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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20/04/30
    도시농부일기_20200429
    hongsili
  2. 2020/04/19
    민주주의 이후의 민주주의
    hongsili
  3. 2020/04/11
    혐오와 수치심
    hongsili
  4. 2020/04/01
    자신을 믿는다는 것
    hongsili

도시농부일기_20200429

hongsili님의 [도시농부일기_20200322] 에 관련된 글.

 

새벽같이 용산역 앞에서 K 선생님의 차를 얻어타고 임실고고...  오늘의 일꾼 날총님도 함께...

중간에 안성 휴게소 들러 김밥, 라면, 소떡소떡과 커피로 서둘러 (하지만 배터지게) 아침을 떼우고, 임실 들어가 읍내 장에 가서 모종 무려 4만 5천원어치 구입!!!

모종으로 나와 있는 식물들의 종류에 깜놀.... 세상에 정말 많은 종류의 채소들이 있구나.

텃밭하시는 분들이 상추나 치커리, 겨자채 같은 잎채소들을 많이 키우지만 경험에 의하면 저거 부지런히 따먹는 것도 일 ㅋㅋㅋㅋ 이미 나는 김체리님 텃밭에 방치된 상추가 서서히 나무로 변태하는 모습을 목격한 일도 있다 ㅋㅋㅋㅋ 별하고 방울 몇 개만 걸면 크리스마스 트리로 써도 되겠더라구 ㅋㅋ

그래서 우리는 좀 시간이 걸리고, 비교적 보관이 용이한 작물에 초점...

 

하지만..  맘대로 골라보라는 K 선생님의 제안과 달리 아는 작물이 많지가 않아서..   나의 야심작물 수세미를 일단 픽하고, 역시 애정하는 야채들인 브로콜리, 아스파라거스, 노란색 파프리카를 고름.  샘이 여기에 아삭이고추, 가지, 피망, 흑토마토, 대추토마토, 완숙토마토를 보태주심. 얼룩강낭콩, 일명 호랑이콩도 사고 싶었으나 다행히 집에 종자가 있다고 하셔서, 푸짐한 꾸러미 들고 귀환. 심바와 코랭이가 오랫만에 봤는데도 반겨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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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아뿔싸!!!!!! 돌아와서 모종 분류하려고 보니 뭐가 뭔지 모르겠어 ㅋㅋㅋ 오로지 구분 가는 것은 잎이 익숙한 수세미, 단가가 비싸서  한 주씩 담아준 흑토마토, 코스모스처럼 생겨 기억에 남았던 아스파라거스 뿐!!!   각종 추론과 토론을 거듭하여  가장 가능성이 높은 이름표를 붙여놓았다가 나중에 열매 열리면 그 때 정정하자고 결정했는데, 아니 열매가 열리면 이름표가 굳이 필요없잖아.. 이게 무슨 짓이야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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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에 잠깐 꽃샘추위가 심하게 왔었는데, 밭에 나가보니 그것 때문에 얼어 죽은 작물이 상당히 많았음. 각종 강낭콩과 완두콩들이 너무 시들시들하던데 과연 살아날지 모르겠음 ㅜ.ㅜ  본격 농사꾼인 이웃께서 잠깐 우리밭에 구경오셨는데, 거기는 냉해 때문에 아예 파종을 새로 하셨다고 함... 상업작물 하시는 분들은 그럴 수밖에 없었겠더라구... 

 

일단 멀칭 용으로 심어둔 호밀이 이제는 정말 많이 자라서 그걸 베어 재료 준비. 이미 이삭이 패인 것도 있어서 이걸 그냥 멀칭용으로 쓴다는 게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호밀 정미소가 국내에 밀양 한군데 밖에 없어서 어차피 얼마 되지도 않는 양을 거기까지 가져갈 수도 없다고... ㅜ.ㅜ 원래 멀칭 용도로 심은 것이니 일단 베기는 베는데.. 아우 아까워...  나랑 날총이랑은 바닥에 떨어진 호밀대 하나도 다 주워서  두둑에 올림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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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서 감자 김매기 작업...  다행히 중간에 샘이 감자 이랑을 다 덮어두셨던 덕에... 멀칭을 치우고 보니 새싹들이 거의 대부분 살아있었음... 어찌나 반갑던지... 여섯 이랑이나 되는 감자밭에서 꼼꼼하게 김매기하고 싹 올라온 이외 부분 덮어주는 작업 수행....  은근히 잡초들도 뿌리 힘이 세고, 흙도 단단하게 뭉쳐 있는 부분이 많아 모종삽과 호미로 작업하는데 손목과 팔꿈치 무리데쓰... ㅡ.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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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나서 정말 대화 한마디 없이 계속 비어 있는 두둑에 퇴비주고 다듬어서 모종 심고, 멀칭하고....

중간중간 두더지굴, 지렁이, 벌레 만나서 단말마의 비명 지르고...

동네 닭은 왜 그리 수시로 우는지 깜딱깜딱 놀램...  닭은 아침에만 우는게 아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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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종 다 하고 점심 먹으려 했는데, 워낙 오전에 늦게 일을 시작하다보니 두 시가 넘어도 작업도 많이 남은데다 배가 너무 고파 일을 할 수가 없음...   이번에도 산들미향에 가서 제육볶음이랑 된장찌개...  천하일미....

 

밥먹고 돌아와 정말 1분도 쉬지 않고 다시 작업.. 서울 가는 기차 시간이 정해져 있으니 그 전에 오늘의 작업을 마쳐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지!!

