어제의 영웅, 오늘의 패잔병

결계의 봉인을 뜯은 것이 자의가 아니라 상황이었다면, 그것은 돌아온 망령의 헛된 변명일까, 아니면 묵언의 침묵을 감당하지 못한 오지랖의 한계일까. 지금 상황에서 물론 궁금한 것은 이것이 아니다. 이것만큼은 반드시, 온라인에 묻어놓은 내 배설물들의 더미 위에 한 덩이 더 올려 놓아야할 일종의 필요성이 발생했다는 것. 어차피 108 마인의 영혼을 양산박으로 불러낸 건 봉인의 미숙함때문이 아니라 권력에 심취한 관료의 망동 덕분이었던 것을. 귀환의 변은 여기까지.

 

침몰한 천안함에서 함께 수장되었던 46명을 "영웅"의 반열에 올려놓았던 수많은 현수막들이 아직도 곳곳에 나부끼고 있다. 현수막은 현수막일 뿐. 그 안에 담긴 진정성이라는 것은 추모의 염도 아니다. 오직 현수막을 건 단위들의 이름을 알리는데 목적이 있었을 뿐.

 

바다 밑바닥에서 쌍끌이 어선의 그물로 건져낸 어뢰의 파편에 선명하게 찍혀 있는 파란색 "1번" 표기는 시기적 상황과 맞물리며 묘한 기시감을 일으킨다. 일단 사진 감상. 출처는 뉴시스.

 

 

파란색 "1번"은 이번 62지방선거에서 한나라당의 번호다. 한나라당 승리를 염원하며 북한이 보낸 선물일까? 쇳조각마저 녹이 슬어 군데 군데 떨어져나간 판에 저 파란색은 어찌 저리 선명한 파란색을 보여줄 수 있다는 걸까? 북한 도료기술의 첨단성을 다시 확인하는 차원? 왼쪽의 글씨체와 오른쪽의 글씨체가 한 사람이 쓴 것일까? 북한인민들은 필체도 통일된 건가?

 

북한의 어뢰기술이 세계 최첨단이라는 사실은 겨우  지난 두 달 사이에 남한에 알려졌다. 가공할 스텔스 버블젯 성능을 갖췄음에도 불구하고 생태환경에 미칠 영향을 고려하여 수역오염이나 수중생물에게는 피해를 입히지 않는 친환경 녹색 마인드까지 실현에 옮긴 안드로메다급 어뢰기술.

 

급기야 초계임무를 담당하는 천안함이 임무완수는 커녕 어뢰 및 어뢰를 싣고 온 북한 잠수함의 동향조차 파악하지 못한 채 일격격침되는 사고를 당한다. 어뢰의 기술 뿐만 아니라 단 한 발로 목표물을 침몰시킬 수 있는 이 정확한 발사기술.

 

현수막에 선명하게 "영웅"으로 호칭되었던 46명은 이명박의 말처럼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증거인 저 파란색 "1번"이라는 숫자로 인해 졸지에 쪽 한 번 써보지 못하고 당한 패잔병으로 전락한다. 더구나 자신의 죽음이 좌초때문인지 어뢰때문인지조차 모른 채, 탈출하는 동료들과 완전 격리된 상황에서 허무하게 죽어간 46명.

 

합조단은 오늘의 발표로 사건의 전모를 낱낱이 밝혔다고 주장하지만, 석화가 달라붙었던 흔적조차 제대로 제거하지 못한 발사체의 몸통 사진은 합조단의 발표 뒤에 뭔가가 더 있을 것이라는 의문을 남기기에 충분하다. 남겨진 의문이 제대로 해소되지 못하는 한, "영웅"이라는 호칭은 개운하지 못한 여운을 주면서 46명의 영혼들을 안식하지 못하게 하리라.

 

진실을 덮은 그늘이 영원하기를 기대하는 자들의 염원은 간절하겠지만, 해는 서쪽을 돌아 다시 동쪽으로 떠오른다. 죽은 자는 말이 없겠지만 산자들의 입은 언제고 열리게 된다. 저들의 간절한 염원과는 달리, 천안함의 앞쪽에서 생존한 수병들은 고막 하나 터진 일 없이 건재하다. 선명하게 찍힌 파란색 "1번"은 그래서 46명의 죽음만을 고하는 증거가 아니라 죽은 자들이 하는 말이다.

