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을 옹호하다 _ 테리 이글턴

 

 
 
이 책은 히친스의 「신은 위대하지 않다」,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을 겨냥하고 있다. 신학을 합리적 이성으로 비판하는데 대해, 테리 이글턴은 합리성을 부정하는 식으로 답을 찾지 않는다. 테리 이글턴은 서두에서 과학을 부정하는 포스트모더니즘에 동조하지 않으며, 종교와 정치를 함께 언급하겠다고 선언한다.
 
1-3장 까지는 특별히 애매한 부분이 없었는데, 4장에서 등장하는 개념어들은 난해하다. 종교가 문명과 문화가 결합시킬 수 있고, 상징형식의 하나라고 얘기하는데, 상징형식에는 성ㆍ예술도 있다. 문명과 문화의 범주를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겠고, 성, 예술이 포함되는 상징형식이 문화와 어떻게 다른지도 잘 모르겠다. 책의 일관된 서술인, 해방ㆍ변혁의 정치를 문화ㆍ종교로 대체하는 것은 반정치적이라는 데 동의한다. 종교는 정치를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와 결합되어야 한다는 것인데, 이를테면 씨빌리떼의 정치와 연관지어볼 수 있을까?
 
1. 인간 쓰레기
 
1장에서 이글턴은 신학이 세상에 대한 설명이 아니라, 믿음(신뢰)과 사랑이라고 설명한다. 예수는 이런 사랑과 자비를 상징하며, ‘아나빔’(사회에서 버림받은 인간쓰레기)을 대표하는 존재이다. 그리고 이 ‘아나빔’이 주춧돌이 될 하나님의 나라라는 유토피아는 세상에 대한 근본적인 변화를 통해서만 가능하고, 그것은 가혹한 인간 현실을 직시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현실을 바꾸기 위해 순교와 같은 희생이 필요하다는 것 자체가 비극이다. 순교는 자살과는 다른 죽음으로,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버리지 않기를 바라는 죽음이다. 혁명가의 삶이 혁명가가 지향하는 삶과 일치할 수는 없는데, 현재 혁명가의 삶을 율법으로 삼는 것은 죽음과 같은 상태이다. 비극을 인식한다는 것은 인류의 역사가 큰 문제없이 나아가고 있다고 보는 자유주의의 관점과 대비된다. 자유주의(인본주의)는 신학에 대립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오히려 신의 위치에 인간을 세워놓은 것에 불과하다. 비극은 현실이 더 나은 세상으로 변할 수 있다는 ‘믿음’을 요구한다.
 
이하 발췌
 
하느님은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지 않고 뭔가가 존재하는 이유 자체이며, 모든 실체의 가능성의 조건이다. 창조자 하느님은 어떤 의도가 담긴 기능적 목적에서가 아니라 창조하는 일 자체를 좋아하고 즐거워하기 때문에 세상을 만들어낸 예술가이자 탐미주의자다. 천지창조는 최초의 ‘동기 없는 행위, 무상의 행위’였다. ‘무로부터의’ 창조는 세상이 어떤 앞선 과정의 필연적 결과, 피할 수 없는 인과 사슬의 결말이 아니라는 사실의 증거다.(이런 설명에서 자연스럽게 편의의 유물론이 떠오른다.)
 
세상이 필연적이지 않기 때문에 세상을 지배하는 규칙을 선험적인 원칙으로부터 추론해낼 수 없고, 세상은 오직 그 자체만을 위하여 존재하는 데 이것은 세상이 하느님 자신의 자유를 함께 누리는 데서 연유한다. 급진적 낭만주의자들이-이 맥락에선 카를 마르크스까지 포함하여-제기하는 의문은 그 같은 존재 방식을 현실화 하려면 어떤 정치적 변혁이 필요하냐는 것이다.
 
과학과 신학은 대부분의 경우에 같은 종류의 대상을 다루지 않는다. 과학과 신학의 다툼은 어느 쪽의 ‘설명’이 더 나은지를 놓고 벌어지는 게 아니다. 쟁점은 우주의 기원을 말할 때 어디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하느냐다. 신학의 입장에서 보면 과학은 충분하게 멀리 올라가지 않는다.(왜 애초에 무언가가 존재하게 되었는지) 신학자는 우리가 설명을 원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우주가 설명 가능할 정도로 앞뒤가 들어맞는 것이라고 우리가 가정하는 이유는 또 무엇인지 따위의 문제에 관심을 갖는다. 거칠게 말해 미적이라 할 이유 때문에 과학이 가능하다는 얘기다.(신학은 일종의 메타-과학) 이런 근원적 의문들의 답이 반드시 ‘하느님 때문에’는 아니고, 이런 질문을 신학자나 과학자만 던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신학적 관점에서 보면 도덕성은 우주 자체만큼이나 목적도 이유도 없다. 예수가 가르치는 도덕은 무모하고 비현실적이며 장래에 대비하지 않는, 상식을 벗어난 것이다. 하느님에게 우리가 지는 의미는 우리에게 애완용 몽구스가 지니는 의미와 다를 바 없다. 따라서 하느님은 우리를 그냥 방치해 둘 수 있고, 이런 상태를 가리키는 단어가 바로 자유다. 기독교 신학에서는 우리가 이처럼 자유로울 때 하느님에게 가장 깊이 속하게 된다고 말한다.
 