근데 가만히 보니까 날총 너무 일못함 ㅋㅋㅋㅋ 못한다기보다, 너무 꼼꼼하게 작업을 해서 내가 세 이랑을 할 동안 하나도 제대로 못함. 아니 무슨 상감청자 만드냐고.. 왜 그렇게 조심조심 꼼꼼하게 하는 것이여..... 이것은 마치 시험 전날 교과서 구석구석까지 꼼꼼하게 읽으며 공부하다 결국 시험진도의 반도 다 보지 못하고 시험장에 들어오는 인간의 전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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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간 다섯시 무렵까지 모든 작업을 마치고 시원하게 밭에 물을 다 뿌리고 걸어서 다시 기차역으로...

돌아보니 정말 일당 알바처럼 일하고 왔음. 새벽차 타고 도착해서 한 시도 쉬지 않고 일하고 밥먹고 다시 일하고, 바로 귀환 코스 ㅋㅋㅋ 원래 생각한 안빈낙도의 삶이란 이런게 아니었는데 ㅋㅋ 나중에는 손에 힘이 빠져서 김매다 모종삽을 놓치기까지 했다니까 ㅋㅋ 다리도 후들후들...

돌아오는 기차에서도 미친 듯이 잘  것 같았지만 팔이 계속 욱신거려 한 숨도 못잤음...

다음에는 꼭 저녁 때 미리 내려가서 한숨 돌린 다음 아침 일찍 농작업 하고 쉬엄쉬엄 하며 돌아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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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우리 밭 옆에 돼지 키우는 농가가 있는데, 오가는 길에 돼지들과 자꾸 눈이 마주침.

애들이 정말 깨끗하고 볼때마다 톱밥도 청결해보이는 걸 보니 정성들여 키우시는 건 알겠는데, 돼지들이 너무 똘똘하고 사람 지나가면 이쪽으로 다가와 친근함을 내보여서 마음이 ㅜ.ㅜ 

얼마전에 이주노동자 지원단체 활동가 분 이야기 들어보니 돼지가 정말 영리하고 사람을 잘 따라서, 돼지 축사 이주노동자들한테는 고용주들도 비교적 대우를 잘 해준다고 함..   손이 바뀌면 돼지들이 스트레스 받기 때문에.... ㅜ.ㅜ

그렇게 영리하고 사회성 좋은 아이들인데... 좁은 공간에서 하루 종일 사육당하는게... 막상 눈으로 보면 많이 괴로움. 심지어 밥 때가 되면 엄청난 울음소리들이 울려퍼짐. 좁은 공간에서 서로 밀치며 순서를 다투느라 벌어지는 일.... 저런 대접을 받을 존재들이 아니잖아... ㅜ.ㅜ 

하지만 점심 제육볶음은 너무 맛있었고, 정말 뭐랄까.... 인간은 존재 자체로 다른 생명체들에게 민폐... ㅡ.ㅡ

 

사실 율도국에서 소돼지는 키우지 말자고 내가 제안한 적 있음. 그걸 누가 잡냐고.... ㅜ.ㅜ

근데  날총이 굳이 자기가 할 수 있다고, 고기 먹고 싶다고 했었는데 오늘 좀 수그러진 것 같음... 직접 마주해보니, 안 되겠다고 ㅡ.ㅡ

밸로시랩터의 후손이자 눈이 마주쳐도 우리 마음이 덜 괴로운 닭까지는 수용가능한 것으로 합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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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 이후의 민주주의

실컷 다 써놓고 글을 날려버린다는 게 이런 거구나.. ㅡ.ㅡ

뭘 잘못 눌렀길래... 하여간 다시...

 

#1. 투표율

 

코로나유행 때문에 선거가 제대로 될 수는 있을까, 투표율이 바닥이면 어쩌나 은근 걱정했는데 다들 그런 걱정을 한 것인지 오히려 예년보다 투표율이 더 높았다.  도통 바깥 나들이를 하기 어렵다보니, 나라가 허용해준 기회에 모처럼 나들이해보자는 심사였는지도 모르겠으나, 나도 사전투표하러 갔다가 사람 너무 많아서 깜놀 ㅡ.ㅡ  마감 시간 다가와서 투표 못할까봐 전전긍긍하기까지...

'적당히'를 모르는 민족의 근성이 여기서도 발휘된 것인가...

어떤 정당을 지지하든간에, 도저히 저꼴은 못봐주겠다, 이건 막아야한다는 절박함을 각자 품었던 게 주요 이유가 아니었을까.  내가 투표 안하면 저놈들이 이긴다, 그건 눈뜨고 볼 수 없다... 이런 마음?

이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민주당이나 민주당후보에 대한 호불호를 떠나, 되도 않는 궤변을 늘어놓으며 파렴치한 행동을 정당화하고, 쇠파이프 움켜쥐고 민주주의 투사인양 목에 핏대를 세우는 나경원의 모습을 더이상, 네버 앤 에버, 보고 싶지 않았다. 이건 뭐 이념이나 개별 정책에 대한 동의/부동의 같은 품격 있는 결정이 아니었다.

 

#2. 위성정당과 민주당, 진보정당

 

내 블로그는 소중하니까, 여기에 쌍욕을 쓰지는 않겠다.

승리를 위해서라면 아무짓이나 해도 되고, 그래서 했고,  심지어 그랬더니 실제 원하는 결과를 달성하기까지 했다. 민주주의 역사에 참으로 아름다운 교훈을 남겨주셨다. 쟤네들이 하는데 우리는 그럼 당하고만 있어야 한다는 거냐고 항변하는데,  이거야말로 정의당을 비롯한 소위 '우군' 시민사회를 발톱의 때만큼도 여기지 않는다는 이야기 아니고 뭐겠나. 너네한테 사정하고 달래가면서, 듣기싫은 욕먹어가면서 같이 가고 싶지는 않아, 그런 노력 따위 하고 싶지 않다구. 따라올테면 따라와... 요런 마음?

