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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9월 22일, 프리챌 커뮤니티 게시판에 썼던 글

 

 

 

 

사람의 얼굴도 여럿이지만

현실의 얼굴은 정말 다양하다

 

비정규직이란 시간제 일당제 등의 임시직을 비롯해

간접고용의 형태로 일하는 모든 노동자들을 일컫는 말이다

 

간접고용이란 사용자 혹은 사업주가 직원을 채용할 때

노동자와 직접 계약해서 고용하는 것이 아니라

용역업체 혹은 파견업체라는 이름의 중간 공급업체가

사용자(사업주)와 계약하여 해당 사업장에 노동자를 공급하는 고용형태를 말한다

 

하루 10시간 이상의 장시간 노동에 정규직보다 적은 임금을 받으며 일하지만

사회보험(고용, 산재, 의료)에 가입해주는 곳도 적고

시간외 수당이나 휴일근무수당을 받기도 어렵고

법정 휴일이나 휴가를 사용할 가능성이 줄어들며

생리휴가나 출산휴가 등의 혜택에서 벗어나 있기도 쉽다

노동 3권으로 불리는 자주적 단결권, 단체 교섭권, 단체 행동권을

행사할 기회가 거의 없고

노동조합을 결성할 기회를 원초적으로 박탈당하기도 한다

 

저임금, 무권리의 이 노예와 같은 근로조건을 가진 비정규직의 70%가 여성이다

따라서 비정규직의 직종을 살펴보면

반복적인 단순업무, 단순기술을 이용한 생산직이나 기능직,

전화나 인터넷을 통한 마케팅업무, 업무 보조원 등에 집중되어 있고

30대만 되어도 해고의 불안에 시달린다

젊고 건강한데다 가사노동의 부담이 없는

(야근 특근 등 장시간 노동이 가능한)예비 노동자가

항상 그 다음 타자로 줄지어 대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잠깐 광고!

 계약서라는 걸 한번도 구경하지 못하고 일하고 있거나

 백지 혹은 알아먹지 못할 어려운 말로 된 계약서에 서명했던 여성노동자 가운데

 부당하게 해고되었거나 해고당할 위기에 처한 분이라면

전국여성노조 02-362-5305 / 02-365-8766/ http://kwunion.jinbo.net 로 연락하세요

 

밤늦게 아르바이트로 어느 영상물의 대본을 쓰느라

전국여성노조의 투쟁사례집을 뒤적거리자니 정말 가관이다

 

'아직도 여성의 권익을 운운하다니...떵떵거리며 출세한 여자들이 얼마나 많은데'라거나

'성희롱이고 성폭력이고 간에 실수로 어쩌다 그런 걸 너무 호되게 처벌한다'거나

'생리대가 생필품이면 면도기도 생필품, 맥주도 생필품이니 세금 떼고 인하하라!'거나

'가부장제도가 사라진 게 언젠데...요샌 남자들 기를 살려야 한다'고 주장하고 싶다면

지금 내가 보고 있는 이 자료집을 빌려드리겠다

 

법적 제도적 약자로서 늘 권력의 주변에 머물러 있는 여성들은

(이젠 많이 검증되었다시피 여성이 '생물학적'으로 약하다는 말은 거짓이다. )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할 노동현장에서 더 세련되게 소외된다

같은 비정규직이라도 남성들의 경우에는 정규직의 노조와 연계하거나

언론에서 기사화하는 비율이 높은 반면에

(가족의 생계를 책임진 가장이라는 이유로, 혹은 노동'형제'들의 동지애가 발동하여...)

여성들의 경우에는 세상에 알리는 일도 서로 단결하는 일도 쉽지 않다

(여성가장의 비율이 20%에 달하지만 사회적 인식은'여성의 취업은 부업'이므로...)

 

가편집본에 담긴 장면 장면들이 다 분통을 터뜨리게 하지만

화면에 보이지 않으면서도 더 가슴을 울렁거리게 하는 것은

이 모든 모순을 가장 기본적으로 안고 있는 공간이 가정이라는 사실이다

 

남편의 비서, 아이의 교사, 각종 모임과 행사의 기획과 뒷처리, 경리 및 재테크 담당, 

노인 도우미, 간병인, 요리사, 게다가 가사노동을 전담하는 존재이지만

일반적으로 '주부'는 정규직도 전문직종도 아니다

지가 좋아서 결혼했는데 무슨 소리냐고 하신다면

당사자가 주변 사람으로부터 '좋은 사람 소개시켜줄께'라는 권유 한번 받지 않고

가족이나 친구들로부터 '왜 결혼 안하냐'는 질문 한번 받지 않고

독신비율이 높네, 출산연령이 점점 높아지네 하는 사회적 여론의 눈치 한번 보지 않고

전적으로 본인의 의사만으로 결정한 결혼이나 출산의 사례가 몇이나 되느냐고

정색을 하고 한번 따져볼 것을 권한다

 

인간은, 특히 여성이 결혼하지 않으면 장애인으로 취급되는 것이

(어디가 모자란다, 혹은 어디가 잘못되었다고 돌려 말하지만)

이 사회의 불문율 아니던가

아이를 낳지 않아도 장애인(돈이 많으면 해결되기도 하지만...),

낳았지만 기를 수가 없어 포기해도 장애인(미친 년이라고 손가락질...)

남편이 아이를 길러도 장애인 소리를 듣는다(병신이라며 들리지 않게 욕하지만...)

이래 저래 외계인이나 금치산자로 취급되는 실제 장애인들은 그래서 더 서럽고

(모자라거나 잘못된 게 아니라 태어날 때 불편한 곳이 있을 뿐인 이들인데...)

졸지에 장애인 취급을 받는 비장애인도 서럽다

(모자라거나 잘못된 게 아니라 생각이 좀 다른 인간인데 말이다...)

 

단순반복노동을 죽을 때까지 해야하는

이 사회의 몹시 필수적이지만 극히 '보조적인'

무임금 무보험 무노조 무권리 노동자가 바로 주부다

열심히 잘해봐야 '당연한 의무'를 처리한 것이지만 못하면 '죽일 년'이 되기도 한다

이 부당한 노동환경의 비합리성을 고발하거나 상담할 기관이 너무 다양하고 많은 대신에

여기 광고할 만큼 똑부러진 곳이 딱 떠오르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다

 

가장 소외된 비정규직의 이름, 그것은 나와 당신을 낳은 엄마이고

(이 엄마들이 살아보겠다고 취업하려면 대개 비정규직으로 일해야 한다...)

가장 허울좋은 이름으로 포장되거나 은폐되어 실체를 반도 드러내지 못한 가해자의 이름,

그것이 바로 가족이고 가끔은 아버지이다

 

의도하지 않고 인식하지 않았더라도

누군가에게 신체적 정신적 피해를 입힌다면 그것을 폭력이라고 부를텐데

나는 혹은 당신은

아주 오랫동안 가족이란 이름으로 누군가의 권리와 자유를 억압한 적이 없었는지

오늘 한번 냉정하게 돌아보시길 바란다

 

 

2002/09/22 09:39 2002/09/22 09: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