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진보에서 역사의 구원으로http://blog.jinbo.net/minjung/근데 여기 '진보넷' 블로그네(읭?)2018-03-12T13:58:04+09:00Textcube 1.8.3.1 : Secondary Dominant뻐큐 손가락 스캔들 혹은 #varoufake김강http://blog.jinbo.net/minjung/4632015-03-21T23:47:42+09:002015-03-21T23:44:02+09:00<p>지난 일요일 저녁, 10%대 후반의 시청률을 자랑하는 제1 공영 ARD의 국민토크쇼 귄터 야우크 쇼에 깜짝 게스트가 있었다. 그리스 재무장관 야니스 바로파키스를 직접 연결해서 토론을 했던 것. 아쉽게도 제대로 된 토론은 없었다. ARD가 작심하고 바로파키스의 면전에서 쇼비니즘적 악선전을 준비했기 때문이었다. 사회자인 야우크가 2년 전 크로아티아에서 열린 "Subversive Festival"의 영상 중에서 바로파키스가 강연 중에 독일인들을 향해 가운데 손가락을 올렸다고 주장하며, 강연 장면을 캡쳐해서 틀었던 것. 야우크는 이 영상을 보여주며 비장한 표정과 목소리로 냉각 중인 그리스-독일 관계에 대한 책임을 바로파키스에게 추궁했다. 웃자고 한 게 아니었던 것.</p>
<p> </p>
<p>바로파키스는 즉각 이 영상이 편집된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이 토론 이후 독일 언론계와 소셜미디어를 통해 거센 반응이 일어났다. 누구보다 황색지 BILD가 이 틈을 놓칠 리가 없었다. 이들은 전문가들을 동원해 바로파키스가 이 영상이 편집되었다고 주장한 것이 거짓말이라고 주장했으며, 그간 지속적으로 해오던 "게으른 그리스인들이 독일 납세자들과 예금주들의 돈을 받아먹고 갚지 않으려 한다."는 프로파간다를 이 손가락 스캔들로 더 강화하려 했다. 편집인인 카이 디크만이 직접 나서서 바로파키스를 공격하는 칼럼을 썼다. 동시에 야우크 쇼가 토론이 아니라 타국 재무장관을 앞에 두고 창피를 주었다는 비판 역시 제기되었고, 신경질적인 논쟁이 이어졌다.</p>
<p> </p>
<p style="text-align: center;"><iframe allowfullscreen="" frameborder="0" height="315" src="https://www.youtube.com/embed/Vx-1LQu6mAE" width="450"></iframe></p>
<p style="text-align: center;"> </p>
<p>이 스캔들의 방향은 코메디언이자 제2 공영 ZDF의 Neo 채널에서 Neo Magazin을 진행하는 얀 뵈르머만이 자신의 쇼에서 "귄터 야우크는 우리가 조작한 영상을 진짜인냥 틀었다."고 주장하면서 확 바뀌게 된다. 독일의 정치풍자 코메디쇼는 그 수위가 매우 높은데, 공영방송의 정치풍자쇼에서조차도 주류 정치인들과 미디어에 대한 직접적인 풍자를 서슴치 않고, 대부분 급진좌파적인 포지션을 보여주는 편이다. 뵈르머만은 쇼의 시작부터 출연진들과 함께 계속해서 가운데 손가락을 들어 보이면서 양식있는 토론대신 손가락 영상 따위에나 몰두하는 독일 주류 언론을 풍자했는데, 압권은 스텝들이 실제로 이 영상을 날조하는 장면과 이들이 "가운데 손가락 없는 원본"이라고 주장한 영상과 조작되었다고 주장한 영상 둘 다를 반복해서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똑같은 시점에서 진행되는 두 영상은 모두 진본처럼 보였던 것이다.</p>
<p> </p>
<p>쇼가 끝나자마자 독일 언론들과 소셜 미디어에서는 거대한 후폭풍이 불었다. ARD와 BILD지에서는 엄숙한 어조로 자신들이 결코 날조된 영상을 쓰지 않았다고 주장했으며, 뵈르머만 역시 유투브에 다시 한 번 영상을 찍어 올리면서 - 역시 풍자인지 진짜인지 모를 어조로 - 우리가 주장한 것은 100% 사실이며, 그보다 이 페이크의 페이크의 페이크의 페이크에나 몰두하고 있는 게 얼마나 바보같은 일인지를 다시 한 번 우스꽝스럽게 주장했다. 야니스 바로파키스는 트위터 계정에서 뵈르머만의 풍자를 칭찬하면서 ADR와 BILD지의 사과를 요구했다. 사실 이 영상이 사실이라 해도, 야우크가 애초에 틀었던 영상엔 전후 맥락이 삭제 되어 있었기 때문에 일치감치 편집을 통한 조작으로 타국 장관을 물먹였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었다.</p>
<p> </p>
<p>뵈르머만의 풍자 이후 여전히 사실관계를 가지고 소셜미디어에서는 갑론을박이 나오고 있지만, 무엇보다 야우크 쇼가 얼마나 바보같은 짓을 했는 지에 대해선 모두가 잘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신경질적인 민족주의-쇼비니즘적 미디어라는 독약에 대한 멋진 해독처방이었던 셈.</p>
<iframe src="http://www.facebook.com/plugins/like.php?locale=ko_KR&href=http%3A%2F%2Fblog.jinbo.net%2Fminjung%2F&layout=standard&show_faces=true&width=445&action=like&colorscheme=light&" scrolling="no" frameborder="0" allowTransparency="true" style="border:none; overflow=hidden; width:445px; height:60px; margin-top:10px; margin-left:5px"></iframe><script type="text/javascript" src="http://tweetmix.net/js/widgetV2.js"></script><script type="text/javascript">if(("TMXW" in window)) { new TMXW.Widget({"shape":"default","target_url":"http://blog.jinbo.net/minjung/","widget_title":"\uc774 \uae00\uacfc \uc5f0\uad00\ub41c \ud2b8\uc717","default_msg":"","width":"445","height":"450","color_upper_back":"93C9E6","color_upper_text":"FFFFFF","color_tweet_back":"FFFFFF","color_border":"EBEBEB","color_text":"888888","color_link":"2ABBD4","widget_type":"1","btn_type":"1","max_messages":"10","is_show_avatar":"1"}).render().start();} </script><div class="buttons-bottom center jinboblog-i-like-this-buttons"><a class="button-jinboblog" href="javascript:void(0);" title="스크랩으로 글 링크를 저장하세요" onclick="recommend('2377',463,'/minjung','');"><img src="/plugins/../jplugins/ILikeThis/images/mini_chuchon.png" alt="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a><a class="button-twitter" href="http://twitter.com/home?status=http%3A%2F%2Fblog.jinbo.net%2Fminjung%2F463+%22%EB%BB%90%ED%81%90%20%EC%86%90%EA%B0%80%EB%9D%BD%20%EC%8A%A4%EC%BA%94%EB%93%A4%20%ED%98%B9%EC%9D%80%20%23%E2%80%8Evaroufake%22" target="_blank" title="트위터로 리트윗합니다"><img src="/plugins/../jplugins/ILikeThis/images/twitter.png" alt="트위터로 리트윗하기" /></a><a class="button-facebook" href="http://www.facebook.com/sharer.php?u=http%3A%2F%2Fblog.jinbo.net%2Fminjung%2F463&t=%EB%BB%90%ED%81%90%20%EC%86%90%EA%B0%80%EB%9D%BD%20%EC%8A%A4%EC%BA%94%EB%93%A4%20%ED%98%B9%EC%9D%80%20%23%E2%80%8Evaroufake" target="_blank" title="페이스북에 공유합니다"><img src="/plugins/../jplugins/ILikeThis/images/facebook.png" alt="페이스북에 공유하기" /></a><a class="button-delicious" href="http://delicious.com/save" onclick="window.open('http://delicious.com/save?v=5&noui&jump=close&url=http%3A%2F%2Fblog.jinbo.net%2Fminjung%2F463&title=%EB%BB%90%ED%81%90%20%EC%86%90%EA%B0%80%EB%9D%BD%20%EC%8A%A4%EC%BA%94%EB%93%A4%20%ED%98%B9%EC%9D%80%20%23%E2%80%8Evaroufake','delicious','toolbar=no,width=550,height=550'); return false;" title="딜리셔스에 북마크합니다"><img src="/plugins/../jplugins/ILikeThis/images/delicious.png" alt="딜리셔스에 북마크" /></a></div><p><strong><a href="http://blog.jinbo.net/minjung/463?commentInput=true#entry463WriteComment">댓글 쓰기</a></strong></p>독일 대학의 "장기 과도기"김강http://blog.jinbo.net/minjung/4602014-12-21T23:32:48+09:002014-12-21T23:32:48+09:00<p style="text-align: center;"><br />
<img alt="사용자 삽입 이미지" height="330" src="/attach/2377/1133402347.jpg" width="440" /></p>
<p> </p>
<p>몇 년 전부터 나오고 있던 이야기지만, 특히 이번 학기 들어서 독일 대학의 열악한 교육환경 문제가 계속 미디어의 의제가 되고 있다. 90년대의 경기 침체와 그 이후 신자유주의의 도입을 통해 노동시장의 성격이 변화하면서 대학에 가는 학생들의 수가 급격히 늘어났는데, 이것을 예산 투입이 따라잡지 못했던 것이다. 학생 수에 비해 교수가 모자라고, 많은 강의를 적은 액수 혹은 아예 강사료를 받지 못하고 일하는 강사나 연구원들이 떠맡고 있다. 특히 대도시의 대학들은 세미나에 들어가도 수십명이 빼곡히 들어차 있는 퐁경이 너무나도 익숙하다.</p>
<p><br />
독일에서 대학교육은 자격을 갖춘 사람이라면 누구나 받을 수 있다. 이 원칙을 입시를 도입한다던지, 수요자 원칙에 따라 등록금을 도입한다전지 하는 식으로 훼손할 길은 기본적으로, 혹은 대중의 저항에 의해 막혀 있다. 정원제한이 도입된 과들이 존재하긴 하지만, 아무튼 독일 전역의 (평준화된) 대학 중 어디건 대입자격시험(아비투어)을 통과한 학생이 자리를 못잡을 일은 없다. 특히 기존의 산업이 튼튼해서 대학졸업장 여부가 삶의 질에 큰 영향을 미치는 남독일 일부 주들 외에 북부, 동부 독일 지역에선 대학 진학률이 빠른 속도로 높아지고 있다.</p>
<p><br />
특히 재정적인 문제가 발생한 것은 2006년 대연정 정부, 특히 기민당이 집권했던 주들의 압력에 의한 개헌을 통해 연방주의에 입각한 교육시스템이 기본법에 명시되어 버렷기 때문이다(91조 b). 독일에서 교육분야에서 강한 쪽은 사민당이 아니라 기민당인데, 이들은 연방에 의해 일률적으로 교육이 좌지우지되는 것을 원치 않았고, "재정을 내는 쪽이 결정을 하게 되는 법"이라며 연방이 각 주의 교육예산을 "지속적으로" 지출하는 길을 헌법으로 금지시켰던 것이다. 이 결정은 지속적으로 큰 비난을 받아왔고, 독일 의회와 각 주들은 기나긴 협상을 통해서 바로 얼마 전에서야 부분 개정안을 마련했고, 상원의 의결을 기다리고 있다.</p>
<p><br />
아무튼, 지금 독일 유학을 준비하고 있는 사람들은 신중하게 생각해야 한다. 독일 사람들은 언제나 그랬듯 아무튼 간에 길을 결국 찾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은 모두가 앞서 말한 교육연방주의 외에도 볼로냐 협약을 통해 신자유주의적 학제 구조조정이 이뤄진 뒤 계속해서 겪고 있는 "장기 과도기"의 혼돈 속에 있다. 특히 베를린 같이 학생들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는 대도시의 대학에선 외국인이면 더더욱 제대로 지도를 받을 기회를 누리지 못할 공산이 크다. 그 뿐 아니라 젊은 학자들의 생존권 역시 지금은 매우 위태위태하다. 수많은 학자들이 시간제 계약을 전전하면서 연구를 이어가고 있다. 전문가들은 2020년은 되어야 대학 및 후속세대 학자들의 상황이 안정될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다.</p>
<iframe src="http://www.facebook.com/plugins/like.php?locale=ko_KR&href=http%3A%2F%2Fblog.jinbo.net%2Fminjung%2F&layout=standard&show_faces=true&width=445&action=like&colorscheme=light&" scrolling="no" frameborder="0" allowTransparency="true" style="border:none; overflow=hidden; width:445px; height:60px; margin-top:10px; margin-left:5px"></iframe><script type="text/javascript" src="http://tweetmix.net/js/widgetV2.js"></script><script type="text/javascript">if(("TMXW" in window)) { new TMXW.Widget({"shape":"default","target_url":"http://blog.jinbo.net/minjung/","widget_title":"\uc774 \uae00\uacfc \uc5f0\uad00\ub41c \ud2b8\uc717","default_msg":"","width":"445","height":"450","color_upper_back":"93C9E6","color_upper_text":"FFFFFF","color_tweet_back":"FFFFFF","color_border":"EBEBEB","color_text":"888888","color_link":"2ABBD4","widget_type":"1","btn_type":"1","max_messages":"10","is_show_avatar":"1"}).render().start();} </script><div class="buttons-bottom center jinboblog-i-like-this-buttons"><a class="button-jinboblog" href="javascript:void(0);" title="스크랩으로 글 링크를 저장하세요" onclick="recommend('2377',460,'/minjung','');"><img src="/plugins/../jplugins/ILikeThis/images/mini_chuchon.png" alt="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a><a class="button-twitter" href="http://twitter.com/home?status=http%3A%2F%2Fblog.jinbo.net%2Fminjung%2F460+%22%EB%8F%85%EC%9D%BC%20%EB%8C%80%ED%95%99%EC%9D%98%20%22%EC%9E%A5%EA%B8%B0%20%EA%B3%BC%EB%8F%84%EA%B8%B0%22%22" target="_blank" title="트위터로 리트윗합니다"><img src="/plugins/../jplugins/ILikeThis/images/twitter.png" alt="트위터로 리트윗하기" /></a><a class="button-facebook" href="http://www.facebook.com/sharer.php?u=http%3A%2F%2Fblog.jinbo.net%2Fminjung%2F460&t=%EB%8F%85%EC%9D%BC%20%EB%8C%80%ED%95%99%EC%9D%98%20%22%EC%9E%A5%EA%B8%B0%20%EA%B3%BC%EB%8F%84%EA%B8%B0%22" target="_blank" title="페이스북에 공유합니다"><img src="/plugins/../jplugins/ILikeThis/images/facebook.png" alt="페이스북에 공유하기" /></a><a class="button-delicious" href="http://delicious.com/save" onclick="window.open('http://delicious.com/save?v=5&noui&jump=close&url=http%3A%2F%2Fblog.jinbo.net%2Fminjung%2F460&title=%EB%8F%85%EC%9D%BC%20%EB%8C%80%ED%95%99%EC%9D%98%20%22%EC%9E%A5%EA%B8%B0%20%EA%B3%BC%EB%8F%84%EA%B8%B0%22','delicious','toolbar=no,width=550,height=550'); return false;" title="딜리셔스에 북마크합니다"><img src="/plugins/../jplugins/ILikeThis/images/delicious.png" alt="딜리셔스에 북마크" /></a></div><p><strong><a href="http://blog.jinbo.net/minjung/460?commentInput=true#entry460WriteComment">댓글 쓰기</a></strong></p>바보들은 어디에나 있다.김강http://blog.jinbo.net/minjung/4592014-12-18T05:03:44+09:002014-12-18T01:50:10+09:00<p style="text-align: center;"><img alt="사용자 삽입 이미지" height="249" src="/attach/2377/1031803333.jpg" style="text-align: center; line-height: 1.6em;" width="500" /></p>
<p style="text-align: center;"> </p>
<p>Taz 기자 데니즈 위젤이 지난 월요일 드레스덴에 15.000명이 모였던 외국인 혐오 집회에 가서 쓴 <a href="http://www.taz.de/!151378/" target="_blank">르포 기사</a>. </p>
<p> </p>
<p><span style="line-height: 1.6em;">시위대인척 하면서 여러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존잼 꿀잼. 현재 이 운동이 위협적인 것은 의식적인 나치들이 아니라 소위 "일반 시민"(gesellschafliche Mitte 사회의 중간층)들이 많이 참여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 그런데 인터뷰를 읽어보면, 이 데모에 참여한 "일반 시민"들을 휘감고 있는 것은 거대한 두려움과 음모론이다. 미디어를 향해서는 "우리는 나치가 아닌데 우리를 나치로 몰아간다."는 불만, 정치권에 대해서는 "이슬람이 얼마나 위험한데, 우리만 가지고 뭐라 하냐 다문화 위험하다!"고 한다. 외국인에 대해서는 "우리는 외국인을 싫어하지 않는다. 내가 얼마나 되너집에 자주 가는데. 하지만 그들은 이 나라에 맞춰야 한다." 이들은 자신들이 정보를 찾는 곳으로 "인터넷"을 들었다. "인터넷과 소셜 네트워크엔 "팩트"가 있다. 나는 그것들을 다 검토해보고 여기 나온 것이다!"</span></p>
<p> </p>
<p><span style="line-height: 1.6em;">이들은 매우 부조리한 자의식을 가지고 있는데, 심지어 데모를 하면서 "Wir sind das Volk! 우리가 민중이다! (이것은 동독 정권에 반대하던 민주화시위의 구호였다.)" 라고 외치면서도, 미디어에 대해선 극도로 소극적이다. "미디어는 우리를 왜곡하니 인터뷰하지 말라"는 지침까지 서로 나눈다. 사실은 자기들이 웃겨 보인다는 것을 자기들이 적어도 의식의 어느 수준에선 알고 있는 거다. 그리고 페북질을 하겠지.</span></p>
<p> </p>
<p>너무나 익숙한 사람들이다. 하긴, 인권헌장이나 학생인권조례 회의장에 난입해서 막말을 지껄이는 이들도 바로 이 일반시민들이겠다. 12월 14일에 전쟁이 이미 났는데, 종북 언론들이 다 넘어가서 보도를 안 하고 있어서 모른다는 어느 예언자와 그 추종자들도 그냥 이런 일반 시민들이겠다. 월요일 시위 이후 여러 비평들이 여기저기서 쏟아져 나왔는데, Taz의 다른 기사에선 이들을 "등 뒤의 칼" 이론에 동조하던 바이마르 공화국 당시의 평범했던 시민들과 비교하면서 정치권 및 시민사회의 강한 대응을 촉구하기도 했다. 나치는 아니다. 그러나 그냥 둬선 안 된다.(물론 나치가 "등 뒤에" 있는 것은 분명하다만.)</p>
<p> </p>
<hr />
<p>추가: 으어 다음과 같은 인터뷰도 있다.</p>
<p> </p>
<p>„Wenn wir wollen würden, könnten wir die überrollen“, sagt sie. „Für mich sind das bezahlte, arme Schweine, die kriegen zehn Euro die Stunde.“ Woher sie das weiß? „Steht offiziell im Internet.“</p>
<p> </p>
<p>“우리가 하고 싶잖아요? 그럼 저것들(반대시위) 다 뭉게버릴 수 있어요. 내가 보기엔 저것들은 다 돈 받고 나온 멍청한 돼지새끼들이에요. 시간당 10유로.” “어디서 그걸 알았어요?” “인터넷이요"</p>
<iframe src="http://www.facebook.com/plugins/like.php?locale=ko_KR&href=http%3A%2F%2Fblog.jinbo.net%2Fminjung%2F&layout=standard&show_faces=true&width=445&action=like&colorscheme=light&" scrolling="no" frameborder="0" allowTransparency="true" style="border:none; overflow=hidden; width:445px; height:60px; margin-top:10px; margin-left:5px"></iframe><script type="text/javascript" src="http://tweetmix.net/js/widgetV2.js"></script><script type="text/javascript">if(("TMXW" in window)) { new TMXW.Widget({"shape":"default","target_url":"http://blog.jinbo.net/minjung/","widget_title":"\uc774 \uae00\uacfc \uc5f0\uad00\ub41c \ud2b8\uc717","default_msg":"","width":"445","height":"450","color_upper_back":"93C9E6","color_upper_text":"FFFFFF","color_tweet_back":"FFFFFF","color_border":"EBEBEB","color_text":"888888","color_link":"2ABBD4","widget_type":"1","btn_type":"1","max_messages":"10","is_show_avatar":"1"}).render().start();} </script><div class="buttons-bottom center jinboblog-i-like-this-buttons"><a class="button-jinboblog" href="javascript:void(0);" title="스크랩으로 글 링크를 저장하세요" onclick="recommend('2377',459,'/minjung','');"><img src="/plugins/../jplugins/ILikeThis/images/mini_chuchon.png" alt="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a><a class="button-twitter" href="http://twitter.com/home?status=http%3A%2F%2Fblog.jinbo.net%2Fminjung%2F459+%22%EB%B0%94%EB%B3%B4%EB%93%A4%EC%9D%80%20%EC%96%B4%EB%94%94%EC%97%90%EB%82%98%20%EC%9E%88%EB%8B%A4.%22" target="_blank" title="트위터로 리트윗합니다"><img src="/plugins/../jplugins/ILikeThis/images/twitter.png" alt="트위터로 리트윗하기" /></a><a class="button-facebook" href="http://www.facebook.com/sharer.php?u=http%3A%2F%2Fblog.jinbo.net%2Fminjung%2F459&t=%EB%B0%94%EB%B3%B4%EB%93%A4%EC%9D%80%20%EC%96%B4%EB%94%94%EC%97%90%EB%82%98%20%EC%9E%88%EB%8B%A4." target="_blank" title="페이스북에 공유합니다"><img src="/plugins/../jplugins/ILikeThis/images/facebook.png" alt="페이스북에 공유하기" /></a><a class="button-delicious" href="http://delicious.com/save" onclick="window.open('http://delicious.com/save?v=5&noui&jump=close&url=http%3A%2F%2Fblog.jinbo.net%2Fminjung%2F459&title=%EB%B0%94%EB%B3%B4%EB%93%A4%EC%9D%80%20%EC%96%B4%EB%94%94%EC%97%90%EB%82%98%20%EC%9E%88%EB%8B%A4.','delicious','toolbar=no,width=550,height=550'); return false;" title="딜리셔스에 북마크합니다"><img src="/plugins/../jplugins/ILikeThis/images/delicious.png" alt="딜리셔스에 북마크" /></a></div><p><strong><a href="http://blog.jinbo.net/minjung/459?commentInput=true#entry459WriteComment">댓글 쓰기</a></strong></p>[번역] 새로운 오리엔탈리즘김강http://blog.jinbo.net/minjung/4582014-04-17T05:35:59+09:002014-04-17T05:35:59+09:00<p><em style="font-size: 18px; line-height: 1.2em;">독일 다큐멘터리 영화 «아트 워»는 어떻게 이집트 혁명을 힙스터 예술가들의 퍼포먼스로 기념하고 있는가</em></p>
