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진보에서 역사의 구원으로http://blog.jinbo.net/minjung/근데 여기 '진보넷' 블로그네(읭?)2013-08-03T05:24:23+09:00Textcube 1.8.3.1 : Secondary Dominant네 이름이 네게서 이루어진 것처럼 [복상 214호]김강http://blog.jinbo.net/minjung/1842008-09-08T19:17:44+09:002008-09-08T19:17:44+09:00<!--FCKeditor--><!--StartFragment-->마르잔 사트라피, <페르세폴리스 1, 2>, 새만화책 2008
<p class="HStyle0"> </p>
<p class="HStyle0"><br /></p>
<p class="HStyle0"><strong>민주에게. </strong></p>
<p class="HStyle0"><br /></p>
<p class="HStyle0">얼마 전에야 네 이름의 한자가 民主라는 걸 알았어. 주 선생님 - 그리고 네 아빠^^ - 께서 87년 6월 민주화 항쟁의 열기가 그해 12월 노태우 군사정권의 연장이라는 어이없는 결과를 낳는 것을 보면서, 네가 살아갈 세상은 더 “민주”이길 바라는 마음에 이듬해 태어난 너에게 “민주”라는 이름을 붙이셨다는 거. 붙여놓고 보니 “주민주”가 되어 혹시나 애들한테 놀림 받지 않을까 걱정하셨다는 말씀을 덧붙이시더라. 그리고 다행히 네가 네 이름을 무척 사랑하는 것 같아 기뻤다는 말씀도. </p>
<p class="HStyle0"><br /></p>
<p class="HStyle0">뭐… 아버지라고 해서 딸의 삶을 속속들이 다 아닌 건 아닐 테니 과연 네가 네 이름을 사랑하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네가 네 ‘이름답게’ 살아간다는 건 요 몇 년 간 너를 지켜본 나로선 분명하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뭐랄까, “민주가 아니면 살지 않겠다.”라는 각오를 보았달까. 1년이 넘도록 다니던 고등학교의 비민주적인 학교문화와 인권침해에 맞서 싸우다가 결국 자퇴하던 그 날의 네 모습은 아직도 내 기억 속에 선명히 남아 있어. 마치 민주화운동을 기록한 사진 속에서 닭장차에 올라타 환하게 웃음 짓고 있던 운동가의 모습처럼, “어떤 일이 있다 하더라도 나는 내 삶의 주인이다.”는 삶의 충만함을 네게서 느꼈었단다.</p>
<p class="HStyle0"><br /></p>
<p class="HStyle0">하지만 그런 충만함의 전에도, 후에도 삶은 결코 쉽거나 단순하지 않다는 것도 사실이겠지. 너 또한 네가 접한 세상의 온갖 모순들 속에서 때로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냈다는 것도. “그땐 정말 괜히 애 이름을 ‘민주’로 지었다고 많이 자책했어.”하시던 주 선생님 목소리 속에선 너에 대한 자랑스러움 한편에 있던 걱정과 회한을 느낄 수 있었단다. 나 역시도, 민주만큼은 훌륭한 삶의 저항을, 그 충만함을 표현하며 살지는 못했지만, 지금까지의 짧은 삶 속에서도 자유와 해방을 구가하며 살려 할 때마다 부딪혔던 삶의 고단함을 기억해. 결코 삶은, 적어도 자유롭고, ‘민주’로 살려는 우리의 삶은 단순하지 않더라. </p>
<p class="HStyle0"><br /></p>
<p class="HStyle0"><span style="FONT-WEIGHT: bold">펑크소녀 마르잔</span></p>
<p class="HStyle0">얼마 전에 <페르세폴리스>라는 프랑스 애니메이션을 봤어. 이란 출신의 프랑스 만화가이자 애니메이션 감독인 마르잔 사트라피가 20대 초반까지의 자신의 삶을 때론 유머러스하게, 때론 담담하게, 그리고 때론 매우 슬프게 들려주는 그 이야기 속에서 난 민주의 모습을 살짝 떠올렸단다. 그녀 역시 자신의 삶에서 자신의 주인이기 위해 살아가는 한 사람이었거든. </p>
<p class="HStyle0"><br /></p>
<p class="HStyle0">애니메이션이 빠른 속도로 내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면, 이 영화의 원작 만화인 <페르세폴리스1 - 나의 어린 시절 이야기>, <페르세폴리스2 - 다시 페르세폴리스로>는 좀 더 깊이 있고 차분하게 그녀의 삶을 바라보면서 한편으로 나와 네가 살아가고 있는 우리 세상을 돌아볼 기회를 주었단다. </p>
<p class="HStyle0"><br /></p>
<p class="HStyle0">“이란의 현대사”라고 한다면 사실 우리에겐 매우 생소할 거야. 사실상 우리는 어디서도 이란의 역사를 제대로 배운 적이 없으니까. 게다가 이란은 우리가 “이슬람”하면 쉽게 떠올리는 “아랍”과도 다른 언어, 다른 정체성을 가진 나라이기도 해. 하지만 이 책을 읽기 위해 꼭 이슬람과 이란에 대한 많은 지식이 필요하진 않아. 마르잔 스스로가 들려주는 이란의 이야기 속에서 그녀의 삶을 느끼고 함께 하는 게 더 의미 있을 거라 생각해. 그리고 그녀의 삶이 가진 특수함과, 또 그럼에도 우리의 삶과의 공통성을 함께 살펴보면 좋을 것 같다. </p>
<p class="HStyle0"><br /></p>
<p class="HStyle0">그녀는 스무 살이 되기 전까지 안락하고 부유한 삶, 혁명, 전쟁, 근본주의의 억압, ‘제 3세계’ 이민자의 삶이라는 그야말로 ‘파란만장’한 10대의 삶을 살았어. 79년 혁명 이전의 억압적인 왕정 밑에서 마르잔은 자유주의적이고 진보적인 부모님을 둔 덕에 전통이나 규율에 매몰되지 않고 자라날 수 있었어. 하지만 79년의 혁명은 그 모든 것을 바꾸게 돼. 혁명은 처음에는 억압적인 왕정에 대한 저항이고, 또 해방의 사건이었지만, 그 혁명의 열매를 따먹은 건 근본주의적인 이슬람 성직자들이었거든. 결국 마르잔의 삼촌을 비롯한 사회주의자들, 자유사상가들은 혁명을 맞이했음에도 불구하고 암살과 테러, 정치적 탄압 속에서 죽고 말아. 그리고 오히려 전 사회에 여성에 대한 억압, 종교적 헌신에 대한 강조 등 근본주의적 이슬람화가 진행돼. </p>
<p class="HStyle0"><br /></p>
<p class="HStyle0">그 와중에서 남녀공학의 프랑스계 초등학교에 다니며 자유롭게 자란 마르잔은 이전의 삶을 살아갈 수 없었어. 정부는 외국계 학교를 없애버렸고, 이제 모든 여학생은 차도르를 쓰고 다녀야만 했어. 오직 종교와, 조국에 대한 비뚤어진 애국주의만이 마르잔이 배워야 할 모든 게 되어 버려. 하지만 그런 억압은 결코 마르잔의 내면적인 삶까지 장악하지 못해. 그녀는 자유와 음악을 사랑하는 ‘펑크소녀’였고, 적어도 사적 공간만큼은 부모님의 보호와 사랑 속에서 자유의 삶을 키워갈 수 있었으니까. </p>
<p class="HStyle0"><br /></p>
<p class="HStyle0">점점 더 억압적으로 변해가는 이란 사회의 모습과, 또 한편에서 지극히 사적인 형태로 존속하는 나름의 ‘자유’의 모습에 대한 마르잔의 묘사는 무척 흥미로워. 난 그런 모습 속에서 비록 약한 모습이라 할지라도 자유의 요구는 어떤 억압적이고 폭력적인 사회 속에서도 존재한다는 걸 다시 한 번 생각할 수 있었어. </p>
<p class="HStyle0"><br /></p>
<p class="HStyle0">하지만 80년대에 들어 시작된 이라크와의 전쟁은 갈수록 이란 사회를 근본주의와 파시즘으로 몰아넣게 돼. 그리고 마르잔이 더 이상 자신의 자유를 사적인 공간에서만 외치지 않고 공적인 자리에서 표현했을 때, 즉 이슬람 혁명 이후 정치범은 없다고 거짓말을 하는 교사에게 “내 삼촌은 바로 이슬람 정권 하에서 사형 당했어요. 지금도 30만 명이나 되는 정치범이 있다는 걸 다 알아요. 어떻게 그런 거짓말을 할 수 있어요?”라고 말했을 때 마르잔의 부모는 그녀가 더 이상 이란에서 살아갈 수 없음을 직감하고 마르잔을 빈(오스트리아)으로 유학보내기로 결심해. 그리고 그녀의 할머니(그녀 역시 사회주의 지식인의 아내이기도 했던)는 마르잔에게 “언제나 네 존엄성을 잃지 말고, 자기 자신에게 진실하렴”이라는 그녀의 인생에 가장 깊이 간직될 충고를 해. 라벤더 향의 ‘가슴 내음’과 함께.(궁금하면 책을 꼭 읽어보렴.^^)</p>
<p class="HStyle0"><br /></p>
<p class="HStyle0"><span style="FONT-WEIGHT: bold">부모를 떠나, 또 다른 혼돈의 세계로</span> </p>
<p class="HStyle0">열네 살 나이에 그야말로 ‘홀로’ 이방의 세계에 던져진 마르잔. 그녀 앞에 펼쳐진 세계는 “자유 서방”이었지만 그녀는 결코 자유롭지만은 않았어. 아마 어쩌면 자유란 외부의 조건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내적인 충만함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었을까. </p>
<p class="HStyle0"><br /></p>
<p class="HStyle0">더 이상 차도르를, 종교생활을, 조신한 윤리를 강요하는 사회는 없었지만 이제 마르잔은 아무도 이란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는 그런 사회 속을 좌충우돌하면서 걸어가. 그녀는 그 곳에서 쉽게 가난한 나라의 불쌍한 아이로 여겨지거나, 은밀하거나 노골적인 인종차별 속에 놓이기도 해. 게다가 한편으로 그녀는 부모가 없는 곳에서 홀로 정신적, 육체적인 성장기를 맞이해야 했어. 2권의 전반부는 빈 시절에 마르잔이 겪었던 문화충격들, 외로움, 혼란, 하지만 그 속에서도 끊임없이 공부하며 혁명을, 사랑을 고민하던 삶을 그리고 있어.</p>
<p class="HStyle0"><br /></p>
<p class="HStyle0">마르잔은 특히나 자신이 빈에서 만난 비주류의 친구들 이야기를 우리에게 많이 들려줘. 그녀가 다른 친구들보다도 아나키스트, 혁명주의자, 동성애자, 성해방주의자 등의 친구들과 어울렸던 건 그녀 역시 빈에서 비주류였기 때문이었을 거야. 물론 그 우정도 결코 평탄한 것은 아니야. 마르잔은 그 친구들 사이에서도 자신의 정체성 - 이란인으로서 라기 보다는 ‘마르잔’으로서의! - 을 끊임없이 고민해야만 했어. </p>
<p class="HStyle0"><br /></p>
<p class="HStyle0">하지만 이제 그녀 곁에는 그 모든 과정을 따뜻하게 지켜봐주는 부모님은 없었어. 혼돈 속에서 때로 그녀는 연애에 푹 빠지기도 하고, 또 그 연애의 실패로 방황하다 결국 이란으로 돌아온 후 우울증을 견디다 못해 고통 속에서 자살을 시도할 만큼 깊은 고통의 시간을 보내기도 해. 하지만 이 책을 다 읽고 느낀 것은 그런 시간들이 결코 그녀에게 시간낭비가 아니었다는 거야. 그토록 힘들게 비주류의 삶 속으로 내던져진 마르잔이었지만 한편으로 그런 삶의 경험은 그녀가 나중에 언제나 자기 자신으로 있으면서 억압적인 주류 이란 사회에 맞설 수 있는 힘이 되었다고 생각해. </p>
<p class="HStyle0"><br /></p>
<p class="HStyle0"><span style="FONT-WEIGHT: bold">이란으로의 귀환, 그리고 다시 떠남</span></p>
<p class="HStyle0">결국 이란으로 돌아오게 된 마르잔은 몇 달 동안 깊은 우울증에 시달리긴 하지만 결국 다시 일어서게 돼. 그녀의 가족들 - 이 책을 읽는 동안 내내 깊은 인상을 내게 남겨주기도 했던 - 은 이제 그녀를 어린아이 마르잔이 아니라 한 사람의 어른으로서 받아들이고, 그녀 역시도 이란 사회 속에서 작은, 그러나 커다란 삶의 저항을 시작해. 그녀가 돌아온 이란은 전쟁 이후로 더욱 피폐해졌지만 한편에선 경제가 복구되며 근본주의 이면의 사적인 자유공간이 커가던 시기이기도 해. 하지만 그런 사적 공간은 어디까지나 사적인 공간이었고, 언제든지 이슬람 정권의 ‘혁명 수호대’에 의해 가혹하게 탄압받을 수도 있는 그런 살얼음판 같은 공간이었어. </p>
<p class="HStyle0"><br /></p>
<p class="HStyle0">하지만 마르잔은 그런 사적 공간과 이슬람 사회의 경계를 넘나들며 자신의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해. 미술대학에 진학하여, 예술의 자유조차 보장하지 못하는 이슬람의 권위주의에 항의하기도 하고, 자신의 성적 자기결정권에 대해 학생들 앞에서 말함으로써 논쟁을 불러일으키기도 하고. 처음에 그녀는 자신을 매우 소수라고 생각했지만 이내 여전히 그 사회에서 자유를 구가하길 원하는 많은 친구들을 만나 함께 예술을, 삶의 즐거움을 고민하기도 해. 물론 그녀의 많은 실수들, 좌충우돌들도 이 책에선 솔직히 그려져. </p>
<p class="HStyle0"><br /></p>
<p class="HStyle0">어쩌면 가장 큰 실수였을지도 모르는 “레자”와의 결혼과 그 결혼의 실패, 그리고 의욕적으로 추진했던 대형 예술 프로젝트의 좌절 이후 결국 마르잔은 프랑스로 다시금 유학길에 올라. 물론 이제는 어린아이로서가 아니라 그야말로 한 사람의 자유인이 되어. 하지만 이 만화의 마지막은 “이날 저녁 이후 운좋게도 나는 1995년 3월 이란 새해 때 한 번 더 고향을 방문했다. 그리고 할머니는 1996년 1월 4일에 돌아가셨다. 자유에는 대가가 따랐다.”라는 슬픈 고백으로 끝나긴 하지만.(에니메이션에선 마르잔이 할머니의 부음을 듣고 공항으로 향하다가 이란으로 돌아가기를 포기하는 장면으로 끝나.) 삶은, 때로 선명하게 “자유”를 말할 때 조차도 결코 단순하진 않은 것일 테니까. </p>
<p class="HStyle0"><br /></p>
<p class="HStyle0"><span style="FONT-WEIGHT: bold">네 이름이 네게서 이루어진 것처럼</span></p>
<p class="HStyle0">검정고시를 치르고, 대입을 준비하는 와중에도 열심히 촛불집회에 나가는 민주를 보면서 나는 마르잔을 많이 생각했어. 물론, 그녀가 겪었던 삶의 질곡들, 또 경험들은 우리의 그것과 같진 않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그녀의 삶을 그저 바깥에서 지켜보며 놀랍고, 장하고, (때론)불쌍하다고 생각하기만 한다면 아마 우린 이 책을 하나도 제대로 읽지 못한 것일 거야. 20여년의 시간을 넘어서, 또 그녀의 삶의 공간과 우리의 삶의 공간을 넘어서 우리가 마르잔의 이야기에 공감하는 건 우리 역시도 그녀처럼 복잡하고 억압적인 삶 속에 던져져 있고, 또 그럼에도 내 삶의 주인이고자 하는, “자유”를 갈망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 아닐까. </p>
<p class="HStyle0"><br /></p>
<p class="HStyle0">어쩌면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대한민국은 “자유롭다”, “민주주의적이다.”라는 말을 강박적으로 해야 할 만큼 사실은 그 이면에 억압을 숨기고 있는 사회일지도 몰다. 이란의 이슬람 정권이 이슬람의 규율로 사람들을 옥죈다면, “자유롭다”고 하는 한국 사회는 오히려 ‘자유’로 포장된 온갖 경쟁의 논리, 적자생존의 논리가 사람들을 숨 막히게 하는 걸지도. </p>
<p class="HStyle0"><br /></p>
<p class="HStyle0">민주가 그토록 고등학교를 다니며 억압을 강하게 느꼈던 건, 그런 논리가 어떤 포장도 없이 날 것으로 다가오는 공간이 학교이기 때문인 건 아니었을까. 게다가 요즘은 더한 것 같아. 일부 우수한 학생(혹은 부유한 학생)에게 더 좋은 학교를 선택할 ‘자유’, 더 좋은 학원을 선택할 ‘자유’를 주고, 나머지 모든 학생들을 배제해버리는 최근의 “학교 자율화” 조치가 얼마나 많은 이들을 고통스럽게 하는지!</p>
<p class="HStyle0"><br /></p>
<p class="HStyle0">하지만 학교 밖에서도 그런 삶은 계속 펼쳐질 거야. 민주가 대학에 진학하더라도 그 공간은 결코 ‘자유의 공간’은 아닐 거야. 하지만 중요한 건 - 이미 민주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듯이 - 그 어느 순간이건 자유는 외부의 조건에 의해 주어질 수 없다는 걸 깨닫는 것이라고 생각해. 마르잔에 대한 이야기 속에서 썼듯이 자유는 “내가 내 삶의 주인”이라는 내적인 충만함이고, 그래서 매 순간 너에게 다가오는 삶에 진지하게 맞설 때만 가능한 것일 테니까. </p>
<p class="HStyle0"><br /></p>
<p class="HStyle0">우리의 삶은 결코 단순하지 않아. 하지만 분명한 건 민주는 이 세상 속에 있고, 민주를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과 더불어 앞으로도 그 삶을 계속 이어가야 한다는 것일 거야. 그 모든 삶 가운데서 때론 세상이 너를 슬프게 한다 해도, 언제나 민주가 ‘민주’로 있기를, 그래서 “네 이름이 네게서 이루어진 것처럼, 세상에서도 이루어지길” 기도할게. </p>
<p class="HStyle0"><br /></p>
<p class="HStyle0">민주의 책 읽어주는 친구, 김강.</p>
<p class="HStyle0"><span style="FONT-FAMILY: "한컴바탕""><br /></span></p><iframe src="http://www.facebook.com/plugins/like.php?locale=ko_KR&href=http%3A%2F%2Fblog.jinbo.net%2Fminjung%2F&layout=standard&show_faces=true&width=445&action=like&colorscheme=light&" scrolling="no" frameborder="0" allowTransparency="true" style="border:none; overflow=hidden; width:445px; height:60px; margin-top:10px; margin-left:5px"></iframe><script type="text/javascript" src="http://tweetmix.net/js/widgetV2.js"></script><script type="text/javascript">if(("TMXW" in window)) { new TMXW.Widget({"shape":"default","target_url":"http://blog.jinbo.net/minjung/","widget_title":"\uc774 \uae00\uacfc \uc5f0\uad00\ub41c \ud2b8\uc717","default_msg":"","width":"445","height":"450","color_upper_back":"93C9E6","color_upper_text":"FFFFFF","color_tweet_back":"FFFFFF","color_border":"EBEBEB","color_text":"888888","color_link":"2ABBD4","widget_type":"1","btn_type":"1","max_messages":"10","is_show_avatar":"1"}).render().start();} </script><div class="buttons-bottom center jinboblog-i-like-this-buttons"><a class="button-jinboblog" href="javascript:void(0);" title="스크랩으로 글 링크를 저장하세요" onclick="recommend('2377',184,'/minjung','');"><img src="/plugins/../jplugins/ILikeThis/images/mini_chuchon.png" alt="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a><a class="button-twitter" href="http://twitter.com/home?status=http%3A%2F%2Fblog.jinbo.net%2Fminjung%2F184+%22%EB%84%A4%20%EC%9D%B4%EB%A6%84%EC%9D%B4%20%EB%84%A4%EA%B2%8C%EC%84%9C%20%EC%9D%B4%EB%A3%A8%EC%96%B4%EC%A7%84%20%EA%B2%83%EC%B2%98%EB%9F%BC%20%5B%EB%B3%B5%EC%83%81%20214%ED%98%B8%5D%22" target="_blank" title="트위터로 리트윗합니다"><img src="/plugins/../jplugins/ILikeThis/images/twitter.png" alt="트위터로 리트윗하기" /></a><a class="button-facebook" href="http://www.facebook.com/sharer.php?u=http%3A%2F%2Fblog.jinbo.net%2Fminjung%2F184&t=%EB%84%A4%20%EC%9D%B4%EB%A6%84%EC%9D%B4%20%EB%84%A4%EA%B2%8C%EC%84%9C%20%EC%9D%B4%EB%A3%A8%EC%96%B4%EC%A7%84%20%EA%B2%83%EC%B2%98%EB%9F%BC%20%5B%EB%B3%B5%EC%83%81%20214%ED%98%B8%5D" target="_blank" title="페이스북에 공유합니다"><img src="/plugins/../jplugins/ILikeThis/images/facebook.png" alt="페이스북에 공유하기" /></a><a class="button-delicious" href="http://delicious.com/save" onclick="window.open('http://delicious.com/save?v=5&noui&jump=close&url=http%3A%2F%2Fblog.jinbo.net%2Fminjung%2F184&title=%EB%84%A4%20%EC%9D%B4%EB%A6%84%EC%9D%B4%20%EB%84%A4%EA%B2%8C%EC%84%9C%20%EC%9D%B4%EB%A3%A8%EC%96%B4%EC%A7%84%20%EA%B2%83%EC%B2%98%EB%9F%BC%20%5B%EB%B3%B5%EC%83%81%20214%ED%98%B8%5D','delicious','toolbar=no,width=550,height=550'); return false;" title="딜리셔스에 북마크합니다"><img src="/plugins/../jplugins/ILikeThis/images/delicious.png" alt="딜리셔스에 북마크" /></a></div><p><strong><a href="http://blog.jinbo.net/minjung/184?commentInput=true#entry184WriteComment">댓글 쓰기</a></strong></p><다중> 서평, "촛불 앞에서, 진보적 복음주의자들께 드리는 고언" [복상 213호] 김강http://blog.jinbo.net/minjung/1252008-06-13T00:13:56+09:002008-06-13T00:13:56+09:00<!--FCKeditor--><p class="HStyle0"><font color="#808080">진보적 복음주의 기독교인들이 만드는 잡지 <복음과 상황>에 연재하는 글입니다...만, <다중>의 내용을 충실히 쓰고 있기에 기독교와 상관 없는 분들도 일독을 권합니다. 뭐, 별로 잘 쓴 글인진 모르겠지만요^^;</font></p>
<p class="HStyle0"> </p>
<p class="HStyle0"><hr /></p>
<p class="HStyle0"> </p>
<p class="HStyle0">안토니오 네그리 & 마이클 하트, <다중>, 세종서적 2007</p>
<p class="HStyle0"><br /></p>
<p class="HStyle0">김강기명_성공회대 대학원생</p>
<p class="HStyle0"><br /></p>
<p class="HStyle0"><br /></p>
<p class="HStyle0"><span style="FONT-WEIGHT: bold">성서한국의 구교형 목사님께. </span></p>
<p class="HStyle0"><span style="FONT-WEIGHT: bold"><br /></span></p>
<p class="HStyle0">목사님 6월 9일의 만남은 참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이런 때가 아니면 언제 저같이 부족한 사람이 복음주의권의 오피니언들과 평등하게 이야기를 섞을 수 있었을까요. 촛불을 들고 거리로 쏟아져 나오는 저 자발적 대중들 - 특히 10대, 20대의 모습들이 복음주의권의 오피니언들에게도 놀라움과 경탄, 그리고 겸손함을 낳게 한 것 같습니다. 저는 그날 "솔직히 열심히 한다곤 하지만 결국 386 '꼰대' 목사님들 아니야?"라고 불신하던 저의 많은 감정들을 녹일 수 있었습니다. 적어도 9일의 시국토론회와 이어진 뒤풀이 자리에 참여하셨던 분들은 운동권과 시민단체 못지않게 복음주의 운동도 변해야 한다는 공감대를 분명히 갖고 계셨다고 생각합니다. 식사 자리에서 구 목사님의 "내가 청년들을 정말 잘 모르고 있었구나."라는 자기고백은 저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 왔었지요. </p>
<p class="HStyle0"><br /></p>
<p class="HStyle0">저는 물론 복음주의자는 아닙니다. 하지만 저 수구적 목회자들의 세력 확장과, 또 사회변화와 세대교체라는 환경의 변화 속에서 이제는 더 이상 복음주의와 진보주의라는 구분으로 기독교를 양분하는 것이 너무나 소모적이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교리보다는 이슈들이, 술․담배․낙태문제 같은 개인윤리보다는 대운하․쇠고기․반전․토지정의․인권․FTA 같은 사회윤리문제가 기독교 운동의 중심이 되면서 복음주의와 진보주의, 혹은 저 같이 어린 민중신학도와 복음주의 오피니언인 구 목사님 같은 분들이 무언가를 함께 할 수 있는 자리가 앞으로 더 많이 생겨나리라 생각합니다. </p>
<p class="HStyle0"><br /></p>
<p class="HStyle0">이런 점에서 저는 복음주의 운동에 대한 '애정'을 갖고 복음주의 바깥에서 구 목사님을 비롯한 진보적인 복음주의 오피니언들께 감히 몇 마디 고언을 드리고 싶습니다. 물론 제가 "책 읽어주는 친구"인만큼, 촛불집회의 모습을 보면서 변화의 길을 모색하고 있는 복음주의 운동이 참고하면 좋을만한 책을 한 권 추천하면서 제 이야기를 해 보려 합니다. </p>
<p class="HStyle0"><br /></p>
<p class="HStyle0"><span style="FONT-WEIGHT: bold">"정상적 국민국가"의 시대가 저물고 있다</span></p>
<p class="HStyle0">제가 소개할 책은 이탈리아의 정치철학자 안토니오 네그리와 그의 제자 마이클 하트가 함께 쓴 <다중>이라는 책입니다. "다중"이란 인민이나 민중처럼 통일성으로 규정되거나, 군중처럼 획일성으로 규정될 수 없는, '수많은 차이들이 하나의 공통의 집단을 형성한 모습'을 일컫는 말입니다. 마치 촛불집회를 함께 하는 우리 시민들을 연상하게 하지요?^^ 이 책은 바로 이 "다중"을 지배하는 세계 지배체제(그것을 저자들은 <제국>이라고 부릅니다.)의 모습을 살피고, 그 지배에 저항하는 다중의 모습, 그리고 그들이 그렇게 저항하는 주체로 나타날 수 있는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문화적 조건들을 분석하는 책입니다. </p>
<p class="HStyle0"><br /></p>
<p class="HStyle0">저자들은 현재 세계는 더 이상 국민국가 단위에서 정당정치를 비롯한 "정치행위"를 통해 국민의 의사를 반영하고, 권력의 행사가 이루어지는 정상적인 국민국가들의 시대가 아니라고 이야기합니다. 즉, 자본주의가 전지구적으로 통합된 하나의 시장을 만들고 있듯이, 주권권력 역시도 더 이상 일국적 차원의 주권을 말할 수 없는 전지구적 주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세계시장과 세계주권, 이 둘은 사실상 하나입니다.) 전작인 <제국>이 세계시장의 측면에서 제국적 주권을 분석했다면, 이 책은 세계주권의 측면에서 제국을 분석하고 있습니다. </p>
<p class="HStyle0"><br /></p>