니체의 관점에서 볼 때 절대적인 힘이 신에게서 인간에게 그대로 옮겨지지 않으면 신의 죽음은 필연적으로 인간의 죽음을 불러온다. 파우스트 식으로 인간은 무한한 듯해 보이는 자신의 힘과 사랑에 빠진 것이다. 이런 병폐를 치유하는 전통적인 방법이 [...] 이른바 비극 예술이라는 것이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창조된 것들이 감히 창조하려 들어서는 안 된다고 했는데, 이는 자기창출에 대한 부르주아의 위대한 신화라 부를만한 것을 경계하는 말이다. 스스로를 만들어낸다는 생각은 부르주아적 환상의 전형이고(자유롭고 완전한 주체-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핵심), 관계의 맥락 속에서만 우리의 자유가 크고 든든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데서 역사적 숱한 재앙이 시작됐다.
 
자유주의와 종교적 믿음이 반드시 충돌하는 것은 아니다. 자유주의자들이 말하는 자유의 이론적 원천 중 하나가 기독교의 자유의지 개념이다. 니체는 자유주의와 기독교가 실상은 한 가지 아니냐고 생각해서 훗날 나치스와 스탈린주의자들이 그랬듯이 둘을 싸잡아 비난했다. 
 
신약성경에는 영웅적이라 할 이야기가 없다. 예수는 구세주치고는 너무나 구차스럽다. 유대인의 전통적 관점에서 보면 살해당한 메시아란 말도 안 되게 변칙적인 것, 혹은 형용모순이다. 무한한 자족적 기쁨의 삶에 근원이 되며 예수가 ‘아버지’라고 일컫는 이 존재는 심판자가 아니고 가부장도 아니며 비난하는 사람도 아니고, 초자아 또한 아니다. 남녀를 불문하고 누구든 하느님이 어떤 경우에도 그들의 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기만 하면 된다.(신앙) 예수의 사명은 인간의 유약함을 인정하는 것이지, 그 때문에 인간을 벌주고 야단치는 게 아니다.
 
성경에서 심판자나 비난자로 등장하는 하느님의 이름은 사탄이다. 사탄은 이를테면 못되게 구는 힘센 왕초로 해석된 하느님이다.[이런 해석도 나름대로 하느님을 비추는 괜찮은 방식의 하나다.] 예수 안에서 하느님의 사탄적이고 초자아적인 이미지가 뒤집어 지면서, 율법과 욕망 간의 위험한 교착상태-정신분석학자 자크 라캉이 ‘실재’라 부르는 것-가 풀리기 시작한다. 교착상태에서 우리는 율법 자체와 병적으로 사랑에 빠지게 된다. 우리 자신을 쓰레기라 생각하며 삶을 끝내려는 충동을 프로이트는 ‘죽음 충동’이라 불렀는데, 이의 정반대가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랑이다. 병적인 교착상태에서 해방돼 복음서에서 영생이라 일컫는 삶을 살 것인가, 아니면 죽음 충동에 시달리며 죽음과 다름없는 거짓된 영생을 살 것인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죽느냐, 사느냐-)
 
갈보리에서 심하게 매질당해 피투성이가 된 희생양이 이제는 율법의 진정한 시니피앙(기표)이 됐다. 우리가 사랑하지 않으면 영생을 누리지 못하고, 사랑을 하면 공권력이 우리를 죽인다. 세속주의자들은 이를 환상과 현실도피로 규정하지만, 거꾸로 우리가 현실이라 부르는 것이 복음서의 가차 없는 요구들을 완화해 준다. 예수를 본뜬다는 것은 예수의 삶만이 아니라 죽음까지도 모방한다는 뜻이다. 죽음은 삶의 완성이며, 예수의 자기희생에 담긴 궁극적 의미가 드러나는 곳이다. 이처럼 격렬하게 사랑하는 하느님의 진정한 모습을 보여주는 유일한 형상은 고문 받고 처형당한 정치범이다.[아나빔] 로마는 정치범만을 십자가에서 처형했다.
 
여기서 필요한 것은 새 술을 헌 부대에 담는 신중한 개량주의적 프로젝트가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무엇을 전위적으로 보여주고 깨우치는 일이다. 이 일에서 중도는 허락되지 않는다. 예수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환전상들의 좌판을 뒤엎어버린 데서 알 수 있듯이, 월 스트리트에서 인기 있을 인물이 아니다.
 
인간들의 유감스러운 상태[원죄]를 고려할 때 이처럼 노골적인 유토피아는 쉽게 이룰 수 없다. 엉망진창으로 뒤틀려 있는 세상에서 자기실현은 결국 자기를 버리는 행위를 통해서만 이룰 수 있다. 상황이 이렇다는 사실 자체가 비극이다. 복음서에 따르면 두 종류의 ‘죽음 속의 삶’이 있다. 하나는 지옥과도 같은 비참한 삶이고, 다른 하나는 자기집착을 버릴 수 있을 때 누리게 되는 풍성한 삶이다. 그런데 두 삶을 구분하기가 항상 쉽지는 않다.
 