<p> </p>
<p>베를린의 영화감독 마르코 빌름스는 2011년 상반기에 혁명을 필름에 담기 위해 카이로로 향했다. 카이로의 젊은 혁명적 예술가들을 다룬 90분짜리 장편 다큐멘터리 «아트 워»에서 그는 새롭고 젊은, 반란의 이집트를 보여주겠노라 천명하고 있다. 그러나 좋은 의도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새로운 종류의, 더욱 미묘해진 오리엔탈리즘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전통적인 오리엔탈리즘은 에드워드 사이드가 비판했던 것처럼, “오리엔트”를 남성 지배가 관철되고, 폭력적이고 미개하며, 변하지 않는 곳으로 구성하면서 그것을 통해 오리엔트를 지배할 수 있고, 조종할 수 있는 곳으로 만드는 것이다. 아랍 국가들에서 일어난 봉기를 통해 오리엔탈리즘 담론은 새로운 상황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지만 여기서도 아랍 세계와 사람들에 대한 서구오리엔탈리즘의 특권적 시선은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p>
<p> </p>
<p>이 영화는 그것을 잘 보여주는 교과서같은 작품이다. 이 영화는 쿨하고 영어를 쓰며, 힙합과 일렉트로 뮤직을 듣고, 스니커즈를 신고 그래피티를 그리는 예술가들과 수염을 기른 남성 및 베일을 쓴 여성들을 구분한다. 후자는 마치 알라에게 정신이 나가 하늘을 가리키며 “혁명적 청년”들이 주도하는 이집트 혁명을 위협하는 사람들로 그려진다. 우리와 비슷한 사람들, 우리와 같은 음악을 듣고, 같은 옷을 입고 있는 사람들과 우리와 완전히 다른 사람들 사이의 이러한 이분법은 “오리엔탈(인)”에 대한 비합리적이고 위험하며, 수염을 기른 존재라는 전통적인 상을 그래도 유지하고 만다.</p>
<p> </p>
<p>“오리엔탈”이라는 단어는 이 «아트 워»에서 등장하지 않는다. 이 단어는 위협적인 군중의 모습이나 가짜 수염을 붙이고 이상한 영어를 쓰면서 멍청함을 발산하는 이슬람교인의 캐리커쳐 같은 모습으로 등장한다. 청중들이 이슬람 주의와 전통적인 오리엔탈 문화의 위협에 대해 확신하게 만들기 위해서 말이다. “혁명적 청년”들은 이와 반대로 서구의 모범을 따르는 민주적 이집트를 대변한다. 그들은 스프레이를 뿌리면서 혹은 마치 파티를 하는 것처럼 자기들의 존재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한다. 하지만 과연 이 스타일리쉬한 상류층의 아이들이 “악마적인 동성애자들”(주-역설적인 의미인 듯)에 대해 노래하고, 수염을 기른 꽉 막힌 이슬람주의자들을 조롱할 때 무엇을 원하고 있는 걸까? 성 혁명에 대해 말하려는 것일까? 자신들의 파티 뮤직비디오를 촬영하면서 이들은 누구에게 말을 걸고 있는 것인가?</p>
<p> </p>
<p>«아트 워»는 두 명의 “우리와 같은” 이집트 예술가들의 초상을 그려나가며 그들을 “혁명적 청년”이라 칭한다. 이를 통해 이 영화는 이집트 혁명이 마치 우리(주-서구)의 고유한 가치체계에서 나온 산물인냥 묘사한다. 그 가치체계는 “오리엔탈”을 자신의 위협으로서 (재)생산하며, 자신을 진보적이며 해방된 존재로 구성하기 위해서 젠더를 분석을 위한 범주로 사용하지만 결코 계급을 들먹이지는 않는다. 다른 사람들 - 우리만큼 해방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와 다른 사람들 -, 그리고 이집트의 서발턴들 - 노동자들과 실업자들 - 이 혁명을 이끈 것이 아니라 힙스터, 성적으로 해방된 일렉트로 뮤지션들, 그래피티 예술가 등이 혁명의 주역이다. 우리는 그들의 예술 속에서 우리 자신을 보게 된다. 왜냐하면 그 예술은 우리를 위해 그려진 것이기 때문이다. «아트 워»의 “혁명적 청년”들은 이집트 인들을 향하여 말하지 않는다. 그들은 우리에게 말을 건다. 그들의 혁명은 어떤 정치적 목적도 추구하지 않는다. 그것은 사실 우리를 위해 마련된 퍼포먼스다.</p>
<p> </p>
<p>에드워드 사이드는19세기의 오리엔탈리즘 담론이 옥시덴트와 자기 자신을 창조하기 위해 어떻게 오리엔트와 타자를 만들어냈는지를 분석했다. «아트 워»는 이집트 혁명에 대해 어떤 것도 말하지 않는다. 모든 것은 그들에 대한 우리의 상상을 다루고 있을 뿐이다. «아트 워»는 “서구”의 “우리”에 대해 무엇을 말해 주고 있는가? 우리는 그래피티와 일렉트로닉을 사랑하며 성적으로 자유롭다. 하지만 해방되지는 않았다. 우리는 혁명의 미학에 관심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의 원인에는 관심이 없다. 우리는 우리와 다른 사람들을 경멸하며 그들이 자신의 권리를 요구하는 것을 두려워한다. 우리는 우리에게 생소한 나라에 살지만, 우리처럼 살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동감할 뿐이다. 우리는 지금 포스트-정치적이며 혁명을 정치적 권리에 대한 싸움이 아니라 퍼포먼스로 이해하고 있을 뿐이다.</p>
<p> </p>
<p>«아트 워»를 본 이후로 나는 서구 기독교 사회를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다.</p>
<p> </p>
<p>필자 <span style="line-height: 1.6em;"><strong>카트야 얀센</strong>_은 라이프치히에서 살면서 오리엔트 연구소에서 동시대 팔레스타인 디아스포라의 시에 대한 주제로 박사논문을 스고 있다. </span></p>
<p><span style="line-height: 1.6em;">출처: </span>http://akweb.de/ak_s/ak592/35.htm</p>
<iframe src="http://www.facebook.com/plugins/like.php?locale=ko_KR&href=http%3A%2F%2Fblog.jinbo.net%2Fminjung%2F&layout=standard&show_faces=true&width=445&action=like&colorscheme=light&" scrolling="no" frameborder="0" allowTransparency="true" style="border:none; overflow=hidden; width:445px; height:60px; margin-top:10px; margin-left:5px"></iframe><script type="text/javascript" src="http://tweetmix.net/js/widgetV2.js"></script><script type="text/javascript">if(("TMXW" in window)) { new TMXW.Widget({"shape":"default","target_url":"http://blog.jinbo.net/minjung/","widget_title":"\uc774 \uae00\uacfc \uc5f0\uad00\ub41c \ud2b8\uc717","default_msg":"","width":"445","height":"450","color_upper_back":"93C9E6","color_upper_text":"FFFFFF","color_tweet_back":"FFFFFF","color_border":"EBEBEB","color_text":"888888","color_link":"2ABBD4","widget_type":"1","btn_type":"1","max_messages":"10","is_show_avatar":"1"}).render().start();} </script><div class="buttons-bottom center jinboblog-i-like-this-buttons"><a class="button-jinboblog" href="javascript:void(0);" title="스크랩으로 글 링크를 저장하세요" onclick="recommend('2377',458,'/minjung','');"><img src="/plugins/../jplugins/ILikeThis/images/mini_chuchon.png" alt="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a><a class="button-twitter" href="http://twitter.com/home?status=http%3A%2F%2Fblog.jinbo.net%2Fminjung%2F458+%22%5B%EB%B2%88%EC%97%AD%5D%20%EC%83%88%EB%A1%9C%EC%9A%B4%20%EC%98%A4%EB%A6%AC%EC%97%94%ED%83%88%EB%A6%AC%EC%A6%98%22" target="_blank" title="트위터로 리트윗합니다"><img src="/plugins/../jplugins/ILikeThis/images/twitter.png" alt="트위터로 리트윗하기" /></a><a class="button-facebook" href="http://www.facebook.com/sharer.php?u=http%3A%2F%2Fblog.jinbo.net%2Fminjung%2F458&t=%5B%EB%B2%88%EC%97%AD%5D%20%EC%83%88%EB%A1%9C%EC%9A%B4%20%EC%98%A4%EB%A6%AC%EC%97%94%ED%83%88%EB%A6%AC%EC%A6%98" target="_blank" title="페이스북에 공유합니다"><img src="/plugins/../jplugins/ILikeThis/images/facebook.png" alt="페이스북에 공유하기" /></a><a class="button-delicious" href="http://delicious.com/save" onclick="window.open('http://delicious.com/save?v=5&noui&jump=close&url=http%3A%2F%2Fblog.jinbo.net%2Fminjung%2F458&title=%5B%EB%B2%88%EC%97%AD%5D%20%EC%83%88%EB%A1%9C%EC%9A%B4%20%EC%98%A4%EB%A6%AC%EC%97%94%ED%83%88%EB%A6%AC%EC%A6%98','delicious','toolbar=no,width=550,height=550'); return false;" title="딜리셔스에 북마크합니다"><img src="/plugins/../jplugins/ILikeThis/images/delicious.png" alt="딜리셔스에 북마크" /></a></div><p><strong><a href="http://blog.jinbo.net/minjung/458?commentInput=true#entry458WriteComment">댓글 쓰기</a></strong></p>내 이익에 반하는 이야기김강http://blog.jinbo.net/minjung/4572014-12-21T23:35:18+09:002014-01-16T23:51:18+09:00<p>유학 나와 있는 입장에서 내 이익에 반하는 이야기를 하는 건진 모르겠는데, 솔직히 나는 인문학 공부를 깊게 하려면 모국어로 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서양인문학 분야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공부를 깊게 하려는 사람들이 계속해서 모국어로 공부해도 지장이 없도록 후속세대 양성 시스템과 교원 시스템이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p>
<p> </p>
<p>유학은 공부를 깊게하는 것보다는 사유의 번역능력을 기르는 데 좋다. 타문화권, 타언어권에서 사유를 해야 한다는 것, 하지만 내 모국어는 결코 내 안에서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 그런 사이 공간의 연구자가 해야 할 고유의 역할들이 분명히 있다. </p>
<p> </p>
<p>하지만 한국의 서양 인문학 분야나 사회과학의 학자 양성 시스템은 이런 상식에 반하는 형태로 이뤄져 있다. 진태원 선생이 짧게 서술한 대로 돈이 없거나, 서울대 박사과정에 들어가지 않는 이상, 해외 박사 유학은 교수직을 꿈꾸는 사람들이 당연히 거쳐야 하는 코스처럼 받아들여진다. 교수들도 공부 좀 잘해서 키우고 싶은 제자가 있으면 어떻게든 유학을 보내려고 한다. 이것이 낳는 효과란, "학계"가 다양하고, 넓고, 뿌리 깊게 만들어지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박사논문이란 건 관련분야의 선행연구들을 이어받아서 그것을 더 풍요롭게 만드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영어의 헤게모니 덕에 영어 권의 연구는 모든 다른 언어권의 연구자들이 검토하는 편이고, 그 외 유럽어들은 각각 자신들의 언어권 내부의 맥락에서 참조되는 편이다. 박사과정을 해외에서 밟는 사람은 그럼 어떤 연구를 자신의 선행연구로 삼냐면, 영어권의 연구와 자기가 유학하는 언어권의 연구다. 한국 학계의 선행연구를 참조할 필요는 별로 없다. 해도 자기가 박사논문을 써서 제출하는 그 학계에 그걸 아는 사람이 없는데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p>
<p> </p>
<p>이게 뜻하는 바는, 그렇게 유학하고 돌아온 사람들은 한국에서 한국어로 논문을 쓰게 되지만, 자신들이 학문하는 "장"은 한국이 아니게 되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한국에 돌아온 사람은 자기가 공부한 "장"과의 연결관계는 또한 일정부분 끊어진 상태가 된다. 읽기는 하지만 쓰지는 않으니까. 이렇게 될 때 해외 학계는 곧 숭배의 대상이 되어 버린다.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학자들은 저마다 자기가 공부한 학문 장의 괜찮은 책들을 번역하거나, 사실 번역이 돈에도, 업적평가에도 도움이 안 되니 논문으로 일정하게 소개한다. 이 때 자기가 있어 보이려면, 혹은 번역 출간을 해주는 출판사를 구하기 위해서라도, 그 쪽 학계에서 "그냥 좀 괜찮은" 학자도 "이 분야의 대가"가 되는 일이 속출하게 된다. 그리고 진짜 "대가급"의 학자라도 그 쪽 맥락에선 그냥 비판과 반박 가운데에 놓여 있는 "대가"인 반면 한국에 오면 귀담아 듣고, 뜻을 밝혀 행해야 하는 그런 "스승님"이 되어 버린다. </p>
<p> </p>
<p>(당장 나만 해도 올해부턴 번역에 착수하고 싶은 Martin Saar 의 번역을 출간해줄 출판사를 구하려면 기획서에 당연히 "악셀 호네트의 수제자로서 프랑스 철학을 주로 연구하며 독일 비판이론과 프랑스 후기구조주의를 모두 꿰뚫는 신진 대가" 뭐 이런 거 써야 하지 않겠냔 말이지.)</p>
<p> </p>
<p>내가 생각하기로, "서양 인문학" 분야 및 일부 사회과학 분야가 계속 이런 식으로 학계가 구성되는 것은 결코 뿌리깊은 사대주의라던가, 식민주의라던가 하는 그런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아주 물질적인 문제다. 이미 우리는 100년이 넘도록 서양인문학을 한국에서 연구해 왔는 걸. 하지만 학자를 길러내는 시스템이 이 모양이어서야, 늘 교수들은 유학파로 채워지고, 유학파 교수들은 수업시간에 "한국에서 제대로 벤야민을 이해하는 사람은 없어. 독일에선 말이지..." 뭐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 젊은 연구자들을 해외로 몰아댈 것이다. 바로 지금 그 자리에서 젊은 연구자들을 박사과정으로 받아서 함께 한국에서의 벤야민 이야기를 자기가 만들어 내야 하는 것인데도 말이다! </p>
<p> </p>
<p>유학은, 내가 볼 때는 그거 성격으로 하는 거다. 유학이 성격에 안 맞는 사람은 정말 고생한다. 애초에 넓이를 추구하길 즐기고, 타문화권, 타언어권에서 생활하는 것이 성품에 맞는 사람이 유학을 해야 건강도 안 버리고, 마음도 안 버린다. 머리는 좋고, 공부도 열심히 하지만 성격이 안 맞아서 유학을 와가지고는 몸 버리고, 마음도 버리고, 멀쩡한 사람 하나 완전히 이상한 사람 되가지고 피해의식과 자존심이 범벅이 된 채로 한국에서 유학파 부심 부리면서 동시에 유학생 먹칠하는 사람이 속출하는 건 그 사람에게 들어간 외화를 생각해도 너무 낭비가 아닌가. 안 가도 될 사람들이 한국에서 깊이 공부하면 연구자로서 일정한 커리어를 싸울 수 있는 모델이 정립이 되어 있다면 이런 낭비를 하지 않아도 될텐데 말이다. </p>
<p> </p>
<p>이런 상황을 타계하려면, 뭐 여러가지 대안이 있을 수 있겠지만 무엇보다 일정시점을 정해놓고, 국내 박사과정에 대한 공통의 기준과 장학 시스템을 마련한 이후 그 시점 이후 배출되는 국내박사를 거의 "무조건" 해외 박사들보다 높게 평가하는 "편협함"이 필요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한다. 해외에서 박사를 한 사람들의 경우는 국내에서 마치 프랑스의 국가박사논문이나 독일의 교수자격논문(하빌리타치온)처럼 박사논문에 준하는 논문을 하나 더 써야(그리고 그 논문은 한국 학계의 연구결과를 반드시 반영한 것이어야 하도록 하고) 국내 박사에 준하는 지위를 주는 것이다. 그럼 정말 자기가 좋아서 해외나가는 사람들 말고는 안 나가려 하겠지. 그리고 그게 결과적으로 한국의 인문사회과학계의 수준을 높이게 될 거다. 대학원 박사과정을 살리지 않으면 한국 인문학이란 사실상 계속 수입 학계로 밖에 남지 않게 될 것이다.</p>
<p> </p>
<p>반대로 유학파 연구자들의 커리어를 위해서는 "번역"과 "아카이빙"에 펀드와 평가를 제대로 쳐 줘야 한다. 지금처럼 유학을 다녀온 사람도 번역을 꺼리게 되고, 결국 인문학 번역을 석박사 대학원생들이 초기 경력삼아 하는 시스템보다는, 제대로 고급인력을 철썩철썩 굴려가면서 질 좋은 번역을 뽑아내고, 우리도 좀 우리말로 된 서양인문학 아카이브들을 제대로 갖추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유학파 연구자들은 이 분야에 일자리를 얻고 말이다. </p>
<p> </p>
<p>뭐, 삶을 위한 인문학도 좋고, 투쟁하는 인문학도 좋고, 다 좋은데, 제도권 학계 역시 인민의 공적 자산이다. 여기에도 신경써야 할 것들은 참으로 많다. 뭐 내가 아무리 애정을 갖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한다 해도 그곳은 나를 받아주지 않는 곳이겠지만 말이다.</p>
<iframe src="http://www.facebook.com/plugins/like.php?locale=ko_KR&href=http%3A%2F%2Fblog.jinbo.net%2Fminjung%2F&layout=standard&show_faces=true&width=445&action=like&colorscheme=light&" scrolling="no" frameborder="0" allowTransparency="true" style="border:none; overflow=hidden; width:445px; height:60px; margin-top:10px; margin-left:5px"></iframe><script type="text/javascript" src="http://tweetmix.net/js/widgetV2.js"></script><script type="text/javascript">if(("TMXW" in window)) { new TMXW.Widget({"shape":"default","target_url":"http://blog.jinbo.net/minjung/","widget_title":"\uc774 \uae00\uacfc \uc5f0\uad00\ub41c \ud2b8\uc717","default_msg":"","width":"445","height":"450","color_upper_back":"93C9E6","color_upper_text":"FFFFFF","color_tweet_back":"FFFFFF","color_border":"EBEBEB","color_text":"888888","color_link":"2ABBD4","widget_type":"1","btn_type":"1","max_messages":"10","is_show_avatar":"1"}).render().start();} </script><div class="buttons-bottom center jinboblog-i-like-this-buttons"><a class="button-jinboblog" href="javascript:void(0);" title="스크랩으로 글 링크를 저장하세요" onclick="recommend('2377',457,'/minjung','');"><img src="/plugins/../jplugins/ILikeThis/images/mini_chuchon.png" alt="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a><a class="button-twitter" href="http://twitter.com/home?status=http%3A%2F%2Fblog.jinbo.net%2Fminjung%2F457+%22%EB%82%B4%20%EC%9D%B4%EC%9D%B5%EC%97%90%20%EB%B0%98%ED%95%98%EB%8A%94%20%EC%9D%B4%EC%95%BC%EA%B8%B0%22" target="_blank" title="트위터로 리트윗합니다"><img src="/plugins/../jplugins/ILikeThis/images/twitter.png" alt="트위터로 리트윗하기" /></a><a class="button-facebook" href="http://www.facebook.com/sharer.php?u=http%3A%2F%2Fblog.jinbo.net%2Fminjung%2F457&t=%EB%82%B4%20%EC%9D%B4%EC%9D%B5%EC%97%90%20%EB%B0%98%ED%95%98%EB%8A%94%20%EC%9D%B4%EC%95%BC%EA%B8%B0" target="_blank" title="페이스북에 공유합니다"><img src="/plugins/../jplugins/ILikeThis/images/facebook.png" alt="페이스북에 공유하기" /></a><a class="button-delicious" href="http://delicious.com/save" onclick="window.open('http://delicious.com/save?v=5&noui&jump=close&url=http%3A%2F%2Fblog.jinbo.net%2Fminjung%2F457&title=%EB%82%B4%20%EC%9D%B4%EC%9D%B5%EC%97%90%20%EB%B0%98%ED%95%98%EB%8A%94%20%EC%9D%B4%EC%95%BC%EA%B8%B0','delicious','toolbar=no,width=550,height=550'); return false;" title="딜리셔스에 북마크합니다"><img src="/plugins/../jplugins/ILikeThis/images/delicious.png" alt="딜리셔스에 북마크" /></a></div><p><strong><a href="http://blog.jinbo.net/minjung/457?commentInput=true#entry457WriteComment">댓글 쓰기</a></strong></p>로타 비스키, 영면김강http://blog.jinbo.net/minjung/4542013-08-14T21:44:00+09:002013-08-14T21:42:26+09:00<p>장벽이 무너지기 직전. 베를린 알렉산더플라츠에 모인 50만명의 군중 앞에 그가 있었다. <br />
동독 정부의 자문역이었고, 포츠담의 영화학교 교수이기도 했던 한 50대 지식인이 차분하게 연설을 했다. </p>
<p> </p>
<p>"저의 잘못, 우리 세대의 잘못은 다시는 반복되지 말아야 합니다."</p>
<p> </p>
<p>그는 이후 그레고르 기지, 디트마르 바츠취와 함께 장벽 해체 이후 스탈린주의적 당-국가 기구의 해체와 "민주적인 사회주의"를 주창하며 집권 통일사회당의 내부 개혁, 그리고 마침내 민주사회당 창당에 참여했다. </p>
<p> </p>
<p>격정적인 연설가도, 카리스마적인 정치인도 아니었던 정치인 로타 비스키. 하지만 그는 독일 좌파 안에서 '경청하는 사람'(Zuhörer)이었다. 그의 지도 아래에서 민주사회당은 지속적으로 성장해 나갔고, 마침내 사민당에서 갈라져나온 서독 좌파들과 함께 좌파당을 건설하고 초기 당 건설의 임무를, 그리고 당내 갈등이 벌어졌을 때 구원투수의 역할을 맡았다. 그의 마지막 시기에 그는 유럽 좌파당과 유럽의회 좌파/녹색당 교섭단체의 대표를 맡아 일했다. </p>
<p> </p>
<p>8월 13일. 독일 사회민주당 창건자인 아우구스트 베벨의 기일에, 독일 좌파당의 창건자 로타 비스키 영면하다.</p>
<p> </p>
<div class="mvm uiStreamAttachments fbMainStreamAttachment" data-ft="{"type":10,"tn":"H"}" style="margin-top: 10px; margin-bottom: 10px; padding-left: 15px; padding-right: 20px; font-size: 11px; line-height: 14px; text-align: left; ">
<div class="shareRedesign _gxb largeMedia" style="position: relative; width: 398px; ">
<div class="clearfix shareRedesignContainer" style="background-color: rgb(247, 247, 247); zoom: 1; ">
<div class="_42ef" style="overflow: hidden; ">
<div class="attachmentText fsm fwn fcg" style="color: gray; max-height: 134px; overflow: hidden; ">
<div class="uiAttachmentTitle" data-ft="{"type":11,"tn":"C"}" style="word-break: break-word; word-wrap: break-word; color: rgb(59, 89, 152); padding-right: 16px; "><a class="pam shareText" href="http://www.tagesschau.de/multimedia/video/video1327858.html" rel="nofollow" style="color: rgb(59, 89, 152); cursor: pointer; text-decoration: none; padding: 8px 10px 7px; display: block; min-height: 72px; max-height: 154px; " target="_blank"><strong>Trauer um Ex-Chef der Linkspartei: Lothar Bisky im Alter von 71 Jahren gestorben</strong></a></div>
