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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세
고통의 얼음 위를 미끄러지는 스케이드 선수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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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정권의 최대 피해자는 중고생이다. by 에뿌키라

노무현 예언, 정도전 예언보다 더 기가막힌 예언이 있었다.

기억나시는지.

미친소라 불리는 한 개그맨이 머리에 꽃을 꽂고 나와

영어를 가르치며 ‘그때그때 달라요.’를 외치던 프로그램을.


이명박 정부에서 우리는

추억 속의 ‘새 나라의 어린이’를 볼 행운을 얻었다.

새 나라의 어린이는 일찍 일어나다 못해 새벽종이 울리면 일어나

0교시 수업에서 영어몰입교육을 받고

점심에 정체불명의 고기를 먹고

밤늦게까지 학교에서 공부하고 학원으로 향한다.

그래서 어찌어찌 해서 대학이라고 턱 붙어 갈라치면

이렇게 말한다.

“엄마, 1000만원만 주세요~”


MBC 9시 뉴스의 한 꼭지의 제목은 ‘학생들 시위 참여 우려’였다. 

그런데 내용을 봐도 무엇이 우려되는지 잘 모르겠다.

그냥 어떤 아저씨와 아줌마가 나와서

이렇게 말했다. “어른들한테 맡겨두고···”

아이들은 뭘 모르는 철부지고 그래서 그들의 이야기는 잡담이 된다.


아이들은 정말 모를지도 모른다.

급식에 들어오는 고기는 원산지 표시 의무가 없다는 사실을.

이번 협상으로 미국산 쇠고기 도축장의 승인권을 미국이 가지게 되었다는 사실을.

고기에 문제가 생길 경우 그 이력을 추적하겠다고 했지만

소의 이력 추적이 불가능한 거의 유일한 나라가 미국이라는 사실을.

광우병 청정 국가로서 30개월 이상 된 소를 수입하는 최초의 나라라는 사실을.

미국의 자국민이 먹는 소는 20개월 미만 된 소라는 사실을.


하지만 아이들은 잘 알고 있다.

어떤 쇠고기가 나오든지 간에 자신들은 주는 대로 먹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아이들의 공포는 간첩의 선동도 괴담에 의한 부풀리기에 있는 것도 아니다.

아이들의 공포는 그들에게 어떤 결정권도 없다는 데서 오는 것이다.


이명박 정부의 교육정책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아이들을 입시 지옥에서 해방시켜 주겠다는 체스추어도 하지 않는다.

아이들을 위하는 척 하는 쇼맨십도 없다.

실용주의의 냉혹성을 말할 뿐이다.

그래서 초등학교와 중학교에서도 전국 일제고사를 부활하고

고등학교에서 사설 모의고사가 부활하는 환경을 만들어준다.

0교시 수업과 심야 자율학습도 이들과 함께 간다.

교육의 이름으로 그나마 폐지되었던 정책들이

이명박 정부에서 한꺼번에 부활하고 있다.


더욱이 그 정책이라는 것도 앞뒤가 맞지 않는다.

0교시 수업을 실질적으로 불허한다지만

학교에서는 수행평가에 넣겠다며 아이들을 압박한다.

영어몰입교육은 한다고 했다가 실효성이 없다 했다가

다시 하는 것 같기도 하고 안 하는 것 같기도 하고 그렇다.


정확한 학업성취도를 알기 위해 전수조사로 바꿔 일제고사를 보지만

통계는 그 중 몇 %만 뽑아서 한다고 한다.

그럼 왜 다 시험을 봐야 하는지, 거참.

대학에 자율로 맡긴 시험에서 지필고사를 못하게 하겠다면서도

이전에 대학에 압박을 가할 수 있었던 조치는 폐지시킨다.

반값 등록금이란 공약대신

학자금 대출 지원액 1000억원을 삭감한단다. 


이 모든 것에 대하여 아이들은 침묵하고 따라야 한다.

아이들에게 주어진 선택권이란

급식? 먹을래, 안 먹을래?

공부? 할래, 말래? 정도다.


아이들은 묻고 있다.

