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ml version="1.0" encoding="utf-8" ?>
<rss version="2.0"
	xmlns:dc="http://purl.org/dc/elements/1.1/"
	xmlns:sy="http://purl.org/rss/1.0/modules/syndication/"
	xmlns:admin="http://webns.net/mvcb/"
	xmlns:rdf="http://www.w3.org/1999/02/22-rdf-syntax-ns#"
	xmlns:content="http://purl.org/rss/1.0/modules/content/">
	<channel>
		<title>밑에서 본 세상</title>
		<link>http://blog.jinbo.net/marishin/</link>
		<description>
<![CDATA[
외국 진보 진영의 글들을 번역해 모아놨습니다.
]]>
		</description>
		<language>ko</language>
		<dc:creator>marishin(mailto:)</dc:creator>
		<pubDate>Sun, 10 Aug 2008 02:01:42 +0900</pubDate>
		<image>
			<title>밑에서 본 세상</title>
			<url>http://blog.jinbo.net/files2/16/marishin/common/my_picture.jpg</url>
			<link>http://blog.jinbo.net/marishin/</link>
			<width>80</width>
			<height>60</height>
			<description><![CDATA[외국 진보 진영의 글들을 번역해 모아놨습니다.]]></description>
		</image>
		<item>
			<guid>http://blog.jinbo.net/marishin/?pid=283</guid>
			<title>과정, 원인을 무시하는 결과론자들</title>
			<link>http://blog.jinbo.net/marishin/?pid=283</link>
			<description>
<![CDATA[
<p style="text-align:justify;">그냥 습관적으로 확인하는 두개의 블로그에 묘하게도 비슷한 내용의 글이 실렸다. 한쪽은 스스로 '비급 좌파'라고 하는 이고 다른 쪽은 (그런줄 몰랐지만) 자칭 '보수주의자'다.

<p style="text-align:justify;">좌파와 보수주의자는 각각, 공영방송이라는 <한국방송>이 '인민' 또는 '우리 사회'에 무슨 의미가 있는가라고 묻는다. '인민의 방송'이 아닌 '공영방송 지키기'를 해야 한다는 게 슬프다는 좌파와 공영방송을 누가 장악하든 어차피 변할 게 없다는 보수주의자의 주장은 다른 듯 하면서도 비슷한 주장이다.

<p style="text-align:justify;">나는 이런 논리가 참으로 해악이 크다고 생각한다. 이런 논리는 냉소로 비칠 수도 있고 패배주의로 비칠 수도 있겠지만, 내가 보기에 무엇보다 과정과 사태의 원인을 무시하고 결과, 그것도 눈에 보이는 결과만 논하는 태도다.

<p style="text-align:justify;">보수주의자에 대해서는 딱 한마디면 족하다. 공영방송과 '우리 사회' 변화상의 상관 관계를 따져보라는 것이다. 공영방송 하나가 한국 사회를 바꿀 수 있는가? 애초부터 부당하고 가능하지 않는 의무를 공영방송에 부과한 뒤 그 것이 실현될 수 없기에 별 의미가 없다고 하는 것은, 논리적 오류일 뿐이다. (아니 공영방송이 세상을 바꾸려고 나서면 '우리 사회 구성원' 대다수는 '계몽주의'니 '엘리트주의'니 하고 욕이나 해대지 않을까?)

<p style="text-align:justify;">이런 식의 논리가 가장 판치는 때는 보통 선거 때다. 어떤 이들은 선거 때만 되면, '선거가 세상을 바꾼다'는 말도 안되는 주장을 당연한 것으로 전제한 뒤, 어차피 이 전제가 실현되지 않을 테니 만날 선거 해봐야 달라질 게 없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선거가 세상을 바꾼다'는 말은 유권자들을 속이기 위해 기득권자들이 꾸준히 퍼뜨려온 신화일 뿐이다. 이 신화를 거부할 때, 선거를 다른 각도에서 볼 수 있고, 진정 선거가 세상을 바꿀 계기가 될 수도 있다. 이 신화를 거부할 때, 유권자는 단지 몇년에 한번씩 표를 던지고는 모든 걸 잊는 '투표 기계'에서 벗어날 수 있다.

<p style="text-align:justify;">어떤 면에서 보면 비급 좌파의 주장도 비슷하다. 신화와 같은 또는 비현실적인 전제를 깔고서 그 전제가 실현이 안되니 별 의미가 없다고 주장하는 격이라는 면에서 말이다.

<p style="text-align:justify;">과연 언제 한국에서 공영방송이 '인민의 방송'인 적이 있는가? 아니 이 세상 공영방송 가운데 '인민의 방송'이 과연 얼마나 존재하는가? (어쩌면 베네수엘라에는 있을지 모르겠다.) 또 '인민의 방송'은 그저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가? 공영방송은 그 사회의 힘 관계 또는 계급 관계와 무관하게 혼자 인민을 위한 방송이 될 수 있는가? 공영방송을 '인민의 방송'으로 만드는 이는 누구인가? 가만 둬도 <한국방송> 직원들이 알아서 하는가? 아니면 <한국방송> 직원을 모두 바꿔버리면 될까? 그럼 직원 교체는 누가 하는가?

<p style="text-align:justify;">현실적이지도 않고 옳지도 않은 전제를 깔고서 현실을 개탄해봐야 남는 것은 절망뿐이다. 고민할 것은, 공영방송이 더 나빠지는 걸 막는 싸움의 과정에서 진정한 공영방송의 의미를 확산시키는 것이다. 또 이를 통해서 싸움을 질적으로 바꾸는 것이다. 진짜 문제는 이른바 '좌파들'이 싸움의 본질을 바꿀 능력, 의지, 전략이 있느냐지, 이 싸움의 본질이 아니다. 싸움의 본질은 한번 정해진 뒤 결코 변하지 않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p style="text-align:justify;">'제대로 된 공영방송'을 위한 투쟁은 사장 지키기 한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깨달음을 퍼뜨릴 수 있다면, 이 싸움은 아주 의미 있는 일이다.</p>



]]>
			</description>
			<author>marishin</author>
			<category>잡글</category>
			
			<pubDate>Sun, 10 Aug 2008 02:01:42 +0900</pubDate>
		</item>
		<item>
			<guid>http://blog.jinbo.net/marishin/?pid=281</guid>
			<title>오역 게시판</title>
			<link>http://blog.jinbo.net/marishin/?pid=281</link>
			<description>
<![CDATA[
<p style="text-align:justify;">그동안 '탈근대 군주론 게시판'으로 이름붙였던 게시판을 '오역 게시판'으로 바꾸었습니다. 2008년 8월 새로 번역한 책이 나오는 데 맞춰서, 제가 번역해 출판한 책 전체의 오역을 논하는 것으로 범위를 넓혔습니다. (오른쪽 메뉴의 '신기섭 오역 게시판'을 누르시면 찾아갈 수 있습니다.)

<p style="text-align:justify;">'탈근대 군주론 게시판'은 번역자의 '알리바이 증명'(?) 용도에 불과했습니다. “나는 독자들이 오역을 지적하고 번역 내용을 문제삼을 통로를 만들어두고 있다”는 자기 만족용이었던 겁니다. 누구도 직접 게시판에 오역을 지적하는 글을 쓴 적이 없습니다. 새로 책이 나와도 이런 상황은 거의 변함이 없을지 모릅니다.

<p style="text-align:justify;">하지만 번역에 문제가 있다고 느끼는 독자가 몇명이든, 비록 단 한명이라 하더라도, 그 독자의 질문에 답한 준비를 하는 것이 번역자의 의무라고 믿습니다. 잘못을 수정해서 다시 책을 내거나 수정본을 기존 독자들에게 제공할 수 없는 처지라면 더 그렇습니다.

<p style="text-align:justify;">이 게시판의 논의 대상이 되는 책들은 <이제는 미국이 대답하라>(당대, 2000), <복권의 역사>(필맥, 2003), <싸이버타리아트>(갈무리, 2004), <탈근대 군주론>(갈무리, 2005), <오늘의 세계적 가치>(문예출판사, 2007), <진실 말하기>(갈무리, 2008)입니다.

<p style="text-align:justify;">오역 게시판 주소: <a href="http://php.chol.com/~marishin/bbs/zboard.php?id=prince">http://php.chol.com/~marishin/bbs/zboard.php?id=prince</a></p>



]]>
			</description>
			<author>marishin</author>
			<category>잡글</category>
			
			<pubDate>Tue, 05 Aug 2008 22:15:09 +0900</pubDate>
		</item>
		<item>
			<guid>http://blog.jinbo.net/marishin/?pid=280</guid>
			<title>대중의 진보성과 보수성</title>
			<link>http://blog.jinbo.net/marishin/?pid=280</link>
			<description>
<![CDATA[
<p style="text-align:justify;"><b>이 글은 <a href="http://blog.jinbo.net/marishin/?pid=279">‘올바른 정세 분석을 위하여’</a>에 이어지는 글이다. 사실 6월 20일에 써둔 것이어서 지금 상황에서는 별로 도움이 안된다. 다만 이 글을 공개하는 것은 곧 이어서 쓸 글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철 지난, 단순 참고용 글로 생각해주시면 된다.</b> (내가 쓰는 ‘대중’이라는 용어는 ‘지식인’ 따위와 대비되는 것이 아니다. 마땅한 말이 생각나지 않아서 ‘수많은 사람의 무리’라는 사전적 의미로 쓸 뿐이다. ‘무지몽매한 무리’라는 비하의 의미는 전혀 없다.)

<p style="text-align:justify;">먼저 쓴 글의 핵심을 다시 풀어서 쓰자면 다음의 두가지다. 

<p style="text-align:justify;">1) 대중은 ‘자랑스런 대한민국’이라는 자신들의 희망에 걸맞게 ‘국가를 새롭게 구성하자’고 요구하고 있으며, 이 점에 있어서 대중은 아주 급진적이다. 이것이 급진적인 것은 ‘모든 기존 권력과 권위에 대한 거부’에서 비롯됐기 때문이다. (여기서 ‘모든 기존 권력과 권위’는 지금까지 ‘한국이라는 국가’를 구성하던 것들 전체를 의미한다.)
<p style="text-align:justify;">2) 하지만 새로운 국가의 구성 요구는 그 자체로 보수성, 반동성을 내포하고 있다. 목표는 ‘국가를 넘어서는 공동체 구성’ 따위가 아니라 ‘국가 재구성’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자랑스런 대한민국’이라는 희망 사항이 2000년대 이후 발전한 과정을 볼 때, ‘비계급적 국가주의’로 나아갈 것으로 보인다.

<p style="text-align:justify;">이 두가지가 현재 상태에서 내가 할 수 있는 말 전부이지만, 저 글에 대한 반응들을 보면서 이 문제를 좀더 자세히 풀어 쓸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첫번째 글에 대한 반응들은 크게 두가지로 나뉜다.

<p style="text-align:justify;">1) 역동적인 대중을 기껏 ‘민족적 자존심’ 또는 ‘국가적 자존심’ 때문에 거리로 나선 ‘무지몽매한 대중’쯤으로 폄하한다.
<p style="text-align:justify;">2) 계속 변하는 역동적인 대중의 흐름을 관념적으로 재단하고 규정하려 한다. 이런 재단은 실천에도 전혀 도움이 안된다.

<p style="text-align:justify;">1번은 대중의 상태에 대한 인식 차이와 관련되며, 2번은 무엇을 할 것인가 문제이다.

<p style="text-align:justify;"><b>1. 대중의 상태</b>
<p style="text-align:justify;"><b>1-1. 대중의 진보성이 뜻하는 것</b>
<p style="text-align:justify;">내가 ‘무지몽매한 대중’쯤으로 폄하한다는 주장은 사실 내 글에 대한 오해다. 하지만 ‘좌파 이론에 능통한 어떤 논자’도 똑같은 주장을 펴는 걸 보면서, 어쩌면 이런 반응은 비현실적이고 관념적인 급진성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무슨 말이냐 하면, ‘국가의 재구성 요구’는 기대에 못미치는 낮은 수준의 요구일 뿐이라고 생각해서, 내가 말하는 대중의 급진성은 대중을 폄하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보는 게 아닐까 싶다.

<p style="text-align:justify;">하지만 ‘국가의 재구성 요구’는 건국 60년을 맞는 한국 헌정사에서 가장 급진적인 요구이다. 1980년 광주의 요구는 군부독재 타도와 민주주의였다. 1987년의 요구는 군부독재 타도와 직선제 개헌이었다. 그런데 지금의 요구는 ‘직접 뽑은 대통령’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우리가 직접 뽑은 대통령은 우리의 말을 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국가 운영의 주체를 바꾸자는 것이다. ‘우리가 주인 곧 국민이고, 국가’이니 ‘대리자인 대통령은 우리 말에 따라 국가를 운영해야 한다’는 것이니 말이다.

<p style="text-align:justify;">이것은 굉장히 급진적인 요구이며 다양한 가능성과 ‘진보성’을 담고 있다. 이를 직접 민주주의 요구라고 할 수도 있지만, 이런 시각은 이 요구의 근본 원인을 설명하지 못한다. 현재 세계의 맥락에서 보면, 이런 요구는 전세계적인 현상 곧 신자유주의 지배에서 비롯된 ‘정치 부재’, ‘경제의 정치 우위’의 직접적인 결과다. 한-미 자유무역협정 때문에 쇠고기 검역 문제를 양보해야 한다는 논리야말로 경제 우위를 대변하는 게 아닌가? 보수 야당조차 이 논리를 정면으로 반박하지 못한다. 아니 지난해까지 자신들이 주장하던 것이다. 노무현이 한-미 자유무역협정을 고집한 이유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것 아닌가?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선거는 요식 행위에 불과하다. 경제가 정치 우위에 있는 한, 정치가 독자적으로 작동하지 않는 한, 선거는 의미를 지닐 수 없다. 이런 상황에서 대통령은, 국회의원은 “경제가 하는 말을 듣지, 국민이 하는 말을 듣지 않기” 때문이다.

<p style="text-align:justify;">하지만 이 문제를 전세계적 보편성 측면에서만 볼 수는 없다. 그렇게 하면, 왜 한국의 대중 봉기가 프랑스의 대중 봉기와 다른가를 설명할 수 없다. 그래서 내가 제기하는 좀더 한국적인 특성이 바로 ‘모든 권위에 대한 거부’다. 이 거부는 하루 아침에 이뤄진 것이 아니다. 보수, 진보를 막론하고 지배층의 부패는 계속 이어졌다. 땅투기, 이권 개입, 자녀 병역 기피, 이중국적, 논문 표절, 학력 위조, 기타 무수한 거짓말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폐악을 사람들은 봤다. 그리고 마침내 그들이 ‘우리의 식탁 안전’마저 내어주자, 대중이 폭발한 것이다. 한마디로 그 어떤 놈도 못믿겠으니, ‘국가’를 그들에게 맡길 수 없다는 것이다.

<p style="text-align:justify;">여기서 논란거리가 하나 제기된다. 정치의 부재와 권위에 대한 거부는 어떤 관계인가? 이 문제는 좀더 따져볼 문제이며, 나 또한 답이 없다. 다만 질문을 제기할 뿐이다.

<p style="text-align:justify;"><b>1-2. 대중의 급진성 밑에 깔린 보수성</b>
<p style="text-align:justify;">‘국가의 재구성 요구’에 담긴 성향은, 이 요구의 동기나 목표와 무관하게 그 자체로 급진적이다. 이 성격은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 요구를 부른 동기가 무엇이냐는, 이 요구를 혁명으로 이어지게 할지, 아니면 반동으로 귀결되게 할지 결정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표현하자면, 국가의 재구성이 목표로 하는 것이 ‘훌륭한 국가’냐, 아니면 ‘인민 주권의 전면적인 실현’이냐에 따라 방향이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p style="text-align:justify;">내 주장은 현재 제기되는 ‘국가의 재구성’은 ‘자랑스런 대한민국’을 목표로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와 ‘민족’의 구별이다. “민족의 무궁한 영광”과 “자랑스런 대한민국”의 차이는 단지 수사적 차이가 아니다. (앞의 글에서도 주장했듯이, 한국에서 그동안 통용된 ‘민족’이라는 말은 ‘국가’가 존재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개념이다.) 남북한 분단을 고려하면 둘의 차이는 극적으로 드러난다. ‘민족’은 남한과 북한을 포괄하지만, ‘국가’는 북한을 배제한다. 이 문제는  남북 관계의 앞날을 생각할 때, 그냥 스쳐지나갈 수 없는 중요한 함의를 담고 있다.