 

지금 상황에서 오직 할 수 있는 단 하나의 부탁은, 죽은 자들을 욕되게 하지 말라는 거다. 저 청춘들은 "신의 아들"로 태어나지 못한 죄로 벙커에 들어가 있던 자들처럼 병역을 기피하지 못했을 뿐이다. 그들을 한 순간 "영웅"으로 들어 올렸다가 졸지에 초계임무조차 실패한 패잔병으로 전락시키는 화려한 장성들의 면면이 어찌 저리 뻔뻔스러울 수가 있는가?

 

덧1 : 기록이 필요하다고 하여 말을 늘릴 필요까지는 없으리라.

덧2 : 무덤은 다시 봉인되어야 한다. 유령은 자주 출몰하면 산자들에게 짐이 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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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5/20 12:07 2010/05/20 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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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Tracked from
    • At 2010/05/22 12:08

    행인님의 [어제의 영웅, 오늘의 패잔병] 에 관련된 글. 기왕 영빨 떨어진 부적이니 결계는 얼어죽을... 암튼... 옛날 옛적에...라고 해봐야 호랑이가 궐련빨던 고리짝 시절도 아니고, 기껏 한 세대 좀 전에 있었던 일들인데. 당시 상황은 선그라스 낀 단구의 가카가 '혁명'의 열기를 이어 '유신'으로 조국 근대화에 일로매진하고 있던 시절. 이당시 도처에서 암약하던 무수한 반국가사범들이 검경은 물론 중정과 보안사 등 음지에서 일하며 양지

  1. 파란색 1번이라, 정말 속보이는 1번이네요. ㅋㅋ

  2. MB with 한나라당 (feat. 미쿡)-"1번으로 무찌르자.mp3"

  3. 아 읽으니까 머가먼지...ㅜㅜㅜㅜㅜㅜ
    가끔 돌아오시는 거군요 ㅎㅎ 뉴가 뉴규에게 짐이 되는 거임...

  4. 돌아와 기뻐 ㅠㅠ (1번은 북괴좌빨의 증거니 몰아냅시다.. 캠펜이라도 해야할듯 )

  5. 오셨군요~!!

  6. 관리자만 볼 수 있는 댓글입니다.

  7. 계속 글 쓰실거죠? 반가워요.

  8. ㅋㅋㅋ 터지는 속내를 결국 터뜨리셨군여.. 확실히 누구들처럼 찍어누르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죠.ㅎ

    암튼 공식 발표 소식을 듣자니, 조직(혹은 보직)보위 충동 앞에선 (군경들의 신줏단지라는) 명예니 자부심 따위, 똥꼬에 바지 끼듯 쉽사리 먹히기 일쑤라 해도, 어쩜 저렇게 제 발등을 찍나 그래 싶던데요..; 한국전쟁 때 한강다리 뽀개고 일단 토껴놓고도 가오 유지는 필수였던 기본 코드는 세월이 흘러도 어쩔 수 없는 모양인지 원. 어째 지키려 들면 들수록 참 없어 보이는 자유대한이예요.ㅎ

  9. 어둑한 글 내용과는 별개로, 오랜만에 행인님의 새 글을 읽을 수 있어 매우 기뻤습니다. 이렇게 돌아오시는 거면 좋겠어요(^-^).

  10.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

  11. 이건 결계를 풀고 돌아오실 만한 사건이지요. 그럼요. 그럼요.

  12. 오랜만이십니다.

  13. 윗분들/ 반갑습니다. ㅎㅎㅎ

  14. 관리자만 볼 수 있는 댓글입니다.

    • 반갑습니다. 제 글은 뭐든 가져가셔도 되는데요.

      인용한 글이 분명히 제가 작성한 것이라서 어제 오늘 밤새가며 찾았는데, 글이 없네요... 제가 삭제한 것이 아닌데, 블로그의 글이 없어지는 경우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아무리 찾아도 저 원문이 나오질 않습니다. 제 검색능력이 부족해서인지 모르겠는데, 이건 좀 미스터리하네요.

      제 블로그에 올린 글 중 아직 하나도 삭제한 것이 없는데 이건 뭔가 좀 이상하긴 하네요. 구글신에게 물어봐도 대답이 없고...

      좀 아쉽긴 하지만 제가 쓴 글도 찾지 못해서 밤을 세웠더니만, 정신이 없네요... 미안합니다. 다음에 또 기회를 주시면... ^^;;;

  15. 저도 반가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