실제로 급식을 먹어야 하는 것도

실제로 0교시 수업을 해야 하는 것도

실제로 영어몰입교육을 받아야 하는 것도

실제로 심화 자율학습을 해야 하는 것도

실제로 자립형 사립고 입학시험에 시달려야 하는 것도

실제로 자율화된 대학 시험을 봐야 하는 것도

학생인 자신들이 아니냐고.


학생들을 우려하기 전에

잠깐만이라도 생각할 시간을 내보자.

― 지금 그 아이들이 묻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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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나를 어떻게 사랑할 수 있지요?
 

갑작스레 일이 뚝 줄어들어버린 요즈음입니다.

선배들이 일부러 신경써줘서 비교적 한가로운 일상을 보내고 있습니다.

하던 세미나들은 하고요.

밤에는 관심 있는 책 번역도 해보고요.

(출판이랑 그런거랑은 아무 상관없고요.....^^; Intensive Science and Virtual Philosophy 라고 흥미진진한 책이에요.)

간간히 음악도 듣습니다.

Sting이나 U2 같은 나이든 아저씨들 노래가 좋아요.

잘 못 알아들으니까 더 좋고요.


그렇게 할 일이 줄어들어버리니,

우울할 때가 많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웃기죠.

바쁠 때는 바빠서 힘들고, 한가할 때는 한가해서 힘들다니.

니체 세미나를 하다가, 마음 아픈 구절을 발견합니다.

이웃 사랑에 대한 글인데요.

사람들이 이웃사랑을 하고, 덕을 가지는 이유는, 자기를 똑바로 보기 싫어서 그렇데요.

대신 남들한테 잘해줘서, 자기를 사랑하게 만들어서, 그런 평으로 자긍심을 유지하기 때문이래요.

결국 나를 사랑할 수 없기 때문에, 남을 사랑하고, 그런 방식으로 ‘억지로’ 나를 사랑하는 거죠.


제가 딱 그 짝이지 싶어 책을 보다 잠시 멍해졌습니다.

할 일을 찾는 것은, 그 안에서 인정을 얻기 위함이었고, 나를 확인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비록 내가 그다지 하기 싫은 일이라도, 그것이 나의 그럴 듯한 모습을 만들어줄 수 있다면, 기꺼이 덤벼들었지요.

성실하다는 평을 가끔 듣습니다.

아마 그 근저에 있는 힘에의 의지는 바로 저런 질적 특성을 띄지 않을까 합니다.


그나마 그런 방식도 쉽진 않았어요.

성실하다는 평 외에 다른 말은 듣기 어려웠습니다.

동료들과의 갈등도 적지 않았습니다.

전 아직 여러 사람과 뭔가를 하는 게 그리 익숙하지만은 않습니다.

그래서 요즘은 지내는 게 참 어색합니다.

사람들 얼굴 보는 것도 어색하고요.


내 진정한 모습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껍데기들 뒤에는 껍데기가 있을 뿐이니까요.

하지만 더 이상 껍데기를 만드는 게,

누군가 던지는 과업을 오바해서 수행하고, 동정 섞인 칭찬을 받는 식은 아니었으면 합니다.

나를 사랑하기가 너무 힘들기 때문입니다.

나는 예측할 수 없는 타인의 행동이 나에 대한 자긍심과 사랑을 일깨우는 핵심 변수가 되어버리니, 사는게 불안합니다.


내 곁에 아무도 없는 채로 나를 사랑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들 없이 나도 없으니까요.

하지만 그들과 관계 맺음에서 내가 능동적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일이 내 맘대로 되지는 않겠지만, 미지의 영역에 날 던질 수 있는 용기가 있었으면 합니다.


하지만 어떻하면 좋을까요.

날 던지기에는, 지금 날 돌아보는 것조차 너무 부끄러운 일인데.

나를 부끄럽게 여기는 사실 자체가, 특정하게 주어진 기준에 나를 대고 있다는 것이지만,

안다고 바뀌는 거였으면 난 예전에 슈퍼맨인데.

이래도 저래도 안 될 거 같은 기분이 드는걸 보니,

오늘 되게 피곤한가봅니다.


이런 몽상조차 사치스럽다고 느끼게 만드는 습관이

오늘은 좀 귀찮네요.