그런데 이게 어떤 개인의 '마음'이라면야 뭐 어쩔 도리가 있겠나, 양심과 사상의 자유는 보호받아야지. 그런데 집권여당이 이런 정치적 스탠스를 보인다면, 이게 도대체 의회 민주주의인가??? 또라이에는 또라이로 맞서는 바닥으로의 경쟁이라니. 이를 적극적으로 지지했던 코어팬덤 전사들의 결기야 내가 공감해줄 마음의 여유가 없으나, 이런 방식을 지지하지는 않았지만 결과적으로 사후 승인하는데 가담할 수밖에 없었던 많은 이들의 불편한 마음에는 심심한 위로를 전하고 싶다.    

87년 이후 유구한 '비판적 지지론'에서 이제는 '비판적' 마저 떼어버리고, 심지어 심상정, 이정미 의원 지역구에마저 떡하니 공천을 해대는 패권주의에 이제 넌더리가 난다. 수구보수 일파보다 우리 민주당 앞길에서 딴지 걸었던 정의당이 더 밉다고 온라인에서 떠드는 이들을 보면, 과연 어떤 대목에서 딴지를, 그리고 왜 걸었는지 확인 좀 해보라고 이야기하고 싶지만, 합리적 대화는 어차피 불가능.

 

물론 정의당에 대한 심경도 복잡하다. NL 그룹이 대중적 진보정당을 '본사'의 지령을 받는 허수아비로 만들어가는 꼴 보기 싥어 탈당하고, 진보신당을 거쳐 가만히 있다보니 노동당원 되었다가, 여기도 또다른 본사에 의해 좌지우지된다는 기도 안 찬 사실에 탄복하여 탈당한 이래 아직까지 당적이 없다. 정의당으로 표상되는 진보정당 존재의 정당성을 강력히 지지하면서도, 여전히 당원으로 발을 들여놓을 수가 없다. 해결되지 않은 그 무엇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사실 정의당보다 더 처참한 것은 녹색당이다. 그나마 정의당은 원칙을 지킨다는 명분이라도 남았지만, 대체 녹색당은 왜 그런 악수를.. ㅜ.ㅜ  쉽지는 않지만, 혼란스러운 상황일수록 원칙을 지켜야, 후일이라도 도모할 수 있는 것 같다.

 

#3. 자기효능감 대잔치

 

선거 다음날 양정철 민주연구원장의 '야인'으로 돌아가겠다는 인터뷰를 보고 나도 모르게 방언이 터졌다. 왜, 기왕이면 트렌치코트 입고 성냥개비라도 물고 인터뷰하지... 자기효능감이 아주 만랩이로구나.

다들 킹 메이커 놀이. 정치 막후/배후 조정 놀이에 너무 몰두한 나머지 조심성이라고는 개나 줘버린 것 같다. 칩거하던 모사가 선거 국면에 홀연히 중원무림에 나타나 기가 막힌 용병술을 발휘하여 선거를 승리로 이끌고, 이제 혈겁을 뒤로 하고 내 역할은 여기까지오. 윙크 한 번 하고 쿨 하게 돌아서서 다시 자연인으로 돌아간다는 서사를 내가 왜 "무려 21세기" 선거에서 봐야하는지 모르겠다고!!!

석양으로 붉게 물든 저녁 하늘을 배경으로 소오강호 가락이 어울릴까나, 아니면 영웅본색의 테마OST가 흐르는게 더어울릴까나 그런게 궁금해졌지. 

민주연구원은 원래도 당의 정책 씽크탱크 역할을 전혀 못해왔지만, 이제 공식적으로도 그냥 선거공학 일삼는 아재들의 살롱으로 확정. 비례후보들도 누구를 대표하고 어떤 배태성을 갖는지 도무지 설명할 길이 없으니, 그저 신출귀몰한 플레이어들의 용병술을 믿어볼 밖에. 다음 선거 때도 다시금 홀연히 등장하여 작전을 지휘해주실테니, 그동안 비전이고 정책이고, 시민사회연대나 지역운동 모두 쓸데 없는 낭비적 투자 되시겠다.

 

미래당은 선거 전날까지 본인이 맡은 당 이름도 모르는 분한테 선거캠프를 이끌도록 했으니 더 할 말도 없다만, 위기에 짠 하고 등장하여 뭔가 중요한 역할을 해낼 것이라는 그런 근자감 나도 진정 배우고 싶었다. 한국 남자들에게 삼국지 금지시켜야 하는 것 아닌가 생각도 잠깐 들었던 것이, 다들 유비의 삼고초려를 받는 와룡에게 자기동일시를 하고 있는 건 아닌가 의심이 든단 말이지. 

그런가하면 아무런 정책도, 작전도 없이 그저 달리기만 하고 세 석을 가져온 안철수의 성취감과 자기효능감은 앞으로 또 어쩔 것인가?

 

#4. 코호트효과

 

당분간 선거 결과에 대한 이런저런 심층분석이 나오겠지만,

장기적 추세에서는 상당 기간 미래통합당(aka. 자유당, 민정당, 민자당, 한나라당, 신한국당, 새누리당, 자유한국당 등등)이 우세를 점하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것이 나의 짐작. 물론 대선에서 어떤 카리스마적 인물이 출현하거나 선거 국면에서 이변이 속출할 가능성이야 상존하기에 장담이야 할 수 없겠지만 말이다. 

흔히 나이가 들면 보수화된다고 이야기하지만,

예전에 호프스테드 책에서 언급한 것처럼, 이러한 연령 효과는 대개  Power Distance 가 높은 국가들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특징. 미국과 유럽에서의 68세대, 일본의 전공투 세대들을 보면 이후 나이가 들어서도 후속 세대보다 계속 일관되게 리버럴한 것이 특징인데, 이를 power distance 로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최소한 코호트 효과가 상당한 힘을 발휘한다는 것은 분명해보인다.

