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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바르떼, 사회적협동조합 설립기 4)

이글은 부산민예총에서 발행하는 격월간지 [두달에 한 번 함께가는 예술인]의 요청으로 

2013년 3월부터 4회에 걸쳐 연재한 글입니다. 

자바르떼가 왜 사회적협동조합으로 전환했는지, 그리고 어떻게 좌충우돌 운영하고 있는지 

고민을 담아 정리해봤습니다. 

 

<글 싣는 순서>

1. 문화예술, 협동조합으로 길을 모색해 보다

2. 문화예술의 공공성 -사회적기업과 사회적협동조합

3. 문화예술협동조합 해외사례

4. 협동조합 전환, 그 이후 - 풀어야 할 과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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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협동조합 전환, 그 이 후 - 풀어야 할 과제들

 

1) 문화예술협동조합 현황

실로 붐은 붐인가 보다. 작년 12월 1일 협동조합 기본법이 시행되고 10개월이 지났는데 그 사이 등록된 협동조합 수는 2,606개소이고, 이 중 일반 협동조합은 2,518개소, 사회적협동조합은 78개소, 일반협동조합연합회가 10개소가 설립되었다고 한다. 월 평균 300개 정도가 설립된 셈이고, 여전히 협동조합에 대한 관심과 열기가 높으니 당분간 계속 이런 추세로 증가할 것이라 예측된다. 2012년 문화관광연구원자료에 따르면 문화예술인들은 협동조합에 대한 인지도는 높으나 제도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한 이해는 부족한 편이라고 한다. 그럼에도 전체 2,518개의 일반 협동조합 중 문화예술협동조합의 비중은 대략 370개소이고 이는 일반 협동조합의 14.2%로 꽤 높은 편이다. 문화예술 사회적기업이 초기엔 별로 없다가 5년이 지나면서 전체 인증 사회적기업 중 16%에 달했던 것에 비하면, 초기부터 적극적으로 설립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문화예술이 다른 분야에 비해 고정수입 확보가 어렵고 고용이 안되는 어려운 구조라는 것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고, 상대적으로 사회적기업에 대한 부담감이나 행정적 어려움이나 적기 때문인 듯하다.

대략 조사해본 370개소의 문화예술협동조합의 사업 내용들은 다음과 같다.

 

<문화예술분야 일반 협동조합 현황>

사업 분야 / 업종

개소

사업 분야 / 업종

개소

문화, 문화예술

23

한지공예, 제조, 판매

7

교육, 문화, 문학컨텐츠

20

문예 아카데미

4

공연

28

댄스, 스포츠, 체육

48

공예 (생산,교육,판매)

23

디자인

20

도예, 도자기, 흙놀이

15

패션

3

미술은행, 아트마켓

4

출판

11

만화

3

광고, 미디어, 영상, 인터넷 관련

45

목공, 수공예

4

극장운영, 시설운영, 공방

10

사진

6

공연기획, 제작, 이벤트

15

전통 문화

3

마을공동체 기반 문화예술 활동

12

음악교육/악기제작/밴드지원/공동구매

4

마술, 마임, 단청문화, 예술상담

4

문화예술교육, 체험

13

문화관광, 여행

38

천연염색

7

합 계 

370

그리고 지역별 분포를 보면 서울이 134개소로 일반 문화예술협동조합 중에서는 36.2%를 차지하고 있는데, 전체 협동조합 중 서울의 비중이 28.6%인 것에 비해 높다. 이 역시 문화예술 인프라나 공공사업, 인력들이 서울에 집중되어 있다는 것을 반영하는 것이겠다. 조합 유형으로는 사업자 242(65%), 생산자 1, 다중이해 80(21%), 노동자 36(10%), 소비자 15(4%)로 전체 분포에 비해 다중이해, 노동자 쪽이 약간 높고, 사업자는 비슷한데 소비자 협동조합은 조금 낮다. 아마도 아직은 문화예술인들이 직접 설립하는 비율이 높기 때문이리라.

그런데 일반협동조합에 비해 문화관광체육부 사회적협동조합은 5개소 밖에 인가되지 않았으며, 현재 5개소가 인가신청 중이라고 한다. 사회적협동조합은 인가 사항이라 심사를 거쳐야 하기 때문에 절차가 복잡하고 시간이 많이 걸린다는 이유이겠지만, 문화예술의 공공성이나 문화기본권의 관점으로 접근을 하고자 하는 그간의 노력들에 비해 너무 시도조차 안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가 든다.

이렇게 많은 협동조합들이 설립되는 것을 보고 일각에서는 벌써 우려의 소리가 나오고 있다고 한다. 전체 협동조합 중에서 정말로 조합원들의 필요에 의해 자발적으로 결성되고, 또 협동조합적 가치와 원리로 작동되는 곳은 얼마나 될 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개점 휴업 상태인 협동조합도 있다고 하고, 기존 조직에 이름만 바꾼 협동조합도 많다고 한다. 물론 이제 막 설립된 곳들을 두고 어러니 저러니 추측을 하기 보다는 좀 더 두고 볼 일이긴 하다. 그리고 또 그러하다한들 어떠하겠는가, 자영업이나 벤쳐기업도 생겼다가 1 ~2년 만에 문을 닫거나 망하는 곳이 허다한데, 협동조합이라고 다르겠나 싶기도 하다. 문화예술 협동조합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기존 회원 조직이 이름만 바꾸거나, 일단 형식적으로만 만들어 놓은 곳도 있을지 모르겠다. 한국사회에서 문화예술인들이 어려운 생계문제와 불안정한 활동구조를 개선하는 것으로 여러가지 방안을 찾다가 협동조합을 설립했다면 당장은 큰 변화를 가져오지 못하더라도 운영을 잘 해서 지역과 다른 관계를 맺고 지속적인 활동토대를 마련했으면 좋겠다. 그럼에도 협동조합다운 협동조합이 되기 위해서는 꼭 챙겨야 할 필수 요소들이 있는 것 같다. 결국 문화예술단체나 개인으로 존재하는 것만큼이나 협동조합으로 함께 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므로, 협동조합을 설립하기 위해 거쳐야 하는 과정들을 짚어보고, 또 설립 이 후 어떻게 운영해야 하는지를 자바르떼의 시행착오 경험을 토대로 풀어보고자 한다.

 

2) 협동조합 설립을 위해 고려해야 할 문제들

위에서 본 것처럼 다양하지만, 사실 구체적으로 주체가 어떤 사람들이고, 어떤 사업을 하고 있는지는 정확한 실태조사를 하지 않고는 알 수 없다. 그럼에도 관심과 실제 시도들이 많은 것만은 확실하다. 전문예술인들이 활동 기반을 마련하려는 곳도 있고, 시민 기반 문화활동을 하는 곳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보면 예술인들이 반드시 생산자나 공급자여야 하는 것이 아니라 악기나 재료를 구매하는 소비자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그러한 조합원 유형은 존재를 이야기하는 것과는 다른 구분이다. 자바르떼도 2007년부터 문화예술생산자협동조합을 목표로 하면서 생산자를 노동자와 같은 개념으로 사용했는데, 제도상으로 노동자는 4대보험을 적용한 고용관계로, 생산자는 개별 사업을 하는 사업자로 구분하고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조합원 유형을 나누게 되었다. 그러니 조합원 유형이나 영리, 비영리라는 틀에 갇힐 필요 없이 공통의 필요를 가진 주체들이 모여서 문제해결을 위해 다양한 상상력을 작동시켜 가며, 존재와 활동방식을 만들어 가는 것이 중요하겠다. 그 후에 목적과 사업성격에 맞게 조합원 유형과 영리, 비영리를 선택하면 된다.

높은 관심 덕분에 최근 협동조합 설립에 대한 상담을 종종 하게 되는데, 쉽게 설립을 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의외로 어디서 무엇부터 시작해야 하는지 어려워하는 사람도 많이 만나게 된다. 이미 준비가 되어 있다면 설립 절차를 알려주면 되지만, 대부분 아직 준비가 안된 채 혼자 찾아오는 경우에는 몇 가지 거쳐야 하는 필수 과정을 강조한다.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마음이 맞고 같은 필요를 느끼는 파트너를 최소 3~5명 이상 찾아야 하는 일이다. 그리고 이들과 함께 그 필요를 절실하게 느끼는지 확인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상담을 받는 분들의 대부분은 혼자 먼저 급하게 생각하고 준비한 뒤에 함께할 파트너를 찾으려 하는데, 그러면 결국은 계속해서 혼자서만 뒷감당을 할 수 밖에 없게 된다. 몇 차례의 워크숍을 설립동의자들이 모여 진행하면서, 자신의 조건과 욕구를 솔직하게 드러내 논의해야 한다. 설립이 아니라 전환이라면 그 과정은 조직의 현 상태를 진단하고, 인적역량과 관계를 혁신하는 과정으로 삼으면 좋겠고, 마찬가지로 새로운 지역관계를 통해 사업모델과 연대방식도 찾아봐야 한다. 협동조합은 지역을 떠나서는 성공하기 어렵고, 또 협동조직 간의 협동이 없이는 살아남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렇게 구체적으로 어떤 사업을 할 수 있고, 필요한지, 이야기를 하다보면 필요한 비용이 나오고 그를 근거로 예산을 작성하게 된다. 이 때 ‘나는 무엇을 얼마나 낼 것이고,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가’에 따라 조합원 유형과 출자금이 결정된다. 그러면 우리가 어떤 협동조합으로 갈 것인지, 사회적협동조합인지, 일반협동조합인지, 생산자 협동조합인지, 노동자협동조합인지, 다중이해협동조합인지 자연스럽게 결정할 수 있다. 조합원들의 이해를 기반으로 하면서도 좀 더 지역사회와 공공적인 활동이 중요한 부분이라면 사회적협동조합을 선택하는 것이 맞다. 행정이나 인가과정이 어렵다고 하지만, 일반협동조합을 설립하고 난 후 문화예술의 사회적 역할을 부각시켜 사회적기업으로 인가를 받으려는 생각을 하는 분들이 많은데, 그럴 바엔 사회적협동조합으로 준비를 하는 것이 더 수월하다. 그런 후에 좀 더 책임있게 결정하고 운영을 할 임원을 선발하면 된다. 누가 우리의 이해를 잘 대변하고 충족시켜 줄 수 있는가 신중하게 따져봐야 한다. 이 내용들이 정관과 사업계획서로 정리되면 설립 신고서를 작성하는 건 그다지 어렵지 않다.

그런데 협동조합은 설립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유지되기 위한 안정적인 수익모델이 있어야 하는데, 다들 여기서 다시 머리가 아플 것이다. 수익모델이라는 것은 얼마나 돈을 잘 벌 것인가의 문제는 아니다. 예를 들어 음악인들이 연습실을 공동으로 마련해서 운영하는 것이 필요라면, 공동으로 공간을 얻음으로서 절감되는 비용의 측면과, 각자들이 연습실 비용을 감당하기 위한 최소 수익구조를 협동해서 마련하면 된다. 즉, 수익모델은 필요한 적정 비용을 산출하고, 그 만큼을 벌 수 있는 구조를 만드는 것이라 볼 수 있다. 물론 필요한 비용이라는 게 누구나 다르겠지만, 협동조합이 되었다고 갑자기 떼돈을 벌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문화예술인 중에는 별로 없을 것이다. 오히려 그 비용을 줄임으로서 수익을 높이는 것도 중요한 일이다. 기존 사업을 어떻게 새롭게 재배치하면 좋을지, 혹은 각자의 활동들을 협동조합과 어떻게 연결시키고 공동의 사업으로 확대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이 좋다. 여기서도 중요한 건 지역에서 이미 협동조합에 대해 이해를 하고 활동하고 있는 다른 조합의 조합원들의 다양한 문화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방향으로 활동영역을 확대해 가는 것이다. 결국 협동조합간 협동이 서로 믿고 팔아주고, 노동력 교환도 하면서, 돈으로 써야만 하는 영역을 줄이는 것이어서, 덜 벌더라도 삶이 불안하지 않도록 하는 안전망의 역할을 할 것이기 때문이다.

 

3) 협동조합 운영을 위한 논의 과정

자바르떼의 이야기로 돌아와 보자. 지난 2월 7일 창립을 한 후 설립 신고서를 작성하는데 한달, 문광부를 거쳐 사회적기업 진흥원에서 인가 심사를 받는데 두달, 인가 통고 후 등기를 하는데 다시 한달, 그 후에 조직명칭을 변경과 각종 서류들의 전환 변경 신고를 하는데 한달. 모두 다섯 달이 걸렸다. 창립 이후에만도 그러한데, 전환 준비기간까지 생각해보면 8~9개월의 시간이 걸린 셈이다. 기존의 회원들을 교육하고 동의를 얻어 기존 사업들을 모두 가져가려 하니 신규 설립에 비해서 비용과 시간이 3배쯤 들어갔다. 그러니 협동조합을 고려하면서 굳이 전환을 고집할 이유가 없다면 설립을 하는 게 좀 더 쉽고, 하고자 하는 사람들끼리 충분히 고민하고 논의하면 된다. 하지만 후다닥 한두달 만에 만들어도 어차피 설립 이후 조합 내에서 논의하고 풀어야 할 과제로 남게 될 것이다. 즉, 사전에 겪든 사후에 겪든 필수 과정은 있다는 이야기다.