<a class="pam shareText" href="http://www.tagesschau.de/multimedia/video/video1327858.html" rel="nofollow" style="color: rgb(59, 89, 152); cursor: pointer; text-decoration: none; padding: 8px 10px 7px; display: block; min-height: 72px; max-height: 154px; " target="_blank"><span class="caption" data-ft="{"tn":"L"}">www.tagesschau.de</span></a>
<div class="mts uiAttachmentDesc translationEligibleUserAttachmentMessage" data-ft="{"tn":"M"}" style="word-break: break-word; word-wrap: break-word; margin-top: 7px; "><a class="pam shareText" href="http://www.tagesschau.de/multimedia/video/video1327858.html" rel="nofollow" style="color: rgb(59, 89, 152); cursor: pointer; text-decoration: none; padding: 8px 10px 7px; display: block; min-height: 72px; max-height: 154px; " target="_blank">Trauer um Ex-Chef der Linkspartei: Lothar Bisky im Alter von 71 Jahren gestorben</a></div>
</div>
</div>
</div>
</div>
</div>
<div class="clearfix" style="zoom: 1; font-size: 11px; line-height: 14px; text-align: left; "> </div>
<iframe src="http://www.facebook.com/plugins/like.php?locale=ko_KR&href=http%3A%2F%2Fblog.jinbo.net%2Fminjung%2F&layout=standard&show_faces=true&width=445&action=like&colorscheme=light&" scrolling="no" frameborder="0" allowTransparency="true" style="border:none; overflow=hidden; width:445px; height:60px; margin-top:10px; margin-left:5px"></iframe><script type="text/javascript" src="http://tweetmix.net/js/widgetV2.js"></script><script type="text/javascript">if(("TMXW" in window)) { new TMXW.Widget({"shape":"default","target_url":"http://blog.jinbo.net/minjung/","widget_title":"\uc774 \uae00\uacfc \uc5f0\uad00\ub41c \ud2b8\uc717","default_msg":"","width":"445","height":"450","color_upper_back":"93C9E6","color_upper_text":"FFFFFF","color_tweet_back":"FFFFFF","color_border":"EBEBEB","color_text":"888888","color_link":"2ABBD4","widget_type":"1","btn_type":"1","max_messages":"10","is_show_avatar":"1"}).render().start();} </script><div class="buttons-bottom center jinboblog-i-like-this-buttons"><a class="button-jinboblog" href="javascript:void(0);" title="스크랩으로 글 링크를 저장하세요" onclick="recommend('2377',454,'/minjung','');"><img src="/plugins/../jplugins/ILikeThis/images/mini_chuchon.png" alt="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a><a class="button-twitter" href="http://twitter.com/home?status=http%3A%2F%2Fblog.jinbo.net%2Fminjung%2F454+%22%EB%A1%9C%ED%83%80%20%EB%B9%84%EC%8A%A4%ED%82%A4%2C%20%EC%98%81%EB%A9%B4%22" target="_blank" title="트위터로 리트윗합니다"><img src="/plugins/../jplugins/ILikeThis/images/twitter.png" alt="트위터로 리트윗하기" /></a><a class="button-facebook" href="http://www.facebook.com/sharer.php?u=http%3A%2F%2Fblog.jinbo.net%2Fminjung%2F454&t=%EB%A1%9C%ED%83%80%20%EB%B9%84%EC%8A%A4%ED%82%A4%2C%20%EC%98%81%EB%A9%B4" target="_blank" title="페이스북에 공유합니다"><img src="/plugins/../jplugins/ILikeThis/images/facebook.png" alt="페이스북에 공유하기" /></a><a class="button-delicious" href="http://delicious.com/save" onclick="window.open('http://delicious.com/save?v=5&noui&jump=close&url=http%3A%2F%2Fblog.jinbo.net%2Fminjung%2F454&title=%EB%A1%9C%ED%83%80%20%EB%B9%84%EC%8A%A4%ED%82%A4%2C%20%EC%98%81%EB%A9%B4','delicious','toolbar=no,width=550,height=550'); return false;" title="딜리셔스에 북마크합니다"><img src="/plugins/../jplugins/ILikeThis/images/delicious.png" alt="딜리셔스에 북마크" /></a></div><p><strong><a href="http://blog.jinbo.net/minjung/454?commentInput=true#entry454WriteComment">댓글 쓰기</a></strong></p>[번역] 독일의 안티파 운동김강http://blog.jinbo.net/minjung/4532013-08-08T03:02:43+09:002013-08-08T03:02:43+09:00<p>독일어 위키의 "Antifa" 항목의 (약간의 요약)번역입니다. </p>
<p>출처: http://de.wikipedia.org/wiki/Antifa </p>
<p> </p>
<p> </p>
<hr />
<p> </p>
<p> </p>
<h1>안티파</h1>
<p>“안티파”라는 개념은 1980년대부터 다시 확산되기 시작한 “반파시즘” 및 “반파시스트 운동”을 지칭한다. 특히 반파시즘적 스펙트럼 안에서 좌파, 급진좌파, 자율주의 그룹이나 조직을 말한다. 많은 경우 반유대주의나 민족주의적 이데올로기에 대한 거부를 강조하는 경향을 보이며, 네오나치에 대한 반대운동과 역사수정주의적 경향에 대한 반대에 있어 의미 있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여러 안티파 그룹들, 특히 자율주의 씬의 그룹들은 독일에서 헌법수호청의 감시를 받고 있다. </p>
<p> </p>
<h2>기원</h2>
<p>반파시즘 행동의 개념과 이념은 무솔리니의 반대자들이 “안티파시스트”로 스스로를 이름붙였던 이탈리아에 기원을 두고 있다. 독일에서는 1923년에 공산당에 기반을 둔 준군사조직 “붉은전선투쟁동맹”(?)의 한 부분으로 “반파시즘 행동”이 존재했다. 이들의 목표는 당시 흥기하고 있었던 파시즘에 저항해 싸우는 것이었다. 처음에 반파시즘 행동의 회원들은 공산당으로부터만 충원되었지만 이후에는 모든 사회주의 정당과 조직들로부터 나오게 되었다. 반파시즘 행동은 자신들의 과제를 혁명적 투쟁을 수행하는 것이기 보다는 바이마르 공화국이 파시즘을 통해 “야만으로 추락”하는 것을 막는 것으로 설정했다. </p>
<p> </p>
<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attach/2377/1334554466.svg" style="height: 450px; width: 450px; " /></p>
<p> </p>
<p>당시 두장의 붉은 깃발이 오른쪽을 향해 휘날리는 이들의 로고는 당시 “혁명적 미술작가연맹”(BRBKD) 소속이었던 막스 카일손과 막스 겝하르트가 고안한 것이다. 이 두 장의 붉은 깃발은 사민당과 공산당을 상징한다. 깃발을 둘러싼 링은 “파시즘으로부터의 구원”을 상징하는 링이라고 한다. 이 로고는 전체적으로는 파시즘에 맞선 통일된 노동운동을 상징한다. 코민테른이 제안하고 독일공산당이 받아 않은 “사회주의 파시즘”의 구호—이후엔 폐기—로 인해 이 이 로고에서 외쳤던 노동운동의 통일은 더이상 적실성을 잃게 되었다.</p>
<p> </p>
<p>아돌프 히틀러의 권력탈취 이후 “반파시즘 행동”의 개념은 1933년부터 점점 사라져갔으며, 개별화 된 공산주의자들의 저항운동에서만 사용되었다. 민족사회주의 독재 시절에 있었던 반파시즘 행동의 한 역사적 예를 찾을 수 있다면 초기에 있었던 “뫼싱어 총파업”을 들 수 있다. </p>
<p> </p>
<h2>동독</h2>
<p>2차 세계대전기간 동안 반파시즘 학파나 서클은 소련의 독일 포로들 사이에서 맑스-레닌주의 교육과 반파시즘 계몽을 담당했다. 그래서 이후 동독의 통일사회당(SED)의 지도 아래에서 안티파의 개념은 서독과 미국의 (추정된) 파시즘적 발전에 대한 반제국주의적 투쟁을 위해 사용되었다.</p>
<p> </p>
<h2>재등장</h2>
<p>1980년대에 서독 지역의 점거자들과 자율주의 운동으로부터 소위 “안티파” 그룹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들은 우선 무엇보다 극우파의 폭력에 맞서 네오나치 공격의 희생자들을 보호했다. 이와 함게 시도되었던 것은 이들의 관점에서 극우파의 범위에 속하는 정당과 사회운동 조직들이 기획환 활동들을 방해하고 망치는 것이었다.— 독일민족민주당(NPD)의 당대회나 다양한 나치 관련 그룹들의 데모 등등.또한 안티파는 부분적으로 전통적인 반파시즘 조직인 “나치정권의 박해자 연합-반파시즘 동맹”(VVN-BdA) 등과 함께 정보를 교환하는 등의 일도 한다. </p>
<p> </p>
<p style="text-align: center;"><img src="/attach/2377/1049310884.svg" style="height: 450px; width: 450px; " /></p>
<p> </p>
<p>반파시즘은 원래 자율주의 운동의 행동영역이 아니었다. 하지만 일부 그룹들이 스스로를 1920년대와 나치시기의 반파시즘 저항운동의 전통 속에서 조명하기 시작했다. </p>
<p> </p>
<p>독일 통일 이후 다시 기승을 부린 민족주의와 극우파의 폭력으로 인해 안티파의 주장이 힘을 얻게 되었다. 특히 자율주의 운동 안에서 반파시즘은 가장 주요한 영역을 차지하게 된다. 1990년대 내내 서독과 동독 지역 모두에서 안티파 그룹들이 발흥하게 된다. </p>
<p> </p>
<p>이러한 발전은 1990년 괴팅엔에서 “아우토노멘 안티파 M”가 건설됨으로써 시작되었다.(참고로 2007년 사회당 대선후보였던 금민은 90년대 독일 유학을 하면서 이 조직에서 활동을 하는데...) 새롭게 조직된 그룹들은 자신들의 중심적 행동분야가 반파시즘 운동임을 분명히 하였다. 92년에는 이 그룹들 일각이 “반파시즘행동/전국조직”(AA/BO)로 조직된다. 이 그룹에는 괴팅엔의 “아우토노멘 안티파 M”외에도 “안티파 행동 베를린” 등의 조직이 소속되었다. 2001년에 AA/BO는 해산하지만, 동독과 서독 모두에서 여전히 안티파 조직들의 구조는 강하게 남아 있다. </p>
<p> </p>
<p>이 21세기의 첫 해에 안티파 내부에서 분열 경향이 나타난다. 이러한 분화는 소위 “반독일”과 “반제국주의” 그룹들 사이에서 벌어졌다. 무엇보다 근동문제에 대한 입장이 이 싸움에서 주제가 되었다. 이들은 서로를 “반유대주의”(반독일주의 쪽에서 반제국주의를 향해)와 “이슬람혐오”(반제국주의 쪽에서 반독일주의를 향해)로 비난했다. 2004년 중반엔 괴팅엔 아우토노멘 안티파 M과 안티파시스트 행동 베를린이 분열되었다. </p>
<p> </p>
<p>그러나 2005년 말 경 부터는 이러한 분열주의의 감소가 관측되고 있다. 극단적인 반독일주의나 반제국주의가 모두 안티파 운동에서 그 의미를 잃었으며 대부분의 안티파 그룹들은 양쪽 모두를 거부하고 “반교조주의”를 지향하고 있다. </p>
<p> </p>
<h2>행동들</h2>
<p>이들의 주요 활동은 부분적으로는 국내외의 극우파나 우익보수주의 세력에 대한 조사, 계몽, 자료 정리 및 홍보를 들 수 있다. 이와 더불어 격렬한 데모 역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예를 들어 극우파씬에 속하는 상점이나 클럽, 술집들, 극우파 정당이나 조직의 행진에 저항하는 대항 시위 등)안티파 그룹들은 때로 다른 정치 영역의 조직이나 개인들과 함께 일한다. 이들은 좌파로부터 청년사민당(Jusos), 녹색당 청년, 노조들 뿐만 아니라 기독교쪽 행동그룹이나 지역의 시민조직들과도 함께 일한다. </p>
<p> </p>
<p>오늘날 안티파 운동은 또한 반인종주의 그룹들이나 난민조직들과 연대하는 것을 과제로 삼고 있다. 안티파 조직들은 망명신청자들과 난민들, 장애인들, 또 여러 종류의 주변화된 소수자들의 권리 확장을 위해 매우 활동적으로 일하고 있다. </p>
<p> </p>
<p>자율주의 안티파 그룹들은 네오나치에 맞선폭력투쟁을 옹호한다. 또한 극우파나 민족주의, 또 인종주의적이거나 반유대주의적인 정당이나 조직들의 집회나 시위, 회의, 당대회 등을 격렬하게 고립시킬 것을 호소한다. 때에 따라서는 안티파 자율주의 그룹의 조직원들과 경찰 혹은 극우파 조직들 사이에서 시가전이 벌어지기도 한다. </p>
<p> </p>
<p>안티파 씬의 새로운 행동분야 중 하나는 “데이터 안티파” 혹은 “가상세계 안티파”라 할 수 있다. 이들 그룹은 극우파 웹사이트나 온라이샵 혹은 포럼들을 해킹하거나 극우파들의 기밀정보를 폭로하는 활동을 벌인다. </p>
<p> </p>
<h2>안티파에 대한 비판</h2>
<p>안티파에 대한 가장 빈번한 비판은 이들이 국가의 폭력독점을 거부하고 폭력투쟁을 옹호한다는 것이다. 안티파 내부에서 폭력 사용에 관한 토론은 매우 광범위하고 자세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이 토론에서는 광범위한 비폭력, 연좌시위와 같은 시민불복종 행동들에 대한 참여여부, 폭력적 도구의 사용 및 신체에 대한 폭력행사 등이 매우 논쟁적으로 다뤄지고 있다. </p>
<p> </p>
<p>연방 헌법수호청은 많은 안티파 그룹들을 폭력적 극좌 씬으로 규정하고 감시하고 있다.이러한 대응은 이들이 수직적인 조직구조를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다양한 방식으로 이뤄지고 있다.</p>
<iframe src="http://www.facebook.com/plugins/like.php?locale=ko_KR&href=http%3A%2F%2Fblog.jinbo.net%2Fminjung%2F&layout=standard&show_faces=true&width=445&action=like&colorscheme=light&" scrolling="no" frameborder="0" allowTransparency="true" style="border:none; overflow=hidden; width:445px; height:60px; margin-top:10px; margin-left:5px"></iframe><script type="text/javascript" src="http://tweetmix.net/js/widgetV2.js"></script><script type="text/javascript">if(("TMXW" in window)) { new TMXW.Widget({"shape":"default","target_url":"http://blog.jinbo.net/minjung/","widget_title":"\uc774 \uae00\uacfc \uc5f0\uad00\ub41c \ud2b8\uc717","default_msg":"","width":"445","height":"450","color_upper_back":"93C9E6","color_upper_text":"FFFFFF","color_tweet_back":"FFFFFF","color_border":"EBEBEB","color_text":"888888","color_link":"2ABBD4","widget_type":"1","btn_type":"1","max_messages":"10","is_show_avatar":"1"}).render().start();} </script><div class="buttons-bottom center jinboblog-i-like-this-buttons"><a class="button-jinboblog" href="javascript:void(0);" title="스크랩으로 글 링크를 저장하세요" onclick="recommend('2377',453,'/minjung','');"><img src="/plugins/../jplugins/ILikeThis/images/mini_chuchon.png" alt="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a><a class="button-twitter" href="http://twitter.com/home?status=http%3A%2F%2Fblog.jinbo.net%2Fminjung%2F453+%22%5B%EB%B2%88%EC%97%AD%5D%20%EB%8F%85%EC%9D%BC%EC%9D%98%20%EC%95%88%ED%8B%B0%ED%8C%8C%20%EC%9A%B4%EB%8F%99%22" target="_blank" title="트위터로 리트윗합니다"><img src="/plugins/../jplugins/ILikeThis/images/twitter.png" alt="트위터로 리트윗하기" /></a><a class="button-facebook" href="http://www.facebook.com/sharer.php?u=http%3A%2F%2Fblog.jinbo.net%2Fminjung%2F453&t=%5B%EB%B2%88%EC%97%AD%5D%20%EB%8F%85%EC%9D%BC%EC%9D%98%20%EC%95%88%ED%8B%B0%ED%8C%8C%20%EC%9A%B4%EB%8F%99" target="_blank" title="페이스북에 공유합니다"><img src="/plugins/../jplugins/ILikeThis/images/facebook.png" alt="페이스북에 공유하기" /></a><a class="button-delicious" href="http://delicious.com/save" onclick="window.open('http://delicious.com/save?v=5&noui&jump=close&url=http%3A%2F%2Fblog.jinbo.net%2Fminjung%2F453&title=%5B%EB%B2%88%EC%97%AD%5D%20%EB%8F%85%EC%9D%BC%EC%9D%98%20%EC%95%88%ED%8B%B0%ED%8C%8C%20%EC%9A%B4%EB%8F%99','delicious','toolbar=no,width=550,height=550'); return false;" title="딜리셔스에 북마크합니다"><img src="/plugins/../jplugins/ILikeThis/images/delicious.png" alt="딜리셔스에 북마크" /></a></div><p><strong><a href="http://blog.jinbo.net/minjung/453?commentInput=true#entry453WriteComment">댓글 쓰기</a></strong></p>[번역] 독일의 아우토노멘(자율주의 운동) 개관김강http://blog.jinbo.net/minjung/4522013-08-03T18:48:53+09:002013-08-03T05:05:31+09:00<p>위키에서 번역한 것입니다. 그 말의 의미는 위키에서 번역했다는 것입니다.:-ß 이 항목 문서의 경우는 2000대 초반 혹은 그 이전까지의 경향을 강하게 반영하고 있는 듯 하고, 특히 2000년대 후반 G8 반대운동 이후로 재정립을 거친 현재의 자율주의 운동 그룹(주로 포스트-자율주의라고 불립니다.)을 잘 반영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기회가 닿으면 프로젝트 삼아서 68 이후 독일 좌파 관련한 위키 페이지들을 번역해 두려고 합니다. 물론 그대로 번역하지는 않았구요, 너무 상세해서 맥락을 모르면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은 제외하였습니다. 각 항목들에 걸려 있던 링크도 클릭해봐야 독일어라 뺐... 암튼 이 한 자료만으론 부족하지만 좀 쌓이면 재밌는 자료가 될 거라 일단 기대를 해 보면서... 올려둡니다. </p>
<p> </p>
<p>출처: http://de.wikipedia.org/wiki/Autonome</p>
<hr />
<h1><span style="font-size:20px;">Autonome</span></h1>
<p> </p>
<p style="text-align: center;"><img alt="사용자 삽입 이미지" src="/attach/2377/1243146030.jpg" style="width: 450px; height: 291px; " /></p>
<p> </p>
<p>자율주의, 혹은 자율주의 그룹은 오늘날 통상적으로 독립적인 급진좌파-해방적 경향 및 아나키즘적 경향의 운동 흐름을 일컫는다. </p>
<p> </p>
<p>자율주의 그룹은 어피니티 그룹(유연행동그룹)을 통해 조직화되어 있다. 그룹들 간에는 느슨한 연결 혹은 네트워크 형태로 소통한다. 자율주의자들은 지배적인 사회 질서에 의존하지 않고 자주적인 자유공간을 창출하려고 애쓴다. 일반적으로 이들은 반 권위적, 사회혁명적, 아나키즘 친화적인 이상을 따른다. </p>
<p> </p>
<p>독일, 오스트리아, 스위스의 국가안보기관들은 자율 운동을 “좌익극단주의”로 평가한다. </p>
<p> </p>
<h2>기원과 이름</h2>
<p><br />
이탈리아에서 68 운동은 대학생들의 참여가 두드러졌던 프랑스나 미국, 독일 등지의 운동과는 달리 처음부터 젊은 노동자들의 운동이었다. 68/69년 당시의 노동자 대투쟁에서 “아우토노미아 오페라이아”(노동자의 자율)라고 스스로를 지칭한 노동자주의적 사회운동은 큰 역할을 담당했다. 아우토노미아 오페라이아 그룹은 투쟁적 운동으로써, 데모에서 경찰에 폭력적으로 맞섰으며, 공장에서의 사보타주를 주도했다. 노동자와 학생 뿐 아니라 노숙자와 실업자들도 이 운동에 함께 했다. 이들은 이스라엘 공산당과 주류 노동조합의 노선을 강하게 거부하였으며 “노동자주의 (오페라이스모)”라고 불리는 자신들의 이론을 발전시켰다. 이 이론의 핵심적 요소가 “자율”이었다. </p>
<p> </p>
<p>당시 안토니오 네그리, 마리오 뜨론띠 등의 지식인 그룹은 자신들이 속한 대학 뿐 아니라 노동현장에 열정적으로 참가했으며, 이들의 참여는 단지 지식인의 계몽적 역할에 머물지 않고 그람시의 “유기적 지식인”의 모습에 상응하는 그런 것이었다. 공장에서의 (전통적인 노동조합까지도 포함하는) 지배관계와 맞서는 투쟁 속에서 노동자주의와 자율주의의 이론이 태동하였고, 이후 70년대에 이 운동과 이론은 공장을 넘어서서 사회 곳곳의 여러 분야를 공격하게 된다. 이들은 도심에서의 건물 점거(스쾃), 대안미디어(자유 라디오 등), 대중교통 집단 무임승차 등의 운동방법들을 개발하였으며, 여성운동, 생태운동, 반전평화운동과 결합했다. </p>
<p> </p>
<p>70년대 후반 일각의 테러주의와 이에 대응하는 경찰국가의 강경한 탄압으로 인해 노동자주의는 약화되었지만 자율에 대한 이들의 이해, 즉 노동조합과 당과의 연결로부터 자주적인 정치적 투쟁, (고정된) 조직과 지도 없는 자생적인 운동에 대한 강조는 이후로 이탈리아 바깥의 “자율주의자”들이 자신들을 규정하는 내용이 된다. </p>
<p> </p>
<p>이탈리아의 자율주의 운동과는 달리 독일어권에서는 노동운동에서 노동자주의의 영향을 받은 실천이나 이론이 커다란 역할을 하지 못했다. </p>
<p> </p>
<h2>독일연방공화국에서 자율주의의 역사</h2>
<p>독일에서의 자율주의 운동은 60년대 후반의 학생운동 와중에 의회 밖 좌파 운동(APO) 전통에서 등장했다. 서베를린의 코뮨1 운동을 비롯한 “Spaß 게릴라” 행동이나 소위 “자발성 운동”등의 신좌파들은 독일 자율주의의 내용과 행동에 본질적인 영향을 미쳤다. </p>
<p> </p>
<p>70년대의 좌파 테러리즘 그룹인 적군파(RAF)나 7월 2일 운동 및 혁명세포(RZ)그룹 등을 후원하거나 그들에게 동조했다. RZ 네트워크 안에는 (특히 서베를린에 기반을 둔) 사회혁명적, 자율주의적 성향의 분파가 존재했다.</p>
<p> </p>
<p>하지만 오늘날 사용되는 “자율주의 (Autonomen)”, 좀 더 넓게는 “탈교조주의적 좌파”의 의미로 자신을 정체화하는 그룹들은 1980년대 들어서 북서부의 대도시와 서베를린에서 처음으로 등장하게 된다. 베를린에서는 1980년 여름에 자율주의자들의 총회가 처음으로 열렸다. 1980년 5월 6일은 투쟁적 자율주의자들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날이며, 여러 그룹들이 자신들의 창립일로 삼는 날이다. 이 날 브레멘에서는 연방군의 신병 선서식이 열렸고, 이에 대항하는 격렬한 대중시위가 있었다. 수 천명의 반군사주의자들은 경찰투입에 폭력적으로 맞섰다. </p>
<p> </p>
<p>70-90년대에서 오늘날까지 자율주의 그룹들은 빈번히 “신사회운동”의 데모나 직접행동에 참가하고 있다. 그 가운데는 반전평화운동이나 핵발전소 반대 운동 등을 들 수 있다. </p>
<p> </p>
<p>자율주의자들은 이런 직접행동의 목표나 내용에 따라 환영받기도 했지만 거부되기도 했다. 여타의 신사회운동과 자율주의 그룹들의 논쟁지점은 주로 자율주의 일각의 폭력투쟁 때문이었다. 이들 폭력 투쟁 그룹은 소위 “블랙블록”(검은 옷을 단체로 입고 폭력투쟁을 수행함)으로 불리는데, 이 개념은 프랑크푸르트의 검찰청이 붙인 이름이다. </p>
<p> </p>