물론 "권력 질서를 비판하면서도 자신은 그 권력에 닿기를 애타게 소망하는 사회에서 사람들이 보이는 특징"이라는 점에서, 한국의 잠재력이 상당한 것은 사실이지만 ㅋㅋ

현재 50대는 20년 전의 50대와 역사적 경험이 전혀 다르고,

이제 50대에 접어들게 되는 70년대 출생인간들은 그 이전과도 또 다른 망나니세대 ㅋㅋ 그 유명한 엑스세대, 신세대인데다 교복과 두발 자유화, 과외도 없이 중고등학교 학창 시절을 보내고 90년대 대중문화의 전성기를 향유하며 온갖 리버럴 짓은 다 해본 이들 아닌가. 이들은 사회조사에서 나이가 들어도 진보적인 견해에 동의하는 비율이 상대적으로 계속 높게 유지되고 있다는 것이 특징이기도 하다.

물론 이후 금융위기를 비롯하여 사회경제적 굴곡이 없었던 것은 아니고, 그래서 사회경제적/계급적 이슈에 대해서는 본인의 계급 위치에 따라 다른 견해를 보일 가능성이 매우 크지만, 최소한 이념적이거나 사회적/정치적 이슈에 대해서는 보수꼴통을 지지할 가능성이 낮을 것으로 짐작한다. 너무 낙후하고 너무 후지기 때문.

예컨대 유승민이나 이혜훈처럼 그래도 좀 제정신으로 말하는 것같은 보수주의자들이 등장한다면 모르겠지만, 지금과 같은 수준으로는 글쎄올시다. 게다가 이 두사람조차, 처음에는 좀 멀쩡한가 했으나 들여다보니 그것도 아니어서 ㅋㅋㅋ 그 똑똑하다는 KDI 경제학 박사도 동성애자 이슈 앞에서는 하느님의 순한 양이더라구 ㅋㅋㅋ

 

장기적 전망이 그렇다는 거지, 격변이 잦은 한국사회에서 또 무슨 일이 일어나서 사람들의 마음이 획 돌아살지 모르는 일이다. 게다가 최소한 정치적 민주주의가 제도적으로 성숙한 상황에서 사회경제적, 계급적 이슈들이 전면에 부각되었을 때는 코호트 효과고 뭐고 사라지는 거지 뭐. 뿐만 아니라 다크호스로 부상하고 있는 우리 20대 XY 인구집단......  아...... 할많하않...

 

그나저나 21대 국회에서, 압도적 다수를 마침내 달성했으니 그동안 힘없어서 못한다고 엄살피우던 여러 가지 개혁조치들, 차별금지법 입법, 52시간제 유예와 탄력근로제 확대 중단, 부양의무제 철폐, 공공병원 확대, 젠더폭력 처벌강화 등등의 의제들을 어떻게 처리하나 두고 볼 일이다. 공수처나 검찰개혁, 사법농단 재발방지 같은 이슈도 당연히 중요하지만, 엘리트그룹 분파 내에서 알아서 필사적으로 싸울테니 굳이 나까지 걱정해주지 않아도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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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와 수치심

밀린 독서일기가 에버노트에 한 가득 있지만 차곡차곡 정리하려다 패가망신할 것 같아서 ㅋㅋ 일단 최근에 읽은 책부터 정리하자로 전술 전환...

 

# 마샤 너스바움. 혐오와 수치심 (2015)

혐오와 수치심 - 인간다움을 파괴하는 감정들
혐오와 수치심 - 인간다움을 파괴하는 감정들
마사 너스바움
민음사, 2015

 

일찍이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가르침이 있었으나, 죄가 무슨 죄나 사람이 죄지.. ㅡ.ㅡ

이런 인간환멸이 한 가득인 상황에서 정신 좀 다독여보려고 책을 읽음.

사실은 코로나 유행에서 드러난 혐오 문제를 좀더 차분하게 이해해보려는 마음으로 책을 폈는데, 중간에 텔레그램 성착취 사건이 점화되면서 가해자 신상공개 논란이 벌어짐. 한층 혼란 ㅜ.ㅜ

 

법은 감정적이 아니라고 노력한다지만 분명히 감정을 반영하고 (사실 분노와 탄식 없이 어떻게 인류사회에 법이 만들어지고 집행되었겠나! 또한 자유주의자들은 법에서 감정의 역할을 흔히 부정하고는 하지만 이미 영미 현행법에서도 '타당한 동정심'은 이미 양형 선고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음), 또 이론과 실천 사이에 상당한 괴리가 존재한다는 지적으로부터 책은 시작. 이를테면 법이 범인에게 수치심을 주어야 한다는 시각과 법은 시민들이 존엄성을 훼손당하지 않도록 보호해야 한다는 시각이 공존하는 상황. 특히 수치심을 주는 처벌은 공동체주의자들에게 사회규범의 표현으로 옹호되는 경향.  


감정은 자연발생적으로 분출하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사고를 담고 있음. 대개 자신의 목표와 목적의 도식 안에서 일정한 중요성을 부여해왔던 것에 대해서만 감정을 가지며, 목마름이나 배고픔의 욕구와는 다른 것이, 감정에는 믿음이 훨씬 더 중요한 역할을 하고, 훨씬 더 많은 사고를 수반. 즉 감정은 '지향적 대상'에 초점을 두며 그러한 대상에 대한 평가적 믿을음 수반. 이를테면 인종주의는 감정 속에서 나름의 근거가 있기에, 증오의 기반이 되는 사실이나 가치와 관련된 잘못된 밁음을 없앤다면 (쉽지는 않겠지만 ㅜ.ㅜ) 감정도 바뀔 수 있는 것임. 감정은 분별없는 정서적 격앙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 일어나는 사건과 개인이 지닌 중요한 가치와 목적에 맞게 조율된 지적 반응...   옳소옳소....

