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진보에서 역사의 구원으로: 기독교 태그 글 목록http://blog.jinbo.net/minjung/근데 여기 '진보넷' 블로그네(읭?)2013-08-03T13:27:00+09:00Textcube 1.8.3.1 : Secondary Dominant돈 큐핏, 포스트모던 이후 신앙의 세 유형에 대해...김강http://blog.jinbo.net/minjung/3542010-05-10T15:59:36+09:002010-05-10T15:59:36+09:00<!--FCKeditor--><p><span style="color: rgb(51,102,255)"><span class="Apple-style-span">아래 글은 영국의 포스트모던 신학자 돈 큐핏의 글이다. 이 글은 "예수 정신에 따른 기독교 개혁"의 11장에서 발췌한 것이다. 그는 60년대 이후 포스트모던과 새로운 세속주의적 경향이 도래한 이후 더 이상 이전의 계몽주의(자유주의)대 근본주의의 전투가 단순하게 벌어지지 않는다고 이야기하며 포스트모던 이후 교회와 신앙운동의 세 경향을 유형화해서 말하고 있다. 한국적 상황은 어떻게 볼 수 있을런지. 나 같은 사람은 굳이 이 유형에 우겨넣자면 3번일 텐데 영 마뜩찮다. 굳이 하나를 더 추가하자면 벤야민, 지젝, 바디우같은 유형도 가능하지 않을까. 기독교나 성서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취급해서 혁명적 정치로 나아가자는...</span></span></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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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pan style="color: rgb(0,128,128)"><span class="Apple-style-span">1) 복음주의자들 (혹은 근본주의자들)</span></span></p>
<p><span class="Apple-style-span">복음주의자들은 아이러니를 거부한다. 그들의 방법은 앵글로 색슨의 반지성주의를 이제껏 꿈꿔보지 못한 높이로 올리는 것이다. 그들은 철학을 거부한다. 비판 이론을 거부하며, 그들의 언어가 한 소종파의 은밀한 언어처럼 들여진다는 것을 문제 삼지 않는다. 그들은 담대하게 그들의 내부적 은어들은 그들이 정말로 경험한 것들을 표현한 것이라고 선언한다. 그것은 내부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만 모두가 진실이다. 따라서 우리가 만일 그들의 주장을 우리 자신의 경험 안에서 증명하기를 원한다면, 그들 편으로 건너와야 한다는 식이다. 즉, '개종'이 요구된다는 말이다. </span></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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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pan style="color: rgb(0,128,128)"><span class="Apple-style-span">2) 포스트모던 우파 (혹은 '근본적 정통주의'[Radical Orthodoxy], 후기 자유주의)</span></span></p>
<p><span class="Apple-style-span">포스트모던주의자들은 (실재론적) 형이상학의 종말이 이미 왔다는 것과, 이것은 허무주의로 우리를 위협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 최근 영국에서 번성한 포스트모던 우파(그리고 미국의 근본적 정통주의도 - 인용하며 첨가)는 '옥스브리지' 신화의 인기를 행사하기를 즐기는 대학생들을 연상시키는 방식으로 처신한다.<span style="color: rgb(153,153,153)">(옛날 명문대 스타일로 입고, 말하고, 돌아댕기는 애들 이야기인 듯... - 인용하며 첨가)</span> 그들은 도발적인 신(new)전통주의자들이다. 그들은 단순히 표준적 라틴신학을 창백하고 아이러니칼한 상태로, 지적인 근거를 대지 못하는 방법으로 우겨댄다. 이러한 방법으로 그들은 바르트주의자들이나 부분적으로는 서구화된 이슬람 교도를 닮은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나는 그들이 이 두 집단보다도 의식적으로 더 심미적이기에, 그들을 그런 식으로 보는 것이 옳은가에 대해 회의적이다. 그들은 바로 이것이 우리가 살기를 원하는 '신화'이며, 놀기를 원하는 '게임'이라고 말한다. 이것이 또한 바로 우리가 입기를 원하는 '의복'이며, 그 위에서 뛰기를 원하는 '무대'라고 말한다. 우리의 쇼는 도시의 그 어떤 쇼보다도 더 오래 상연되고, 우리의 이야기는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전해진다고 말한다. 실제로 그것은 우리의 이야기며, 최고의 이야기로서, 우리는 그 이야기에 집착한다는 식이다. 