<p>90년대 이후 자율주의자들이 주도하는 행동 영역에는 무엇보다 건물점거를 통한 자율주의 공간운동, 반파시즘 및 반인종주의 운동이 있고, “불법 인간은 없다”라는 구호 아래에서 난민과 이민자들에 연대하는 운동에도 자율주의자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2000년대 후반에는 여러 대도시들에서 느슨한 네트워크 형태의 자율주의자들의 총회들이 정기적으로 열리고 있다. </p>
<p> </p>
<h2>분열 / 반유대주의 논쟁</h2>
<p>자율주의자들은 처음부터 여러 상이한 급진적인 의회 밖 좌파들이 뒤섞여 있는 혼합체였다. 지역이나 시기에 따라 상이한 노선이 주도했다. 어떤 시기에는 아나코생디칼리즘을 추종하는 그룹들이 강했고, 또 어떤 시기에는 적군파와 친화적인 반제국주의 그룹이 자율주의 그룹을 주도하기도 했다. 즉 자율주의 그룹은 언제나 매우 다종적인 그룹이었다고 볼 수 있다. </p>
<p> </p>
<p>자율주의 운동과 관련된 두 개의 극단이 있다면 그것은 “반독일(Antideutsche)”노선과 “반제국주의(Amtiimps)” 노선이었다 할 수 있다. 이들 사이의 갈등은 좌파 내부의 반유대주의와 중동문제에 대한 입장 및 3차 걸프 전쟁에 대한 평가를 둘러싼 논쟁에서 불붙었다. 이 둘 사이의 논쟁은 매우 격렬했으며, 심한 경우 양 그룹들 사이의 직접적인 충돌이 벌어지기도 했다. </p>
<p> </p>
<p>“반독일” 노선은 이스라엘과의 연대를 표명하고, 미국의 중동정책을 종종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이들의 입장은 극단적 이슬람주의와 자살폭탄 공격에 대한 비판을 통해 잘 드러났다. </p>
<p> </p>
<p>“반제국주의” 노선은 이스라엘과 미국의 정책을 이들의 이념적 입장에 따라 제국주의적이며 범죄적인 것으로 바라본다. 이들은 ‘이스라엘의 억압에 저항하는 팔레스타인 민중의 해방운동’에 연대했다.</p>
<p> </p>
<p>다수의 반제국주의자들은 스스로를 자율주의자라고 이해하지 않는다. 이들의 세계관에서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시각은 선진국의 부가 남미, 아프리카, 아시아의 착취에 기반하고 있으며 자본주의는 이러한 지정학적 차원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심지어 선진국 대도시들의 가장 가난한 주민들도 이 세 개의 대륙에 대한 착취로 이득을 얻고 있기 때문에, 이들 선진국에 더 이상 사회 혁명에 대해 물질적인 이해를 가진 객관적인 의미의 프롤레타리아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봤다.</p>
<p> </p>
<p>혁명주의자들의 과제는 이런 점에서 개발도상국에서의 해방운동과 사회주의 정권을 후원하고, 선진국의 군산복합체에 대항해 사보타주와 평화운동에의 참여를 통해 투쟁하는 것이었다. 계급투쟁은 어떤 면에서 군사행동으로 환원되는 경향을 보이며, 이런 점에서 이들은 적군파에 동조 했고, 많은 적군파 활동가들이 반제국주의 운동으로부터 활동가를 수급했다. </p>
<p> </p>
<p>이와 달리 선진국에서의 혁명적 변화의 가능성을 믿는 자율주의자들은 스스로를 “사회혁명주의자”들로 표방했다. 특히 반독일주의자들의 입장은 모든 종류의 국민적 정체성을 강하게 거부하고, 독일의 반시오니즘에 대한 판단을 미국의 정책에 대한 긍정적 혹은 유보적인 판단과 연결하지 않는 반국가주의적 입장 중 하나라 볼 수 있다. 이 두 흐름은 자율주의 흐름의 안팎에 모두 존재한다. konkret나 Jungle World 등의 잡지는 이러한 반독일주의나 반국가주의 담론과정으로부터 강하게 영향을 받은 잡지라 할 수 있다. </p>
<p> </p>
<p>자율주의 그룹들 중 아나코생디칼리즘이나 아나키즘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그룹들은 국기 사용이나, 국가나 민족해방운동에대한 연대를 기본적으로는 거부하는 경향을 보인다. 왜냐하면 이런 운동은 지배와 억압을 민족국가의 내적인 구성요소로서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입장의 자율주의자들이 수 적으로는 가장 많으며, 이들은 반제국주의자들이나 반독일주의자들로부터 거리를 두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경향은 각각 여러 행동그룹들의 가장 극단적인 경향에 대한 것이고, 최근들어서는 좀 더 넓은 범위의 연대를 구축하는 흐름이 강하다고 볼 수 있다. </p>
<p> </p>
<h2>이론과 내용</h2>
<p>자율주의 그룹에서 빈번히 토론되는 내용들로는 자기조직화와 자율적 결정, 폭력 투쟁에 대한 질문 직접행동의 이론과 실재, 행동적 선전(Propaganda der Tat), 권한의 부여(Empowerments),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과 관련된 질문을 들 수 있으며, 직접행동과 행동적 선전은 방법론과, 권한부여와 개인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의 문제는 교육론과 관련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p>
<p> </p>
<p>자율주의자들은 우리가 최종적으로자율적이며 독립적인 존재가 되는 것이 가능하다고 본다. 모든 사람들은 관계망 속에서 독립적으로 살아가며, 이것은 사회적 존재 일반이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이 가장 주목하는 것은 이러한 독립성이 가능한한 타율 없이 살아갈 수 있기를 추구함에 있어서 어디까지가 외부의 결정이며 어디까지가 자기 결정인가 하는 것이다. 폭력투쟁은 이들 그룹들 안에서는 “군사적”이 아니라 “투쟁적”이라는 의미로 이해된다. 폭력은 궁극적으로 사라져야 하며 그런 점에서 이들은 국가의 폭력 독점을 문제시한다. 폭력투쟁적 행동의 공격목표는 앞서 설명한 여러 운동 영역 외에도 성산업과 성차별주의자들, 외국인청, 네오나치들의 근거지 착취로 이름높은 사업장, G8 등의 국제회의 등이 있다.</p>
<p> </p>
<p>자율주의자들의 이론적인 토대에선 “삼중의 억압”이 종종 이야기 된다. 이것은 인종주의, 성차별주의(섹시즘), 계급문제의 복합을 말한다. 이러한 이론은 상품의 사회적 생산과 사적 소유를 자본주의의 근본 모순으로 보는 사회주의나 공산주의 고전과 관점을 달리한다고 볼 수 있다. 이들에 따르면 모든 인간은 이 세 가지 권력형식으로 구성된 관계망 속에서 각각의 삶의 상황을 따라 상이한 방식으로 억압받고 있는 것이다. 한동안은 자율주의 경향들 속에서는 자본주의적 사회관계 속에서는 노동의 해방적 역할을 기대할 수 없으며, 자본주의적 관계를 거부하는 실천(평의회 등)을 통해서 “자유로운 인간들의 공동체”(맑스)를 창출할 수 있다는 “가치비판이론”이 주목을 받기도 했다. (물론, 가치비판이론 안에도 상이한 흐름이 존재한다.)</p>
<p> </p>
<h2>하위문화에서의 영향</h2>
<p>1980년대 초반부터 하위문화(써브컬쳐)로서 음악 뿐만 아니라 라이프스타일을 포괄하는 펑크 운동이 시작되었다. 이들은 상업화된 록과 팝음악 및 관습적인 패션과 라이프스타일에 반기를 들었고, 당시 상대적으로 ㅈ럼은 세대의 자율주의자들의 상당수에 문화적 영향을 끼쳤다. </p>
<p> </p>
<p>좌파 이론은 “(요즘의 ‘잉여’와 비슷한 의미에서) 멋진 전복적” 유머들과 연결되었다.(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이러한 집단들 중에는 자율주의적인 학생-여성운동, 남성운동(여성운동의 맥락과 같이하는 남성해방운동), 동성애 운동의 여러 근원들이 있었다. </p>
<p> </p>
<p>80년대 말에는 많은 여성들이 자율주의 씬을 떠나게 된다. 당시 많은 여성활동가들이 그들에게 저질러진 성역할 부여와 성폭력을 이슈화 하고, 해결을 요구하게 되면서 성별화된 “섹시즘 (성차별주의부터 성폭력의 문제 등 많은 것을 포괄한 개념)”의 문제의식이 운동사회 안에서 폭발적을 확산되었던 것이다.보쿰에서는 여성활동가들이 자율센터에서의 섹시즘에 대한 논쟁 이후 남성 활동가들의 퇴거를 요구하였고, 공간을 “자율주의 여성 센터”로 이름붙인 일도 있었다. 이 외에도 각 지역의 섹시즘 논쟁 이후 조직이 분열되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자율주의 여성/레즈비언” 씬의 비판자들에게 이들은 도덕적 엄숙주의라는 비판을 받았다. 사실상 자율주의 집단들은 이 질문에 있어서 매우 이질적인 채로 남게 되었다. 90년대 초에는 자율주의자 게이들이 “Tunten (여성적으로 여겨지는 동성애자들을 지칭)-테러-투어”의 일활으로 Fulda시의 카톨릭 성당 앞에서 소위 “Sex-In”을 하기도 했다.(뭐지? 뭐야? 뭐냐고! 흠흠.) 같은 시기에 채식주의나 배건 운동이 자율주의 씬에서 주요 테마로 대두되었다. 폭력투쟁과 관련해서는 매우 강한 분파화가 있기도 했다.한편에선 헬멧과 유니폼으로 신분을 숨긴 블랙 블록의 투쟁을 원천적인 자율주의의 데모 형태라고 굳게 주장했지만, 다른 한편에선 이런 방식을 “의례적 폭력투쟁 페티시”라고 비판하고, “Pink and Silver”와 같은 새로운 행동양식이나 “저항의 리듬”과 같은 정치적 타악기 그룹들을 발전시키기도 했다. </p>
<p> </p>
<p> </p>
<iframe src="http://www.facebook.com/plugins/like.php?locale=ko_KR&href=http%3A%2F%2Fblog.jinbo.net%2Fminjung%2F&layout=standard&show_faces=true&width=445&action=like&colorscheme=light&" scrolling="no" frameborder="0" allowTransparency="true" style="border:none; overflow=hidden; width:445px; height:60px; margin-top:10px; margin-left:5px"></iframe><script type="text/javascript" src="http://tweetmix.net/js/widgetV2.js"></script><script type="text/javascript">if(("TMXW" in window)) { new TMXW.Widget({"shape":"default","target_url":"http://blog.jinbo.net/minjung/","widget_title":"\uc774 \uae00\uacfc \uc5f0\uad00\ub41c \ud2b8\uc717","default_msg":"","width":"445","height":"450","color_upper_back":"93C9E6","color_upper_text":"FFFFFF","color_tweet_back":"FFFFFF","color_border":"EBEBEB","color_text":"888888","color_link":"2ABBD4","widget_type":"1","btn_type":"1","max_messages":"10","is_show_avatar":"1"}).render().start();} </script><div class="buttons-bottom center jinboblog-i-like-this-buttons"><a class="button-jinboblog" href="javascript:void(0);" title="스크랩으로 글 링크를 저장하세요" onclick="recommend('2377',452,'/minjung','');"><img src="/plugins/../jplugins/ILikeThis/images/mini_chuchon.png" alt="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a><a class="button-twitter" href="http://twitter.com/home?status=http%3A%2F%2Fblog.jinbo.net%2Fminjung%2F452+%22%5B%EB%B2%88%EC%97%AD%5D%20%EB%8F%85%EC%9D%BC%EC%9D%98%20%EC%95%84%EC%9A%B0%ED%86%A0%EB%85%B8%EB%A9%98%28%EC%9E%90%EC%9C%A8%EC%A3%BC%EC%9D%98%20%EC%9A%B4%EB%8F%99%29%20%EA%B0%9C%EA%B4%80%22" target="_blank" title="트위터로 리트윗합니다"><img src="/plugins/../jplugins/ILikeThis/images/twitter.png" alt="트위터로 리트윗하기" /></a><a class="button-facebook" href="http://www.facebook.com/sharer.php?u=http%3A%2F%2Fblog.jinbo.net%2Fminjung%2F452&t=%5B%EB%B2%88%EC%97%AD%5D%20%EB%8F%85%EC%9D%BC%EC%9D%98%20%EC%95%84%EC%9A%B0%ED%86%A0%EB%85%B8%EB%A9%98%28%EC%9E%90%EC%9C%A8%EC%A3%BC%EC%9D%98%20%EC%9A%B4%EB%8F%99%29%20%EA%B0%9C%EA%B4%80" target="_blank" title="페이스북에 공유합니다"><img src="/plugins/../jplugins/ILikeThis/images/facebook.png" alt="페이스북에 공유하기" /></a><a class="button-delicious" href="http://delicious.com/save" onclick="window.open('http://delicious.com/save?v=5&noui&jump=close&url=http%3A%2F%2Fblog.jinbo.net%2Fminjung%2F452&title=%5B%EB%B2%88%EC%97%AD%5D%20%EB%8F%85%EC%9D%BC%EC%9D%98%20%EC%95%84%EC%9A%B0%ED%86%A0%EB%85%B8%EB%A9%98%28%EC%9E%90%EC%9C%A8%EC%A3%BC%EC%9D%98%20%EC%9A%B4%EB%8F%99%29%20%EA%B0%9C%EA%B4%80','delicious','toolbar=no,width=550,height=550'); return false;" title="딜리셔스에 북마크합니다"><img src="/plugins/../jplugins/ILikeThis/images/delicious.png" alt="딜리셔스에 북마크" /></a></div><p><strong><a href="http://blog.jinbo.net/minjung/452?commentInput=true#entry452WriteComment">댓글 쓰기</a></strong></p>청(소)년, 그리고 몰락의 정치김강http://blog.jinbo.net/minjung/4482012-08-08T19:19:45+09:002012-08-08T01:54:35+09:00<h3>
<em style="color: rgb(178, 34, 34); font-size: 14px; ">«잉여의 시선으로 본 공공성의 인문학»(이파르, 2011)에 실린 글입니다. </em></h3>
<h3>
</h3>
<h2>
홍대 앞 철거농성장 ‘두리반’과 청(소)년의 집합행동</h2>
<p>
</p>
<p>
나의 지구가 죽어간대 / 나도 월세 땜에 죽겠는데</p>
<p>
나의 지구를 살려야한대 / 살릴 땅 한 평도 난 못 샀는데</p>
<p>
북극곰 집이 녹아 사라진대 / 내 집도 재개발로 사라진대</p>
<p>
하와이 섬들이 사라져 간대 / 하와이 한번 가보고 싶은데</p>
<p>
자동차 배기가스가 문제래 / 나는 면허 없는 게 문젠데</p>
<p>
해수면 높아져 큰일이 났대 / 난 휴가철에 해수욕도 못 갔는데</p>
<p>
차라리 잘됐어 될 대로 되라지 / 어차피 이 세상은 내 것이 아냐</p>
<p>
-갤럭시 익스프레스, <나의 지구를 지켜줘> 중</p>
<p>
</p>
<p>
</p>
<p>
88만원 세대론부터 G세대론을 거쳐 ‘20대 개새끼’론까지. 최근 들어 활발하게 진행되어온 20대 담론은 어떤 식으로든 오늘날의 20대가 사회에 ‘물음’을 제기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물론 많은 논자들이 지적해왔듯이 그것은 능동적이고 주체적인 ‘질문하기’가 아니라는 것, 현재 20대의 상황 자체가 하나의 ‘물음’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사실상 수많은 세대 담론들은 20대 자신의 그것이라기보다는 지금의 20대라는 물음 앞에 놓인 기성세대들의 대답에 가깝다. 그리고 그 대답이 향하는 곳이 정치 분야건, 상업의 분야건 ‘마케팅’이라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p>
<p>
</p>
<p>
자기 자신의 언어를 가질 수 없는 이들은 언제나 길게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 수많은 세대론 사이를 헤쳐나가는 20대들의 목소리는 그래서인지, 장황하다. 책을 많이 읽은 이는 잡다한 인문학의 개념어들을 통해서, 그렇지 않은 이들은 자신이 겪어온 인생 이야기를 통해서, 20대는 자신의 삶이 어떻게 그들의 세대론 속에 갇히지 않는 값어치를 갖고 있는지를 장황하게 이야기한다. 이런 목소리는 마치 <무한도전> 속 ‘하하’ 캐릭터의 절규 같기도 하다. “나 아니라구우! 그런 게 아니라니까아!” 장광설이든, 절규든 그것은 지혜로워보이지 않는다. 이들이 더 많이 말할수록, 혹은 더 외칠수록 그것은 진리-언어<span style="text-align: justify; text-indent: -5.7px; font-size: 5.3px; font-family: 'Nanum Myeongjo'; letter-spacing: -0.3px; "><sup>1</sup></span><span style="font-size: 8px; text-align: justify; text-indent: -5.7px; letter-spacing: -0.3px; "><span class="Apple-tab-span" style="white-space:pre"> </span> 여기서 진리</span><span style="font-size: 8px; text-align: justify; text-indent: -5.7px; font-family: 'Nanum Myeongjo'; letter-spacing: -0.3px; ">-</span><span style="font-size: 8px; text-align: justify; text-indent: -5.7px; letter-spacing: -0.3px; ">언어란 도그마로 기능하는 언어를 일컫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주체를 생산해내는</span><span style="font-size: 8px; text-align: justify; text-indent: -5.7px; font-family: 'Nanum Myeongjo'; letter-spacing: -0.3px; ">, </span><span style="font-size: 8px; text-align: justify; text-indent: -5.7px; letter-spacing: -0.3px; ">혹은 그 생산을 설명하는 언어를 말한다</span><span style="font-size: 8px; text-align: justify; text-indent: -5.7px; font-family: 'Nanum Myeongjo'; letter-spacing: -0.3px; ">. </span>에 닿지 못하고 세대론자들의 수많은 분석과 기획의 ‘대상’으로 전락할 뿐이다. 때문에 우리에게는 이들의 언어를 대하는 신중한 감각이 요구된다. 별다른 의미를 갖지 못한 장광설이나 절규로만 보이는 이들의 언어 속에서 들려오는 희미한 진리-언어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것이다. </p>
<p>
</p>
<p>
나는 최근에 이러한 작업을 가장 성공적으로 수행한 것으로 단연 엄기호의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를 꼽는다. 이 책은 저자가 수년간 연세대 원주 캠퍼스와 덕성여대에서 강의하면서 만난 대학생들과의 대화로 채워져 있다. 이 책이 택한 방법론은 이들을 하나의 세대로 규정하여 외부에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이들과의 대화를 통해 저자 자신이 배우게 된 것을 기술하는 것이었다. 20대의 삶의 조건과 서사 속으로 들어가 거기에서 이들을 만들고 있는/이들이 만들어 가는 세계를 발견 하는 것, 그것이 이 책이 여타의 세대 담론을 넘어선 성취라 할 수 있다. 이 글에서 나는 엄기호의 문제의식에 공명하여, 좀더 좁은 범위의 대상과 주제를 다루어 보려고 한다. 홍대입구역 앞의 철거 농성장 ‘두리반’과 함께 싸움을 이어가고 있는 청(소)년들이 그 대상이며, 주로 다룰 주제는 정치가 될 것이다. 이들의 이야기 속에서 나는 민주화 이후 한국 사회를 구성해 온 주류의 정치적 언어와는 다른 언어가 현재의 ‘싸우는 20대’<span style="text-align: justify; text-indent: -5.7px; font-size: 5.3px; font-family: 'Nanum Myeongjo'; letter-spacing: -0.3px; "><sup>2</sup></span><span style="font-size: 8px; text-align: justify; text-indent: -5.7px; letter-spacing: -0.3px; "><span class="Apple-tab-span" style="white-space:pre"> </span> 이것은 지난 </span><span style="font-size: 8px; text-align: justify; text-indent: -5.7px; font-family: 'Nanum Myeongjo'; letter-spacing: -0.3px; ">1</span><span style="font-size: 8px; text-align: justify; text-indent: -5.7px; letter-spacing: -0.3px; ">월 </span><span style="font-size: 8px; text-align: justify; text-indent: -5.7px; font-family: 'Nanum Myeongjo'; letter-spacing: -0.3px; ">12</span><span style="font-size: 8px; text-align: justify; text-indent: -5.7px; letter-spacing: -0.3px; ">일 두리반에서 열렸던 </span><span style="font-size: 8px; text-align: justify; text-indent: -5.7px; font-family: 'Nanum Myeongjo'; letter-spacing: -0.3px; ">“</span><span style="font-size: 8px; text-align: justify; text-indent: -5.7px; letter-spacing: -0.3px; ">싸우는 </span><span style="font-size: 8px; text-align: justify; text-indent: -5.7px; font-family: 'Nanum Myeongjo'; letter-spacing: -0.3px; ">20</span><span style="font-size: 8px; text-align: justify; text-indent: -5.7px; letter-spacing: -0.3px; ">대</span><span style="font-size: 8px; text-align: justify; text-indent: -5.7px; font-family: 'Nanum Myeongjo'; letter-spacing: -0.3px; ">, </span><span style="font-size: 8px; text-align: justify; text-indent: -5.7px; letter-spacing: -0.3px; ">우린 어디로 가는가</span><span style="font-size: 8px; text-align: justify; text-indent: -5.7px; font-family: 'Nanum Myeongjo'; letter-spacing: -0.3px; ">?” </span><span style="font-size: 8px; text-align: justify; text-indent: -5.7px; letter-spacing: -0.3px; ">토론회에서 따온 것이다</span><span style="font-size: 8px; text-align: justify; text-indent: -5.7px; font-family: 'Nanum Myeongjo'; letter-spacing: -0.3px; ">. </span><span style="font-size: 8px; text-align: justify; text-indent: -5.7px; letter-spacing: -0.3px; ">물론 두리반 사람들 중에는 상당수의 </span><span style="font-size: 8px; text-align: justify; text-indent: -5.7px; font-family: 'Nanum Myeongjo'; letter-spacing: -0.3px; ">‘10</span><span style="font-size: 8px; text-align: justify; text-indent: -5.7px; letter-spacing: -0.3px; ">대</span><span style="font-size: 8px; text-align: justify; text-indent: -5.7px; font-family: 'Nanum Myeongjo'; letter-spacing: -0.3px; ">’</span><span style="font-size: 8px; text-align: justify; text-indent: -5.7px; letter-spacing: -0.3px; ">가 존재하며</span><span style="font-size: 8px; text-align: justify; text-indent: -5.7px; font-family: 'Nanum Myeongjo'; letter-spacing: -0.3px; ">, </span><span style="font-size: 8px; text-align: justify; text-indent: -5.7px; letter-spacing: -0.3px; ">이 글을 위해 인터뷰한 활동가들 중에도 두 명이 </span><span style="font-size: 8px; text-align: justify; text-indent: -5.7px; font-family: 'Nanum Myeongjo'; letter-spacing: -0.3px; ">10</span><span style="font-size: 8px; text-align: justify; text-indent: -5.7px; letter-spacing: -0.3px; ">대 활동가였다</span><span style="font-size: 8px; text-align: justify; text-indent: -5.7px; font-family: 'Nanum Myeongjo'; letter-spacing: -0.3px; ">. </span><span style="font-size: 8px; text-align: justify; text-indent: -5.7px; letter-spacing: -0.3px; ">또한 두리반에는 청</span><span style="font-size: 8px; text-align: justify; text-indent: -5.7px; font-family: 'Nanum Myeongjo'; letter-spacing: -0.3px; ">(</span><span style="font-size: 8px; text-align: justify; text-indent: -5.7px; letter-spacing: -0.3px; ">소</span><span style="font-size: 8px; text-align: justify; text-indent: -5.7px; font-family: 'Nanum Myeongjo'; letter-spacing: -0.3px; ">)</span><span style="font-size: 8px; text-align: justify; text-indent: -5.7px; letter-spacing: -0.3px; ">년들만이 결합하고 있는 것이 아니며 매우 다양한 이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연대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해두도록 하자</span><span style="font-size: 8px; text-align: justify; text-indent: -5.7px; font-family: 'Nanum Myeongjo'; letter-spacing: -0.3px; ">. </span> 속에서 형성되고 있는 풍경을 그려보려 한다. 그러니까 “이것은 왜 정치가 아니란 말인가?”</p>
