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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의 새벽’ 20주년 기념 콘서트에 부쳐

  • 등록일
    2004/12/08 20:19
  • 수정일
    2004/12/08 20:19
오는 10일 ‘명사’들 초청 대형행사…민주노총 등 노동계 ‘무관심’ 속 치러져 ‘노동의 새벽 출간 20주년 기념 콘서트’가 오는 10일 열린다. 1984 년, 노동문학의 신기원을 개척하며 ‘박노해 현상’까지 일으킨 기폭제가 됐던 서적 ‘노동의 새벽’. 그리고 한때는 노동자 계급의 의한 체제 변혁을 꿈꾸었던 사회주의 혁명가였다가 이제는 ‘나눔과 사랑의 전도사’로 돌아온 노동의 새벽의 저자, 박노해. 그 자체로 상징이고, 역사인 ‘노동의 새벽’을 기념하는 ‘뜻 깊은’ 행사가 세밑을 앞둔 즈음에 열리는 것이다. 이번 행사에선 신해철이 기념음반 프로듀싱을 맡았고, 윤도현, 싸이, 장사익, 황병기 등 ‘국민적 스타’들이 대거 출연해 기념무대를 장식하게 된다. 강헌, 백태웅, 임종석, 조희연 등 정치·문화·학술 계통을 두루 관통하는 ‘명사’들이 추진위원으로 참여한 점도 눈길을 끈다.


하지만 기자는 지난 10월 29일, 레이버투데이에 이번 콘서트를 비판하는 기사를 쓴 바 있다. 꽃다지 전 대표 이은진씨와 노동가요 작곡가 김호철씨 등의 입을 빌어 이 콘서트를 바라보는 어떤 이들의 ‘유감’을 지적한 것이다. 비 판의 요지는 이랬다. 먼저 이 콘서트가 행사 주체나 참여뮤지션들의 면면으로 봤을 때 80년대 노동의 새벽의 정신을 올곧이 이어받고 있는지 의심이 든다는 것. 그리고 비정규직 문제와 정부의 탄압으로 노동계가 그 어느 때보다 더 처절한 싸움을 벌이고 있는 상황에서 ‘7만 7천 원’ 씩이나 하는 티켓을 사서 공연을 관람할 노동자가 있을 리 만무하다는 것이었다. 더욱이 수익금 전액을 이주노동자를 위해 쓴다고 했으나 그 돈을 사망한 이주노동자의 ‘유해 송환 비용’이나, ‘자녀들 공부방 지원 비용’ 등으로 쓰겠다는 발상은 ‘맥락을 잘못 짚은 것’이라는 점이 기사의 주요내용이었다. 기사가 나간 뒤 반응은 뜨거웠다. 언론으로선 최초보도였다는 점에서도, 노동의 새벽과 박노해가 지닌 ‘현재적 민감함’ 때문에도 반응은 뜨거울 수밖에 없었다. 이 번 콘서트를 “‘노동계급의 눈물과 피’를 팔아먹는 수혜적 인도주의”라며 혹독한 비판을 가한 이들이 있는가 하면 “그의 시를 다양한 음악적 분석과 방식으로 표현하고 창작하여 우리가 함께 시대의 보석으로 간직하는 것이 뭐가 문제가 되느냐”고 반박하는 이들도 있었다. 어떤 이는 “노동자 계급의 정서와 사상을 가장해 얼치기 혁명투사의 흉내만 냈을 뿐, 실제 노동자계급과는 거리가 멀었던 박노해와 노동의 새벽이 이제야 제 자리를 찾은 것이다”라고까지 평가했다. 주 최측 관계자의 ‘항의’도 있었다. 왜 아직 공식적인 언론브리핑을 거치지 않은 단계에서 미리 비판적 기사를 쓰느냐는 것이었다. 출연진도 아직 100% 확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너무 악의적인 시각으로 이번 콘서트를 재단했다는 지적이었다. 기자는 그 관계자에게 반론을 제기하면 실어주겠다고 제안했고, 이와 함께 콘서트의 내용이 달라지게 되면 새롭게 반영된 기사를 쓰겠노라고도 약속했다. 그 로부터 보름 뒤인 11월 중순경 노동의 새벽 콘서트 기사가 일제히 모든 언론에 실렸다. 다행히도(?) 이들 언론엔 레이버투데이의 기사처럼 ‘비뚤어진’ 시각으로 이번 콘서트에 초를 친 기사는 없었다. 그러나 콘서트의 기조와 내용이 달라진 건 없었다. 그 리고 본 공연을 앞둔 지금, 실제로 ‘변화’된 것들이 있다. 우선 공연요금이 ‘3만 원 균일’로 바뀌었다. 공연을 불과 14일 앞둔 11월 26일, 주최측은 최고 7만 7천 원까지 하던 차등 요금제를 폐기하고 3만 원으로 통일했다고 밝혔다. 