그렇게 시간을 많이 들여 전환, 창립을 한 자바르떼도 모임을 진행하고 발전 방향 논의를 하다보니 많은 부분이 부딪힌다. 3월부터 생산자 조합원들은 월 3회의 모임을 하면서 각자들이 가진 예술활동을 자바르떼 새로운 사업으로 어떻게 연결시키고, 지속적인 수익구조를 만들 것인지 논의하기 시작했고, 몇가지 사업 제안을 해보기도 했다. 그리고 6월부터는 월 1회의 조합원 교육을 겸한 모임을 갖었다. 모여서 구체적으로 내년 사업에 대한 이야기와 이런저런 논의를 해보니, 정말 자신의 필요가 절실해서 조합원이 된 사람이 그다지 많지 않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다. 기존 사업 관계 때문에 참여하기도 했고, 또 굳이 당장 사업적으로 결합할 건 없는데도 과거에 회원이었거나 직원이었으니 의리상 가입한 사람도 없잖아 있는 듯했다. 또 기존의 사업적 관성을 여전히 갖고 있다보니 새로운 조합원들이 참여하거나 끼어들 요소가 많지 않은 것도 문제였다. 새로운 조직으로 거듭나고서 매달 모여 함께 새로운 미래를 상상하며 즐거운 일들을 만들어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몇 달 지나지 않아서 조합원들은 지겨워했고, 참여율도 낮았다. 늘 나오는 조합원들은 나오지 않는 조합원들을 원망하면서도, 왜 나오지 않는지, 어떤 시간대로 옮기면 나올 수 있는지 물어보지 않고, 시간을 정해 공지하곤 했다. 이들에게도 관심없는 조합원들이 꼭 필요한 파트너가 아닌가 보다. 그리고 생산자 조합원들은 컨텐츠를 생산하는 사람들이고 노동자 조합원들은 이들이 참여할 수 있는 사업을 기획하는 역할이라서 서로 이해관계가 달랐다. 생산자 조합원들에게 높은 강사비나 인건비를 지급하면 수익이 적게 남아 노동자 조합원들의 안정적인 급여가 어려울 수도 있다. 그리고 사업의 집행권이 노동자 조합원들에게 있다보니, 생산자 조합원들이 어떤 경우는 ‘을’인 것도 같고, 어떤 경우는 고객인 것도 같다.

그러다가 우연히 조합원 규약의 중요성에 대해 이야기를 듣게 되었고, 마침 올해 총회 때 다른 사안이 많아 진행하지 못한 자바르떼 조합원 규약을 같이 만들자는 생각이 들었다. 매번 사안이 발생할 때마다 모여서 이야기를 할 게 아니라 규약을 만들어 운영의 원칙으로 삼자는 제안을 했고, 두 달간 5회의 교육과 두 번의 워크숍을 통해 조합원 규약을 논의하고 있다. 실제로 우리들이 필요하고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운영 원칙을 각각 다른 이해당사자들이 모여서 함께 만들어야 하니 쉽지 않은 과정이지만 그렇게 조금씩 간격을 줄여가고 있고, 공통의 필요를 이끌어 내고 있는 중이다.

 

4) 협동조합은 대안적 삶의 가치를 실천하는 운동이어야

도대체 언제까지 논의와 교육을 반복해야 하는가? 라고 묻는다면 잎으로도 계속이라고 이야기할 수 밖에 없다. 7, 80년대 민주노조가 설립되고 노조운동이 성장하던 시기, 조합원 교육과 소모임은 기본이었다. 다양한 소모임을 조직하고, 일상적으로 교육과 토론을 하면서 조합의 필요성을 이야기하고 느끼고 공감했다. 나아가 임금인상에 머물지 않고 노동권의 문제와 사회개혁에 대한 부분까지 인식의 확장도 가져왔고, 가장 좋은 재료는 문화예술이었다. 모든 조직은 교육과 소모임을 통해 탄탄해지고, 성장한다고 믿는다. 협동조합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우리가 유난한 건 아닐 것이다. 당연하게도 설립보다 운영이 더 어려운 것이다. 그럼에도 협동조합은 문화예술이 고민할 만한 것인가? 대안인가? 라고 묻는다면 나는 역시 그렇다고 답하고 싶다.

첫회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현재의 상태에 별다른 문제를 못느낀다면 지금 당장 고민하지 않아도 좋지만, 그렇지 않다면 우리의 활동을 성찰하고 새로운 대안을 모색하는 계기로 삼았으면 한다. 단순히 문화예술의 현실만이 아니라 지역의 문제, 차별의 문제, 삶의 주체로서의 문제를 다시 고민하자는 이야기이다. 그 고민과 모색의 과정에서 문화예술 활동의 가치를 증명하고 이를 계량해야 하고, 적정 가격과 공정거래의 문제도 반드시 대두될 것이지만, 또 함께 풀어갈 수 있을 거라고 믿는다.

이런 내용들이 바로 협동조합이 운동으로서 펼쳐져야 하는 이유인데, 생산의 영역 만이 아니라 소비의 영역에서도 대안적 가치를 확산하는 운동일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기존에 생산의 영역에서만 만났던 노동자들을 소비의 영역에서 다시 만날 수 있는 것이 지역이다. 또 나아가 기존 관계에서는 후원자이거나 경제적 이해나 참여가 없는 비영리단체의 회원이었다면, 조합원으로 재결합하여 경제적인 참여와 더불어 의사결정에 관여하고, 생산(창작)에 영향을 주는 관계로 발전시켜갈 수 있다. 문화 창조와 향유의 주체로서 자기문화를 만들어가고, 또 스스로 필요한 예술 창작물의 맞춤 생산을 요구하는 수용자(소비자, 자원봉사자, 후원자) 조합원들은, 건강하고 신뢰할 수 있는 문화를 생산하는 문화예술 노동자, 생산자 조합원들을 지키는 것이 중요다고 여기게 될 것이 분명하다. 그러니 협동조합이라는 조직 형식을 고민하면서 지역 안에서 비자본적인 삶의 방식을 일상의 다양한 영역에서 함께 나누는 대안적 가치로 접근하고, 또 지역의 관계망을 새롭게 재구축하기를 바란다. 협동조합이 내 일상을 바꾸는 실천 방식으로 선택되고, 전체 삶의 영역에 걸쳐 협동적 삶을 살아가는 연대와 실천의 방식으로 채택되는 것은 지역과 사회를 변화시키는 일임이 분명하다. 문화예술인들도 자기 삶의 주체가 되어 공동체 내에서 협동조합적 삶 살기, 일상을 다른 가치의 삶으로 재기획하는 운동으로 만들어 보길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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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바르떼, 사회적협동조합 설립기 3)

이글은 부산민예총에서 발행하는 격월간지 [두달에 한 번 함께가는 예술인]의 요청으로

2013년 3월부터 4회에 걸쳐 연재한 글입니다.

자바르떼가 왜 사회적협동조합으로 전환했는지, 그리고 어떻게 좌충우돌 운영하고 있는지를

고민을 담아 정리해봤습니다.

 

<글 싣는 순서>

1. 문화예술, 협동조합으로 길을 모색해 보다

2. 문화예술의 공공성 -사회적기업과 사회적협동조합

3. 문화예술협동조합 해외사례

4. 협동조합 전환, 그 이후 - 풀어야 할 과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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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문화예술협동조합 해외사례

남들은 참 잘(?)도 가는 해외 연수를 가본 적이 별로 없다. 여기저기 인터넷을 뒤져보면 그래도 많은 탐방 보고가 올라와 있고, 취재글도 더러 있다. 그러나 정작 알고 싶은 문화예술협동조합의 운영과 실상, 협동조합 조합원으로서 예술인들이 느끼는 변화를 찾아내기는 쉽지 않다. 몬드라곤에도 이탈리아 볼로냐에도 그리고 캐나다에도 분명 문화예술협동조합이 있을 것이고, 또 이탈리아에는 문화예술협동조합 연합회도 있다고 한다. 이렇게 전해지는 이야기로만 해외사례를 정리하는 것은 참 한계가 많다는 걸 느끼면서도 그래도 여기저기 남의 교육자료를 컨닝해서 나름 모아보았다. 한국사회엔 아직 사례가 많지 않으니 협동조합의 미래를 꿈꾸려면 이미 150년이 넘는 역사 속에서 이루어진 시도들과 발전과정, 그리고 우리의 오래된 미래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바램 속에서. 하지만 결국 스스로 해결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우리는 모두 너무 잘 알고 있다.

 

1) 사회적 협동조합 설립 이후의 과제

약 5개월 가까이 진행된 자바르떼 사회적협동조합 전환 컨설팅은 3단계로 진행되었다. 먼저 우리 조직과 협동조합의 가치가 부합하는지를 점검하고 협동조합을 구체적으로 이해하는 ‘협동조합 이해도 향상의 단계’를 통해 전환총회를 하였다. 그런 후에 전환의 이슈를 공유하고, 하나씩 해결해 가면서 조직의 목적과 사업, 조합원 제도를 설계하는 ‘전환용이도 향상의 단계’를 거쳐 설립총회까지 가게 되었다. 그런데, 그것으로 종료되는 것이 아니었다. 협동조합의 리더십, 커뮤니케이션, 협동조합 경영을 이해하고 사회적가치를 이해, 적용하는 ‘조직원 내부 역량 강화 단계’가 남아있다. 이 부분은 누가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해결해야 하는 과제이고, 내부에서 계속 고민하며 진행 중이다. 결국 각기 다른 이해당사자들이 모여 조정을 하는 조직 운영 시스템을 제대로 세우고, 지속적인 전망을 만들어내는 사업 모델을 수립하여 사업을 제대로 해서 애초에 목표로 삼았던 ‘생산자 조합원에게는 고정적인 수입을’, ‘노동자조합원에게는 안정적인 고용과 자율적인 노동의 기회’를 충족시키는 것은 조합의 성패와 직접 연결될 수 밖에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이윤배당이 가능하고, 조합원들의 공통의 이익을 충족시키기 위해 설립된 일반 협동조합의 경우에도 큰 수익이 발생하기는 어렵다고 한다. 생협의 경우 생산자에게 정당한 가격을 주고 생산물을 구입해서, 소비자 조합원에게 적정 가격으로 판매하는 것이 원리인데, 여기서 이익을 발생시키고자 한다면 싼 물건을 사서 비싸게 팔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면 생산자든, 소비자든 조합원이 될 이유가 없다. 생협의 생산자도 정당한 가격과 고정적인 수익이 있어야 할 것이고, 소비자도 너무 부담이 되지 않는 가격으로 상품을 구매하고자 할 것이기 때문이다. 사회적협동조합은 조합원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수익사업을 하고, 사회적목적을 실현하는 사업을 전체의 40% 이상 해야한다. 그렇다면 더군다나 많은 잉여가 발생하지 않을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문화예술과 협동조합은 같이 갈 수 없는건가? 자립, 수익창출, 불가능한가? 만약 그렇다고 답한다면 사회적경제도, 문화예술도 제대로 이해를 못하고 있는건지 모른다.

 

2) 유럽의 문화예술 협동조합

유럽에서 협동조합은 문화예술 분야의 지배적인 조직형태는 아니라고 한다. 이는 문화예술이 영리와 비영리를 넘나들며 활동을 하거나, 비영리 부문에 속해 발전해왔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유럽에는 문화예술 분야에 최소 3,000개 이상의 협동조합이 활동하고 있으며 3만2천 명 이상의 노동자가 일하고 있고, 이중 이탈리아, 스페인, 프랑스에서 협동조합이 상대적으로 발달되어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소분류

조합 수

노동자수

국가

연합조직

창작∙예술∙연예 활동

 

55

1,199

프랑스

CGSCOP

117

1,113

스페인

COCETA

63

 

영국

COOPERATIVE-UK

도서관∙아카이브∙박물관 및

기타 문화활동

4

148

프랑스

CGSCOP

22

346

스페인

COCETA

1

 

영국

COOPERATIVE-UK

게임 및 사행산업

1

 

루마니아

UCECOM

스포츠∙여가∙레크레이션 활동

11

71

프랑스

CGSCOP

88

598

스페인

COCETA

1

 

루마니아

UCECOM

15

 

영국

COOPERATIVE-UK

소분류 없음

1.949

21,559

이탈리아

(협동조합)

Confcoop ,Legacoop, AGCI

575

7,679

이탈리아

(사회적협동조합)

 

합 계

2,902

32,713

 

 

 

 

- 이탈리아 라 바라카 (La Baracca)

이탈리아의 연극 협동조합으로 한국과도 계속 교류를 하고 있고, 또 몇 차례 소개된 바 있는 라 바라카 (La Baracca)는 이탈리아 볼로냐에 위치한 어린이연극 전문극단이다. 1976년에 일반 극단으로 시작하여 1979년에 협동조합으로 전환을 하였고, 2010년에는 다시 사회적 협동조합으로 전환했다. 1980년부터 Testoni 극장을 운영하며 어린이를 위한 연극공연과 페스티벌 진행하면서 외국의 여러 곳에서 6세 이하의 어린이를 위한 연극을 65회 제작 진행 하였고, 유아를 위한 연극축제를 진행해왔다.