<p style="text-align:justify;">물론 ‘국가’가 ‘인민 주권의 전면적인 실현체’가 못되더라도, ‘국가‘가 언제나 반동적인 것은 아니다. 국가는 국민의 범위 한정을 대전제로 하기에, 국민 아닌 이들의 배제를 필연적으로 전제한다. 하지만 ‘시혜적인 국가’는 국민 아닌 이들을 수용하기도 한다. 국가가 여성의 투쟁에 밀려 여성에게 ‘국민 자격’을 부여했듯이, 이주민들에게도 ‘이류 국민’의 자격을 줄 수 있고 잘 하면 ‘일반 국민 자격’을 줄 수도 있다. 하지만 국민은 언제나 국가의 목표에 부합해야 할 의무를 진다. 이 점에서 국가는 제한적이며 억압적이며 반동적이고 보수적이다.

<p style="text-align:justify;">더 큰 문제는 한국 상황에서 국가의 부각이 지니는 보수성이다. 앞의 글에서 이미 언급한 것이지만, 이 국가의 부각이 ‘시민’(또는 ‘국민’)의 발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세계에 내놔도 떳떳할만큼 경제적으로 성장한 대한민국’의 발견에서 비롯됐다는 점이 진짜 문제인 것이다. 이는 필연적으로 ‘국민의 자격’을 ‘떳떳한 대한민국’에 어울리는 존재로 규정한다. 이명박, 한나라당, 조선일보로 대표되는 극우 신문이 거부당하는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그 가운데 중요한 것 하나는 바로, 그들이 ‘떳떳한 대한민국’에 걸맞지 않다는 대중의 ‘생각, 인식 또는 느낌’이다.

<p style="text-align:justify;"><b>2. 무엇을 할 것인가?</b>
<p style="text-align:justify;">내 글에 대한 가장 강력한 비판은 “무엇을 할 것인가”가 빠져있다는 지적이다. “대중이 보수성과 진보성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는 걸 누가 모르나? 그래서 뭘 어쩌자는 건가?” 이 질문이야말로 내 글의 한계를 정확하게 지적한다.

<p style="text-align:justify;"><b>2-1. 실천의 전제</b>
<p style="text-align:justify;">실천과 관련해서 내가 제시할 것은 별로 없다. 이것은 내 한계다. 다만 내가 주장하는 것은, 실천의 전제를 따지자는 것이다. 대중의 진보성과 보수성을 제대로 아는 것이 실천의 첫걸음이라는 것이다.

<p style="text-align:justify;">어떤 이들은 정국이 빠르게 돌아가는데 무능력한 좌파들은 책상머리에서 무엇을 할 것인지만 고민하려 한다고 질타한다. (넓은 의미에서 좌파와 우파로 나눌 때, 그리고 한국의 진보진영에서 ‘좌파’라는 말이 현재 지니고 있는 의미 곧 “진보진영의 좌파”라는 의미에서 볼 때, 내가 ‘좌파’에 속한다는 걸 부인할 생각은 없다. 다만 나는 실천이라고는 하는 게 없으니, 이념적인 측면에서만 ‘좌파’라고 해야 마땅하다.)

<p style="text-align:justify;">그들이 이렇게 질타하는 심정은 이해한다. 상황은 급박하게 돌아가는데 한가하게 있어서는 안된다. 하지만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좌파 또는 진보진영이 지금 상황을 이끌어갈 능력이 없다는 사실 말이다. 게다가 섣불리 개입했다가는 역풍을 만난다. 실천 측면에서 시급한 것은 시위에 최대한 결합하는 것, 그리고 ‘대중과 호흡하는 것’이 아니라 ‘대중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속에서 최대한 많은 쟁점들을 꺼내고 부각시키며 토론하고 설득하는 것이다. 이것을 하지말자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동시에 필요한 것이 있다. 토론하고 설득하고 합의를 끌어내려면 그들이 어떤지 알아야 한다. 그들이 어떤지 모르고 떠들어봐야 왕따만 당한다.

<p style="text-align:justify;">어떤 이들은 “무엇을 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 자체를 부정적으로 본다. 지금은 이 흐름을 최대한 이어가며, ‘내 진솔한 이야기를 꺼내어 놓는 것’이 필요하지, 상황을 이끌어가려고 시도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이 시각은 좀더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한다. 그건 이념적으로는 ‘계몽적 구좌파’와 ‘낭만적 신좌파’의 대립을 연상시킨다. 1960년대에 전면에 등장한 ‘낭만적 신좌파’들은 전략을 거부했다. 그들은 ‘감정의 분출, 욕구의 발산’으로 세상을 바꾸려고 했다. 그리고 이런 태도가 가장 나쁘게 귀결된 지점은 ‘상대주의적 포스트모더니즘’, 자본의 소비 욕망 촉구를 정당화하는 ‘소비주의’였다.

<p style="text-align:justify;">나는 이런 시각을 단호히 거부한다. 계몽의 시대가 지났다는 걸 인정하지만, 전략의 문제는 ‘계몽’이라는 딱지붙이기로 거부하고 말 정도로 하찮은 게 아니다. 쟁점은 계몽의 권위주의를 넘어서는 ‘집단적, 민주적 실천 주체’를 어떻게 형성할 것이냐지, 전략을 무엇으로 대체할 것이냐가 아니다. 전략 그 자체의 한계가 문제가 아니라 그걸 형성하고 실천하는 주체를 어떻게 올바르게 만들 것이냐가 문제라는 말이다.

<p style="text-align:justify;"><b>2-2. 중요한 실천의 지점</b>
<p style="text-align:justify;">무엇을 할 것인지를 제시할 수는 없지만, 현재 상황이 실천 문제에 제기하는 중요한 함의를 찾는 것은 가능할 듯 하다. 그것 바로 소통 곧 커뮤니케이션의 문제다.

<p style="text-align:justify;">지금 제기되는 핵심어 가운데 하나가 바로 ‘소통’이다. 이와 관련해서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시위 현장이 지닌 ‘직접 소통’, ‘진짜 소통’의 장이라는 성격이다. 이에 대해서 흥미있는 분석을 제시하는 이가 프랑스 철학자 보드리야르다. (보드리야르가 포스트모더니스트라는 생각은 일단 접어두자. 사실 그의 커뮤니케이션 이론은 포스트모더니즘이 아니라 ‘급진적 뒤르켐주의’에 바탕을 두고 있다.)

<p style="text-align:justify;">그는 뒤르켐을 따라서 원시 사회와 현대 사회를 구분하면서 이렇게 주장한다. 원시 사회에서는 축제 현장이 ‘상징’을 매개로 한 ‘직접 커뮤니케이션’의 현장이었다. 여기서 사람들은 직접적인 의사소통을 통해 ‘현실’을 접했다. 하지만 현대 사회는 직접적인 의사소통을 ‘언론’이 대체했다. 사람들은 언론이 보여주는 ‘현실’을 간접적으로 구경할 뿐이며, 현실을 직접 접할 수 없게 됐다. 대화는 가능하지 않다. 일방적인 전달만 있다. 그의 이런 주장은 흥미있는 함의를 담고 있다.

<p style="text-align:justify;">촛불 시위 현장을 겪은 사람들은 그동안 적대시하던 노조에 대해서도 상당히 열린 반응을 보였다. 화물연대 파업 지원와 지지가 이를 보여준다. 누구는 이를 대중의 진보성과 개방성, 변화 가능성을 보여주는 걸로 해석한다. 내가 보기에, 이것은 의사소통의 자연스런 결과다.

<p style="text-align:justify;">언론이 보여주는 ‘거짓 형상’ 대신 ‘진짜 현실’을 접하면 사람들은 다른 이의 현실이 자신의 현실과 다르지 않다는 걸 쉽게 안다고 나는 믿는다. 사람은 누구나 진짜 현실을 접하면 변하기 마련이다. 왜냐하면 체제(특히 자본주의 체제)가 만들어내는 ‘비루한 현실’은 대중(또는 민중) 누구에게나 공통되기 때문이고, 사람은 누구나 적어도 자신이 느끼는 고통만큼 남의 고통에 반응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필요한 것은, 서로의 고통에 공감하는 능력을 좀먹는 ‘거짓 형상’을 거둬내는 것이고, ‘거짓 선전’을 극복하는 것이며, 고통을 겪는 사람들끼리 직접 소통하는 것이다. 현대 사회의 진짜 걸림돌은 커뮤니케이션이고 언론이다.

<p style="text-align:justify;">이것이 내가 실천과 관련해서 할 수 있는 말 전부다. 더 이상의 것은 내게 없다.</p>


]]>
			</description>
			<author>marishin</author>
			<category>잡글</category>
			
			<pubDate>Wed, 09 Jul 2008 23:25:47 +0900</pubDate>
		</item>
		<item>
			<guid>http://blog.jinbo.net/marishin/?pid=279</guid>
			<title>올바른 정세 분석을 위하여</title>
			<link>http://blog.jinbo.net/marishin/?pid=279</link>
			<description>
<![CDATA[
<p style="text-align:justify;">미합중국 광우병 위험 쇠고기 수입 반대로 시작된 지금의 정국이 어디로 발전할지 누구도 예측하기 힘들다. 촛불집회와 시위만으로 보면 상황이 더 진전될 기미는 별로 없는 것 같다. 하지만 노조와 같은 조직적 세력들의 참여 측면, 조선 따위의 극우신문 광고주 압박 운동과 한국방송 지키기 운동 따위로 쟁점이 계속 확대되는 점 등은 최근 2주 사이 변화된 모습이다. 촛불집회에 온갖 깃발들이 등장하기 시작한 것도 주목할 변화라면 변화다. (지난번 글에서 운동단체들이 깃발과 조끼를 벗고 집회에 참여해야 한다고 쓴 것이 오류가 아니냐는 지적이 있었다. 부분적으로 수긍할 수 있는 지적이지만, 깃발의 의미 차이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깃발을 내리라는 것은 어떤 권위에 의존하거나 권위를 드러내려는 의도를 버리자는 뜻을 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 국면에서 이 문제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p style="text-align:justify;">아무튼 지금 중요한 것은 정세를 제대로 분석하는 일이다. 정세 분석하자고 하면, 행동 능력 없는 좌파들이 그럴듯한 말만 늘어놓겠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정세 분석이 없이는, 앞으로 무엇을 할지 결정할 수 없다. 정세 분석은 전술과 전략을 세우는 데 아주 중요한 것이다.

<p style="text-align:justify;">‘촛불 집회, 시위 정국’이 길어지면서, 이런 저런 주장들이 나오고 있다. 어떤 이가 정리한 것을 보니, 이명박 이후를 논의할 ‘진보진영 협의체’를 만들자는 주장, ‘제헌’이 필요하다는 주장, ‘제헌’에 앞서 주민소환제를 실시하자는 주장 따위가 있다고 한다. 이외에도 노조가 총파업을 벌임으로써 전선을 한층 확대시켜야 한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모두 나름대로 의미있는 주장들일 수도 있지만, 떨쳐버릴 수 없는 것은 과연 이런 주장을 하는 이들이 제대로 정세를 분석하고 하는 소리인가 하는 의구심이다. 객관적인 정세 분석이 없는 당위적인 주장은 심각한 해악을 끼친다.

<p style="text-align:justify;">위에 거론한 주장들은 공통적으로 지금의 시위 대중이 ‘진보적’ 또는 ‘급진적’이라고 보는 듯 하다. 이명박 퇴진을 전제로 한 이후 체제 논의로 옮겨가도, 제헌 목소리를 높여도, 노조가 총파업을 벌여도, 시위 대중이 강하게 호응할 것이라고 전제하지 않으면 현실성이 없는 주장들이기 때문이다.

<p style="text-align:justify;">그런데 과연 그럴까? 정말 그렇다면 문제가 전혀 없겠지만, 아니라면 정세에 혼란을 가져올 가능성이 높다. 정세를 너무 앞서가는 주장은 현실에 유효한 도움을 주지 못하고 기껏 자기만족에 빠지기 쉽다.

<p style="text-align:justify;">그래서 제대로 된 정세 분석이 필요한데, 그 이전에 짚고 넘어갈 일들이 있다.

<p style="text-align:justify;"><b>1. 대중은 진보적인가?</b>
<p style="text-align:justify;">나는 촛불집회에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온갖 목소리를 쏟아내는 장면이 착시 현상을 일으키기 쉽다고 본다. 그들이 굉장히 급진적이고 진보적이라는 착각 말이다. 대중은 현재 단지 미합중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에만 공명하는 것이 아니라 건강보험 민영화, 물 산업 민영화 따위의 민영화(사유화) 반대 목소리에도 공감을 표시하고 있다. 게다가 극우신문들의 해악을 깨닫고 공영방송의 중요성까지 인식하기 시작했으니, 놀라움을 넘어 감탄과 희망에 빠져 바라볼 수도 있겠다.

<p style="text-align:justify;">하지만 몇달 전까지는 보수화로 치닫던 사람들이 어떻게 갑자기 진보적으로 돌변할 수 있는가? 대통령 선거에서의 압도적인 승리는 논외로 하더라도, 얼마전 총선에서 한나라당의 승리를 그저 ‘낮은 투표율’ 탓으로 돌리고 말 수는 없다. 한국 사회가 보수화하고 있다는 것은 그저 표면만 본 착각에 불과했단 말인가? 이런 질문에 설득력 있게 답하지 못한다면, 현재 대중이 진보적이라는 생각은 기각되어야 마땅하다.

<p style="text-align:justify;">그럼 지금의 이 모습이 진보적, 급진적인 것이 아니면 무엇인가?

<p style="text-align:justify;">현재의 모습은 첫째 모든 권위의 거부이다. 이 거부는 하루 아침에 이뤄진 것이 아니고 적어도 2000년 이후 한국 사회를 가장 확실하게 특징짓는 현상인 ‘불신’이 계속 쌓이다가, ‘기존 정치 일반의 무능’, 특히 ‘나의 생존과 안전에 대한 위협’에조차 반응하지 못하는 ‘정치의 총체적인 무능’에 대한 폭발적인 분노로 터진 것이다.

<p style="text-align:justify;">다른 말로 하면, 한국의 시민들은 ‘지배층의 부도덕’(땅투기, 병역 기피, 학력 위조, 거짓말)부터 ‘경제 침체’로 대표되는 ‘무능력’에 이르기까지 가지가지로 질리다 못해, 이제 그들의 부도덕과 무능 때문에 ‘생명의 안전’까지 위협받는다고 느낀다. 쇠고기 이외의 문제들 가운데 건강보험 민영화 문제가 가장 먼저 부각되고 대중의 큰 호응을 얻은 것은 우연이 아니다. ‘안전’이라는 측면에서 긴밀하게 얽히는 문제다. 물 문제, 전기 문제도 이와 비슷하게 생존과 안전이라는 측면에서 ‘피부에 와닿는’ 문제들이다.

<p style="text-align:justify;">하지만 대중의 급진성은 딱 여기까지다.

<p style="text-align:justify;"><b>2. 대중은 국가에 무엇을 요구하는가?</b>
<p style="text-align:justify;">대중의 급진성을 따지려면, 그들이 국가를 어떻게 보는지도 알아야 한다. 지금까지 60년동안 한반도 남쪽에 ‘국가’는 존재하지 않았다. 우파들에게 국가는 곧 대통령으로 대표되는 정부였고, 좌파들에게 국가는 ‘폭력적인 억압 기구’일 뿐이었다. 이렇게 국가가 없으니, 시민도 없었다. 우파나 좌파나 모두 ‘민족’에 집착한 것은 이 때문이다. 국가와 국가를 구성하는 시민을 민족이 대체했고, 그래서 이 ‘민족’은 보수적이고 진보적인(또는 저항적인) 두가지 성격을 동시에 지녔다.

<p style="text-align:justify;">하지만 언제인가부터 이 땅에도 ‘국가’ 개념이 현실로 다가오기 시작했는데, 그건 ‘시민’의 발견에서 비롯됐다기보다는 ‘한국’에 대한 자부심에서 비롯됐다. 2002년 월드컵을 계기로 ‘한국’ 대신 ‘대한민국’이라는 호칭이 널리 쓰이기 시작했다. 이 ‘대한민국’은 경제적으로 내세울만한 나라다. 정보통신 강국, 세계 10권에 육박하는 경제 대국이다. 게다가 이런 경제력은 월드컵 축구 4강, 박세리를 중심으로 한 골프 강국,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박태환과 김연아로 대표되는 수영과 피겨스케이팅의 성과까지 가져다줬다. 가짜로 귀결되고 말았지만 황우석도 있었고, 할리우드와 겨루겠다는 심형래도 빼놓을 수 없다.

<p style="text-align:justify;">반면에 정치 현실은 이런 자부심에 전혀 걸맞지 않았다. 여당이건 야당이건 ‘자랑스런 대한민국’에 걸맞은 정치를 보여주지 못하긴 마찬가지다. 외교 또한 ‘대한민국’이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다. 효순-미선 사건에 뒤늦게 수많은 사람들이 분노해 거리로 나온 것도 바로 ‘자랑스런 대한민국’에 걸맞지 않은 ‘굴욕적 대미 관계’와 무관하지 않다. 그것은 반미라기보다, 이제 우리도 ‘미국’에 좀더 당당해지고 싶다는 의지의 표시다.