<p class="HStyle0">저자들이 분석한 제국적 주권의 모습은 "전쟁" 혹은 "전지구적 내전상태"입니다. 즉 그것이 민주주의가 되었든, 과두제나 군주제가 되었든 정상적인 정치가 기능하지 못하고, 전지구를 가로지르는 경찰-군대가 끊임없이 치안을 유지해야 하는 항구적인 "예외상태"가 바로 오늘날 지구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저자들은 "제국적 권력 하에서 고강도의 치안행위와 저강도의 전쟁 행위가 만난다."고 말합니다. 이라크에는 미국과 다른 여러 나라의 군대가 파견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작전"은 전쟁이라기보다는 사실상 "치안"행위에 가깝습니다. 다를 게 없습니다. 반대로 현재 한국 경찰은 시위대를 무력으로 짓밟고, 바리케이트를 치는 "치안행위"를 하고 있지만 그것은 사실상 저항자들을 상대로 한 "전쟁"과 비슷한 양상으로 전개됩니다. </p>
<p class="HStyle0"><br /></p>
<p class="HStyle0">이런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권력자들은 "안보"의 논리와 "정의로운 전쟁"론을 설파합니다. 우리의 안전한 삶을 위해서 테러리스트들을 소탕하자! 그러나 소탕되는 것은 테러리스트가 아니라 보통 가난한 이들입니다. 정작 테러리스트는 제대로 잡지도 못하는 이런 치안 전쟁들의 역할은 사실상 안보 선동을 통해 사람들로 하여금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도록 눈을 가리는 역할을 한다는 게 저자들의 주장입니다. 즉, 신자유주의에 입각한 지금의 세계체제(제국)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치안-전쟁이, 즉 이전에는 "예외적"이었던 상황이 항구적인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일국적 차원의 국가권력은 너무나 무능력합니다. 그토록 국민들이 재협상을 부르짖어도 "힘들다, 어렵다"를 반복하는 이명박 대통령의 모습은 단순히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라는 말만 가지고는 효과적으로 비판할 수 없습니다. 어찌보면 그는 제국의 총독에 불과할 지도 모릅니다. </p>
<p class="HStyle0"><br /></p>
<p class="HStyle0">저자들은 이런 점에서 단순히 하나의 국민국가를 "정상상태"로 되돌리려는 투쟁으로는 이러한 전지구적 시장과 권력에 제대로 맞설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이미 우리는 노무현 5년의 실험을 통해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제대로 맛본 바 있습니다. 저는 이런 점에서 과연 한국의 복음주의 운동이 정치참여 운동으로 나아가는 것에 대해 상당한 불만을 갖고 있습니다. 일단 - 죄송한 말씀이지만 - 잘 하지도 못하는 것 같고, 과연 새로운 전지구적 질서 하에서 기독교인들이 선택과 집중을 해야 할 영역이 '국민국가의 정치'인가 하는 의문이 들기 때문입니다. </p>
<p class="HStyle0"><br /></p>
<p class="HStyle0"><span style="FONT-WEIGHT: bold">전지구적 지배에 맞선 전지구적 다중</span></p>
<p class="HStyle0">이렇게 이야기하면 "그렇다면 뭘 해야 하느냐?"고 반문이 쏟아질 것입니다. 저자들이 바로 이 지점에서 강조하고자 하는 것이 전지구적인 주권권력에 맞선 전지구적 "다중"의 연대와 민주주의 운동입니다. 저자들은 현재의 주권권력이 강력하며 또 잔인하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다중의 저항이 더 강력하다고 주장합니다. 그것은 바로 이 제국은 "다중"이 만들어내는 생산물에 기생하면서 지배하고 있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p>
<p class="HStyle0"><br /></p>
<p class="HStyle0">즉, 제국은 언제가 다중이 노동현장과, 또 노동현장을 넘어 삶 시간 전체에서 생산하는 상품, 지식, 재화, 정서, 정보 등의 이른바 "공통적인 것"을 착취함으로써만 체제를 유지할 수 있는 허약한 주권체제라는 것입니다. 만일 다중이 이러한 "공통적인 것"의 착취를 거부하고, 스스로가 공통적인 것들의 생산과 재생산을 장악하려 할 때 제국의 주권권력은 위협을 느낄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p>
<p class="HStyle0"><br /></p>
<p class="HStyle0">좀 더 구체적인 예를 들어 보자면, 이를테면 인터넷 공간은 그 동안 자본이 자신의 덩치를 불리는 공간이었습니다. 특히 한국에서 IT산업의 발전은 비약적이었지요. 그들은 인터넷 공간에서 생산되는 수많은 정보, 정서, 라이프스타일 등을 절취함으로써 자본을 증식합니다. 그런데 이제 그 동일한 공간에서 사람들이 자신들이 생산한 이 공통적인 것들을 정부와 언론, 또 정부 정책에 기생하는 자본에 대한 저항을 위해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광우병, 민영화, 집시법 등등 수많은 정보들이 무료, 말하자면 공통의 것이 됩니다. 비단 인터넷뿐만 아니라 산업의 현장에서 노동자들이 파업을 통해 자본에 맞설 때, 시위 현장에서 자발적으로 김밥을 싸고, 오토바이를 타고 그것을 배달할 때 우리는 거기에서 공통적인 것을 생산하고 직접 통제하려는 다중의 저항을 만나게 됩니다.(물론 예로 든 것들은 매우 작은 예에 불과합니다.) </p>
<p class="HStyle0"><br /></p>
<p class="HStyle0">이런 점에서 다중은 결코 "단일한 집단"(인민)은 아니지만 한편으로 "공통적인 집단"입니다. 수많은 차이들을 가지고 있는 다중들은 또 한편으로는 공통적인 것들(가장 크게는 이 세계)을 함께 생산하고 있는 이들입니다. 저자들은 이전의 공산주의나 사회주의의 오류가 이 다중을 "노동계급"으로 한정한 데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그들이 만든 사회는 획일적인 독재 사회였던 것이겠지요. </p>
<p class="HStyle0"><br /></p>
<p class="HStyle0">촛불집회에 모인 사람들은 이 다중의 모습을 너무나도 잘 보여줍니다. 그 누구도 특권화되지 않는 평등한 네트워크가 이번 촛불시위의 특징입니다. 여고생, 예비군, 노동자, 유모차부대, 직업 운동가, 하이힐을 신고 나온 여성과 그녀의 손을 꼭 잡은 남자 친구, 할아버지, 장애인, 이주노동자... 그들의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받는 억압도, 그들의 삶이 생산해내는 것들도 각각 다 다르지만, 그들은 지금 광장에서 '공통의 요구'를 하고 있습니다. "안전한 먹거리를 달라", "공공성을 파괴하지 말라", "국가를 신뢰할 수 없다"는. 이 요구가 단순히 "대한민국 헌법 1조"라는 국민국가적 내용으로 나타난다 할지라도, 이미 그것은 곧바로 공통적이며, 전지구적인 요구로 나타납니다. 미국이 끈질기게 "쇠고기 문제는 한국의 국내문제다."라고 덮으려 하는 것은 오히려 이 문제가 결코 일국적인 문제가 아님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p>
<p class="HStyle0"><br /></p>
<p class="HStyle0"><span style="FONT-WEIGHT: bold">다중의 운동으로서의 "민주주의"</span></p>
<p class="HStyle0">저자들은 이러한 다중의 공통적인 것을 향한 운동을, 또 저항을 "민주주의"라는 오래된 용어를 통해 설명합니다. 저자들이 말하는 민주주의란 대의제 민주주의와도 다르고, 또 직접민주주의와도 다릅니다. 그것들이 "제도화 된" 정태적인 민주주의라면 저자들이 말하는 민주주의는 운동과정 중에 있는, "만들어 져야 할" 동태적인 민주주의라 할 수 있습니다. </p>
<p class="HStyle0"><br /></p>
<p class="HStyle0">즉 저자들은 쉽사리 어떤 정치적 시나리오나 유토피아적 상황을 그려놓고, 다중의 운동적 활력을 그 속으로 밀어넣는 것을 강하게 비판합니다. 민주주의란 바로 다중의 주권에 대항하는 운동 그 자체요, 또 공통적인 것을 생산하고 통제하려는 운동 그 자체라는 게 제가 이해한 저자들의 "민주주의"입니다. 저자들은 다중이 어떤 대의제 장치가 없이도 소통하는 능력을 가졌다고 말합니다. 물론 이것은 분명 60년대 이후 지속적으로 성장해 온 지식정보 자본주의와 인터넷 덕택이기도 합니다.(그리고 그것을 만들어낸 것도 또 다중입니다.) 저자들은 지금의 시대야말로 더 이상 대의제 정치나, 전위조직이 대중을 동원하는 형식의 운동방식이 불가능한 시대라고 이야기합니다. 때문에 저자들이 마지막으로 주문하는 것은 바로 민주주의라는 끊임없는 운동정치 속으로 과감히 들어가 "다중이 되자"는 것입니다. </p>
<p class="HStyle0"><br /></p>
<p class="HStyle0"><span style="FONT-WEIGHT: bold">복음주의 운동은 무엇을 할 것인가?</span></p>
<p class="HStyle0">저는 저자들의 진단과 제안이 복음주의 운동을 비롯한 기독교 사회운동에도 많은 시사점들을 던져준다고 생각합니다. 이번 촛불집회는 분명 어떤 대의제 민주주의로 환원되지 않는 대중의 욕구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국가는 더 이상 신뢰할 수 없는 존재가 되었습니다.(촛불 이전에도 그 불신은 투표 거부라는 소극적 행위로 나타난 바 있습니다.) 또한 국회에 있는 어떤 정당도 사실상 작금의 대중을 제대로 '대의'할 능력이 없습니다. </p>
<p class="HStyle0"><br /></p>
<p class="HStyle0">한편으로 이번 촛불집회는 기존의 시민운동과 사회운동에도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5월 2일 여고생들과 네티즌들이 이슈를 제기하자 운동단체들은 그제서야 부랴부랴 "광우병 국민대책위"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거리의 대중은 무려 1700여개의 단체가 함께 한 대책위임에도, 그들에게 권위를 부여하는 것을 한사코 거부했습니다. 그야말로 수평적인 네트워크들이 곳곳에 만들어졌고, 그 네트워크 안에서는 끊임없는 논쟁과 토론이 이어졌습니다. 대중의 지도부를 자처한 몇몇 단체는 호된 비판을 맞기도 했습니다. 저는 이러한 모습이 저자들이 말하는 움직이는 운동으로서의 "민주주의"에 상응한다고 생각합니다. </p>
<p class="HStyle0"><br /></p>
<p class="HStyle0">이미 많은 운동단체들이 자기 반성을 쏟아내고 있고, 특히 회원 없는 명망가 중심의 조직운동에 대한 자기 비판과 대중과 소통하지 못하는 운동권의 문화적 감성에 대한 비판들이 봇물처럼 터져 나오고 있습니다. 저는 이러한 움직임이 확산된다면 혹여라도 이 촛불이 잦아들고, 제국적 주권체제에 기생하는 국가권력이 그대로 존속하게 된다 하여도 아래로부터의 민주주의의 희망은 분명히 계속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p>
<p class="HStyle0"><br /></p>
<p class="HStyle0">복음주의 운동은 어떨까요? 저는 그 어느 운동단체보다도 복음주의 운동이 권위주의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물론 그것은 단지 복음주의 운동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 교회 전반의 문제입니다. 저는 가끔 선교단체들의 경배와 찬양 집회나 대형교회의 예배에서 파시스트 집회에 온 것 같은 섬뜩함을 느끼곤 합니다. 자기 주체적 신앙인으로서, 아래에서부터 한 몸 된 공동체를 이룬다기 보다는 무대 위의 인도자나 설교자의 열광적인 인도를 따르는 '청중'이 되어 그에게 가치판단을 맡겨버리는 획일적인 군중의 모습이 현재 한국교회 일반의 모습은 아닐까요? 진보적인 복음주의 운동이라고 별반 달라 보이지 않습니다. 보수파 목사들이 보수적인 설교로 대중을 동원한다면, 진보적인 목사들은 진보적인 설교로 대중을 동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래서 촛불집회가 보여준 "자유발언대"의 발랄함과 그것을 통해 진화하는 대중의 신앙적, 정치적 능력은 한국 교회 어디서도 찾을 수 없는 것은 아닐까요. 목회자들은 늘 "청년들이 너무 각성이 안 되고, 동원도 안 된다."고 푸념하시지만 스스로가 권위의 덫에 빠져 있는 것은 혹시 아닐런지요. </p>
<p class="HStyle0"><br /></p>
<p class="HStyle0">복음주의 운동의 의제들과 이슈들도 그렇습니다. 예전에 <88만원 세대> 서평에서도 썼듯이 통일운동이나 정치참여 운동이 중심의제가 될 때(특히 성서한국 등의 큰 운동이 그런 경향이 있다고 봅니다.) 그 운동은 명망가 중심, 386 목회자들 중심의 운동에 청년들이 동원되는 형식을 넘어서기 힘들지 않을까 합니다. 지금 복음주의 운동에 필요한 것은 위를 향하는 그런 운동이 아니라 저자의 표현을 빌리면 "다중"이 만들어나가고 있는 여러 가지의 민주주의 운동에 동참하는 것이 아닐까요. 사실상 몇몇 리더들 말고는 참여하기 힘든 정치운동의 틀을 벗어나 복음주의 청년들이나 교인들이 일상에서 느끼는 이슈들로부터 시작되는 운동들을 만들어나갈 수 있지 않을까요.(저는 개인적으로 환경, 평화, 학생인권, 생활협동조합, 공동체 운동 등이 종교운동의 블루오션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운동 방식에 있어서도 촛불집회의 "자유 발언대"로 상징되는, 대중들의 자발성과 창조력을 최대한 이끌어낼 수 있는 방식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p>
<p class="HStyle0"><br /></p>
<p class="HStyle0">구 목사님. 물론 제의 이런 비판은 제가 복음주의 바깥에 있기 때문에 편하게 던지는 것일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욱 구 목사님과 같이 복음주의 운동의 핵심에 계신 분들의 깊은 숙고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교회 안팎의 "다중"들은 단지 한국 보수교회의 "내용"만을 비판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들은 바로 권위 구조 전체에 대해 저항하고 있습니다. 진보적인 복음주의 운동이 여기에 대해 해답을 모색하지 않는다면 저는 한국 교회의 미래는 아마 없을 거라고, 시민사회와 동떨어진 곳에서 화석화된 늙은 종교로 남을 거라고 감히 전망합니다. </p>
<p class="HStyle0"><br /></p>
<p class="HStyle0">하느님은 결코 홀로 일하시지 아니하시고, 사람을 통해 일하십니다.(민중신학에선 그것을 "민중사건"이 곧 "하느님 사건"이다."라고 이야기합니다.) 하느님이 일하시는 그 사건의 현장 속에서 목사님과 자주 만나 뵙길 소망합니다. </p>
<p class="HStyle0"><br /></p>
<p class="HStyle0">구 목사님의 책 읽어주는 친구, 김강 드림. </p><iframe src="http://www.facebook.com/plugins/like.php?locale=ko_KR&href=http%3A%2F%2Fblog.jinbo.net%2Fminjung%2F&layout=standard&show_faces=true&width=445&action=like&colorscheme=light&" scrolling="no" frameborder="0" allowTransparency="true" style="border:none; overflow=hidden; width:445px; height:60px; margin-top:10px; margin-left:5px"></iframe><script type="text/javascript" src="http://tweetmix.net/js/widgetV2.js"></script><script type="text/javascript">if(("TMXW" in window)) { new TMXW.Widget({"shape":"default","target_url":"http://blog.jinbo.net/minjung/","widget_title":"\uc774 \uae00\uacfc \uc5f0\uad00\ub41c \ud2b8\uc717","default_msg":"","width":"445","height":"450","color_upper_back":"93C9E6","color_upper_text":"FFFFFF","color_tweet_back":"FFFFFF","color_border":"EBEBEB","color_text":"888888","color_link":"2ABBD4","widget_type":"1","btn_type":"1","max_messages":"10","is_show_avatar":"1"}).render().start();} </script><div class="buttons-bottom center jinboblog-i-like-this-buttons"><a class="button-jinboblog" href="javascript:void(0);" title="스크랩으로 글 링크를 저장하세요" onclick="recommend('2377',125,'/minjung','');"><img src="/plugins/../jplugins/ILikeThis/images/mini_chuchon.png" alt="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a><a class="button-twitter" href="http://twitter.com/home?status=http%3A%2F%2Fblog.jinbo.net%2Fminjung%2F125+%22%3C%EB%8B%A4%EC%A4%91%3E%20%EC%84%9C%ED%8F%89%2C%20%26quot%3B%EC%B4%9B%EB%B6%88%20%EC%95%9E%EC%97%90%EC%84%9C%2C%20%EC%A7%84%EB%B3%B4%EC%A0%81%20%EB%B3%B5%EC%9D%8C%EC%A3%BC%EC%9D%98%EC%9E%90%EB%93%A4%EA%BB%98%20%EB%93%9C%EB%A6%AC%EB%8A%94%20%EA%B3%A0%EC%96%B8%26quot%3B%20%5B%EB%B3%B5%EC%83%81%20213%ED%98%B8%5D%20%22" target="_blank" title="트위터로 리트윗합니다"><img src="/plugins/../jplugins/ILikeThis/images/twitter.png" alt="트위터로 리트윗하기" /></a><a class="button-facebook" href="http://www.facebook.com/sharer.php?u=http%3A%2F%2Fblog.jinbo.net%2Fminjung%2F125&t=%3C%EB%8B%A4%EC%A4%91%3E%20%EC%84%9C%ED%8F%89%2C%20%26quot%3B%EC%B4%9B%EB%B6%88%20%EC%95%9E%EC%97%90%EC%84%9C%2C%20%EC%A7%84%EB%B3%B4%EC%A0%81%20%EB%B3%B5%EC%9D%8C%EC%A3%BC%EC%9D%98%EC%9E%90%EB%93%A4%EA%BB%98%20%EB%93%9C%EB%A6%AC%EB%8A%94%20%EA%B3%A0%EC%96%B8%26quot%3B%20%5B%EB%B3%B5%EC%83%81%20213%ED%98%B8%5D%20" target="_blank" title="페이스북에 공유합니다"><img src="/plugins/../jplugins/ILikeThis/images/facebook.png" alt="페이스북에 공유하기" /></a><a class="button-delicious" href="http://delicious.com/save" onclick="window.open('http://delicious.com/save?v=5&noui&jump=close&url=http%3A%2F%2Fblog.jinbo.net%2Fminjung%2F125&title=%3C%EB%8B%A4%EC%A4%91%3E%20%EC%84%9C%ED%8F%89%2C%20%26quot%3B%EC%B4%9B%EB%B6%88%20%EC%95%9E%EC%97%90%EC%84%9C%2C%20%EC%A7%84%EB%B3%B4%EC%A0%81%20%EB%B3%B5%EC%9D%8C%EC%A3%BC%EC%9D%98%EC%9E%90%EB%93%A4%EA%BB%98%20%EB%93%9C%EB%A6%AC%EB%8A%94%20%EA%B3%A0%EC%96%B8%26quot%3B%20%5B%EB%B3%B5%EC%83%81%20213%ED%98%B8%5D%20','delicious','toolbar=no,width=550,height=550'); return false;" title="딜리셔스에 북마크합니다"><img src="/plugins/../jplugins/ILikeThis/images/delicious.png" alt="딜리셔스에 북마크" /></a></div><p><strong><a href="http://blog.jinbo.net/minjung/125?commentInput=true#entry125WriteComment">댓글 쓰기</a></strong></p>당신의 평화와 용서가 승리하기를! [복상 212호] 김강http://blog.jinbo.net/minjung/1242008-05-20T00:12:19+09:002008-05-20T00:12:19+09:00<!--FCKeditor--><p class="HStyle0">달라이 라마․빅터 챈, <용서>, 오래된미래 2004</p>
<p class="HStyle0"><br /></p>
<p class="HStyle0"><br /></p>
<p class="HStyle0"><span style="FONT-WEIGHT: bold">달라이 라마께.</span></p>
<p class="HStyle0"><br /></p>
<p class="HStyle0">한국어를 사용하는 서울 주민으로써 저는 지금 약간의 난감함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건 2인칭 호칭에 관한 것입니다. 고민 끝에 저는 그냥 “당신”이라는 호칭을 사용하기로 했습니다. 한국어 어법에서 이 말이 존경의 의미를 제대로 담아내지 못하는 게 사실이지만, 제가 이 말을 할 때에 최대한의 존경을 담고 있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달라이 라마와, 또 이 글을 읽는 독자 모두가 헤아려 주시길 부탁드립니다.</p>
<p class="HStyle0"><br /></p>
<p class="HStyle0">무엇보다 당신의 건강과 평화를 기원합니다. 전자의 것은 잘 모르겠지만, 후자의 것에 관한 한 당신은 지구상의 어떤 지도자들보다도, 또한 대다수의 종교인들보다도 더 높은 성취에 다다라 있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재의 정치 상황은 안타깝게도 ‘평화’와는 거리가 많이 먼 것처럼 보입니다. 올해 초에 시작된 티베트에서의 봉기와 잔인한 진압, 그리고 뒤를 이은 세계 각지에서의 올림픽 성화 갈등들 속에서 몇 번이나 당신께서 망명정부 지도자의 자리를 내놓으려 하셨다는 것을 외신보도를 통해 들었습니다. 멀리에서도 갈등과 관련된 이들 모두를 향한 당신의 안타까움과, 그것을 넘어서는 자비의 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p>
<p class="HStyle0"><br /></p>
<p class="HStyle0"><span style="FONT-WEIGHT: bold">어긋난 만남</span></p>
<p class="HStyle0">안타깝게도 저와 티베트, 그리고 티베트 불교와의 만남은 결코 아름다운 것은 아니었습니다. 중고등부 때 근본주의 단체가 주관한 연합수련회 따위에서 만나는 티베트 불교는 부패와 무능으로 점철된 그런 집단일 뿐이었습니다. “티베트나 몽골, 중국 서북부는 왜 가난한가? 불교 때문이다. 그들은 부패하고 기득권을 놓지 않으며 미신을 조장한다. 우리는 그들을 복음으로 정복하고 그들에게 문명의 혜택을 주어야 한다.” 이것이 저에게 티베트를 알려준 선교사들의 설교 내용이었습니다. </p>
<p class="HStyle0"><br /></p>
<p class="HStyle0">2000년 경에 중국 서북부의 청해성에 단기 선교를 갔을 때 저는 처음으로 직접 티베트 불교의 승려들과 티베트족 사람들을 접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만남을 통해서도 제 생각이 변할 수는 없었습니다. “단기선교여행”이라는 배치 속에서 순박한 티베트족 사람들은 “불쌍한 사람”이고, 라싸까지 오체투지를 하며 걸어가는 신실한 불자들은 “미신에 빠진 죄인들”이고, 오고가며 마주치던 스님들은 “사단의 종”일 뿐이었습니다. 그에 대해 우리는 가난과 미신의 땅에 복음을 들고 온 위대한 사역자인 것처럼 생각했었지요. </p>
<p class="HStyle0"><br /></p>
<p class="HStyle0">아마도 그 때 저의 인식이 전적으로 잘못되기만 한 건 아닐 것입니다. 한국의 기독교 안에도 수많은 문제들이 존재하듯이 티베트 불교 안에도 문제점들이나 본래의 종교의 모습에서 일탈된 모습이 없을 수 없겠지요. 그러나 근본주의와 소제국주의가 결합된 제 인식은 티베트와 티베트불교의 장점과 선량함 까지도 폄훼하도록 하며, 티베트를 그들 자신의 관점에서, 즉 ‘내재적으로’ 바라볼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결코 티베트의 신실한 불교도들이 자신들의 신앙을 통해 어떤 방식으로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지, 그들의 종교행위의 목적과 의미가 무엇인지 이해하려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우상숭배라고 편협하게 이해했을 뿐이었습니다. </p>
<p class="HStyle0"><br /></p>
<p class="HStyle0">몇 년이 지나 세계 종교의 여러 모습들과, 또 불교에 대해 조금씩 공부하기 시작하면서 저의 지난날의 사고방식을 참 많이 반성하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그런 편협한 인식이 얼마나 많은 세계의 갈등과 폭력을 낳고 있는지! </p>
<p class="HStyle0"><br /></p>
<p class="HStyle0"><span style="FONT-WEIGHT: bold">상업적 기획의 한 복판에서 “진리”를 만나다. </span></p>
<p class="HStyle0">당신의 친구인 중국계 미국인 빅터 챈이 쓴 이 책은 제가 그런 반성의 발걸음을 내딛게 해준 책 중 하나입니다. 저자와 당신과의 대화와 만남의 내밀한 기록을 담은 이 책을 저는 두 번 읽었습니다. 처음은 티베트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는, 근본주의자에서 막 벗어나려는 그 시점이었고, 그리고 이번에 티베트 민중의 항쟁을 보면서 다른 여러 자료들과 함께 다시 읽게 되었습니다. 첫 번째 읽었을 때도 많은 감동을 받았었지만 이번에 중국과 티베트와의 관계, 그 권력의 폭력성, 당신과 티베트 민중의 고통의 현대사를 어느 정도라도 공부하면서 읽었을 때의 감동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세상에 이 사람은 이런 역사의 경험 속에서도 용서와 자비를 말할 수 있단 말인가!”</p>
<p class="HStyle0"><br /></p>