처음에는 청소년, 어린이, 연극, 공동작업을 경험하며 직업으로 발전시키기를 꿈꿨던 소그룹의 형태였다가 비즈니스 프로젝트의 지원을 위해 협동조합이 적합하다고 보고 전환을 하였다. 상근 직원은 18명이며, 비정규직의 수는 공연에 따라 변한다고 한다. 그리고 조직은 공연제작부, 예술교육부, 기술관리부, 기획경영부 등 부서가 있지만 부서와 관계없이(법률, 회계부문 제외) 배우, 페스티벌의 기획, 워크숍, 프로모션, 극장 유지관리 등의 업무를 나눠 분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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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1회 아시테지 국제 여름 축제 초청작으로 선정되어, 공연 예정인 라바라카 ‘달빛 작은 배’ 공연 홍보 사진> / 2013. 7. 19~20 / 세종문화회관

 

 조합원으로 참여하기 위한 최소 출자금은 25유로인데, 현재 총 자본금 규모는 약 3백만 유로(약 44억 정도)이다. 이탈리아에서는 사회적협동조합의 자원봉사자 조합원은 전체 직원 수의 50%를 초과 할 수 없고, 후원조합원은 조합의 의사결정과 지배구조에 제한적으로만 참여 할 수 있다.

<조합원 구성>

구 분

조합원수

상근 여부

노동자 조합원(배우)

18명

상근

이용자 조합원

10명

-

자원봉사자 조합원

비상근

후원 조합원

-

법인 조합원

6개 단체

-

<수입구조>

항목

수입내용

비율

직접 (자체)수입

회사공연 판매수입

13.90%

극장 티켓 매상고

13.07%

워크샵 및 (교육)과정 수입

4.18%

컨설팅 수입

5.26%

기타 수입들

5.18%

소 계

41.59%

지원 수입

자치 협약 기부금

20.39%

이탈리아 정부 지원금

13.23%

에밀리야 로마냐 지방 지원금

7.85%

Small size 프로젝트에 대한 유럽연합 지원금

10.19%

개인 및 사업별 지원금

6.74%

소 계

58.4%

 

- 프랑스 씨테 크레아씨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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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소개된 적이 없고 그닥 별로 자료도 없지만, 이곳은 프랑스 남부 리용에서 1987년 설립된 전문 벽화를 창작하는 예술노동자협동조합이란다. 리용 예술학교 졸업생 5-6명이 함께 모여 학교 및 공공임대주택 공공벽화를 그리는 것으로 시작했고, 점차 활동 범위를 넓혀왔다. 성장보다는 작품의 질과 책임

 감을 중시하기에 2012년 현재 직원은 12명이지만 독일, 캐나다 등에 자회사를 운영하고 있으며 전 세계에서 함께 작업을 진행하는 파트너들이 80여명이 있다고 한다. 자본금은 40만 유로(5억 8천만원 정도)이고 2005년 매출은 120만 유로(17억 정도)였는데, 이중 20%가 공공부문 발주, 80%는 민간 부문 발주였다고 한다. 직원 12명 중 조합원이 8명이고 2명이 준조합원, 2명은 비조합원이다. 신규 조합원은 2-3년 동안 자신의 고유한 활동 영역을 구축하도록 한다. 남녀 공동대표제로 운영된다는 점과 조합원 전원이 이사회를 구성한다는 점이 특이하다. 이들은 매년 4회에 걸쳐 조합원, 비조합원 등 모든 구성원들이 모여서 회의를 진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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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국의 더 컬쳐 커넥션

2008년부터 2010년 사이 정부 재정 감축으로 볼튼시의 어린이, 청소년을 대상으로 해오던 문화체험 프로그램이 더 이상 운영될 수 없는 처지에 이르게 된다. 그러자 문화단체와 지방정부, 청소년을 포함한 개인들이 조합원으로 참여하면서 2011년 협동조합으로 설립하였다.

영국은 협동조합이나 상호공제 관련 단체들이, 영국에서 취하는 보편적 법적지위로 일반 협동조합과는 달리 잉여에 대한 배당을 금하고 수익을 지역사회를 위해 활용하도록 하고 있기 때문에 이로 인해 공공부문의 보조금과 기부금으로 운영이 되고 있다고 한다. 조합원은 1파운드의 지분을 구입함으로서 자격을 가지게 되는데, 조합원 자격은 어린이와 청소년을 포함한 모든 개인과 학교, 공공기관이나 커뮤니티 그룹을 포괄하는 조직에도 열려있다. 주요 사업은 어린이, 청소년들이 학교와 지역사회에서 다양한 문화활동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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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국 헤크니 지역개발 협동조합

런던 변두리 지역인 해크니는 과거 노동자들의 거주지역이었는데, 세계화 속에서 공장의 해외 유출로 지역이 쇠퇴하기 시작하면서 소득이 매우 낮고 실업률이 매우 높아졌으며 마약과 매춘, 범죄가 잦은 우범지역으로 전락하였다. 그러던 80년대 초중반부터 지역개발의 필요성에 대한 대중적인 동의가 이루어지면서 지방정부가 빈 건물을 인수하고 지역사회와 주민이 함께 협력해서 협동조합 방식으로 건물의 개발사업을 진행하기 시작했다. 초기에 각종 펀드와 지원 자금들을 활용해서 임대형 주택협동조합으로 운영하였다. 임대건물에 입주하는 다양한 파트너와 지역사회의 조직, 행정조직들이 함께 하는데, 예술가들을 지원하는 방식은 아니지만 많은 예술인들이 입주하여 상근하는 조합원들과 지역 축제, 문화행사들을 유치한다. 현재 해크니의 매출액은 70억. 이중 임대료 수입이 60%를 차지하고 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

<영국 런던 해크니(Hackney) 달스턴 킹스랜드(Dalston Kingsland)역 인근 질레트 스퀘어(Gillett Square) 광장에서 바비칸 문화예술단체 주최로 열린 'Dance Nations Dalston' 축제에 수많은 시민과 주민들이 참석해 공연을 즐기고 있다. 특히 20명의 유명한 드러머들이 모여 시민과 주민들에게 멋진 공연을 선보였다. HCD는 주차공간으로 쓰이면서 마약도 팔고 범죄율이 높았던 질레트 스퀘어를 개발해 커뮤니티 허브 공간으로 사용하고 있다.>

 

 3) 여전히 남는 문제들

한국 문화예술협동조합의 사례는 아직 몇 군데 없고, 실제 사업이 이루어지고 있는 곳은 거의 없어 아쉽지만 다루지 않았다. 하지만 협동조합의 오랜 역사와 전통이 있고, 또 한국보다 문화예술 생태계의 토양이 풍부하다고 하는 유럽의 몇군데 사례만 봐서도 협동조합이 시장 논리로 살아 존재하기는 불가능하다고 보여진다.

협동조합으로 존재하던, 문화예술단체로 존재하던, 개별 예술가로 남아있던 국가의 지원과 다양한 후원으로 육성, 보호하는 영역이 문화예술이다. 그러니 문화예술이 일반 시장에서 알아서 살아남으라 하는 것은 어불성설일 수 밖에 없다. 또 문화가 아닌 영역에서 사회적기업도 인건비 지원이 있고, 지원 종료 이후에도 판로확대, 공공시장 확대, 사업개발비, 컨설팅 지원 등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 이는 대부분 사회적기업들이 시장에서 제공하지 않지만 인간 삶에 필요한 영역에 존재한다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기에 그러한 건 아닐까? 또 여기에 모두 해당되지 않더라도 사회적경제는 다른 방식으로 시장이 조성되고 수익이 창출되어야 한다는 생각은 단순히 계속 지원에 의존하고자 하는 비주체적인 태도만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수익모델은 매우 중요하다. 결국 협동조합도 사업체를 통해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조직이고, 지속적으로 유지되면서 비전이 있어야 조합원의 필요를 충족시키고, 또 지역사회 공헌도 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최소한 전환 이전보다는 더 좋아져야 전환이 의미가 있는 것이니까. 결국 하나의 수익구조만 가지고 승부수를 내려고 덤비는 것은 위험할 수 있고, 다양한 지역사회 자원들과 연계하는 방법을 동시에 가져가야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명확한 해답은 아니지만, 위에서 소개한 몇 개의 해외 사례를 깊이 탐구해서 다양한 아이디어가 생겨나길 기대한다. 그리고 혼자서 해결해야만 하는 건 아니라는 위안을 삼아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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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럽사례의 대부분은 (사)협동조합연구소의 교육자료에서 인용했고, 해크니 지역개발 협동조합은 인천문화재단 탐방보고서를 참고하였다. 워낙 유명한 사례들이라 더 많은 정보는 인터넷만 검색해도 많이 나오니 궁금하신 분들은 찾아보시길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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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바르떼, 사회적협동조합 설립기 2)

이글은 부산민예총에서 발행하는 격월간지 [두달에 한 번 함께가는 예술인]의 요청으로 

2013년 3월부터 4회에 걸쳐 연재한 글입니다. 

자바르떼가 왜 사회적협동조합으로 전환했는지, 그리고 어떻게 좌충우돌 운영하고 있는지를 

고민을 담아 정리해봤습니다. 

 

<글 싣는 순서>

1. 문화예술, 협동조합으로 길을 모색해 보다

2. 문화예술의 공공성 -사회적기업과 사회적협동조합

3. 문화예술협동조합 해외사례

4. 협동조합 전환, 그 이후 - 풀어야 할 과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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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문화예술의 공공성 - 사회적기업과 사회적협동조합

 

1) 자바르떼의 협동조합 전환 및 설립과정

첫 회에서 언급한 것처럼 자바르떼는 2004년에 문화예술인들의 공공적 일자리를 창출하고, 소외계층에게 찾아가는 문화예술교육인 신나는문화학교를 진행하는 프로젝트 사업으로 출발했다. 이 프로젝트 사업을 진행하기 위해 자바르떼(job+arte)라는 조직을 먼저 구성했고, 다음해 비영리민간단체로 등록을 했다. 고정적인 수입이 없고, 직장을 가져보지 않았던 예술인들이 월급받으면서 지속적으로 일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어보자는 취지였는데, 부족함이 많아 여전히 외부 기금에만 의존해야 하는 불안정한 상황이 계속되었다. 그럼에도 자바르떼 문화예술인들은 뭔가 지속적이고 안정적인 토대를 구축하는 것에 대한 꿈을 놓지 않았다. 그래서 선택한 길이 사회적기업이었다. 2007년 사회적기업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일정기간 일부 인건비 지원을 받으면서 예술인을 고용하는 운영 체계와 사업의 전망을 만들어간 후에 문화예술생산자협동조합으로 전환하기로 했다. 여전히 문화예술인들에게 맞는 조직형태가 뭘까 하는 고민이 계속 있었다. 문화예술집단은 과거에도 공동체적으로 운영하고, 함께 책임지고 함께 나눴지만 수익구조가 불안정해 지속성을 갖기가 어려웠으니 이를 보완하는 것이 협동조합일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지원이 종료되면 우리 나름대로 협동조합으로 전환하고 그에 맞게 운영을 하겠다는 계획이었다.

하지만 기본법이 제정되고, 시행되면서 오히려 더 어려워졌다. 이왕 협동조합으로 전환하는 것이라면 법인격을 갖추는게 더 좋겠다는 기대와, 협동조합을 사회운동으로서 일정한 흐름을 만들어가는 과정에도 동참을 하게 되고, 또 제도에 맞춰야 하는 것도 있었다. 그런데 한국사회에서 처음 시행되는 법이니 사례가 많지 않았고, 특히나 문화예술분야에서는 처음 시도하는 일이니 결코 쉽진 않았다.

일자리 지원이 종료되는 2011년 7월부터 내부에 조직 TF를 구성하고 내부 교육과 워크숍을 진행하면서도 별다른 진전을 만들지 못했고, 결국 1년을 끌다가 2012년 9월에 (사)협동조합연구소에 컨설팅을 의뢰했다. 연구소에서는 자바르떼의 현황과 목표 등을 점검하고 직원 설문조사 및 교육을 진행했다. 자바르떼가 협동조합으로 전환하기 위한 상대적 잇점과 목표 공유, 비즈니스 모델 혁신과 협동조합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 과정으로 컨설팅이 진행되었다. 기업을 협동조합으로 전환한다는 것은 조직형태 뿐만 아니라 구성원의 의식, 조직의 문화, 경영관행, 조직의 분위기를 협동조합적으로 전환하는 총체적인 과정이라 할 수 있기 때문에 협동조합 연구소의 컨설팅은 ‘협동조합’이라는 새로운 개혁을 조직의 구성원들이 받아들이는 개혁의 확산이라는 관점에서 추진되었다. 자바르떼는 그동안에도 수평적이고 민주적인 공동체 방식으로 운영되어왔기 때문에 조직에 대한 만족도가 매우 높았고, 전환에 대한 기대치는 협동이라는 가치와 이후 비즈니스 모델 혁신에 두게 되었다. 물론 협동조합에 대해 좀 더 잘 이해하고, 각 구성원들이 많은 부분을 깊게 논의하면서 모든 결정은 스스로가 내렸다. 이렇게 4개월의 과정을 거쳐 사회적협동조합으로 창립하게 된 것이다.