독신은 성 그 자체에 적대적인 게 아니다. 희생이란 소중히 여기는 것을 버린다는 의미이다. 강제적인 금욕 생활에서 바람직한 삶의 모습을 찾으려 한다면 최악의 잘못일 터이다. 혁명가가 이루고자 하는 사회의 바람직한 이미지들에 혁명가와 그의 삶이 포함되기는 어렵다. 순교자는 자기가 지닌 가장 소중한 것을 버리지만, 가능하다면 그러지 않아도 되기를 바란다. 반면에 자살자는 견디기 힘든 부담이 돼버린 삶을 기꺼이 내던진다. 순교자는 타인을 위해 죽음을 택하는 사람이다.
 
못쓰게 돼버린 우리 세상을 포기할 각오가 되었을 때, 그제서야 우리는 미래의 참된 삶을 기대하며 살아갈 수 있다. 이런 마음가짐은 비관주의가 아니라 현실주의다. 우리는 그런 삶이 과연 가능한지를 확실하게 알 수 없기 때문에, 이런 자기 비우기에는 믿음이 필요하다. 이처럼 믿기 어려울 정도로 냉정한 현실주의를 유지하면서, 인간을 십자가에 못 박는 극악하고 충격적이며 지긋지긋한 실재, 그 메두사의 얼굴을 정면으로 응시할 때에만 어떤 형태로든 부활이 가능해지지 않겠는가. 죄 없이 고통 받은 사람의 그런 끔직한 형상을 역사의 진실로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이라면 인류의 무한정한 진보라는 순진한 꿈을 곧이곧대로 믿을 가능성이 크다.
 
믿음이란 본디 무엇 혹은 누군가의 존재에 대한 확신이 아니라 헌신과 충성을 뜻한다. 기독교 신앙에서 일차적인 것은 초월자인 하느님이 존재한다는 명제에 동의하느냐 않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세상을 변화시키는 사랑에 대한 약속을 충실하게 믿고 지키는 인간들이 보여주는 헌신이다. 자유주의적 합리주의자라면, 우리 인류가 비록 고통스러운 상황에 처했으나 놀랍게도 아직 희망이 남아 있다는 믿음 따위는 가질 필요가 없다. 상황이 그렇다는 점 자체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는 한결같이 나쁜 방향으로 무신론적인데, 그에 반해 마르크스와 니체는 대체로 좋은 방향으로 무신론적이다. 무자비하게 실리만을 추구하는 자본주의에 내몰린 이른바 영적인 가치가 피난처로 삼은 곳의 하나가 뉴에이지다. 마르크스가 종교를 “무정한 세계의 감정이고, 영혼 없는 상황의 영혼이다”라고 했을 때 염두에 두었던 게 바로 이런 상황이다. 마르크스가 공격한 종교는 실리만을 추구하는 물질주의자들에게서 기대할 수 있는 종교, 즉 영적인 것을 현실에서 분리하여 감상적으로만 이해하는 유형의 종교였다. 마르크스가 지적했듯이, 낭만주의의 한 특징은 그것이 공리주의의 이면이라는 점이다. 뉴에이지는 세상으로부터 도피할 곳을 제공할 뿐이지 세상을 변화시킬 사명을 제시하지 않는다. 프로이트가 말하는 신경증의 징후가 그러듯이, 이런 유형의 종교적 믿음은 좌절된 욕망을 표현하는 동시에 그 욕망을 추방한다. 우리가 물질적으로 변해야만 진정한 의미에서 영적으로 살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낭만주의처럼, 그런 믿음은 무정한 세계에 대한 반발이기는 하되 감정과 가치라는 한정된 영역 안에서만 맴돈다.
 
이슬람 급진주의와 기독교 근본주의는 [...] 낭만주의나 뉴에이지와 달리, [...] 불만을 품은 소수의 교리를 넘어선 대중운동이다. 근본주의는 단순히 세상으로부터 도피처를 찾지 않고 세상을 변화시키려고 나선다. 근본주의는 비현실적인데, 이는 근본주의가 헛된 꿈을 꾸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들의 가치가 이전 시대의 자본주의, 즉 산업자본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뉴에이지가 탈정치적인 데 비해 근본주의는 반정치적이다. 기독교 근본주의는 정치적 투쟁을 일삼기는 하나 근본에서는 문화주의의 한 형태로서 정치를 종교로 대체하고자 한다. 문화가 지나치게 비대해져서 정치를 완전히 집어삼키는 우려스러운 경향을 보이는 시대에 이런 근본주의가 싹튼다. (종교의 부흥이 정치적인 형태를 띄는) 형상은 본래적인 정치의 회복이 아니라 실패를 반영한다. 근대 혹은 현대라고 불리는 시대는 [...] 종교의 의미가 퇴색하지만, 동시에 종교의 폐해 또한 줄어드는 게 사실이다. 포스트모던한 시대에 오면 종교는 다시 공공 영역으로 나아가고 집단화 되는데, [...] 우리는 지금 후기자본주의 세계의 재주술화라는 우려해야할 현상을 목격하고 있는 셈이다. 혁명적 민족주의가 끝나는 지점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은 시작된다.(포스트모더니즘이 정치를 문화로 대체한다면, 근본주의는 그 문화/정치를 종교로 대체한다.)
자본주의가 앞으로 어떻게 변할지는 몰라도, 지금까지는 종교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상부구조를 포기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럴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 현시점의 문제는, [...] 종교가 시장경제에 의해 축출된 영적인 가치들의 몇 안 되는 피난처 중 하나로서 방어적이고 편집증적이며 거의 병적으로 되어 가고 있다는 점이다.
 