<p style="text-align:justify;">그런데 이런 대중의 요구와 기존의 국가관은 어울리지 않는다. ‘자랑스런 대한민국’은 ‘무능한 정부’로 대표될 수 없고, ‘폭력적 억압 기구’의 틀 안에 가둬둘 수도 없는 개념이다. 이런 불일치가 해소되지 않고 지속되는 가운데 ‘국민의 생명’을 아랑곳하지 않는 ‘굴욕적 쇠고기 협상’이 터져나왔다. 광우병 위험 쇠고기 수입은 ‘자랑스런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에 대한 자부심을 여지없이 무너뜨리는 것이었다.

<p style="text-align:justify;">이런 상황은 ‘국가’를 다시 구성할 필요성을 제기한다. 경제 강국은 ‘삼성’으로 대표되는 기업이 이뤄냈고, 세계에 내세울 스포츠 강국은 ‘박태환’과 ‘김연아’가 이뤄냈다면, 정치(또는 민주주의)와 외교는 누가 맡을 것인가? ‘우리가 바로 민주주의’라는 구호는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날로 커져가고 있는 ‘기존 권위에 대한 거부’도 ‘국가의 재구성’을 부추기고 있다. 그동안 꾸준히 자라오던 ‘시민’이 불려나올 수밖에 없다.

<p style="text-align:justify;">이제 한국인들은 진정 근대적 의미에서의 ‘국민국가’와 ‘시민’에 눈을 뜨고 있다. 그리고 이 ‘국가’는 ‘모든 권위에 대한 거부’ 끝에 발견한 ‘해법’이다. 그 자연스런 귀결은 이 ‘국가’가 우선 광우병 쇠고기를 저지해야 하며 이어서 ‘시민’의 건강을 지켜줄 건강보험을 제공해야 하고, 물과 전기를 안정되게 공급해야 한다. 그리고 마침내 ‘지속적인 경제 성장’도 제공해야 한다. 그래야 ‘자랑스런 대한민국’이 계속 유지될 수 있다.

<p style="text-align:justify;">이런 결론은 다시 첫번째 질문으로 돌아가게 만든다. 대중은 진보적인가? 대중은 새로운 ‘국가의 구성’을 요구하는 한에서 ‘진보적’이지만, 그 진보는 ‘국가’로 귀결되는 한에서 아주 반동적이고 권위적이며 보수적이다. 결국 이제 좌파 또는 진보 세력은 ‘탈계급적 국가주의’ 아니 ‘비계급적 국가주의’(사실 언제 한국의 사회 인식 일반이 계급적인 적이나 있나?)를 직시해야 할 때가 온 듯 하다.</p>



]]>
			</description>
			<author>marishin</author>
			<category>잡글</category>
			
			<pubDate>Mon, 16 Jun 2008 13:23:15 +0900</pubDate>
		</item>
		<item>
			<guid>http://blog.jinbo.net/marishin/?pid=278</guid>
			<title>'광우병 반란', 어떻게 이끌 것인가?</title>
			<link>http://blog.jinbo.net/marishin/?pid=278</link>
			<description>
<![CDATA[
<p style="text-align: justify;">지금의 시위 국면을 두고 논란이 벌어지고 있다. 논란의 핵심은 아무래도 시민의 자발성과 지도부의 지도 문제다. 이 논란은 '다함께'가 행진을 앞장서서 이끄는 데 대한 반감, 심지어는 '다함께'가 시위대를 동대문까지 이끌어 가서는 어이없게도 갑자기 해산시키려 했던 일에서 촉발됐다. 하지만 이 문제는 지금의 시위가 어디로 향해 갈 것인가라는 중차대한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 정세적으로 굉장히 중요하고 시급한 문제다.

<p style="text-align: justify;"><b>1. 사실들의 정리</b>
<p style="text-align: justify;">1) 시위대는 아주 자발적으로 구호를 결정하고 행진을 벌이고 있다.
<p style="text-align: justify;">2) 사실상 지도부는 존재하지 않으며 '대책회의'와 이 대책회의에 속한 '다함께' 따위의 집단이 이들을 이끌어보려고 하지만 별로 성공적이지 못하다.
<p style="text-align: justify;">3) 별다른 힘이 없는 대책회의와 다함께를 빼고 어떤 단체도 조직적으로 개입하지 않고 있다.
<p style="text-align: justify;">4) 그래서 이 시위 양상이 어디로 갈지, 어떻게 발전할지 아무도 모른다.

<p style="text-align: justify;">한마디로, 어디로 갈지, 궁극적인 목표치가 무엇인지 아무도 모르지만 시민들이 분노해서 계속 나오고 있으며 이런 흐름을 이끌거나 지도할 세력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대중을 지도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직시해야 할 사실은 '지도'를 운운할 상황이 아님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p style="text-align: justify;">상황이 이런 것은 이 시위의 성격에서 비롯된다. 이 시위는 모든 권위에 대한 거부의 몸짓이다. 여기에는 이른바 기존의 '운동권' 거부도 포함된다. 이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p style="text-align: justify;">이 대전제를 이해하지 못하고 '지도' 운운하는 것은 일고의 가치도 없다. 교과서적 원론을 운운하는 일은 골방에서는 유효할지 몰라도, 2008년 5월 한국의 심장부에서 벌어지는 이 무정부적인 분노의 폭발을 논할 때는 한낱 관념의 유희에 불과하다. (사실 '다함께'의 행태는 이와 또 다르다. 그들은 '관념의 유희'나 '관성'에서 움직이는 것이 아닌 것 같다. 이것이 그들의 생존 방식처럼 보인다. 이에 대해서는 다시 쓸 기회가 있을 것이다.)

<p style="text-align: justify;"><b>2. 시민 자발성의 의의와 한계</b>
<p style="text-align: justify;">이번 시위만큼 시민들의 자발성이 두드러진 사례도 별로 없는 듯 하다. 물론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거리로 나온 사례는 수도 없이 많다. 사실, 시민들의 자발적인 참여 없이 가능한 대규모 시위와 항쟁은 없다.

<p style="text-align: justify;">그럼에도 이번 시위의 자발성이 중요한 것은 다른 이유 때문이다. 앞에서도 이야기했고, 전에 쓴 글에서도 계속 강조했지만, 이 시위의 핵심은 “기존 세력 모두에 대한 거부 선언”이다. 국민의 밥상이 위협받는 데도 아무 반응이 없는 정치권에 대한 거부, 거짓을 일삼고 제 살 길만 찾는 기득권층에 대한 거부, 이들을 감싸는 데만 급급한 언론에 대한 거부다. 그리고 분명한 사실 한가지는 노동조합과 운동 단체에 대한 거부도 포함된다는 것이다. 노조나 운동 단체로서는 억울할지 모르지만, 자신들이 대중으로부터 지지받지 못한다는 것은 인정해야 한다. (그 이유가 보수언론의 거짓 공세에 물든 탓인지, 비정규직을 외면하는 등 이기적인 모습을 보인 탓인지, 그건 지금 당장은 시급하게 따질 문제가 아니다.)

<p style="text-align: justify;">시위의 본질이 이렇게 때문에 거리의 시민들은 당연히 지도를 거부한다. '다함께'는 이 본질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한 채 나섰다가, 29일을 기점으로 일단 후퇴한 듯 하다. 다른 운동단체들은 이 본질을 어렴풋이라도 느끼고 관망하는 듯 하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아무리 봐도 '개입의 지점'이 보이지 않는 것이리라. 재빠르게 개입의 지점을 파악하고 움직일 수준만 됐어도, 이 땅의 운동단체들이 무기력하고 경직되어 있다는 비판을 받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역시 현대자동차 노조만한 곳은 없다. 욕도 많이 먹지만 그들은 29일부터 조직적으로 집회에 결합했다고 한다. 그들이 어떤 식으로든 '개입의 지점'에 대해 감을 잡았다는 소리다.)

<p style="text-align: justify;">시민들의 자발성은, 이 권위에 대한 거부 때문에 더없이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이 땅의 모든 권위와 기득권층에 대한 총체적인 거부, 이것만큼 무서운 것이 없다. 그들이 만약 야당이 동참할 분위기를 만들었다면 이번 싸움은 벌써 끝났을 것이다. 시위는 야당 정치인들의 공허한 발언 속에 사그라들고 정국은 곧 '여-야 영수회담' 따위의 더러운 정치 타협 국면으로 바뀌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시위대 상당수는 허탈감 속에 집으로 돌아갔을 것이고, '역전의 용사들'만 끝까지 남아 '타협과 개량'을 거부하는 '메아리 없는 구호'를 외치다가 경찰에게 무자비하게 진압당했을 것이다. 지금까지 이런 식으로 귀결되는 걸 한두번 본 게 아니다.

<p style="text-align: justify;">하지만 이번 시위는 이렇게 되지 않았고, '당분간'도 마찬가지다.

<p style="text-align: justify;">그런데 문제는 이 '당분간'에 있다. 이 양상이 얼마나 더 지속될지, 과연 어떻게 귀결될지, 너무나 불안한다. 어떤 식으로든 '지도'의 필요성이 있다. 아니 좀더 정확하게는 '전략'을 제시할 세력이 필요하다. 전술은 고민할 것도 아니다. 이미 대중이 확고한 전술을 만들어내 실천하고 있다. '비폭력'으로 무조건 계속 모인다는 전술 말이다. '비폭력'이 만능은 아니지만, 대중은 비폭력만이 이 국면을 이어갈 확실한 전술임을 몸으로 느끼고 있다. 하지만 그 다음 문제는 누구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p style="text-align: justify;"><b>3. 어떻게 이끌 것인가?</b>
<p style="text-align: justify;">이 문제를 고민하기 전에 먼저 고민할 것은, 어떻게 시위에 <b>조직적으로 결합할</b> 것인가다. 상당수의 조직들이 이 시위에 조직적으로 결합하지 못하는 이유는 아마도 무슨 목소리를 낼지 모르기 때문일 것이다. 대중들은 그저 '광우병'에만 집착하고 있고, 미국산 쇠고기 문제의 본질적인 문제인 '한-미 자유무역협정'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거나 오히려 지지하는 듯 하다. 한마디로, 운동권이 보기에 지금 시위의 요구는 너무나 부르주아적이다. 변혁적 가능성이 보이지 않는다.

<p style="text-align: justify;">이런 생각을 한다면, 그건 운동단체들이 얼마나 현실과 동떨어져 있느냐를 보여주는 것이다. 교육 문제, 건강보험 민영화, 물 사유화 따위에 대한 반대 목소리가 적지 않게 제기되고 있다는 사실은 논외로 하더라도, 지금보다 더 변혁적인 상황은 없다. 모든 권위에 대한 거부만큼 더 변혁적인 움직임이 있는가?

<p style="text-align: justify;">운동단체들은 지금이라도 조직적으로 시위에 결합해야 한다. 다만 깃발은 내리고 단체 조끼는 벗고 나가라. 깃발 들고 조끼 입은 사람들은 모든 권위를 총체적으로 거부하는 사람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동안 당신들이 싸워온 노력과 활동을 부정하자는 소리가 아니다. 당신들이 원하는 게, 투쟁 경력을 대중들로부터 인정받는 것인가? 세상을 바꾸자고 싸웠지, 싸운 경력을 인정받자고 싸웠나? 당신들은 운동 경력 내세워 금뱃지 달고 기껏 민주화운동 보상금에 연연하는 '386'들을 그토록 경멸하지 않았던가?

<p style="text-align: justify;">두려워 할 것은 없다. 지금 할 일은, 모든 권위에 대한 총체적 거부에 동참하는 것이다. 여기에 동참함으로써 대중들의 신뢰를 얻고, 운동단체들이 또 하나의 권력, 또 하나의 권위가 아님을 증명해보여야 한다. 그리고 그 안에서 하나씩, 하나씩, 민주적으로 설득하고 호소해야 한다. 그렇게 대중의 동의와 승인을 받아야 '지도'가 가능하다. '지도'는 '지도받을' 대상이 인정하지 않는 한 가능하지 않다. 똑똑한 척 한다고, 책 좀 읽었다고, 시위 좀 했다고, 지도부의 권위를 인정해줄 사람은 이제 한국 땅에 단 한명도 없다.

<p style="text-align: justify;">나는 운동단체들을 걱정해서 이야기하는 게 아니다. 오래간만에 찾아온 이 결정적인 국면을 또 다시 그냥 보낸다면, 이 땅의 희망은 사라진다. 우리 아이들에게 희망을 찾아주기 위해서라도, 지금 당장 겸손한 자세로 나서야 한다.</p>



]]>
			</description>
			<author>marishin</author>
			<category>잡글</category>
			
			<pubDate>Fri, 30 May 2008 22:03:22 +0900</pubDate>
		</item>
		<item>
			<guid>http://blog.jinbo.net/marishin/?pid=277</guid>
			<title>'다함께'는 공개 해명하라!!!</title>
			<link>http://blog.jinbo.net/marishin/?pid=277</link>
			<description>
<![CDATA[
<p style="text-align: justify;">오늘 나는 오마이뉴스의 보도 내용을 보고 너무나 충격을 받았다. 그 내용은 이렇다.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15pt; margin-right: 15pt;">시민 1000여명이 동대문에 위치한 쇼핑몰 '두타' 앞 도로 5차선을 점거하고 있다. 시민들은 촛불문화제가 열렸던 청계광장이 전경차와 전경에 가로 막히자 청계천 밑으로 우회해 동대문으로 행진해왔다.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15pt; margin-right: 15pt;">이들을 선두에서 이끌던 운동그룹 '다함께'의 한 회원이 "경찰들이 우리를 막았지만 우리는 경찰을 뚫고 여기까지 왔다"며 "앞으로 계속 목소리를 내기 위해 이렇게 거리로 나와야 한다"고 말했다.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15pt; margin-right: 15pt;">그러나 그는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자"며 해산을 선언해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해산을 거부하는 일부 시민들은 해산 선언을 주도한 '다함께'를 이렇게 비판했다.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15pt; margin-right: 15pt;">"'다함께'가 우리의 리더냐? 여기까지 왔는데 왜 갑자기 해산하느냐? 이럴 거면 왜 뛰어 왔느냐? 이해할 수 없다."</p>

<p style="text-align: left;">출처 <a href="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911760&PAGE_CD=N0000&BLCK_NO=3&CMPT_CD=M0001&NEW_GB=">오마이뉴스</a> (기사 확인 시간: 한국 시각 5월29일 오전 2시27분)

<p style="text-align: justify;"><b>나는 이 중요한 국면에서 '다함께'가 이런 일을 하지 않았기를 간절히 바란다. 하지만 만약 사실이라면 '다함께'는 용서할 수 없다. '다함께'는 공개적이면서도 분명하게 이 보도에 대해 해명해야 한다. 분명한 해명은 '다함께' 자신들을 위해서도 좋은 일일 것이다.</b></p>



]]>
			</description>
			<author>marishin</author>
			<category>잡글</category>
			
			<pubDate>Thu, 29 May 2008 02:48:03 +0900</pubDate>
		</item>
		<item>
			<guid>http://blog.jinbo.net/marishin/?pid=276</guid>
			<title>한국은 혁명을 맞을 것인가?</title>
			<link>http://blog.jinbo.net/marishin/?pid=276</link>
			<description>
<![CDATA[
<p style="text-align: justify;">촛불집회가 계속 이어지더니 급기야 시위로 발전했다. 세종로가 뻥 뚫리고, 시위대가 새벽까지 도심에서 경찰과 맞섰다. 그동안 책임있는 반응을 보이지 않던 정부는 폭력적인 시위 진압으로 시민들의 분노만 키우고 있다. 처음 촛불집회가 시작됐을 때와 지금의 상황은 아주 다르다. '광우병 정국'이 이제 '혁명' 상황으로 변화하는 것일까? 지금 상황의 가장 큰 특징은 '새로움'과 '자발성'이다.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1. 새로움</strong>
<p style="text-align: justify;">세상사에 완전히 새로운 것은 없지만, 지금의 상황은 그동안 보던 것들과 많은 면에서 다르다.

