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육교사 아동폭행 사건을 보며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로 돌아가보자. 아이가 태어나면, 이때 태어난 아이를 맏이라고 하면, 우선 부모가 아이의 양육을 담당한다. 즉, 한 아이에 보호자 둘이 달라붙는 거다. 3대가 한 집에 사는 게 보통이던 때에는 부모와 조부모까지 네 명이 한 아이를 키우게 된다.

이 아이가 조금 커서 동네 골목길을 돌아다닐 즈음에는 점방 밖 평상에 앉아 막걸리잔 기울이며 수다를 떨던 동네 어르신들이 아이들을 지켜보게 된다. 넘어지면 괜찮냐고 물어봐주고 때 되면 밥먹으러 들어가라고 알려주기도 한다. 못되게 구는 아이들 있으면 꾸지람도 해주고 엄마 찾다가 우는 아이 있으면 집에 데려다주기도 했다. 온 동네 사람이 나서 아이 하나를 봐주었다. 

삶에 필요한 지혜는 격세유전된다는 말이 그럴싸하게 들리는 이유다. 부모가 일 나간 사이, 아이는 노동능력은 상실했지만 삶의 지혜로 가득찬 조부모세대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의 박물관과 같은 사람들이 들려준 이야기들이 아이들에게는 새로운 세계를 알려주었고 더 큰 세계에 대한 꿈으로 나가는 지름길이었다.

물론 못되먹은 부모도 있었겠고, 나쁜짓하는 동네어른도 있었겠다. 그들에게 고통을 받은 아이를 품을 넉넉한 품이 동네에 없을 수도 있었으리라. 장단점을 따지면 한이 없겠지만, 요컨대 중요한 건 아이는 혼자 클 수 없고, 더구나 한 두 사람의 보살핌만으로 충분하게 성장할 수 없다는 거다. 가족이, 동네가, 더 나가 사회가 한 아이를 키우게 된다.

최근 어떤 자리에서 아이들을 돌보는 것이 일인 분과 이야기를 할 기회가 있었다. 초등학교 저학년들을 돌본다고 하는데, 교사 1인이 담당하는 아이들의 수가 25명이란다. 과거에는 최소 2명, 많으면 동네 어른들이 죄다 힘을 합쳐 했던 일을 돌이켜보면, 지금 한 사람이 25명의 아이를 담당한다는 건 도대체 수치상으로만 몇 배의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일까?

초등학교 미만의 아이들을 돌보는 보육교사는 한 사람당 담당하고 있는 아이들의 수가 그보다는 훨씬 적은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어찌되었든, 과거와는 완전히 달라진 상황임은 분명하다. 중요한 것은 아이를 돌보고 자라나게 하는 건 한 개인의 '지식'이 아니라 공통적이거나 다양한 형태로 공동체 안에 존재하는 '지혜'라는 것이다. 과거에는 후자가 주된 양식이었다면 오늘날에는 전자로 모든 걸 해결해야만 하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아이에게 손찌검을 하던 보육교사의 행위를 온전히 '구조'의 탓으로 돌리는 건 적절치 않다. 그렇다면 같은 구조 안에서도 열과 성의를 다하고 있는 수많은 보육교사들의 태도를 설명할 수 없다. 당연히 개인적인 소양이나 자질의 문제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 따라서 폭력을 행사한 보육교사가 져야 할 개인적 책임은 분명히 인정된다.

그러나 어쩌면, 손찌검보다 더 위험한 문제가 도사리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한 사람이 여러 아이를 돌보기 위해 필요한 것은 지혜와 나눔이 아니라 지식과 효율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공동으로 책임졌던 돌봄이 한 사람에게, 그것도 1인당 1명이 아니라 그 1인에게 돌봐야 할 많은 아이들이 배정되면서 아이를 관리하는 스킬과 효과적인 시설운영이 주업이 된다.

돌봄이라기보다는 경영에 가깝다. 아이는 관리해야 할 대상으로 전락하기 일수고 교사는 또 부모들에게 감시당한다. 이렇게 서로가 서로를 5호담당제 돌리듯 관리 감시하는 사회에서 아이들은 손찌검을 당하게 되고,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과 공유해야 할 지혜를 잃게 되는 것은 아닐까?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15/01/28 15:04 2015/01/28 15:04
Trackback Address :: http://blog.jinbo.net/hi/trackback/14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