<p>
</p>
<h4>
철거민과 청(소)년들의 우연적인 혹은 필연적인, 만남</h4>
<p>
</p>
<p>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두리반’의 시작은 2009년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부터이다. 그 일대를 몽땅 사들이고, 세입자들의 연대를 분쇄하여 차례차례 헐값을 주고 내보낸 GS 건설의 유령회사 남전디앤씨는 계고장 하나 미리 보내지 않은 채 갑자기 용역을 동원해서 마지막까지 협상하지 않고 남아 있던 칼국수 요리집 두리반의 집기를 들어내고 펜스를 둘러 쳤다. 그리고 그 다음날 밤, 안종려 사장은 극한의 두려움과 분노 속에서 그 펜스를 뜯고 가게로 다시 들어갔다. 점거 농성이 다른 철거 투쟁 현장과 조금 달랐던 것은 당사자 뿐 아니라 안 사장의 남편 소설가 유채림의 동료들인 작가회의 회원들이 일찍부터 농성에 연대하였다는 것이다. </p>
<p>
</p>
<blockquote>
<p>
그때는 한국작가회의 분들이나 모교 민주동문회 후배들은 돌아가면서 번을 서줬었어요. 그날도 일상처럼 두리반에 들러줬는데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가기 전에 나한테 묻는 거예요. “형님 노동자는 어떻게 싸우죠?” “뭘 어떻게 싸워?” 그랬더니 “노동자의 방식으로 싸우겠죠.” 하는 거예요. 그 다음엔 “그럼 농민은 어떻게 싸워요?”라고 물어보더라구요. “농민의 방식으로 싸우겠지.” 했더니 “작가는 어떻게 싸워요.” 그 말을 하는 거예요. 제가 그때 정말, 홍두깨로 뒤통수를 호되게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을 받았어요. 그렇게 ‘철거민’이라는 자각보다 ‘나는 작가였지’ 하는 게 먼저 왔어요. 그걸 느끼고부터 철거의 문제점, 우리의 억울한 사례들을 내 시선으로, 내가 겪은 그대로 쓰면 얼마나 더 호소력이 있을까 싶어서 쓰기 시작했어요. (처음에 쓰신 글이?) 한겨레에 썼던 칼럼이었어요. ‘아내의 우물 두리반’이라는 제목이에요. 그 후로 가능하면 모든 지면을 통해서 알리려고 노력을 했죠. 프레시안, 작은 책, 한살림 등등 계속해서 써나갔어요. -유채림, 「퍼슨웹」과의 인터뷰(http://www.personweb.com/articles/247)에서 </p>
<p>
</p>
</blockquote>
<p>
농성장의 이러한 성격은 두리반이 젊은 예술가들과 활동가들이 활발하게 활동하는 지금의 모습으로 이어질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두리반을 낳은 상황은 한국사회의 고질적인 철거 재개발의 문제와 전혀 다르지 않았다. 90년대 중반 이후 신촌 등의 지역의 비싼 임대료를 견디지 못한 젊은 예술가들과 클럽들이 모여들면서 시작된 소위 ‘홍대 문화’는 2000년대를 지나며 이 지역의 땅값을 엄청나게 올렸다. 이런 공간에 거대 자본이 눈독을 들이게 된 것은 당연한 일. 최근 몇 년간 홍대 입구역 주변을 필두로 마치 강남 테헤란로를 연상시키듯 고층빌딩들이 계속 올라가는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이 진행되었고, 공항 철도가 이 지역을 지나게 되면서 홍대에서 상대적으로 변두리에 있었던 동교동 일대까지 지구단위계획으로 묶여서 재개발이 시작된 것이다.<span style="text-align: justify; text-indent: -5.7px; font-size: 5.3px; font-family: 'Nanum Myeongjo'; letter-spacing: -0.3px; "><sup>3</sup></span><span style="font-size: 8px; text-align: justify; text-indent: -5.7px; letter-spacing: -0.3px; "><span class="Apple-tab-span" style="white-space:pre"> </span> 현재는 두리반 뒤편의 </span><span style="font-size: 8px; text-align: justify; text-indent: -5.7px; font-family: 'Nanum Myeongjo'; letter-spacing: -0.3px; ">‘</span><span style="font-size: 8px; text-align: justify; text-indent: -5.7px; letter-spacing: -0.3px; ">걷고 싶은 거리</span><span style="font-size: 8px; text-align: justify; text-indent: -5.7px; font-family: 'Nanum Myeongjo'; letter-spacing: -0.3px; ">’ </span><span style="font-size: 8px; text-align: justify; text-indent: -5.7px; letter-spacing: -0.3px; ">일대까지 지하상가 등의 재개발이 예고된 상태이다</span><span style="font-size: 8px; text-align: justify; text-indent: -5.7px; font-family: 'Nanum Myeongjo'; letter-spacing: -0.3px; ">. </span><span style="font-size: 8px; text-align: justify; text-indent: -5.7px; letter-spacing: -0.3px; ">포스코가 주도하는 이 곳 역시 법적으로는 지구단위사업계획으로 묶인 지역이며 이에 따른 갈등은 이미 표면화되고 있다</span><span style="font-size: 8px; text-align: justify; text-indent: -5.7px; font-family: 'Nanum Myeongjo'; letter-spacing: -0.3px; ">. </span><span style="font-size: 8px; text-align: justify; text-indent: -5.7px; letter-spacing: -0.3px; ">개발 이익 중 얼마를 회수할 수 있는 마포구는 세입자들에 대한 어떠한 대안도 내놓지 않고 있다</span><span style="font-size: 8px; text-align: justify; text-indent: -5.7px; font-family: 'Nanum Myeongjo'; letter-spacing: -0.3px; ">. </span></p>
<p>
</p>
<p>
지구단위계획에 따른 재개발은 세입자들에게는 악랄하기 그지 없는 폭력이다. 뉴타운이나 주거환경개선 등 공익사업의 경우 세입자들이 영업이익이나 이전비용을 어느 정도 보전받을 수 있는 반면, 지구단위계획은 민간개발이기 때문에 세입자들은 상가임대차보호법에 따른 어떤 보호도 받을 수 없었던 것이다. 홍대 앞의 문화와 상권을 만들며 이 지역의 가치를 올려온 건 땅주인들이 아니라 세입자들이었건만, 땅주인들이 시세의 열배가 넘는 평당 8000만원에서 2억원까지 받고 땅을 팔아 이득을 보는 동안 세입자들은 그나마의 월세 보증금도 소송비용으로 뜯기고, 마치 시혜를 베풀듯 주어지는 몇백만원의 이사비용만 받고 추방당해야 했다. 그리고 두리반의 안종려 사장은 그 시혜도, 추방도 거부하고 두리반을 지키는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에 돌입했다. 그의 요구는 이전의 삶을 이어갈 수 있게 해달라는 것. </p>
<p>
</p>
<p>
초기에는 사장 내외와 가까운 작가회의 회원들, 촛불을 켜는 그리스도인들, 전철연, 진보정당들이 이 싸움에 연대했다. 그리고 2월, 유채림 작가의 칼럼을 보고 인디 뮤지션인 정동민과 한받이 두리반을 찾아왔다. 이들은 농성 주체들의 사정을 듣고 ‘음악가의 방식’으로 연대를 시작했다. 그것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토요일 <자립음악회>의 시작이었다. 3월 12일에는 용산참사 현장에서 미디어 활동을 하던 활동가 조약골 등의 기획으로 금요 <칼국수 음악회>도 시작되었다. 음악회가 진행되면서 홍대 주변에서 활동하던 많은 인디 밴드들과 자립음악가들, 그리고 젊은 관객들이 농성장을 찾기 시작했다. 농성장의 분위기는 사뭇 달라졌다. 안종려 사장은 “작가들과 인디밴드들이 함께 한 다음부터 문을 잠그지 않게 되었다.”고 말한다. 젊은 음악가들과 두리반의 이런 연대는 5월 1일 노동절을 기점으로 폭발적으로 확장되었다. “세계노동절120주년기념전국자립음악가대회뉴타운칼챠제공파티 <51+>”가 열렸던 것이다. 처음에 술자리 아이디어어일 뿐이었던 ‘51개의 밴드가 참여하는 노동절 음악회’는 이날 하루 종일 두리반 지하와 3층, 뒷 공터의 야외무대까지를 65개의 밴드와 수천 명의 관객들이 가득 채우며 동교동 3거리 일대를 저항의 공간으로 바꾸어 놓았다. </p>
<p>
</p>
<p>
현재까지 두리반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청(소)년 활동가들의 결합은 대부분 이 시기에 이루어졌다. <51+>에 자원봉사나 관객으로 참여했던 10대, 20대 활동가들이 계속해서 두리반에 결합하게 되었고, 두리반에서 먹고 자며 상근하는 이들까지 생겨났다.</p>
<p>
</p>
<blockquote>
<p>
친구가 4월 말에 전화해서 홍대에 두리반이라는 데가 있는데, 여기서 5월 1일 날에 인디밴드들이 총 집결해서 공연을 한다고 연락을 했어. 그 중에 내가 엄청 좋아하는 인디신의 밴드들이 많아서 두리반에 대해 관심 갖고 조사를 해 봤지. ‘어 여기 재미있는 데다.’ 그리고 4월 20일 전후로 두리반에 오게 되었어. 그 때 청소년 인권운동가들이 꽤 많이 결합했었어. (여기에 매일 오잖아. 내가 ‘연대한다’라는 걸 넘어서 여기가 ‘내 투쟁이다’라고 생각하게 된 건 어떤 계기였어?) 어… 두리반이란 장소가 ‘대안공동체’라는 이미지를 가졌을 때? 여기가 자유롭고 평화롭고, 유쾌하기까지 하면서 또 진중한 투쟁의 현장이라는, 또 음악이 있고 춤이 있고, 내가 좋아하는 홍대에 있고. 그래서 어느 순간 두리반이 나다. 그렇게 생각을 했지. -청소년 활동가 A 인터뷰</p>
<p>
</p>
</blockquote>
<blockquote>
<p>
어떻게 상근하게 되었냐면…… 사실 그 한 열흘 정도의 기억이 잘 안나는데, 어느 순간 보니까 자연스럽게 여기서 자고 있더라고. 왜 상근하게 되었는지 생각해보면 당연히 강제철거의 문제, 자본의 폭력 이런 거에 동감하고, 그걸 두리반에 와서 제대로 보게 되었지. [중략] 그리고 두리반에 오면서 두리반에서 형성된 문화들이 아주 좋았어. 내가 원했던, 안 좋은 것들에 대해 안 좋다고 말할 수 있는 그런. 51+ 때 하자센터 쪽에 알던 친구들이 여기에서 연대해서 스텝을 한다고 해서 나도 행사 전날 와서 그 다음 날까지 한 숨도 잠을 안 잤던 것 같아. -청소년 활동가 B 인터뷰</p>
<p>
</p>
</blockquote>
<p>
인터뷰 속에서 나타나듯이 <51+>를 전후로 해서 두리반은 단지 철거농성장의 성격을 넘어서 홍대 앞의 대안적 문화공간이자 대안 공동체의 성격까지 함께 띠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두리반이 젊은이들의 문화적 코드에 맞는 행사를 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두리반에 연대하는 이들은 두리반의 상황이 자신들이 처한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지적한다. </p>
<p>
</p>
<blockquote>
<p>
애초에 두리반에서 자립음악가 모임이 태동을 했구요, 그 때 모두가 가진 공통된 건 그거였어요. 두리반이 자본에 의해서 처한 상황이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홍대 앞이 엄청나게 개발 바람이 불면서 이른바 중소형 클럽이 다 망해나갔어요. 이런 클럽에서는 지금 두리반 3층에서 하고 있는 거 같은 연주를 할 수 있었어요. 주인들도 어느 정도 마인드가 있었고. 그런데 임대료가 올라가고 세가 비싸지니까 쫓겨날 수밖에 없는 거에요. 아니면 빚을 내서 더 큰 공연장을 만들어요. 그런데 그러면 그 공연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메이저를 불러야 하는 거죠. 최소한 사람들에게 이름은 알려졌고, 티켓값을 오천원 만원 받을 수 있는 밴드를 불러야 하는 거죠. 그러니까 이제 빈익빈 부익부가 되는 거죠. 유명한 애들은 계속 유명해지고, 안 유명한 애들은 아예 이제 공연할 장소조차 없어요. 근데 그 상황이 되게 심해졌고, 이런 상황에서 그들이 두리반이라는 공간을 만났을 때 이건 심정적인 연대가 아니고 정말 나의 미래를 위한 싸움이다. 이런 이야기가 나오는 거죠. -20대 활동가 C 인터뷰</p>
<p>
</p>
</blockquote>
<p>
자립음악가들은 두리반 이전부터도 이러한 흐름에 민감하게 반응해오고 있었다. 몇몇 음악가들은 나름의 조직을 구성해서 시위를 벌이기도 하고, 자본금을 마련해서 공동작업실과 공연장을 마련할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는 지지부진했던 이러한 노력은 두리반이라는 물리적, 상징적 ‘장소’를 만남으로써 좀더 확장된 기획과 “자립음악가 생산자모임”이라는 조직으로 발전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음악가들은 두리반을 통해 자립음악가로서 필요한 자질과 기술(음향, 연주, 공연기획, 홍보 등)을 집합적으로 연마할 수 있게 되었고, ‘돈이 되지 않는’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실험할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이다. 두리반 역시 음악가들의 결합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자율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공간의 모습을 갖게 되고, 또한 문화적 스펙트럼이나 소셜 네트워크에 대한 활용도가 높은 젊은 세대의 활력을 통해 많은 활동을 벌이며 다양한 매체가 주목하는 공간이 될 수 있었다. 현재는 음악회 뿐 아니라 문학포럼, 낭독회, 강좌, 영어/일본어 모임, 다큐 상영회 등을 통해 많은 이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두리반에 드나들고 있다. </p>
<p>
</p>
<p>
자립음악가 단편선은 음악가들의 결합이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단위로서의 ‘음악가’의 시민권을 선포하는 정치행위라고 평가한다. 음악가들은 분명 일정한 노동을 바탕으로 사회에 비물질적 생산물을 생산하며 기여하고 있는 존재이지만 다른 직능 단위가 누리고 있는 4대 보험 등의 사회적 권리를 갖지 못한 존재이다. 음악가들의 저항은 그런 점에서 자신들이 ‘사회적 존재’임을 가시적으로 드러냄으로써, 그들이 사회에서 차지하지 못하는 몫의 분배를 요구하는 정치적 투쟁이 된다. 그는 이것이 단지 어떤 특정한 주체의 투쟁만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자신들의 투쟁은 ‘몫 없는 자들’이라는 부정적 규정에 의해 구성된 보편적 계급 모두의 싸움이 될 수 있으며 따라서 연대가 매우 중요한 과제가 된다는 것이다.<span style="text-align: justify; text-indent: -5.7px; font-size: 5.3px; font-family: 'Nanum Myeongjo'; letter-spacing: -0.3px; "><sup>4</sup></span><span style="font-size: 8px; text-align: justify; text-indent: -5.7px; letter-spacing: -0.3px; "><span class="Apple-tab-span" style="white-space:pre"> </span> 단편선</span><span style="font-size: 8px; text-align: justify; text-indent: -5.7px; font-family: 'Nanum Myeongjo'; letter-spacing: -0.3px; ">, “</span><span style="font-size: 8px; text-align: justify; text-indent: -5.7px; letter-spacing: -0.3px; ">자립의 조건 </span><span style="font-size: 8px; text-align: justify; text-indent: -5.7px; font-family: 'Nanum Myeongjo'; letter-spacing: -0.3px; ">: </span><span style="font-size: 8px; text-align: justify; text-indent: -5.7px; letter-spacing: -0.3px; ">두리반의 경우</span><span style="font-size: 8px; text-align: justify; text-indent: -5.7px; font-family: 'Nanum Myeongjo'; letter-spacing: -0.3px; ">”, <</span><span style="font-size: 8px; text-align: justify; text-indent: -5.7px; letter-spacing: -0.3px; ">플러그 토크쇼</span><span style="font-size: 8px; text-align: justify; text-indent: -5.7px; font-family: 'Nanum Myeongjo'; letter-spacing: -0.3px; ">: </span><span style="font-size: 8px; text-align: justify; text-indent: -5.7px; letter-spacing: -0.3px; ">자립의 음악</span><span style="font-size: 8px; text-align: justify; text-indent: -5.7px; font-family: 'Nanum Myeongjo'; letter-spacing: -0.3px; ">, </span><span style="font-size: 8px; text-align: justify; text-indent: -5.7px; letter-spacing: -0.3px; ">음악의 자립</span><span style="font-size: 8px; text-align: justify; text-indent: -5.7px; font-family: 'Nanum Myeongjo'; letter-spacing: -0.3px; ">>(</span><span style="font-size: 8px; text-align: justify; text-indent: -5.7px; letter-spacing: -0.3px; ">광주프린지페스티벌 부대행사</span><span style="font-size: 8px; text-align: justify; text-indent: -5.7px; font-family: 'Nanum Myeongjo'; letter-spacing: -0.3px; ">) </span><span style="font-size: 8px; text-align: justify; text-indent: -5.7px; letter-spacing: -0.3px; ">발표 원고</span><span style="font-size: 8px; text-align: justify; text-indent: -5.7px; font-family: 'Nanum Myeongjo'; letter-spacing: -0.3px; ">, 2010.10</span><span style="font-size: 8px; text-align: justify; text-indent: -5.7px; letter-spacing: -0.3px; ">월</span></p>
<p>
</p>
<p>
두리반에서 형성된 이러한 연대는 이렇게 철거 투쟁 자체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게 되었다. 여전히 두리반은 영업손실과 이전비용을 보전 받고 근처에 새 가게를 낼 수 있게 해달라는 특정 철거 사업장의 요구를 내걸고 있지만, 그것은 동시에 이들 젊은 세대를 비롯하여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추방을 겪고 있는 이들 상징적 요구가 된 것이다. 단지 상징만이 아니라 두리반 사람들<span style="text-align: justify; text-indent: -5.7px; font-size: 5.3px; font-family: 'Nanum Myeongjo'; letter-spacing: -0.3px; "><sup>5</sup></span><span style="font-size: 8px; text-align: justify; text-indent: -5.7px; letter-spacing: -0.3px; "><span class="Apple-tab-span" style="white-space:pre"> </span> 두리반의 투쟁주체들과 음악가들</span><span style="font-size: 8px; text-align: justify; text-indent: -5.7px; font-family: 'Nanum Myeongjo'; letter-spacing: -0.3px; ">, </span><span style="font-size: 8px; text-align: justify; text-indent: -5.7px; letter-spacing: -0.3px; ">또 이런 저런 모양으로 두리반에 드나드는 사람들을 명확하게 구분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span><span style="font-size: 8px; text-align: justify; text-indent: -5.7px; font-family: 'Nanum Myeongjo'; letter-spacing: -0.3px; ">. </span><span style="font-size: 8px; text-align: justify; text-indent: -5.7px; letter-spacing: -0.3px; ">심지어 두리반의 의사결정기구라 할 수 있는 </span><span style="font-size: 8px; text-align: justify; text-indent: -5.7px; font-family: 'Nanum Myeongjo'; letter-spacing: -0.3px; ">‘</span><span style="font-size: 8px; text-align: justify; text-indent: -5.7px; letter-spacing: -0.3px; ">반상회</span><span style="font-size: 8px; text-align: justify; text-indent: -5.7px; font-family: 'Nanum Myeongjo'; letter-spacing: -0.3px; ">’</span><span style="font-size: 8px; text-align: justify; text-indent: -5.7px; letter-spacing: -0.3px; ">는 그 참가 자격을 두리반 투쟁에 공감하는 모든 사람들로 하고 있다</span><span style="font-size: 8px; text-align: justify; text-indent: -5.7px; font-family: 'Nanum Myeongjo'; letter-spacing: -0.3px; ">. </span><span style="font-size: 8px; text-align: justify; text-indent: -5.7px; letter-spacing: -0.3px; ">나는 종종 이들을 뭉뚱그려 </span><span style="font-size: 8px; text-align: justify; text-indent: -5.7px; font-family: 'Nanum Myeongjo'; letter-spacing: -0.3px; ">‘</span><span style="font-size: 8px; text-align: justify; text-indent: -5.7px; letter-spacing: -0.3px; ">두리반 사람들</span><span style="font-size: 8px; text-align: justify; text-indent: -5.7px; font-family: 'Nanum Myeongjo'; letter-spacing: -0.3px; ">’</span><span style="font-size: 8px; text-align: justify; text-indent: -5.7px; letter-spacing: -0.3px; ">이라고 부를 것이다</span><span style="font-size: 8px; text-align: justify; text-indent: -5.7px; font-family: 'Nanum Myeongjo'; letter-spacing: -0.3px; ">. </span>은 실제로 기륭전자나 홍대 청소용역 노동자들의 투쟁에 활발하게 연대하기도 하고,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나 카페 등에서 기본소득이나 비정규직 문제 등을 적극적으로 의제화함으로써 추방당한자들의 연대를 구축해나가고 있다. </p>