골수 반동이 되려나?


15일에 유성이 떨어진데요.

그 유성 중에 하나가

내 머리를 향해줬으면 합니다.

한 대 얻어맞으면

용기가 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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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자 평전을 읽고

전에 로자 글을 본 적은 있었는데,

이번에 세미나에서 평전을 읽게 되었다.

단편적으로 제시되는 중요 쟁점은 이후에 읽게 될 그 사람 글 보고 이야기 하면 될 거 같아서....

전위/대중, 확대재생산 등 재미있는 쟁점이 참 많지만...

그냥 감상을 한 번 써봤다.

요즘은 세상에서 동 떨어져 책 보고 나불대는 신선이 된 것 같은 느낌.

애잇.

 

코뮨주의와 현대 자본주의/ 2007. 12. 7. / 만세


기도에서 고민으로


 잘 사는 것에 대한 물음은 잘 살게 해달라는 기도보다 몇 백배 소중한 법이다. 당연하다고 여기겠지만, 헤아려보면 잘 사는 것에 대한 물음을 던져본 적이 극히 적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어떻게 세미나에 임해야 하는지, 동료와 어떻게 지내야 하는지, 취직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다지 많은 생각을 하지 않는다. 대신 사람들이 좋다고 하는 것을 따르며, 행복이 주어지기를 기다린다. “나는 이렇게 열심히 하고 있으니 결국에는 좋은 날이 올 것이야.” 하지만 세상은 고민하지 않고 기도하는 이에게 변치 않는 시련을 내려준다. 세상에 특별히 나를 신경써주는 존재, 예컨대 신이나 초월적 도덕 같은 건 없기 때문이다. 내 상황과 문제와 대면하여 고민하지 않아도, 알아서 문제를 해결해주는 존재는 없기 때문이다. 니체가 신은 죽었다고 말한 것은, 기도하지 말고 고민 좀 하라는 뜻이기도 하다.

 비단 일상뿐이겠는가? 소위 거창한 일을 한다는 사람들에게도 고민보다는 기도가 더 친숙하다. 분석보다 신심이 앞서고, 내가 지금 해야 하는 일을 찾기보다 하던 일을 반추하는 우리와 타인의 모습을 얼마나 많이 보아왔나. “뭔가 아닌거 같고 잘 안되는 거 같지만, 난 열심히 하고 있어.” 라는 말 뒤에 숨겨진 고민의 포기와 사유의 중단을 언제 한번 대면해 본 적이 있는가. 맑스를 믿고, 조직을 믿고, 선생님을 믿으면서 나의 조건과 나의 세계에 대한 판단을 유보해 오지 않았던가.

 로자가 그의 동료들에게 하는 비판의 근저에서 이런 노예적 태도에 대한 일갈을 느낀다. 로자는 항상 냉철한 시선을 갖추라고 요구한다. 로자가 감옥에 있을 때, 동료들이 독일사회민주당의 반동성과 세계대전의 발발 때문에 꽤나 많은 신세 한탄을 했나보다. 그때 로자는 동료들의 비극적 정서를 비판하면서 “온 세상이 무너져 내려도 왜 그랬을까? 물어야” 한다고 충고한다. 큰 비극 앞에서의 슬픔과 비탄은 내 사유로 감당하지 못할 것 같은 대상을 회피하려는 시도인 경우가 많다. 비극이란 내 앞의 세계가 내 맘대로 되지 않는다고 징징거리는 유아적 태도일 뿐이다. 거대한 사건 앞에서 내 판단의 습관을 보호하기 위해 대상을 예외적 괴물로 만들어버리는 것.