<p class="HStyle0">사실 장이 넘어갈 때마다 박혀 있는 아름다운 티베트 사람들의 사진이며, 상당히 내밀히 들여다본 당신의 사생활(?)의 모습들이며, 또 속도감 있고 맛깔난 문체 등은 이 책이 세심하게 기획된 상업적 작품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특히 한국에도 여러 권 번역된 바 있는 당신의 깊이 있고, 때론 난해한 강론들과 비교해보면 더욱 그렇습니다. 고백하건데 저는 정말 이런 책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아마 이 책이 무언가 읽을거리가 간절했던 그 때에 20% 할인 딱지를 붙이고 제 눈앞에 있지 않았다면 결코 사보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책을 통해서도 마음의 충격과 깊은 돌이킴의 경험을 할 수 있었던 건, 상업성을 뛰어넘는 당신의 인격과 삶의 모습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도저히 냉소할 수 없는 진리의 무게가 상업성의 껍질을 뚫고 제게 전해져 왔던 것이지요. </p>
<p class="HStyle0"><br /></p>
<p class="HStyle0">그 진리란 “모든 존재는 서로 의존하며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를 용서하고 자비를 베풀어야 합니다.”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단지 말 뿐이라면 그게 제게 감동을 주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당신께서 그 진리를 몸소 몸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보이실 때 마침내 그 진리는 ‘진리’가 되어 세상의 많은 사람들의 삶에 다가가는 것일 테지요. </p>
<p class="HStyle0"><br /></p>
<p class="HStyle0"><span style="FONT-WEIGHT: bold">민족을 넘어 세계로</span></p>
<p class="HStyle0">이 책에는 당신의 상당히 내밀한 수행 경험담이며, 병마로 쓰러졌던 몇 년 전의 모습, 또 많은 ‘인간적인’ 풍모 등이 가까운 거리에서 그려지고 있습니다만, 그런 것보다도 제게 상호의존과 용서의 가르침과 더불어 의미있게 다가왔던 것은 “세계인”으로서의 당신의 모습이었습니다. 망명 이후 당신께서 세계를 다닐 때마다 티베트 민중의 문제를 중심에 놓으셨다면 오히려 세계는 당신을 그토록 주목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계 곳곳의 수많은 강론처에서 당신은 티베트라는 한 민족공동체의 지도자를 넘어 대중의 영적 스승의 역할을 감당하셨습니다. 전쟁과 폭력, 가난과 고통의 소식을 접할 때 마다, 그 일이 티베트의 일인지 아닌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슬픔과 자비의 마음을 보이시는 당신의 모습에서 저는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p>
<p class="HStyle0"><br /></p>
<p class="HStyle0">“나의 주된 관심은 티베트라는 국가나 티베트 민족에 있지 않습니다...... 티베트의 영적 전통을 보호하는 것은 단지 티베트 인들을 위한 것만이 아닙니다. 더 넓은 인류 공동체를 위한 것입니다. 특히 우리의 형제 자매인 중국인들을 위해 필요합니다.”(114쪽)</p>
<p class="HStyle0"><br /></p>
<p class="HStyle0">안타깝게도 최근 중국은 더욱 더 그 반대의 길로 가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전 정권에서 이어진 민족주의 교육을 받고 자라난 많은 젊은이들이 중화주의의 온/오프라인 폭력으로 정부의 티베트 탄압을 옹호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론 중국의 젊은 세대들은 이전 세대보다 더 높은 인권의식과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을 가진 것도 사실입니다. 당신께서 설파하시는 “공(空)”의 가르침의 위대함은 바로 무한한 변화를 긍정한다는 것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본래적으로 폭력적이거나 평화로운 이들은 없다는 것을 저는 당신의 가르침을 통해 배웁니다. 지금 저렇게 폭력으로 민족주의를 옹호하는 이들이 언젠가는 다른 변화의 조건 속에서 평화를 옹호하는 이들로 변화될 수 있음을 기대합니다. </p>
<p class="HStyle0"><br /></p>
<p class="HStyle0"><span style="FONT-WEIGHT: bold">비폭력과 평화</span></p>
<p class="HStyle0">저는 한편으로 이 책을 “기독교 정치”를 한답시고 총선에 나온 목사님들께 읽혀드리고 싶었습니다. “좌파정권의 뿌리를 뽑자.”, “동성애자들을 차별할 수 없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다.”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를 믿는다는 이들이 쏟아내는 증오와 폭력의 구호들을 들을 때마다 “중국인들의 존재 속엔 티베트인들이 있고, 티베트인들의 존재 속에 중국인들이 있습니다.”라는 당신의 말을 떠올리곤 했습니다. 50년대 후반에 벌어진 무수한 티베트 민중에 대한 학살과, 그 뒤로 계속된 식민정책을 바깥에서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당신께서 먼저 용서를 말하며 중국과의 공존을 이야기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 우리는 잘 압니다. 그러나 힘든 만큼 당신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얼마나 세계의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지도 말입니다. 그 진정성의 무게만큼이나 “기독교 정치”를 한다는 목사님들의 가벼움을 느끼게 됩니다. </p>
<p class="HStyle0"><br /></p>
<p class="HStyle0">저는 종교의 정치 참여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신정(神政)조차도 특별한 맥락 속에서 긍정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런 특별한 맥락이란, 그런 정치의 지도자들과, 함께 하는 민중들이 당신만큼의 영성의 무게를 가지고 있을 때란 생각이 듭니다. 종교인들이 세속의 사람들보다도 더 편협하고, 더 반인권적인 인식과 영성을 지니고 있다면 그들은 결코 그들에게 주어진 권력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스스로 무너질 것입니다. 그리고 무너지기까지 얼마나 많은 민중이 고통을 받아야 할지는 가늠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사례를 수천 년의 역사 속에서 너무도 많이 봐 왔습니다. </p>
<p class="HStyle0"><br /></p>
<p class="HStyle0">당신과 또 티베트 민중의 비폭력 저항은 그런 수천 년의 역사도 교정될 수 있다는 희망을 우리에게 주고 있습니다. 물론 모두가 당신의 비폭력과 상호공존 정책을 찬성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올해 초 결국 폭력적으로 터져 나온 봉기와 또 그것에 대한 더 큰 폭력적 진압은 우리에게 많은 슬픔을 남겼습니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여전히 많은 티베트 민중들은 용서와 비폭력으로 중국의 제국주의적 폭력에 저항하고 있음을 저는 믿습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중에 중국 측에서 대화를 재개하기도 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진정한 대화가 이루어지길 기대합니다. 당신의 평화와 용서가 폭력에 승리하기를!</p>
<p class="HStyle0"><br /></p>
<p class="HStyle0">이 책을 읽으며 한편으로 감동을 받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마음 한구석이 아파옵니다. 그건 아마도 현재 한국 교회의 천박한 영적 수준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저 또한 그 꼴을 빚어가는 데에 일조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부디 한국 교회가 자신들만의 울타리를 벗어나 세계를 치유할 희망의 메시지를 몸으로 살아낼 수 있는 영성을 갖추기를 간절히 고대합니다. 언젠가 꼭 한국에 방문하셔서 우리에게도 귀한 가르침을 나누어 주실 수 있게 되길 희망합니다.</p>
<p class="HStyle0"><br /></p>
<p class="HStyle0">평화를 기원하며, 당신의 책읽어주는 친구 김강 올림.</p><iframe src="http://www.facebook.com/plugins/like.php?locale=ko_KR&href=http%3A%2F%2Fblog.jinbo.net%2Fminjung%2F&layout=standard&show_faces=true&width=445&action=like&colorscheme=light&" scrolling="no" frameborder="0" allowTransparency="true" style="border:none; overflow=hidden; width:445px; height:60px; margin-top:10px; margin-left:5px"></iframe><script type="text/javascript" src="http://tweetmix.net/js/widgetV2.js"></script><script type="text/javascript">if(("TMXW" in window)) { new TMXW.Widget({"shape":"default","target_url":"http://blog.jinbo.net/minjung/","widget_title":"\uc774 \uae00\uacfc \uc5f0\uad00\ub41c \ud2b8\uc717","default_msg":"","width":"445","height":"450","color_upper_back":"93C9E6","color_upper_text":"FFFFFF","color_tweet_back":"FFFFFF","color_border":"EBEBEB","color_text":"888888","color_link":"2ABBD4","widget_type":"1","btn_type":"1","max_messages":"10","is_show_avatar":"1"}).render().start();} </script><div class="buttons-bottom center jinboblog-i-like-this-buttons"><a class="button-jinboblog" href="javascript:void(0);" title="스크랩으로 글 링크를 저장하세요" onclick="recommend('2377',124,'/minjung','');"><img src="/plugins/../jplugins/ILikeThis/images/mini_chuchon.png" alt="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a><a class="button-twitter" href="http://twitter.com/home?status=http%3A%2F%2Fblog.jinbo.net%2Fminjung%2F124+%22%EB%8B%B9%EC%8B%A0%EC%9D%98%20%ED%8F%89%ED%99%94%EC%99%80%20%EC%9A%A9%EC%84%9C%EA%B0%80%20%EC%8A%B9%EB%A6%AC%ED%95%98%EA%B8%B0%EB%A5%BC%21%20%5B%EB%B3%B5%EC%83%81%20212%ED%98%B8%5D%20%22" target="_blank" title="트위터로 리트윗합니다"><img src="/plugins/../jplugins/ILikeThis/images/twitter.png" alt="트위터로 리트윗하기" /></a><a class="button-facebook" href="http://www.facebook.com/sharer.php?u=http%3A%2F%2Fblog.jinbo.net%2Fminjung%2F124&t=%EB%8B%B9%EC%8B%A0%EC%9D%98%20%ED%8F%89%ED%99%94%EC%99%80%20%EC%9A%A9%EC%84%9C%EA%B0%80%20%EC%8A%B9%EB%A6%AC%ED%95%98%EA%B8%B0%EB%A5%BC%21%20%5B%EB%B3%B5%EC%83%81%20212%ED%98%B8%5D%20" target="_blank" title="페이스북에 공유합니다"><img src="/plugins/../jplugins/ILikeThis/images/facebook.png" alt="페이스북에 공유하기" /></a><a class="button-delicious" href="http://delicious.com/save" onclick="window.open('http://delicious.com/save?v=5&noui&jump=close&url=http%3A%2F%2Fblog.jinbo.net%2Fminjung%2F124&title=%EB%8B%B9%EC%8B%A0%EC%9D%98%20%ED%8F%89%ED%99%94%EC%99%80%20%EC%9A%A9%EC%84%9C%EA%B0%80%20%EC%8A%B9%EB%A6%AC%ED%95%98%EA%B8%B0%EB%A5%BC%21%20%5B%EB%B3%B5%EC%83%81%20212%ED%98%B8%5D%20','delicious','toolbar=no,width=550,height=550'); return false;" title="딜리셔스에 북마크합니다"><img src="/plugins/../jplugins/ILikeThis/images/delicious.png" alt="딜리셔스에 북마크" /></a></div><p><strong><a href="http://blog.jinbo.net/minjung/124?commentInput=true#entry124WriteComment">댓글 쓰기</a></strong></p>“실용주의”를 믿숩니까! [복상 211호]김강http://blog.jinbo.net/minjung/1232008-04-19T00:10:35+09:002008-04-19T00:10:35+09:00<!--FCKeditor--><p class="HStyle0">더글러스 러미스, <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 녹색평론사 2002</p>
<p class="HStyle0"><br /></p>
<p class="HStyle0"><br /></p>
<p class="HStyle0"><span style="FONT-WEIGHT: bold">이명박 대통령님께.</span></p>
<p class="HStyle0"><br /></p>
<p class="HStyle0">늦게나마 취임을 축하드립니다. 더불어 여당의 총선 압승을 축하드립니다. 한나라당뿐만 아니라 보수주의 정당인 자유선진당과 제게는 코미디언 집단으로만 보이던 친박연대와 무소속 보수정치인들까지 합치면 그야말로 독재도 가능한 보수의 시대가 열린 듯합니다. </p>
<p class="HStyle0"><br /></p>
<p class="HStyle0">그러나 대통령님께는 축하할 일이 제게는 어째 좀 부담스럽게 느껴지네요. 당선 이후부터 지금까지 인수위와 새 정부를 거쳐 발표되는 정책을 접할 때마다 저는 꼭 누군가가 무거운 돌덩이를 올려놓고 누르는 것처럼 가슴이 답답해지곤 합니다. 한반도 대운하나 의료의 산업화, 영어몰입교육 같은 잘 알려지고 커다란 정책에서부터 파업권 제한, 집회 시 체포전담조 투입, 법인세 인하, 공공부문 구조조정, 일제고사 부활 등을 비롯한 새 정부의 거의 모든 정책이 제가 원하는 세상과는 너무나도 다른 방향으로 대한민국을 끌고 가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p>
<p class="HStyle0"><br /></p>
<p class="HStyle0">물론 제가 원하는 세상의 모습을 대통령님께 강요할 순 없을 겁니다. 어찌 되었든 대통령님은 바로 그런 정책들을 공약으로 내걸고 선거에 나서서 “국민의 지지”를 받으신 거니까요. 하지만 그럼에도 저는 이 지면을 빌어서 대통령님께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그것은 대통령님의 가장 큰 구호였던 “실용주의”라는 말 때문입니다. 자신의 정책을 “실용주의”로 표방하면서 다른 대안을 제시하는 사람들의 의견을 “이념”이나 한갓 “이상주의”로 몰아붙이는 대통령님과 새 정부의 인식과 주장에 동의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오늘 대통령님께 소개해드릴 이 책, <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를 읽으면서 대통령님의 “실용주의”야 말로 참으로 “이념”이나 한갓 “이상주의”일 뿐이라고 생각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p>
<p class="HStyle0"><br /></p>
<p class="HStyle0"><span style="FONT-WEIGHT: bold">타이타닉 현실주의, 혹은 ‘실용주의’</span></p>
<p class="HStyle0">어떤 정책을 “실용주의”라고 할 땐 그것이 현실의 문제를 실질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 것입니다. 즉, 실용주의는 현실에 대한 적합한 판단을 기초로 하는 “현실주의”이기도 한 것입니다. 현실에 기반을 두지 않고, 실용은 있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대통령님이 바라보는 현실과 이 책의 저자가 바라보는 ‘현실’은 많이 다른 것 같습니다. 저자는 대통령님과 같은 현실인식을 “타이타닉 현실주의”라고 부릅니다.(이걸 타이타닉 실용주의라 불러도 우리의 이야기에서 어긋남은 없을 듯합니다.) </p>
<p class="HStyle0"><br /></p>
<p class="HStyle0">저자는 타이타닉 호는 빙산을 향해 질주하고 있었고, 그 빙산은 현실로 존재했고, 마침내 그 배가 침몰한 것도 현실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 배에 타고 있던 사람들은 “배를 멈추어야 한다.”는 경고를 “비현실주의적”이라고 생각합니다. “타이타닉호는 전진하도록 되어 있다”는 것, 그것이 멈추면 배에 타고 있는 사람들 각자의 일거리가 없어질 것이며, 어찌해야 좋을지 모르는 상황이 올 것이라는 것, 그것이 저자가 말하는 “타이타닉 현실주의”입니다. 갑자기 웬 배 이야기냐구요? 대통령님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이 지구와, 지구상의 국가들이 “닥치고 계속 성장”을 하다가는 언젠가 파괴적인 결과를 낳을 것이 불 보듯 뻔하다는 “명백한 현실”에서는 눈을 돌리고 “계속 경제는 성장해야 하는 것이 현실이다”라고 주장하며 지구라는 타이타닉의 속도를 올리고 있는 가짜 현실주의를 비판하려는 비유가 아닐는지요.</p>
<p class="HStyle0"><br /></p>
<p class="HStyle0"><span style="FONT-WEIGHT: bold">경제 성장, 혹은 발전이라는 허상</span></p>
<p class="HStyle0">편집자와의 대담을 기초로 쓰인 이 책은 그래서인지 매우 친절한 강의의 형태로 이 “타이타닉 현실주의”에 대한 비판과, “진짜 현실주의”적인 대안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타이타닉 현실주의의 이유를 타이타닉 호 바깥에 아무것도 없다는 착각에 기인한 것이라 말합니다. 이 배가 세계이며, 배 바깥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하는 사고방식이 곧 “현실주의” 경제학자들의 논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타이타닉 호 바깥에는 바다와 빙산이 있고, 세계 경제의 바깥에는 경제적 합리성만으론 완전히 파악할 수 없는 “정치”의 세계와 자연환경이 있습니다. 더구나 세계경제 시스템의 “빙산”은 장래에 기다리고 있는 일이 아니라 이미 시작된 일이라는 것이 저자의 주장입니다. 이 책이 써진 지 10여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온난화”로 대표되는 지구환경의 악화를 눈으로 목도하고 있습니다. </p>
<p class="HStyle0"><br /></p>
<p class="HStyle0">대체 사람들은 언제부터 이런 “타이타닉 현실주의”를 “현실”로 착각하면서 국가와 세계를 움직여 왔을까요? 흥미롭게도 저자는 이런 식의 발전 이데올로기가 분명하게 태어난 순간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바로 1949년 1월 20일,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의 연설이 그 순간입니다. 그는 취임 연설에서 “미국의 새로운 정책”을 이야기하면서 “미개발의 나라들에 대해 경제 원조를 행하고 투자를 하여 발전시킨다.”는, 오늘날에는 너무나 익숙해진 정책을 발표합니다. 그러나 저자는 이 연설이 “미개발 국가”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한 공식문서라고 이야기합니다. 더불어 이 연설에서 본디 자동사인 develop(발전하다)라는 단어가 타동사(발전시키다)로 문법에 맞지 않게 쓰였다는 것을 지적합니다. </p>
<p class="HStyle0"><br /></p>
<p class="HStyle0">저자는 본래 발전이라는 건, 하나의 틀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고, 각 개체(여기서는 나라들)의 내재적인 가능성이 개화되는 것을 뜻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트루먼 대통령의 이 연설과, 이어지는 미국의 세계정책은 발전을 누군가(특히 미국)에 의해 주어지는 것으로, 하나의 동일한 기준과 틀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만들어버렸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시점 이후로 우리가 아는 “경제 규모가 커지는 것이 바로 발전”이라는 이데올로기가 만들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이전 세기의 식민주의, 제국주의가 파국을 맞은 지점에서 새롭게 세계를 지배하는 방법이 되었습니다. </p>
<p class="HStyle0"><br /></p>
<p class="HStyle0">한국은 이러한 정책의 즉각적인 수혜자였습니다. 대통령님이라면 잘 기억하시겠지만, 50년대~60년대를 이어가며 우리는 “원조경제”의 시대를 살았고, 뒤 이은 장면과 박정희 정부의 “경제 개발 계획”에 의해 끊임없는 성장 정책을 취해왔습니다. 물론 이 “개발”과 “성장”은 국민의 다양성과 자율, 복지에 입각한 것이 아니라 단 하나의 척도,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에 입각한 것이었지요. 그러한 성장 정책의 최신판이 대통령님이 “실용주의”라고 부르는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일 것입니다. 즉 정치와 경제와 사회 등 모든 삶을 민주주의원리가 아닌 시장원리에 따라 재편하자는 것이지요. </p>
<p class="HStyle0"><br /></p>
<p class="HStyle0">그리고 이 실용주의는 바로 “가난을 벗어나려면 경제가 성장해야 하며, 성장을 멈추지 말고 가속해야 한다.”는 타이타닉 현실주의에 기반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실상은 다르다고 이야기합니다.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대표적인 ‘실상’의 예는 바로 “슬럼”입니다. 우리는 높은 빌딩, 비행장등 콘크리트와 유리, 철근으로 된 건물들을 보면서 그것을 “발전”의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달동네와 쪽방 등을 보면서는 아직 청산되지 못한 과거의 유물일고 생각하지요. 하지만 저자는 오히려 “슬럼”에서 우리는 가장 근대적인 건축재료들을 발견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블록, 플라스틱, 베니어판 등, 그것이 주워온 것일지는 몰라도 슬럼은 결코 과거의 흔적이 아니라 초현대적인 현상이라는 것이죠. 저자는 근대건축을 보기 위해서는 고층빌딩과 슬럼을 동시에 봐야 한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슬럼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하는 일이 곧 고층빌딩의 청소부, 창문 닦기, 부자들의 하인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경제발전이란 ‘슬럼세계’를 ‘고층빌딩 세계’로 조금씩 변신시키는 과정이라고 하는 건 착각에 불과합니다. 반대로 경제발전이라는 획일적인 과정을 따라 예전의 ‘다양한’ 사회가 ‘고층빌딩과 슬럼의 세계’로 바뀐 것이 20세기의 역사적 사실인 것입니다.</p>
<p class="HStyle0"><br /></p>
<p class="HStyle0">이런 고층빌딩과 슬럼의 세계로 모든 나라들이 나아갈수록 가난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끊임없이 재생산됩니다. 제3세계에서는 절대적 빈곤이 더욱 늘어나고, 1세계에서도 절대적 빈곤과 상대적 빈곤(이는 자본주의에서는 필연적입니다.)이 계속해서 늘어납니다. 아마 이명박 정부 하에서 우리가 “양극화”라고 부르는, 이 상대적 빈곤의 증가는 이전보다 더 빠른 속도로 계속될 것입니다. 부자들이 늘어나는 속도 만큼이나요. </p>
<p class="HStyle0"><br /></p>
<p class="HStyle0">그러나 저자는 이것보다도 더 큰 문제가 있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바로 이 경제 체제 혹은 사회 바깥의 “자연”입니다. 왜냐하면 경제체제라는 파이는 계속 커질지 모르지만 자연은 결코 커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한국은 경제규모가 엄청나게 큰 나라 중 하나이지만 환경과 생태에 대한 인식은 너무나도 낮은 수준입니다. 엄청난 양의 에너지를 소비하고, 이산화탄소를 뿜어대는 지금의 경제를 유지하다가는, 게다가 여기에 더하여 재앙이 불 보듯 뻔한 새만금 매립과 대운하 건설을 진행한다면 자연은 거대한 빙산이 되어 대한민국이라는 타이타닉호에 부딪혀 올 것입니다. 결국 이런 점에서 대통령님의 “실용주의”는 하나도 “실용적”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가장 신비적이고 비현실적인 이데올로기에 불과합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현실을 직시하는 것, 즉 빈곤의 증가가 가속화되고, 빈곤하지 않은 사람들도 야근에 시달리고, 지구는 갈수록 온난화되고, 그래서 재앙이 멀지 않은 미래에 있을 거라는 그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닐까요. 그래서 이 현실로부터 우리의 삶을 “실용적으로” 계획해야 하는 게 아닐까요. </p>
<p class="HStyle0"><br /></p>
<p class="HStyle0"><span style="FONT-WEIGHT: bold">경제 관료의 지배에서 대중의 민주주의적 자치로</span></p>