 

법은 잘못된 '행위'를 처벌하고 그 행위에서 비롯된 '죄책감(guilty)'을 일깨우는 방식으로 작동해야지, 행위가 아닌 인간 정체성에 근간을 둔 혐오에서 비롯된 법적 판단, 혹은 수치심을 일깨우는 방식으로 작동해서는 안 됨. 수치심과 혐오는 분노나 두려움과는 분명히 다른 감정이기에, 너스바움은 혐오에 강하게 반대하면서, 혐오가 어떠한 행위를 범죄행위로 규정하는 일차적 기반이 되어서는 안 되며, 현재처럼 형법에서 죄를 무겁게 하거나 경감시키는 역할을 해서도 안 된다고 주장함  

 

혐오에 대해서 조금 더 설명하자면...
혐오가 법에서 유용한 역할을 할 수 있는 부분은 위해로 여겨질 수 있는 불쾌감이 정당한 지침 역할을 할 수 있는 생활방해법이나 토지용도 지정 정도. 흔히 '혐오가 담고 있는 지혜'를 운운하며 혐오를 정당화하고 그에 기반한 차별이나 법제도를 옹호하지만 (동성애가 대표적 타겟), 사실 혐오라는 감정은 인간이 동물적 육체를 갖고 있다는 불쾌감으로부터 촉발되며, 사회적 실천은 취약한 사람들과 집단을 대상으로 투영됨. 이러한 반응이 규범적 의미에서도 비합리적인 것은, 이러한 반응은 될 수 없는 존재가 되려는 열망을 담고 있을 뿐 아니라 그러한 열망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다른 사람을 표적으로 해서 심각한 위해를 가하기 때문.

혐오는 감각 요소에 의해 유발되는 부정적 반응인 '기피'나 해로운 결과가 예상되어 거부하는 '위험'과도 구분됨. 혐오는 대상이 지닌 감각적 요소라기보다 대상에 대한 주체의 인식, 관념적 요소에 의해 유발. 혐오는 기본적으로 우리가 지닌 동물성을 숨기고 ('오염'), 우리 자신의 동물성을 꺼려할 때 현저히 드러나는 유한성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감정임.   
혐오는 분개와도 다른데, 분개는 모든 사람에게 법률적 규제의 기초로 일반적으로 수용되는 위해 또는 손상과 관련된 반면, 혐오는 법의 원천이 될 수 있는지 논쟁을 일으키고 있는 '오염'에 대한 사고와 연관. 분개는 일반적으로 발생한 위해를 야기한 사람에 대한 평범한 인과적 사고와 위해의 심각성에 대한 일상적 평가에 기초하는 반면, 혐오는 실제적 위험보다는 자신이 오염될 수 있다는 신비적 사고에 바탕. 또한 분개는 일반적 속성 상 우리가 쉽게 상처입을 수 있는 취약한 존재이며 우리가 가장 마음쓰는 대상이 다른사람의 부당한 행위로 해를 입을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한 반응이지만, 혐오는 우리가 될 수 없는 어떤 존재, 즉 동물성을 갖지 않는 불멸의 존재가 되려는 소망을 중심으로 움직임.  혐오의 절규에는 '나는 이 추악한 세상을 나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이길 거부한다. 그러한 바보같은 제도에 나는 토할 것 같고 그것들이 나의 (순수한) 존재의 일부가 되도록 놔두고 싶지 않다'가 담겨있는 반면, 분개는 '이 사람들이 부당한 대우를 방아왔다면 더 이상 그러한 취급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담겨 있음. 혐오는 오염에 대한 사고가 중심이기 때문에, (행위를 개선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사라져버리길 원함. 역사적으로 혐오는 특정집단을 배척하기 위한 사회적 무기로 작동해왔음. 특권을 가진 집단은 자신과 구별하는 집단을 통해서 우월한 인간적 지위를 명백히 하려 했으며, 유대인, 여성, 동성애자, 불가촉천민, 하층계급 사람들 모두 육신의 오물로 더럽혀진 존재로 그려짐. 이런 면에서 사회의 도덕적 진보는 위험과 분개로부터 혐오를 '분리시키는' 정도에 따라 측정할 수 있을 것임.

혐오는 인간 내면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는 반응으로, 너무 어리거나 부주의해서 혹은 잘 몰라서 해당 품목의 이점을 숙고할 수 없을 때 위험을 피할 수 있게 해주는 유용한 장치이기는 하지만, 이로부터 혐오가 법적, 정치적 목적에 적합한 귀중한 반응이라는 결론을 도출해서는 안 됨. 인간의 삶 속에 깊이 뿌리내린 많은 반응은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으며(!) 공적 행위의 지침이 될 수 없음. 혐오가 법적으로 규제할 수 있는 행위에 대한 추정상의 기준이 될 때, 그리고 특히 취약한 집단과 사람들을 정치적으로 예속하고 주변화시키는 역할을 할 때 이는 위험한 사회적 감정이 됨. 우리는 혐오를 이용해야 하지만 혐오가 담고 있는 인간사회의 비전에 기초해서 우리의 법률 세계를 건설해 나가서는 안 됨 === 한문장 한문장 모두 지극히 동의

 

다음 타자 수치심!
인간에게는 원초적 수치심이 존재하고 선을 가져올 수 있는 잠재력이 있지만 공적 삶에서 규범적으로 신뢰하기는 어려움. 그래서 자유주의적 사회에서는 수치심을 억제하고 시민이 수치심을 겪지 않도록 보호해야 할 특별한 이유가 있음. 왜 그런고 하니, 수치심은 자신의 약점이 노출되었을 때 생기는 고통스러운 감정으로, 특정 사회가 지닌 규범적 정향에 상관없이 밑바탕에 존재. 수치심은 인간이 지닌 인간성, 즉 자신이 유한한 존재임과 동시에 과도한 욕심과 기대가 두드러지는 존재라는 인식 안에 존재하는 일정한 긴장을 해소하는 매우 일시적인 방법이기도 함. 모든 사회는 혐오와 마찬가지로 수치심을 통해 특정 집단과 개인을 선택하고 그들을 '비정상'으로 구별하며 자신이 무엇인지 누구인지에 대해 부끄러워하게 만들어 왔음.