 
2. 배신당한 혁명
 
2장에서는 자유주의/합리주의 혁명이 자기 모순에 부딪힌 역사를 설명한다. 자유주의, 합리주의, 계몽주의는 인류의 소중한 유산이다. 하지만 그 자유주의, 합리주의 아래에서 아우슈비츠와 히로시마 원폭 등이 있었고, 근대가 이전 시대에 비해 진보했다고 단정할 수 없다. 자유주의는 그 시대에 존재하는 결함은 일시적인 것으로 치부하고, 역사가 끊임없이 나아지고 있다고 믿는 편을 택한다. 반면 급진주의자란 우리의 상황이 지금은 극도로 나쁘지만 바람직한 방향으로 많이 개선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다. 자유주의자들이 믿음과 이성, 종교와 과학을 대비시키지만 종교와 과학은 서로 다루는 대상이 다르고, 이성/과학이 믿음과 무관하지도 않다. 자유주의는 맹목적 믿음에 근거하고 있다며 테러리즘을 비난하지만, 실상 테러리즘은 자유주의/합리주의라는 이름으로 저질러졌던 서구문명의 만행 때문에 가치를 인정받는 것이다. 오히려 서구는 이슬람 세계에 폭력적으로 개입해 근본주의 이외의 다른 정치세력을 말살시켰다. 이성/믿음을 부당하게 대립시키며 어느 한편을 말살시키려는 시도는 이지러진 복수로 돌아올 뿐이다.
 
이하 발췌
 
기독교 믿음에 따르면 인간의 사악함은 큰 부분이 역사적 이유에서 비롯되며, 따라서 정치적 실천을 통해 어느 정도 순화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의 악덕이 얼마나 크고 끈덕진가를 고려할 때, 이런 설명과 대응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 또한 기독교의 믿음에 속한다. 인간이라는 종의 구조 자체에 결함과 모순이 없다고 단정하기 힘들며, 그런 결함과 모순은 역사적 관점에서 다룰 수 없다는 생각에서다.
 
신앙의 성서적인 유형과 이데올로기적 유형[성 요한이 ‘이 세상의 권력’이라 부른 것과 어떤 방식으로든 결탁한 해석] 사이의 구분[...]은 무작정 전제할 게 결코 아니며 끝없이 논의해야 할 문제다. 이 [...] 작업에 대해 니체는 키르케고르의 어법을 빌려 ‘기독교 세계로부터 기독교 신앙을 구해내는 일’이라고 했다. 우리가 교회의 결함과 실패를 거론할 때 취하는 관점은 다른 무엇보다도 유대-기독교 유산 자체에서 비롯된 가치들의 관점이다.
 
자유주의 계몽주의의 역사는 인간 해방의 고무적인 역사로서 무한히 귀중한 유산이다. 이런 견해를 마르크스만큼 굳게 지닌 사상가는 없었다. 계몽주의의 가치들, 많은 부분이 유대-기독교에 기원을 두고 있는 그 가치들을 포스트모더니즘의 방자하고 어리석은 비난으로부터 지켜내야 한다. 마르크스주의는 근대성이 피임법과 히로시마 원폭, 해방운동과 생물학전을 동시에 뜻한다고 역설한다. 근대성이 긍정적인 현상이냐 부정적 현상이냐 하는 의문에 대해 급진주의는 단호하게 “긍정적인 동시에 부정적”이라고 답한다.
 
테일러는 “‘종교’와 ‘과학’ 간의 전적인 대결이라는 관념은 키마이라 같은 가공의 괴물,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이데올로기적 구성물”이라고 주장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주체와 객체의 만남을 대립이 아니라 협력으로 본다. 이 관계에서 주체인 정신은 객체인 현실에 능동적으로 참여하고 객체에 내재한 명료성을 겉으로 드러냄으로써 객체만이 아니라 주체 자신의 힘까지 알찬 자기실현으로 이끈다. 일체의 주관적 관념론과 달리 아퀴나스는 이런 상호관계에서 객체 쪽을 강조했다. 아퀴나스에게 이 세상은 우리 마음대로 만들고 조절할 수 있는 소유물이 아니라, 알 수 없는 타자성을 구현하고 있는 선물, 우리가 그 물질적 밀도와 자율성을 존중해야 하는 선물이다. 신학자와 과학자는 적어도 이 같은 존중을 공유한다.
 
진보의 가능성에 대한 믿음 자체가 잘못은 아니다. 그런 믿음에 짙게 덧칠된 이데올로기가 문제일 뿐이다. 과거를 지움으로써 미래를 향해 나아가려는 사람들은 과거가 결국은 복수의 칼로 되돌아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뿐이다.(종교를 지우려고만 해서는 극복할 수 없다)
 
종교는 오만하게 거부해야할 대상이 아니라 끈질기게 해독해야 할 대상이다. 이성이 합리성과는 무관한 관심과 욕망들을 인정할 수 있어야만 이성은 보다 견실해져서 그 욕망들이 무법 상태로 치닫고 결국에는 이성 자체까지 압도하게 되는 상황을 막을 수 있다. 프로이트 학파에서 말하듯이 억압은 욕망을 더 강화시킬 뿐이다.
 