<div style="text-align: center;"><img width="500" height="323" alt="" src="/files2/16/marishin/images/200805/270530484.jpg" /></div>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1)  “MB 니가 뭔데 우릴 막아”</strong>
<p style="text-align: justify;">첫번째 촛불집회 바로 다음날인 5월3일에 나는 이 사태의 중심에 이른바 '386세대' 이후의 젊은이들이 있다고 보고 글을 썼는데, 그 이후 사태는 주도 세력이 고교생들이었음을 보여줬다. 그렇다고 20대가 전혀 없지는 않았겠지만, 아무튼 이 점은 주목할 만 하다. 한국 사회가 발전하면서 '우리의 자식들'이 똑똑해졌음이 확인되고 있다. 누구는 여학생들의 당돌함으로 상징되는 집회 양상을 미학적이라고 규정했던데, 나는 이것이 한국 사회가 발전했음을 보여주는 징표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주장을 당돌하게 말할 수 있고, 대통령쯤은 우습게 아는 태도, 이것보다 새로운 현상은 별로 없다. 시위 현장에 등장한 “MB 니가 뭔데 우릴 막아”라는 펼침 종이가 이걸 상징한다. 노무현이 대통령도 별 것 아님을 몸소 보여줌으로써 한국의 뿌리깊은 권위주의를 끝장냈지만, 노무현이 한 일은 마무리에 불과했다. 물밑에서 자라나고 있던 똑똑하고 당돌한 젊은이들이야말로, 권위주의를 무너뜨린 진짜 밑바닥의 힘이다.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2) “우리가 바로 민주주의!”</strong>
<p style="text-align: justify;">두번째 새로운 것은, 민주주의에 대해 시민들이 진짜 눈을 떴다는 것이다. “MB 니가 뭔데 우릴 막아”라는 주장은 필연적으로, 그리고 논리적으로 “우리가 바로 민주주의!”라는 주장과 연결된다. 아니 이 두가지 구호는 같은 주장을 다르게 표현한 것에 불과하다. 이제 똑똑하고 당돌한 '대한민국의 젊은이'들은, 어떤 권위도, 어떤 제도도, 어떤 세력도 자신들을 막을 수 없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대통령도 별 것이 아니고, 정치인들도 별 것이 아니며, 언론은 더욱 더 하찮다. “딱딱한 것들이 모두 허공 속으로 녹아 사라지는” 형국이다.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3) “들어봐!“</strong>
<p style="text-align: justify;">불만 있고, 할 말 있는 사람들이 나서서 마음껏 떠드는 모습, 이 또한 지금까지 별로 보지 못하던 일이다. 권위주의를 거부하는 이들이, 집회 진행자인들 신경 쓰겠나? 그러니 거리 곳곳에서 자유 발언이 이어진다. 일사불란한 진행, 식순에 따른 행사 따위는 자리잡기 어렵다. 모든 사람이 할 말이 있다. 그들 각각 “들어봐!“라고 외친다. 아무도 들어주지 않아서 거리로 나섰으니, 그들이 말을 쏟아내는 건 당연하다. 너나 할 것 없이 하고 싶은 말을 떠드는 '말의 잔치', 한국에서 이것만큼 낯선 현상도 드물다. 프랑스 68혁명에 비교할만한 일이 서울의 심장부에서 벌어지고 있다.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4) 깃발 대신 카메라</strong>
<p style="text-align: justify;">똑똑하고 자긍심 강한 개인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오니, 미디어 활용 방식도 달라진다. 전통적으로 집회에 등장하던 깃발들이 자취를 감췄다. 대신 사람들은 카메라를 손에 들었다. 깃발은 집단적 정체성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크고 작은 단체들이 자신들의 깃발 아래 모여 함께 행진하고 외쳤다. 이제는 개인들이 자신의 정체성과 존재감을 사진과 영상을 찍어 전파함으로써 표현하고 있다. 기존 언론이 촛불집회를 외면하는 것에 분노하지만, 애초부터 그들의 주요 관심 대상은 아니다. 그들에겐 인터넷 블로그와 동영상 공유 사이트가 있기 때문이다. 미디어 활용에도 큰 변화가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p style="text-align: justify;">하지만 중요한 점은 이런 새로움이 10대의, 또는 20대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들이 주도하는 변화이기는 하지만 이 변화는 시대의 흐름을 반영하는 것이다. 그래서 기성 세대도 이런 변화가 낯설기만 하지는 않다. 이 때문에 별다른 갈등 없이 모든 세대가 촛불집회에, 거리 행진에 녹아들고 있는 것이다.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2. 자발성</strong>  </p>
<p style="text-align: justify;">지금의 사태를 규정하는 또 한가지 특징은 자발성이다. 정부는 촛불집회의 배후 세력을 찾아보려고 애쓰고 있지만, 결국 찾지 못할 것이다. 시민들은 뭔가 모를 답답함, 정부에 대한 절망감, 분노를 이기지 못해서 무작정 거리로 나섰다.

<p style="text-align: justify;">자발성을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아마도 미국 소고기 수입 반대 광고일 것이다. 여성들이 주축이 된 패션 관련 카페인 '소울드레서' 회원들이 십시일반으로 돈을 모아 일간지 1면에 광고를 냈다. 바로 이어서 미국 야구에 관심있는 사람들이 모인 'MLBPARK' 회원들도 신문에 광고를 냈다.

<p style="text-align: justify;">정치적이지 않은 인터넷 모임 회원들이 1천만원이 넘는 큰 돈을 모으고, 직접 광고를 만들어서 신문 1면에 실었다는 사실은 정말 놀랍다. 물론 이런 식의 모금 활동이 완전히 없던 것은 아니다. 연예인 팬카페에서는 흔히 이런 식으로 돈을 모아, 연예인에게 선물을 하고 잔치를 벌이곤 한다. 이런 일이 정치적인 신문 광고를 내는 데까지 발전한 것이다. 하지만 이 두가지는 표면상의 유사성보다 훨씬 큰 차이를 담고 있다. 정치적 의사 표현을 위해 서로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이 돈을 모으고 광고를 제작한다는 건, 말 그대로 '듣보잡'(듣도 보도 못한 것)이다.

<p style="text-align: justify;">게다가 'MLBPARK'의 광고는 겉모습에서도 차원이 다른 세련됨을 자랑한다. 푼돈들이 차곡차곡 들어온 예금 통장 사진, 그리고 파란색과 빨간색의 강렬한 대조, “버스 세 정거장을 걸어갔습니다”, “얼굴 한번 본적 없는 사람에게 돈을 보냈습니다”, “아이가 울지만 로보트를 외면했습니다” 따위의 문구. 이 광고는 “잘못된 것은 잘못되었다고 말하고 싶었습니다”라는 자신들의 주장을 더 없이 세련되고 호소력있게 제시한다. 이제 '대한민국'은 정치적 의견 광고에서조차 '촌스러움', '감정 과잉'이 용납되지 않는 시절을 맞고 있다.

<div style="text-align: center;"><img width="600" height="227" src="/files2/16/marishin/images/200805/270533207.jpg" onclick="viewPostImage('/files2/16/marishin/images/200805/270533207.jpg')" onload="setTimeout('fixImage(5926378)',300)" id="my_post_img5926378" style="" alt="" /></div>

<p style="text-align: justify;"><strong>3. '개성과 집단의 만남'이 혁명을 부를 것인가?</strong>
<p style="text-align: justify;">이 새로움과 자발성은 한마디로 '자유로운 개인들의 자발적이고, 개성적이며, 자유로운, 집단적 의사 표현'으로 규정될 수 있다. 개성과 집단이 접점을 만난 것이다. 새로운 혁명을 꿈꾸는 이들이 형성하려고 애쓰던 것이 바로 이 '개성과 집단의 접점'이다. 하지만 이 일은 쉽지 않고 일시적인 일이 되기 쉽다. 거리로 나선 한국의 젊은이들을 뭔가 찜찜한 마음으로 바라보게 만드는 것의 정체가 바로 이것이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개성과 집단의 접점'은 아주 일시적이고 즉흥적이며 불안해보인다. 이 접점이 순식간에 깨지면서, 젊은이들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자신들만의 '개성'으로 후퇴할지 모른다는 불안감, 이 불안감은 일부 비관주의자들만 느끼는 게 아니다. 

<p style="text-align: justify;">그래서 아직 혁명을 말하기 어렵다. 하지만 '정통 좌파적' 비관은 배격되어야 마땅하다. “그래 보니 뭐가 바뀌겠는가?” “결국 자본주의의 논리에 포로가 된 그들의 한계는 분명하다.” 따위의 생각을 나는 적극적으로 반대한다. 이런 생각에 매몰된 이들은 진짜 잠재력을 보지도 못하고, 그 잠재력을 깨워 발전시키지도 못한다.

<p style="text-align: justify;">분명한 사실은 한국의 젊은이들이 자본의 논리, 상품의 논리를 이미 부분적으로 넘어섰다는 점이다. 68혁명의 정신 곧 '당신의 감정을 마음껏 발산하라'는 구호를 자본은 고스란히 가져다가, '당신의 감정을 마음껏 발산하라, 단 우리 상품을 소비함으로써.'로 변질시켰다. 지금 당장 텔레비전을 틀어보라. 똑같은 소리를 주장하는 핸드폰 광고, 디지털카메라 광고가 넘쳐난다.

<p style="text-align: justify;">이 광고에 세뇌된 것 같던 젊은이들이 진짜 일을 벌였다. 그들은 핸드폰으로, 카메라로, 경찰의 폭력 진압 현장을 찍어서 고발하고 있다. 정말 곧이 곧대로 믿고, 자신들의 분노, 자신들의 감정을 생생히 표현하고 있다. 엽기적인 동영상이나 주고 받으며 즐기라고 만들어준 동영상 사이트를 시위 현장 생중계 사이트로 변모시켜 버렸다.

<p style="text-align: justify;">더 중요한 점은 '진정한 커뮤니케이션'의 경험이다. 현대 사회는 미디어에 표현된 허상을 통해서만 현실을 경험할 수 있는 사회다. 언론에 나타난 모습을 수동적으로 소비하는 대신 사람들이 직접 만나고 대화하고 느끼는, 진짜 커뮤니케이션은 사라졌다. 촛불집회는 이런 가짜 현실에 파열구를 내고 있다. 이 집회에 참석한 이들은 진짜 사람을 만나고 진짜 하나되는 경험을 했다. 경찰에 끌려가는 시위대를 구출해내고, 함께 도망치고, 다쳐서 피 흘리고, 피 흘리는 사람을 부축해주는 '폭력적인' 경험 또한 소중하기는 마찬가지다. 보드리야르의 주장처럼, 진짜 커뮤니케이션은 축제이자 폭력의 현장에서 생겨난다.

<p style="text-align: justify;">이 경험은 되돌릴 수 없는 경험이다. '진짜 현실'을 한번 겪은 사람은 그 기억을 지울 수 없다. 과거로 되돌아갈 수 없다. 그리고 이런 경험이 없는 혁명은 상상할 수 없다.

<p style="text-align: justify;">그 자리에 '태극기'가 난무한다고, '국가'와 '민족'이 판친다고 궁시렁거릴 일이 아니다. 태극기가 피 흘리는 사람의 붕대로 쓰이는 순간, 태극기는 전혀 다른 의미와 상징으로 거듭날 수 있다. 진짜 과제는 기존의 상징과 의미들을 새로운 상징과 의미로 탈바꿈시키는 일이다. 냉소적인 좌파들이 진짜 한탄할 것은, 대중의 모호성과 변덕이 아니라, 현장에서 새로운 상징을 만들어낼 능력이 없는 자신들의 무기력이다. 컴퓨터 앞에서 궁시렁거리기만 하리라고 생각했던 여학생들도 거리로 나서지 않았는가?</p>


]]>
			</description>
			<author>marishin</author>
			<category>잡글</category>
			
			<pubDate>Tue, 27 May 2008 05:55:59 +0900</pubDate>
		</item>
		<item>
			<guid>http://blog.jinbo.net/marishin/?pid=275</guid>
			<title>'광우병 정국' 단상</title>
			<link>http://blog.jinbo.net/marishin/?pid=275</link>
			<description>
<![CDATA[
<!--FCKeditor--><p>지구 반대편 한 구석에서 학교 과제물 때문에 정신을 못 차리는 신세라 그냥 넘어가려고 했는데, 금요일 밤 서울 한복판에 1만명이 모여 촛불 집회를 했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더 참지 못하게 됐다.</p>
<p>&nbsp;</p>
<p>&nbsp;</p>
<p><strong>1. 이 사태를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strong> </p>
<p>&nbsp;</p>
<p>금요일 밤에 시민들이 1만명이나 모였다니 보통 일이 아니다. 게다가 집회 장소도 다름 아닌 청계천이라니, 이건 굉장히 상징적이며 아이러니하다. 이쯤 되면 '광우병 정국'이라는 말도 그리 과장은 아니다. 다만 이 정국에 정치인들이 없다뿐이다. 그래서 더욱 '정치적인' 사태다. 왜냐하면 요즘 가장 정치적인 상황은 정치가 실종되고 정치가 위기에 처할 때에 나타나기 때문이다. 좀더 풀어서 표현하자면, 시민들이 어떤 위협을 느끼고 정치인들이 이 위기의식에 호응하지도, 반응하지도 않는다고 느끼는 사태, 이것보다 더 정치적인 사태는 없다는 말이다. 그리고 '세계화한 시장의 힘'이 정치를 압도하는 요즘 전세계적 상황 곧 '신자유주의 세계화' 상황에서, 정치의 실종은 특별한 현상도 아니다. </p>
<p>&nbsp;</p>
<p>이제 바야흐로, 정치는 전혀 다른 곳에서, 전혀 다른 모습으로 실현되지 않으면 안되는 국면에 온 것이다. 이건 정치의 죽음이 아니라 진정한 정치가 살아날 수 있는가 여부를 가를 '결정적 위기 국면'이다. </p>
<p>&nbsp;</p>
<p>그래서 어떤 면에서는 아주 심한 아이러니로 보이기도 한다. 먼저, 총선의 저조한 투표율, 특히 젊은층의 정치 무관심을 개탄하고 '민주주의의 위기'를 논하던 '전문가'들은 얼굴을 들지 못하게 생겼다. 이른바 '요즘 젊은이들'은 무기력하지도 않으며, 정치 의제를 제기할 능력도 있으며, 비록 소극적으로 보일지 몰라도 '촛불집회'라는 정치적 동원을 성사시킬 의지도 있음이 다시 한번 확인됐다. (여기서 '요즘 젊은이'는 이른바 '386세대' 이후를 통칭하는 것이다.) 그들은 선거 그리고 정치와 전혀 무관한 다른 상황에서 '정치적인 의지'를 표출했다. </p>
<p>&nbsp;</p>
<p>그렇다고 무작정 '키보드 전사'들을 찬양하는 행위는 곤란하다. 이런 띄워주기는 '천박함' 이상도, 이하도 아니고 아무짝에도 쓸모없다.</p>
<p>&nbsp;</p>
<p>&nbsp;</p>
<p><strong>2. '광우병 정국'은 어떻게 가능했나?</strong> </p>
<p>&nbsp;</p>
<p>중요한 것은 바로 이 질문이다. 어떻게 이번 사태가 '광우병 정국'으로 부를 수 있는 상황까지 발전했는가? 이 질문에 답하는 것이야말로 새로운 정치의 가능성을 탐색하는 데 긴요하다. (우리가 머리 속에 담고 있는 '썩은 정치', 부패하고 더러운 정치라는 이미지는 지워버리자. 지금 논하는 것은, 이미 죽어버린 '기존 정치'와 전혀 상관없는 것이다. 굳이 표현하자면 '대의제 정치'를 대체할 '급진적 생활 정치", '급진적 참여 정치'쯤이다.) </p>
<p>&nbsp;</p>
<p>"대통령이 이엠비가 아니었더라도 광우병 때문에 '탄핵'을 운운하는 이 지경까지 왔을까?" 내 대답은 "아니, 절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이 사태에서 광우병 공포감은 방아쇠일 뿐이라는 뜻이다. </p>
<p>&nbsp;</p>
<p>지난 몇개월을 되돌아보면 사태의 진전은 분명하다. 영어 교육 논란, 건강보험 논란, 투기꾼 또는 거짓말쟁이 또는 '허공에 떠있는' 부자들이 독차지한 내각 구성으로 이어지는 사태가 남겨준 것은 한마디로 '배신감'과 '절망감'이다. '말만 떠드는 정부'에 질려서 거짓말쟁이든 투기꾼이든 상관없으니 먹고 살기 편하게만 만들어달라고 표를 찍었더니 돌아오는 건 '배신'뿐이다. </p>
<p>&nbsp;</p>
<p>잠재되어 있던 '영어 컴플렉스'를 자극하면서 영어로 사교육 부담만 잔뜩 지우겠다고 나서더니, 건강보험이 민영화되어 무지막지한 병원비 부담을 떠안을지 모른다는 불안에 떨게 만들었다. 게다가 알고보니 그들은 온갖 편법 다 동원한 '다른 세상의 갑부'들인 게 들통났다. 이것만으로도 배신감을 참을 수 없는데, 이제는 무시무시한 광우병의 공포 속에서 '값싸고 질 좋은 미국 쇠고기'를 실껏 드시라고 한다. 이쯤되면 더는 참을 수 없다. 그래서 이번 일은 단순히 '광우병 파문'이 아니다. '우리의 절박한 삶'과 동떨어진 '그들만의 나라'에 대한 저항이다.</p>
<p>&nbsp;</p>
<p>&nbsp;</p>
<p><strong>3. 그들은 무슨 생각으로 거리에 나섰나?</strong> </p>
<p>&nbsp;</p>
<p>"천박하다고 비아냥 거리고 '정치의식'이라곤 없다고 비난할지 모르지만, 그래도 좋으니 먹고 살기 좀더 편해지고 싶다. 너희들이 해준 게 뭐냐? 양극화를 해결했냐? '88만원 세대'로 상징되는 비정규직 천국을 개선했냐? 역사 바로잡기도 좋고, 남북 관계 개선도 좋지만, 우리의 삶은 그야말로 전쟁터가 따로 없을 만큼 불안하고 힘들다." </p>
<p>&nbsp;</p>
<p>이것이 바로 '보수화했다'는 한국 유권자들, 특히 젊은 유권자들의 심정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그들은 눈 딱감고 '이메가'를 믿어봤다. 그런데 알고보니 상황이 더하면 다했지 나아길 조짐이라곤 보이지 않는다. 게다가 그동안 질리도록 본 '가볍고 즉흥적인 막말에만 능한 대통령'보다 별로 나을 게 없는 '가벼움'과 '천박함'까지 보여준다. 얼마전 일본 국왕과 악수하면서 고개 숙인 한장의 사진이면 족하지, 뭐가 더 필요한가? </p>
<p>&nbsp;</p>
<p>이제는 먹고 살만해졌고, 배낭 여행으로 유럽 구석구석을 누비면서 '눈도 높아졌고', 그래서 일본이나 미국에도 꿀리지 않는 '당당한 대한민국', '고상한 대한민국', '세련된 대한민국'을 꿈꾸는 이들이 요즘 젊은 세대다. (사실 젊은 세대만의 바람이 아니라 대다수 시민의 바람이다.) 그래서 경제적 상황이 좋아지기를 더욱 더 갈망하는 것이다. 현재의 시스템에서는, 잘 살지 못하면 당당하고 고상하고 세련될 방법이라곤 없음을 너무나 잘 안다. 그런 그들에게 눈앞의 현실은 '독재 시대'를 겪으면서 이전 세대가 느낀 절망감보다 결코 약하지 않은 좌절감을 가져다 준다. 이걸 이해하지 못하는 한, 요즘 한국 사회의 역동적이리만치 '엽기적'이고 종잡을 수 없는 여론의 흐름, 사람들의 행동을 따라갈 수 없다. </p>
<p>&nbsp;</p>
<p>그래서 '광우병 정국'은 새로운 정치의 희망과 가능성이기 이전에, '한국 사회'가 안에서 스스로 무너져내리는 '내파'의 위기를 맞고 있다는 아주 분명하며 불길한 징후다. 기성 세대는, 제도권 정치는, 그리고 언론은 이 요구과 현실의 괴리를 이해하고 해결할 의지도, 능력도, 관심도 없기 때문이다. </p>
<p>&nbsp;</p>
<p>따라서 '한국 사회'가 내파하고 말 것이냐, 아니면 4.19혁명과 70-80년대 민주화 투쟁의 역사를 잇는 '강고하고 끈질긴 정치 투쟁의 나라'로 되살아날 것이냐, 이것이 진짜 문제이다. 그리고 이 문제는, 젊은이들이 광우병 촛불집회를 새로운 참여 정치의 공간으로 발전시킬 상상력과 감성을 발휘하고, 전략과 전술을 개발할 수 있느냐에 달려있다. 또 그들과 적극 연대하고 그들을 지원할 세력이 존재하느냐에 달려 있다. 하지만 '낡은 감성과 고정관념'을 버리지 못하는 한, 좌파 세력이 끼어들 자리는 좀처럼 보이지 않을 것이다.</p>
<p>&nbsp;</p>
]]>
			</description>
			<author>marishin</author>
			<category>잡글</category>
			