<p class="HStyle0">그렇다면 저자가 보는 ‘실용주의’란 무얼까요. 빈곤의 세계화와 임박한 자연재앙이라는 현실을 ‘실용적으로’ 극복하는 길은 무얼까요. 저자는 그 길이 “민주주의”라고 이야기합니다. 너무도 식상한 말이라구요? 아닙니다. 저자가 이야기하는 “민주주의”는 4년에 한 번씩 투표해서 “훌륭한 일꾼”을 뽑는 그런 ‘대의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멉니다. 더불어 민주주의 사회에서도 시장원리에 입각해서 움직이는 “경제”와, 권위주의에 의해 움직이는 “군대”조차도 민주주의의 원리에 의해 움직이게 하자는 게 저자의 주장입니다. </p>
<p class="HStyle0"><br /></p>
<p class="HStyle0">민주주의란 무얼까요? 저자는 “선거”는 결코 민주주의가 아니었다고 말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선거를 통해서는 보통 가진 사람, 잘난 사람, 많이 배운 사람들만이 정치가와 관료가 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민주주의의 시초라는 고대 그리스에서도 민주주의란 선거가 아니라 “제비뽑기”였다고 말합니다. 누구나 일정 기간 동안 공직에 오를 수 있는 것이 민주주의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누구나가 공직에 올라서 임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수양을 쉬지 않고, 민주주의적 역량을 몸에 익힘으로써 대중의 수준 자체가 높은 사회가 곧 민주주의 사회의 이상이라는 것입니다. </p>
<p class="HStyle0"><br /></p>
<p class="HStyle0">그러나 근대 시기의 “민주주의자”들은 이내 선거를 도입하고, 민주주의를 대의민주주의로 바꾸어버립니다. 그리하여 대중은 그저 유권자로서 선거에 참여하고, 선거에서 뽑힌 엘리트들이 관료들을 통해 국가를 운영하는 제도가 민주주의인 것처럼 바뀌었다고 말합니다. 바로 이것이 경제원리가 모든 삶을 지배하게 된 원인이라고 말합니다. 저자는 지금의 민주주의 사회 안에서도 철저하게 비민주적으로 운용되는 부문들이 있다고 말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경제와 군대입니다. 이 둘은 다른 것 같지만 한편으로는 특히 회사와 군대라는 양 조직을 비교할 때 매우 유사하다고 말합니다. 곧 상명하복과 관료제라는 것이지요. 민주주의는 개인과 공동체의 자율, 자치에 의해 움직이는 것임에도 시민들이 일상의 대부분을 보내는 회사는 자율과 자치가 아닌 상명하복과 관료제가 지배한다는 것입니다. 민주주의를 살아가는 시간보다 경제원리와 권위주의를 살아가는 시간이 더 많은 이런 삶을 민주주의라고 부를 수는 없을 것입니다.</p>
<p class="HStyle0"><br /></p>
<p class="HStyle0">대통령님이 아직 대권주자 중 한 명이던 시절에 저는 대통령님의 한 마디를 듣고서 “나는 죽었다 깨어나도 저 사람에게 투표할 수는 없다.”고 다짐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 한 마디는 이런 거였습니다. “투표율이 낮고 국민들이 정치에 관심 없는 것이 선진국이라는 증표이다. 국민이 정치에 관심이 많으면 갈등만 생기고 나라가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국민들은 생업에 열심히 종사하고 정치는 전문가들이 맡아야 나라가 제대로 움직인다.” 세상에 이런 주장을 백주대낮에 자랑스럽게 하는 사람이 대통령 후보로 나설 수 있는가 싶을 만큼 반민주적인 발언이었다고 지금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p>
<p class="HStyle0"><br /></p>
<p class="HStyle0">바로 대통령님과 같은 그런 인식이 타이타닉 현실주의를 낳는 요인입니다. 정치인들이 “정치는 우리가 한다. 나머지는 시장원리에 따른다.”고 책임을 방기할 때, 대중들이 “우리는 그저 먹고 살기 바빠. 국가 운영은 전문가들이 알아서 잘 하겠지.”라고 하면서 그 책임을 방기할 때 타이타닉 현실주의가 빙산을 향해 바다를 질주하게 되는 것입니다. </p>
<p class="HStyle0"><br /></p>
<p class="HStyle0"><span style="FONT-WEIGHT: bold">우리는 저항할 것입니다</span></p>
<p class="HStyle0">그러나 이 지점에서 가장 “실용적”인 것은 바로 경제가 시장원리에 따라 움직이지 못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군대가 권위주의에 따라 움직이지 못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율과 자치, 협동이라는 민주주의 원리에 따라 대중들 스스로가 자신들의 삶을 기획하고, 미래를 준비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물론 저자는 지금 곧바로 대의민주주의에서 직접민주주의로 제도를 전환하자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불가능할 것입니다. 그러나 당장 아래에서부터, 대중들로부터 이러한 자율과 자치, 협동의 문화와 제도들을 만들어갈 수는 있다고 저자는 주장합니다. 지면상 다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저자는 여러 가지 예를 통해 위기로 보이는 지금이 민주주의의 기회라는 주장을 펼칩니다.</p>
<p class="HStyle0"><br /></p>
<p class="HStyle0">저는 이 책을 읽으면서, 대통령님이 집권하는 앞으로의 5년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깊이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도 국회와 청와대를 보수주의 정치인들이 장악했다고 그저 우울해하고, 실망만 하는 바보가 되진 않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앞으로도 얼마든지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즐거운 일들이 제게는 많이 남아 있습니다. 무엇보다 저는 이제 대통령님과 싸울 것입니다. 대통령님이 주장하는 경제의 논리, 죽음의 논리에 맞서 저는 끈질기고 즐겁고 행복하게 제 삶을 이웃과 더불어 살아가렵니다. 당장 이번 주에라도 생활협동조합에 가입하고, 공정무역으로 들어온 커피를 마시며, 시시때때로 거리의 친구들과 연대하면서 민주주의를 살아보렵니다. 이명박 대통령님, 실용주의를 믿쑵니까? 저는 참으로 믿쑵니다. 그 실용주의를 저는 민주주의라고 부릅니다.</p><iframe src="http://www.facebook.com/plugins/like.php?locale=ko_KR&href=http%3A%2F%2Fblog.jinbo.net%2Fminjung%2F&layout=standard&show_faces=true&width=445&action=like&colorscheme=light&" scrolling="no" frameborder="0" allowTransparency="true" style="border:none; overflow=hidden; width:445px; height:60px; margin-top:10px; margin-left:5px"></iframe><script type="text/javascript" src="http://tweetmix.net/js/widgetV2.js"></script><script type="text/javascript">if(("TMXW" in window)) { new TMXW.Widget({"shape":"default","target_url":"http://blog.jinbo.net/minjung/","widget_title":"\uc774 \uae00\uacfc \uc5f0\uad00\ub41c \ud2b8\uc717","default_msg":"","width":"445","height":"450","color_upper_back":"93C9E6","color_upper_text":"FFFFFF","color_tweet_back":"FFFFFF","color_border":"EBEBEB","color_text":"888888","color_link":"2ABBD4","widget_type":"1","btn_type":"1","max_messages":"10","is_show_avatar":"1"}).render().start();} </script><div class="buttons-bottom center jinboblog-i-like-this-buttons"><a class="button-jinboblog" href="javascript:void(0);" title="스크랩으로 글 링크를 저장하세요" onclick="recommend('2377',123,'/minjung','');"><img src="/plugins/../jplugins/ILikeThis/images/mini_chuchon.png" alt="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a><a class="button-twitter" href="http://twitter.com/home?status=http%3A%2F%2Fblog.jinbo.net%2Fminjung%2F123+%22%E2%80%9C%EC%8B%A4%EC%9A%A9%EC%A3%BC%EC%9D%98%E2%80%9D%EB%A5%BC%20%EB%AF%BF%EC%88%A9%EB%8B%88%EA%B9%8C%21%20%5B%EB%B3%B5%EC%83%81%20211%ED%98%B8%5D%22" target="_blank" title="트위터로 리트윗합니다"><img src="/plugins/../jplugins/ILikeThis/images/twitter.png" alt="트위터로 리트윗하기" /></a><a class="button-facebook" href="http://www.facebook.com/sharer.php?u=http%3A%2F%2Fblog.jinbo.net%2Fminjung%2F123&t=%E2%80%9C%EC%8B%A4%EC%9A%A9%EC%A3%BC%EC%9D%98%E2%80%9D%EB%A5%BC%20%EB%AF%BF%EC%88%A9%EB%8B%88%EA%B9%8C%21%20%5B%EB%B3%B5%EC%83%81%20211%ED%98%B8%5D" target="_blank" title="페이스북에 공유합니다"><img src="/plugins/../jplugins/ILikeThis/images/facebook.png" alt="페이스북에 공유하기" /></a><a class="button-delicious" href="http://delicious.com/save" onclick="window.open('http://delicious.com/save?v=5&noui&jump=close&url=http%3A%2F%2Fblog.jinbo.net%2Fminjung%2F123&title=%E2%80%9C%EC%8B%A4%EC%9A%A9%EC%A3%BC%EC%9D%98%E2%80%9D%EB%A5%BC%20%EB%AF%BF%EC%88%A9%EB%8B%88%EA%B9%8C%21%20%5B%EB%B3%B5%EC%83%81%20211%ED%98%B8%5D','delicious','toolbar=no,width=550,height=550'); return false;" title="딜리셔스에 북마크합니다"><img src="/plugins/../jplugins/ILikeThis/images/delicious.png" alt="딜리셔스에 북마크" /></a></div><p><strong><a href="http://blog.jinbo.net/minjung/123?commentInput=true#entry123WriteComment">댓글 쓰기</a></strong></p>도덕주의의 무능력을 넘어 [복상209호]김강http://blog.jinbo.net/minjung/982008-02-11T13:56:53+09:002008-02-11T13:56:53+09:00<!--FCKeditor--><div class="article">
<p> </p>
<div class="imageblock left" style="FLOAT: left; MARGIN-RIGHT: 10px"><img class="tt-resampling" style="CURSOR: pointer" onclick="open_img('/tt2/attach/1/1291327251.jpg')" height="361" alt="사용자 삽입 이미지" src="http://www.kimkang.net/tt2/thumbnail/1/1291327251.w250-h361.resampled.jpg" width="250" />
<p class="cap1">강양구 김병수 한재각, <침묵과 열광>, 2006</p>
</div>
<strong>이 교수님. </strong>
<p> </p>
<p>이른바 <황우석 사태>가 한국 사회를 휩쓸고 지나간 지도 2년여가 흘렀습니다. 황우석 박사는 여전히 간간히 "원천기술"을 들먹이며 연구 재개를 노리고 있고, 그 주변에서 알짱대던 많은 이들은 입을 다문 채 책임을 회피하고 있습니다. 몇몇 언론인들과 칼럼니스트들만이 반성을 했을 뿐, 정작 책임져야 할 노무현 대통령을 비롯한 정치인들, 테크노크라트들, 지식인들은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냥 여전히 활발하게 활동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p>
<p> </p>
<p>2년이 지난 지금, 노무현 대통령만큼이나 황우석 박사를 사랑했던 정치인 이명박 씨가 대통령 취임을 앞두고 있습니다. 저는 요즘 "~~하면 뭐하나, 경제만 살리면 되지"라는 유머로 상징되는 작금의 대중의 정서가 황우석 사태 때와 참으로 비슷하다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대학을 자율화시켜 수천만원의 등록금을 감당할 수 없는 가난한 학생들이 진학을 꿈도 꿀 수 없는 상황이 되던, 자사고와 특목고를 늘려 초등학교 때부터 입시지옥에 시달리게 만들던, 영어 몰입교육이니 해서 전국민을 영어 능력자와 무능력자로 일치감치 갈라놓던, 건강보험을 무력화시켜 수술 한 번에 한 집안이 박살나는 상황이 일반화되건, "경제만 살린다면", "국가 경쟁력만 키운다면" 괜찮다는 게 여전히 이명박 당선자를 80%가까이 지지하는 대중의 정서인 것 같습니다.</p>
<p> </p>
<p>황우석 사태 때도 그랬습니다. 증거를 찾아가며 조목조목 황우석 박사 연구의 문제점을 지적한 PD수첩이 네티즌들과 광고주들의 폭격을 맞고 프로그램 자체가 없어질 뻔 했던 걸 우리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또 이미 황우석 박사의 연구가 처음부터 끝까지 거짓말투성이고, 원천기술도 없었다는 발표가 났음에도 "그에게 다시 한 번의 기회를 주자"는 여론이 60%를 넘나들던 것도 기업납니다. 황우석이나, 이명박이나 대중들이 바라는 건 그들 자신이라기보다는 그들을 통해서 자신들이 누리고 싶은 '환상'인 것 같습니다. 대중이 대면해야 할 실재란 건 너무나 고통스럽기에 끊임없이 환상을 갖지 않고서는 더 이상 살아가기 힘든 세상, 그게 작금의 한국 사회인 것 같습니다. </p>
<p> </p>
<p><strong>기독교 도덕주의의 무능력</strong><br />이 교수님, 제가 이 교수님께 이 이야기를 주저리주저리 늘어놓는 것은 바로 그 이명박 당선자를 지지한 모 기독교 단체에 교수님의 이름이 올라가 있어서였습니다. 저는 그걸 뒤늦게야 알았지요. 학부 시절에 누구보다도 생명 윤리에 대해서 많은 말씀을 쏟아내던 교수님, 황우석 사태 때도 일관되게 "배아는 사람이다. 실험의 도구로 삼아선 안 된다."는 근본주의 기독교의 생명윤리를 고수하던 교수님이 어떻게 황우석 사태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은 이명박 신드롬에는 그토록 쉽게 합류할 수 있었는지 저는 의문이었습니다. </p>
<p> </p>
<p>황우석에 대한 비판과 이명박에 대한 지지. 교수님뿐만 아니라 많은 보수주의 기독교의 오피니언들이 택한 이 모순되어 보이는 길 속에서 저는 기독교 보수주의(혹은 복음주의)의 무능력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도덕주의"의 무능력입니다. 저는 윤리를 사람 사는 사회의 한 복판, 그러니까 "정치"와 "경제"의 차원과 함께 생각하지 못하고, 추상적이고 규범적인 "도덕"수준에서밖에 사유하지 못하는 무능력이 오늘날 이 교수님과 같은 "선한 마음을 가진 이명박 지지자"들을 만들어 낸다고 생각합니다. 생명윤리와 같이 규범적 수준에서 다루기 쉬워 보이는 부분에 관해서는 비판을 해 낼 수 있었지만, 복잡한 수준으로 얽힌 사회적 관계를 읽어내야 할 대선이라는 장에서는 비판을 수행할 수 없었던 것이지요. 그리고 그렇게 탄생한 이명박 정부의 결과는 앞서 언급했듯이 대중의 삶이 총체적으로 어그러지고, 일단의 환상들이 진통제 역할을 하며 전면화되는 상황일 것입니다.(아마 그 최악의 경우는 파시즘일 것입니다.)</p>
<p> </p>
<p>그러므로 오늘날의 상황에서 다시금 황우석 사태를 되짚어보는 건 분명 의미 있는 작업이라 생각합니다. 오늘 소개할 이 책 <침묵과 열광-황우석 사태 7년의 기록>을 통해 저는 황우석 사태를 도덕이 아닌 정치의 관점에서 볼 수 있었던, 그래서 지금의 상황 속에서도 유의미한 문제제기를 던질 수 있을 저자들의 작업을, 결국 당시에도 의미 있는 실천을 만들어내지 못했고, 지금에 와서는 주류적 삶을 재생산(그 결과로 대중의 피폐한 삶을 재생산)하는데 빠져버린 기독교의 도덕주의와 비교해보고자 합니다.</p>
<p> </p>
<p><strong>과학기술동맹의 "침묵", 대중의 "열광"</strong><br />이 책이 처음 구상되고 집필에 들어갔던 건 PD수첩의 보도로 말미암아 황우석 사태가 전면화되기 몇 달 전이라고 합니다. 저자들이 오랜 기간 황우석과 그 주변의 권력관계 - 저자들은 이것에 "과학기술동맹"이라는 이름을 붙입니다. - 를 감시해 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들은 대학과 대학원에서 과학을 전공하고 각각 언론과 시민단체, 정당에서 과학 분야의 정책과 비평을 생산하던 이들입니다. 이 책이 나오기 이전, 아니 황우석 사태가 터지기 이전부터 이들은 지속적으로 황우석 연구의 문제점들을 지적해 왔습니다. </p>
<p> </p>
<p>황우석 사태에 대한 다각적인 검토를 통해 저자들이 내린 결론은 "침묵"과 "열광"이었습니다. 즉, 대중의 "열광적 지지" 뒷면에서 과학기술의 자본화와 권력화를 "조용히" 진행시켰던 황우석과 과학기술동맹에 대한 분석과 비판이 이 책의 주된 내용입니다. 기독교 도덕주의자들의 개입이 "배아도 인간이며, 인간을 죽이는 건 살인이다."라는 추상적인 규범윤리의 수준에서 황우석 연구에 개입할 때, 이들은 처음부터 그 연구의 정치성을 묻고 있습니다. </p>
<p> </p>
<p>이 책은 황우석 박사의 연구실 내에서의 권력관계, 황우석과 관련된 언론과 정치인들의 태도, 생명공학과 의료시장화의 관계에 대한 연구, 연구비 지원의 불평등성, 대중의 열광과 민주주의의 후퇴 등의 문제를 구체적 자료와 함께 독자들에게 보여줍니다. 거짓말 등으로 나타난 연구 윤리 문제나, 배아 사용의 문제점 등도 지적하고 있지만 이 역시도 추상적인 수준이 아니라 여성과 환자의 인권, 거짓을 재생산하는 정치적 구조의 문제와 함께 구체적으로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p>
<p> </p>
<p>저는 이 책에서 서술하고 있는 7년간에 걸친 황우석 박사 연구의 부침과 그것을 둘러싼 사회현상을 읽어나가면서 황우석 문제가 추상적인 생명윤리의 문제가 아니라 이 땅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을 모종의 방법으로 통제하는 권력과 자본의 작동원리에 대한 문제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사태의 재발을 막기 위해서는 연구와 정책결정에 참여하는 엘리트들에게 생명에 대한 규범을 가르친다고 될 일이 아니라, 엘리트들의 과학기술 독점 자체를 근본적으로 반성하고 대중들이 과학기술에 대한 접근권을 영유함으로써 아래로부터 윤리적 과학연구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는 정치적인 대안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p>
<p> </p>
<p><strong>하느님은 위가 아니라 아래에 계십니다.</strong><br />저자들의 작업과 비교할 때 기독교계 전반의 대응은 철저히 무능했습니다. 보수주의자들은 배아도 인간이라는 견해를 확산시키지도 못했고, 황우석 연구의 문제점을 폭로하는데 있어 주도적인 역할을 해내지도 못했습니다. 진보적이라 여겨지는 KNCC의 상층부 또한 무능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들은 배아도 사람이라는 교리 대신에 '약자인 환자 옹호'라는 도덕관념을 근거로 황우석 박사의 연구를 제한적으로 지지하기까지 했습니다. 아주 소수의 기독교 그룹만이 황우석 신드롬에 대한 정치적이고 포괄적인 담론을 생산해냈지만 큰 반향을 일으키지는 못했습니다.</p>
<p> </p>
<p>도덕주의는 왜 이 문제를 제대로 다루지 못했을까요. 도덕주의는 근본적으로 위로부터의 윤리적 접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의 경우라면 하느님의 명령, 세속적으로는 정언 명령에 입각한 복종적 행위가 바로 도덕주의자들의 삶의 길입니다. 때문에 이러한 위로부터의 사유는 정치적 문제를 사유함에 있어 빈곤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저 권력자들이, 정책결정자들이, 엘리트들이 하느님의 명령 혹은 도덕규범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도덕주의의 정치문제에 대한 해결방법입니다. 위에 계신 하느님이 의로운 명령을 내리는 분이시듯이, 세속에서도 위에 있는 사람들이 그 의로운 명령에 따라 아랫사람들을 잘 이끄는 것이 도덕주의 정치의 패러다임이라 할 수 있습니다. </p>
<p> </p>
<p>저는 이것이 "배아도 인간"이라는 규범에 따라 황우석을 비판했던 교수님과 보수 기독교의 지식인들이 이명박으로 대표되는 한국사회 주류의 흐름에 동참하게 된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아마도 교수님들께선 이명박과 주류세력이 "도덕적으로 행하는 것"(교수님이 그 단체에 참여할 당시엔 BBK의혹 등이 터져나오기 전이었죠.)이 대한민국이 긍정적으로 나아가는 길이라 생각하고 그 길로 나아가셨을 거라 추측해 봅니다. 또 이명박 당선자가 교회 장로라는 것도 교수님의 희망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게 아닐런지요.(물론 이것은 어디까지나 제 추측입니다.) </p>
<p> </p>
<p>그러나 세상의 어떤 주류도, 혹은 어떤 '위'도 자기 자신의 도덕적 결단에 의해 의로워지거나, 하느님과의 개인적 만남을 통해 "올바른 정치"를 하진 않습니다. 신실한 종교개혁자인 루터와 칼빈도 농민에 대한 잔혹한 진압과 정적의 숙청과 공포정치라는 권력의 길을 걸었던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가까이로는 매일 기도하며 살아간다는 미국의 부시대통령이 인가한 수만 명의 죽음을 우리는 보고 있습니다. "위"의 회개와 도덕적 각성을 기대하는 도덕주의자들의 실천은 현실에서는 무능하기 짝이 없습니다.</p>
<p> </p>
<p>저는 기독교인들이 추상적인 도덕의 수준에서 실천을 논하지 말고, 대중의 구체적인 삶과 정치의 장에 뛰어들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실은 하느님 자신이 그런 분이 아닙니까? 제가 아는 하느님은 위에서 명령만 내리고 계신 그런 분이 아닙니다. 그분은 역사 안에서 수많은 "사람"들과 함께 역사하시며, 심지어는 "사람"이 되어서 역사의 장, 정치의 장 안에서 직접 살아가기도 하신 그런 분입니다. 인간으로 오신 하느님 예수는 바리새인들처럼 도덕을 설하는 지도자로 행하지 않으셨습니다. 갈릴리 촌사람으로 태어난 예수는 끝까지 갈릴리와 이스라엘의 민중들과 함께 행하셨으며, 그 결과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p>
<p> </p>
<p><strong>도덕주의를 넘어서 정치로</strong><br />저는 교수님께서도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인 성서의 사회적 비전을 가지고 계실 거라 생각합니다. 저는 그런 사회는 "위"의 회개와 반성으로 저절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비전은 "헬라인과 종과 여자"들, 그리고 그들의 하느님의 끈덕진 정치적 저항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단순히 저만의 생각이 아니라 인권의 역사가 그것을 증명해준다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실천이란 스스로 "헬라인과 종과 여자"가 되어 "유대인들과 자유인, 남자만의 세상"을 만들려 하는 "위"에 대한 저항의 삶이 아닐까요.</p>
<p> </p>
<p>황우석 신화는 2년 전에 막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그 신화는 주인공을 바꿔서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 신화에 대응하기에 도덕주의는 너무나 무능력합니다. 저는 지금이야말로 저와 교수님을 비롯한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이 "도덕에서 정치로" 실천에 대한 견해를 대폭 수정해야 될 때라고 생각합니다. <침묵과 열광>의 저자들은 황우석 사태를 추상적인 도덕의 관점으로 보지 않았기 때문에 그 사태의 여러 구체적인 측면들을 제대로 분석하고 오늘날에도 적용할 수 있을 나름의 대안을 제시할 수 있었습니다. 이명박 정부의 출범과 총선이 멀지 않았습니다. 교수님과 같이 실력을 갖춘 그리스도인들이 도덕주의를 넘어서 민중들 속에서 민중의 삶을 위한 정치적 대안을 제시해주시길 기대해봅니다. </p>
<p>평화를 기원하며, 교수님의 책 읽어주는 친구, 김강.</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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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class="article">
<div class="imageblock left" style="FLOAT: left; MARGIN-RIGHT: 10px"><img class="tt-resampling" style="CURSOR: pointer" onclick="open_img('/tt2/attach/1/1087874445.jpg')" height="293" alt="사용자 삽입 이미지" width="200" src="http://www.kimkang.net/tt2/thumbnail/1/1087874445.w200-h293.resampled.jpg" />
<p class="cap1">고미숙, <공부의 달인, 호모 쿵푸스></p>
</div>
</div>
<div class="article"><strong>승준에게.</strong><br /><br />우선 축하의 인사를 전해야겠지? 고등학교 졸업 축하하고, 또 신학대학 입학 축하해. 그 고된 수년간의 입시지옥에서 드디어 탈출했구나. 중학교 때 소위 ‘좀 놀던’ 네가 고등학교 들어와서 얼마나 열심히 공부했는지를 아는 나로선 더욱 감격이 크다. 여하간 이제 잠시 대입을 위해 삶의 여러 모습을 돌아보지 못했던 시간으로부터는 안녕이니까 당분간은 그 기쁨을 만끽하면서 살길 바란다. </div>