수치심은 역사상 가장 널리 퍼져 있는 처벌 방식의 일부이지만, 규범적 상황은 혐오보다 훨씬 복잡함. 일정한 형태의 수치심은 긍정적 윤리적 가치를 지니지만, 그러한 역할들이 원초적 또는 나쁜 형태의 수치심에 호소하고 있기 때문에 위험함. 현대 자유주의 사회가 '정상적인 시민'이라는 매우 일반화된 직관적 사고에서 벗어나야만 수치심을 둘러싼 현상에 적절하게 대응할 수 있음.

수치심은 어떤 이상적 상태에 도달하지 못한다는 생각에 반응하는 고통스러운 감정으로, 자아의 '특정한 행위'보다는 '전체 자아'와 관련. 수치심과 모욕의 구분이 필요한데, 수치심을 주는 것은 도덕적 비판이 정당한 경우들과 당사자의 인간성 자체를 욕보이지 않는 가벼운 경우도 포함하는 보다 넓은 개념인 반면, 모욕은 일반적으로 이를 당하는 당사자가 인간 존엄의 측면에서 다른 사람과 동등하지 않은 열등한 사람이라는 진술을 표현함. 당혹감은 일반적으로 수치심보다 가벼운 상황이며, 항상 사회적이고 맥락적이지만 수치심은 반드시 그럴 필요는 없음. 수치심은 깊게 자리잡고 있는 문제와 관련되며 세상이 자신을 바라보는 것과 무관하게 '자기 스스로의 평가'를 담고 있는 감정이라는 점이 중요. 당혹감은 청중이 없으면 생기지 않고, 청중의 속성에 대한 자신의 인식에 반응하는 것.

수치심은 완전해지고 완전한 통제력을 지니려는 원초적 욕구로부터 기원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 대한 폄하와 어떤 형태의 공격 (자아의 나르시즘적 계획을 가로막는 장애물을 격렬하게 비난하는)과 연결될 가능성이 존재함. 분노와도 구분이 필요한데, 분노는 위해 또는 손상에 대한 반응이며 부담함을 바로잡으려는 목적을 지니고 있으며, 죄책감은 말하자면 자기 처벌적 분노로, 자신이 잘못이나 위해를 저질렀다는 인식에서 생겨남. 수치심은 결점이나 불완전성에 주목하고 감정을 느끼는 그 사람 자체가 지니는 일정한 측면에 관심을 두지만 죄책감은 어떠한 행위에 초점을 맞춤. 죄책감에 내재된 공격성은 수치심 주기에 담긴 공격성보다 더 성숙된 것이고 창조적일 수 있는 가능성을 더 많이 가지고 있음. 죄책감은 도덕적 요구를 수용하고 다른 사람의 권리를 인정하면서 자신의 요구를 제한하는 것과 연관되었기에 자신의 잘못을 바로잡으려는 생각과 관련됨. 법은 사회가 범죄에 대해 죄책감을 표현하고 죄책감을 사회적 동기로 활용하도록 해야 함. 성숙한 인간이 된다는 것은 자신이 '도덕적으로' 불완전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다른 사람의 통찰력 있는 말을 귀담아 들어서 귀중한 개인적 이상을 향한 자신의 노력을 계속해서  개선해나갈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하는 것!

정상적인 것을 벗어난 모든 것은 수치심을 일으킬 수 있는 이유가 되며, 많은 경우 신체적인 것과 직접적으로 연관됨. 수치심을 외부 대상에 투영하고 다른 사람의 몸이나 얼굴에 소인을 찍임으로써 정상인들은 일종의 대리 행복을 얻고, 외부를 통제하고 완전무결해지려는 유아기적  소망을 만족시킬 수 있음. 모든 사회가 관여하고 있는 낙인찍는 행동은 일반적으로 유아기적 나르시즘과 자신의 불완전성에서 생겨난 수치심에 대한 공격적 반응이라 할 수 있음. 낙인찍는 행위의 핵심은 피해자를 비인간화하는 것.

 