<p>
</p>
<blockquote>
<p>
이제 우리 부부의 맺힌 것 풀고, 원하는 것 쟁취하고 그게 다가 아닌 싸움이 되어버렸어요. 상징 싸움이 되어서 인근 어딘가에 반드시 두리반을 차려야만 해요. 그래야 상징 싸움으로 성공한 것이 되거든요. (문: 다른 사람들이 철거 싸움을 시작할 때 너희가 원하는 게 뭐냐고 했을 때 두리반처럼 해달라는 거다. 라고 제시할 수 있는 모델이 생긴 거네요.) 그렇죠. 철거되기 전에도 두리반처럼 싸우면 가게 안 뺏길 수 있으니 싸워보자는 용기를 심어주는 상징이 되어야 하고, 그렇게 해서 두리반들이 많이 생겨나면 결국은 상가임대차보호법이나 도시정비개발법을 만들어낸 국회가 개정 운동을 할 수 밖에 없지 않을까 싶어 꼭 이겨야겠어요. 근데 이러면 오래 가거든요. 지금 난감해요.(웃음) - 유채림, 「퍼슨웹」과의 인터뷰</p>
<p>
</p>
</blockquote>
<h4>
새로운 운동권?</h4>
<p>
</p>
<p>
‘작가는 작가의 방식으로 싸운다’고 말한 유채림의 이야기는 두리반의 다른 활동에도 영감을 주어, 음악가는 음악가의 방식으로, 사진사는 사진사의 방식으로, 청소년은 청소년의 방식으로, 잉여는 잉여의 방식으로 각각의 활동을 구성하고 실행한다는 생각이 일반화되어 있다. 이러한 각각의 구체적인 활동의 서사들이 엮여서 두리반이라는 하나의 정치적 상징을 건축하고 있는 것이다. </p>
<p>
</p>
<p>
이러한 방식의 운동을 묶어낼 수 있는 개념이 있다면 그것은 ‘액티비즘(activism)’이라 할 수 있다. 두리반 투쟁은 흔히 ‘아나키즘’이라고 (주로는 비판적인 뉘앙스로) 불리곤 하는데, 나는 이러한 운동이 — 맑스주의와 더불어 이념적 성격이 강한 언어인 — 아나키즘 보다는 그 형식에 주목하여 ‘액티비즘’으로 불리는 것이 더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이 개념을 나는 최근에 뉴욕을 매개로 한 도시 운동이나 대항지구화 운동을 분석하고 있는 고소 이와사부로의 『뉴욕열전』을 읽으면서 진지하게 고민하게 되었다. 이념보다도 활동의 ‘형식’에 강조점을 갖는 ‘액티비즘’이라는 개념은 내용의 측면에서 지배적인 ‘사상’이 없음에도 적극적으로 수행되고 있는 오늘날 일군의 사회운동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적실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고소는 액티비즘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p>
<p>
</p>
<blockquote>
<p>
현대 액티비즘은 예전의 운동과 비교해 볼 때, 모든 의미에서 유연하며 유동적인 ‘실천형태’ 속에 관계되어 있는 개개인의 정열과 의지와 힘에 맞춰 그 어디까지라도 개입해 갈 수 있는 미정(未定)의 가능성을 지닌 운동이다. 생활형태, 신체성, 정동, 인간관계, ‘가치’를 형성하는 총체적 변혁에 이르기까지 미정의 가능성을 지닌다. [중략] 이러한 가능성과 미결정성은 무엇보다도 그들이 가치를 세우고 있는 이상사회를 ‘바로 지금 이 운동단체’ 속에서 실현하는 것 이외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예시적 정치’의 원리에서 기인하고 있다. </p>
<p>
</p>
</blockquote>
<p>
미래의 총체적 해방의 상보다는 지금 여기에서의 행동 자체에 의미를 부여하며, 자율적인 활동가들의 수평적인 네트워크 형태가 군사적이거나 행정적인 조직의 형태를 대체하는 액티비즘의 특징은 두리반 활동의 여러 측면에서 발견된다. 그것을 가장 가시적으로 볼 수 있는 활동은 ‘반상회’이다. 반상회는 보통 한 달에 두 번 정도 열리며 두리반의 모든 활동과 살림에 대해 논의하는 회의이다.<span style="text-align: justify; text-indent: -5.7px; font-size: 5.3px; font-family: 'Nanum Myeongjo'; letter-spacing: -0.3px; "><sup>6</sup></span><span style="font-size: 8px; text-align: justify; text-indent: -5.7px; letter-spacing: -0.3px; "><span class="Apple-tab-span" style="white-space:pre"> </span> 두리반에는 반상회 외에도 여타의 철거현장과 같이 철거당사자와 진보신당</span><span style="font-size: 8px; text-align: justify; text-indent: -5.7px; font-family: 'Nanum Myeongjo'; letter-spacing: -0.3px; ">, </span><span style="font-size: 8px; text-align: justify; text-indent: -5.7px; letter-spacing: -0.3px; ">민노당 마포구 위원장 등으로 구성된 </span><span style="font-size: 8px; text-align: justify; text-indent: -5.7px; font-family: 'Nanum Myeongjo'; letter-spacing: -0.3px; ">“</span><span style="font-size: 8px; text-align: justify; text-indent: -5.7px; letter-spacing: -0.3px; ">철거대책위원회</span><span style="font-size: 8px; text-align: justify; text-indent: -5.7px; font-family: 'Nanum Myeongjo'; letter-spacing: -0.3px; ">”</span><span style="font-size: 8px; text-align: justify; text-indent: -5.7px; letter-spacing: -0.3px; ">가 있지만 대책위는 의결기구로서의 반상회에 종속되어 있으며</span><span style="font-size: 8px; text-align: justify; text-indent: -5.7px; font-family: 'Nanum Myeongjo'; letter-spacing: -0.3px; ">, </span><span style="font-size: 8px; text-align: justify; text-indent: -5.7px; letter-spacing: -0.3px; ">단지 외부적으로 두리반을 대표하는 기구로 기능한다</span><span style="font-size: 8px; text-align: justify; text-indent: -5.7px; font-family: 'Nanum Myeongjo'; letter-spacing: -0.3px; ">. </span> 그런데 이런 중요한 회의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은 “두리반 투쟁에 연대하고, 지지하고, 함께 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이다. 참석과 의견교환, 활동의 구성이 어떤 결정된 구조보다는 두리반 사람들의 자율에 맡겨져 있는 셈이다. 반상회에서는 참가자 누구의 의견이든 기본적으로 존중받으며, 반대로 당사자인 유채림, 안종려 두 사람의 의견이라 할지라도 보류될 수도 있다. 두리반에서 어떤 기획을 실행할 경우, 반상회에서 간단하게 기획을 공유하고 참가자들의 동의만 받으면 누구나 공간에서 자신의 기획을 추진할 수 있다.<span style="text-align: justify; text-indent: -5.7px; font-size: 5.3px; font-family: 'Nanum Myeongjo'; letter-spacing: -0.3px; "><sup>7</sup></span><span style="font-size: 8px; text-align: justify; text-indent: -5.7px; letter-spacing: -0.3px; "><span class="Apple-tab-span" style="white-space:pre"> </span> 단편선</span><span style="font-size: 8px; text-align: justify; text-indent: -5.7px; font-family: 'Nanum Myeongjo'; letter-spacing: -0.3px; ">, “‘</span><span style="font-size: 8px; text-align: justify; text-indent: -5.7px; letter-spacing: -0.3px; ">농성</span><span style="font-size: 8px; text-align: justify; text-indent: -5.7px; font-family: 'Nanum Myeongjo'; letter-spacing: -0.3px; ">’</span><span style="font-size: 8px; text-align: justify; text-indent: -5.7px; letter-spacing: -0.3px; ">으로서의 두리반</span><span style="font-size: 8px; text-align: justify; text-indent: -5.7px; font-family: 'Nanum Myeongjo'; letter-spacing: -0.3px; ">, </span><span style="font-size: 8px; text-align: justify; text-indent: -5.7px; letter-spacing: -0.3px; ">그리고 </span><span style="font-size: 8px; text-align: justify; text-indent: -5.7px; font-family: 'Nanum Myeongjo'; letter-spacing: -0.3px; ">‘</span><span style="font-size: 8px; text-align: justify; text-indent: -5.7px; letter-spacing: -0.3px; ">삶의 방식</span><span style="font-size: 8px; text-align: justify; text-indent: -5.7px; font-family: 'Nanum Myeongjo'; letter-spacing: -0.3px; ">’</span><span style="font-size: 8px; text-align: justify; text-indent: -5.7px; letter-spacing: -0.3px; ">으로서의 두리반</span><span style="font-size: 8px; text-align: justify; text-indent: -5.7px; font-family: 'Nanum Myeongjo'; letter-spacing: -0.3px; ">”, “</span><span style="font-size: 8px; text-align: justify; text-indent: -5.7px; letter-spacing: -0.3px; ">싸우는 </span><span style="font-size: 8px; text-align: justify; text-indent: -5.7px; font-family: 'Nanum Myeongjo'; letter-spacing: -0.3px; ">20</span><span style="font-size: 8px; text-align: justify; text-indent: -5.7px; letter-spacing: -0.3px; ">대</span><span style="font-size: 8px; text-align: justify; text-indent: -5.7px; font-family: 'Nanum Myeongjo'; letter-spacing: -0.3px; ">, </span><span style="font-size: 8px; text-align: justify; text-indent: -5.7px; letter-spacing: -0.3px; ">우린 어디로 가는가</span><span style="font-size: 8px; text-align: justify; text-indent: -5.7px; font-family: 'Nanum Myeongjo'; letter-spacing: -0.3px; ">?” </span><span style="font-size: 8px; text-align: justify; text-indent: -5.7px; letter-spacing: -0.3px; ">토론회 원고</span><span style="font-size: 8px; text-align: justify; text-indent: -5.7px; font-family: 'Nanum Myeongjo'; letter-spacing: -0.3px; ">.</span> 두리반에서 진행되고 있는 활동이나 행사는 대부분 이런 방식으로 시작된 것이다. 반상회는 뚜렷한 의사결정 절차나 강한 구속력을 가진 회의가 아니기 때문에 때로(특히 초창기) 어떤 결정이 비민주적으로 이루어지거나 결정된 사항이 지켜지지 않는 경우도 종종 있다. 그러나 반상회는 단지 어떤 일을 결정하고 실행하는 것보다도 두리반의 다양한 구성원들이 모여서 미스-커뮤니케이션의 문제나 감정적인 앙금을 해소하는 기능 역시 한다<span style="text-align: justify; text-indent: -5.7px; font-size: 5.3px; font-family: 'Nanum Myeongjo'; letter-spacing: -0.3px; "><sup>8</sup></span><span style="font-size: 8px; text-align: justify; text-indent: -5.7px; letter-spacing: -0.3px; "><span class="Apple-tab-span" style="white-space:pre"> </span> 앞의 글</span><span style="font-size: 8px; text-align: justify; text-indent: -5.7px; font-family: 'Nanum Myeongjo'; letter-spacing: -0.3px; ">.</span>는 점에서 절차적 민주주의의 관점에서만 그것을 이야기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할 것이다. </p>
<p>
</p>
<p>
반상회 뿐만 아니라 두리반의 일상적인 실천과 문화 역시 그렇게 이루어진다. 두리반의 활동에 결합하면서 처음에 매우 인상적으로 다가왔던 것은 두리반 사람들의 상당수가 나이와 상관없이 반말을 사용한다는 점이었다. 특히 주도적으로 여러 활동을 기획하는 이들끼리는 거의 전적으로 반말로 대화가 이루어지는데, 활동가들은 이것이 나이나 경력에 따른 위계 없이 수평적인 활동이 가능하게 하는 중요한 요건이라고 생각한다. </p>
<p>
</p>
<blockquote>
<p>
나는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반말 문화에 대해서는 정말 동의하고 맞는 거라고 생각해. 정말 간단한 이유고, 근데 심지어 나이가 뭐가 중요하냐고 말하는 사람들도 형 누나 꼭 붙이고, 나이 어리다고 (일방적으로 반말하고) 그러잖아. 난 그런 사람들이 싫고, 누가 왜 나보고 "너 왜 반말해?"라고 말한다면 나는 솔직히 다 말할 수 있어. 내가 왜 반말하는지. 나이가 뭐가 중요하냐고. -B 인터뷰</p>
<p>
</p>
</blockquote>
<p>
이러한 문화나 운동방식은 “수평적이고 자율적인 활동이 옳다”라는 탈권위주의적 당위나 아나키즘적인 이념에 의해 형성되었다기보다는 구체적인 운동의 필요에 의해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유채림 작가는 인터뷰에서 자신이 문화적으로는 상당히 보수적이었다고 말한다.</p>
<p>
</p>
<blockquote>
<p>
지금도 공연하는 음악가나 영화 찍는 감독, 문화 활동가들, 우리 두리반 식구들에게 누누이 하는 얘기가 있어요. “솔직히 말해서 나는 정치적으로는 굉장히 진보적이다. 그런데 문화적으로는 터무니없이 보수적이다.” 우리 애들이 담배 피는 꼴도 처음에는 굉장히 거북했어요. (인디밴드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몰랐어요. 이를테면 그때까지 제가 알고 있었던 인디 밴드에 대한 개념이 어느 정도였냐면 ‘상업 자본에 편입되기 위해 발버둥치고 있는 예비 주자들.’ (웃음) (문: 문화적으로 그렇게 보수적인데 인디밴드를 받아들인 이유가 있으시겠죠?) 농성 초기에는 두리반에 항상 누군가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마음이 급했어요. 그래야만 용역들이 못 들어올 테니까. - 유채림, 「퍼슨웹」과의 인터뷰</p>
<p>
</p>
</blockquote>
<p>
‘누군가 있어야 한다’는 필요에 의해 받아들인 ‘맞담배를 피우는’ 젊은 음악가들이나 활동가들은 기대 이상으로 성실하게 농성장을 지켰고, 주도적으로 활동을 구성했다. 끊임없이 사람이 있어야 하고, 활동을 통해 그 존재를 알려야 하는 농성장에서 이들의 활동은 존중받을 수밖에 없었다. 만일 두리반이 통상적인 운동단체같은 수직적인 분업구조를 가지고 있었다거나, 나이나 경력에 따른 위계가 존재했다면 두리반 활동이 지금처럼 구성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농성장’이라는 조건 속에서 활동가들 각각이 자율적으로 활동을 구성하고 수평적으로 소통하는 것은 그 어떤 방식보다 더 효율적이었던 것이다. 또한 ‘빨리 끝나야 하는’ 농성장의 특성상 장기적인 프로젝트보다는 짧은 호흡의 기획들 위주로 활동이 이루어 져야 했다는 점 역시 이러한 문화를 만든 요인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방식이 용역과의 폭력적 대치 상황 등 조직된 물리력이 필요한 상황에서도 효과적으로 기능할 수 있을지 물음표를 던지는 활동가들도 있다. 그러나 적어도 마포구청 점거농성이나 지난 11월에 시도되었던 용역의 침탈 시도가 있었을 때 두리반 사람들은 네트워크를 통해 기민하게 움직임으로써 많은 연대를 끌어모을 수 있었다. </p>
<p>
</p>
<p>
물론 두리반의 이러한 활동이 그저 자유분방하게 이루어진 것은 결코 아니다. 자율적이고 수평적인 활동의 이면에는 유채림 작가와 상근자들의 성실한 환대의 노력이 있었다. 아침마다 건물 전체를 깨끗하게 청소하고 식사를 준비하고, 드나드는 모든 이들을 따뜻하게 맞이하는 이들의 노력은 ‘자율’과 ‘수평적 소통’ 만큼이나 두리반 활동에 있어서 강조되고 있다. 그러나 이것 역시 지도부는 문건을 만들고 하위 활동가들은 몸을 쓰는 방식과는 매우 다른 모습이라는 걸 기억할 필요가 있다. </p>
<p>
</p>
<p>
인터뷰에 참여했던 활동가들은 이러한 두리반의 문화나 운동방식이 기존의 학생운동이나 사회운동과 상당히 다르다는 점을 의식적으로 인지하고, 의미를 부여하고 있었다. </p>
<p>
</p>
<blockquote>
<p>
이 시대에 와서는 이전의 사회운동의 방법이 잘 안 먹힌다는 건 분명해요. 그게 되게 무서운 거에요. 일상화되는 거. 근데 지금 우리나라 자본가들이나 정부에 있어서 으쌰으쌰하는 물리적 방법은 익숙해요. 이거는 이런 식으로 통제하면 되겠다 하는 걸 알아요. 두리반을 어떻게 잘 못하는 게 아직 얘네가 어떻게 나올지 모르기 때문에 그런 거 같아요. 음악가 얘네들이 돈도 없고 빽도 없고 음악도 이상해. 근데 얘네 음악 들으러 오는 사람들이 많고 막 자유분방하고 얽매이지 않고 있으니까…… 이런 게 필요하다는 생각 두리반 보면서 많이 생각해요. -20대 활동가 D 인터뷰</p>
<p>
</p>
</blockquote>
<p>
10대 활동가들은 기존의 정당이나 단체들에 대해서 상당히 부정적인 인식을 갖고 있었다. 이를테면 집회 현장에서 종종 만날 수 있는 모 정치조직의 경우 ‘사람은 많은데 뭐 하는지는 잘 모르겠고, 판이 벌어지면 나타나서 똑같은 피켓을 만들어 뿌리고, 자신들이 주도권을 갖고 유명해지려는 단체’라는 평가를 받았다. 물론 이런 단체나 정당이 이들의 평가처럼 활동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이런 평가를 내리는 것은 이들 조직의 운동 방식이 이들의 감각과는 상당히 다르기 때문이었다. 학생운동을 예로 들자면, 1학년 때는 선배들을 따라다니면서 허드렛일을 하고, 2학년이 되면 대자보를 쓰고, 3학년이 되면 문건을 작성하고 선거에 출마하는 위계적인 구조나, 구체적인 현실 분석 없이 구성원들이 전부 커다란 대의나 교조를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모습이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p>
<p>
</p>
<blockquote>
<p>
솔직히 말하면 그 때는 학생운동이 저랑 맞지 않는 것 같았어요. 학교에서 만난 친구들은 뭔가 되게 '종교' 같았어요. 깊게 고민하고 그걸 자기의 뭔가 진짜 경험 내지는 자기가 꿈꾸는 다른 삶이라든지 그런 걸로 연결하기보다는 당위성에 몰입하는 그런 느낌이라 굉장히 불편했죠. 무슨 말만 하면 단계가 정해져 있어요. 모두가 다 똑같은 패턴으로 똑같은 결론을 향해 달려가요. 근데 두리반에서 만난 사람들(학생운동 출신이나 정당 활동가) 같은 경우는 달라요. 이 사람들은 각자 주관이 있고, 그 주관에 의해서 그 정당을 택했고, 그렇기 때문에 나는 스스로 그 정당을 왜 지지하고 비판도 할 수 있다고 다들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그런 점에서 제가 진보정당들을 막 까고 그래도 토론이 되는 거죠. -C 인터뷰</p>
<p>
</p>
</blockquote>
<p>
활동가들은 두리반에 참여하는 이유에 대해 “재미”라고 말한다. 재미있고, 유희적인 것이 최근 젊은 세대의 중요한 유인동기가 되고 있다는 것은 여러 논자들이 이미 지적한 바 있다. 그러나 이들이 말하는 “재미”란 단지 두리반에서 공연을 하고, 영화를 상영하며, 술 마시고 즐겁게 노는 것을 지칭하는 것을 넘어선다. 사실 두리반보다 더 좋은 사운드의 공연을 볼 수 있고, 더 재미있는 영화를 볼 수 있고, 더 맛있는 것을 먹고 마실 수 있는 공간은 홍대 주변에 널려 있다. 그러나 이들이 재미를 느끼는 측면은 소비적인 측면이 아니라 자신들이 그 활동을 직접 구성하고 있다는 데 있다. 두리반에 오기 전에도 다양한 사회운동에 참여했던 한 참가자는 그런 운동을 하는 이유에 대해 “자신이 무언가 할 수 있는 것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기술이나 지식이 현장에서 어떤 결과를 낳는 것이 즐겁고 재미있기 때문에 계속 활동을 한다는 것이다.<span style="text-align: justify; text-indent: -5.7px; font-size: 5.3px; font-family: 'Nanum Myeongjo'; letter-spacing: -0.3px; "><sup>9</sup></span><span style="font-size: 8px; text-align: justify; text-indent: -5.7px; letter-spacing: -0.3px; "><span class="Apple-tab-span" style="white-space:pre"> </span> C </span><span style="font-size: 8px; text-align: justify; text-indent: -5.7px; font-family: 'Hiragino Kaku Gothic Pro'; letter-spacing: -0.3px; ">인터뷰</span> 심지어 “바보 동네 형과 백수 얼간이”나 “애주가 혹은 주당”의 방식이라 할 지라도 그것이 두리반에서 무언가를 만들어 낼 수 있는 능력으로 기능하며 “잘 났지만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다 훨씬 의미 있는 것이라고 이들은 이야기한다.<span style="text-align: justify; text-indent: -5.7px; font-size: 5.3px; font-family: 'Nanum Myeongjo'; letter-spacing: -0.3px; "><sup>10</sup></span><span style="font-size: 8px; text-align: justify; text-indent: -5.7px; letter-spacing: -0.3px; "><span class="Apple-tab-span" style="white-space:pre"> </span> 단편선</span><span style="font-size: 8px; text-align: justify; text-indent: -5.7px; font-family: 'Nanum Myeongjo'; letter-spacing: -0.3px; ">, “</span><span style="font-size: 8px; text-align: justify; text-indent: -5.7px; letter-spacing: -0.3px; ">한 찌질이로서</span><span style="font-size: 8px; text-align: justify; text-indent: -5.7px; font-family: 'Nanum Myeongjo'; letter-spacing: -0.3px; ">. </span><span style="font-size: 8px; text-align: justify; text-indent: -5.7px; letter-spacing: -0.3px; ">내년에도</span><span style="font-size: 8px; text-align: justify; text-indent: -5.7px; font-family: 'Nanum Myeongjo'; letter-spacing: -0.3px; ">, </span><span style="font-size: 8px; text-align: justify; text-indent: -5.7px; letter-spacing: -0.3px; ">열심히 노래하고 술 마시겠습니다</span><span style="font-size: 8px; text-align: justify; text-indent: -5.7px; font-family: 'Nanum Myeongjo'; letter-spacing: -0.3px; ">”, </span><span style="font-size: 8px; text-align: justify; text-indent: -5.7px; letter-spacing: -0.3px; ">두리반 농성 </span><span style="font-size: 8px; text-align: justify; text-indent: -5.7px; font-family: 'Nanum Myeongjo'; letter-spacing: -0.3px; ">1</span><span style="font-size: 8px; text-align: justify; text-indent: -5.7px; letter-spacing: -0.3px; ">주년 기자회견문</span><span style="font-size: 8px; text-align: justify; text-indent: -5.7px; font-family: 'Nanum Myeongjo'; letter-spacing: -0.3px; ">.</span> 즉 이들의 운동에서 중요한 것은 엄숙한 진정성이나 대의가 아니라 ‘깨알같은’ 구체적인 활동과 재미에 있는 것이다. </p>