 

2) 사회적기업과 사회적협동조합

협동조합의 정의는 ‘공동으로 소유하고 민주적으로 운영되는 사업체를 통하여 공통의 경제적·사회적·문화적 필요와 욕구를 충족시키고자 하는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결성한 자율적인 조직(ICA)’이다. 그리고 협동조합은 자조, 자기책임, 민주주의, 평등, 공정, 그리고 연대의 가치를 기초로 하고 있고, 조합원은 정직, 공개, 사회적 책임, 그리고 타인에 대한 배려라는 윤리적 가치를 신조로 한다. 즉, 누구(주체)의 필요와 욕구인지, 누가 소유할 것인지, 어떤 사업을 통해 해결할 건지, 그리고 어떻게 운영을 할 것인지가 협동조합을 이야기하는 시작이다. 그러니 우선 나의 명확한 필요를 내가 소유하는 사업체를 통해 해결하고 책임지겠다는 의지가 있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내 것을 먼저 내놓고 협동을 통해 사회적 책임을 함께 지는 것이다. 단순히 협동조합의 7원칙만 가지고 협동조합이라고 이야기할 수는 없는 것이고, 그 원칙은 결국 협동조합을 협동의 가치와 철학, 윤리가 조직과 사업에 잘 반영되어 운영하기 위한 원리일 뿐이다.

 

 

<협동조합 운영의 7원칙>

(1) 자발적이고 개방적인 조합원제도 (Voluntary and Open Membership)

(2) 조합원에 의한 민주적 관리(Democratic Member Control)

(3) 조합원의 경제적 참여(Member Economic Participation)

(4) 자율과 독립(Autonomy and Independence)

(5) 교육, 훈련 및 정보제공 (Education, Training and Information)

(6) 협동조합간의 협동(Co-operation Among Co-operatives)

(7) 지역사회에 대한 기여(Concern for Community)

 

위의 협동조합 7원칙은 아마도 문화운동단체에서 활동했던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익숙하고 당연한 이야기들일 것이다. 특히 마지막 ‘지역사회에 대한 기여’는 협동조합이 경영위기를 극복하고 성장하면서 조합원들이 스스로 철학과 가치를 지역으로 확산하고, 협동조합을 통해 발생한 이익과 성과를 나누자는 의미로 90년대 후반에 추가된 것이라 한다. 그러면서 사회적협동조합이라는 유형이 생겨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즉, 협동조합 자체가 다른 경제, 다른 가치로 보다 인간다운 세상을 만들어 가기 위한 것이지만, 좀 더 사회 공공적인 활동을 하는 협동조합이 사회적협동조합이다.

 

<일반협동조합과 사회적협동조합>

 

 

 

협 동 조 합

사 회 적 협 동 조 합

법 인 격

▪ (영리)법인

▪ 비영리법인

설 립

▪ 시도지사 신고

▪ 기획재정부(관계부처)인가

사 업

▪ 업종 및 분야 제한 없음

 -법 제45조 제1항 사업 반드시 포함

*금융 및 보험업 제외

▪ 공익사업 40% 이상 수행

 -지역사회 재생, 주민권익 증진 등

 -취약계층 사회서비스, 일자리 제공

 -국가ㆍ지자체 위탁사업

 -그 밖의 공익증진 사업

 -법 제45조 제1항 사업 포함

법정적립금

▪ 잉여금의 10/100이상

▪ 자기자본의 3배가 될 때 까지

▪ 잉여금의 30/100이상

▪ 자기자본의 3배가 될 때 까지

배 당

▪ 배당 가능(이용실적에 따른 배당)

▪ 배당 금지

청 산

▪ 정관에 따라 잔여재산 처리

▪ 비영리법인ㆍ국고등 귀속

자바르떼는 사회적협동조합으로 전환하고, 2013년 2월 7일 창립 총회를 했다. 일반 협동조합이 조합원들의 공통의 이해를 충족시키는 영리법인이라면, 사회적협동조합은 비영리조직으로 조합원의 이익도 물론 중요하지만, 사회 공적인 활동을 하는 것이 주요한 임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이익을 조합원에게 배당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고, 공공적인 활동을 확대해 가도록 하는 것이다. 자바르떼가 그동안 해왔던 철학이나 사업에는 사회적협동조합이 더 적합하다고 판단했고, 또 이미 사회적기업으로 사회적가치를 실현하는 사업을 주요 사업으로 해왔으니 사회적협동조합으로 결정하게 된 것이다. 그러자 많은 이들이 ‘사회적기업과 사회적협동조합은 무슨 차이가 있는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답변은 간단하다. 사회적기업은 영리법인이던 비영리법인이던 사회적가치 실현을 주요 목적으로 하는 어떤 사업에 대한 자격증 같은 것이다. 사회적협동조합이 되었다고 사회적기업 인증을 반납하거나 사회적기업 자체가 협동조합으로 전환하는 것이 아니다.

그 다음 많이 받는 질문은 ‘사회적협동조합이 되어 무엇이 좋아졌는가’이다. 그 역시 단순하다. 협동조합으로 전환을 통해 개개인의 자발성을 토대로 책임과 권리를 높이고, 기업적 운영방식을 도입하여 지속성을 만들어가자는 것이다. 대표를 맡아 2011년까지 조직을 운영해보니, 사회적기업도 결국 대표가 나머지 직원들을 모두 책임지는 1인 기업의 형태를 벗어나기는 힘들더라는 것이었고, 월급받는 직원을 넘어 협동조합의 진정한 주인이 되는 것이 중요하겠다는 것이었다. 노동자, 생산자, 후원자, 자원봉사자 등의 이해당사자들이 함께 필요한 자금도 모으고, 사업적 고민도 함께 하면서 책임도 공유하자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한가지를 꼽는다면 ‘협동조합간의 협동’이라는 연대의 가치가 자바르떼의 마케팅에 활력을 불어넣어줄 것이란 기대감이다. 그러나 앉아서 기다리거나 우리의 컨텐츠가 뛰어나니 이용하라는 것이 아니라 각 협동조합 단위들의 요구와 철학을 담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또 조합원 스스로가 사업을 만들어가는 주체가 되는 것이다.

 

<조직형태별 비교>

구분

사단법인,

비영리민간단체

협 동 조 합

주식회사

일반

사회적협동조합

근거 법률

민법

협동조합기본법

상법

사업 목적

공 익

조합원 실익증진

이윤 극대화

운영 방식

1인 1표

1인 1표

1주 1표

설립 방식

인가

신고(영리)

인가(비영리)

신고

책임 범위

해당 없음

유한책임

유한책임

규모

주로 소규모

소규모 + 대규모

대규모

성격

인적결합

인적결합

물적결합

사업 예

학교, 병원, 자선단체, 종교단체등

일반경제

활동분야

의료협동조합 등

대기업 집단

삼성전자(주) 등

(사회적기업)

(인증 통해 사회적기업 자격 획득 가능)

사회적협동조합 자바르떼는 올 상반기에 지역 자바르떼도 각각 사회적협동조합으로 전환을 하고, 그 과정에서 연합회를 결성할 계획이다. 그리고 장기적으로는 문화예술사회적협동조합의 전국연합회를 만들어 더 어려운 문화예술단위들이 협동조합을 결성하고 초기 자금을 만들 수 있도록 서로 돕고자 한다. 그래서 먼저 협동조합연구원을 만들었는데, 자바르떼의 전환과 설립 프로세스를 만들어 큰 어려움 없이 협동조합을 설립하는 과정을 도울 것이다. 그리고 이를 기반으로 시민들이 스스로 창조적인 문화활동을 하는 지역별 공동체를 구성하는 것이 목표이다. 

 

3) 문화예술, 보호된 공공시장 조성해야

 협동조합은 조직 형식일 뿐이고, 결국 협동조합은 사업체 운영이 성패를 좌우할 수 밖에 없다고 한다. 그러니 문제는 안정적고 고정적인 사업 모델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 정부와 지자체가 앞다투어 협동조합을 홍보하고 조례를 만드는 등 다양한 정책을 내놓고 있다. 기본법 시행 후 100일만에 600개가 넘는 협동조합이 설립되었다고 한다. 엄청난 속도인데, 이 추세라면 연내에 몇 천개의 협동조합이 만들어질 것이라는 전망이다. 하지만 지역 현장에서 체감하는 건 많이 다르다. 사회적기업의 경우에도 인건비 지원을 포함한 많은 지원이 있긴하지만, 사실 다른 부처나, 기초지자체로 가면 전혀 다르게 변질되는 경우가 많고, 아직도 이해가 부족하다. 물론 협동조합은 지원에 의존하는 것은 아니지만, 정부나 지자체가 사회적경제 영역을 확대하겠다는 것이 구호에 그치거나 개수만 늘리는 것이 아니라면, 사회 각 분야에 걸쳐 환경 조성이나 토양을 육성하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사회적기업의 경우 인증해서 수를 늘리기는 했지만 지원 종료후 자립과 지속을 위한 정책은 매우 부족하다. 공공구매도 결국 몇몇 기업에 국한될 뿐이고, 공간 임대나 운영지원도 대부분 중간 지원조직에게만 돌아가고 있다. 이처럼 현실과는 괴리된 정책이 되지 않기 위해, 좀 더 세분화된 정책과 시간이 필요하다. 특히 협동조합 교육은 삶의 철학과 가치를 바꾸는 교육으로 공통의 내용과 영역별 내용을 구분하여 연구하는 작업이 같이 가야 하고, 이 과정에서 각 영역별 전문 역량을 키우는 일도 매우 시급하게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문화예술분야의 경우 역사적으로나 세계적으로, 국가의 지원과 보호정책없이 존재하기 어려웠던 것을 보면, 문화예술영역을 문화산업구조나 시장으로만 내모는 것은 매우 위험한 발상이다. 대다수 국가들이 지원과 육성정책을 통해 예술가와 예술활동을 육성하는 것은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문화시민, 창의적이고 주체적인 인간을 키우는 일이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이고, 국가 경쟁력 강화나 산업발전에도 근간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 시민 교육을 위해 예술가의 활동도 보장이 되어야 하는데, 둘 다 그렇지 못한 현실이다. 내 아이에게 절대 예술활동을 하라고 권하지 않는 현실은 예술인들의 실상을 반증해 준다. 삶의 질을 높이는 문화 활동, 주체적으로 창조하는 문화활동을 통해 마을 공동체가 만들어 질 것이고, 창조적 문화산업이 발전할 것이라는 생태계 그림 속에서 문화예술분야의 협동조합을 육성하고 안정적이고 지속적인 사업 기반을 조성해야 한다.

이는 문화복지나 문화기본권을 제도화해서 보호된 공공시장을 조성하고, 이들을 사회적경제나 협동경제 영역이 담당할 수 있도록 하는 것으로 시작될 수 있을 것이다. 복지바우처에 문화프로그램을 개발하여 문화예술사회적협동조합이 그 책임과 역할을 담당하도록 하고, 또 문화바우처도 맞춤형 문화복지의 개념으로 재구성하고, 국민기초생활보장법 상의 기본급여에 문화급여를 추가하는 등 다양한 제도적 개혁이 수반되어져야 할 것이다. 꽃다지에 있던 10년동안 100명 가까운 예술가들이 들어왔다가 생활고로 활동을 포기했고, 20여년 동안 주변의 많은 문화예술인들이 안타깝게도 그렇게 사라져 갔다. 우리는 협동조합을 통해 이런 문제를 당사자가 되어 극복해 가려고 한다. 그러니 정부나 지자체도 문제의식을 갖고 환경 조성과 인프라 구축에 함께 고민해 주었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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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바르떼 사회적협동조합 설립기 1)

이글은 부산민예총에서 발행하는 격월간지 [두달에 한 번 함께가는 예술인]의 요청으로 

2013년 3월부터 4회에 걸쳐 연재한 글입니다. 

자바르떼가 왜 사회적협동조합으로 전환했는지, 그리고 어떻게 좌충우돌 운영하고 있는지를 

고민을 담아 정리해봤습니다. 

 

<글 싣는 순서>

1. 문화예술, 협동조합으로 길을 모색해 보다

2. 문화예술의 공공성 -사회적기업과 사회적협동조합

3. 문화예술협동조합 해외사례

4. 협동조합 전환, 그 이후 - 풀어야 할 과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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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 협동조합으로 길을 모색해 보다.

 

1. 들어가며

90년대 초반, 당시 소비에트 해체와 동구의 몰락(?) 이후 다양한 사회이론들이 한국사회에 떠돌아다녔고, 그 언저리에서 집적거리다가 우연히 접한 몬드라곤의 이야기는 지금 기억에도 가슴을 설레게 했던 사례였다. 출처도 기억나지 않고, 내용도 확실하진 않지만, 노동자 스스로가 그 해의 생산량을 결정하고 함께 일해서 발생한 수익을 나누어 갖는다는 이야기였는데, 노동해방이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인지, ‘소외되지 않는 노동’인지, 심정적으로 여전히 명확하게 답을 내지 못했던 나는, 그 때 잠시 한국사회에도 그런 모델이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당시엔 노동자와 학생들이 연이어 죽음을 맞던 열사 정국이 계속되던 시절이라 그냥 그건 먼 나라 이야기일 뿐이었다.

90년대 중반 즈음, ‘문예에서 문화로’라는 노동문화운동진영의 관점변화에 발맞춰 일상과 가치까지 변화시키는 문화운동이 필요하다는 생각으로, 새로운 대중접점을 창출하고자 하는 다양한 시도와 문화운동 1만 명 수용자 조직을 목표로 후원회 조직사업을 했었다. 또 음반 사전 주문예약제 등의 시도들을 보면서도 이를 운동의 주요한 흐름으로 생각하지 못했었다. 생협활동을 하는 선배들을 노동자계급지향의 부문운동이나 지역운동이 아닌 개량적인 활동으로 치부해 버리곤 했었다.