주최측은 “축제같은 공연을 함께 즐기고, 나아가 이 사업의 취지를 더 많은 분들에게 전하기 위함”이라고 요금 인하의 이유를 밝혔다. 뒤늦은 결정이지만, 박수를 보낼 만한 일이다. 콘 서트 제목을 ‘스무살 공순이의 노래’라 이름 붙인 것도 달라진 점이다. 공연포스터에선 영화배우 배두나가 ‘공순이’를 자처하고 나섰다. 영화배우 조재현이 공연 사회를 맡고, 전태일 열사의 누이 전순옥 참여여성복지센터 대표도 무대에 선다. 결 국 이제 우리는 ‘스무살 공순이의 노래’란 이름을 단 ‘3만 원짜리’ 노동의 새벽 20주년 기념공연을 관람할 수 있게 됐다. 기자 입장에서 낯뜨겁게 자위하자면, 레이버투데이의 기사가 여기에 눈꼽만큼의 ‘자극’을 주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다. 그 럼에도 이번 콘서트에 대한 아쉬움은 여전히 남아 있다. 우선 사실상 출연진이 달라진 것이 없다. 애초부터 추진위원으로 참여했던 전순옥씨 정도를 빼면 무대에 서는 이들 중 지금 ‘노동’과 직접적으로 연관을 맺고 있는 이들은 없다. 이주노동자들이 결성한 밴드가 마치 ‘양념처럼’ 출연진 라인업에 속해 있을 뿐, 오늘날 노동의 문제를 직시할 만한 이들은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도 이번 콘서트는 ‘노동의 어제’를 추억하는 행사일 뿐, 힘겨운 ‘노동의 오늘’을 나누는 행사는 아니다. ‘노동의 오늘’이 ‘소외’되고 있는 건 단순히 출연진의 문제만이 아니다. 주최측은 이번 행사를 홍보하기 위해 상당한 노력을 기울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은 각종 포털사이트에 이번 행사를 소개하는 배너광고를 게재하는 등 전방위적인 홍보작업을 펼치고 있다. 하지만 정작 노동의 새벽의 진짜 주체인 노동자들에게 이번 행사는 알려지지 않았다. 하다못해 민주노총 자유게시판에조차 이번 행사와 관련한 글은 올라오지 않았다. 민주노총, 전태일기념사업회 등 노동단체의 반응도 냉랭하다. 이준용 민주노총 문화미디어국장은 “이번 행사와 관련, 주최측으로부터 어떠한 협조요청이나 제안을 받은 것이 없다”며 “과거는 물론, 지금도 끊임없이 노동과 문화를 이야기하고 있는 이들에겐 정작 이번 콘서트가 아무런 의미가 없는 저들만의 잔치일 뿐”이라고 지적했다. 그래서일까. 공교롭게도 오늘자(12월 7일) 조선일보에 실린 박노해의 ‘고백’은 의미심장하다. 이 고백을 듣고 기자는 비로소 고개를 끄덕였다. 박 노해 시인은 주위에 “나는 변함없이 진보를 지향한다. 다만 진보의 내용이 바뀌었다. 과거에는 모스크바가 진보의 표상이었다면 지금은 뉴욕”이라고 말하고 있다. 박시인은 “내게 뉴욕은 강자와 약자의 구별이 없고 다수와 소수도 자유롭게 소통하는 용광로와 같은 곳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조선일보 12월 8일자 ‘새로운 길을 모색하는 386’ 기사 중) 포 털 사이트에 걸린 노동의새벽 콘서트 ‘배너광고’의 문구는 ‘노동자에서 인간으로’이다. 대체 이들이 말하는 노동자는 누구이고, 인간은 또 누구일까. 이들은 이제 ‘모스크바를 사랑했던 노동자’가 아니라 ‘뉴욕을 사랑하는 인간’이 되고 싶은 것일까. 그렇다면 처음부터 기자의 비판은 번짓수를 잘못 찾은 셈이다. 기자는 최소한 그가 뉴욕을 사랑하는 ‘노동자’의 정서와 이념만은 지니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결국 앞서 이야기한 어떤 이의 말처럼 이제야 그와 노동의 새벽이 ‘제 자리’를 찾은 것인가. 이오성 기자 dodash@labor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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