<p>
</p>
<p>
나는 두리반 운동 속에서 80-90년대를 지나며 만들어진 한국의 사회운동 진영의 흐름과 일정하게 구분되는 ‘새로운 운동권’의 부상을 조심스럽게 예측해본다. ‘운동권’이라는 단어는 사회운동에 참여하는 사람들이라는 넓은 의미를 갖기도 하지만 보통은 ‘학생운동’을 지칭하는 단어였다. 실제로 현재 대부분의 운동이 인적 구성이나 운동 프레임의 차원에서 80년대의 학생운동권을 그 자원으로 하고 있다. ‘새로운 운동권’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이러한 계보에서 벗어난 새로운 인적 구성과 프레임, 운동 방식이 오늘날의 청(소)년들 속에서 대두하고 있음을 말하려는 것이다. </p>
<p>
</p>
<p>
이것은 이러한 경향의 운동이 두리반에서 처음 시작되었다는 의미는 아니다. 90년대 후반 ‘두발 자유’로 상징되는 청소년 인권운동이나 2002년~2008년 사이의 촛불집회는 현재의 ‘싸우는 20대’의 전사(前史)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촛불집회 등이 그 시작은 청(소)년들의 저항으로 시작했다가도 이내 기성의 운동 패러다임이나 조직에 의해 장악되었던 것과는 달리 두리반 운동은 이 저항을 끌어가는 주요 동력이 계속해서 젊은 활동가들에게서 나오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만하다. 물론 두리반이 이러한 경향의 모든 운동을 대표한다거나, 기존의 정치조직이나 사회운동 단체를 대체하고 있다고 볼 수는 없다. 두리반 활동가들 중 몇몇은 기성 정당이나 사회운동단체의 회원이기도 하며, 이러한 기성 조직의 연대 없이 두리반 투쟁이 성공적으로 진행될 수 있다고 기대하기도 어렵다. 그러나 두리반 투쟁에서 기존의 운동 언어나 방식이 헤게모니를 갖지 못한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진보 정당 등의 활동은 두리반 운동에 있어서 주도적이기 보다는 보조적인 역할이나 측면지원의 역할을 하고 있을 뿐, 두리반 운동의 기획이나 실행은 모두 철거 당사자와 젊은 활동가들이 주도해서 이끌어가고 있다. 또한 그동안 통상적으로 파편화되어서 수행되었던 새로운 세대의 여러 사회운동이 두리반이라는 계기 혹은 장소를 통해 한데 모이고 있다는 점<span style="text-align: justify; text-indent: -5.7px; font-size: 5.3px; font-family: 'Nanum Myeongjo'; letter-spacing: -0.3px; "><sup>11</sup></span><span style="font-size: 8px; text-align: justify; text-indent: -5.7px; letter-spacing: -0.3px; "><span class="Apple-tab-span" style="white-space:pre"> </span> 두리반에서는 두리반의 활동 뿐 아니라 팔레스타인 평화연대의 모임이나</span><span style="font-size: 8px; text-align: justify; text-indent: -5.7px; font-family: 'Nanum Myeongjo'; letter-spacing: -0.3px; ">, </span><span style="font-size: 8px; text-align: justify; text-indent: -5.7px; letter-spacing: -0.3px; ">진보신당 청년활동가 모임 주최의 토론회</span><span style="font-size: 8px; text-align: justify; text-indent: -5.7px; font-family: 'Nanum Myeongjo'; letter-spacing: -0.3px; ">, ‘</span><span style="font-size: 8px; text-align: justify; text-indent: -5.7px; letter-spacing: -0.3px; ">우리동네 자립과 공존을 위한 벼룩시장</span><span style="font-size: 8px; text-align: justify; text-indent: -5.7px; font-family: 'Nanum Myeongjo'; letter-spacing: -0.3px; ">’ </span><span style="font-size: 8px; text-align: justify; text-indent: -5.7px; letter-spacing: -0.3px; ">등 다양한 단위의 활동이 활발하게 구성되고 있다</span><span style="font-size: 8px; text-align: justify; text-indent: -5.7px; font-family: 'Nanum Myeongjo'; letter-spacing: -0.3px; ">. </span><span style="font-size: 8px; text-align: justify; text-indent: -5.7px; letter-spacing: -0.3px; ">이 밖에도 두리반의 공간을 빌려서 </span><span style="font-size: 8px; text-align: justify; text-indent: -5.7px; font-family: 'Nanum Myeongjo'; letter-spacing: -0.3px; ">4</span><span style="font-size: 8px; text-align: justify; text-indent: -5.7px; letter-spacing: -0.3px; ">대강 사업에 반대하는 노래를 녹음하기도 하고</span><span style="font-size: 8px; text-align: justify; text-indent: -5.7px; font-family: 'Nanum Myeongjo'; letter-spacing: -0.3px; ">, </span><span style="font-size: 8px; text-align: justify; text-indent: -5.7px; letter-spacing: -0.3px; ">때로 활동가들의 만남의 장소가 되기도 하는 등 크고 작은 활동이 벌어진다</span><span style="font-size: 8px; text-align: justify; text-indent: -5.7px; font-family: 'Nanum Myeongjo'; letter-spacing: -0.3px; ">. </span>에서 이것을 새로운 ‘운동권’의 시작으로 ‘경향적’으로 읽어내는 것은 의미가 있다고 본다.</p>
<p>
</p>
<h4>
이것은 왜 정치가 아니란 말인가?</h4>
<p>
</p>
<p>
그렇다면 이들이 수행하는 정치란, 어떤 내용을 가지고 있는가. 앞에서 설명한 ‘액티비즘’은 그 정치의 ‘형식’적 측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데 내용(혹은 언어)은? 과연 두리반 투쟁에 유의미한 정치적 내용이 있는가? 나는 그것을 해명하기 위해서는 현재의 20대가 오늘날 한국의 정치 사회를 구성하는 능동의 언어세계로부터 배제되어 있다는 것을 먼저 살펴야 한다고 생각한다. 즉 이들에게 고유한 정치적 언어가 있다면 그것은 기존의 정치공간 속에서 작동하는 언어들 속에서가 아니라 그 바깥에서 모종의 방식으로 들려오는 것이며, 그 바깥이 가시화됨으로써야 비로소 우리는 이들의 ‘정치’를 사유할 수 있다는 것이다. </p>
<p>
</p>
<p>
오늘날 한국의 정치공간의 언어는 80년대에 세팅된 두 개의 진보 담론 — 선진화와 민주화 — 에 의해 장악되어 있다. 87년 이후 한국의 정치는 사실상 이 두 담론 세력 간의 전투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둘은 정치세력으로서는 서로 대립하면서도 또한 서로의 담론을 참조하는 방식을 통해 집권에 성공했다. 이것은 민주화와 선진화라는 이 두 담론이 사실상 ‘진보’라는 똑같은 형식을 가진 담론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위대한 한민족이 가난과 독재를 딛고 오늘날 최첨단 IT문명과 자유로운 자기표현과 소비를 구가하게 되었다는 서사는 선진화와 민주화라는 두 담론이 모두 공유하는 진보의 역사서사이다. 그리고 이러한 진보를 이루기 위해 피땀흘려 노동해온 생활인들과, 자기를 희생해 민주화를 이룩한 투사들이 이 역사의 ‘주체’로서 그려진다. 이들은 수많은 위기를 헤쳐가며 지금의 한국사회를 만들어 왔던 것이다. 억눌린 이들, 투쟁했던 이들의 역사적 기억은 이 진보의 서사 속에 기입됨으로써 국가 혹은 시민사회에 의해 기념된다. </p>
<p>
</p>
<p>
우리는 이런 서사가 쉽게 수많은 것들을 은폐해 왔음을 알고 있다. 수많은 생활인들이 이전보다 더욱 피땀흘려 살아도 생활의 어떤 진보도 바랄 수 없는 비정규직으로 전락해가고 있으며, 한 켠에서 부동산을 통한 불로소득으로 엄청난 부가 축척되는 동안 다른 한 켠에서는 땅과 집을 갖지못한 자들이 여전히 <상계동 올림픽>을 재현하고 있다는 것 등. 민주화와 선진화의 담론은 이러한 은폐 위에서 그 육신을 잃어버리고 하나의 정치신화로서, 페티쉬로서 기능한다.</p>
<p>
</p>
<p>
우리는 이 은폐되는 것들의 목록에 청(소)년들의 정치적 삶을 통째로 추가할 수 있을 것이다 20대 투표율과 청소년 투표권을 둘러싼 지난 10여년 간의 담론은 20대가 어떤 정치적 언어 속에 놓여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20대의 정치의제란 오직 투표율밖에 없었던 것이다. 20대의 정치운동이란 것도 온통 투표율 제고를 위한 캠퍼스 투표소 설치운동 같은 것 뿐이었다. 선거가 끝나면 20대는 진보적인 ‘어른들’에게 언제나 투표하지 않는다는 욕을 처먹었고, 가끔씩 ‘민주개혁 세력’이나 ‘진보 세력’이 승리한 선거에서는 20대의 투표가 세상을 바꾸었다는 찬사를 들었다. 그러나 그 찬사에는 어떤 내용도 들어 있지 않았다. 20대는 오직 정해진 ‘진보의 의제’에 표를 던지는 거수기로만 여겨졌을 뿐이다. 그것은 정당운동을 하는 20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p>
<p>
</p>
<blockquote>
<p>
정말 열심히 활동을 했는데, 뭔가 결정하는 지점에서는 ‘젊은 시절부터 자기를 희생해서 밑바닥 현장에서 지금까지 활동해온’ 사람들에 의해서 모든 게 결정되더라구. 일 있을 땐 그렇게 자주 전화를 하는데, 막상 ‘당의 진로’라든지 그런 걸 이야기할 때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어. 나는 뭐랄까 아주 작은 한 명? 나는 진지하게 어떤 활동에 대해 반론이나 의견을 제시한 건데 저쪽에서는 그게 NL이냐, PD냐야. 자꾸 그런 틀에서 내 이야기가 필터링 되는 거지. 결국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주로 젊은 당원들은 현실적인 의사결정 구조 밖에서 피켓팅하고, 키워질 하고 뭐 그런 거밖에 할 수 없는 거지. -전 민노당원 D 인터뷰 </p>
<p>
</p>
</blockquote>
<p>
어쩌면 20대의 낮은 투표율이야말로 이들의 목소리가 정확하게 들려오는 지점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들의 정치적 목소리는 더 이상 ‘진보’의 언어가 아니다. 이미 민주화된 사회에서 유년시절을 보낸 오늘날의 청(소)년들에게 ‘진보’는 경험해보지 못한 어떤 것이며, 오히려 선진화되고 민주화되었다는 이 사회에서 그들이 맛보고 있는 것은 깊은 불안과 절망이다. 이들은 낮은 투표율로 민주개혁이나 진보의 20대 마케팅을 거절한다. 물론 이것은 많은 이들이 지적하는 것처럼 단지 정치에 대한 냉소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이들이 자신들의 냉소를 감추지 않고 그대로 드러냄으로써 냉소마저도 문제시하는 ‘몰락’의 언어로 나아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p>
<p>
</p>
<blockquote>
<p>
(단편선 개인의 흐름 속에서 두리반을 ‘무능의 종착지’라고 했어요.) 아, 그거요.(웃음) 그건 제가 ‘무능’하다는 의미에요.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두리반에 잉여들이 많다고 하는데, 우리들한테는 일종의 ‘망했다’는 의식이 있어요. 이 나라에서 자본주의적인 성공은 할 수 없다는 인식이에요. 자본주의 사회에서 20% 안쪽에 들지 못하면 80%로 가는 건데, 그 80%는 더 망하거나 덜 망하거나 망하는 건 똑같다고 생각해요. 두리반에 있는 애들은 최소한 내가 남들보다 일찍 망했구나 하는 건 알고 있는 애들인 거죠. - 단편선, 퍼슨웹 인터뷰(http://www.personweb.com/articles/256)</p>
<p>
</p>
</blockquote>
<p>
이러한 태도를 상징하는 단어가 ‘잉여’이다. 오늘날 스스로를 ‘잉여’라고 부르기 시작한 청(소)년들은 “정치는 어차피 바뀔 수 있는 게 아니니 열심히 취직 준비를 해서 어떻게든 잘 먹고 잘 살아야겠다.”라는 냉소적이고 속물적인 태도마저 불신하며, 그것을 통해 오늘날 그들을 둘러싼 세계를 몰락시킨다. 두리반에서 이러한 몰락의 언어는 좀 더 분명하게 정치적 맥락 속에서 나타난다. 앞서 언급했던 “싸우는 20대” 토론회는 상당히 많은 언론의 주목을 받았지만, 정작 그 기획자는 열심히 준비해서 치룬 행사를 ‘실패’로 규정한다. </p>
<p>
</p>
<blockquote>
<p>
기획자 중 한명으로서, 어제의 <싸우는 20대, 우린 어디로 가는가> 집담회에 대해서 자평해보자면, 한 마디로 일축해서 “좆 to the 망”입니다. 그간 기획자들, 그리고 패널들이 들인 노력과는 별개로 (진보신당 홍원표 연구원을 제외한) 모든 참여자는 (제 정치적인 이해관계를 떠나) 전혀 핀트를 맞추지 못했으며, 당연히 유의미한 토론으로 이어질 수 없었습니다. 다만 유일하게 긍정적으로 평가할 부분이 있었다면 ‘우리는 도대체 왜 늘 (아무 남은 것도 없이) 완전하게 실패하는가?’에 대해 3시간이란 비교적 짧은 시간 동안 압축적으로 상연했다는 점 정도일 것이고, 바로 그런 이유에서 토론회 자리는 종종 어떤 ‘경외감’ 내지는 ‘숭고의 감정’을 불어일으키기에 충분했습니다(그것이 ‘불쾌’와 직접적으로 연관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합니다). 이것이 현주소라고 생각을 합니다. 우리는 여전히 한 치도 앞으로 나가질 못했고, 그것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만, 이번 토론회의 실패는 실패로서의 가치가 생깁니다. - @danpyunsun의 트위터</p>
<p>
</p>
</blockquote>
<p>
이런 글이 개중 점잖은 글일 만큼 그들은 자신들의 활동을 끊임없이 불신하거나 조롱함으로써 의미를 부여한다. 이들의 이런 ‘개드립’<span style="letter-spacing: -0.3px; text-align: justify; text-indent: -5.7px; font-size: 5.3px; font-family: 'Nanum Myeongjo'; "><sup>12</sup></span><span style="letter-spacing: -0.3px; font-size: 8px; text-align: justify; text-indent: -5.7px; "><span class="Apple-tab-span" style="white-space: pre; "> </span> 애드립</span><span style="letter-spacing: -0.3px; font-size: 8px; text-align: justify; text-indent: -5.7px; font-family: 'Nanum Myeongjo'; ">(adlib)</span><span style="letter-spacing: -0.3px; font-size: 8px; text-align: justify; text-indent: -5.7px; ">과 폄하의 의미를 가진 </span><span style="letter-spacing: -0.3px; font-size: 8px; text-align: justify; text-indent: -5.7px; font-family: 'Nanum Myeongjo'; ">‘</span><span style="letter-spacing: -0.3px; font-size: 8px; text-align: justify; text-indent: -5.7px; ">개</span><span style="letter-spacing: -0.3px; font-size: 8px; text-align: justify; text-indent: -5.7px; font-family: 'Nanum Myeongjo'; ">’</span><span style="letter-spacing: -0.3px; font-size: 8px; text-align: justify; text-indent: -5.7px; ">의 합성어</span><span style="letter-spacing: -0.3px; font-size: 8px; text-align: justify; text-indent: -5.7px; font-family: 'Nanum Myeongjo'; ">. </span><span style="letter-spacing: -0.3px; font-size: 8px; text-align: justify; text-indent: -5.7px; ">상대방이 </span><span style="letter-spacing: -0.3px; font-size: 8px; text-align: justify; text-indent: -5.7px; font-family: 'Nanum Myeongjo'; ">(</span><span style="letter-spacing: -0.3px; font-size: 8px; text-align: justify; text-indent: -5.7px; ">정도가 심한</span><span style="letter-spacing: -0.3px; font-size: 8px; text-align: justify; text-indent: -5.7px; font-family: 'Nanum Myeongjo'; ">)</span><span style="letter-spacing: -0.3px; font-size: 8px; text-align: justify; text-indent: -5.7px; ">터무니없는 말을 하거나 진실되지 못한 발언을 할 때 </span><span style="letter-spacing: -0.3px; font-size: 8px; text-align: justify; text-indent: -5.7px; font-family: 'Nanum Myeongjo'; ">(</span><span style="letter-spacing: -0.3px; font-size: 8px; text-align: justify; text-indent: -5.7px; ">개</span><span style="letter-spacing: -0.3px; font-size: 8px; text-align: justify; text-indent: -5.7px; font-family: 'Nanum Myeongjo'; ">)</span><span style="letter-spacing: -0.3px; font-size: 8px; text-align: justify; text-indent: -5.7px; ">드립이라고 표현하곤 한다</span><span style="letter-spacing: -0.3px; font-size: 8px; text-align: justify; text-indent: -5.7px; font-family: 'Nanum Myeongjo'; ">.</span>에서 가장 자주 사용되는 어휘는 ‘망했다’이다. 이것은 정치나 사회운동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p>
<p>
</p>
<blockquote>
<p>
관료들이 외치는 진보대통합은 전체운동 자체가 망했다는 사실을 은폐하기 위한 수사에 불과하다. 그리고 죽은 운동세대의 힘을 연장하기 위해 젊은 운동가들의 피를 내어 먹이려는 거겠지. -@seouIdecadence 의 트위터</p>
<p>
</p>
</blockquote>
<blockquote>
<p>
지금 이대로 꾸준히 해나가다 보면, 패착을 거듭하면서도 조금씩 남는 것들이 쌓여가겠죠. 그렇게 한걸음 한걸음 더디게 가다보면, 목적지에 다다르기 전에 수명이 끝나서 안타깝습니다. -@kimstcat_bot 의 트위터</p>
<p>
</p>
</blockquote>
<p>
흥미로운 것은 이들이 운동 바깥에서 정치와 운동을 냉소하는 이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옆에서 지켜본 이들은 저마다 자신의 삶이나 두리반 투쟁, 정당운동 등을 누구보다도 열성으로 수행하는 이들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이러한 조롱의 언어를 통해 오늘날 일상이 되어버린 진보 정치의 언어에 대한 전면적인 불신을 조장한다. 이들의 언어 속에서 진보 정치 일반은 이제 역사의 막다른 길에 다다른 것이 되며, 더 이상 추방당한 이들, 배제당한 이들을 대의하고 있지 않은 환상의 정치가 된다. 두리반에 모이는 젊은 활동가들은 진보의 서사 속에 기입될 수 있을 어떤 긍정적인 정치적 비전의 언어 대신 이 서사 전체의 이미지를 몰락시키는 방식으로 고유의 ‘정치’를 발생시킨다. </p>
<p>
</p>
<p>
그것은 곧 오늘날 “망한 것들”의 직접적인 가시화이다. 우리는 이 지점에서 발터 벤야민의 “억압받는 자들의 전통은 우리가 그 속에서 살고 있는 ‘예외사태’가 상례임을 가르쳐준다.”<span style="text-align: justify; text-indent: -5.7px; font-size: 5.3px; font-family: 'Nanum Myeongjo'; letter-spacing: -0.3px; "><sup>13</sup></span><span style="font-size: 8px; text-align: justify; text-indent: -5.7px; letter-spacing: -0.3px; "><span class="Apple-tab-span" style="white-space:pre"> </span> 발터 벤야민</span><span style="font-size: 8px; text-align: justify; text-indent: -5.7px; font-family: 'Nanum Myeongjo'; letter-spacing: -0.3px; ">, “</span><span style="font-size: 8px; text-align: justify; text-indent: -5.7px; letter-spacing: -0.3px;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span><span style="font-size: 8px; text-align: justify; text-indent: -5.7px; font-family: 'Nanum Myeongjo'; letter-spacing: -0.3px; ">” 8</span><span style="font-size: 8px; text-align: justify; text-indent: -5.7px; letter-spacing: -0.3px; ">테제</span>는 진술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span style="text-align: justify; text-indent: -5.7px; font-size: 5.3px; font-family: 'Nanum Myeongjo'; letter-spacing: -0.3px; "><sup>14</sup></span><span style="font-size: 8px; text-align: justify; text-indent: -5.7px; letter-spacing: -0.3px; "><span class="Apple-tab-span" style="white-space:pre"> </span> 발터 벤야민</span><span style="font-size: 8px; text-align: justify; text-indent: -5.7px; font-family: 'Nanum Myeongjo'; letter-spacing: -0.3px; ">,</span><span style="font-size: 8px; text-align: justify; text-indent: -5.7px; letter-spacing: -0.3px; ">『일방통행로』의 </span><span style="font-size: 8px; text-align: justify; text-indent: -5.7px; font-family: 'Nanum Myeongjo'; letter-spacing: -0.3px; ">“</span><span style="font-size: 8px; text-align: justify; text-indent: -5.7px; letter-spacing: -0.3px; ">독일의 인플레이션을 가로지르는 여행</span><span style="font-size: 8px; text-align: justify; text-indent: -5.7px; font-family: 'Nanum Myeongjo'; letter-spacing: -0.3px; ">”</span><span style="font-size: 8px; text-align: justify; text-indent: -5.7px; letter-spacing: -0.3px; ">에 나오는 다음의 구절을 함께 읽어볼만 하다</span><span style="font-size: 8px; text-align: justify; text-indent: -5.7px; font-family: 'Nanum Myeongjo'; letter-spacing: -0.3px; ">: </span><span style="font-size: 8px; text-align: justify; text-indent: -5.7px; letter-spacing: -0.3px; ">이미 전쟁이 일어나기 이전에도 안정된 상태가 궁핍의 고정화를 의미할 뿐인 사회 계층이 존재하고 있었다</span><span style="font-size: 8px; text-align: justify; text-indent: -5.7px; font-family: 'Nanum Myeongjo'; letter-spacing: -0.3px; ">. </span><span style="font-size: 8px; text-align: justify; text-indent: -5.7px; letter-spacing: -0.3px; ">몰락은 상승보다 결코 덜 안정된 것도</span><span style="font-size: 8px; text-align: justify; text-indent: -5.7px; font-family: 'Nanum Myeongjo'; letter-spacing: -0.3px; ">, </span><span style="font-size: 8px; text-align: justify; text-indent: -5.7px; letter-spacing: -0.3px; ">더 놀라운 것도 아니다</span><span style="font-size: 8px; text-align: justify; text-indent: -5.7px; font-family: 'Nanum Myeongjo'; letter-spacing: -0.3px; ">. </span><span style="font-size: 8px; text-align: justify; text-indent: -5.7px; letter-spacing: -0.3px; ">오로지 몰락에서만 현재 상황에 대한 유일한 분별력이 생긴다는 점을 받아들일 때 비로소 매일 반복되는 일에 대해 놀라지 않는 둔화 상태를 벗어나 다음과 같은 생각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span><span style="font-size: 8px; text-align: justify; text-indent: -5.7px; font-family: 'Nanum Myeongjo'; letter-spacing: -0.3px; ">. </span><span style="font-size: 8px; text-align: justify; text-indent: -5.7px; letter-spacing: -0.3px; ">즉 몰락의 현상들은 전적으로 안정된 것이며 구원은 유일하게 거의 기적과 신비에 가까운 어떤 특별한 일로부터만 기대될 수 있다는 생각이다</span><span style="font-size: 8px; text-align: justify; text-indent: -5.7px; font-family: 'Nanum Myeongjo'; letter-spacing: -0.3px; ">. […] </span><span style="font-size: 8px; text-align: justify; text-indent: -5.7px; letter-spacing: -0.3px; ">따라서 최후의 파국에 대한 부단한 기다림 속에서 유일하게 구원을 가져다줄 비상한 일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 외에는 대책이 없다</span><span style="font-size: 8px; text-align: justify; text-indent: -5.7px; font-family: 'Nanum Myeongjo'; letter-spacing: -0.3px; ">.</span> 진보의 서사 속에서는 포착될 수 없는 이 ‘상례화된 예외상태’는 그 진보의 이미지를 부수는 저들의 ‘개드립’ 속에서 드러난다. 결국 이들의 정치가 향하는 방향은 어떤 ‘정상적 상태’로의 진보나 회귀가 아니라 “진정한 예외상태를 도래시키는 것”일 수밖에 없다. </p>