수치심을 주는 처벌에 반대하며 다음과 같은 논거를 제시할 수 있음 

  1. 수치심을 주는 처벌은 모욕을 주기 때문에 인간의 존엄성을 해치게 됨 (죄책감은 행위에 초점을 맞추는 반면 수치심은 인격에 주목)
  2. 수치심을 주는 처벌은 일반적으로 인민재판 같은 모습을 갖는데, 인민재판은 자유민주주의 사회가 일반적으로 소중하게 여기는 공평하고 심의적이며 중립적 재판이 아님
  3. 역사적으로 수치심 처벌은 사람을 잘못 대상화하거나 처벌의 정도를 정확하게 정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서, 처벌이 지닌 억제 기능을 제대로 실행하지 못함.  수치심의 대상이 실제 범죄자에서 단순히 다른 정체성을 지닌 사람으로 비교적 빠르게 이동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님. 왜냐하면, 수치심은 애당초 잘못된 행위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정상에서 벗어난 정체성을 지니고 있다고 여겨지는 사람이나 이런 사람들로 이루어진 집단에 초점을 맞추기 때문. 이들을 대상화함으로써 지배적 집단은 자신들을 정의하고 보호할 수 있음. 이러한 자기보호 뒤에 완전무결성과 나르시즘적 승리를 추구하는 심리적 기제가 작동하고 있기에, 수치심을 주는 사람이 지니는 분노의 대상이 실제 범죄자에 국한되지 않으며, '정상인'들에게 자신의 나약함을 떠올리게 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나 희생양이 될 수 있고 공동체에서 배척당할 수 있음
  4. 수치심에 기초한 처벌은 경험적으로 강력한 억제 효과를 지닌다기보다 정반대의 결과 초래. 모욕을 당한 사람은 전보다 소외되고 불안해지며, 이미 연약한 자아를 지닌 사람이 수치심을 경험하게 되면 우울증과 공격성으로 이어지기 쉽고, 그래서 수치심을 강화하는 것은 폭력을 줄이기보다 오히려 키우기 십상
  5. 수치심을 주는 처벌은 보다 많은 사람을 사회적 통제 아래 두려는 시도로 이어질 가능성이 큼.

이러한 논거에 반대하는 이들은 수치심 처벌이 형벌의 네가지 목적 (응보, 억제, 표출, 개심 또는 재통합)을 잘 수행한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못함. 처벌이론에서 응보주의는 무임승차와 평등한 자유에 관한 관점에서 생각하는 것인데, 모든 시민이 동등하며 행위에 대한 동등한 자유를 향유해야 할 때, 범죄자는 자신에게 평등하지 않은 자유의 영역을 요구하는 것이나 다름 없고, 응보적 처벌은 범죄자의 불평등한 자유요구를 기록에 올리는 것과 마찬가지. 응보적 처벌은 복수와 다르고 이런 면에서 수치심 처벌은 전혀 응보적이지 않음. 수치심 처벌은 일탈 집단과 대비되는 상위집단을 정의하는 것이 사실상 전부라 할 수 있음.  


물론 비판적 자기성찰의 결과로 야기되는 수치심 (에렌라이크의 미국 근로빈곤층에 대한 르포가 미국 대중들에게 수치심을 갖게 만드는 방식)은 개혁을 추진하는 역할을 할 수 있음. 일종의 건설적 수치심이라 명명할 수 있는데, 이는 완전히 일반적 성격을 가지고 있으며 자신을 포함하기 때문에 법적인 측면에서의 수치심 처벌과는 다름.

 

대개 혐오와 수치심을 기초로 작동하는 법적 처벌은 시작은 도덕적 공분에서 비롯되었을지 모르지만, 결국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에게로 향한다는 것이 역사적 경험..
동성결혼,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금지법에 반대하는 공격적 대중운동의 많은 부분은 전혀 종교에 관한 것이 아니며 원초적 나르시즘의 공격적 형태의 요소를 수반. 성소수자에게 낙인을 안겨줌으로써  가족과 성에 대한 통제력을 다시 발휘하길 바라는 것임. 이는 인종 간 결혼 합법화에서 '정상적' 가족 구조를 송두리째 뒤집는다는 인식과 마찬가지. 당시 백인 남성들은 자신의 남성성에 대해 수치심을 느낄 수 있었기에 이러한 수치심의 위협을 피하려는 욕구에서 인종간 구분선을 엄격하게 나누고자 했음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 동성 결혼의 권리에만 초점을 두다보니, 결혼의 지위에 대한 건설적 논쟁이 어려워짐. 제도로서의 결혼은 사랑과 함께 폭력을, 아이 양육과 함께 아이에 대한 학대와 멸시를 키워왔고 특히 일반적으로 여성과 아이들에게 불리하게 작용해왔음. 동성결혼에 대한 공포와 이에 대한 반작용 때문에 평등한 결혼 권리에 초점을 맞추다보니 공적으로 토론되어야 할 긴급한 문제들이 지연됨 ㅡ.ㅡ)

 

혐오와 수치심을 규범으로 활용하고자 하는 공동체주의자들의 주장에 담긴 아킬레스 건은 '공동체'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 모든 공동체는 규범과 가치에 대한 차이를 지니고 있으며 권력의 차이도 마찬가지. 특정 집단의 가치로 내걸리는 것은 주로 집단 내 가장 지배적 구성원들의 가치임.  또한 공동체주의자들은 대체로 인종, 장소, 또는 공통의 문화나 언어로 이루어진 집단에 초점을 두지만, 공통의 취향이나 직업, 문제를 공유하는 집단, 압제의 역사를 공유하는 집단도 공동체가 될 수있음

 