			<pubDate>Sat, 03 May 2008 01:54:09 +0900</pubDate>
		</item>
		<item>
			<guid>http://blog.jinbo.net/marishin/?pid=274</guid>
			<title>식민주의론에서 마르크스 내쫒기</title>
			<link>http://blog.jinbo.net/marishin/?pid=274</link>
			<description>
<![CDATA[
<p>우연히 식민주의이후론(탈식민주의론)의 이념적 배경을 재미있고 논쟁적이면서도 간략하게 요약한 글을 읽게 됐다. 이른바 포스트 이론들이 마르크스, 마르크스주의의 흔적을 어떻게 지워버렸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분석이어서 소개한다. 난삽하고 골치 아픈 내용들을 그냥 건너 뛰어서, 요약 정리만 하고 싶은 이들에게 딱 어울린다. (인도 출신의 학자로 유명세를 얻은 가야트리 스피박과 호미 바바를 은근히 비꼬는 부분에서는 웃음을 참기 어렵다. 스피박의 '길고 어려운' [그라마톨로지] 서문, 바바의 라캉 오독 따위를 언급하는 대목, 바바는 기껏 부르주아 작가일 뿐이라는 평가 따위가 그렇다.)</p>
<p><br />   </p>
<p>필자는 마르크스 이론으로 성경 분석을 시도하는 학자인 롤랜드 보어(Roland Boer)다. 그는 오스트레일리아 모나시 대학(Monash University)의 종교 및 신학 연구소(Centre for Studies in Religion and Theology)에 재직하고 있는 학자다. 출처는 2005년에 나온 책 [식민주의이후론(탈식민주의론)적 성경 비판: 학제적 교차점들]에 실린 보어의 글 '마르크스, 식민주의이후론(탈식민주의론), 그리고 성경'이다. (Boer, Roland. 2005. Marx, Postcolonialism, and the Bible. Stephen D. Moore and Fernando F. Segovia (eds). <em>Postcolonial Biblical Criticism: Interdisciplinary intersections</em>. London and New York: T&T Clark International, pp. 166-183.)  </p>
<p><br /></p>
<p>여기 소개하는 부분은 167쪽에서 168쪽 앞까지와 168쪽 일부, 169쪽 하반부부터 170쪽 앞부분까지다. <br /></p>
<p><br /></p>
<p>---------- </p>
<p><br /></p>
<p>(167쪽에서 168쪽까지) <br /></p>
<p><br /></p>
<p>여러가지 측면에서 명백한 것을 말하자면, 마르크스 그리고 이어서 레닌은 자신들이 식민주의, 제국주의라고 여러가지 이름으로 지칭한 것에 비판적으로 접근하는 방법을 누구보다 먼저 제기했다. 마르크스가 이 길을 추적했다면 (자본주의가 살아 남으려면 유럽이라는 한계를 넘어 확장하고, 지금도 경제적 성공의 척도인 '성장'을 지속하고 계속 새로운 식민지를 점령해야만 했다는 지적.) 레닌은 자기가 살던 시점까지만 볼 때 가장 진전된 자본주의 최고 단계로서 제국주의 또는 제국주의적 자본주의를 특히 집중 추적했다. 레닌의 관점에서 보면, 두번의 '세계 전쟁'은 모두 전세계 지배권을 다투는 유럽 제국주의 세력들의 분쟁, 전 지구에 걸쳐서 좀더 많은 땅을 점령하려는 경쟁이 절정에 이른 투쟁이었다. 레닌 이후, 식민주의를 포함한 제국주의적 팽창을 체계적으로 이론화하고 비판하는 작업은 마르크스주의 전통 안에서 이뤄졌다. 무어-길버트의 분류법을 따르자면, 식민주의 이후에 대한 초창기 비판을 이끈 핵심 인물들, 곧 프란츠 파농, W.E.B. 뒤 부아, C.L.R. 제임스 같은 인물들은 모두 식민주의를 비판하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이었다. 식민주의 분석 외에, 그들의 작업에는 두가지 다른 중대한 부분이 있었다. 그것은 작가 자신들의 위치에서 문학과 기타 문화적 생산물들을 연구하는 작업과 정치에 뚜렷하게 개입하는 것이었다. 예컨대, 제임스는 크리켓이 식민주의 문화의 힘이자 동시에 반식민주의 문화의 힘으로 작용하는 데 대단히 관심이 많았을 뿐 아니라, 서인도제도의 독립운동 과정에서 중심이 되는 인물이기도 했다.  </p>
<p style="margin-left: 20pt;">To state what is in many respects the obvious: Marx and then Lenin first developed a critical approach to what they variously called colonialism and imperialism. If Marx traced the way (capitalism for its very survival had to expand, to 'grow' - still very much the benchmark of economic success - beyond the confines of Europe and conquer ever new colonial spaces), Lenin, especially in Imperialism, or imperial capitalism, as the most advanced stage of capitalism up until that point. From a Leninist perspective, both 'World Wars' were conflicts between the European imperial powers, vying for global dominance, the struggle coming to a head in the competition for the conquest of ever more territories throughout the globe. After Lenin, the systematic theorization and critique of capitalist expansion, including colonialism, took place in the Marxist tradition. Key figures of earlier postcolonial criticism, following Moore-Gilbert’s classification, such as Frantz Fanon, W.E.B. Du Bois, and C.L.R. James, were all Marxist critics of colonialism. Apart from the analysis of colonialism, there were two other vital parts of their work: the study of literature and other cultural products from their own locations and a distinct level of political involvement. For instance, James was not only intensely interested in the role of cricket as both a colonial and anti-colonial cultural force, but he was also a central figure in the process towards independence in the West Indies.  </p>
<p><br /></p>
<p>내가 너무나 간략하고 두서없이 요약했지만 이런 역사를 생각할 때, 도대체 어떻게 식민주의이후(탈식민주의) 이론의 마르크스주의적 차원이 실종되고 말았을까? 마르크스주의 이론의 다양한 핵심 측면들을 마르크스주의 그 자체로부터 체계적으로 떼어내고 이어서 그 이론의 정치적 잠재력을 부정한, 동시 다발적인 변형 과정을 통해서 이 작업이 이뤄졌다. 이 과정은 에드워드 사이드가 안토니오 그람시의 헤게모니 개념을 사용한 것에서 시작한다. </p>
<p style="margin-left: 20pt;">Given this history, which I have sketched far too briefly and haphazardly, how is it that the Marxist dimension of postcolonial theory has been lost? Through a simultaneous process of transformation that systematically detached various key aspects of Marxist theory from Marxism itself and then negated their political potential. The process began with Edward Said's use of Antonio Gramsci’s notion of hegemony.  </p>
<p><br /></p>
<p><br /></p>
<p>(168쪽에서 169쪽까지) <br /></p>
<p><br /></p>
<p>식민주의 시대에, 이런 헤게모니는 이념 작업 전반에 관여했다. 곧 인종 이론부터 시작해서 군사 행동, 제국주의 중심지의 우월성을 믿는 신념의 창출을 거쳐, 사이드의 유명한 '오리엔탈리즘'에까지 이르는 전반적인 작업에 관여한 것이다. 그러나 사이드는 권력에 관한 미셸 푸코의 작업, 특히 지정된 자리이자 당연히 예상되는 자리에 머물지 않는 권력 곧 분산되고 모세관처럼 퍼져 존재하는 권력 형태에 관한 작업에 헤게모니를 문제가 많은 방식으로 연결시켰다. 이 연결 고리 곧 분산된 권력과 위협받는 헤게모니의 관계는 볼 수 있지만, 푸코는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었다. 장폴 사르트르의 제자이자 정치 활동가이긴 했지만 말이다. 헤게모니에 있어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다른 범주들 곧 계급, 계급 갈등, 정치경제학의 중요한 구실 같은 것들이 결여됐고, 이는 헤게모니 개념이 의미를 확보하는 개념적 맥락에서 떨어져나와 고아처럼 떠돌게 되는 것을 뜻했다. 이렇게 식민주의이후(탈식민주의) 이론에서 마르크스의 유산이 희석되는 첫번째 작업이 이뤄졌다. </p>
<p style="margin-left: 20pt;">In the period of colonialism, such hegemony involved wholesale ideological work, ranging from racial theory, through military action and the production of belief in the superiority of the imperial centre to Said's well-known 'orientalism' (Said 1978). But Said linked this in problematic fashion to Michel Foucault's work on power, specifically the dispersed, capillary forms of power that never reside in the named and expected seats of power. One can see the connection - dispersed power and a threatened hegemony - but Foucault was not a Marxist, despite being a student of Jean-Paul Sartre and a political activist. The absence of other categories crucial to hegemony - such as class, class conflict, and the central role of political economies - meant that the notion of hegemony was orphaned, drifting away from the conceptual context in which it made sense. Thus, the first step in watering down the Marxist heritage in postcolonial theory was made.  </p>
<p><br /></p>
<p><br /></p>
<p>(169쪽에서 170쪽까지) <br /></p>
<p><br /></p>
<p>가야트리 스피박이 비록 마르크스주의가 자신의 이론적, 정치적 위치의 일 부분을 이루고 있다고 주장하지만, 다름 아니라 데리다의 [그라마톨로지](1976) 번역 작업 그리고 특히 스피박이 쓴 길고 어려운 이 번역본 서문이야말로 식민주의이후(탈식민주의) 이론으로 형성되는 복합물에 해체(주의)를 주입하는 구실을 했다. 이에 뒤 이어 스피박의 [다른 세상에서](1988)이 등장하면서, 데리다식 해체론이 사이드를 거쳐서 들어온 그람시 및 푸코와 나란히, 새로운 접근법을 벼려내기 원하는 비평가들이 취할 수 있는 이론적 맥락의 하나로 더 두드러진 위치를 차지했다. 그러나, 해체와 마르크스주의 그리고 여성주의를 결합시키려는 스피박의 시도를 잠깐 진지하게 따져보자면, 데리다식의 마르크스는 실로 이상한 마르크스다. 데리다의 책 [마르크스의 유령들](1994)이 너무나도 잘 보여주고 있듯이, 이 마르크스는 중도좌파에서 약간 왼쪽으로 기운 자유주의자와 더 흡사해 보인다. </p>
<p style="margin-left: 20pt;">Even though Gayatri Spivak claims Marxism as part of her own theoretical and political position, it was her translation of Derrida's <em>Of Grammatology</em> (1976) and especially the long and difficult introduction that she wrote, which brought decontruction into the mix of what was becoming postcolonial theory. The subsequent appearance of her <em>In Other Worlds</em> (1988) reinforced the prominence of Derridean deconstruction, along with Gramsci and Foucault via Said, as one of the theoretical strands available for critics wanting to forge a new approach. But a Derridean Marx - taking for a moment Spivak's effort to combine deconstruction, Marxism, and feminism seriously - is a strange Marx indeed, looking more like a slightly left-of-centre liberal, as Derrida's own <em>Specters of Marx</em> (1994) showed only too well.  </p>
<p><br /></p>
<p>마르크스를 식민주의이후(탈식민주의) 이론에서 추방하는 마지막 단계는 호미 바바의 작업, 특히 그의 책 [문화의 위치](1994)와 함께 왔다. 이 책은 라캉의 정신분석을 마르크스주의를 탈색시킨 바흐친과 함께 식민주의 관련 글들을 읽는 데, 곧 인도에서의 성경 읽기부터 이빨 빠진 프란츠 파농 읽기까지의 다양한 독해에 도입했다.  비록 바바가 많은 식민주의이후론(탈식민주의론)자들의 본보기가 됐지만, 바바의 돌고 돌리는, 특이한 양식과 라캉 오독이 라캉으로 하여금 제 자신을 배반하게 하려고 의도적으로 한 것인지, 또는 바바가 (라캉과) 다른 길들을 다루고 있는 건지 결코 확신할 수 없다. 맨처음 바바에게 매혹됐던 급진주의 비평가들 가운데 적어도 한명 이상이 경악하면서 깨닫게 됐듯이, 바바는 확고한 부르주아 작가다. 그에겐 자유주의가 유일하게 선택 가능한 이념적 위치인 것이다. (이 시기 이후 그의 예술 및 문학 비평을 보라.) 그럼에도, 바바와 함께 라캉식 정신분석과 바흐친의 변증법적 독해 전략은 식민주의이후(탈식민주의) 이론의 모순적인 잡종물을 이루는 한 부분이 됐고, 이제 헤게모니 및 해체론과 함께 흉내내기, 잡종성, 경계 넘기 같은 용어들이 식민주의적 마주침의 글들을 재해석하는 열쇠들이 됐다. </p>
<p style="margin-left: 20pt;">The final step in the banishment of Marx from postcolonial theory came with Homi Bhabha's work, especially <em>The Location of Culture</em> (1994), which introduced Lacanian psychoanalysis along with a demarxified Bakhtin into the reading of colonial texts that range from the Bible in India to a de-fanged Frantz Fanon. Although he has become a model for so many postcolonial critics, one is never sure whether the looping and idiosyncratic style and the misreadings of Lacan all designed to turn Lacan against himself, or whether Bhabha is covering other tracks. As more than one radical critic first mesmerized by Bhabha has found out to her or his dismay, Bhabha is a solid bourgeois writer for whom liberalism is the only possible ideological position (witness his later art and literary criticism). Yet, with Bhabha, Lacanian psychoanalysis and Bakhtin's dialogic reading strategy became part of the contradictory hybrid of postcolonial theory, and now, along with hegemony and deconstruction, terms such as mimicry, hybridity, and border crossing become the keys to reinterpreting the texts of colonial encounters.  </p>
<p><br /></p>
<p><br /></p>
<p>번역: 신기섭</p>
]]>
			</description>
			<author>marishin</author>
			<category>번역:경제-이념</category>
			
			<pubDate>Wed, 26 Mar 2008 07:55:46 +0900</pubDate>
		</item>
		<item>
			<guid>http://blog.jinbo.net/marishin/?pid=273</guid>
			<title>지젝이라는 대중적인 현상</title>
			<link>http://blog.jinbo.net/marishin/?pid=273</link>
			<description>
<![CDATA[
<p>지난주 화요일(3월18일) 내가 다니는 영국 리즈대학에서 슬라보예 지젝의 강연회가 열렸다.(지젝이 누군지 모르는 이들은 알라딘 같은 인터넷 서점에 접속해서 저자 소개 검색해보면 충분할 것이다. '먹물들의 연예인'이라고 할 철학박사다.)