하느님의 나라는 역사라는 상승하는 곡조의 절정에서 힘차게 울려 퍼지는 소리처럼 도래하는 게 아니다. 그것은 장엄한 역사적 진화의 완성이 아니라, 인간이 정의를 위해 투쟁하는 가운데 보편적 평화와 정의가 살아 숨 쉬는 하느님의 통치 시대를 예시한 모든 역사적 발화점의 마무리다. 이처럼 기독교 신학은 진보라는 오만한 관념에 의존하지 않고서도 역사를 바꾸어갈 수 있다고 믿는다. 발터 벤야민도 인식했듯이, 하느님의 통치란 다른 무엇이 아니라 억압받는 사람들을 위한 산발적이고 자주 불운했던 투쟁들, 영원의 관점이라 할 것에 따라 ‘지금시간’이라는 하나의 순간에 모여 일관된 이야기로 구현됨으로써 구원에 이르는 투쟁들을 이른다.
 
마르크스주의자는 자유주의적 계몽정신의 원대한 이상 자체에는 시비를 걸 일이 거의 없다. 다만, 그 이상들을 실현하려는 시도가 있을 때마다 어떤 가차 없는 힘에 의해 이상이 비틀어져 정반대의 것으로 전화하고, 그 결과 누군가의 자유가 다른 누구에게는 착취가 되며, 이론상의 평등이 현실에서는 불평등을 낳게 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하는 따위의 의문을 짐짓 순진한 태도로 제기할 뿐이다. 자유주의는 또한 자아를 원자론적으로 생각하고 인간관계를 냉정한 계약관계로 보며 윤리를 공리주의라는 빈약한 관점에서 해석하는 경향을 조장한다. 
 
이 모든 사실에도 불구하고 테러는 전혀 정당화될 수 없다는 게 아마드와 나 자신의 견해다. 자살폭탄테러가 결국은 서구 탓이라는 뜻도 아니다. 자살폭탄테러의 책임은 자살폭탄테러범 자신이 져야 한다. 얘기의 초점은 그 같은 범죄 행위가 값지게 생각되는 환경이 조성되는 데 서구 세계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사실이다.(테러에 대한 억압이 아닌, 테러가 조성되는 조건 자체에 대한 변화가 필요하다-반폭력)
 
 
3. 믿음과 이성
 
2장에 이어 믿음과 이성의 관계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믿음과 이성은 서로 대립하지 않으며, 과학 또한 믿음에 근거하고 있다. 믿고 있던 것이 사실과 다르다 해서 그것이 비이성적인 것으로 등치될 수는 없다. 우리는 어떠한 믿음을 이성에 근거해 일일이 선택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은 아는 것만으로 행동하지는 않고, 행동에는 믿음이 필요하다. 하지만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는 세상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필요하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이런 필요에 공감하지 않는다. 포스트모더니즘이 객관성에 대한 믿음을 환상으로 치부할 때, 근본주의는 종교적 믿음으로 모든 것을 환원시킨다. 이 둘은 믿음과 이성의 관계를 고민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닮은꼴이다.
 
이하 발췌
 
우리는 믿음과 이성이라는 문제를 만나게 되는데, 이는 결코 신학적인 주제에 그치지 않는다.
믿음이란 대체로 진위에 입각한 명제의 성격보다는 발화와 동시에 그 말이 나타내는 행위가 이루어지는 수행적 성격을 띤다. “하느님 아버지를 저는 믿나이다.”라는 신앙고백이 뜻하는 바는 [...] “나는 당신을 신뢰한다.”라는 발화와 더 비슷하다. 이에 반해 악마는 하느님이 있음을 인정한다고 예부터 알려졌지만, 하느님을 믿지는 않는다.
지식과 믿음의 관계는 무척 복잡하다. 예컨대 어떤 믿음은 합리적이지만 진실이 아닐 수 있다. 우리 조상들이 이러저러한 신조들을, 비록 나중에는 잘못된 것으로 밝혀졌지만 당시의 가정들과 지식 아래서는 옳다고 생각하면서 받아들인 것은 합리적이었다.
여기서 유의해야할 것은 우리가 알지 못하면서 믿을 수 있듯이 알면서 믿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그처럼 극적으로 자기를 드러내는 일이 우리에게 지식 한 점을 보태는 데 그치지 않고 믿음에까지 영향을 주려면, 우리의 말과 행동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어야 한다.
 