밀이 자유론에서 옹호했던 결론은, 다수(자신이  행하는 방식이 정상이라고 정의하고 다른 사람에게 해를 입히는)의 압제를 막고 개인의 존엄성과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는 항상적이고 주의 깊은 보호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 낙인의 작동에 대한 일차적이고 가장 본질적인 해법은 개인적인 자유와 권리를 빈틈없이 강조하고 모든 시민에게 법의 동등한 보호를 확고히 보장하는 것임. 너스바움은 이러한 맥락에서 시민들이 수치심과 낙인을 겪지 않고 살 수 있는 '촉진적 환경'을 형성해야 한다고 주장. 그러면서 낙인의 가장 중요한 조건으로 빈곤을 지적하며, 예의 역량접근법을 토대로 사회가 모든 시민에게 괜찮을 생활수준을 보장해야하는데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촉구 (인간 역량이란 어떤 구체적 형태의 기능을 선택할 준비가 되어 있고 그러한 기능을 실제로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의 상태를 지칭). 법적 측면에서는 차별금지법과 증오범죄법이 중요한데, 자유주의자들과 대립되는 시각을 지닌 사람들의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고 어떻게 취약한 사람들을 보호할 것인가 하는 어려운 문제가 실재함. 또한 자신에 대해서든 다른 사람에 대해서든 다루기 어렵고 수치심을 야기할 수 있는 인간성의 측면을 대면하고 검토할 수 있는 공간의 보호라는 측면에서 프라이버시 강조함. 예술이나 문학을 통해 생기는 상상과 공상은 과도한 불안없이 자신의 인간성이 갖는 다루기 어려운 측면을 탐구할 수 있는 방법이 되며 이러한 탐구는 자신에 대한 인식을 보다 더  풍부하게 만들어주고, 이러한 자기탐색은 타인의 경험을 상상할 수 있는 능력을 높여줌. 이 두 가지 능력은 바람직한 힌간관계를 맺는 데에도 중요하며, 자유주의 사회가 건강하게 운영되기 위해서도 필요. 즉, 사회가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 상상하고 탐구하는 공간을 보호할 필요가 있음을 시사. 프라이버시 영역, 특히 사람에 따라서는 수치스럽게 여길 수 있는 활동과 상상을 위한 프라이버시를 법적으로 보호하는 것이 중요. 대개 공/사 구분은 대칭적으로 작동하지 않는데 '정상인'의 경우는 감추고 싶은 선택과 공개하고 싶은 선택을 모두 보호하지만 '비정상인'에게는 감추라고 요구하기 때문. 이를테면 성소수자에게, 여성들에게 '사회가 혼란을 감당할 수 없으니' 욕구와 노출을 감추라고 하는 것처럼.

 

이러한 논의들을 따라가다보면, 최근의 텔래그램 성착취 사건에서의 가해자 신상공개가 과연 처벌의 응보, 억제, 표출, 개심 측면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가 회의가 드는 것도 사실


그러나 이들이 저지른 범죄의 내용이 개인에게 수치심과 말할 수 없는 낙인을 가져온 행위였다는 점에서, 응보적 측면의 처벌이 타당해보이기도 함. 물론 억제와 표출 측면에서는 신상 공개보다는 강력한 형량이 더 의미있는 기여를 할 것으론 생각하지만서도... (이들에게 개심이 가능하긴 한 건지 잘 모르겠음 ㅡ.ㅡ)
근데 사실, 가해자의 수치심 처벌 측면에서의 신상공개보다는 잠재적 범죄 예방 측면에서 논의되는 게 더 중요하지 않을까 생각을 하고 있음. 핵심 가해자인 조주빈을 포토라인에 세우는 거야 뭐 대중에게 딱히 '알 권리'를 충족시켜줄 것이 없으나, 그를 포함한 26만명 주변에 있는 여성들이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성범죄 피해자가 되었거나 앞으로 될 가능성이 있다는 점에서 신상 공개가 필요해보임. 언론에 명단이 공개되어 봤자 이들이 연예인도 아닌데 누가 누군지 알 수가 없고, 오히려 좀더 상세한 정보를 성범죄자 신상공개 형태로 조회해볼 수 있게 해서 잠재적 피해를 예방하는 것은 매우 필요해보임.
     


너스바움의 논문들만 읽다가 단독 저서는 처음 읽어봤는데 엄청 꼼꼼하고 논리적이고, 견고한 정치철학적 관점이 분명히 드러나서 강추하고 싶음.
그런데.... 책을 읽고나서 근본적 미스테리는, 이렇게 합리적이고 똑똑한 양반이 왜 유대교로 개종했느냐 하는 것... 인간 본연의 취약성으로 이해해야 하는가....
혐오가 인간 그 자체에 대한 부정이라는 점에서 합리적 감정이 아니라는 수백페이지짜리 책을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유일신 종교에 대한 마음 저 깊은 곳으로부터의 혐오가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 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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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믿는다는 것

나이 들어가면서 이상하게 방향을 바꾸는 사람을 볼 때마다 주변에 '내가 저런 기미가 보이거들랑 꼭 말려달라'고 신신당부하고 하는데...

막상 그런 순간이 닥치면, 옆에서 누가 뭐래도 말을 잘 들지 않는 것 같다.

물론 그런 순간이 어느날 갑자기 찾아온다기보다, 점증하는 조짐이 있었을테고 사람들도 서서히 손절하거나 말해봐야 소용없다는 걸 깨달아가고 있었겠지..

 

그래서, 요즘에는 요구사항을 하나 추가했다.

나에게 진정한 애정이 1이라도 남아있다면, 말 안듣는다고 포기하지 말고, 치매가 걸렸다고 둘러대든 바깥 문을 잠그든 막아줘야 한다고 ㅋㅋㅋ  예전 국정교과서 편찬위원 위촉과 관련한 해프닝이  좋은 참조 사례다 ㅋㅋㅋ

그리고 주변 사람들도 이상하게 변할 수 있으니, 2차 저지선, 3차 저지선을 마련해놓는게 좋겠어 ㅋ

요즘 보면 주위에서 내가 제일 멀쩡한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지 ㅋㅋ

 

일희일비하지 않는 천성과 평균 이상의 자기객관화 능력이 나름의 장점이라고 생각하지만

커리어가 쌓이고 정치적 환경이 변화하면서 자의식과 자기효능감이 비대해질 수 있는 상황에 마주치는 경우가 심심찮게 나타나고 있다. 시민사회, 운동조직과의 배태성이야말로 위험한 개인적 선택을 피할 수 있는 중요한 무기가 아닌가 싶다.  

세상에, 다른 사람은 절대로 잘하기 어려운데 나만 잘 할 수 있고, 모든 외적 제약에도 불구하고 나라면 다르게 할 수 있는 일은 그리 많지 않다. 당연한 거 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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