그런데 2013년 초 지금 문화예술협동조합을 준비하고 있다. 그 동안 어떤 고민이 나를 이 자리로 흘러오게 했는지 돌아보게 된다. 1989년 초, 사회에 나와 노동자문화운동을 시작한 지 25년. 그것도 예울림, 꽃다지로 10년, 노문센터로 5년, 그리고 자바르떼에서 10년이라는 간단한 이력밖에 없는 나의 활동을 통해 무엇을 변화시키려고 했고, 또 무엇을 얻고자 했는지 말이다.

 

2. 자바르떼는 왜 문화예술생산자협동조합을 목표로 해왔나?

2004년 문화예술의 공공적인 일자리 만들기 사업으로 소외계층에게 찾아가는 문화활동을 제안받고, 반갑기보다는 여러 가지 고민이 들었다. ‘이것이 과연 우리 운동에 도움이 되는 활동 기회가 될 수 있을까? 삼성의 기금으로 진행될 예정인 이 사업이 우리의 의지대로 잘 세팅되어 추진될 수 있을까?’였다. 그리고 몇몇 선후배들과 고민을 나누면서 혼자라면 걱정이 되지만 내가 흔들릴 때 굳건히 잡아줄 몇몇 사람들이 함께한다면 원하는 대로 성과를 내고, 또 정 안되면 놓아버려도 되겠다 싶었다. 하지만 이는 참 안이한 생각이었다는 걸 곧 알게 되는 사건들이 생겨났다. 노동문화운동 단위에서는 삼성의 기금을 받아 저임금의 비정규직을 양산하는 사회적일자리 사업에 대한 거부감이 무척 컸고, 이는 결국 참여한 사람들까지 싸잡아 변절자 혹은 가해자로 몰아갔다. 우리 스스로의 목표와 지역에 성과를 남길 수 있는 구조로 사업을 만들어 가면 되지 않겠느냐는 이야기는 해보지도 못했다. 20년 가까운 동지적 관계에서의 소통은 더는 불가능했고, 결국은 서로 등을 지게 되었다.

그렇게 시작한 <신나는 문화학교>는 사실 짧은 기간만 하고 그만 둘 수 있었던 사업이었다. 그런데 벌써 10년을 계속 고민하며 가고 있다. 하면 할수록 점점 더 많은 책임과 과제들이 보였고, 이를 통해 꿈꾸던 것들을 어찌 되었건 일부라도 실현하고 싶었다. 그게 문화예술생산자 협동조합이었다. 월급 받는 예술가, 문화활동가들이 안정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토대를 구축하고, 예술가들이 자기 예술노동의 주체가 되어 스스로 조직되고 운영하는 책임 있는 활동조직, 그리고 지역에서 문화를 통해 작은 공동체를 만드는 것. 이는 나 혼자가 아니라 함께하는 이들이 같이 꾸는 꿈이었다. 사회적 기업으로 인증을 받고, 3년간 인건비 일부를 지원받은 후, 주변의 많은 사회적 기업들이 지원 이후 자립에 실패하거나 중단되는 일이 많은 가운데에서도 살아남아 지속해서 활동할 수 있다는 것을 우리 자신들에게 증명하고, 비로소 사회적 협동조합으로 전환하게 된 것이다.

또 하나의 목표는 새로운 문화주체를 형성하는 것이었다. 8~90년대의 노동자문화운동의 주체는 민주노조의 조합원과 진보적인 학생, 지식인들이었다. 하지만 노동조합운동 속에서 노동자문화는 문선(문화선동)만이 남았고, 투쟁 과정에서도 스스로 만드는 문화활동은 거의 사라졌다. 전국적으로 활발했던 노동자문화패들도 대부분 해체되었고, 주체적으로 자신의 문화를 누리고, 창조하는 집단은 얼마나 남아있는지 모르겠다. 지역에서 새로운 노동문화운동의 주체를 형성하는 것은 노조를 통하지 않고 지역의 노동자 자녀, 비정규직, 이주민들을 시민, 주민이라는 이름으로 만나 스스로 자기 삶의 주체로 서게 하는 일이다. 이러한 대안적 가치로 살아가는 것을 시도해 볼 만하다고 생각했다. 자바르떼가 그동안 해왔던 문화기본권과 문화복지 개념은 사람들이 단순한 문화소비자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주체적인 문화활동을 통해 자기 삶의 주인이 되고, 스스로 조직화하고, 조직화되는 것이었다. 이것은 자바르떼 문화예술교육의 이념이기도 하다.

그러나 협동조합을 준비하는 과정이 쉽지는 않았다. 문화예술조직은 그 특성상 일반기업 등에 비해 상대적으로 수평적이고 민주적으로 운영되었고, 자본을 중심으로 운영하지 않았던 터라 굳이 협동조합으로 전환할 확실한 동기를 찾기가 어려웠다. 다만 설문과 면담을 통해 조사한 바로는, 협동조합 전환에 동의하는 이유가 협동조합이 긍정적 이미지를 준다는 것과 현재의 사회적 기업보다는 협동조합이 협동의 가치를 추구하는 사회적 운동으로서 더 어울린다는 것, 그리고 협동조합 전환 컨설팅 과정에서 사업 모델의 혁신과 새로운 사업관계가 형성되리라는 기대 때문이었다. 다시 말해, 협동조합 설립은 예술인들이 운영하는 공동체 조직을 통해 문화복지를 실현하는 공익적 활동을 하고, 결과적으로 문화예술인들의 안정적인 일자리를 만들 토대를 마련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기존 문화예술단체에서는 하지 못했던 안정적이고 지속적인 활동기반을 마련하는 것이 협동조합이 만들어지면 해결될까? 도대체 협동조합은 무엇일까?

 

3. 협동조합 기본법의 배경과 의미, 그리고 문제의식

2011년 말 협동조합 기본법이 제정되고, 2012년 12월 시행되는 사이에 놀라울 만큼 빠른 속도로 협동조합에 관심이 커지고 있다. 과거 50년간 한국사회는 산업별로 농협법, 수협법, 소비자생협법 등 8개의 특별법에 근거해서만 협동조합을 설립할 수 있었고, 지역농협은 1천 명, 소비자생협의 경우 300명이 모여야 설립할 수 있었다. 이러한 기준들은 그동안 소규모 협동조합의 설립을 막는 근본적인 걸림돌이었다. 그러나 협동조합기본법이 제정되면서 최소 5명만 모이면 자유롭게 협동조합을 설립하여 신고를 거쳐 법적 자격을 갖출 수 있게 되었고, 또 모든 산업부문에서 설립이 가능해졌다. 또한 이해당사자의 요구만 충족시키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목적 실현을 우선으로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이 조합원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사회적 협동조합을 포함했다는 점에서 기본법 제정의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또한, 일반 주식회사는 ‘1주 1표’의 의결권을 가지지만, 협동조합은 출자금이 얼마든 모든 조합원이 ‘1인 1표’의 의결권을 갖는 조직이면서 배당금도 일정하게 제한을 두어 이윤창출만을 목표로 삼지 않는다. 물론 협동조합기본법제정연대회의 때부터 계속 요구되었던 공제사업을 배제한 점과 노동자(직원) 협동조합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점, 그리고 정치활동금지 등은 이후 개선해야겠지만 협동조합은 그야말로 자본 중심이 아닌 사람 중심의 ‘협동’과 ‘자조’의 조직이다.

정부와 시민사회는 협동조합이 ‘자본주의의 약점을 보완하고 일자리 창출은 물론 사회서비스를 제공할 통로가 될 수 있는 대안적인 경제체제’로서, 협동조합기본법이 시행되면 자활단체, 돌봄 노동, 대안기업, 청소, 재활용, 공동육아, 주택, 구매, 생산 등 다양한 형태의 소액, 소규모 창업이 활성화되어, 취약계층의 경제활동을 지원하고 일자리를 만들어내어 서민․지역경제를 활성화하고 양극화를 없애는데 이바지할 것으로 보고 있다고 한다. 협동조합기본법이 시행되던 지난 12월 1일부터 약 한 달간 접수된 협동조합 신고ㆍ인가신청은 총 128건이었고, 하루 7건 정도 접수되었다고 한다. 이 중 일반협동조합은 115건이고 사회적협동조합이 8건인데, 이런 추세라면 5년 내에 8천 개~1만 개의 협동조합이 생겨날 것이라고 보고 있다고 한다.

과연 그럴까? 협동조합이 이런 의미를 담고 있다면 시민사회 영역이야 당연히 반기고 운동적 흐름을 만들어 가야 하겠지만, 정부부처와 지자체들도 앞장서서 협동조합 교육, 컨설팅과 설립 지원 등을 이야기하며 대대적으로 홍보하고 있는 것은 왠지 미심쩍은 구석이 있다. 2007년 사회적기업육성법이 시행된 이후 작년 11월까지 노동부 인증 사회적기업은 723개에 달했고, 지자체별, 정부부처별 예비사회적기업도 무척 많아졌다. 이 역시 5년 내 2천 개의 사회적기업을 육성하겠다는 계획 아래 진행된 결과이다. 이렇게 얼마 전까지 사회적기업이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도깨비 방망이처럼 이야기되더니, 이제는 또 협동조합이다. 사회적기업은 인건비지원 때문에 시작한 곳이 많아 지원 종료 후 제대로 자립한 기업이 없으니 그 실패를 인정하고, 대안으로 내놓은 것이 협동조합인 걸까? 아니면 사회적기업을 고민하다 너무 어려워 포기한 사람들이 협동조합은 좀 쉽게 할 수 있을 테니 적극 고민해 보라고 할 만한 일인 걸까? 정말 시장과 국가의 실패를 인정하고 새로운 방법을 모색하며 나온 궁극적인 대안인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협동조합은 사회적기업과는 달리 설립 지원 외에 다른 지원은 없어서 자주성을 상실하거나 지원이 끝난 이후를 염려할 일은 별로 없어 보인다. 또 공동체 정신을 복원하고 관계를 재설정하여, 더욱 인간다운 세상을 만들어가는 작은 시도들이 모이고 전국적으로 퍼져 나가는 것은 모두에게 좋은 일이니 굳이 시비를 걸 이유도 없다. 그럼에도 주체들이 고민할 수 있도록 담론을 형성하고 토양을 형성해 가는 것이 아니라 몇 개의 협동조합을 만들겠다는 실적 위주의 관 주도 행보는 여전히 불편하기만 하고, 협동조합의 정신과 원칙에도 맞지 않는다. 자발적이고 자주적인 결사체인 협동조합은 누가 하라고 해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스스로 필요하다고 느낄 때, 그 필요를 공감하는 사람들이 함께 의지를 모아 만들어가야 한다. 또한, 협동조합 역시 단체와는 다른 사업체이니 이를 위한 준비도 필요하다. 그래서 문화예술인들의 진지한 고민과 대안이 필요하다. 협동조합은 해결책이 아니라 해결책을 찾아가는 방식 중 하나이고, 또 조직 형식일 뿐이다.

 

4. 다양한 모색, 길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문화예술 진영에서는 이를 어떻게 이해하는 것이 좋을까? 이전에는 사단법인이나 비영리민간단체의 경우에 단체로서 인정을 받았는데, 이들은 진입장벽이 높아 설립이 어려웠던 반면 협동조합은 5명만 모이면 법인격을 부여받을 수 있다는 점에서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런 후에 사회적기업으로 인증을 받거나 사회적협동조합을 설립하면 사회적기업에 준하는 자격을 얻게 된다. 또한, 협동조합은 모두 중소기업으로 인정되어 굳이 사회적기업 지원 정책이 아니더라도 중소기업 육성 정책에 준하는 다양한 혜택을 받을 수 있다. 물론 이 역시 대부분 경쟁입찰 방식이긴 하지만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협동조합으로 가자는 것이 아니다. 문화예술인들이 한국사회에서 자신의 활동을 포기하지 않고 지속할 수 있는 방법의 하나가 협동조합이라는 것이다. 어떻게 존재할까? 어떻게 활동을 지속할까? 스스로 자기 문제를 해결하려고 적극 노력해야 할 때이고, 혼자서는 해결하기 어려우니 모여서 문제를 해결해 가자는 것이다. 협동조합에 관해 고민하고, 이를 통해 대안을 찾아보는 계기를 마련하자는 것이 협동조합에 관해 이야기하는 이유이다.