<div class="article"></div>
<p class="article"> </p>
<p class="article">그런데 어쩌지? 삶의 기쁨을 만끽하라고 해 놓고 난 이 편지에서 승준이한테 또 ‘공부’ 이야기를 하려고 해. 제목부터 무시무시하게 “공부하거나 존재하지 않거나!”라고 뽑아놓고 말이야. 제목에 놀랐다면 미안해. 저 충격적인 구호(?)는 나 역시도 처음 들었을 때 무척 놀란 말이었으니까. 그리고 이제 갓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신학과 대학생이 되는 너한텐 꼭 “공부 안 할 거면 죽어!”라는 학원선생님의 목소리로 들릴 것 같아 추가로 미안^^ 하지만 내가 말하는 ‘공부’는 네가 지금껏 해오던 ‘공부’와는 사뭇 다른 공부란다. 오히려 “삶의 기쁨을 가장 잘 만끽하는 방법”이랄까. 그러니까 공부하라는 말에 꼭 ‘낙담’이라는 연쇄반응을 보이진 말기 바래.</p>
<p class="article"> </p>
<p class="article"><strong>기독교 철학? 철학적 신학?</strong><br />하지만 그 전에, 앞으로 네가 ‘주로’ 공부할 분야의 이야기부터 하는 게 좋을 것 같다. 뭐, 신학교 간다 하니 주위에서 많은 사람들이 성경 열심히 읽어라, 하루에 두 시간씩 기도해라, 편협하게 공부하지 말고 다양한 분야의 공부를 해라 등등. 여러 가지 조언을 해 주었을 거라 생각하고 난 어쩌면 남들은 거의 하지 않았을 그런 이야기를 네게 해 주려고 해. </p>
<p class="article"> </p>
<p class="article">너도 알다시피 난 두 개의 학교를 거치며 신학을 공부하고 있어. 내가 다닌 두 학교는 사실 그 색깔이 무척 다르단다. 여러 가지 면에서 다르지만 내게 가장 인상 깊었던 건 기독교 바깥 혹은 교회 바깥의 학문이나 세상을 대하는 학문적 태도의 차이였어. 학부 때에 가장 많이 들었던 단어는 아마도 “기독교 세계관”이라는 걸 거야. 그리고 학교에 개설된 과목 중에 전통적인 신학이 아닌 다른 분야를 다루는 용어를 이야기할 때 “기독교 사회이론”, “기독교 철학”, “기독교 정치”, “기독교 음악”, “기독교 미술” 같은 이름을 붙였어. 뭐, 이런 용어들은 승준이한테도 꽤나 익숙한 표현들일 거야. 그런데 졸업 후 진학한 대학원에서는 비슷한 내용을 공부하면서도 사뭇 다른 이름을 붙이더라구. “사회학과 신학”, “철학적 신학”, “과학과 신학”, “미학적 신학” 이런 식으로 말이야.</p>
<p class="article"> </p>
<p class="article">네가 보기엔 두 학교가 어떤 점에서 다른 것 같니? 일단 “기독교”(혹은 신학)와 다른 것의 순서가 다르지?^^ 왜 이렇게 다른 이름으로 사회학이나 철학이나 과학을 다룰까? 내 생각엔 두 학교에서 “기독교” 혹은 “신학”을 바라보는 시각의 차이 때문인 것 같아. 편의상 전자를 A대학, 후자를 B대학이라고 할게. A대학에서 “기독교”란 일종의 고정불변하는 실체와 같아. 그래서 “신학”이란 그 기독교를 충실히 재현하는 학문이고, 또 신앙인이란 이미 정해져있는 기독교와 신학의 입장에 서서 세상과 학문을 바라봐야 한다는 게 A대학의 이념이야.</p>
<p class="article"> </p>
<p class="article">반면에 지금 내가 다니고 있는 B대학에서 “기독교”는 고정불변한 어떤 것이 아니라 역사 안에서 무수히 많은 외부적인 것들과 교류하기도 하고 또 투쟁하기도 하는 변화하고 움직이는 거야. 그래서 “기독교적 00”라는 개념보다는 “00과 신학”이나 “00적 신학”같은 식으로 신학과 여타 학문(혹은 세상)의 독립성과 함께 대화와 소통을 강조하는 거지. 신학이란, 또 신앙인이란 언제나 그러한 학문과 세상과의 교류 속에서 만들어 온, 또 앞으로 만들어 갈 열린 존재라는 거야. </p>
<p class="article"><br /><strong>공부는 삶의 가능성들을 열어젖힌다</strong><br />내가 왜 이런 이야기를 꺼내느냐면, 승준이의 공부는 이제 좋은 대학에 가기 위해서라거나, 좋은 학점을 받기 위해서라거나, 혹은 좋은 신학대학원에 들어가기 위해서 같은, ‘목적을 위한’ 공부가 아니어야 하기 때문이야. 목적을 위한 공부가 아니라는 건, 기독교나 신학 자체에도 해당되는 말이야. 기독교가 고정불변하는 실체라면 신학을 한다는 건 그저 그 기독교를 목표로 해서 그것을 재현하는 것, 혹은 주석달기에 불과한 공부일 거야. 그리고 학문이란 이 기독교의 입장에서 ‘벗어나지 않는’ 범위에서 세상 학문을 ‘기독교적으로’ 해석하는 일이 될 거야. 난 근본적으로 이런 공부란 고등학교 때 답이 정해져 있는 걸 외워서 시험을 치루던 것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해. 그렇다면 이런 공부는 아무리 해도 “삶의 기쁨을 만끽하는 방법”은 될 수 없겠지. </p>
<p class="article"> </p>
<p class="article">그러나 반대로 기독교도, 신학도, 그래서 우리의 삶도 열려 있는 것이라면 공부는 바로 그렇게 우리의 삶을 새롭게 빚어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일 거야. 오늘 소개할 이 책 <공부의 달인, 호모 쿵푸스>의 부제인 “공부하거나, 존재하지 않거나”라는 말의 뜻은 바로 이러한 공부를 하라는 뜻이야. 정해진 교리나 삶의 방식 속에서만 존재함으로써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삶을 살지 말고, 공부를 통해 항상 새롭게 삶을 창조하는 공부의 달인 혹은 호모 쿵푸스(‘공부하는 인간’이란 뜻의 신조어)가 되라고!</p>
<p class="article"> </p>
<p class="article"><strong>삶의 달인은 공부의 달인이다</strong><br />이 책의 저자는 실제로 인문학, 사회학, 철학, 과학, 고전, 예술 등을 가로지르며 공부하는, 또 그 공부가 삶과 분리되지 않는 공동체를 실험하고 만들어가고 있는 사람이야. 저자는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공부에 대한 ‘통념’ - 공부와 학교를 동일시하고, 좋은 학교가 실력을 보장해주고, 공부에는 정해진 나이가 있다는 등의... - 에 대해 혹독하게 비판해. 그런 통념들은 근대의 교육제도가 만들어낸 거짓말이라고, 그런 공부로는 삶이 바뀌지 않는다고 말이야. 또 저자는 그러한 근대 교육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만들어진 대안교육에 대해서도 비판적이야. 자율성이나 창의성을 강조하지만 정작 그것을 채울 내용과 삶을 제대로 만들어내지 못했다는 거야. </p>
<p class="article"> </p>
<p class="article">그래서 저자가 제시하는 대안은 바로 “고전으로 돌아가자”라는 거야. 저자에게 고전은 단순히 옛날 책이 아니야. “고전이란 시대의 통념과 억압을 뚫고 삶과 사유의 눈부신 비전을 탐색한 전위적 텍스트를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고전은 항상 미-래적인, 늘 새로운 얼굴로 우리에게 되돌아오는 책이라고 말해. 신학도인 너와 나에겐 성서 역시 바로 이런 책일 거야. 물론 우리의 성서 읽기가 제도 종교 속에 구속당하지 않는다는 걸 전제로 할 때 말야.</p>
<p class="article"> </p>
<p class="article">그런데 이런 고전을 읽고 끊임없이 오늘 우리의 삶에서 삶과 사유의 비전을 탐색하고, 삶의 가능성을 열어젖히는 일은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야. 많은 고전들이 또 어렵기까지 하거든. 그렇기에 저자는 앎의 공동체성을 강조해. 학교가 만들어 낸 나이의 환상을 넘어, 또 계급이나 성별 등의 구별의 논리를 넘어 삶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사람들이 함께 모여 고전을 읽고 토론해야 한다는 거야. 그것을 저자는 앏의 꼬뮌(commune)이라고 불러. 서로가 서로의 스승과 벗이 되어주는 공부의 공동체!</p>
<p class="article"> </p>
<p class="article">저자가 공부의 방법으로 특히 강조하는 ‘암송’과 ‘구술’도 바로 이 공부가 공동체적인 공부이기 때문에 그럴 거야. 저자는 암기가 지독히 개인적인 공부이며 하면 할수록 몸을 상하게 하는 방법인 반면에 암송은 공동체적이며 신체를 건강하게 하는 공부라고 말해. 소리를 통해 몸의 안팎이 연결된다는 점에서 항상 외부와의 소통을 전제로 한다는 거지. 구술 역시 마찬가지야. 자신이 알고 있는 걸 이야기로 전달하는 구술의 능력은 기본적으로 공동체적이고, 하면 할수록 모두가 행복해지는 공부 방법일 거야. </p>
<p class="article"> </p>
<p class="article">저자는 이렇듯, 책과 몸과 공동체와 세상이 하나의 차원에서 펼쳐지는 공부를 우리에게 제안하고 있어. 그리고 이런 공부에선 결국 책마저도 넘어서서 세상의 모든 것이 ‘공부’의 주제가 된다고 저자는 말해. 연애, 질병, 죽음, 먹고 마시는 것 등등 우리 삶의 모든 부분에 있어 공부를 통해 그것들을 새롭게 바라보고, 삶을 확장시키는 사람이 바로 호모 쿵푸스라는 거야. 흥미로운 이야기가 많이 있으니 꼭 책을 한 번 읽어보길 바래. </p>
<p class="article"> </p>
<p class="article"><strong>학교를 넘어 벗들과 함께</strong> <br />승준아. 사실 네가 들어가는 신학대학은 학교의 이념에 반하는 글을 쓰거나 이야기를 하면 징계한다는 내용의 학칙이 있을 만큼 좀 완고한 면이 있는 곳이야. 하지만, 너의 삶과 공부를 네가 다닐 학교와 교단에, 혹은 “기독교”라는 제도 종교에 그저 맡기고 살진 않았으면 좋겠어. 삶은 정해져 있는 게 아니니까. </p>
<p class="article"> </p>
<p class="article">앞으로 네 주변의 많은 분들이 너에게 대학졸업 - 신학대학원 3년 - 군목 갔다 와서 서울의 큰 교회에서 부목사를 하다가 개척하거나 청빙을 받는 “목회자 코스”나 중간에 해외 유학이 낀 “신학자 코스”를 권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런 ‘코스’들은 결코 네 삶을 매순간 창조하는 것으로서, 기쁨을 만끽하며 사는 것으로 만들어 주지는 못할 거야. 난 네가 몸과 마음을 열고 “천지에 가득한 책의 정기”(연암 박지원)를 호흡하며 살았으면 좋겠어. 대학에 진학하면 꼭 학교의 강의실 바깥에서 함께 책을 읽고, 더불어 삶의 길을 걸어갈 벗들과 스승들을 많이 만들길 바래. 그들과 함께 네 인생을, 너의 기독교를, 그리고 너의 세상을 한 번 멋지게 만들어가 보렴. </p>
<p class="article"> </p>
<p class="article">다시 한번 졸업과 입학을 축하하며. 승준이의 책 읽어주는 친구, 김강. </p><iframe src="http://www.facebook.com/plugins/like.php?locale=ko_KR&href=http%3A%2F%2Fblog.jinbo.net%2Fminjung%2F&layout=standard&show_faces=true&width=445&action=like&colorscheme=light&" scrolling="no" frameborder="0" allowTransparency="true" style="border:none; overflow=hidden; width:445px; height:60px; margin-top:10px; margin-left:5px"></iframe><script type="text/javascript" src="http://tweetmix.net/js/widgetV2.js"></script><script type="text/javascript">if(("TMXW" in window)) { new TMXW.Widget({"shape":"default","target_url":"http://blog.jinbo.net/minjung/","widget_title":"\uc774 \uae00\uacfc \uc5f0\uad00\ub41c \ud2b8\uc717","default_msg":"","width":"445","height":"450","color_upper_back":"93C9E6","color_upper_text":"FFFFFF","color_tweet_back":"FFFFFF","color_border":"EBEBEB","color_text":"888888","color_link":"2ABBD4","widget_type":"1","btn_type":"1","max_messages":"10","is_show_avatar":"1"}).render().start();} </script><div class="buttons-bottom center jinboblog-i-like-this-buttons"><a class="button-jinboblog" href="javascript:void(0);" title="스크랩으로 글 링크를 저장하세요" onclick="recommend('2377',93,'/minjung','');"><img src="/plugins/../jplugins/ILikeThis/images/mini_chuchon.png" alt="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a><a class="button-twitter" href="http://twitter.com/home?status=http%3A%2F%2Fblog.jinbo.net%2Fminjung%2F93+%22%EA%B3%B5%EB%B6%80%ED%95%98%EA%B1%B0%EB%82%98%20%EC%A1%B4%EC%9E%AC%ED%95%98%EC%A7%80%20%EC%95%8A%EA%B1%B0%EB%82%98%21%20%5B%EB%B3%B5%EC%83%81208%ED%98%B8%5D%20%22" target="_blank" title="트위터로 리트윗합니다"><img src="/plugins/../jplugins/ILikeThis/images/twitter.png" alt="트위터로 리트윗하기" /></a><a class="button-facebook" href="http://www.facebook.com/sharer.php?u=http%3A%2F%2Fblog.jinbo.net%2Fminjung%2F93&t=%EA%B3%B5%EB%B6%80%ED%95%98%EA%B1%B0%EB%82%98%20%EC%A1%B4%EC%9E%AC%ED%95%98%EC%A7%80%20%EC%95%8A%EA%B1%B0%EB%82%98%21%20%5B%EB%B3%B5%EC%83%81208%ED%98%B8%5D%20" target="_blank" title="페이스북에 공유합니다"><img src="/plugins/../jplugins/ILikeThis/images/facebook.png" alt="페이스북에 공유하기" /></a><a class="button-delicious" href="http://delicious.com/save" onclick="window.open('http://delicious.com/save?v=5&noui&jump=close&url=http%3A%2F%2Fblog.jinbo.net%2Fminjung%2F93&title=%EA%B3%B5%EB%B6%80%ED%95%98%EA%B1%B0%EB%82%98%20%EC%A1%B4%EC%9E%AC%ED%95%98%EC%A7%80%20%EC%95%8A%EA%B1%B0%EB%82%98%21%20%5B%EB%B3%B5%EC%83%81208%ED%98%B8%5D%20','delicious','toolbar=no,width=550,height=550'); return false;" title="딜리셔스에 북마크합니다"><img src="/plugins/../jplugins/ILikeThis/images/delicious.png" alt="딜리셔스에 북마크" /></a></div><p><strong><a href="http://blog.jinbo.net/minjung/93?commentInput=true#entry93WriteComment">댓글 쓰기</a></strong></p>폭력의 세상에서 평화를 살기 위하여 [복상206호]김강http://blog.jinbo.net/minjung/822007-11-20T21:48:44+09:002007-11-20T21:48:44+09:00<!--FCKeditor--><div class="imageblock left" style="FLOAT: left; MARGIN-RIGHT: 10px"><img class="tt-resampling" style="CURSOR: pointer" onclick="open_img('/tt2/attach/1/1373181901.jpg')" height="370" alt="사용자 삽입 이미지" src="http://www.kimkang.net/tt2/thumbnail/1/1373181901.w250-h370.resampled.jpg" width="250" />
<p class="cap1">끌로드 안쉰 토마스, 정신세계사 2007</p>
</div>
<p><strong>준수야. <br /></strong><br />작년 가을 이후로 처음으로 네 이름을 이렇게 불러보는구나. 그 때 그렇게 싸우고 널 그냥 보내는 게 아니었는데……. “취직 준비로 바쁘다.”는 네 소식을 다른 이들을 통해 들을 때마다, 바쁜 것보다도 그 때 그렇게 널 몰아세운 나 때문에 결국 네가 모임에 나오기 힘들어진 것 같아 미안하구나. 씩씩한 너는 어쩌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괜찮아요, 형”하면서 돌아올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때 우리가 다투었던 그 문제를 살피지 않고선, 너와 내가 겪었던 갈등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할 것 같아 이 편지를 쓴다. </p>
<p> </p>
<p> </p>
<p>생각해보면 내가 문제였다. 확실히. 이제 갓 의경 생활을 마치고 제대한 너에게 “어디 어디 출동했었냐?”, “하느님 앞에서 부끄러움 없이 군 생활 한 거냐?”라고 물었던 거. 지금 생각해보면 그런 질문 자체가 너에게 얼마나 큰 부담으로 다가왔을지. 처음엔 그냥 이런 저런 이야기가 오가다가 결국 “시위대한테 맞고, 끌려 다니는 동료를 보고 어떻게 눈이 뒤집히지 않을 수 있어요! 그래놓고도 결국 우리만 살인자들이라고 욕먹죠. 형은 이상주의자에 불과해요!”,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그럴 수 있냐? 나도 그 자리에 있었다. 수십 명이 피를 흘리고 밟히고 미란다 고지도 없이 연행 당했어. 게다가 니네는 해산하고 돌아가려는 사람들까지 뒤에서 쫓아가서 방패로 찍었잖아!” 식으로 “누가 잘못했냐?” 논쟁을 벌이고 말았었지. 그리고 이내 네가 “도대체 내가 뭘 잘못했단 말이에요. 나도 어쩔 수 없었다구! 안 그럼 내가 맞는단 말이야. 날 좀 이해해주면 안돼요?”라고 소리치며 뛰쳐나간 게 마지막으로 너와 나눈 대화가 되어 버렸구나. </p>
<p> </p>
<p><strong>어떻게 이 폭력의 세계에서 구원을...</strong><br />그래. 나는 너를 조금도 이해하지 못했었던 것 같아. 일부 최전방 부대를 제외하면 ‘실전’이라는 것과는 거리가 먼 군대에 비해 의경들은 매일같이 ‘실전’을 치루고 있다는 걸, 그리고 그로 인해 너와 너의 동료들이 엄청난 신체적, 심리적 부담과 이후에도 잘 아물지 않는 트라우마를 갖고 있다는 걸 말이야. </p>
<p> </p>
<p>그 동안 많은 고민을 했었어. 머릿속으로 수없이 너와 다시 대화하는 장면을 상상하면서 어떻게 말할까를 고민했다. 그냥 ‘젊은이들을 그런 상황으로 몰아넣는 정부의 신자유주의젹 경찰국가 정책이 문제인 걸까. 그래 의경들도 불쌍한 피해자지…’ 라고 생각해보기도 했었어. 그러나 그렇게만 생각하고 마음을 회복하기엔 시위 현장에서 만나는 전/의경 개개인들의 마치 그 악마와도 같은 표정과 비무장한 할아버지들과 아주머니들에게까지 방패를 들고 달려드는 모습이 계속 떠올라 분노가 치밀어 오르곤 했단다. 그래서 나는 물을 수밖에 없었어. 도대체 이 문제는 어디서 출발한 것일까? 어떻게 해야 너와 나, 혹은 이 땅을 살아가는 우리들이 그런 폭력으로부터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걸까?</p>
<p> </p>
<p><strong>베트남 참전 군인이 성직자가 되기까지</strong><br />그 때 읽게 된 책이 클로드 안쉰 토머스라는 이름의 미국인 스님이 쓴 <풀 한 포기 다치지 않기를>이라는 책이었어. 이 책을 읽으면서 네 생각이 나서 몇 번을 울었는지 모르겠다. 전쟁과 폭력의 세상 한 가운데 던져진 한 인간이, 평화를 향해 길고 긴 구도의 여행을 떠나는 이야기를 담은 이 책을 통해서 나는 드디어 나와 너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담과, 그 담을 허물 수 있는 길을 조금 알게 된 것 같아. </p>
<p> </p>
<p>저자는 이 책의 첫 장서부터 담담하게 자신이 수백 명을 사살한 살인자라고 고백하고 있어. 그 살인자의 다른 이름은 바로 “참전 용사”야. 나라를 위해 전쟁터에서 공을 세운 “참전 용사”와 살인자. 우리에게는 너무나 다른 느낌으로 다가오는 이름들이지만 저자는 다르지 않다고 말해. 더 나아가 저자는 마음에 분노와 복수, 폭력의 씨앗을 키우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사실은 살인자라고 말해. 마치 “자기 형제나 자매에게 성내는 자는 살인하는 자다.”라고 하신 예수님처럼 말야.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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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저자는 베트남 참전 군인이었어. 그가 헬리콥터 부대의 기관총 사수가 되어 베트남에 배치되었을 때 그는 겨우 열아홉 살에 불과했다고 해. 거기서 그는 수많은 동료의 죽음과, 그리고 그보다 더 많은 살인을 경험했어. 게릴라전을 벌이던 적군은 도저히 군인과 민간인이 구분이 가지 않았고, 때로는 합장하고 길을 가던 스님들(로 가장한 게릴라)이 갑자기 돌아서서 AK-47s 소총을 난사하기도 하던 그 전쟁은 그야말로 지옥과 다를 바 없었지. 그러나 그 속에서도 그는 살아남았고, 625회의 전투비행경력과, 수십 개의 훈장, 그리고 전투 중에 얻은 부상을 가지고 돌아오게 돼.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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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그러나 그가 돌아왔을 때 그를 맞이한 건 애국자들에 대한 감사와 환영이 아니었어. “공항대기실에서 한 아름다운 소녀가 눈에 띄었다. 그녀는 나를 정면으로 응시하고 있었다…… 나는 머리를 들어 숨을 내쉬었고, 내 여신의 환영 인사를 받을 준비를 했다. 하지만 눈이 서로 마주쳤을 때, 그녀는 능숙한 솜씨로 내게 침을 뱉었다.” 당시는 반전운동이 미국을 휩쓸고 있던 시기였던 거야. 참전용사를 맞이한 미국인들 중 일부는 그들을 국가의 영웅으로 치켜세웠고, 일부는 그들을 살인자요, 전범으로 비난했어. 그리고 대다수는 자신들을 불편하게 하는 그들의 존재를 잊고 싶어 했어. 누구도 그들이 그 폭력의 현장에서 겪은 아픔과 상처를 이해하고 치유하려 하지 않았던 거야.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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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저자는 당시에 밤이면 트라우마로 인해 불면과 악몽에 시달리며 낮에는 술과 마약, 연애를 통해 그 악몽을 잊는 생활을 반복했다고 고백해. 때로 반전운동에 참가하기도 했지만, 그는 여기에서도 이용당하고 있다는 느낌과 “전쟁”과 다를 바 없는 평화운동에 대한 환멸을 느꼈어. 그 이후로도 그는 계속해서 고통으로부터의 구원을 찾아 헤맸지만 어디서도 평화를 얻을 수 없었다고 해. 어느 날 애인이 임신을 하게 되자 그는 가정과 아이가 자신을 구원해주리라 생각하여 결혼을 선택했어. 하지만 거기서도 결코 평화는 없었어. 그는 아이가 울 때마다 도망가고 싶다는 생각이 자신을 덮쳤다고 해. 결국 그는 3년 만에 가정을 버리고 떠나게 돼. 그에게는 가정조차도 끝나지 않은 전쟁이었던 거야.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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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983년이 되어서야 저자는 마약과 술을 끊게 돼. 그리고 열심히 베트남을 잊으려고 노력하며, 한 사람의 정상적인 시민으로 살아가려고 했지. 하지만 베트남은 그를 떠나가지 않았고, 굳게 억압되어 있던 전쟁에 대한 감정들은 갈수록 더 강렬하게 표면으로 새나왔어. 1990년 그의 고통이 극에 달했을 때 그는 베트남 출신의 고승인 틱낫한 스님의 참전 용사들을 위한 수련회 프로그램을 소개받게 돼. 그러나 그는 망설일 수밖에 없었어. 그들은 그의 “적”이었기 때문이야. 그러나 그가 수련회 관계자에게 전화를 걸었을 때 그 사람의 한 마디가 그를 움직였다고 해. “우리는 누구도 거절하지 않습니다.” 그가 목숨 걸고 지켰다고 생각한 동포들은 그를 거부했지만 그가 적이라고 생각했던 이들은 그를 받아들였던 거야. 불교 수행자이자, 평화운동가인 클로드 안쉰 토마스의 삶은 그렇게 시작되었어.</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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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trong>정념, 혹은 하느님의 임재 의식</strong><br />“우리는 누구도 거절하지 않습니다.” <br />이 구절을 읽는데 눈물이 왈칵 쏟아졌어. 그렇구나. 나는 준수를 거절하고 있었구나. 나의 폭력에 대한 두려움과 약자를 향한 국가의 억압에 대한 분노가 마땅히 용납하고 받아들여야 할 한 사람을 거절하게 만들었구나 하는 후회가 밀려왔단다. 내가 두려워하고 분노하는 만큼이나 너도 그런 마음을 누군가에게 갖고 있었을 테고, 그 마음을 이해하는 데서부터 대화를 시작했어야 하는데, 나는 그만 옳고 그름이라는 문제부터 꺼내버렸던 거야. 그제서야 내가 너에게 얼마나 미안한 일을 했는지 알 수 있었어.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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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수련회와 그 이후 이어진 틱낫한 스님과의 교류를 통해 저자는 온 마음을 다해 삶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정념(正念) 수행”에 매진하게 돼. 이 수행을 통해 그는 그동안 피하기만 했거나, 혹은 그것 아래에 지배당하기만 했던 베트남전의 고통스러운 기억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며 그 고통으로부터 조금씩 놓일 수 있게 되었어. 저자는 “정념”수행을 다른 말로 지금 이 순간, 지금 여기에 온전히 있는 것이라고 말해. 우리는 대부분의 시간을 과거로부터 조건화된 행동이나 생각에 파묻혀 산다고 저자는 말해. 그래서 특히 나를 고통스럽게 하는 일들을 만날 때 우리는 우리에게 익숙한 폭력적인 대응이나 거절, 혹은 마음을 닫아버리는 방식으로 대응한다는 거야. 하지만 정념이란 그런 과거의 습관을 떠나서 현재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마음이야.