믿음을 단지 ‘증명될 수 없는 어떤 명제들을 받아들이는 일’로 축소할 수는 없다. 예를 들어, 사람들을 움직여 인종차별이 없는 사회의 가능성을 믿게 만드는 것은 일련의 명제들이 아니라 일련의 헌신이다. 그들이 피부색 때문에 일자리를 얻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마음이 움직여 행동에 나서려면 그에 앞서 이미 정의라는 개념과 정의의 실현 가능성에 어느 정도 헌신하고 있어야 한다. 사실에 대한 인식만으로는 정의 실현을 위한 행동을 유발하기에 충분치 않다.
“나는 이해하기 위해서 믿는다.”라는 [...] 말은 사회주의나 페미니즘을 믿는 사람들에게도 맥락을 달리해 적용할 수 있다. 예컨대 당신이 여성해방운동에 뜨거운 관심을 가질 때 가부장제의 작동 방식에 대해 더 깊이 알게 된다.
따라서 기독교 정통 교리에서 믿음은 진정한 지식을 가능케 해주는 것이며, 이 점은 일상의 삶에도 어느 정도 적용된다. 또한 혁명이론은 대중의 혁명운동을 통해서만 완성될 수 있다는 블라디미르 레닌의 주장과도 맥이 통하는 바가 있다. 지식은 적극적인 참여를 통해서 얻어지고, 적극적 참여를 위해서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믿음이 행동을 유발하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행동을 거치면서 믿음의 내용이 분명히 규정되기도 한다. 나아가 우리는 흔히 사람에 대해서보다는 사물에 대하여 아는 걸 지식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믿음과 지식이 서로 얽히는 또 다른 방식에는 눈길이 가지 않기 쉽다. 누군가를 믿을 때에만 우리는 위험을 감수하면서 그에게 자신을 완전히 드러낼 수 있으며, 그 결과로 우리 자신에 대해 진정으로 알게 된다는 점 말이다. [...] 결국은 오직 사랑을 통해서만(믿음도 사랑의 한 형태다.) 낭만이라는 불안정한 매력과 욕망이라는 어수선한 환상을 떨쳐내고 상황을 있는 그대로 파악하는 거의 불가능한 목표를 성취할 수 있다.(그래서 사회주의를 포기할 수 없다.)
 
우리의 지식과 믿음 전부가 허구라는 얘기는 물론 아니다. 절대적인 정당화, 즉 증거에 대한 갈망은 신경증일 뿐이지 칭찬해야할 끈기가 아니다.
 
지금까지 나는 다른 주제들과 함께 이성이 우리의 궁극적 토대가 아니라는 점을 몇몇 측면에서 검토해보았다. 예컨대 이성은 우리의 헌신을 필요로 하는데, 그 헌신 자체가 이성으로 환원될 수 없다.[니체라면 “진리에 대한 이처럼 집요하고 냉혹한 의지 뒤에는 과연 어떤 원망과 악의, 불안 혹은 지배욕이 숨어 있을까?”하고 물었을 법하다.]
 
찰스 테일러의 지적에 따르면 사적인 이해관계에 좌우되지 않고 과학적 객관성을 지니는 근대적 주체는 전근대의 종교적 금욕주의와 그것이 표방한 ‘세상에 대한 경멸’에 기원을 둔다. 이러한 인식론에서는 흥미롭게도 세상에 대한 앎이 세상에 대한 거부를 수반한다. 하지만 스스로의 해방과 복지를 위해 세상 속의 자기 처지를 제대로 파악하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에겐 어떤 의미로든 객관성이 절실하게 필요하다. 보다 처지가 좋아서 그리 안달할 이유가 없는 일부 사람들은 객관성이란 환상일 따름이라고 거리낌 없이 주장하는데, 포스트모더니스트들도 이 부류에 속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은 확신이라는 개념을 무척 싫어해서, 대단치도 않은 이 일상적 개념을 놓고 온갖 이론을 동원해 소동을 피운다. 그런 면에서 포스트모더니즘과 근본주의는 동전의 양면을 이룬다고 할 수 있다. 근본주의 역시 확신에 대해서 야단을 떨지 않는가.
 
믿음은 그게 어떤 종류든 기본적으로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는 뭔가를 믿겠다고 의식적으로 결정하는 경우보다는 그냥 이미 믿고 있는 경우가 더 많다. 아니면 적어도 이미 특정한 방향으로 마음이 기울어져 있기 때문에 그쪽을 믿겠다는 의식적 결정을 내리게 된다.
믿음이 궁극적으로 선택의 문제가 아님을 기독교에서는 은총이란 개념으로 나타낸다. 기독교의 관점에서는 세상 자체가 선물이듯 믿음 또한 선물이다. 믿음은 의식적인 행위만은 아닌 까닭에 생각만으로 믿음을 버리는 경우는 흔하지 않다. 그러려면 다른 부분들도 함께 변해야 한다. 예컨대 평생 보수적으로 살아온 사람이 어떤 생각 하나가 머릿속에 떠올랐다고 갑자기 혁명가로 변신하지는 않는다.(믿음은 이데올로기의 문제./믿음을 의지로 결정한다-주의주의, 믿음은 고정되어 있다-결정론)
 
 
4. 문화와 야만
 
모든 것을 신앙/종교로 환원시키는 신앙주의/근본주의는 이성의 극단적인 배타성에 대한 반기로 등장한 것이다. 서구는 다문화주의를 수용하지 못하고, 영국 총리가 제시하는 ‘공통의 문화’는 자유주의로의 귀화를 의미한다. 문명과 문화의 대립이 심화되는데, 문명과 문화를 융합시키려 했던 마르크스주의의 정치적 시도는 크게 좌절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정치를 문화로 대체하며, 극단적인 문화주의는 문화가 인간의 삶을 결정한다고 간주한다. 종교(문화)적 차원에서 구성된 공동체로 사회적 해방을 대체하려는 근본주의자들의 시도와 포스트모더니즘은 상호 교접한다. 하지만 해방은 역사의 진보에 희생이 함께함을 직시하는 비극적인 인본주의를 견지할 때 가능하다. 그리고 이 희생은 믿음과 사랑에서 가능하다.
(문명과 문화의 범주를 정확히 이해하지는 못하겠다.)
 