최근 홍대앞자립음악생산조합과 장르별 예술인들의 협동조합 준비 움직임들이 늘고 있다. 1년에 6만이 넘는 예술가 지망생을 쏟아내는 한국사회에서 이들 모두가 어떤 장르, 영역의 예술가, 문화활동가로 살아가기는 결코 쉽지 않다. 그럼에도 굳이 전업 문화예술인으로 자기 규정을 한다면 1등만 인정받는 이 사회에서 목마른 자들이 우물을 파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다. 그리고 다른 한편에서는 예술인들이 제 권리를 찾고자 모인 문화예술소셜유니온(준)의 경우를 보면, 이제 문화예술인의 활동이 투쟁 지원이나 연대활동을 넘어 자신이 주체가 되어 스스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의지를 표현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우리 스스로 모든 걸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국가는 복지제도나 문화기본권 등의 정책을 통해 더욱 많은 사람이 행복한 삶을 창조적으로 꾸려갈 수 있도록 해야 하고, 우리는 그를 위해 함께 싸워야 한다. 그리고 국가와 자본을 상대로 싸우는 것 외에도 제도를 활용하여 스스로 활동할 수도 있다. 지역에서 공동체를 만들고 함께 서로 지지해주는 것도, 일상을 나누며 소소한 문화활동을 하는 것도 중요하고, 이를 위해 관계를 재설정하는 것도 필요하다. 또 우리의 힘도 키워야 하고, 연대도 탄탄히 해야 할 것이다.

개별 창작 작업에 익숙한 예술인에게는 사회적기업만큼이나 협동조합은 사례도 별로 없고 낯선 영역이니 어디서부터 시작하고, 어디를 따라 배워가야 할지 막막한 것도 사실이지만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일은 얼마든지 많이 있다. 문화적, 예술적 상상력을 발휘해 다양한 실험을 해보는 것은 우리가 가장 잘하는 것이고, 또 늘 필요한 일이다. 협동의 방식으로 공동의 문제를 해결해가고, 우리의 활동을 사회적인 노동 즉, 공공적 가치로 인정받을 수 있다면 해볼 만한 일이다. 전과 달리 문화예술인, 예술조직들도 존재방식과 활동방식, 그리고 이제 자신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는 주체가 되고자 하는 노력들이 모여질 수 있길 기대한다. 그 과정에 문화예술인들이 지속해서 함께 살아가기 위한 고민과 상상력의 결과로 협동조합이 선택되면 좋겠다. 또 한국사회에서 어떤 활동으로 어떻게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갈 것인지 방향을 모색하는데 도움이 되고, 또 많은 다양한 사례가 만들어지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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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땅에 울리는 노동가요~

일본의 민중가요 노래패 [노래노카이] 음반발매를 축하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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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달여쯤 전 사무실 책상위에 우편물이 한 놓여있었다. 딱 봐도 일본에서 온 음반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작년부터 계속 준비해서 편곡하고, 연습하고, 녹음한 결실이었다. 여러모로 정말 우여곡절이 많았다는 걸 잘 알고 있기에 음반을 받은 나 역시도 너무 가슴이 벅찼다.

 

처음 이들과 인연이 된건 96년 5월이었다. (나는 그 때 가진 못했지만) 꽃다지가 히비야 메이데이 행사에 초청되고, 일본에서는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5.1 합창단이 꾸려졌단다. 노동자들과 활동가들이 모여 꽃다지의 대표곡인 투쟁가를 한국발음으로 연습해서 함께 불렀다고 한다. 그 후로 이들은 종종 모여 연습도 하고, 또 일본의 노동자 집회에서도 가끔 노래를 부르고 꽃다지 음반을 보급하기도 했다. 꽃다지 일본 공연 때 이들은 <가자, 노동해방>을 동선까지 완벽하게 구사해 놀라움을 사기도 했다.

그러다가 멤버들도 줄어들고, 모임도 잘 되지 않으면서, 꽃다지 노래를 한국말로만 부르는 것의 한계를 느끼게 된 것일까? 정식으로 노래소모임을 구성하고 일본어로 번역해서도 부르기를 시도했다. 꽃다지 가수들을 초청해 틈틈이 강습도 받았다. 꽃다지 노래강사 출신인 박미영도 일본에서 몇 개월 동안 노래모임을 지도했다. 일본에는 노동자 노래패나 전문단체가 없기 때문에 이들은 사명감과 자부심으로 정말 열심히 활동을 했다.

 

2009년 가을 동경에 갔을 때 이들은 음반을 만들고 싶다고 했다. 노래모임이라면 누구나 소망하는 작업이기도 했고, 또 일본의 현실에서 공연만으로는 어렵다고 느꼈을 것이다. 이들이 너무나 좋아하는 꽃다지 음반도 많이 보급을 하지만 그래도 역시 일본어로 노래의 의미와 정서를 전달하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참으로 많은 난관이 있었다. 전문노래집단도 아니고 노동자와 활동가들로 구성된 노래모임이 음반을 낸다는 건 넘어야 할 산이 무척 많은 작업이고, 또 한국의 노동가요를 일본의 정서로 언어를 바꿔 그 맛을 내기란 쉽지 않아 보였다.

 

그런데, 이들은 해냈다. 해내고야 말았다. 대단한 의지와 노력의 결실이 아닐 수 없다. 또 마침 꽃다지 기타주자 출신으로 올 초까지 일본에서 음악을 하던 이승완(찬욱이라 불려지는)이 편곡과 녹음을 맡아주어 정말 다행이 아닐 수 없었다. 음반을 들으며 먼저 놀라운 건 노래실력이었다. 물론 개개인들은 다 노래를 잘한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예상 이상으로 호흡도 잘맞고 화음도 잘 어우러졌다. 그 바쁜 분들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 연습과, 또 서로의 소리에 대한 배려를 했는지 듣다보면 한사람 한사람의 얼굴이 떠올라 나도모르게 눈물이 난다. 번역된 노래들은 일본어 가사로도 전혀 어색하지 않게 들릴 만큼 참으로 매끄럽다. (물론 일본어를 잘 모르기 때문에 표현은 잘 모르지만, 틀림없이 느낌이 잘 옮겨졌을 것이라 는 확신이 든다)

장중한 피아노 반주로 느리고 유장하게 시작하는 <임을 위한 행진곡>(백기완 시, 김종률 곡), 그리고 경쾌하게 울리는 <바위처럼>(유인혁 글,곡), 최근 미군기지 반대투쟁 현장에서 많이 불리는 <평화가 무엇이냐>(문정현 글, 조약골 곡), 멋진 남성의 목소리로 부르는 <비수>(지민주 글,곡), 다시금 신나고 경쾌한 <얼굴 찌푸리지 말아요>(최창현 곡)과 너무나 익숙하고 힘찬 <철의 노동자>(안치환 글,곡).

그리고 89년 수미다 일본 원정투쟁 때 일본 노동자들이 연대하며 함께 투쟁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노래 <海を越えて>(우미오 코에떼-바다를 넘어서), 꽃다지의 <반격>과 <노래의 꿈>(정윤경 글,곡), 김명준의 다큐멘터리 삽입곡이었던 <하나>(One)(윤영란 곡) ,마지막으로 노래노카이 멤버들이 함께 만든 창작곡 <うたOh! (노래여!)까지. 노래하는 목소리에 사람들의 얼굴이 하나씩 스쳐지나가고, 또 그들과 함께 했던 시간들이 흘러간다.

다 듣고 나니 90년대 중후반쯤에 만들어진 공연 한 편을 본 것 같다. 90년대 중반이라고 해서 구시대적이라던가 투쟁일변도라던가 하는 그런 이야기는 아니다. 그 당시엔 공연들이 다양한 현장의 투쟁을 담아내고, 또 자기를 반추하게 하는 내용들이 적절히 어우러져 들썩거리게 하는 신명과 감동이 있었는데, 바로 그 부분에서 닮아 있다는 느낌이다. 그리고 90년대나 지금이나 노동자, 민중들의 삶에 뭐 달라진 것이 있을까? 또 그 때만 해도 함께 만들어갈 세상에 대한 꿈과 희망이 있지 않았던가 말이다.

다시금 우리들의 지금 이 시점을 돌아보고, 또 같이 만들어갈 시간들을 상상하는 즐겁고 가슴 벅찬 시간을 갖게 해준 것에 감사한다. 또 어려운 상황에서도 너무나 정성스럽게 잘 만든 음반이 세상에 나오게 된것을 진심으로 축하한다.

 

모두들 정말 고생 많이 하셨습니다. 지나온 16년의 시간보다 더 긴 시간, 더 끈끈한 사랑과 연대로 함께 할 것을 새겨봅니다. 진심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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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익~~~ 뉘우스!!!! 화가 최병수 결혼하다!!!

어제, 그러니까 5월 15일 집에서 강의안을 짜고 있는데

병수형한테서 전화가 왔다. 너무 오랜만에 듣는 목소리가 반가웠다...

병수형은 화났을 때 빼고는 아주 조근조근 이야기를 하신다.

잘 지내냐는 안부가 오고가고 느닷없이

'은진아, 나 어제 결혼했어' 하신다.

헐~~!! '결혼한다' 가 아니구 '결혼했다'니요오오오오...

뭐냐고요오오오오~~

 

결혼식을 여수에서 했고, 또 예전에 한바탕 소란을 떨어서 또 연락하기가 미안했단다.

내년엔 전시를 하는데, 그 때와서 사람들한테 인사를 하겠다고.

 

그래도 그거랑 그거랑은 다른거잖아요오~~

이런 투정을 하면서도 마음이 뿌듯하다.

결혼이야 할 수도 있고 뭐 안할 수도 있지만

형이 활동하는데 옆에서 함께할 수 있는 동반자가 있음 좋겠다는 생각을

아는 후배들은 종종 했었으리라.

 

몇해전 몸이 안좋아 주변 사람들이 많이 걱정했고

그간 요양을 하면서도 꾸준히 작업을 하신걸로 안다.

활동력, 추진력 하면 알아주는 양반이라

쉽없이 창작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는 여기저기서 전해들었다.

 

안그래도 지난 5월 2~4일 제주 워크숍을 간 길에 강정마을에 들렀을 때

누군가 병수형이 강정마을에 있다 카드라~~ 해서

가면 병수형을 볼 수 있을까 살짝 기대를 했지만

그 이야긴 오보였을 뿐이고, 형의 작품만 세워져 있었다.

안그래도 병수형은 잘 살고 계신가? 계속 여수에 계신가?

하는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형~~ 무지무지하게 축하하고요~~~

건강 잘 챙기시고, 알콩달콩 행복하세요~~~

그리고 형의 좋은 작품 직접 보게될 날 기대할께요~~

약속대로 제가 이렇게 형의 결혼식을 여기저기 소문내겠습니다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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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디앙 연재 24 - 겨울 그리고 사랑노래

 

민중가요의 캐럴 '겨울 그리고 사랑노래'
[노래이야기 24] 연말의 감성 채워줘…"새로운 시작 앞두고 따스한 겨울"
 
 
 

매우 구태의연한 표현이지만, 이제 2010년이 며칠밖에 남지 않았네요. 날짜 생각하지 않고 달려오다가도 꼭 이렇게 며칠 남겨 두지 않고, 한 해를 돌아보게 되는 건 참 어쩔 수 없나봅니다. 이 코너에서 5.18을 제외하고는 굳이 계절이나 시기를 따지지 않고 '노래 이야기'를 써왔는데, 그래도 연말이라는 이 분위기는 마음을 싱숭생숭하게도 하고, 여러 가지 생각과 사람들도 떠오르고, 아쉬움도 많고 그러네요.

 

음악의 힘과 위로

하지만 그러면서도 다가오는 새해에 대한 설렘도 있는 때죠. 연말이 되면 많은 평가와 반성을 하게 되는데, 빼먹지 말아야 할 것이 또 우리들이 잘한 성과를 칭찬해 주는 겁니다. 매순간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잘한 부분들을 찾아 다독이고 어루만져 주는 거지요. 여전히 변치 않고 지켜가는 신념을, 사람에 대한 사랑을, 조금은 치열한 나의 실천 노력에 대해 말입니다.

이번에 소개할 노래는 <겨울 그리고 사랑노래>입니다. 종교와 상관없이 연말 분위기를 흠뻑 느끼게 하는 환경 중 하나가 크리스마스와 캐럴인데요, 아무리 시국이 어지럽고 마음이 무겁더라도 좋은 음악이 우리에겐 위로도 주고 힘도 주고, 또 감성적으로 이어주기도 하지요.

<겨울 그리고 사랑노래>는 민중가요 캐럴 같은 노래입니다. 제목과 가사가 주는 이미지 때문에 겨울에만 불리는 노래이지요. 힘이 들 때일수록 주변의 사람들을 챙기고 따뜻한 인사 나누시길 바라는 마음에서 올해의 마지막 곡으로 선곡해 보았습니다.

 

   
  ▲꽃다지 싱글 음반. 

이 곡은 노동극을 주로 창작, 공연하던 극단 현장의 16회 정기공연 [겨울 그리고 사랑노래]를 위해 93년에 조민하가 창작한 노래입니다.

그 후 95년 겨울 ‘꽃다지’ 콘서트에서 다시 편곡되어 불렸고, 또 97년 겨울, ‘꽃다지’ 싱글음반 [세상을 바꾸자]에 실리면서 보다 많은 대중들에게 알려졌습니다.

이렇게 노래는 민중가요로 탄생하여 노동극이나 연극에 삽입된 곡도 있지만, 노동극이나 마당극 속에서 탄생하여 독자적인 민중가요로 대중성을 획득한 노래도 아주 많이 있습니다.

 

노래의 인생유전

<임을 위한 행진곡>, <그날이 오면>, <잘가오 그대> 등등 80년대 민중가요는 그런 노래가 많지요. 이 노래 말고도 극단 현장 공연을 위해 창작되어 ‘꽃다지’에서 계속 불리며 사랑을 받은 노래로는 <고귀한 생명의 손길로>가 있습니다. 이 노래는 91년 병원노동자들의 이야기를 다룬 [지금 수술중]이라는 정기공연에 삽입되었던 곡인데 후에 꽃다지 음반에 실리면서 아주 큰 인기를 얻은 곡이지요.