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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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불교에서는 이 정념에 다가가는 방식으로 “호흡을 의식하기”를 가르친다고 해. 지금 내가 숨을 쉬고 있는 것에 집중함으로써 내가 가지고 있는 생각이나 잡념들, 고통이 현재하는 것이 아니라 바뀌고 변하며, 또 이미 지나간 것이라는 것을 명상하는 거야. 저자는 때로 깊은 명상 중에도 전쟁의 기억들이 존재할 때가 있지만, 그 기억에 집착하지도, 그것을 거부하지도 않음으로써 그 기억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었다고 말해. 그 기억 역시도 지나가고 있는 그의 모습이라는 걸, 없애거나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지켜보며 받아들임으로써만 그 고통은 치유될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는 거야.</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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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나는 이런 정념과 마음의 치유에 대한 가르침에 불교에만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 오히려 나는 이 부분을 읽으면서 오래 전에 읽었던(그 때는 무미건조하고 시시한 가르침이라 생각하고 덮어버렸던) “하느님의 임재 의식”에 대한 가르침이 생각났어. “나는 오늘도 프라이팬을 뒤집으며 하느님의 임재를 느꼈다.”라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 때는 웃기다고만 생각했었는데, 이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의 정념 수행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매 순간 나의 과거와 죄에 얽매이는 것이 아니라 오늘 나를 먹이시고, 또 내안에 계시는 하느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체험하는 것. 그래서 나의 일상의 모든 순간에 내가 나로써 사는 게 아니라 하느님의 호흡(성령)을 가진 자로 살아가는 것.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은 아닐까.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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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생각해보면 나는 마치 예수님을 향하여서도 ‘옳고 그름’이라는 잣대만을 들이대던 바리새인의 모습을 닮아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세상을 옳고 그름 혹은 ‘기독교적인 것, 비기독교적인 것’으로 나누고 그런 분별의식 속에서 나온 어떤 법을 따라 사는 것을 참된 삶으로 여겼던 것 같아. 그런 나에게 예수님은 “법 제정자”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고, 내가 순종하고 복종해야 할 어떤 존재로 다가왔었어. 예수를 따른다고 하면서도, 사실은 기독교로 가장한 바리새 종교를 믿었던 거지.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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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예수님은 물론 정의를 말씀하시고, 사랑하라는 계명도 우리에게 주셨어. 하지만 그것은 우리가 어떠한 법을 지킴으로써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하느님의 영을 자각함으로, 즉 내 안에 계신 성령님과 동행함으로써만 가능해지는 거겠지. 이것을 위해 ‘호흡’을 주시하는 건 그리스도인들이 불교인들로부터 배울 수 있는 좋은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었어. 무엇보다 “성령”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루아흐나 헬라어 프뉴마는 둘다 ‘숨’이라는 뜻이 있거든. 불교인들이 매 순간을 지금 현재로서 살기 위하여 정념 수행을 하듯이 그리스도인들은 매 순간을 하느님의 임재 의식 속에서 고통과 폭력을 지켜봄으로써 그것으로부터 놓여나 매 순간을 진실된 평화의 삶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될 거라 생각해.</p>
<p><br /> <br /><strong>누구나 자신의 베트남을 가지고 있다.</strong><br />이 책의 후반부에서 저자는 그가 다녔던 순례 여행에 대해 쓰고 있어. 그는 정념 수행은 앉아서도 할 수 있지만 걸어가면서 할 수도 있다고 말해. 그는 미국과, 또 세계의 분쟁지역을 걸어가면서 수행을 하며 평화의 메시지를 나누었다고 해. 그가 군인으로 참전했던 베트남으로 돌아가 걷기 수행을 하던 모습과, 근본주의 기독교인들이 도처에서 눈을 부릅뜨고 있는 미국을 가로질러 걸으며 평화를 전하는 모습은 매우 감동적이야. 그가 이 순례여행을 통해서 깨달았던 건 바로 “누구나가 자신의 베트남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어. 가정에서의 갈등 같은 것으로부터 넓게는 국가 간의 전쟁에 이르기까지, 그 고통과 폭력의 크기가 크고 작을 수 있겠지만 세계의 모든 사람들은 폭력에 노출되어 살아가고 있다는 거야.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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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저자는 서로가 서로에게 연결되어 있다는 불교의 가르침을 이야기하면서 안타깝게도 고통 역시 그러하다고 말해. 내가 고통 받고 있다면 남도 고통 받고 있다는 거야. 더 나아가 폭력과 고통에서 가해자와 피해자는 없다고 말해. 가해자도 사실은 고통 받고 있는 인간이라는 거지. 마치 그리스도교에서 원죄를 이야기하는 것처럼 저자는 우리가 고통의 연대성 속에 살고 있다고 이야기해.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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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나는 여전히 약자들의 의견이 제대로 대표되지 않는 사회에서 그들이 거리로 나올 때 그것을 무력으로 진압하는 경찰력에, 약자들의 폭력은 가혹하게 짓밟으면서 자본가와 그들의 하수인들이 약자들을 향하는 폭력에는 눈을 감는 그들에게 분노하고 있어. 그건 옳지 않아. 하지만 지금은 그 옳고 그름을 따지기 이전에 그렇게 행동하는 경찰들 역시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라는 걸 알아가기 위해 노력하고 있어. 여전히 시위 현장에서 맞닥뜨리는 전의경들의 악마 같은 얼굴이 떠올라 고통스럽기도 하지만 그 얼굴 역시 그들에게 조건화된 폭력의 드러남일 뿐이라는 걸, 그들도 참으로 고통 받고 있다는 걸 조금씩 받아들려고 해. 그리고 내가 그들의 악마와 같은 얼굴을 떠올릴 때 나도 역시 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는 걸 하느님의 임재 의식 속에서 알아가고 있어.</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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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준수야. <br />아마도 다시 너와 같은 주제로 이야기를 나눈다면, 아마도 나는 여전히 같은 입장을 갖고 있을 거야. 하지만 이제는 그 ‘입장’보다 먼저 너와 내가 안고 있는 “베트남”과 조건화된 폭력의 문제를 먼저 꺼내놓고 서로의 안타까움을 받아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 우리 모두가 사실은 이 폭력의 세계 속에서 가해자이고 피해자라는 걸. 그리고 그것을 이겨나가는 힘이 우리 안에 있는 하느님의 호흡 안에 있다는 걸 함께 이야기하고 싶어.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십시오.”라는 성서의 권면은 아마도 바로 이런 태도를 말하는 걸 거야. 우리 이제 다시 만나서 평화를 이야기해보자꾸나. 이제는 너와 함께 이 폭력의 세상에서 평화를 살고 싶어. 많이 미안하고, 사랑한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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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너의 책 읽어주는 친구, 김강. </p><iframe src="http://www.facebook.com/plugins/like.php?locale=ko_KR&href=http%3A%2F%2Fblog.jinbo.net%2Fminjung%2F&layout=standard&show_faces=true&width=445&action=like&colorscheme=light&" scrolling="no" frameborder="0" allowTransparency="true" style="border:none; overflow=hidden; width:445px; height:60px; margin-top:10px; margin-left:5px"></iframe><script type="text/javascript" src="http://tweetmix.net/js/widgetV2.js"></script><script type="text/javascript">if(("TMXW" in window)) { new TMXW.Widget({"shape":"default","target_url":"http://blog.jinbo.net/minjung/","widget_title":"\uc774 \uae00\uacfc \uc5f0\uad00\ub41c \ud2b8\uc717","default_msg":"","width":"445","height":"450","color_upper_back":"93C9E6","color_upper_text":"FFFFFF","color_tweet_back":"FFFFFF","color_border":"EBEBEB","color_text":"888888","color_link":"2ABBD4","widget_type":"1","btn_type":"1","max_messages":"10","is_show_avatar":"1"}).render().start();} </script><div class="buttons-bottom center jinboblog-i-like-this-buttons"><a class="button-jinboblog" href="javascript:void(0);" title="스크랩으로 글 링크를 저장하세요" onclick="recommend('2377',82,'/minjung','');"><img src="/plugins/../jplugins/ILikeThis/images/mini_chuchon.png" alt="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a><a class="button-twitter" href="http://twitter.com/home?status=http%3A%2F%2Fblog.jinbo.net%2Fminjung%2F82+%22%ED%8F%AD%EB%A0%A5%EC%9D%98%20%EC%84%B8%EC%83%81%EC%97%90%EC%84%9C%20%ED%8F%89%ED%99%94%EB%A5%BC%20%EC%82%B4%EA%B8%B0%20%EC%9C%84%ED%95%98%EC%97%AC%20%5B%EB%B3%B5%EC%83%81206%ED%98%B8%5D%22" target="_blank" title="트위터로 리트윗합니다"><img src="/plugins/../jplugins/ILikeThis/images/twitter.png" alt="트위터로 리트윗하기" /></a><a class="button-facebook" href="http://www.facebook.com/sharer.php?u=http%3A%2F%2Fblog.jinbo.net%2Fminjung%2F82&t=%ED%8F%AD%EB%A0%A5%EC%9D%98%20%EC%84%B8%EC%83%81%EC%97%90%EC%84%9C%20%ED%8F%89%ED%99%94%EB%A5%BC%20%EC%82%B4%EA%B8%B0%20%EC%9C%84%ED%95%98%EC%97%AC%20%5B%EB%B3%B5%EC%83%81206%ED%98%B8%5D" target="_blank" title="페이스북에 공유합니다"><img src="/plugins/../jplugins/ILikeThis/images/facebook.png" alt="페이스북에 공유하기" /></a><a class="button-delicious" href="http://delicious.com/save" onclick="window.open('http://delicious.com/save?v=5&noui&jump=close&url=http%3A%2F%2Fblog.jinbo.net%2Fminjung%2F82&title=%ED%8F%AD%EB%A0%A5%EC%9D%98%20%EC%84%B8%EC%83%81%EC%97%90%EC%84%9C%20%ED%8F%89%ED%99%94%EB%A5%BC%20%EC%82%B4%EA%B8%B0%20%EC%9C%84%ED%95%98%EC%97%AC%20%5B%EB%B3%B5%EC%83%81206%ED%98%B8%5D','delicious','toolbar=no,width=550,height=550'); return false;" title="딜리셔스에 북마크합니다"><img src="/plugins/../jplugins/ILikeThis/images/delicious.png" alt="딜리셔스에 북마크" /></a></div><p><strong><a href="http://blog.jinbo.net/minjung/82?commentInput=true#entry82WriteComment">댓글 쓰기</a></strong></p>당신은 무능하지 않습니다. [복상205호]김강http://blog.jinbo.net/minjung/722007-10-05T10:20:28+09:002007-10-05T10:20:28+09:00<!--FCKeditor--><div class="imageblock left" style="FLOAT: left; MARGIN-RIGHT: 10px"><img class="tt-resampling" style="CURSOR: pointer" onclick="open_img('/tt2/attach/1/1137670626.jpg')" height="376" alt="사용자 삽입 이미지" width="250" src="http://www.kimkang.net/tt2/thumbnail/1/1137670626.w250-h376.resampled.jpg" />
<p class="cap1">우석훈 박권일, 88만원 세대</p>
</div>
<p> <strong>일우 형.<br /></strong><br />지난 추석 마지막 날에 만났던 형의 모습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축 쳐진 어깨와 힘을 잃은 눈매는 활력에 넘치는 청년부 리더였던 형의 모습을 기억하는 저에게는 적지 않은 충격이었습니다. 마치 선교단체처럼 조직된 그 교회 청년부에서 학부 1학년 때부터 군대를 다녀와 복학해서 3학년을 마칠 때까지 형은 가장 충성된 회원이자 리더였습니다. 단 두 명뿐이던 캠퍼스 모임을 열배로 성장시킨 이야기는(양만이 아니라 질로서도 성장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지금도 신화처럼 전해 내려온다고 합니다. 제가 그 교회를 나온 이후에 형이 4학년이 되면서 갑자기 모든 사역을 그만두고 취업 준비를 하겠다고 선언했다는 소문을 들었을 때도 저는 그다지 놀라지 않았습니다. “이제는 직장 선교사로 쓰임 받고 싶다.”던 형의 진정성을 믿었기 때문이었죠. 그동안 취업준비를 완전히 미루어 놓았던 형이니 적어도 1년은 죽어라고 해야겠지 생각도 했구요.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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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하지만 4학년 때 1년간, 졸업하고 또 1년간 수백 장의 이력서를 넣었지만 줄줄이 퇴짜를 맞고 결국 간간히 아르바이트를 하며 공무원 시험을 준비한 게 2년. “내가 무엇을 잘못한 거니? 요즘은 자꾸만 청년부 사역을 하느라 내가 시간을 헛되게 써버렸다는 후회가 들더라. 그리고 그런 후회를 하는 내가 또 하나님 앞에서 너무 죄스럽더라.” 3년 만에 만난 형이 토로하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형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는 실업이라는 고통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직장선교사를 꿈꾼다.”던 형이 지금은 “부모님 용돈 받아 사는 것도 못할 일이고, 결혼도 해야 하고, 어찌되었건 살긴 해야겠기에” 대학시절엔 형이 그토록 무시하던 공무원 시험 준비에 매달리는 걸 보면서 적잖이 안타까웠습니다. 어쩌면 도피라고도 할 수 있는 대학원 진학을 택했던 저로선, 형의 모습을 통해서야 우리 세대를 짓누르고 있는 청년 실업의 실상을 목도하게 된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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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trong>영혼을 팔아서라도 취직하고 싶다!</strong><br />전에 어떤 신문기사에서 “영혼을 팔아서라도 대기업에 취직하고 싶다.”던 한 취업준비생의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국민소득 2만 달러를 넘어 이제는 선진국 대열에 들어갔다는 한국에서 우리 20대는 영혼을 팔아서라도 경쟁에서 이겨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왜 이렇게 된 걸까요. 왜 우리 세대는 어떤 소설 속 주인공의 대사처럼 “후진국에서 태어나 개발도상국의 젊은이로 자라나 선진국에서 대학을 다녔”는데 직업이 없을까요. “우리는 초등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아침부터 밤까지 의자에 앉아 공부만 했는데, 부모나 선생이 하라는 거는 얌전히 다 했는데, 왜 이렇게 된 거야? 세상은 죽이는 스터프들, 머스트해브(MustHave) 아이템으로 가득 차 있는데 왜 우리 주머니에는 그걸 살 돈이 없는 거야? 1인당 국민소득 2만 달러라더니, 다 어디로 간 거야?”라고 한숨을 쉬어야 할까요.(김영하, <퀴즈쇼> 中)</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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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우리가 무능력하기 때문일까요. 명절 때마다 듣는 우리 어머니 잔소리처럼 “능력도 없이 지들 하고 싶은 것만 하고 다니면서 부모 등골이나 빼 먹고” 살기 때문일까요. 꼭 그런 것 같지는 않습니다. 영어 한 마디 못해도, 휴교령이다 민주화운동이다 해서 성적표에 F가 가득해도 대학만 졸업하면 어디든 취직하여 적어도 IMF가 오기 전까진 승진에 승진을 거듭하며 사회의 주류가 된 4,50대에 비하면 우리는 그야말로 ‘글로벌 인재’들이 아니던가요. 그런 우리에게 왜 비정규직으로 대표되는 불안정한 삶과 재테크로 대표되는 헛된 희망 말고는 미래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는 걸까요. <br /><br /><strong>“88만원 세대”를 낳은 한국 사회 <br /></strong>그런 고민을 하던 중에 이 책 <88만원 세대>를 읽게 되었습니다. 연구공간 수유+너머에서 시작된 “시민독서프로젝트: 우리의 불안정한 삶, 비정규직을 읽는다”라는 전국적인 독서운동을 통해서였습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저는 어렴풋이만 느끼고 있었던 진실을, 형과 저의 문제와 고민이 비단 우리 개인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20대 전체의 문제이며, 한국의 경제, 문화, 사회 전체의 문제라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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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이 책의 제목인 “88만원 세대”란 상위 5%만이 대기업이나 한전 등의 공기업 직원, 5급 사무관 이상의 고위 공무원이 될 수 있고, 나머지는 월평균 88만원(세전소득)의 급여를 받는 비정규직의 삶을 살아야 하는 지금의 20대를 지칭한 신조어입니다. 이 책의 저자들의 문제의식은 이들 88만원 세대가 30대가 되고, 4,50대가 되어도 이러한 처지에서 더 나아갈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데에 있습니다. 왜냐하면 한국 경제의 성장은 바로 우리들 20대를 볼모로 잡고 이루어지는 ‘세대 간 착취’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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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이 책의 첫 장은 “첫 섹스의 경제학”이라는 흥미로운 제목으로 10대, 20대가 놓인 특수한 상황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유럽국가의 청소년들과는 달리 한국의 청소년, 청년들은 어린 나이부터 ‘동거’와 ‘결혼’, ‘섹스’로 대표되는 독립적인 삶을 구가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문화적인 이유보다도 그들에게 “돈이 없기 때문”이라고 주장합니다. 저자들은 유럽사회와 달리, 한국 사회는 새롭게 출발하는 사람들에 대한 최소한의 주거권과 생활지원을 보장해주는 사회적 합의가 없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이들의 성장을 무한히 지체되도록 만듭니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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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한국사회의 고등학교를 졸업한 청소년이 취할 수 있는 방법은 세 가지가 있습니다. 1) 대학 진학을 포기, 2) 등록금 융자와 같은 개인융자를 받아 대학에 가는 방법, 3) 부모의 재정에 기대는 것입니다. 많은 이들이 3)의 길을 가게 되고, 부모로부터의 독립이나 동거와 같은 자신의 의지에 대한 선택은 취업 이후로 무한히 연기됩니다. 2)의 길은 졸업 후 빚더미에 앉게 되어 고소득의 직장에 입사하지 않으면 평생을 빚과 싸우는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1)은 이른바 ‘알바 인생’의 길입니다. 그러나 한국의 ‘알바’들은 한국과 비슷한 수준의 어떤 나라들의 알바들보다도 비참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최저임금에도 못 미치는 시급과 가혹한 노동조건 속에서 국가도, 노동조합도 이들을 전혀 보호해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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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저자들은 지금의 20대가 만나게 된 이 비참한 현실을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국제적 독과점화”와 이를 그대로 받아들인 노무현 정부의 “선택과 집중” 전략 때문이라 설명합니다. “파이를 먼저 키워야 한다”는 발상 속에서 독과점화에 대한 어떤 규제도 없는 승자 독식의 경제 정책은 결국 ‘제대로 된 안정된 직장’을 갈수록 줄어들게 만들고 있습니다. 승자독식 게임 속에서 대기업 정규직은 한정되어 있고, 경제의 중추를 이루는 중소기업들은 위기 속에서 비정규직을 돌려 쓸 수밖에 없습니다. 그 결과 수십만의 20대가 오로지 ‘공무원 시험’과 각종 ‘고시’에 목을 매달고 있습니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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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저자들의 중요한 통찰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러한 승자 독식 게임이 근본적으로는 20대의 ‘세대 내의 경쟁’이 아니라 ‘세대 간 경쟁’이라는 것을 밝힌 데에 있습니다. 즉 한국 경제의 성장기, 연공서열제와 정규직 체제가 있는 조건에서 사회진출을 한 유신세대, 386세대 등과 지금의 20대가 경쟁을 해야 하는 구조가 되었다는 것이지요. 저자들은 2장에서 공무원, 정부출연기관, 대기업, 민간협회, 시민단체, 자영업 심지어는 조직폭력단과 다단계조직 등을 분석하면서 각 조직들 속에서 세대 간 경쟁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지, 20대가 어떤 식으로 밀려나고 있는지를 흥미롭게 분석하고 있습니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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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압도적인 재력과 생존능력으로 무장한 지금의 4,50나 민주화 투쟁 속에서 능력을 키웠고, 2002년 대선을 통해 주류 세력으로 등장한 386세대와 지금의 20대의 경쟁은 애초부터 불공정한 싸움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세대 간 경쟁’에서 밀려난 우리 세대는 한편으론 윗세대의 마케팅 전략에 완전히 포섭되어 착취당하고, 한편으론 “88만원 인생”을 벗어나기 위해 동년배들끼리의 무한 경쟁을 해야만 하는 것이지요. 이 싸움은 마치 개미지옥에 빠진 개미들이 죽지 않기 위해 서로를 밟고 올라가는 - 그리고 그럼에도 대부분이 희생되고 마는 - 비참하고 처절한 싸움입니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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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그렇다면 우리는 도대체 어떻게 이 개미지옥을 벗어날 수 있는 걸까요? 