<p>나는 지젝이 무슨 소리를 떠드는지 관심이 없는 사람인데, 내가 듣는 과목의 강사가 열심히 추진한 강연이라 참석했다. 부활절 휴가가 막 시작되어 학교가 한산한 편인데, 강연에는 500명이 훨씬 넘는 이들이 몰렸다. 청중은 20대의 젊은 학생부터 나이 지긋한 교수까지 다양했다. 지젝의 인기를 보여준다.

<p>재미있는 것은 강연회장 입구에 학생회가 설치한 지젝 책 판매대 바로 옆에 '사회주의노동자당'(영국의 국제사회주의자들이다. 한국의 다함께가 이들과 아마 자매단체쯤 될 것이다.)이 책 판매대를 설치했다는 점이다. 지젝도 여기서는 '급진 좌파' 계열에 드는 듯 하다.

<p>먼저 지젝의 강연회 모습 따위를 찍어 편집한 영상이 상영됐다. 지젝이 알몸으로 침대에 이불을 덮고 누워서 철학에 대해서 왈가왈부 하는 대목도 나온다. (참 안쓰럽다. 이렇게까지 해야 먹고 사는가.) 아주 재미있는 영상이었다. 지젝은 코미디언으로 나서도 될 듯 하다.

<p>오후 6시쯤 지젝이 직접 등장해서 거의 두시간쯤 말을 했다. 우선 이 연예인, 사람 혼을 빼놓는 데 특기가 있다. 말을 하면서 거의 1분에 한번 꼴로 자기 코를 만진다. 또 약 3-4분에 한번 꼴로 옷을 만진다. 게다가 영어 발음은 죽음이다. 나처럼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사람으로서는 정말 고역이다. (예컨대 '폼(form)'을 '포름'이라고 발음한다.) 정신이 사나워서 집중이 안된다. 게다가 이 사람 정말 수다쟁이다. 딱히 표현하기 어렵지만, 말을 참 수다스럽게 한다. 그리고 사용하는 영어 단어는 꽤 한정되어 있다. 영어가 외국어니 어쩔 수 없다. 덕분에 나같은 사람도 금방 적응이 됐다.

<p>이 강연에서 내가 느낀 것은, 이 사람이 라캉주의자를 자처하면서도 마르크스 팔아먹기, 재미있는 농담으로 청중 웃기기, 영화 이야기로 흥미 유발하기를 적절히 결합해서 자신의 무기로 삼는다는 것이다.

<p>먼저 마르크스 팔아먹기다. "내가 너무 나이브하게 마르크스주의자로 말하는 것 같죠", "나는 프로이드-마르크스주의자들과 거리를 두고 있습니다", "포스트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따위의 주장으로 자신은 '정통 마르크스주의'에 가깝다는 걸 암시한다. "모든 포스트주의는 이론이 아니라 언론의 이름 붙이기에 불과하다" 따위의 주장으로 포스트모더니즘과 거리를 두는 것도 '정통 마르크스주의자' 이미지 형성 효과를 발휘한다.

<p>급진적이고 정통 마르크스주의에 가깝지만 고루하거나 꽉 막히지 않은 좌파, 그러면서도 '불온하거나 과격하지 않은 좌파' 이것이야말로 지젝의 판촉 핵심이고, 지젝이라는 '서양 먹물들의 대중적인 열기'의 본질임을 여실히 보여준다. 이른바 포스트주의자들이 결정적으로 결여하고 있는 지점을 정확하게 포착한 것이다. (이제 누가 포스트모던주의자들을 좌파라고 하는가!)

<p>강연은 미합중국의 이라크, 이란 정책 비판으로 시작해서(별 내용은 없다. 그저 흔한 이야기다.), 역시 영화 이야기로 이어진다. 1988년 존 카펜터가 감독한 미합중국 영화 '데이 라이브(They live)'를 언급했다. 이 영화는 로스앤젤레스에 사는 가난한 노동자 이야기다. 어떤 색안경을 쓰면 미합중국 자본주의의 본질이 보인다는 내용이다. 색안경을 쓰는 순간, 거리의 화려한 광고판에 '복종하라'는 메시지가 보인다는 것이다. 지젝은 이를 두고 "전통적으로 철학은 눈을 가리는 막을 벗어야 진실이 보인다고 생각했는데, 이 영화는 안경을 써야 진짜 자본주의 이념이 보인다고 말한다"고 논평했다. (카펜터 감독이 심오한 생각에서 이렇게 만들지 않았으리라고 생각하는 건 어렵지 않다. 로스앤젤레스의 거리를 배경으로 한 영화에서, 안경을 벗으면 세상의 진실이 보인다는 걸 표현하기는 곤란하다. 이런 난점을 극복하려고 살짝 비틀어서 우연히 얻은 색안경을 쓰니 진실이 보인다고 한 게 아니겠는가? 여기에 무슨 대단한 진실이 있는 것처럼 말하는 건 조금 우스꽝스럽다. 이미 이 세상은 자본주의 이념으로 포화 상태에 이르렀다. 이런 상황에서 안경을 쓴다는 행위는 존재 조건인 자본주의 이념을 벗어버리고 '진짜 맨 눈'으로 보는 것의 영화적 장치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p>이어서 자신이 최근에 쓴 책 '폭력'에 대해 약간 언급했다. 주장의 핵심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정치적 올바름' 또는 '관용'이 아니라 '차이를 인정하는 것', '서로 거리를 두는 것'이라는 내용이다. 서로 다른 존재들이 상대를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우리는 모두 하나다"라고 떠드는 것, 그것이 진짜 폭력이라는 이야기다. 밑바닥의 인종 차별적 인식을 감추는 은폐 도구로서 '관용', '포용' 대신 솔직하게 서로 다르다는 걸, 서로 이해할 수 없다는 걸 인정하자는 이야기다. 다만 이 거리두기는 브레히트가 말한 소격화의 의미에서 거리두기라고 한다. (이 부분은 약간 흥미있다. 다만 '정치적 올바름'에 지치다 못해 진저리를 치는 '1990년대 서양 사회'라는 아주 특정 시기, 특정한 맥락에서만 그렇다. 아직도 생짜배기 '폭력'이 난무하는 한국 사회, 그리고 생짜배기 폭력이 '테러리즘'이라는 초강력 무기를 들고 다시 등장하고 있는 요즘의 미합중국과 유럽 사회에서는 턱도 없는 이야기다. 한마디로 시효가 끝났다. 지젝은 너무 늦게 깨달음을 얻은 듯 하다. 아니면 요즘 미합중국이, 영국이 어떤지, 서유럽이 어떤지 진짜 따져들어가는 건 '너무 불온'하기 때문일까?)

<p>이어서 지젝은 프랑스 학자 카트린 말라부(Catherine Malabou)를 언급했다. (이 학자는 지젝이 비판하는 자크 데리다의 제자이고, '헤겔의 미래'라는 책을 썼다. '말라부는 데리다의 후속판이다'는 말까지 나온다는 것 같다.) 솔직히 지젝이 말라부에 대해서 한 말은 잘 모르겠다. 말라부에 대해 내가 아는 게 없어서 그렇다. 그저 말라부의 분석이 일리가 있지만, 한계가 분명하다는 정도다. 강연을 들을 때는 대강 어느 부분을 비판하는지 감을 잡는 정도였는데, 메모를 해둔 것도 없고 지금은 기억이 전혀 없다. 지젝이 데리다와 '각을 세우려고' 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말라부를 언급하는 맥락을 짐작할 수 있다. 말라부에 관심이 있는 이들은 다음의 인터뷰를 읽어보시라. 영어로 된 것이다. (<a href="http://pervegalit.files.wordpress.com/2008/02/malabou.pdf">말라부 인터뷰(pdf 파일)</a>)

<p>마지막으로 지젝은 역시 마르크스를 '전유'함으로써 마무리를 지었다. 그는 마르크스에게 프롤레타리아트는 빼앗긴 존재이고, 다시 표현하면 '실체 또는 본질 없는 주체'(subject without substances)라고 했다. 그러면서 지금은 세가지 프롤레타리아트화가 진행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첫째는 생태 측면에서 박탈당하는 존재, 두번째는 상징적으로 박탈당하는 존재, 세번째는 내적 의식 측면에서 박탈당하는 존재다. 한마디로 말해 21세기 인간의 조건은, 생태적으로 착취당하고, 상징적으로(권력과 미디어의 상징 조작 때문에) 착취당하고, 마침내 의식 내부 차원에서까지 착취당하는, 무산계급화라는 것이다.

<p>그리고 이렇게 덧붙인다. "더는 이대로 세상이 지속될 수 없다. 뭔가 돌파구가 필요한데, 그게 뭔지는 나도 솔직하게 모른다." 그리고 질문에 답하는 과정에서 "(반세계화주의자들의 행사인) 세계사회포럼의 일각이 주장하는 '작은 지역 공동체의 회복'은 해법이 아니다. 작은 공동체를 회복하기는 너무 늦었다. 보편적이고 큰 싸움이 필요하다."고 부연했다. 내가 공감한 딱 두가지 대목 가운데 하나다. 다른 한 대목은 "포스트주의는 이론이 아니라 언론의 이름 붙여주기에 불과하다"는 주장이었다.

<p>마지막으로 지젝 숭배자들에게는 안타까운 이야기지만, 지젝은 자신의 적수를 기껏 주디스 버틀러로 설정하고 있었다. (자기 입으로 '에니미(enemy)'라고 직접 말했다.) "어떤 좌파가 주디스 버틀러를 두려워하랴!"</p>


]]>
			</description>
			<author>marishin</author>
			<category>잡글</category>
			
			<pubDate>Mon, 24 Mar 2008 23:51:34 +0900</pubDate>
		</item>
		<item>
			<guid>http://blog.jinbo.net/marishin/?pid=272</guid>
			<title>번역 비평의 진정한 의의는?</title>
			<link>http://blog.jinbo.net/marishin/?pid=272</link>
			<description>
<![CDATA[
<p>인터넷 서점 ‘알라딘'이 긍정적인 영향을 끼친 게 하나 있다면, 번역 비평을 대중화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알라딘의 ‘서재'를 통해서 수많은 엉터리 번역들이 폭로되고 비판받았다. 그래서 이제 적어도 인문학 또는 철학 서적을 번역하는 번역자들은 ‘수준 높은' 알라딘 비평가들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까딱 잘못했다가는 큰코 다치게 된다. (나는 이른바 ‘사회과학' 분야를 번역하기 때문에 예외다. ‘사회과학서'는 ‘번역 비평가'들의 주요 관심 영역이 아니다!!!) 이 현상은 일단 긍정적이다. 엉터리 번역서로 골탕을 먹은 독자들의 통쾌한 반격이기 때문이다. 그동안 돼먹지 못한 번역서 때문에 독자들이 당한 게 얼마인가? 번역자들은 아직 더 당해도 싸다.

<p>그런데 최근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한 번역자가 자신의 번역서를 ‘비판'(또는 ‘비난'?)한 알라딘 이용자 몇몇을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한 것이다. 이 일에 대한 첫번째 반응은 어이없다는 것이리라. 나 또한 그렇다. 나는 독자라기보다는 번역자로 분류되는 사람이지만, “명예훼손이라니... 참으로 딱하다”는 게 솔직한 심정이었다.

<p>그런데 이 사건은 조금 더 생각해볼 여지를 제공해주는 사건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나는 “번역 비평의 의미는 과연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p>이 문제에 답하기 전에 먼저 번역자의 심정을 생각해보자. 이 번역자는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번역서가 두번째 작업이다. 그리고 그는 ‘전문 번역자'의 길을 선택했다. 어쩌면 이 번역자는 “이제 내 번역자로서의 생명은 끝인가?”라는 심정으로 고소라는 극단적인 행동을 취했을지 모른다. 이런 번역자의 심정을 나는 이해할 수 있다. 같은 ‘번역자’여서 번역자를 편드는 게 아니다. 같은 ‘번역자'여서 번역자의 길이 얼마나 힘든지, 얼마나 허약하고, 욕만 먹는 자리인지 알기 때문에, 고소라는 행위는 전혀 동의할 수 없지만 그 심정만큼은 알 것도 같다.

<p>물론 사태가 이렇게 된 책임은 먼저 번역자에게 있다. 하지만 한가지 고려해야 할 것은, 번역은 아주 어려운 일이라는 사실이다. 그에 비하면 번역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일은 누워서 떡먹기 같은 일이다. 나는 얼마전에 ‘민주주의 벼리기'라는 책 일부분의 번역을 검토해서 결과를 이 블로그에 적었다. 어떤 이들은 아주 공들인 작업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이 작업에는 그리 많은 시간이 들지 않았다. 만약 내가 이 분량을 번역했다면 대략 10-20배의 시간을 들였어야 했을 것이다.

<p>그렇다고 번역 비평이 무의미하다는 것은 아니다. 번역 비평은 중요하다. 다만 그것이 ‘비난'이나 ‘헐뜯기'가 아니라 ‘비평'이려면 한가지 명심할 것이 있다. 이에 대해서는 이택광 교수가 잘 지적했다.

<p style="text-align: justify; margin-left: 10pt; margin-right: 5pt;">“우리가 만년 이론수입국의 처지에서 벗어나려면, 인문학자들끼리 '연대의식'부터 먼저 길러야할 것 같다. 좀 틀렸다고 해서 잡아먹을 듯이 덤빌 이유도 없고, 그 틀린 걸 누가 폭로했다고 해서 발끈할 이유도 없다. 서로 틀렸다면, 인문학을 업으로 삼는 이들이 힘을 모아 조금씩 수정해가는 게 올바른 길이다.” (출처: <a href="http://wallflower.egloos.com/1723746">이론수입국의 징후</a>)

<p>하지만 나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려고 한다. 내가 진짜 문제삼고 싶은 것은 번역자와 번역 비평자의 불균형 현상이다. 번역자는 날로 줄어드는 와중에, 번역 비평자는 (아마추어건, 프로건) 많이 늘어났다. 그리고 그들의 오역 지적은 책 판매에 어느 정도 영향을 끼친다. 오역의 문제점을 지적한 글을 보고, 대부분의 독자가 취할 행동은 딱 한가지다. 책을 사지 않는 것이다. 이미 수없이 당한 경험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번역 비평이 책 구매를 부추기기는 어렵지만 책 구매를 억제하는 건 아주 쉽다.

<p>그래서 인문학 서적 번역 비평자들은, 자신들의 의도와 상관없이, 인문학 책이 팔리지 않는 데 자신들도 한 몫을 하고 있다는 걸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이 문제에 대해 함께 고민해봐야 한다. 자신들은 무관한 일이라고 치부해서는 곤란하다. 인문학 책이 팔리지 않으면, 번역자에 대한 대우는 더 나빠질 것이다. 그리고 이는 번역의 질을 떨어뜨리는 것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일반인은 상상하지 못하겠기에 실례를 들어본다. 나는 대략 1년 정도 작업해서 ‘탈근대 군주론'이라는 책을 번역했다. 429쪽짜리 책이다. 그리고 번역료로 내 손에 쥐어진 돈은 대략 75만원이다. 이렇게 번역료가 적은 것은 책이 많이 팔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책 정가의 몇퍼센트에 해당하는 액수를 팔린 만큼 받는 조건으로 계약하는, 이른바 ‘인세 계약'의 결과다. 이 경우는 조금 극단적이지만 다른 책들도 인세 계약의 경우 내가 받은 번역료는 기껏해야 150만원을 넘지 않는다.