이하 발췌
 
서구가 거대담론을 내버리고 있던 시점에 하필 이슬람주의 테러라는 새로운 거대담론이 돌출하여 서구를 당혹케 했다고 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이는 두 사건의 관계를 올바로 이해하지 못한 말이며, 상황을 실제보다 훨씬 역설적으로 보이게 만든다. 자본주의가 이제 유일한 선택이 됐다는 뜻으로 사방에서 떠들어대는 ‘역사의 죽음’이라는 명제는 세계 지배를 꿈꾸는 서구의 오만을 그대로 보여주는데, 바로 이 같은 침략적 정책이 급진적 이슬람이라는 형태의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따라서 역사가 끝났다는 주장의 허위성이 입증됐다. 
 
믿음이 지금처럼 범람하는 데는 불가지론적인 후기자본주의 문명 자체도 일조를 했다. 근본주의가 태동할 여건을 조성하는 데 후기자본주의가 큰 역할을 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이성이 지나치게 지배적이고 타산적이며 도구적이 되면 급기야 너무나 천박해져서 합리적인 믿음이 번성할 수 있는 토대 역할을 못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 결과 믿음은 신학자들이 신앙주의라고 부르는 유형의 비합리주의로 타락하면서 이성에 완전히 등을 돌려버린다. 이런 상황에서는 광신에 빠지기 쉽다. 합리주의와 신앙주의는 좌우만 바뀐 거울상처럼 서로 닮았다.
 
경제적 자유주의는 대규모의 전 지구적 인구 이동을 촉진했고, 그로 인해 서구에서 이른바 다문화주의가 탄생했다. 여기에도 모순이 하나 있는데, 다름이 아니라 자본주의가 세계적인 규모로 번창할수록 국민에 대한 국가의 장악력을 위협하게 된다는 점이다. 문화는 권력이 우리 삶의 구체적인 경험들과 결합하여 우리를 더 확고히 장악하도록 해줌으로써 권력을 안정시키는 역할을 한다. 그렇지 못한 권력은 삶에서 유리된 냉담한 것으로 비치기 때문에 국민의 절대적 충성을 이끌어내지 못한다. 권력이 충성을 확보하려면 자신을 문화에 새겨 넣어야 한다. 그러니 수많고 다양한 문화들에서 동시에 기반을 잡아야 하는 권력은 큰 어려움에 처할 수밖에 없다.
다문화주의가 기존 질서에 위협이 되는 이유는 그것이 테러리스트를 키우기에 적합한 환경을 제공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현저하게 분열적인 정부 정책을 시민들이 받아들이도록 만들기 위해서는 상당히 탄탄한 문화적 합의가 필요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공통의 문화를 보다 급진적으로 해석하면, 모두가 똑같은 것을 믿는 문화가 아니라 모두가 동등한 지위를 갖고 서로 협력하여 공통된 삶의 방식을 결정하는 문화라는 뜻이 된다. 공통의 문화가 지금은 주변에서 맴도는 문화전통들을 포용하게 될 경우, 우리가 이루어낼 수 있는 문화는 현재의 것과 무척 다를 터이다. 우선 훨씬 다채로운 문화가 될 것이다. 모든 구성원이 적극적으로 참여해서 이뤄내는 문화는 새로운 사람들을 자기 방식대로만 받아들이는 획일적인 문화에 비해 더 혼성적이고 덜 균일하게 마련이다. 이런 의미에서 평등은 차이를 만들어낸다.
 
문화와 문명을 절대적으로 구분할 수는 없다. 특정한 삶의 방식이라는 의미에서 문화는 문명의 이른바 보편적 가치들을 매개해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시대에 가장 절박한 문제의 하나는 문명이 문화 없이 존재할 수 없음에도 문화와 공존하기가 쉽지 않다는 데에 있다. 문명은 고귀하지만 연약하고, 문화는 조야하지만 강력하다. 문명은 물질적인 이익을 지키기 위해 살상하는 반면, 문화는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살상한다. 문명이 실용주의와 물질주의에 젖어갈수록 그것이 감당 못하는 정서적이고 심리적인 욕구들을 채울 임무가 문화에 더 많이 주어지고, 문명과 문화 간의 반목은 한층 깊어진다.
 