그러고 보면 극단 현장과의 인연은 꽤 깊었던 것 같습니다. ‘예울림’ 시절에는 극단 현장의 창작극인 [멋있는 동지]를 노래극으로 각색해서 90년에 합동공연을 한 바 있고요. 거기서 저는 아주 재수 없는 사무직 여성 역을 맡아 곤혹을 치렀드랬습니다. 보기엔 차고 까칠해 보이는 인상이라 딱 어울린다고 연출자가 배역을 주었는데, 웃기만 하면 바보 같아진다고 웃지 말라고 해서 계속 야단을 맞았던 기억이 납니다.

또 연극을 처음해보는 ‘예울림’ 가수들의 엉성한 폼과 연기를 고쳐주느라 현장 선배들은 고생을 했고, 또 우리는 선천적 음치가 틀림없다고 사료되는 몇몇 배우들을 붙잡고 어떻게 소리라도 내게 하느라 안간힘을 썼답니다. 그리고 94년 초에는 100회 이상의 순회공연 기록을 세운 노동극 [노동의 새벽]을 노래극으로 재구성하여 문예회관 대극장에 올렸는데, 역시 이때도 같이 했습니다.

저는 아쉽게도 그 즈음에 결혼식을 하느라 공연을 보지도 못했고, 도움도 주지 못했지만, 꽃다지 연주자 모두와 조민하 선배, 그리고 몇몇 가수들이 출연을 했습니다. 그 뿐 아니라 89년 겨울부터 몇 해간 노래판굿 꽃다지도 함께 만들고, 전국 순회도 하고 했습니다. 참 오랜 기간 많은 활동을 같이 하며 아주 친밀한 관계를 만들었지요. 하긴, 그렇게 따지면 민요연구회도 그랬고, 놀이패 ‘한두레’도 그랬고, ‘노동미술위원회’도 그랬고, ‘터울림’도 그랬던 시절이었네요.

매일 거리에서, 파업장에서, 노동자 집회에서 함께 해오면서 다양한 형식으로 작품도 같이하고, 연대도 해왔으니까요. 그 때 함께 했던 배우들 중에는 지금 꽤 유명한 영화배우가 되어 있는 사람도 많아 간혹 TV나 드라마를 보면서 옛 생각에 젖곤 한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한해를 돌아보며 부르게 되는 이 노래는 괴롭고 힘들 때는 눈물을 흘리게도 하고, 서로를 다지기도 하고, 또 마음이 따뜻할 때는 참으로 사람들의 소중함을 느끼게 해줍니다. 노래를 들으시면서 손 내밀면 닿은 듯한 곳에서 묵묵히 나를, 우리를 지켜보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생각했으면 좋겠고요, 또 나 역시 누군가에게 그런 자리에서 지켜보며 힘이 되어 주겠다는 다짐을 해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저로서도 여러분께 보내는 송년인사인 셈인데요, 그동안 보내주신 관심에 감사드리고, 여러분도 제게는 그런 소중한 분들임을 잊지 않겠습니다. 따뜻한 연말 보내시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겨울 그리고 사랑노래
                                                                                   조민하 글, 곡

 

빛바랜 사진 위로 흘러간 세월 그 세월 속에 변함없는 삶의 모습들
가던 길 멈추고 뒤돌아보면 어느새 웃음이 애달파
한 겨울 밀짚모자 꼬마 눈사람 그렇게 우리 사랑을 키워간다면
창 밖에 떨고 있는 겨울나무도 어느새 봄날을 맞으리
벗이여 정말 오랜만에 우리 마주 잡은 두 손 가득히
이 세상 끝까지 변함없는 마음을 변함없는 우리 사랑을
아직은 멀고 먼 길이라지만 또 지금보다 결코 쉽진 않다 하지만
새로운 시작을 눈앞에 두고 벗이여 이 겨울을 따스히

 

* 음원출처 : 꽃다지 싱글음반 [세상을 바꾸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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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디앙 연재 23 - 공장

 

매일 도망치고, 매일 돌아온다, <공장>
[노래이야기 23] IMF 경제위기 시절, 예술인들 거리로 나서다
 
 
 

지난 회에 96~97총파업 이야기를 했었지요? 그때를 기억하시는 분들이 많이 계실는지 모르겠는데, 그야말로 87년 투쟁이 후 10년 만에 전국적 총파업을 맞게 된 때입니다. 노동법과 안기부법 날치기 통과에 분노한 노동자들은 전국적 총파업으로 일어섰고, 지역별, 단위 기업별로 파업을 하면서 조직적으로 결합했습니다.

 

IMF 경제위기와 노동문화단체

총파업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비판이 있긴 했지만, 이 총파업을 계기로 민주노총은 사회개혁세력으로, 시민사회의 중요한 조직으로 부각되었습니다. 이 총파업이 끝난 후 97년 봄부터 여름까지 노동문화단체 대표자회의를 중심으로 전국을 돌며 총파업 과정에서 드러난 문예성과를 모아내는 작업도 이루어졌지요. 저도 광주와 전주 등 지역을 순회하며 당시 제작된 선전물과 사진, 다양한 프로그램 자료 등 노동자들의 문예적 성과들을 수집했습니다.

그리고 97년 대통령 선거 때 노동자 후보로 국민승리 21의 권영길 대표가 출마를 했었고, 98년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자마자 한국사회는 엄청난 경제 위기를 맞이합니다. 건설사들이 넘어가고, 자동차 공장도 경제 위기에 봉착했습니다. 자본의 중복-과잉투자, 부실경영이 빚어낸 엄청난 경제 위기는 IMF 구제금융을 불러왔고, 이 모든 짐은 노동자 민중들에게 고스란히 전가되었습니다.

은행권 노동자들을 시작으로 줄줄이 희망퇴직과 정리해고 등 구조조정의 칼날을 맞고 직장을 잃은 채 거리로 내쫒깁니다. 언론에서는 연일 ‘깨져버린 행복, 집나온 가장, 비관자살’ 등등의 파괴된 삶을 보도했습니다. 국가차원의 대책위가 꾸려지고 국민들은 너도나도 앞 다투어 금을 모았습니다. 그리고 공공근로를 통해 일자리를 만들어 실업자를 구제하겠다고 했지만 경제위기를 어떻게 극복할지 답은 잘 보이지 않았습니다.

<꽃다지>는 그 해 3월부터 거리에 나가 공연을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당시 “예술은 위기를 남들보다 먼저 감지해 이를 공감하게 하고, 또 반보 앞서 나가 삶의 희망을 노래해야 한다”는 말을 했던 것 같습니다. 대학로에서, 서울역에서 희망을 잃은 이들을 위로하며, 같이 힘을 내자고 말입니다.

그리고 전국적으로 노동문화단체를 비롯한 예술인들도 거리로 나왔습니다. 이 과정에서 많은 작품들이 발표되었고, 노래도 많이 창작되었습니다. 노동자문화는 늘 위기의 시대, 투쟁을 통해 더 많은 창작물이 나오고 또 대중성을 갖게 되는 것 같습니다. 거리공연들이 지속되며 성과들이 쌓이자, 99년에는 몇 년 만에 '노래판굿 꽃다지'가 제작되어 공연되기도 했습니다.

 

   
  ▲연영석 공연 모습. 

 

늦깎이 신인가수 연영석

이런 활동 중 돋보인 사람이 바로 민중가요계의 늦깎이 신인가수 연영석이었습니다. 연영석은 98년 6월에 1집 테이프 '돼지다이어트'를 발매하여 많은 이의 관심의 대상이 되었지요. 가수로 무대에 서는 것을 어색해하고, 어눌한 말투와 무대 매너가 그를 매력적이고 진솔하게 보였던 것 같습니다. 활동 초반, 어디 가서 공연비라도 받으면 미안해하며 음반을 잔뜩 기증하고 오기도 해 사람들에게 걱정 어린 소리를 듣기로 했던 그였습니다.

연영석의 노래는 곡은 물론이지만 가사도 탁월했습니다. 시대 정서를 잘 표현하면서도 본질적인 부분을 직설적으로, 때론 비유적으로 기가 막히게 잘 표현했습니다. <돼지 다이어트>, <칼국수와 바카스>, <나는 부품>은 그야말로 98년 IMF 구제금융 상황을 너무나 잘 표현한 곡들입니다.

하지만 연영석의 노래는 그 시절 노동자대중들에게 쉽게 다가가지는 못했습니다. 기존의 노동가요들과 비교해 조금은 낯선 질감이었던 것이지요. 오히려 활동가들에게 인기를 먼저 얻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노동가요를 창작하고 보급하던 전문 집단에게는 아주 신선한 충격이었고, 또 즐겨 불린 노래였습니다. 특히 <엄마 미안해>는 자신의 이야기처럼 느껴져 많은 이들의 애창곡이 되기도 했습니다.

연영석은 다양한 투쟁 현장과 결합하고, 또 스스로를 문화노동자로 소개하며 기존의 단체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연대하며 활동을 펼쳤습니다.

창작 작업도 꾸준히 진행, 2001년 <간절히>, <공장>, <노란선 넘어 세상> 등이 수록된 2집 [공장]을 발매하고, 2005년에는 3집 [숨]을 발매합니다. <코리안드림>, <꼭두각시>, <나약해>, <숨> 등이 수록된 3집 음반은 제 3회 한국대중음악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고, 심사위원의 전원일치로 특별상을 받았답니다. 그럼 이번 시간에는 연영석의 노래 중에서 2집 타이틀 곡인 <공장>을 함께 들어볼까요?

 

 

공장
                                                 연영석 글, 곡

 

너도 몰래 나도 모르게 모든 것은 익숙하다.
반복 속에 반복된다. 시간 속에 반복된다.
까도 까도 똑같은 나 까도 까도 똑같은 내가
자꾸 자꾸 생겨난다. 자꾸 내게로 다가온다.
빠르게 낯설게 때론 너무도 당연하게
자꾸 자꾸 밀려온다. 자꾸 자꾸 넘쳐난다.
능숙한가. 신속한가. 필요한 만큼 유연한가.
시간 속에 맞춰가도 나는 네게서 밀려난다.

넘쳐도 점점 줄어간다. 넘쳐도 점점 죽어간다.
넘쳐도 점점 줄어간다. 넘쳐도 점점 죽어간다.

나는 매일 도망친다. 나는 매일 돌아온다.
죽고 싶다가 살고 싶다. 모든 것은 반복된다.
돌아보면 돌아갈 만하다. 살아보면 살아갈만하다.
반복 속에 내가 있고 그런대로 돌아 갈만하다.
빠르게 낯설게 때론 너무도 친숙하게
시간 속에 반복 속에 모든 것은 당연하다.
답답한가. 궁금한가. 살아가기에 막막한가.
시간 속에 반복 속에 살아보면 살아갈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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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디앙 연재 22 - 강

 

서태지 노래도 민중가요라고?
[노래이야기 22] 90년대 논쟁과 노동자 율동단 등장 & <강>
 
 
 

90년대 중반 민중가요에 대한 논쟁이 다시 시작되었습니다. 95년 초, 나우누리 민중가요 동호회에서 누군가의 ‘서태지와 아이들의 노래가 민중가요일 수도 있다’는 글에 공방이 벌어지다가 결국 ‘민중가요가 무엇이냐’는 문제로 넘어간 적도 있습니다. 여기에 나름 그 시절 활동을 하던 유명 평론가와 창작자들이 가세를 하면서 확산되었습니다.

 

서태지 노래도 민중가요?

온라인 상의 논란이 그렇듯 딱히 결론이 난 건 아니지만, 그 즈음 민중가요, 노동가요가 이전 시대에 비해 상대적으로 침체되고 있던 시기였기에 논쟁은 민중가요의 개념과 범주, 정체성과 방향까지 고민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만큼 민중가요가 어떻게 가야할지 관심은 지대했지만 뚜렷한 방향성을 제시하지 못했고, 무엇보다도 대중들에게 검증되는 새로운 민중가요가 활발하게 창작되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할 것입니다.

96년에는 홍대 앞 인디 밴드들과 민중가요 진영의 록밴드들이 만나 독자적인 유통망을 만들어 독자적인 활동을 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있었고, 조금은 낯설고 선정적인 멘트들이 날아다니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96년 국회에서 노동법, 안기부법을 날치기로 통과하는 사건이 발생하고 노동조합은 총파업에 돌입합니다. 96~97 총파업을 거치며 ‘언제 그런 논쟁이 있었냐’는 듯이 노동문화는 다양한 양상으로 활기를 되찾게 됩니다. 역시 노동문화가 발전하는 것은 투쟁시기인 것 같습니다.

 

   
  ▲노동자 율동패 공연 모습. 

이 시기의 특징을 꼽으라면 화려하고 웅장한 노래들과 흥겨운 노래들이 인기를 끌면서 율동문선대가 전국적으로 확산된 것을 들 수 있겠습니다. <불나비>, <바위처럼> 등의 흥겨운 노래에 율동을 붙여 같이 부르면서 노래도 다시 인기를 얻게 되었고, 또한 총파업 투쟁도 힘을 얻게 됩니다. 각 매체마다 특성이 있고, 시기에 따라, 노동자 대중들의 정서에 따라, 매체별로 뜨기도 하고 침체되기도 하는데 이때부터 가장 인기 있고 선동적인 매체로 율동이 부각됩니다.