소수 5%만이 승리자가 되는 이 게임을 우리는 죽을 때 까지 반복하며 살아야 하는 것일까요? 저자들은 이 승자독식 게임을 그대로 놔 둘 경우 한국 사회는 전후 최초로 파시즘 세대를 만나게 될지 모른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먹고 살기가 팍팍해지고, 사회적 박탈감이 심화될수록 사람들은 외부의 적을 찾다가 그게 수월치 않으면 내부의 적을 찾게 된다는 것이지요.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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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trong>386세대, 너희들의 ‘하느님 나라’</strong><br />이런 비극적 상황을 맞이하지 않기 위해서 저자들은 몇 가지 제언을 하고 있습니다. 약간은 혼란스럽게 제안들이 흩어져 있지만 크게 정리하면 386세대로 대표되는 기성세대에 대한 주문과, 20대에 대한 제안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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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저자들이 “자신들의 손으로 민주화를 쟁취한” 386 세대에게 보는 시각은 매우 서늘합니다. 386세대야 말로 한국 사회의 세대 간 착취를 고착화시킨 주범이라는 것이지요. 프랑스의 68세대와 달리 386세대는 혁명적 변화 이후 너무나도 쉽게 기존 체제에 흡수되어버렸습니다. “이 세대가 아이들을 낳게 되었을 때 우리나라에서는 원정출산이 나타났고, 그 아이들이 자랐을 때는 조기유학 붐이 일어났다. 유럽의 68세대가 사회에 진출하면서 사회적 민주주의가 발전되고 직접 민주주의가 심화된 것과 달리 우리나라 386의 경우는 부모 세대가 되면서 자신들의 경험과는 전혀 상반되게 사교육에 매달리거나 교육을 매개로 한 무한 경쟁에 더욱 깊이 빠져들었다. 현재 한국 사회가 안고 있는 ‘다음 세대’의 문제의 절반 정도는 지금의 386세대가 부모가 되면서 생겨난 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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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저자들은 이 386 세대가 20대에 대한 시각을 빨리 바꾸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른바 “꼰대”가 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죠. 저자들은 자본의 구매력에 근거한 회유가 강할 것인가, 미디어의 쇼비니즘에 의한 동원력이 강할 것인가, 아니면 노동조합을 비롯한 대척점에 서 있는 힘이 내미는 협조의 손이 더 강할 것인가가 지금부터의 흐름의 분기점을 형성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386세대의 이 “대척점에 서 있는 힘”들이 20대를 향해서 “너희들은 민주주의를 몰라” “이기적이야”라고 비판만 해서는, 집회를 할 때마다 여전히 “민중의 노래”같은 군가식 노래 틀어놓고 알아들을 수 없는 내용의 연설만 늘어놓는 식으로는 곤란하다는 것입니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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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이 부분을 읽으면서 저는 복음주의 교회나 운동판도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생각해 보면 교회 내에서도 이 책의 내용과 비슷한 세대 갈등이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대부분 교회 청년부의 교역자들은 386들일 테니까요. 그들은 매일같이 청년들에게 죄책감을 심어줍니다. 보수적인 시각을 가진 목회자들은 “여러분이 주께 하듯 노력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께선 여러분에게 비전을 이룰 기회를 주시지 않는 겁니다.”라는 식으로, 그리고 진보적인 목회자들은 “언제까지 학점이나, 패션 같은 개인적인 문제에 몰두하며 살 겁니까? 개인의 취업보다 훨씬 중요한 ‘민족 통일’의 문제에는 왜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까?”라는 식으로요. 어쩌면 형이 가지고 있는 죄책감이나 열패감은 저런 식의 선동 때문은 아닐까요? 설교말씀대로 살자니 도저히 살 길이 안 보이고, 살 길을 찾자니 하느님 나라를 버리는 것 같은 그런…….</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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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올해 “성서한국” 대회 - 형이 “이제는 그런 거 별로 관심도 안 간다.”고 손사래 치는 바람에 이야기해보지 못했었죠. - 의 주제는 “통일”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좋은 이야기이고, 한국사회가 반드시 넘어야 할 주제이기도 합니다만 저는 그 모임에 대한 기사들을 읽으면서 무언가 불편함을 느꼈었습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야 그 불편함의 실체를 알았는데, 그건 386 목회자들의 운동에 어쩌면 우리 청년들이 그저 동원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물음이었습니다. 청년들을 “하느님 나라”운동에 헌신케 한다면서 정작 “청년들의 하느님 나라”가 아닌 “386 목회자들의 하느님 나라”를 청년들에게 강요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그런 물음입니다. 그래서 살 길을 찾아 분주히 헤매는 다른 많은 청년들은 자신의 이슈를 찾지 못해 동참하지 못하고, 한편으론 ‘헌신되지 못한 죄인’이 되어버리는 건 아닐까요. 물론 저의 괜한 과대망상일 수도 있겠지만요.<br /> <br /><strong>88만원 세대의 하느님 나라<br /></strong>그러면, 우리 세대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우리의 힘으로 과연 개미지옥을 벗어날 수 있을까요. 무한 경쟁이 아니라, ‘무한 연대’를 이루어 88만원 세대 우리 자신의 삶을 바꾸고, 한국 사회의 미래를 바꿀 수 있는 가능성을 열 수 있을까요? 88만원 세대가 벌여야 할 ‘하느님 나라 운동’은 무엇일까요?</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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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이 책 표지에는 “20대여, 토플 책을 덮고 바리케이드를 치고 짱돌을 들어라.”라는 글이 적혀 있습니다. “나가서 데모라도 하라구?”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만, 책을 읽어보면 상징적인 의미로 “바리케이드”와 “짱돌” 사용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우리 세대를 보호할 장치들(바리케이드)을 만들고 세대 간 경쟁에 공세적으로 나설 수 있는 무기(짱돌)를 마련하라는 이야기입니다. 저자들은 하나의 예로 20대 1만 명 정도가 스타벅스에 가기를 거부하고 20대 사장이 직접 내려주는 커피와 차를 마시겠다는 선언을 한다는 상상을 해보자고 제안합니다. 1만 명이 이런 운동을 벌이면 100명의 20대가 자기 카페를 가지고 경제적 삶을 시작할 수 있을 것이고, 또 그보다 큰 사회적 파격을 낳는다는 것이죠. 또 더 나아가 ‘생활협동조합’의 방식으로 직접 서로를 먹여 살릴 수 있는 20대들 간의 경제적 연합을 만들어보자는 이야기를 합니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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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물론 이것만 있는 건 아닐 것입니다. 사실은 이 책 자체가 하나의 “짱돌”이기도 할 겁니다. 제 주변에 이 책을 읽은 친구들은 하나같이 “내 주변 사람들에게 이 책을 소개하고 싶다.”고 말합니다. 우리를 둘러싼 실상을 깨닫는 것, 우리가 얼마나 - 특히 마케팅 전략에 의해 - 우리 윗세대들에게 농락당하고 있는지를 인식하는 것 자체가 우리의 무기가 될 것입니다.</p>
<p> </p>
<p>일우 형. 저는 이 책을 읽으면서 우리가 이 개미지옥을 벗어나려면 어떤 종류의 “바리케이드”든 치고, “짱돌”을 들어 의미 있는 사회세력이 되지 않으면 안 되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교회 내에서도 사회선교를 하겠다는 청년들이 먼저 88만원 세대 자신의 문제를 가지고 한 번 싸우고, 연대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또 그것을 윗세대의 목회자들이 믿고 후원해주면 좋겠습니다. 개미지옥 속의 삶 말고 다른 삶을 만들어보고 싶습니다. <br /> <br />내년 시험에 형이 붙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마도 열심히 준비했으니 그리 될 거라 봅니다. 하지만 혹시라도 운이 없어서 떨어지거나(미안해요.ㅜㅜ) 마음이 바뀐다면, 그때는 저랑 같이 무엇이 되었든 바리케이드 한 번 같이 쳐 보아요. 우리만 말고 “함께 살아가기”를 “경쟁”보다 원하는 다른 88만원 세대 친구들을 모아서요. 형, 우리는 무능력하지 않습니다. 다만 지금은 혼자라서 힘겨울 뿐입니다. <br /> <br />다시금 형의 활기찬 모습을 보고 싶은, 일우 형의 책 읽어주는 친구 김강.</p><iframe src="http://www.facebook.com/plugins/like.php?locale=ko_KR&href=http%3A%2F%2Fblog.jinbo.net%2Fminjung%2F&layout=standard&show_faces=true&width=445&action=like&colorscheme=light&" scrolling="no" frameborder="0" allowTransparency="true" style="border:none; overflow=hidden; width:445px; height:60px; margin-top:10px; margin-left:5px"></iframe><script type="text/javascript" src="http://tweetmix.net/js/widgetV2.js"></script><script type="text/javascript">if(("TMXW" in window)) { new TMXW.Widget({"shape":"default","target_url":"http://blog.jinbo.net/minjung/","widget_title":"\uc774 \uae00\uacfc \uc5f0\uad00\ub41c \ud2b8\uc717","default_msg":"","width":"445","height":"450","color_upper_back":"93C9E6","color_upper_text":"FFFFFF","color_tweet_back":"FFFFFF","color_border":"EBEBEB","color_text":"888888","color_link":"2ABBD4","widget_type":"1","btn_type":"1","max_messages":"10","is_show_avatar":"1"}).render().start();} </script><div class="buttons-bottom center jinboblog-i-like-this-buttons"><a class="button-jinboblog" href="javascript:void(0);" title="스크랩으로 글 링크를 저장하세요" onclick="recommend('2377',72,'/minjung','');"><img src="/plugins/../jplugins/ILikeThis/images/mini_chuchon.png" alt="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a><a class="button-twitter" href="http://twitter.com/home?status=http%3A%2F%2Fblog.jinbo.net%2Fminjung%2F72+%22%EB%8B%B9%EC%8B%A0%EC%9D%80%20%EB%AC%B4%EB%8A%A5%ED%95%98%EC%A7%80%20%EC%95%8A%EC%8A%B5%EB%8B%88%EB%8B%A4.%20%5B%EB%B3%B5%EC%83%81205%ED%98%B8%5D%22" target="_blank" title="트위터로 리트윗합니다"><img src="/plugins/../jplugins/ILikeThis/images/twitter.png" alt="트위터로 리트윗하기" /></a><a class="button-facebook" href="http://www.facebook.com/sharer.php?u=http%3A%2F%2Fblog.jinbo.net%2Fminjung%2F72&t=%EB%8B%B9%EC%8B%A0%EC%9D%80%20%EB%AC%B4%EB%8A%A5%ED%95%98%EC%A7%80%20%EC%95%8A%EC%8A%B5%EB%8B%88%EB%8B%A4.%20%5B%EB%B3%B5%EC%83%81205%ED%98%B8%5D" target="_blank" title="페이스북에 공유합니다"><img src="/plugins/../jplugins/ILikeThis/images/facebook.png" alt="페이스북에 공유하기" /></a><a class="button-delicious" href="http://delicious.com/save" onclick="window.open('http://delicious.com/save?v=5&noui&jump=close&url=http%3A%2F%2Fblog.jinbo.net%2Fminjung%2F72&title=%EB%8B%B9%EC%8B%A0%EC%9D%80%20%EB%AC%B4%EB%8A%A5%ED%95%98%EC%A7%80%20%EC%95%8A%EC%8A%B5%EB%8B%88%EB%8B%A4.%20%5B%EB%B3%B5%EC%83%81205%ED%98%B8%5D','delicious','toolbar=no,width=550,height=550'); return false;" title="딜리셔스에 북마크합니다"><img src="/plugins/../jplugins/ILikeThis/images/delicious.png" alt="딜리셔스에 북마크" /></a></div><p><strong><a href="http://blog.jinbo.net/minjung/72?commentInput=true#entry72WriteComment">댓글 쓰기</a></strong></p>주석궁에 농사를 지으십시오 [복상203호] 김강http://blog.jinbo.net/minjung/582007-08-19T01:51:57+09:002007-08-19T01:51:57+09:00<!--FCKeditor--><div class="imageblock left" style="FLOAT: left; MARGIN-RIGHT: 10px"><img class="tt-resampling" style="CURSOR: pointer" onclick="open_img('/tt2/attach/1/1111736963.jpg')" height="291" alt="사용자 삽입 이미지" width="200" src="http://www.kimkang.net/tt2/thumbnail/1/1111736963.w200-h291.resampled.jpg" />
<p class="cap1">요시다 타로, 생태도시 아바나의 탄생</p>
</div>
<p><strong>김정일 국방위원장님께.</strong></p>
<p><br />최근 뉴스에서 종종 김정일 위원장님의 건강이상설을 접했습니다. 지금은 어떠신지 모르겠습니다. 건강하실 때에 어서어서 남한에 한 번 오셔서 남북정상회담도 하시고, 한반도의 정전체제를 평화체제로 전환시켜야 할 텐데 걱정입니다. 다행히 남한에선 한나라당까지도 전향적인 대북정책을 내 놓고 있습니다. 요 일이년간이 남북관계에 있어서 중요한 전환점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때를 놓치면 또 얼마나 남한과 북조선의 인민들이 분단이 주는 부담을 안고 살아가야 할지 모릅니다. 부디 활발하게 평화를 위해 활동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p>
<p><br /><strong>사회주의와 반미의 동지, 쿠바</strong><br />하지만 오늘 제가 이 편지를 드리는 건 평화와 통일의 문제를 이야기하기 위함은 아닙니다. 좀 뜬금없이 들리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북조선과 ‘사회주의와 반미의 동지’라 할 수 있는 쿠바의 이야기를 함께 나누고자 위원장님께 이 편지를 드립니다. 쿠바의 이야기를 지금 꺼내는 건 90년대 중반 고난의 행군 시기 이후로 다시 찾아온 북조선의 식량난 때문입니다. 지금은 사정이 그나마 호전되었다고는 하나 여전히 안정적인 식량생산보다는 홍수와 가뭄 없는 날씨에 많은 것을 기대하는 불안정한 상태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래서인지 북조선 정부가 발표하는 신년 사설에서도 요 몇 년간 계속 농업생산력을 재고하자는 이야기가 실려 있더군요.</p>
<p><br />그러나 북조선의 정치?사회체제에 대한 부족한 인식에도 불구하고 감히 말씀드리자면, 북조선은 여전히 인민의 삶의 질과 인권의 향상보다는 서구사회와 남한과의 정치적, 군사적 경쟁에 더욱 치중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그리고 그 때문에 정작 중요한 인민의 삶의 질을 내팽겨 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제가 이렇게 말씀드리는 이유는 북조선과 같은 식량 위기를 겪었으면서도 정부와 인민들이 상호 소통하면서 창조적 역량을 발휘하여 식량난 극복을 넘어 하나의 생태적 국가의 모범을 만들고 있는 쿠바의 사례 때문입니다.</p>
<p><br /><strong>미증유의 식량난에 봉착하다.</strong><br />제가 소개할 이 책 <생태도시 아바나의 탄생>은 위기를 위대한 창조의 발판으로 삼은 쿠바 인민들의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80년대까지 남미에서 가장 공업화되고, 안정적인 복지체제를 갖추었던 ‘사회주의 천국’ 쿠바는 90년대 초 사회주의권이 대대적으로 몰락하자 무역과 산업의 끈을 잃고 심각한 경제난에 부딪혔습니다. 게다가 쿠바의 코앞에 있는 거대한 제국, 미국은 “이 때야말로 카스트로를 몰아내고 다시 쿠바를 속국화 할 때다.”라는 기대를 감추지 않고 혹독한 경제봉쇄를 단행했습니다. 이 경제봉쇄가 얼마나 가혹했던지 UN이 제제를 가할 정도였습니다. GNP는 89년에서 93년 사이 48%가 하락했고, 경제 봉쇄로 식량과 의약품이 거의 들어오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1993년에는 20세기 최악의 태풍으로 기록될 거대한 허리케인이 급습하여 주택과 농지, 호텔 등이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공장은 80%가 문을 닫았고, 석유가 수입되지 않아 수도인 아바나에서도 정전 사태가 12~16시간씩 지속되기도 했습니다. </p>
<p><br />이런 경제 위기의 타격을 가장 크게 받은 것은 식료품 공급이었습니다. “쌀은 이미 바닥났고 콩은 50퍼센트, 식물성 기름은 16퍼센트, 라드 7퍼센트, 연유 11퍼센트, 버터는 47퍼센트, 분유는 22퍼센트 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쿠바의 카스트로 의장은 91년의 당 대회에서 이런 안타까운 고백을 해야 했습니다. 특히 식량문제에서 큰 위기가 닥친 것은 그간의 쿠바 농업이 사탕수수와 커피 등의 단작 농업 중심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고부가가치를 생산하는 사탕수수와 커피를 소련을 비롯한 사회주의 각국에 수출하고, 정작 자신들이 먹을 것은 60% 정도를 수입했던 것이지요. 때문에 사회주의권이 붕괴되고 경제봉쇄가 시작되자 대량의 영양실조와 기아가 닥쳤던 것입니다. ‘사회주의 천국’ 쿠바의 몰락은 이제 시간문제처럼 보였습니다. </p>
<p><br />그런데.....</p>
<p><br />지금 쿠바는 식량을 거의 완전히 자급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화학비료와 농약을 거의 치지 않는 유기농 채소 위주의 식단으로 ‘웰빙’을 구가하고 있지요. 자동차가 줄어든 아바나의 도로를 자전거와 대중교통이 신나게 달리고 있고, 도시 곳곳에 농지가 펼쳐진 이색적인 풍경을 볼 수 있습니다. 위기 가운데서도 국방비까지 줄여가면서도(미국이 노골적으로 ‘침공’까지 운운하며 위협했는데도 말입니다!) 보존을 위해 심혈을 기울였던 병원과 학교는 오히려 더욱 늘어났고, 석유 의존도를 줄이고 친환경적인 에너지 생산을 늘려가는 등 ‘지속가능한 사회’를 쿠바의 인민들은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게다가 수천개의 NPO(NGO)들이 생겨나고 분권화와 지역민주주의가 진행되는 등 민주주의와 인권 역시 상당한 수준으로 신장되었습니다. 도대체 어떤 일이 벌어진 것일까요?</p>
<p><br /><strong>도시인, 농사꾼들이 되다!</strong><br />“한 발짝이라도 잘못 내딛으면 수많은 아사자가 속출할 위기의 순간에 아바나 시민이 선택한 비상수단은 도시를 경작하는 것이었다.” 쿠바의 인민들은 먹을 것이 없어진 순간에 자발적으로 농사를 짓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수도 아바나에선 수천 명의 주민들이 발코니와 안마당, 옥상과 빈 땅에서 농사를 짓기 시작했습니다. 카스트로 의장도 이런 움직임에 고무되어 “식량 문제가 최우선”이라는 비상선언을 하고 스스로 채식주의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소련식 과다소비형 근대농업에서 지역의 재활용 자원에 입각한 유기농업과 도시의 자급농업 정책을 관과 민이 함께 만들어가기 시작했습니다. </p>
<p><br />이렇게 시작된 도시 농업(그들은 이 도시농업을 urbana란 이름으로 불렀지요^^)은 이내 비약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했습니다. 정부는 도시농업을 장려하기 위해 가장 먼저 시민들에게 국유지를 빌려주는 일을 시작했습니다. 쓰레기장, 놀고 있는 땅, 심지어 아스팔트 위에도 흙을 깔아 농지로 무상공급했습니다. 농약도 종자도, 비료도 없었지만 인민들은 땅을 빌려 농사짓기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산적해 있었습니다. 유기농업 기술개발, 농업용수 확보, 종자와 비료, 바이오 농약, 농기구 제공, 일반인들을 위한 농업지식 보급 등 여러 난제들 앞에서 쿠바의 인민들은 “도시농업 동호회”등의 각종 NPO그룹들을 만들어 국가지원과 함께 문제들을 하나하나씩 해결해 나갔습니다. 정부는 또한 도시농업 보급원이라는 도우미 제도를 만들어서 직접 도시농업인들을 교육하고 훈련했습니다. 훈련을 받은 이들은 또 다른 사람들에게 노하우를 전수하기도 했지요. 그 결과 10여년이 지난 지금은 인구 220만명의 대도시에서 채소를 자급하는 일이 가능해졌습니다. 이제 굶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뿐더러 양질의 유기농 채소위주의 웰빙(?) 식단을 즐기게 된 것입니다.</p>
<p><br /><strong>사회주의 국가, 생태와 분권화를 만나다.</strong><br />이 책은 단지 도시농업의 사례만을 다루고 있지는 않습니다. 도시농업을 중심으로 하여 위기에 처한 쿠바가 의료와 교육, 분권화와 시장의 도입,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한 환경보호 등 여러 정책을 어떤 식으로 진행하여 왔는지를 다각도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자본주의와 별반 다를 것 없는 근대화와 생산력주의에 빠져 있던 사회주의 국가체제가 어떤 식으로 ‘생태’와 만나 진화할 수 있는 지에 대한 한 사례를 이 책은 잘 보여줍니다.</p>
<p><br />쿠바도 북조선이나 소련 등과 같은 여타의 사회주의 국가와 마찬가지로 60~80년대에 이르는 기간 동안 근대화와 생산력 강화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소련의 지원과 게바라주의(도덕주의적 사회주의)에 입각한 성실한 인민들의 노력 덕분에 쿠바는 남미에서 가장 생산력이 높은 복지형 공업국가로 성장하게 됩니다. 그러나 서구와의 근대화 경쟁 속에 육식이 장려되고, 농업은 고부가 가치를 낳는 사탕수수와 커피 농업 외에는 천대받기도 했습니다. 또한 공업화로 인한 환경오염 역시 심각한 문제로 떠올랐습니다. </p>
<p><br />그러나 한편으로 쿠바는 사회주의 국가답게 높은 수준의 교육과 의료, 복지체제를 이룩하였습니다. 유아 사망률은 미국보다도 낮았고, 평균수명도 73세에 이르렀습니다. 체제도 일당 독재의 스탈린주의 체제로서는 드물게 부패가 없고 사명감이 높은 관료들이 안정되게 이끌었습니다. 체 게바라나 호세 마르띠(19세기에 쿠바의 독립운동을 이끈 사상가)의 영향으로 카스트로 의장을 비롯하여 모든 관료들이 일반인들과 다를 것 없는 평범하고 검소한 생활을 하는 것이 쿠바 지도자들의 특징이었습니다. 그러나 역시 일당지배와 생산력중심의 정책을 유지하기 위해서 권력은 중심화되고, 관료주의가 나타나는 경향도 있었습니다. </p>
<p><br />소련이 붕괴하고 경제위기가 닥치자 쿠바는 위기에 대쳐하기 위해 이제까지의 장점은 그대로 살리면서도, 과감하게 근대화와 생산력중심의 정책을 생태적이고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한 정책으로 전환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 카스트로 의장은 대대적으로 권력을 지방과 인민에게 이양하는 분권화를 추진하였습니다. 인민이 자발적으로 커뮤니티 운동을 조직하고, 스스로의 삶을 직적 꾸릴 능력을 갖지 못하면 위기 극복을 위한 새로운 정책은 불가능했기 때문입니다. </p>
<p><br />그리하여 쿠바 곳곳에서 작은 단위의 주민자치위원회가 생겨나고 삶의 질을 향상시키기 위한 각종의 아이디어들이 공동체 단위로 실험되고 또 실행되었습니다. 정부는 이러한 인민의 노력을 뒷받침하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지요. 또한 쿠바는 대담하게 시장을 도입하여 농민들이 생산한 농산물들을 직접 사고 팔수 있도록 했습니다. 그 결과 사유재산과 빈부격차가 조금씩 생겨나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 도덕주의에 입각한 사회주의 정책과, 또 교육과 의료를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쿠바의 전통은 여전히 높은 수준의 평등을 유지하는 힘이 되었습니다. </p>