종교는 문화와 문명 양쪽에 다 관여한다.
문화의 관점에서 믿음이란 사람들이 의지에 따라 선택할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문화에 대한 일방적 주장이 합리적인 토론을 대체하는 경우가 많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문화란 내가 ‘누구인지’에 따라 내가 ‘어떻게 사는지’가 결정된다는 걸 의미하는데, 이것은 생물학적 인종주의와 상통하는 논리다.
포스트모던한 사상가들은 [...] 종래의 토대를 문화라는 새로운 유형의 토대로 대체한다.
문화가 종교를 대체한다는 생각이 터무니없지만은 않다. 종교와 마찬가지로 문화도 궁극적인 가치와 직관적 확신, 신성한 전통, 보증된 정체성, 공유된 신념과 상징적 행위, 그리고 초월의 느낌 등의 요소를 지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화가 종교의 대체물 역할을 온전히 해낼 수 없는 게 사실이다. 지난 두 세기 동안 문화 개념이 그토록 버거운 부담 아래 허덕인 이유가 여기에도 있다. 예술작품이 우리를 구원할 수는 없다. 예술작품은 수정되고 치유되어야할 것들에 우리가 좀 더 민감해지도록 해줄 뿐이다.
이성은 너무 추상적이고 비인격적인 힘이어서 죽음을 이겨낼 수 없다. 하지만 그 사랑이 진정한 것이 되기 위해서는 “피의 제물을 항상 묵묵히 인정하는” 사랑이어야 한다. 우리는 아름다움과 이상주의, 그리고 진보를 향한 열망을 높이 평가해야 하지만, 그 뿌리에는 많은 피와 비참함이 있었다는 사실 또한 마르크스나 니체 식으로 시인해야 한다.
 
문화가 종교의 역할을 적절히 대신하지 못한다면 정치의 역할도 대신할 수 없다. 근대성에서 탈근대성으로의 이행은 인간 삶의 중심이 정치에서 문화로 이동했다는 믿음과도 직결된다. 문화주의의 한 형태로서 포스트모더니즘은 얄궂게도 급진적 이슬람주의와 비슷한 데가 있다. 급진적 이슬람에서도 궁극적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믿음과 가치관이라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이슬람 급진주의는 서구의 약탈적 정책에 대한 반발로서만 생겨난 게 아니라, 앞에서도 지적했듯이 다양한 형태를 띠었던 무슬림의 세속주의, 자유주의, 민족주의와 사회주의가 궤멸한 데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일부에서는 종교적 언어가 정치적 담론을 대체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는 종교와 정치를 하나로 결합하고자 하는 기독교 해방신학과는 정반대라고도 할 수 있다.
 
정치가 이 땅에서 고통 받는 사람들의 처지를 바꿔놓겠다고 하면서도 지금까지 그들을 결집하지 못했다면, 문화가 정치를 대신하여 그 과업을 이루어낼 수 없다는 점도 거의 확실하다. 그렇다면 종교는 어떨까? 우리가 기독교 세계라고 부르는 것은 스스로를 문화와 문명의 통일체로 여겨왔다. 종교가 지금까지 인류가 이루어낸 가장 강력하고 끈질기며 보편적인 상징형식이라면 그건 부분적으로 이 때문이기도 하다.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진리와 무수히 많은 사람들의 일상적 관습을 그처럼 직접적으로 연결시킨 상징형식이 종교 이외에 또 있었는가? 그러나 억압받는 사람들을 해방시키는 데는 종교도 문화만큼이나 무력하다.
 
마르크스주의가 문화와 문명의 화합에 대한 전망을 제시한다면 그건 무엇보다도 마르크스주의의 창시자가 낭만주의적인 인본주의자인 동시에 계몽주의적 합리주의의 후계자였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주의는 문화와 문명 모두에 관한 것이다. 감각적 개별성과 보편성, 노동자와 세계시민, 지역적인 헌신과 국제적 연대, 육신을 지닌 개개인의 자유로운 자기실현과 인간 모두가 범세계적으로 협동하는 사회, 이 모두 관련된 사상이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는 우리 시대에 엄청난 정치적 좌절을 겪었고, 출구를 잃은 급진적 충동들이 이동해 간 곳 중 하나가 하필이면 신학이다.
이런 현상은 그다지 놀랍지 않다. 신학이 주장하는 진리들 중 받아들이기 어려운 게 많다 해도, 끊임없이 전문화되어 가는 세상에서 아직 남아 있는 가장 야심찬 이론적 영역의 하나가 바로 신학이기 때문이다. 신학은 인간의 본질과 운명 그 자체를 주제로 삼아 생명의 초월적 근원이라고 상정되는 존재와 연관시켜 연구하는 학문이 아닌가.
 
나 같은 사람들과 디치킨스의 차이는 결국 자유주의적 인본주의와 비극적 인본주의의 차이로 귀착된다. 비극적 인본주의도 자유주의적 인본주의와 마찬가지로 인류의 자유로운 번영을 염원하되, 그 같은 이상은 위가 최악의 것들을 직시할 때에만 실현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비극적 인본주의는 사회주의적인 것이든 기독교나 정신분석학의 관점에 선 것이든 간에, 인간은 자기 비우기와 근본적인 개조를 통해서만 바로 설 수 있다고 주장한다.
 
 
 
 
기타
 
/과학과 신학 간에 차이가 있다면 그것은 이 세상을 선물로 보느냐 아니냐 하는 데에 있다. 
 
/ “우주와 관련해서 가장 이해할 수 없는 점은 우주가 이해될 수 있다는 것” - 아인슈타인

 

 
 
 
2011/10/20 23:06 2011/10/20 2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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