 로자는 결코 절망하지 않는다. 거꾸로 “비통한 맛을 풍기는 것은 무엇이든지 증오” 했다.  대신 로자는 계속 경쾌하게 머리를 굴린다. 맑스로도, 엥겔스로도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한 세계정세를 읽어내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감옥에서건 거리에서건 마찬가지다. 그렇기에 로자는 폴란드 민족주의에 대해서도, 러시아 혁명에 대해서도, 민주주의에 대해서도 나름의 입장을, 혁명을 진전시킬 입장을 내세울 수 있었다. 그 하이라이트가 전시에 독일에서 일어난 정치적 대중파업이 아닐까. 스파르타쿠스 동맹은 평화 시에 무시무시한 조직력을 갖추고도 도저히 성공시킬 수 없었던 정치파업을 전시에, 그러니까 사회민주당도 보수화되고 노동자들 사이의 분열이 극대화된 전시에 성공시킨다. 물론 그것은 대중의 폭발적인 역량에 기반 한 것이었다. 하지만 로자를 비롯한 활동가들의 세심한 시선이 없었더라면, 모든 이들이 전쟁에 절망하거나 거꾸로 부르주아 국가에 협력하는 때에 거꾸로 PT동맹의 가능성을 보고 끊임없는 촉발을 시도한 시선이 없었더라면, 대중파업은 성사되지 못했으리라.

 그렇기 때문에 로자는 어디서든 싸우고 토론하는 ‘문제적 존재’였다. 대세나 법칙으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자신의 눈으로 세상을 읽고 판단하려 했으니 많은 이들과 부딪힌 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물론 로자가 항상 옳았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로자가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던 것도 그런 싸움과 토론을 통해서였다. 그렇기 때문에 로자가 논쟁을 한 대상은 정적만이 아니었다. 그가 아낀 친구들 역시 로자가 항상 냉철하고 예리하게 비판하던 대상이었다. 많은 사안에서 적지 않은 충돌을 겪었던 레닌과 나눈 우정은 이미 유명하다. 마치 로자에게 우정이란, 니체가 말한 것처럼 상대가 자신을 극복하도록 창을 겨누는 행위인 것처럼 보인다. 그럼으로써 자신도 더 날카로운 견해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로자가 민주주의에 각별한 애착을 보임은, PT 독재는 “계급의 독재” 이며 그것은 계급 안에서의 치열한 토론이 수반되어야 함을 주장하는 것은 바로 이런 친구나 동료에 대한 태도 때문이다.

 아무리 좋은 것들도, 진보든 평화든 혁명이든, 그것이 단순히 주어지는 것이라면, 노예의 굴레일 뿐이다. 내가 내 삶의 원인이 되지 못한다면, 그 삶은 하루아침에 고통스런 삶으로 바뀔지도 모른다. 니체가 가치를 평가할 때 그것의 구체적인 내용이 아니라, 가치가 어떻게 생산되었는지, 능동적으로 생산되었는지 수동적으로 받아들였는지를 문제 삼은 것도 그 때문이다. 아무리 좋은 내용도 상황과 배치에 따라 다른 의미를 획득하기 마련이다. 한때 혁명적 의미를 가졌던 ‘민족주의’가 오늘날 반역의 첨병 구실을 하는 것을 보라. 중요한 것은 그때그때의 정세에 따라, 나의 혁명과 행복을 ‘고민’ 하는 것이다. ‘기도’ 하는 순간, 신에게 기도하고 맑스에 기도하고 민족에 기도하고 진보에 기도하는 순간, 나도 모르게 반동의 대열에 합류하게 될 지도 모른다.

 로자가 전쟁을 반대하면서 평화에 대해서 언급한 말이 인상적이다. “노동자들이여! 부르주아 정부는 그들이 전쟁을 일으키듯이 평화도 만들어 낼 것입니다. 그러나 전쟁으로 얻은 결과가 어떻든 그들은 우월한 힘을 가지고 거듭해서 재무장하고 전쟁을 일으키고, 황폐화시키고, 반동을 초래하고, 야만적 행동을 할 것입니다.”(301) 로자에게 문제는 단순한 평화가 아니었다. 그건 부르주아가 만들어줄 지도 모른다. 로자에게 평화가 진정 가치 있으려면, 그것은 우리가 찾아온 평화여야 했다. 그렇지 않다면, 그 평화는 전쟁을 겨냥한 도구로 기능할지도 모른다. 로자의 혁명은 일차적으로 이런 태도의 변환을 요구한 것은 아니었을까? 언제나 날카로웠고, 그래서 경쾌했으며, 항상 자신의 견해의 주인이었던 로자가 오늘날에도 우리의 스승일 수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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