<p><br /><strong>주석궁에 농사를 지으십시오.</strong><br />저는 이 책을 읽으면서 북조선의 인민들과 김 위원장님 생각이 많이 났습니다. 죄송한 말씀이지만 북조선의 지도층들은 쿠바의 지도층에 비하면 너무나 많은 특권을 누리며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근대화를 이루어 자본주의 남한을 이겨야 된다는 강박 속에서 지식인과 관료 계층은 우대하고, 정작 삶의 가장 기본적인 것을 만드는 농민들과 노동자들, 그리고 ‘땅’을 멀리하지는 않았습니까? </p>
<p><br />저는 북조선에서 늘 하는 말 대로 북조선의 식량위기는 미국의 간악한 경제 봉쇄가 가장 큰 원인이라는데 많이 동감합니다. 그러나 그것뿐일까요. 어쩌면 북조선 스스로도 경제 봉쇄를 넘어서 사회를 재구축하고, 인민의 삶의 질을 보호할 노력을 제대로 기울이지 못한 것은 아닐까요? 북조선이 엄청난 돈을 쏟아 부어 미국에 대항할 핵시설을 만들 때, 쿠바는 국방비를 줄여가며 병원을 짓고, 아이들을 교육하고, 식량자급을 위한 농업에 총력을 기울였습니다. 분노를 조직하는 것만이 과연 북조선의 살길이었을까요. 행복과 삶을 조직할 수는 없었을까요. </p>
<p><br />김 위원장님. 과감히 말씀드립니다. 북조선의 살길은 남한과의 경제성장 대결이 아닙니다. 그 싸움은 이제 끝났습니다. 그러나 북조선이 ‘사회주의’이기 때문에 남한보다 먼저 할 수 있는 게 있을 것입니다. 쿠바는 그 길을 먼저 보여주었습니다. 사회주의적인 평등의 가치가 생태와 만났을 때 어떻게 자본주의와는 다른 삶을 창조할 수 있는지를 쿠바의 인민들과 정부는 보여주고 있습니다. </p>
<p><br />평양 시민들이 퇴근 후에 텃밭을 가꿀 수 있도록 땅을 제공하십시오. 105층 짜리 유경호텔 그까이 꺼 그냥 헐어버리고 그 자리에 논을 만드십시다. “자기혁명은 자기가 해야 한다는 것, 남으로부터 원조를 받지 않고 자기갱생을 해야 한다”는 주체사상을 북조선의 인민들은 뼈 속까지 익히고 있지 않습니까? 그 힘을 굳이 남한의 자본주의와 생산력 대결, 군비경쟁에 쏟아붓지 말고 삶을 위해 쏟아 부으면 안 됩니까? 미제에 군사적 힘으로 이기려들지 말고 더 높은 삶의 질로 이기려들면 안 됩니까? 힘으로, 돈으로 경쟁에서 이기려 든다면, 그래서 그것 때문에 소외되는 사람들과 파괴되는 자연이 생겨난다면 그게 자본주의와 다를 게 무엇입니까? </p>
<p><br />남한은 요즘 북조선에 투자하려고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북조선과의 경제 협력을 통해서 남한 경제도 살리고, 북조선도 자본주의화 하여 통일과 경제성장을 동시에 이뤄보자는 게 김대중 정부 이후의 대북정책입니다. 이른바 진보적인 민족주의 지식인들조차도 여기에 대해서 별다른 비판 없이 지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무식한 제가 추측하기로도 이 방향으로 가면 북조선은 분명 비참해집니다. 이런 방향으로 나아가서 통일되면 남한의 미친 부동산 자본, 건설자본이 북조선 땅을 완전히 들쑤셔 놓을 것입니다. 토지보상도 얼마 안 해도 될 테니 이 얼마나 좋은 기회입니까. 게다가 지금 남한에서 비정규직 노동자들이나 이주노동자들 대하는 꼴을 보면 결코 북조선의 노동자들에게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리라는 가능성이 없습니다. 그 길은 북조선이 가야 할 길이 아닙니다. 중국을 한 번 보십시오. 심각한 빈부격차와 도농격차가 인민들의 삶을 위협하고 있습니다.</p>
<p><br />지금은 위기입니다. 저는 핵무기를 개발하고, 서구와 남한과 경쟁하는 것 말고도 이 위기를 극복하는 길이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쿠바는 그러한 길의 한 예를 보여주었습니다. 선군정치를 생태정치로 방향을 한 번 돌려보십시오. 도시마다 먹거리를 직접 생산하도록 장려하십시오. 북조선이 가지고 있는 그 천혜의 자연을 활용하여 생태관광 코스를 계발해보십시오. 인민들에게 자신의 삶을 직접 결정할 권리와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적 환경을 주십시오. 과감하게 특권계급을 청산하고 인민들 속으로 들어가십시오. 이렇게 살아가는 데는 군비를 증강하고 자본주의와 생산력 경쟁을 벌이는 것보다 훨씬 더 적은 돈이 들어갈 것입니다. 잃을 것은 지난날의 식량난이요, 얻을 것은 새로운 생태적, 사회주의적 삶입니다. 김정일 위원장님, 위원장님부터 주석궁에서 농사를 지어보십시오. </p>
<p><br />위원장님의 평화와 건강을 기원하며, 당신의 책 읽어주는 친구 김강. </p><iframe src="http://www.facebook.com/plugins/like.php?locale=ko_KR&href=http%3A%2F%2Fblog.jinbo.net%2Fminjung%2F&layout=standard&show_faces=true&width=445&action=like&colorscheme=light&" scrolling="no" frameborder="0" allowTransparency="true" style="border:none; overflow=hidden; width:445px; height:60px; margin-top:10px; margin-left:5px"></iframe><script type="text/javascript" src="http://tweetmix.net/js/widgetV2.js"></script><script type="text/javascript">if(("TMXW" in window)) { new TMXW.Widget({"shape":"default","target_url":"http://blog.jinbo.net/minjung/","widget_title":"\uc774 \uae00\uacfc \uc5f0\uad00\ub41c \ud2b8\uc717","default_msg":"","width":"445","height":"450","color_upper_back":"93C9E6","color_upper_text":"FFFFFF","color_tweet_back":"FFFFFF","color_border":"EBEBEB","color_text":"888888","color_link":"2ABBD4","widget_type":"1","btn_type":"1","max_messages":"10","is_show_avatar":"1"}).render().start();} </script><div class="buttons-bottom center jinboblog-i-like-this-buttons"><a class="button-jinboblog" href="javascript:void(0);" title="스크랩으로 글 링크를 저장하세요" onclick="recommend('2377',58,'/minjung','');"><img src="/plugins/../jplugins/ILikeThis/images/mini_chuchon.png" alt="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a><a class="button-twitter" href="http://twitter.com/home?status=http%3A%2F%2Fblog.jinbo.net%2Fminjung%2F58+%22%EC%A3%BC%EC%84%9D%EA%B6%81%EC%97%90%20%EB%86%8D%EC%82%AC%EB%A5%BC%20%EC%A7%80%EC%9C%BC%EC%8B%AD%EC%8B%9C%EC%98%A4%20%5B%EB%B3%B5%EC%83%81203%ED%98%B8%5D%20%22" target="_blank" title="트위터로 리트윗합니다"><img src="/plugins/../jplugins/ILikeThis/images/twitter.png" alt="트위터로 리트윗하기" /></a><a class="button-facebook" href="http://www.facebook.com/sharer.php?u=http%3A%2F%2Fblog.jinbo.net%2Fminjung%2F58&t=%EC%A3%BC%EC%84%9D%EA%B6%81%EC%97%90%20%EB%86%8D%EC%82%AC%EB%A5%BC%20%EC%A7%80%EC%9C%BC%EC%8B%AD%EC%8B%9C%EC%98%A4%20%5B%EB%B3%B5%EC%83%81203%ED%98%B8%5D%20" target="_blank" title="페이스북에 공유합니다"><img src="/plugins/../jplugins/ILikeThis/images/facebook.png" alt="페이스북에 공유하기" /></a><a class="button-delicious" href="http://delicious.com/save" onclick="window.open('http://delicious.com/save?v=5&noui&jump=close&url=http%3A%2F%2Fblog.jinbo.net%2Fminjung%2F58&title=%EC%A3%BC%EC%84%9D%EA%B6%81%EC%97%90%20%EB%86%8D%EC%82%AC%EB%A5%BC%20%EC%A7%80%EC%9C%BC%EC%8B%AD%EC%8B%9C%EC%98%A4%20%5B%EB%B3%B5%EC%83%81203%ED%98%B8%5D%20','delicious','toolbar=no,width=550,height=550'); return false;" title="딜리셔스에 북마크합니다"><img src="/plugins/../jplugins/ILikeThis/images/delicious.png" alt="딜리셔스에 북마크" /></a></div><p><strong><a href="http://blog.jinbo.net/minjung/58?commentInput=true#entry58WriteComment">댓글 쓰기</a></strong></p>미국 것이 아니면 안 됩니까? [복상202호] 김강http://blog.jinbo.net/minjung/562007-07-26T13:17:13+09:002007-07-26T13:17:13+09:00<!--FCKeditor--><div class="imageblock left" style="FLOAT: left; MARGIN-RIGHT: 10px"><img class="tt-resampling" style="CURSOR: pointer" onclick="open_img('/tt2/attach/1/1367834928.jpg')" height="296" alt="사용자 삽입 이미지" width="200" src="http://www.kimkang.net/tt2/thumbnail/1/1367834928.w200-h296.resampled.jpg" />
<p class="cap1">박노자, 한겨레신문사, 2007</p>
</div>
<strong>장 선배님께… </strong>
<p> </p>
<p> </p>
<p>선배님, 그간 안녕하셨어요? 저 김강입니다. 미국에서의 유학생활은 어떠신지 모르겠어요. 대학에 처음 올라갔을 때 저에게 공부와 대학생활을 가르쳐주었던 선배 생각, 많이 하곤 해요. 고등학교 때부터 나름 성경도 많이 읽고, 고등학생답지 않게 이것저것 책도 많이 읽었다고 자만하고 있었던 저를 선배님은 바닥부터 뒤흔들어 놓으셨죠. 그 때 그렇게 깨져보지 않았다면 저는 아마 지금도 얄팍한 교리적 지식과 ‘경배와 찬양’이 세상의 전부인줄만 아는 근본주의 기독교인으로 남아 있을 겁니다.</p>
<p><strong></strong></p>
<br />
<p><strong>기독교 세계관을 배우다</strong><br />어디서 몇 자 주워들은 것만 가지고 “하나님의 임재 안에 거하는 찬양인도자”니, “불붙는 지성의 설교자”니 하는 것을 꿈꾸고 살던 저에게 선배님은 하느님이 교회의 하느님만이 아니요, 세상의 하느님임을 가르쳐 주셨고, 기독교 사상의 세계가 웨스터민스터 교리문답이나, 제가 읽었던 목사님들의 설교집보다 훨씬 더 방대하고 깊은 세계임을 가르쳐주셨습니다. 그 때 선배님께서 저에게 권해주셨던 프란시스 쉐퍼나 아더 홈즈, 존 스토트 같은 이들의 책들을 통해 저는 “기독교 세계관”을 알게 되었고, 이 땅에 하느님의 나라를 이루리라는 비전을 가슴에 심을 수 있었습니다. 저보다 서너 살 밖에 차이 안 나는 선배는 어쩜 그렇게 똑똑했는지, 무얼 물어봐도 막힘없이 대답하던 선배의 속사포같은 입술이 아직도 생각이 나네요. </p>
<p> </p>
<p>선배가 유학갈 땐 많이 아쉬웠어요. 선배에게 더 배우고 싶은 것이 많았는데, “한국의 기독교세계관 운동은 2% 부족하다. 가서 제대로 배워올게”라며 미국으로 훌쩍 떠나버려서 내심 많이 섭섭했답니다. 그래도 간간이 선배님의 홈페이지에 들러서 쓰신 글이나 사진들을 보면서 ‘여전히 장 선배는 멋지게 잘 지내고 있구나.’ 하고 확인하곤 합니다. 보수적인 개혁주의 신학을 표방하는 교단의 신학생이라는 신분이 무색할 만큼 그리스도인의 사회참여나 문화변혁, 평화와 정의를 위한 행동의 중요성을 논하는 선배의 글들을 보면 선배를 통해서 한국의 복음주의 담론이나 기독교세계관 논의가 한층 더 풍부해 질 것이라 기대가 됩니다. <br /> <br /><strong></strong></p>
<p><strong>왜 구체적인 삶에 와 닿지 않을까</strong><br />그런데 말이에요 선배…, 오늘은 죄송하게도 감사와 기대의 마음을 전하기보다는 선배의 글을 보면서 느꼈던 아쉬움을 전하려고 이 글을 씁니다. 물론 단순히 선배에게만 느끼는 아쉬움은 아니에요. 어쩌면 한국의 “복음주의”나 “기독교 세계관” 담론 전반에 대한 아쉬움이라 할까요. </p>
<p> </p>
<p>저는 선배의 글이나 최근에 소개되는 기세나 복음주의 담론이 저의 삶과 참 많이 유리되어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단순히 제가 이제는 복음주의자가 아니라서 하는 소리가 아니라 2007년 현재 한반도에서 자리 잡고 사는 저의 개인적, 사회적 삶과 기세나 복음주의 담론이 그다지 가깝지 않다는 이야기에요. </p>
<p> </p>
<p>예를 들자면, 최근에 통과된 비정규직 법안과 관련해서 상당히 논란이 되고 있는 기업이 “기독교적 경영”으로 유명한 “이랜드”죠. 그러나 이 문제와 관련하여 기독교 세계관 진영에서 나온 논의를 찾아보기란 하늘의 별따기입니다. 여전히 총론적 수준에서 ‘기독교적 경영’ 등에 대한 논의만 있을 뿐, 구체적인 한국 상황에서 노동의 문제, 경영의 문제가 다루어지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일전에 선배가 쓰신 ‘평화 공동체’에 관한 글도, 일반론적인 수준의 이야기를 넘어 구체적으로 어떤 운동이 필요할지, 어떤 선례가 있는지에 대해선 잘 알 수 없었습니다. <br /> <br />왜 이런 일이 발생할까요. 왜 기세나 복음주의 담론은 20여 년이 지나도록 구체성을 확보하지 못하고 있는 걸까요. 사실 이미 복음주의나 기세 담론을 생산하는 이들 자신이 이미 이 문제를 10여 년 전부터 지속적으로 지적하고 있는 듯합니다. 각론이 없다는 이야기나, 개혁주의 세계관과는 다른 패러다임이 필요하다든지 하는 나름의 해결책들도 나오고 있구요. 선배가 요즘 주목하고 있는 대조사회로서의 교회라든지, 비폭력 평화 운동 같은 논의들도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나온 이야기들이라고 생각합니다.</p>
<p><strong></strong></p>
<br />
<p><strong>‘지역성’과 ‘식민성’을 다시 생각하다</strong> <br />그런데 오늘 소개할 박노자 선생님의 이 책 <우리가 몰랐던 동아시아>를 읽으면서 저는 조금 다른 각도에서 이 문제를 살펴보고 싶었습니다. 바로 ‘지역성’과 ‘식민성’이라는 관점에서 말이죠. 이 책을 읽으면서 저는 복음주의나 기세 담론이 바로 이 ‘지역성’을 결여하고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구체적인 삶의 현실이 아니라 서구의 학자들의 논의를 마치 우리의 논의인 것처럼 받아들이고 학문했던 지적(知的) ‘식민성’과도 관련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p>
<p> </p>
<p>이 책은 매우 흥미진진한 역사책이자, 90년대 말부터 학계의 트렌드로 자리잡은 ‘동아시아 담론’에 대한 비판적 고찰이기도 합니다. 일단 이 책의 내용을 소개하고 왜 이 책을 읽으면서 기세와 복음주의 담론이 생각났는지를 좀 더 이야기해보려 합니다.</p>
<p> </p>
<p>저자는 “한자․유교 문화권”이라는 전통문화에 기반한 동질성이나 “경제적 공존․평화체제”같은 현실적인 필요성의 코드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기존의 동아시아 담론에 대해 비판적으로 평가합니다. ‘유럽’이 ‘기독교적 가치’라는 하나의 정체성만을 갖지 않고, 그 안에 도도한 반란의 전통을 또한 가지고 있듯이, ‘동아시아’ 역시 ‘유교문화권’이나 ‘권위주의적 위계질서’ 같은 하나의 정체성으로 규정할 수 없는 반란의 전통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입니다.</p>
<p> </p>
<p>특히 저자가 주목하는 ‘동아시아’는 20세기 동아시아의 급진적 사회주의와 아나키즘의 역사입니다. 저자는 이 책의 곳곳에서 한, 중, 일 3국에서 벌어진 사회주의와 아나키즘 운동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민족을 넘어서, 또 복고주의를 넘어서 아래로부터의 동아시아와 세계의 평화와 연대를 주장하고 그것을 위해 투쟁했던 이들의 역사야말로, 오늘날 극우적 민족주의와 군비경쟁, 천민적 자본주의의 지배하에 놓인 동아시아의 민중들이 기억하고 공부해야 할 역사라고 저자는 주장합니다. 이러한 “반란의 동아시아”가 바로 “우리가 몰랐던 동아시아”라는 것이죠. </p>
<p><strong></strong></p>
<br />
<p><strong>반란과 억압의 동아시아</strong><br />그동안 <한겨레21>에 꾸준히 연재된 글을 모은 이 책은 정말로 학교에서의 역사공부를 통해선 들을 수 없었던 “우리가 몰랐던” 동아시아의 반란적 흐름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20세기 서구와 같은 제국주의적 주권체제를 갖추었지만 서구와는 달리 이슬람을 포용하고 받아들였던 중국의 명․청 왕조의 이야기, 니체보다 앞선 시기에 급진적 개인주의를 주장한 아나키즘적 사상가 이탁오, 국왕에게 절하기를 거부한 승려 혜원, 군대와 국가의 폐기를 주장한 톨스토이주의자들의 이야기가 흥미진진하게 펼쳐집니다. </p>
<p> </p>
<p>또한 저자는 동아시아의 반란적 흐름을 중단시키고, 민중을 국가와 민족의 지배하에 두려 했던 동아시아 지배층의 시도 역시 소개하고 있습니다. 동아시아를 지배하기 위해 서구와는 다른 형태의 인종주의(황인종 연대)를 설파한 일본의 지배 계급이나, 친일파 못지않게 민중을 억압하고 때론 학살하기도 했던 조병옥과 같은 숭미파 지식인들, 윗사람에 대해 맹종하는문화가 낳은 동아시아의 특이한 사이비 종교들, 톨스토이의 급진적 이데올로기를 ‘자기 수양’의 담론으로 바꾸어 버린 이광수와 최남선과 같은 이들의 이야기는 우리 시대 억압적 질서의 뿌리를 볼 수 있게 해 줍니다.</p>
<p><strong></strong></p>
<br />
<p><strong>미국 것 말고는 안 되는가?</strong><br />이 책을 읽으면서 저는 한국의 기세나 복음주의 담론이 지나칠 만큼 서구, 특히 미국의 이론에 경도되어 한국 혹은 동아시아라는 우리의 지역적 상황에 들어맞지 않는 이론이 되어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100년 전에 유길준이나 서재필, 윤치호 같은 지식인들이 ‘고루한 전통’을 타파하고 부국강병의 꿈을 이루기 위해 서구 문물이나 선교사들의 기독교를 수용하여 새로운 지배 이데올로기로 삼은 것처럼, 오늘날의 기세나 복음주의 지식인들도 고루한 이원론적 기독교 전통을(사실은 이것도 수입품입니다!) 비판하기 위해 서구의 진보적인 복음주의 이론들을 가져다 쓰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p>
<p> </p>
<p>왜 우리는 기독교 세계관에 있어 이야기의 중요성을 깨닫기 위해 왈시나 미들톤을 읽어야 할까요. 이미 70년대에 이야기의 신학을 정립한 서남동이나 안병무를 읽으면 안 되는 것일까요? 왜 우리는 기독교 평화주의에 대해 공부하기 위해 존 요더를 읽어야 할까요. 함석헌을 읽으면 안 될까요? 왜 우리는 사회참여적 교회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 세이비어 교회나 쉐인 클레이본의 책들을 읽어야 할까요. ‘나눔의 집’이나 80년대 도시산업선교회에서 배울 것은 없을까요? 왜 우리는 영성을 공부하기 위해 헨리 나웬이나 달라스 월라드를 읽어야 할까요. 유영모나 이세종 같은 이들에게선 배울 게 없는 것일까요?</p>
<p> </p>
<p>물론 제가 “서구의 것이 아니라 우리 민족의 것을 택해야 한다.”라는 식의 주장을 하려는 건 아닙니다. 위에서 예를 든 사람들도 ‘순수한 한민족적 사유’를 펼친 것도 아니었구요. 중요한 것은 오늘 우리 현실의 문제를 이해하고, 그것에 맞는 기독교적 사유와 실천을 위해선 지역성과 식민성의 문제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한반도의 현실에서 배태된 사유, 한국 사회의 모순과 억압적 질서를 타계하기 위해 치열하게 고민했던 이들의 사유를 보지 않고 서구의 이론을 따라가기 바쁘다면 기세나 복음주의 담론은 영원히 총론의 수준에서 머물고 말 거란 생각이 듭니다. </p>
<p> </p>
<p>선배님의 관심이 지금까지의 기세운동에 대한 비판과 대안제시에 있다면, 그리고 한국의 구체적 정황 속에서 기독교인으로써 치열하게 살아가는 것에 있다면, 잠시 그동안 읽었던 책들을 덮어놓고 한반도와 동아시아 역사 속의 ‘반란의 기독교’를 한 번 찾아 읽어보는 건 어떨까요. 그것이 복음주의냐 아니냐를 떠나서 주체적으로 기독교를 고민했던 이들의 사유는 선배님이 더 깊고 구체적인 사유와 실천으로 들어가는 데 틀림없이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p>
<p> </p>
<p>물론 하느님의 나라는 한반도의 것이 아니라 전 세계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느님 나라의 보편성을 ‘서구적인 것’ 혹은 ‘미국적인 것’과 혼동할 때 하느님 나라는 우리의 것이 아니게 될 것입니다. 20세기 초 동아시아의 아나키스트들과 사회주의자들이 자신들의 민족적, 지리적 모순과 맞서 싸우면서도 항상 다른 세계를 위해서 민족을 뛰어넘는 세계 민중의 연대를 주장했던 것처럼 우리도 우리가 있는 이곳에서 하느님 나라를 꿈꾸며 전 세계의 정의와 평화를 사랑하는 기독인들과 연대해야 할 것입니다.</p>
<p> </p>
<p>쓰다 보니 좀 건방진 글이 된 것 같아 부끄럽습니다. 선배님의 공부에 더 큰 진보가 있기를 기도할게요. 돌아오시면 하느님께서 꼭 선배님을 크게 쓰시리라 믿으며,</p>
<p> </p>
<p>장 선배님의 책 읽어주는 친구 김강.</p><iframe src="http://www.facebook.com/plugins/like.php?locale=ko_KR&href=http%3A%2F%2Fblog.jinbo.net%2Fminjung%2F&layout=standard&show_faces=true&width=445&action=like&colorscheme=light&" scrolling="no" frameborder="0" allowTransparency="true" style="border:none; overflow=hidden; width:445px; height:60px; margin-top:10px; margin-left:5px"></iframe><script type="text/javascript" src="http://tweetmix.net/js/widgetV2.js"></script><script type="text/javascript">if(("TMXW" in window)) { new TMXW.Widget({"shape":"default","target_url":"http://blog.jinbo.net/minjung/","widget_title":"\uc774 \uae00\uacfc \uc5f0\uad00\ub41c \ud2b8\uc717","default_msg":"","width":"445","height":"450","color_upper_back":"93C9E6","color_upper_text":"FFFFFF","color_tweet_back":"FFFFFF","color_border":"EBEBEB","color_text":"888888","color_link":"2ABBD4","widget_type":"1","btn_type":"1","max_messages":"10","is_show_avatar":"1"}).render().start();} </script><div class="buttons-bottom center jinboblog-i-like-this-buttons"><a class="button-jinboblog" href="javascript:void(0);" title="스크랩으로 글 링크를 저장하세요" onclick="recommend('2377',56,'/minjung','');"><img src="/plugins/../jplugins/ILikeThis/images/mini_chuchon.png" alt="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a><a class="button-twitter" href="http://twitter.com/home?status=http%3A%2F%2Fblog.jinbo.net%2Fminjung%2F56+%22%EB%AF%B8%EA%B5%AD%20%EA%B2%83%EC%9D%B4%20%EC%95%84%EB%8B%88%EB%A9%B4%20%EC%95%88%20%EB%90%A9%EB%8B%88%EA%B9%8C%3F%20%5B%EB%B3%B5%EC%83%81202%ED%98%B8%5D%20%22" target="_blank" title="트위터로 리트윗합니다"><img src="/plugins/../jplugins/ILikeThis/images/twitter.png" alt="트위터로 리트윗하기" /></a><a class="button-facebook" href="http://www.facebook.com/sharer.php?u=http%3A%2F%2Fblog.jinbo.net%2Fminjung%2F56&t=%EB%AF%B8%EA%B5%AD%20%EA%B2%83%EC%9D%B4%20%EC%95%84%EB%8B%88%EB%A9%B4%20%EC%95%88%20%EB%90%A9%EB%8B%88%EA%B9%8C%3F%20%5B%EB%B3%B5%EC%83%81202%ED%98%B8%5D%20" target="_blank" title="페이스북에 공유합니다"><img src="/plugins/../jplugins/ILikeThis/images/facebook.png" alt="페이스북에 공유하기" /></a><a class="button-delicious" href="http://delicious.com/save" onclick="window.open('http://delicious.com/save?v=5&noui&jump=close&url=http%3A%2F%2Fblog.jinbo.net%2Fminjung%2F56&title=%EB%AF%B8%EA%B5%AD%20%EA%B2%83%EC%9D%B4%20%EC%95%84%EB%8B%88%EB%A9%B4%20%EC%95%88%20%EB%90%A9%EB%8B%88%EA%B9%8C%3F%20%5B%EB%B3%B5%EC%83%81202%ED%98%B8%5D%20','delicious','toolbar=no,width=550,height=550'); return false;" title="딜리셔스에 북마크합니다"><img src="/plugins/../jplugins/ILikeThis/images/delicious.png" alt="딜리셔스에 북마크" /></a></div><p><strong><a href="http://blog.jinbo.net/minjung/56?commentInput=true#entry56WriteComment">댓글 쓰기</a></strong></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