델리카트슨 사람들 Delicatessen (1991)

소개해주신 덕분에, 잘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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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아이들의 도시와 같은 감독이다.

이 영화를 보고 나니, 이 영화는 물론, 잃어버린 아이들의 도시도 자본주의에 대한 풍자가 아닐까 싶어졌다.

 

고기가 없어, 사람을 잡아 먹는 동네.

푸줏간 주인은 사람의 고기를 팔아 곡식과 교환하고, 창고에는 곡식이 그득하게 쌓여있다.

푸줏간 주인의 실수로 다리 한쪽을 잃어도, 그 불평의 화살은 이방인에게로 향한다.

자신의 차례가 돌아오는 걸 피하기 위해, 다른 사람을 사지로 내보낸다. 서로 독립적으로 사는 것 같지만, 필요할 땐 합심해 희생자를 만든다.  델리카트슨 한편에는 매번 죽기 위해 노력하지만 죽지 못하는 부르주아 여성이 있고, 집세를 내지 못해 죽을 차례가 돌아오길 기다리는 가난한 할머니가 있다.

그리고 이런 지상세계의 사람들과 싸우는 지하세계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곡식이 부족할지언정, 사람 고기를 먹지 않는다.

영화는 집 바깥을 거의 보여주지 않는다. 설사 보일 때에도 음습하고, 비바람이 몰아친다. 집 내부는 당연히 어둡고, 또 장면의 한 축은 지하 또한 그리 다르지 않다.

 

지상을 자본주의, 지하를 현실사회주의 세계로 바꿨을 때 비유는 정확하게 겹쳐진다. 지하세계 사람들이 곡식만으로 살듯, 지상세계도 충분히 삶을 영위할 조건이 만들어져 있지만, 고기를 섭취하기 위해 희생자를 만드는 일을 포기하지 않는다.(곡식에는 화폐라는 은유가 겹쳐져 있다.) 이런 세상은, 왼쪽 수도꼭지를 틀면 오른쪽에서 물이 나오는, 뭔가 비틀어진 곳임에 틀림없다. 영화 안에서 푸줏간 주인을 격침시키는 것은, 지하세계의 사람들이 아니라 광대 뤼종과 푸줏간 주인의 딸 쥴리다. 이 둘의 '사랑'이 델리카트슨을 물로 깨끗이 쓸어내버린다. 푸줏간 주인이 죽고난 뒤, 첼로와 톱을 켜는 장면에서 하늘이 맑아져 있다. 지상/지하의 음습함과는 다른 세상이다. 뤼종과 쥴리는 지하세계에 도움을 요청하지만, 감독이 지하세계의 음습함에 동의하는 것은 아님을 시사하는 것 같다.  어두컴컴한 방안에 개구리와 달팽이를 키워 자생하는 사람은 공동체운동이 유비된다. 물이 쏟아지는 순간, 개구리를 방생하며 밝은 세상으로 뛰쳐나온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푸줏간 주인을 쓰러트린 건, 뤼종/쥴리가 아니었다. 궁지에 몰린 뤼종/쥴리는 실상 변변한 힘 한 번 쓰지 못했었고, 푸줏간 주인은 자신이 던진 부메랑에 맞아 죽게 된다. 생산을 늘리기 위해 고정자본을 소비하는 기술진보를 가속할 수록 최종적 파국에 가까워지는 자본주의.

 

군데군데, 기발한 상상력이 엿보이는 장치들, 멋지다. 저런 상상력, 닮고 싶어.

2010/06/06 11:45 2010/06/06 1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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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네.. 맞아요.. 음, 그 땐 분하고 흥분해서 막 내뱉었는데, 나중에 남기신 덧글 보고 제가 너무 무례했었단 생각이 들어 민망했어요.. 혹시 불편하셨다면 죄송해요..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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