<p>상황이 이런데 어느 바보가 번역을 하겠는가? 이런 상황에서 남는 번역자는 딱 네가지 부류다. 첫번째는, 돈 생각하지 않고 그냥 자기가 좋아서 계속 번역하는 사람들이다. (나는 앞으로도 이 부류의 번역자로 남을 것이다.) 두번째는, 번역의 질보다는 번역의 양에 집중함으로써 가능하면 많은 책을 번역해서 일정한 수입을 올리는 ‘전문 번역가'들이다. (이들은 번역료와 판매량이 비례하는 ‘인세 계약' 대신 원고량에 따라 번역료를 받는 이른바 ‘매절'로 계약하는 일이 많기 때문에 보통은 나보다 더 많은 번역료를 확보한다. 어느 정도 인정받는 번역자는 원고지 한장당 3500원 정도의 원고료를 받을 수 있다. 웬만한 책 한권 번역하면 300만원-400만원쯤은 받을 수 있다는 이야기다.) 세번째는 ‘어떤 실적'이 필요한 일부 ‘교수님'들이고, 네번째는 팔릴 책만 골라서 번역할 수 있는 ‘일류 번역자'들이다. 숫적인 면에서 보자면 ‘전문 번역가'가 압도적으로 많고, 나머지 세 부류는 손에 꼽을 정도다.

<p>그러니 지금 상황 대로라면 한국 인문 출판계에는 결국 ‘전문 번역가'들만 남을 공산이 크다. 그리고 그들은 가능하면 많은 책을 번역해야 한다. 갈수록 책이 팔리지 않고 그래서 번역자 대우도 그만큼 더 나빠지면, ‘전문 번역가'들은 그에 따라 번역 속도를 더욱 높여야 한다. 그러니 번역 품질이 향상되기를 기대하는 건 헛된 꿈이다.

<p>암울하지 않은가?

<p>이것이 암울한 것은 먼저, 외국어를 할 줄 모르는 독자들이 외국의 지적 자산 또는 업적을 제대로 흡수하기 어려워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외국어를 할 줄 아는 이들의 권력을 강화하는 것으로 이어질 것이다. 외국어를 할 줄 아는 사람들만 ‘선진 학문’을 향유하고, 이것을 바탕으로 그들은 자신들만의 울타리를 쌓아갈 것이다.

<p>이것이 암울한 두번째 이유는, 오역과 오역에 대한 불신의 상호 작용 속에 한국 인문 출판의 기반이 무너질 것이기 때문이다. 근본 원인이 어디에 있느냐와 무관하게, 불신 받는 책과 불신 하는 독자가 빚어내는 궁극의 결과는 번역서 판매 부진과 독자 감소일 수밖에 없다. 이는 곧 독자 대중이 외국의 지적 자산에서 소외당하는 것으로 이어질 것이다.

<p>번역은 조금 거창하게 말해 ‘지식의 민주화'에 기여한다. 이는, 루터가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변함없는 진실이다.

<p>그렇다면, 번역서 비평 능력이 있는 이들은 일정한 의무감을 느껴야 한다. 그리고 의무감을 강하게 느낀다면 직접 번역을 하라!!! 아니면 적어도 당신의 번역 비평이 한국의 번역 수준을 높이는 집단적인 작업에 기여하는 것이 되도록 해야 한다. 번역서에 대한 독자의 불신을 조장하는 것을 넘어서서 좀더 나은 번역을 만들어가는 과정을 촉진하는 것, 이것이 진정한 번역 비평의 의미가 아닌가?

<p>여담 한가지를 적는다. 요즘 내가 수업을 듣는 과목의 영국인 강사는 보드리야르와 지젝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다. 그가 지난주 수업시간에 보드리야르 번역에 대해 재미있는 말을 했다. 프랑스 학자인 보드리야르의 책 가운데 하나를 오스트레일리아 사람이 영어로 번역했는데, 도저히 읽을 수준이 못된다는 것이었다. 프랑스어를 어느 정도 하는 이 강사는 프랑스어 원문과 영어 번역본을 비교해봤는데, 번역자가 프랑스어를 이해하지 못하고 번역했더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 강사, 한마디를 덧붙였다. “프랑스 학자들은 아주 독특해서 번역이 보통 어려운 게 아니다.”

<p>프랑스 학자들의 책이라면, 영역본조차 너무 믿지말지어다.</p>


]]>
			</description>
			<author>marishin</author>
			<category>잡글</category>
			
			<pubDate>Mon, 10 Mar 2008 11:56:46 +0900</pubDate>
		</item>
		<item>
			<guid>http://blog.jinbo.net/marishin/?pid=271</guid>
			<title>영국 은행 국유화의 의미</title>
			<link>http://blog.jinbo.net/marishin/?pid=271</link>
			<description>
<![CDATA[
<p>영국 정부가 노던록(Northern Rock)이라는 은행을 국유화하겠다고 2008년 2월17일(일요일) 발표했다. 국유화라니... 국유화라고 말하면 우파는 경악하고 좌파는 흥분할지 모르지만, 내가 보기에 이건 과잉 반응이다. 노던록 문제는 이렇게 볼 사안이 아니다. 한마디로 투기자본의 시대가 점점 파국으로 치닫고 있는 상황에서 그 투기자본이 낳은 괴물을 어떻게 할 것이냐의 문제이고, 영국으로서는 별다른 선택이 없었다.

<p>이 국유화가 상징하는 것이 있다면, 적어도 영국의 지배계급 전반이 미합중국에서 시작된 현재의 금융 위기를 얼마나 심각하고 뼈저리게 느끼고 있는지를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유로 통화권은 그나마 미합중국의 한파로부터 조금 떨어져있지만, 영국은 그 찬바람을 직접 맨 몸으로 맞고 있는 나라다. 

<p>이 사태를 이해하려면 먼저 노던록이 어떤 금융기관인지 알아야 할 것 같다. 그리고 영국 언론과 정치권의 반응을 파악하는 것도 도움이 될 것이다.

<p><b>1. 노던록은 어떤 금융기관인가?</b>

<p>은행이라고 하니까 한국으로 말하면 제일은행이나 하나은행쯤 되는 걸로 생각할지 모르지만, 노던록은 이런 금융기관이 아니다. 비비시방송 웹사이트에 올려져있는 이 회사 관련 통계를 보면 뭔가 특이한 기관임을 알 수 있다.

<p>예금자 100만명, 주택 담보 대출자 80만명, 주주 18만명, 직원 6천명.

<p>국민이 6천만명인 나라에서 예금자는 고작 100만명이다. 게다가 대출자보다 20만명 많을 뿐이다. 직원도 6천명에 불과하다. 직원 규모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지점이 몇곳 안된다. (2006년 연차보고서를 보면 모든 업무를 하는 일반 지점이 56곳, 주택 담보 대출만 전문으로 취급하는 지점이 16곳이다.)

<p>그럼 이 금융기관은 그냥 동네 마을금고처럼 군소 금융기관인가? 조금 큰 마을금고라고 할 수도 있는 뉴캐슬 인근의 '빌딩소사이어티'(building society, 주택금융조합)에서 출발한 것은 맞지만 하찮은 금융기관은 아니다.

<p>차이는, 이 기관이 전통적인 은행과 다르게 아주 <b>'위험한'(투기자본자들 눈에는 '혁신적인')</b> 영업을 한다는 점이다. 영국의 주택 담보 대출 상위 금융기관들은 모두 예금을 유치해서 대출 자금을 마련하지만, 노던록은 다른 방식으로 영업을 해서 주택 담보 대출 기준으로 영국내 5위 안에 드는 기관으로 커졌다.

<p>그 방식이란 비용이 많이 드는 예금 유치 같은 '산매'(소매) 방식 대신 금융시장에서 값싼 자금을 '도매'로 빌려다가 집을 사려는 개인들에게 빌려주는 것이다. 금융시장의 금리가 싸고 여유 자금이 많을 때 이 방법은 정말 기발한다는 평가를 받았다. 일반 예금 같은 산매 자금은 전체 자금의 20% 수준밖에 안된다. (자금 흐름(flow) 기준으로 보면 2006년에 14%에 불과하다.) 게다가 신용 상태를 잘 따지지 않고 마구잡이로 돈을 빌려줬다. 집값보다 더 많은 돈을 대출해주기도 했다고 한다. 금융시장에서 자금을 조달하는 데 문제가 없는 한, 더 빌려줄수록 이익이 나기 때문이다. 조금 심하게 말하면 '러시앤캐시' 뭐 이런 식의 '돈놀이' 전문 기관이라고 할 수도 있을 지경이다.

<p>이 회사가 한동안은 잘 나갔다. 하지만 지난해 하반기부터 미합중국의 금융 위기 때문에 자금이 마르게 되자, 노던록은 순식간에 파산 지경에 이르렀다. 어떤 금융기관도 돈을 빌려주려고 하지 않으니 그야말로 대책이 없었다. 중앙은행에 손을 벌리는 것이 유일한 길이었고, 정부는 즉각 자금을 투여했다. 이 금융기관은 지점이 몇곳 안되기 때문에 예금을 더 열심히 유치해서 구조를 바꾸는 것도 불가능한 기관이다. 금융시장이 얼어붙이니 ‘기발한 자금 조달 방식'은 이 회사를 아무 대책이 없는 골칫덩어리로 만들고 말았다.

<p><b>2. 언론과 정치권의 반응</b>

<p>노동당 정부가 국유화를 발표하자 대부분의 언론은 '늦었지만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좌파에 해당하는 신문인 '인디펜던트'와 ‘가디언'은 물론이고 경제신문 '파이낸셜타임스'도 정부 손을 들어줬다. 보수당 지지 신문인 '데일리 텔레그라프'조차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머독이 주인인 '더타임스'만 '완벽하게 잘못된 일'이라고 광분하고 있다. (사실 요즘 이 신문은 옛날의 '더타임스'가 아니다. 별로 진지하게 보기 어렵다는 평가가 적지 않다. 판형조차 요즘은 선정적인 신문들과 같은 타블로이드다. 발행부수에서도 '데일리 텔레그라프'에 한참 못미친다.)

<p>정치권에서는 노동당을 몰아내고 정권을 잡으려는 보수당 혼자 난리를 친다. 자유민주당은 벌써 몇달전부터 국유화를 주장했다. 우파라고 할 자유민주당까지 국유화를 이야기할 정도면 이 문제는 우파-좌파간의 오랜 갈등인 '사유화'-'국유화' 논쟁과는 뭔가 다른 것이 아니겠는가?

<p><b>3. 왜 국유화밖에 길이 없었을까?</b>

<p>영국 국가 차원에서 볼 때, 노던록의 파산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예금자 100만명도 문제지만, 주택 담보 대출 문제도 보통 심각한 게 아니다. 만약에 주택 담보 대출 5위권의 금융기관이 파산한다면, 그렇지 않아도 얼어붙은 주택 담보 대출 시장은 완전히 공황 상태에 빠질 것이다. 동시에 금융 시장 전반도 심각하게 흔들릴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집값 거품이 엄청나고 금융이 대표 산업들 가운데 하나인 영국으로서는 다른 대안이 없다. 살리는 수밖에...

<p>그런데 다른 기관이 인수하는 것도 그리 간단치는 않았다. 몇몇 기관이 협상을 했지만 워낙 헐값으로 넘기라고 한 것 같다. 사실 노던록을 적당한 값에 사들일 기관은 별로 없을 거라는 분석이 오래전부터 나왔다. 위에서도 이야기했듯이 이 금융기관의 영업 방식이 이제는 전혀 현실성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다른 은행들처럼 지점을 늘리고 산매 금융을 확대할 수도 없다. 그러려면 천문학적인 자금이 들어갈 것이고, 이미 추락한 신용 때문에 효과도 보기 어렵다.

<p>대부분의 언론이 국유화를 비판하지 않은 건 바로 이 때문이다. 보수당이 난리치는 건 대중적 지지도가 그리 높지 않은 노동당 정부를 이 참에 무너뜨리자는 정치 공세 차원으로 이해할 수 있다.

<p>미합중국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고, 미합중국처럼 온갖 투기적 금융 기법들이 판치는 나라인 영국에서는 이 방법이 아마도 최선일 것이다. 그리고 이건 은행 국유화라기보다는, 투기자본의 광기가 낳은 괴물 긴급 처리 문제라고 봐야 한다. 금융 기관의 사회적 책임 따위를 고려한 국유화, 이런 것과는 하등 상관이 없는 일이라는 소리다.

<p>다만 미합중국처럼 ‘국유화’라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정치 문화를 지닌 나라와 좌파 정부의 역사가 있는 영국의 차이는 분명히 있을 것이다. 차이가 있다면 이 뿐일 것이다.

<p>이 사태가 보여주는 진짜 징후는, 세계 금융 위기가 이제 정말 심각한 수준으로 넘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세계 경제가 초유의 위기로 향해 가고 있다는 분석을 몇년전부터 계속 내놓고 있는 프랑스의 두뇌집단인 유럽정치예측연구소는 2월16일 미합중국 실물 경제가 2008년 9월께부터 붕괴 단계에 접어들 것이라는 수준까지 예측 강도를 높였다. 예측은 예측일뿐이지만, 이제는 진지하게 검토해볼 가치가 있는 내용이다. <a href="http://www.leap2020.eu/GEAB-N-22-is-available!-Global-systemic-crisis-September-2008-Phase-of-collapse-of-US-real-economy_a1298.html">2월16일치 예측(영문)</a></p>


]]>
			</description>
			<author>marishin</author>
			<category>잡글</category>
			
			<pubDate>Tue, 19 Feb 2008 08:56:50 +0900</pubDate>
		</item>
		<item>
			<guid>http://blog.jinbo.net/marishin/?pid=270</guid>
			<title>뚝심 있는 번역자</title>
			<link>http://blog.jinbo.net/marishin/?pid=270</link>
			<description>
<![CDATA[
<p>유럽 좌파의 역사를 다룬 두툼한 책이 최근 한국어로 번역되어 꽤 관심을 끄는 것 같다. 제프 일리가 쓴 ‘민주주의 벼리기’(Forging democracy)다. (한국어판 제목은 이상하다. 아예 ‘The left 1848-2000’이라고 영어를 썼다. 원서 제목과도 다른 영어를 쓰다니, 나처럼 ‘번역'에 관심이 많은 사람으로서는 기막힐 노릇이다.)

<p>이 책이 내 관심을 특히 끈 것은, 분량이 자그마치 1000쪽을 넘는다는 사실이다. 처음 든 생각은 “번역자, 참 대단하다”는 것이었다. 책을 번역해본 사람들은 잘 알겠지만, 1000쪽 짜리 책 번역은 보통 일이 아니다. 내가 보통 번역하는 책이 번역본 기준으로 300에서 400쪽이다. 이 정도 분량도 번역하다보면, 곳곳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앞 부분과 뒷 부분의 용어가 달라진다거나, 문체의 일관성이 깨진다거나 등등 여러가지 문제가 생긴다. 그런데 1000쪽이라니 오죽할까 싶다.

<p>그래서 찾아보니 번역자가 유강은씨다. 이 사람은 두권짜리 두툼한 책인 ‘미국민중사’도 번역한 분이어서 이렇게 두꺼운 책을 번역하는 게 처음은 아니다. 처음은 아니지만 여전히 참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사람은 내가 1990년대말 또는 2000년대초부터 막연한 ‘동지 의식'을 느끼는 사람이다. 국제 정세를 이 땅에 전한다는 ‘운동' 차원에서 번역 작업을 하던 것, 그리고 그러다가 책 번역을 시작하게 됐고, 요즘은 팔리지 않는 이른바 ‘사회과학' 서적 번역을 꾸준히 계속 한다는 점에서 나와 비슷한 측면이 있는 사람이다.(내 혼자 생각일지 모르지만 말이다.)

<p>그런데 우연히 <a href="http://www1.vista-server.com/uploadfile/6/4/20/2074192745.zip">영어 원문 피디에프(pdf) 파일</a>을 구하게 됐고 그래서 원본과 번역본을 비교해보면 어떨까 하는 호기심이 생겼다. 알라딘을 찾아보니, 36쪽이나 ‘미리보기'로 제공하고 있었다. 그래서 조금 비교해봤다.

<p>아래는 검토 결과다. 이 작업은 전적으로 ‘동지적인'(?) 또는 ‘동업자’ 측면에서의 우호적인 검토다. 그리고 1000쪽 가운데 일부 검토 결과만 가지고 번역의 질을 논하는 건 어불성설이다. 이 책은 꽤 팔리는 것 같으니, 내 검토 결과를 참고해서 보완할 기회가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서 공개한다. (많은 경우 초판을 찍은 뒤에 잘못을 발견하더라도 수정할 기회를 얻기 어렵다. 잘 팔리지 않아서 다시 인쇄할 일이 없기 때문이다.)