과거에도 율동 문선대가 있었지만 그 당시는 대부분 선동을 위해 임시로 문선대를 꾸려 임단투 때나 파업시기에 활동을 하였고, 구성원도 노래패나 풍물패 중에 선별해서 율동을 배워 일시적으로 활동을 했더랬습니다. 전문패들 역시 노래공연을 하더라도 임단투 시기에는 임투문화학교, 문선대 학교에서 율동을 같이 만들거나 가르치기도 했고요.

 

노동자 율동단

그러니 전문패 중에 율동패라는 영역은 존재하지 않았지요. 춤패, 탈패 등이 있었고, 연극집단에서도 필요에 따라 춤을 배우기도 했었지만 문선율동을 전문적으로 창작하고 보급하는 단체는 없었던 겁니다. 주로 단위사업장의 노동자 율동패가 있었는데 지하철 율동패 ‘두더지’가 아주 힘찬 선동율동으로 대표적이었습니다.

<다시 노동자로 태어나>, <선포> 등 노문창 노래에 맞춘 율동들로 대중들을 사로잡았습니다. 이렇게 파업이나 투쟁시기에 문선과 놀이로서 활용이 되던 율동이 96~97 총파업 이후 본격적으로 노동자율동단을 결성하여 문선 율동을 창작하고 지도하고 보급하기 시작했지요.

노동자 율동단은 전문단체는 아니었지만 한 단사의 조직도 아니었고 율동을 좋아하고 잘하는 노동문화활동가들이 모여 만든 집단으로, 창작 율동을 발표하여 보급하고, 지도하는 등의 활동을 했습니다. 98년 겨울 창작율동을 모아서 자체 공연도 했고, 노동자대회 전야제 때는 전국의 율동패들을 모아 율동 집체공연도 했습니다.

그 이후로도 매 시기 대중적 인기를 얻은 노래들에 율동을 창작해서 보급하였고, 단지 선동 율동 뿐 아니라 경쾌한 노래에 맞춰 흥겹게 함께할 수 있는 것도 창작해 보급하였습니다.

선동적인 율동으로는 <동지>, <세상을 바꾸자>, <강> 등이 대표적이고, 흥겨운 율동으로는 <불나비>, <내일의 노래> 등을 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율동은 이미 인기를 얻은 노래를 선곡해서 음반을 틀어놓고 공연을 할 수밖에 없고, 음악을 창작하여 몸짓, 춤으로 연결해 내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거대한 파도와 같은 몸짓들

또 기존의 노래라 할지라도 가수가 라이브로 노래를 하게 되면 백댄서 같은 모습으로 보이는 딜레마도 있었지요. 노동자율동단은 이런 한계를 극복하고자 주제를 정해 율동을 창작하며 음악을 새로 만드는 시도를 하거나, 가수가 무선마이크를 달고 율동패와 섞여 공연하는 시도도 했었지만 그 성과가 지속되진 못했습니다.

전문 율동패가 없고, 또 가수들이 율동을 전문적으로 연습하기 어려운 현실을 더 이상 극복해 내기는 힘들었던 겁니다. 그럼에도 아직까지 가장 선동적이기도 하고, 가장 흥겹게 함께 할 수 있는 율동문선이 인기를 끌고 있는 건 여전히 그런 요구들이 있다는 것이겠지요.

이번 시간에는 율동패들의 많은 창작 율동 중에서 가장 인상적으로 만들어지고, 보급되었던 노래, <강>을 들으실 텐데요. 율동과 함께 들을 수 없는 게 아쉬울 뿐입니다. 이 <강>이라는 노래에 맞춘 율동은 노동자들의 거대한 파도 같은 힘과 출렁거림을 어렵지 않은 율동으로 잘 표현하였습니다.

<강>은 도종환 님의 시에 윤민석이 곡을 붙여 95년 금속산업연맹에서 제작한 음반에 박은영의 목소리로 수록되면서 처음 발표되었는데, 후에 꽃다지에서 편곡해 부른 서기상의 노래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혹시라도 이 율동을 본 적이 있는 분들은 출렁대듯 밀려오던 율동을 상상하시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강>


                                                                   도종환 시, 윤민석 곡

가장 낮은 곳을 택하여 우리는 간다. 가장 더러운 것들을 싸안고 우리는 간다.
너희는 우리를 천하다 하겠느냐, 너희는 우리를 더럽다 하겠느냐
우리가 지나간 어느 기슭에 몰래 손을 씻는 사람들아
언제나 당신들 보다 낮은 곳을 택하여 우리는 흐른다

 

음원 출처 : 서기상 1집 [세상속으로]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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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디앙 연재 21 - 사람이 태어나

 

일본 할아버지 노동자에 힘을 준 노래
[노래이야기] <사람이 태어나>…60세 노동자 홋타 눈물흘리다
 
 
 

96년은 여러 가지로 일이 많았던 해입니다. 구속된 사건도 사건이지만 ‘꽃다지’가 처음으로 일본 공연을 간 해이기도 합니다. 95년 11월, 민주노총이 출범하던 노동자대회 전야제는 연대 노천극장에서 열렸습니다. 한국의 노동자 뿐 아니라 세계 각지에서 노조 간부들이 참석을 했고, 그 때 꽃다지가 <단결투쟁가>를 대합창 편성으로 불렀지요.

 

꽃다지 일본 공연

그것을 보고 일본에서 온 전통일(젠또이쯔)노조 서기장과 상근활동가들이 큰 감동을 받았다고 합니다. 가사는 잘 이해하지 못했지만 어떤 힘을 느낀 것이지요. 그래서 한국 노동자투쟁의 정서와 에너지를 노래와 문화를 통해 일본 노동자들에게도 전달해주자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96년 메이데이 때 꽃다지를 초청하게 됩니다. 민주노총 문화국과 협의를 해서 한 번도 빠진 적이 없는 한국의 메이데이 집회에서 빠지고, 일본 전노협의 메이데이 집회에서 공연을 하게 되었답니다. 물론 집회 말고 콘서트도 있었지요.

 

   
  ▲히비야 공원 공연 모습. 

동경 히비야 공원에서 열린 메이데이 집회에 꽃다지가 공연하던 순간에 물론 저는 없었습니다. 재판 중이라 여권이 발급되지 않았고, 구청에 전화해 항의도 해보고, 아는 빽(?)도 써보고 했지만, 결국 출발 당일까지 여권이 나오지 않아 혼자 남았지요.

그 후 다시 가을에 일본 공연을 가게 되었습니다. 사전 준비를 할 때 일본에서 협의를 하러 오신 활동가, 오자와구니꼬씨가 우리에게 "일본에서 어떤 곳에 가고 싶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일본의 기업 단위 사업장에 찾아가 노동자들을 직접 만나 이야기도 나누고 노래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 결과 약 10여 차례의 노조 순회공연을 잡게 되었고 콘서트도 2개 도시에서 열게 되었습니다. 이 중 인상적인 몇 개의 투쟁과 사업장들이 있었습니다. 국철 해고 투쟁은 많이들 알고 계신 것처럼 1987년 1,047명이 해고되어 복직 투쟁을 20여 년간 계속 해오고 있지요.

 

현장 노동자들 앞에서 공연하다

그분들을 만나 그 긴 세월의 이야기를 들으며 민영화가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초래하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또 하나는 다니구찌라는 작은 공장이었는데, 여기는 기업이 부도나서 은행에 넘어가고, 공장 문을 닫게 된 곳이었습니다.

하지만 노동조합에서 못 받은 임금을 대신해 은행보다 우선권을 주장하며 싸워서 회사를 인수 받아 노조가 관리하는 자주관리기업입니다. 전체 노동자 수가 9명이었고, 그들의 가족까지 모여 공장 앞마당에서 파티를 열며 의자 뺏기 놀이, 바위처럼 율동과 해방춤을 추면서 함께 즐거운 시간을 가졌습니다. 마치 80년대 후반에 한국에서 하던 것처럼 말입니다.

또 한군데 기억에 남는 곳은 고구레 보탄이라는 단추공장인데, 재래적인 수공업 방식으로 교복단추를 만드는 공장입니다. 이곳은 노동자가 4명이고, 수동으로 단추를 만드는 공정을 4명이 돌아가며 담당하고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홋타라는 할아버지가 60세 즈음에 노동조합을 결성합니다. 그러자 회사에서는 정년을 65세에서 60세로 낮추는 규정을 졸속으로 만들고 홋타 할아버지를 강제 퇴직시켰습니다.

홋타 할아버지는 이에 맞서 싸웠고, 이 투쟁을 전통일 노조가 지원을 했습니다. 우리가 방문할 당시 회사 정문에는 ‘부당해고니 복직시키고, 보상금을 지급하라’는 판결 공고문이 붙어있지만, 회사는 전혀 미동도 안하는 상태였습니다.

 

   
  ▲두번째 공연. 국철 해고자 단결대회 공연 모습. 

 

홋타 할아버지

이렇게 일주일간 10여 군데의 사업장을 돌고, 노동자들을 만나 이야기를 듣고 나누는 가운데 느낀 점들을 콘서트 때 담았습니다. 그 당시 연출을 맡았던 조민하 선배의 순발력과 대중감이었지요.

그 공연 중에 한 부분에서 홋타 할아버지 이야기를 하면서 60세가 넘었는데도 노동조합을 스스로 결성하고 부당해고에 맞서 4년간 하루도 빠지지 않고 출근 투쟁을 하신 그 열정과 근성에 대한 찬사와 존경을 담아 꽃다지 가수 김용진이 부른 노래가 <사람이 태어나>였습니다. 할아버지는 공연이 끝나고 고맙다고 하셨습니다. 저희가 부끄러웠지요.

98년 홋타 할아버지는 끈질긴 투쟁 끝에 승리했고, 보상도 받았다고 합니다. 투쟁 승리 보고대회에 그 노래를 부른 당사자인 가수 김용진이 초청을 받아 참석을 하여 축하 공연을 했고요. 그리고 10년이 훌쩍 지나 2009년 동경 공연에서 70세를 훌쩍 넘기셨지만 노동자들을 지원하는 활동을 하고 계신 홋따 할아버지를 다시 만날 수 있었습니다. 일본어에 서툰 저에게 할아버지는 꼭 하시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며, 그 당시 이야기를 해주셨습니다.

그 시절은 아주 힘들었다고, 그래서 포기하고 싶었다고 합니다. 전통일 노조가 지원해 주긴 했지만 일반 사람들의 관심도 받지 못하고 혼자서 외롭게 투쟁하면서 지쳐있었다고요. 그런데 그 때 ‘꽃다지’가 자신에게 용기를 불어넣어주었다고 합니다.

그 때 너무나 큰 감동을 받았고, 일본인들에게서도 느끼지 못했던 지지와 용기를 받았다고요. 그래서 그 뒤에도 더 열심히 힘내서 버틸 수 있었고 자신의 투쟁은 승리할 수 있었다고요. 그건 다 그 때 꽃다지의 덕분이라고, 꽃다지가 그 때 그런 용기를 주지 않았다면 자신은 이길 수 없었을 거라 하셨습니다. 자신이 죽을 때까지 절대 잊지 못할 거라 하시며 제 손을 꼭 잡고는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자신만의 노래를 만들자

한국에서도 많은 노동자가 더 처절한 투쟁을 끈질기게 하고 있고, 그리고 승리하기도 하고, 또 패배하기도 합니다만, 이미 노동운동이 침체되었다고 하는 일본에서 어쩌면 더 어려운 투쟁을 하신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사람이 태어나>는 <바위처럼>으로 잘 알려진 유인혁의 곡입니다. 91년 대공장 남성 노동자들의 정서에 맞게 창작되어 집회나 투쟁현장에서 뿐 아니라 일상 시기에도 많이 불린 노래입니다. 이 노래가 일본의 한 노동자의 가슴에 영원히 남아있을 수 있는 건, 바로 노동자의 정서를 잘 담고 있기 때문이겠지요.

이처럼 노래는 시간과 공간이 다르더라도 같은 상황에 놓여있는 노동자들에게 공감대를 형성시키는가 봅니다. 그리고 그것은 노동자들이 스스로 투쟁하면서 자신의 존재를 찾아갈 때 비로소 자신의 것이 되는 것이고요. 늘 강조하지만 여러분도 각자 자신의 노래를 꼭 만드시기 바랍니다.
 


<사람이 태어나>

                                                                                   유인혁 글, 곡

1. 사람이 태어나서 세 번을 운다지만 노동자는 오직 한번 동지를 위해 운다.
끝없는 노동 속에 우리 젊음 흘러가도 머리띠를 묶으면 다시 또 청춘이다.
노동자 가는 길에 후회일랑 없구나 오늘은 투쟁이다. 내일은 해방
2. 사람이 태어나서 육십을 산다지만 노동자는 오직 하루 해방의 그날위해
자본가 너희 놈들 아무리 빼앗아도 가져갈 수 없는 건 동지의 굳은 사랑
노동자 가는 길에 후회일랑 없구나 오늘은 투쟁이다 내일은 해방

 

*음원출처 : 노동가요 공식음반 중에서 김태언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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