<p>
</p>
<blockquote>
<p>
(정치적인 활동에 참가하는 이유는 뭐야?) 내가 많이 억압받고 있다고 생각했어. 민주시민으로 태어났으니까 의무를 다 해야지. 이런 게 아니라. 그보다 더 많이 드는 생각은 나의 현재가 되게 눌려져 있고, 억압되어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좀 벗어나고 싶다. 그런 거? 집회나 시위에 나가면 그 순간 벗어날 수 있잖아. 투쟁할 수 있고. 그게 너무 좋았어. 그게 확장되어서 용산도 가고, 기륭도 가고. 두리반에도 이렇게 오고. 사실 학교에서는 뭘 적극적으로 행동을 하지는 못해. 말 그대로 억압받고 있어. 그냥 욕하고 하는 정도일 뿐이지. 학생회도 어용이고. 할 수 있는 게 없어. (A 인터뷰)</p>
<p>
</p>
</blockquote>
<p>
물론 나는 여기서 심한 도약을 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진정한 예외사태’라는 표현을 통해 우리가 떠올리게 되는 혁명적인 봉기는 전혀 멀게만 보인다. 두리반 사람들은 여전히 이 한국사회에서 한 줌도 안 되는 ‘망해가는 것들’의 일부분일 뿐이다. 그러나 적어도 지금 예외상태를 겪고 있는 두리반에서 이들이 ‘진정한 예외상태’를 작게나마 실험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이 곳에서 예외상태를 겪는 이들의 연대가 조직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어쩌면 “우리에게는 우리에 앞선 모든 세대와 마찬가지로 희미한 메시아적 힘이 주어져 있는 것이다.”<span style="text-align: justify; text-indent: -5.7px; font-size: 5.3px; font-family: 'Nanum Myeongjo'; letter-spacing: -0.3px; "><sup>15</sup></span><span style="font-size: 8px; text-align: justify; text-indent: -5.7px; letter-spacing: -0.3px; "><span class="Apple-tab-span" style="white-space:pre"> </span> 발터 벤야민</span><span style="font-size: 8px; text-align: justify; text-indent: -5.7px; font-family: 'Nanum Myeongjo'; letter-spacing: -0.3px; ">, “</span><span style="font-size: 8px; text-align: justify; text-indent: -5.7px; letter-spacing: -0.3px;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span><span style="font-size: 8px; text-align: justify; text-indent: -5.7px; font-family: 'Nanum Myeongjo'; letter-spacing: -0.3px; ">” 2</span><span style="font-size: 8px; text-align: justify; text-indent: -5.7px; letter-spacing: -0.3px; ">테제</span><span style="font-size: 8px; text-align: justify; text-indent: -5.7px; font-family: 'Nanum Myeongjo'; letter-spacing: -0.3px; ">, </span><span style="font-size: 8px; text-align: justify; text-indent: -5.7px; letter-spacing: -0.3px; ">강조는 벤야민</span></p>
<p>
</p>
<br />
<iframe src="http://www.facebook.com/plugins/like.php?locale=ko_KR&href=http%3A%2F%2Fblog.jinbo.net%2Fminjung%2F&layout=standard&show_faces=true&width=445&action=like&colorscheme=light&" scrolling="no" frameborder="0" allowTransparency="true" style="border:none; overflow=hidden; width:445px; height:60px; margin-top:10px; margin-left:5px"></iframe><script type="text/javascript" src="http://tweetmix.net/js/widgetV2.js"></script><script type="text/javascript">if(("TMXW" in window)) { new TMXW.Widget({"shape":"default","target_url":"http://blog.jinbo.net/minjung/","widget_title":"\uc774 \uae00\uacfc \uc5f0\uad00\ub41c \ud2b8\uc717","default_msg":"","width":"445","height":"450","color_upper_back":"93C9E6","color_upper_text":"FFFFFF","color_tweet_back":"FFFFFF","color_border":"EBEBEB","color_text":"888888","color_link":"2ABBD4","widget_type":"1","btn_type":"1","max_messages":"10","is_show_avatar":"1"}).render().start();} </script><div class="buttons-bottom center jinboblog-i-like-this-buttons"><a class="button-jinboblog" href="javascript:void(0);" title="스크랩으로 글 링크를 저장하세요" onclick="recommend('2377',448,'/minjung','');"><img src="/plugins/../jplugins/ILikeThis/images/mini_chuchon.png" alt="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a><a class="button-twitter" href="http://twitter.com/home?status=http%3A%2F%2Fblog.jinbo.net%2Fminjung%2F448+%22%EC%B2%AD%28%EC%86%8C%29%EB%85%84%2C%20%EA%B7%B8%EB%A6%AC%EA%B3%A0%20%EB%AA%B0%EB%9D%BD%EC%9D%98%20%EC%A0%95%EC%B9%98%22" target="_blank" title="트위터로 리트윗합니다"><img src="/plugins/../jplugins/ILikeThis/images/twitter.png" alt="트위터로 리트윗하기" /></a><a class="button-facebook" href="http://www.facebook.com/sharer.php?u=http%3A%2F%2Fblog.jinbo.net%2Fminjung%2F448&t=%EC%B2%AD%28%EC%86%8C%29%EB%85%84%2C%20%EA%B7%B8%EB%A6%AC%EA%B3%A0%20%EB%AA%B0%EB%9D%BD%EC%9D%98%20%EC%A0%95%EC%B9%98" target="_blank" title="페이스북에 공유합니다"><img src="/plugins/../jplugins/ILikeThis/images/facebook.png" alt="페이스북에 공유하기" /></a><a class="button-delicious" href="http://delicious.com/save" onclick="window.open('http://delicious.com/save?v=5&noui&jump=close&url=http%3A%2F%2Fblog.jinbo.net%2Fminjung%2F448&title=%EC%B2%AD%28%EC%86%8C%29%EB%85%84%2C%20%EA%B7%B8%EB%A6%AC%EA%B3%A0%20%EB%AA%B0%EB%9D%BD%EC%9D%98%20%EC%A0%95%EC%B9%98','delicious','toolbar=no,width=550,height=550'); return false;" title="딜리셔스에 북마크합니다"><img src="/plugins/../jplugins/ILikeThis/images/delicious.png" alt="딜리셔스에 북마크" /></a></div><p><strong><a href="http://blog.jinbo.net/minjung/448?commentInput=true#entry448WriteComment">댓글 쓰기</a></strong></p>19세의 수험생 김재석씨는 유죄인가김강http://blog.jinbo.net/minjung/4472012-02-14T01:55:17+09:002012-02-14T01:55:17+09:00<div>
아내와 함께 백화점 식품관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일주일에 한번, 유학생 신분에 거의 유일하게 부리는 사치인 '린트너' 빵집의 통밀 식빵을 사기 위해서였다. 모처럼 나왔으니 평소엔 잘 안 먹는 벨기에 초콜렛도 하나 사 보자며 우리 둘은 들떠 있었다. 길게 늘어선 줄을 지나 계산을 할 때까지만 해도 우리는 무척 행복했다. 장갑 한 짝이 없어진 걸 발견하기 전까지. </div>
<div>
</div>
<div>
둘이서 백화점 안에서 지나다닌 길을 두 번이나 샅샅이 뒤졌지만 결국 장갑을 찾을 수 없었다. 10유로. 그닥 비싸지 않고 따뜻한 겨울 장갑의 가격이었다. 둘이서는 집에서 요리를 해먹으면 며칠 식비 정도 되는 금액이다. 별 것 아니라면 별 것 아닌 돈이다. 하지만 참을 수 없이 화가 났다. 조금 전까지 분명히 하고 있었던 장갑인데. 이걸 도대체 어디서 떨어뜨린 걸까. 나는 왜 여기서 생돈 10유로를 그냥 길바닥에 버린 걸까. 한 짝은 멀쩡하게 있는데 한 짝이 없어진 상황도 어처구니가 없고 더 화를 돋우었다. 그래. 결국 내가 죄인이다. 이 나이 먹도록 부모님께 생활비 받아 쓰고 있는 내가 죄인이고, 죄인 주제에 물건을 잃어버리기까지 하니 더욱 죄인이다. 생각이 여기까지 흐르니 이번엔 이 유치한 감정에 또 화가 난다. </div>
<div>
</div>
<div>
10유로. 한화로 따지만 15,000원 조금 못 되는 이 돈에 사람은 이렇게 화가 날 수 있다. 그런데 어느 날 하루 아침에 460만원을 모아야 한다면. 그 돈이 없어서 지금껏 살아온 삶에서 손꼽을만한 기쁜 일 하나를 그냥 공중에 날려버린다면. 그것도 거의 성사되었던 일 하나를. 그리고 결국 돈은 구하지 못하고, 어떻게 파국을 막아보고자 애 썼지만 그 기회가 지나가 버렸다면. 그는 얼마나 화가 날까. 이 세상에. 그리고 그 보다 스스로에게. 서울에 사는 수험생 김재석 씨가 겪은 일이다. </div>
<div>
</div>
<div>
'인권과 평화의 대학' 성공회대학교에 그동안 여러 운동현장에서 활동해온 경력을 인정받아 NGO전형에 합격한 김재석씨는 2월 초가 되어서야 등록금 고지서를 받았다. 460만원이라는 금액이 찍혀 있었다. 평범한 '19세'의 시민으로써 이 금액에 숨이 턱 막히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일을 잘 도와줄 가족 친지도 별로 없는 가난한 '19세'의 시민으로써 등록금 문제, 학자금 대출관련 정보, 공인인증서와 액티브X, 인터넷 보안 등 한국의 특수하고 불편하기 그지 없는 금융관련 절차에 홀로 능통한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 그는 조금 늦게, 하지만 여하간 신청기간 내에 등록금 '대출'을 한국'장학'재단에 신청했다. 등록금 납부일은 8일에서 10일 단 삼일이었다. 승인은 더디고 더졌다. 등록금 납부기간이 될 때까지 발을 동동 구른 김재석 씨가 전화를 하면 재단 측에서는 "일단 사전 등록을 하던가, 460만원을 학교에 먼저 내고 기등록을 한 후 돈을 받도록 하라."라는 대답을 했다. 그러나 성공회대학교에는 사전 등록 제도가 없었고, 460만원을 당장에 그가 마련할 길은 없었다. 물론 길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런 돈을 갑자기 댈 수 있는 친척이 없다 해도 잠깐이지만 사채를 끌어 쓸 수도, 혹은 굴욕을 무릅쓰고 돈을 빌리러 다닐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껏 여러 청소년 인권활동을 해 왔지만 그렇다고 이런 일에까지 능통할 수는 없을 19세의 평범한 시민에게 460만원을 하루만에 마련할 길은 없었다. </div>
<div>
</div>
<div>
그는 등록을 하지 못했다. 10일 2시에 승인이 났다는 것을 알았지만, - 만약 그가 회원가입시에 sms를 등록하면 된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더 일찍 알았을 수도 있다. - 집에 인터넷을 할 수 있는 컴퓨터가 없는 김재석씨는 PC방에 가야 했고, 외장하드에 담아온 공인인증서가 오류가 났다는 걸 알고, 다시 은행에 다녀와야 했고, 한국장학재단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이체를 시도했지만, 보안이 낮은 PC방 컴퓨터로는 액티브 액스를 깔고 공인인증서로 로그인을 하고 계좌 이체를 하는 그 모든 절차가 잘 안 된다는 걸 업무마감시간인 4시를 넘겨서까지도 알지 못했다. 그는 성공회대에 전화를 했다. 하루만 기다려줄 수 있냐고. 지금 승인이 났는데 컴퓨터가 문제가 생겨서 입금을 못한 거라고, 한국장학재단이 일처리가 늦었던 데다가 내 서류 팩스를 한번 누락하기까지 하는 실수를 저질렀다고. 안 된다고 했다. 처음엔 소명서를 받으면 도움을 줄 수 있다는 말을 내비쳤다가 윗선에서 안 된다고 했는지 다시 전화가 와서 절대로 안 된다고 했다. </div>
<div>
</div>
<div>
우리는 김재석씨를 쉽게 비난하고 싶은 유혹에 빠진다. 이미 기사화된 그의 이야기에 달린 댓글들을 보면, 그리고 그가 직접 올린 호소문에 달린 댓글들을 보면 "1월에 합격해 놓고 2월까지 왜 손놓고 있었냐.", "장학재단 홈페이지가 그런 걸 몰랐냐."라는 이야기가 줄줄줄 올라온다. "학교나 장학재단이 문제가 많지만 김재석씨의 행동도 실수가 많았네요 안타깝습니다." 식의 양비론으로 자신은 이렇게 바보같지 않다는 걸 확인하는 헛똑똑이들의 댓글도 달린다. </div>
<div>
</div>
<div>
19세의 시민 김재석씨는 죄인인가. 어렸을 때부터 저축이라도 하고, 알바라도 해서 460만원을 갖고 있지 못했던 김재석씨가, 명시적으로 공지된 절차보다 더 많은 절차와 복잡한 기술적 문제가 있다는 것을 몰랐던 김재석씨가, 자신의 인생에 대하여, 등록금을 마련해주지 못해 한없이 미안해하는 그의 가족에 대하여, 뒤늦게 이 사실을 알고 함께 괴로워하는 친구들에 대하여, 결국 너무 화가나서 쓴 호소문에 들어간 몇 가지 실수에 대하여, 성공회대와 한국장학재단의 욕먹는 담당자들에 대하여 죄인인가? 김재석씨의 이야기가 알려지자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같은 문제를 겪었다는 것이 알려졌다. 비슷비슷하게 학교와 장학재단 사이에 치여서, 자신의 무능을 탓하고 있던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게 되었다. 이들이 죄인인가? </div>
<div>
</div>
<div>
서울의 4년제 대학교 한학기 등록금 및 입학금 460만원. 이것은 내가 멍청하게 어딘가에 떨어뜨린 10유로가 아니다. 이 금액을 내야만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세상이, 조그만 실수라도 몇 개가 쌓이면 온갖 굴욕을 겪으면서 돈을 마련하거나, 등록을 못해 호소문을 쓰면서 '그것도 제대로 못했냐.'라는 댓글을 보게 만드는 이 세상이야말로 유죄가 아닌가! 나는 묻고 싶다. 만약 김재석씨가 힘겹게 460만원을 마련하여 등록을 한다면, 그가 이런 저런 전화나 민원을 넣어서 그의 사정을 이미 알고 있을 장학재단의 담당자나, 성공회대 입학처의 직원은 "정말 이렇게 굴욕을 감내하게 해서, 힘겹게 해서 죄송합니다."라는 사과 한 마디라도 했을까. 아니다. 그들은 그럴 필요가 없다. 그들은 절차상 잘못한 게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적어도 그들이 그런 사과 한마디를 하지 않아도 되는 이 시스템은 유죄가 아닌가. </div>
<div>
</div>
<div>
이게 사는 건가. 10유로짜리 장갑의 한 짝을 잃어버려도 화가 치솟고 스스로를 탓하는 인간이 적지 않을(그렇게 믿고 싶다.) 이 세상에서, 매년 수많은 젊은이들이 수백만원의 돈에 가슴이 턱 막히고, 몇 개의 실수가 겹쳐서 그동안 공부하고, 활동했던 것을 통해 얻은 대학입학의 자격을 박탈당하고, 가족들과 친구들에게 한없이 미안해야 하고, 악플까지 받아 가면서 성인으로써의 첫 발을 내딛는 이런 게 사람 사는 건가. 한 학기에 30만원 정도의 돈을 내면 시내 교통비까지 포함된 학생증을 주고, 1학기 째에는 시청에서 100유로의 돈을 주는 독일같은 곳이 없더라도,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독립해서 살 수 있도록 월세와 기본생활비까지 주는 덴마크 같은 곳이 없더라도 이 사회는 유죄다. </div>
<div>
</div>
<div>
나는 내 친구 김재석씨가 부디 성공회대 합격이 취소되지 않고 이번 학기부터 학업을 시작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것은 그가 단 하나의 실수도 없이 당당하게 입학을 주장할 수 있기 때문은 아니다. 19세의 실수 많았던 시민에게서 공부할 자격을 박탈할 권리가 이 죄 많은 사회에는 없기 때문이다. 김재석씨 한 사람을 이번 학기에 성공회대학에서 받아들이는 건 원칙에 위배되는 온정주의적 해법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온정주의는 그 원칙이 정의로운 사회 안에 있는 원칙일 때만 비판받아야 한다. 그 전까지는, 그것은 모든 것을 전부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고 손을 떼는 이 자본주의 세상에도 '사람'이 있다는 것의 증거일 뿐이다. 그래서 김재석씨는 3월부터 공부를 시작해야 한다. </div>
<iframe src="http://www.facebook.com/plugins/like.php?locale=ko_KR&href=http%3A%2F%2Fblog.jinbo.net%2Fminjung%2F&layout=standard&show_faces=true&width=445&action=like&colorscheme=light&" scrolling="no" frameborder="0" allowTransparency="true" style="border:none; overflow=hidden; width:445px; height:60px; margin-top:10px; margin-left:5px"></iframe><script type="text/javascript" src="http://tweetmix.net/js/widgetV2.js"></script><script type="text/javascript">if(("TMXW" in window)) { new TMXW.Widget({"shape":"default","target_url":"http://blog.jinbo.net/minjung/","widget_title":"\uc774 \uae00\uacfc \uc5f0\uad00\ub41c \ud2b8\uc717","default_msg":"","width":"445","height":"450","color_upper_back":"93C9E6","color_upper_text":"FFFFFF","color_tweet_back":"FFFFFF","color_border":"EBEBEB","color_text":"888888","color_link":"2ABBD4","widget_type":"1","btn_type":"1","max_messages":"10","is_show_avatar":"1"}).render().start();} </script><div class="buttons-bottom center jinboblog-i-like-this-buttons"><a class="button-jinboblog" href="javascript:void(0);" title="스크랩으로 글 링크를 저장하세요" onclick="recommend('2377',447,'/minjung','');"><img src="/plugins/../jplugins/ILikeThis/images/mini_chuchon.png" alt="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a><a class="button-twitter" href="http://twitter.com/home?status=http%3A%2F%2Fblog.jinbo.net%2Fminjung%2F447+%2219%EC%84%B8%EC%9D%98%20%EC%88%98%ED%97%98%EC%83%9D%20%EA%B9%80%EC%9E%AC%EC%84%9D%EC%94%A8%EB%8A%94%20%EC%9C%A0%EC%A3%84%EC%9D%B8%EA%B0%80%22" target="_blank" title="트위터로 리트윗합니다"><img src="/plugins/../jplugins/ILikeThis/images/twitter.png" alt="트위터로 리트윗하기" /></a><a class="button-facebook" href="http://www.facebook.com/sharer.php?u=http%3A%2F%2Fblog.jinbo.net%2Fminjung%2F447&t=19%EC%84%B8%EC%9D%98%20%EC%88%98%ED%97%98%EC%83%9D%20%EA%B9%80%EC%9E%AC%EC%84%9D%EC%94%A8%EB%8A%94%20%EC%9C%A0%EC%A3%84%EC%9D%B8%EA%B0%80" target="_blank" title="페이스북에 공유합니다"><img src="/plugins/../jplugins/ILikeThis/images/facebook.png" alt="페이스북에 공유하기" /></a><a class="button-delicious" href="http://delicious.com/save" onclick="window.open('http://delicious.com/save?v=5&noui&jump=close&url=http%3A%2F%2Fblog.jinbo.net%2Fminjung%2F447&title=19%EC%84%B8%EC%9D%98%20%EC%88%98%ED%97%98%EC%83%9D%20%EA%B9%80%EC%9E%AC%EC%84%9D%EC%94%A8%EB%8A%94%20%EC%9C%A0%EC%A3%84%EC%9D%B8%EA%B0%80','delicious','toolbar=no,width=550,height=550'); return false;" title="딜리셔스에 북마크합니다"><img src="/plugins/../jplugins/ILikeThis/images/delicious.png" alt="딜리셔스에 북마크" /></a></div><p><strong><a href="http://blog.jinbo.net/minjung/447?commentInput=true#entry447WriteComment">댓글 쓰기</a></strong></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