<p>검토한 부분은 ‘서장: 유럽의 민주주의’와 1장의 일부에 해당하는 번역본 29쪽에서 64쪽까지다. 기준으로 삼은 원문은 2002년 초판의 pdf 판본이다. <b>(덧붙임: 검토 결과로 제시한 '대안 번역'은 언뜻 봤을 때 문제가 있다고 판단한 부분만 최소한도로 수정한 결과다. 만약 내 번역이라면 이와는 많이 달라질 것이다. 내 문체나 번역의 방식이 이 번역자와는 많이 다르다.)</b>

<p><b>EM님과 이 책 번역자의 지적 등을 수용해서 일부 내용을 수정했다.</b>

<p>1. 30쪽.
<ol><li>번역본: 이러한 권리는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의 정의를 서서히 이동시키고 <b>대중매체를 통해 점차</b> 공적 영역을 활용한 여러 형태의 사회적 동원과 문화적 자기주장을 통해 달성되었다.</li>
<li>대안: ... 서서히 이동시키고 <b>점점 더 대중 매체라는 매개를 통해 접하게 되는</b> 공적 영역을 ...</li>
<li>영어 원문: These were achieved by various forms of social mobilization and cultural self-assertion that gradually shifted definitions of public and private and made use of an increasingly mass-mediated public sphere.</li>
<li>설명: mass-mediated는 대중 매체가 매개가 된다는 뜻이다. 곧 공적 영역을 시민들이 직접 접하는 대신 대중 매체가 전하는 모습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접하게 된다는 뜻이다. 날로 대중 매체의 비중이 커지는 현대 사회에서는 대중 매체가 표현하는 모습이 일반 시민이 접할 수 있는 유일한 현실이 되어가고 있다.</li>
<li>대안에 대한 자신감: 아주 강함.</li>
</ol>

<p>2. 31쪽.
<ol><li>번역본: 민주주의는 <b>‘주어진' 것이 아니라 ‘허락된’ 것이다</b>.</li>
<li>대안: 민주주의는 <b>’주어진' 또는 ‘부여받은' 것이 아니다.</b></li>
<li>영어 원문: democracy is not “given” or “granted.”</li>
<li>설명: 원문을 보면, granted는 given을 다시 표현한 것이다. 본문 바로 다음에 conflict가 나오는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민주주의는 투쟁을 통해, 갈등을 통해 쟁취하는 것이다. 번역자의 실수로 생각된다.</li>
<li>대안에 대한 자신감: 아주 강함. </li>
</ol>

<p>3. 34쪽.
<ol><li>번역본: 체코슬로바키아와 폴란드에서 개혁운동이 억압당한 뒤, <b>지배적인</b> 공산주의는 마침내 진보의 대행자로서 남아 있던 신뢰를 모두 잃어버렸다.</li>
<li>대안: ... <b>집권</b> 공산주의는 ...</li>
<li>영어 원문: governing Communisms</li>
<li>설명: 여기서는 동유럽의 집권 세력을 뜻하는 듯 하다. 바로 이어지는 문장이 ‘서유럽 공산당들이 소련 모델을 공공연하게 비판하는 독자적인 정치 경로를 개발할 수밖에 없었던 사실'에서도 이를 짐작할 수 있다. 번역자가 바로 밑부분에서는 ‘governing Socialists’를 ‘집권 사회당들’이라고 번역했는데, Communists가 아니라 Communisms이기는 하지만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집권이라고 하는 게 적당해 보인다.</li>
<li>대안에 대한 자심감: 중간 이상.</li>
</ol>

<p>4. 34쪽.
<ol><li>번역본: 유로코뮤니스트들은 이런 결과로부터 <b>단호한 결론을</b> 이끌어내고는 공산주의의 정체성을 모조리 털어버리기 시작했다.</li>
<li>대안: <b>결연하게 마음 먹은 유로코뮤니스트들은 (진로에 대해) 결론을 짓고서는</b> 공산주의의 정체성을...</li>
<li>영어 원문: Determined Eurocommunists drew their conclusions and began shedding their Communist identities altogether.</li>
<li>설명: 영어 원문 구조에서는 번역본 같은 번역이 나올 수 없다. determined는 Eurocommunists를 수식한다고 볼 수밖에 없다.</li>
<li>대안에 대한 자신감: 아주 강함.</li>
</ol>

<p>5. 35쪽.
<ol><li>번역본: 그러나 이 새로운 시기에 접어들어 <b>앞서 조정된</b> 기둥들 - 케인즈주의 경제학, 폭넓은 복지국가와 확장되는 공공부문, 코포라티즘과 강력한 노동조합 등 -</li>
<li>대안: 그러나 이 새로운 시기에 접어들어 <b>앞서의 타협을 떠받치던</b> 기둥들 곧 케인즈주의 경제학...</li>
<li>영어 원문: But in this new period, the pillars of that earlier arrangement - Keynesian economics, comprehensive welfare states and expanding public sectors, corporatism and strong trade unions</li>
<li>설명: arrangement를 ‘조정된'으로 번역할 수는 없다. 여기서는 전후 번영의 시기에 이뤄진 타협(바로 앞 문장에 ‘자본주의적 축적에 손상을 입히지 않고도 완전고용, 실질임금 상승, 관대한 복지국가 등과 같은 사회민주주의의 목표들이 확보된 바 있었다'는 대목에서 알 수 있다.)이라고 봐야 한다. arrangement는 배열, 배치가 첫번째 뜻이며 이렇게 봐도 큰 무리는 없지만, ‘타협'이 더 맥락을 분명히 보여주는 듯 하다.</li>
<li>대안에 대한 자신감: 아주 강함.</li>
<li> <b>뒤늦게 덧붙임</b>: '타협' 대신 번역자가 쓴 '조정'이라는 단어를 써서 <b>'앞서의 조정을 떠받치던 기둥들'</b>이라고 번역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다. 사실 '타협'은 조금 강한 번역이다.</li>
</ol>

<p>6. 35쪽.
<ol><li>번역본: 여기에는 나치즘의 패배라는 <b>가혹한 시련</b> 속에서 벼려진 1943-49년의 범유럽 차원의 반파시즘 대중 합의가</li>
<li>대안: 여기에는 나치즘의 패배라는 <b>(격변의) 도가니</b> 속에서...</li>
<li>영어 원문: Here the pan-European antifascist popular consensus of 1943–49, itself forged in the crucible of the defeat of Nazism,</li>
<li>설명: ‘in the crucible of’는 가혹한 시련 속에서라는 뜻의 숙어이지만 여기의 문맥에는 맞지 않는다. 반파시즘 세력에게 나치즘의 패배가 ‘가혹한 시련'일 이유는 전혀 없다. 그러니 crucible의 첫번째 뜻 곧 쇳물을 녹이는 도가니로 보는 것이 적합해 보인다.</li>
<li>대안에 대한 자신감: 중간 정도.</li>
</ol>

<p>7. 35쪽.
<ol><li>번역본: 이러한 사회적 합의는 <b>국가 차원과 대중문화의 관용 모두에서 정당성을 누리는</b> 매우 확고한 것이었음이</li>
<li>대안: 이러한 사회적 합의는 <b>국가 차원의 정당성과 대중문화 속에 널리 퍼져있는 상태를 동시에 확보한,</b> 매우 ...</li>
<li>영어 원문: this societal consensus proved extremely robust, enjoying both legitimacy at the level of the state and breadth in popular culture.</li>
<li>설명: breadth를 마땅한 말로 번역하기가 어렵다. 다만 both에 걸리는 것은 legitimacy and breadth로 봐야 마땅해보인다. 사회적 합의가 정부 차원의 정당성뿐 아니라 대중들 속에 널리 퍼져있었다는 뜻으로 생각된다.</li>
<li>대안에 대한 자신감: 중간 수준. </li>
</ol>

<p>8. 38쪽.
<ol><li>번역본: 여성을 차별하고 배제하는 결과를 낳은, 노동계급의 남성성이라는 강하게 젠더화된 이상을 둘러싼 사회주의 정치의 <b>모순</b>이 이러한 결과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였다.</li>
<li>대안: ... 노동계급의 남성성이라는 강하게 젠더화한 이상 <b>주변으로 축소된 사회주의 정치의 협소함(축소 지향성)</b>이 ... </li>
<li>영어 원문: The contraction of socialist politics around strongly gendered ideals of working-class masculinity, with discriminatory and exclusionary consequences for women, was the most important of these effects.</li>
<li>설명: 내가 기준으로 삼은 pdf가 맞다는 것을 전제로 할 때, contraction을 contradiction으로 착각한 단순 실수로 생각된다.</li>
<li>대안에 대한 자신감: 중간 이상.</li>
<li><b>뒤늦게 덧붙임</b>: EM님의 지적을 수용해 번역 약간 수정함.</li>
</ol>

<p>9. 39쪽.
<ol><li>번역본: 노동운동은 거대한 민주적 성과를 <b>산업화의 공으로</b> 돌리기도 했다.</li>
<li>대안: ... 민주적 성과를 <b>자신들의 공으로</b> 돌리기도 ... </li>
<li>영어 원문: those movements also chalked up huge democratic achievements to their credit.</li>
<li>설명: 영어 원문의 ‘their’를 볼 때, 이는 단수인 ‘산업화’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복수인 ‘those movements’를 지칭하는 걸로 봐야 한다. 그리고 상식적으로 노동운동이 민주적 성과를 산업화 덕분이라고 말할 리가 없다. 자신들의 투쟁의 결과라고 볼 게 뻔하다.</li>
<li>대안에 대한 자신감: 아주 강함.</li>
<li><b>뒤늦게 덧붙임</b>: 번역자와 댓글을 주고 받은 결과, '자신들의 공으로'인지 '산업화의 공으로'인지는 좀더 검토가 필요하다고 판단됨.</li>
</ol>

<p>10. 40쪽.
<ol><li>번역본: <b>이 책에서 나는</b> 다시금 불러내서 정당한 평가를 제시해 마땅한 사회주의의 역사를 <b>다루고자 한다</b>.</li>
<li>대안: <b>이것이 바로 되찾아 정당하게 평가해야 마땅한 사회주의의 역사다.</b></li>
<li>영어 원문: This is the history of socialism that needs to be recovered and given its due.</li>
<li>설명: 먼저 이런 식의 이른바 ‘의역'은 옳지 않다. 심하게 말하면 일종의 ‘왜곡’이다. 그리고 바로 앞 문장(1860년대와 1960년대 사이에 두 정당은 광범위한 민주주의의 진전을 이끄는 활발한 중심을 형성했다.)을 생각할 때 번역문의 뉘앙스도 본문과 거리가 있다. 원문은 앞 문장의 내용이 바로 사회주의의 역사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번역문은 바로 앞 문장과의 연결 고리를 제대로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li>
<li>대안에 대한 자신감: 아주 강함.</li>
</ol>

<p>11. 41쪽.
<ol><li>번역본: 그러나 사회주의가 좌파에서 가졌던 중요성이 이제는 그것을 가능케 한 조건들이 해소되어버린 사회역사와 정치형태의 강력한 연계 속에 자리매김될 수 있다면,</li>
<li>대안: 그러나 사회주의가 좌파에서 가졌던 중요성이 <b>이 특정한 시기에,</b> 이제는 그것을 ...</li>
<li>영어 원문: But if socialism’s importance for the Left can be located <b>in this particular period</b>, in a powerful nexus of social histories and political forms whose possible conditions had dissolved</li>
<li>설명: 원문의 ‘in this particular period’를 빼먹고 번역했다. 앞 문장을 보면 이 시기는 ‘1860-1960년’이다.</li>
<li>대안에 대한 자신감: 아주 강함. </li>
</ol>

<p>12. 41쪽.
<ol><li>번역본: 민주주의를 <b>한층 더 확대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b>?</li>
<li>대안: 민주주의를 <b>한층 더 확대하는 게 어떻게 가능한가?</b></li>
<li>영어 원문: How can further extensions of democracy take place?</li>
<li>설명: 뉘앙스가 다르다. 민주주의를 확장하는 방법이 뭐냐고 묻는 게 아니라, 민주주의를 만들어온(forge, 벼려온) 사회주의가 철 지난 것이라면 곧 1860-1960년대라는 특정한 시기에 한정된 문제라면 사회주의가 사라진 현재 상황에서 민주주의의 확장이 가능하지 않는가라고 묻는 것이다.</li>
<li>대안에 대한 자신감: 아주 강함.</li>
</ol>

<p>13. 47쪽.
<ol><li>번역본: 사우스런던에 있는 사설 정신병원에 집어넣고 말았다. 블랜드퍼드 박사의 설명에</li>
<li>대안: ... 집어넣고 말았다. <b>그녀가 항의했음에도 병원 담당자는 정식으로 그녀를 입원시켰다.</b> 블랜드퍼드 박사의 ...</li>
<li>영어 원문: delivered her to a South London private asylum. <b>Despite her protests, the medical officer duly admitted her</b>. The goal was</li>
<li>설명: 한 문장을 빼먹고 번역했다.</li>
<li>대안에 대한 자신감: 아주 강함. </li>
<li><b>뒤늦게 덧붙임</b>: 번역자와 댓글을 주고받은 결과, <b>'정식으로'</b> 보다는 <b>'아니나 다를까'</b>가 적당해보임.</li>
</ol>

<p>14. 51쪽.
<ol><li>번역본: 급진파는 의장 자리에서 볼 때 의회 왼쪽에 자리잡아 오른쪽에 자리잡은 보수파와 마주보았다. 이런 자리 배치가 <b>뚜렷해지면서</b>, ‘왼쪽', 즉 ‘좌파'는 ...</li>
<li>대안: ... 이런 자리 배치가 <b>뚜렷하게 보여주듯이</b>, ‘왼쪽', ...</li>
<li>영어 원문: As this alignment clarified</li>
<li>설명: 원문은 be 동사가 생략된 수동태로 보기 곤란하다고 생각한다.</li>
<li>대안에 대한 자신감: 중간 수준.</li>
<li><b>뒤늦게 덧붙임</b>: 번역자의 설명을 들으니 원래 번역문이 수긍이 됨.</li>
</ol>

<p>15. 53쪽.
<ol><li>번역본: 온정주의적인 <b>정부에 의해, 그렇지 않으면</b> 독립 생산자들의 자치 단위 사이의 교환 연합이나 합동조합이라는 급진적인 미래상을 통해 가능할 터였다.</li>
<li>대안: 온정주의적인 <b>정부가 하지 않는다면</b> ...</li>
<li>영어 원문: if not by a paternalist government then via</li>
<li>설명: if not ... then의 구조로 봐서 만약 정부가 나서지 않는다고 한다면 교환 연합이나 합동조합을 통해서 ‘소규모 생산이라는 전통적 형식을 보호하고 복구’하자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는 뜻으로 보는 게 타당해 보인다.</li>
<li>대안에 대한 자신감: 중간 이상.</li>
</ol>

<p>16. 54쪽.
<ol><li>번역본: 그러나 이런 급진 민주주의가 1848년에 정점에 <b>다다랐을 때도 그 토대는 손상되지 않고 있었다</b>.</li>
<li>대안: 정점에 <b>다다랐을 때 이미 그 토대는 손상되어가고 있었다.</b></li>
<li>영어 원문: Yet even as this radical democracy reached its climax in 1848, its bases were being undermined.</li>
<li>설명: 단순한 착각으로 보인다. were being이 아니라 weren’t being으로 본 듯 하다.</li>
<li>대안에 대한 자신감: 아주 강함.</li>
</ol>

<p>17. 56쪽.
<ol><li>번역본: 남부와 동부의 주변부에서는 훨씬 뒤의 시기까지 이어진다. 사회주의 정치인들이 이전의 민주적 전통에 빚진 것은 무엇이고 이런 전통이 더는 제공할 수 없는 것이</li>
<li>대안: 이어진다. <b>이 더 오래된 급진적 유산은 1917-1918년에 와서야 마침내 버려지는데, 이 작업은 189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극적인 정화 과정의 결과로 나타난 것이다.</b> 사회주의 정치인들이 ...</li>
<li>영어 원문: <b>That older radical heritage was only finally left behind after 1917–18 via processes of dramatic clarification going back to the 1890s.</b></li>
<li>설명: ‘이어진다.'와 ‘사회주의 정치인들이' 사이에 있는 위의 한 문장을 빼먹고 번역했다.</li>
<li>대안에 대한 자신감: 아주 강함.</li>
</ol>

<p>18. 58쪽.
<ol><li>번역본: 민주주의 경제학은 19세기 <b>전반기</b> 내내 좌파가 일관되게 몰두하는 분야가 되었다.</li>
<li>대안: ... 19세기 <b>후반기</b> 내내 ...</li>
<li>영어 원문: The economics of democracy became the Left’s insistent preoccupation in the second half of the nineteenth century.</li>
<li>설명: ‘second half’를 ’first half’로 본 단순 착각이다.</li>
<li>대안에 대한 자신감: 아주 강함.</li>
</ol>

<p>19. 59쪽.
<ol><li>번역본: 19세기의 마지막 <b>30년</b> 동안에</li>
<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