그러한 근거 위에서, 젊은 성직자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특별히 대도시에서, 흠잡을 데 없는 '정통'으로 쉽게 간주될 수 있다. 그들 가운데 어떤 이들은 솔직하게 그들이 진짜 정통이라고 생각하는데, 이런 생각은 나에게 두통을 일으킨다.</span></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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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pan style="color: rgb(0,128,128)"><span class="Apple-style-span">3) 포스트모던 좌파, 혹은 수정주의</span></span></p>
<p><span class="Apple-style-span">그들은 현대 철학과 문화를 허무주의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포스트모던 우파의 진단과 왕구닥다리 자유주의적 심각성을 결합한 것으로 보인다. 포스트모던 좌파는 허무주의의 형이상학적 '진실'을 받아들여, 신학적 진술의 의미는 실재론적으로 이해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그러나 이런 입장은 종교적 관념이 사람들을 규제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는 관점으로 통하는 길을 열어두고 있다. 즉 종교적 관념은 우리가 어떻게 우리의 세계를 건설해야 하며, 그 세계를 가치 있는 것으로 만들고, 새롭게 가치를 부여하는 방법을 보여주며,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가 말하는 방식을 통해 허무주의를 정복하는 길을 보여준다는 식으로, 종교적 관념은 우리를 규제한다는 관점이다. 우리는 하느님을 위하여 하느님의 역할을 맡도록 되어 있다. 많은 포스트모던 좌파들이 불교를 찬양하며, 허무주의가 어떤 면에서 하나의 심오한 해방적 교리라고 생각한다. 최근에 그들은 자신들을 탈교회적 하느님 나라 기독교인들로 생각하기에 이르렀다.</span></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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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pan class="Apple-style-span">이런 것들이 오늘날 진지한 종교적 믿음을 위해 선택할 수 있는 가능성들이다. 당신은 1)자신의 종교가 내부자들에게만 허락되는 경험에 의해 증명되기 때문에 컬트처럼 작동하는, 일종의 아이러니를 인정하지 않는 복음주의자가 될 수 있다. 당신은 또한 2)자신의 종교적 세계와 우리의 세속적인 포스트모던 세계 사이에 거리를 잘 알고 있지만 그런 아이러니와 더불어 살아가는 데 만족하는, 즉 아이러니를 느끼는 보수주의자, 혹은 '포스트모던 우파'가 될 수도 있다. 그들은 반항적인 기분으로 "이것은 나의 간증이다. 나는 여기에 목숨을 건다"고 말한다. 마지막으로 3)당신은 포스트모던 좌파가 되어, 모든 교리적 선언을 포기하고 교회를 방어하거나 개혁하려는 노력도 하지 않을 수 있다. 그 대신 포스트모던 좌파는 우리 시대의 서구문화와 공 안에서의 인도주의<span style="color: rgb(153,153,153)">(이것은 서구적인 불교라 할 수 있는 해체주의, 유목주의, 과정 사상 등의 경향을 일컫는 듯하다. - 인용하며 덧붙임)</span>를 하느님 나라가 (불완전하게) 세속적으로 실현된 것으로서 진단한다. 그들은 이런 서구문화를 부수려고 하지 않고, 그 발전에 종교적으로 기여할 수 있기를 추구한다. </span></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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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pan style="color: rgb(153,153,153)"><span class="Apple-style-span">(중략)</span></span></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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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pan style="color: rgb(153,153,153)"><span class="Apple-style-span">(그런데 왜 교회를 떠나지 않느냐는 물음에 대해...)</span></span></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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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pan class="Apple-style-span">교회중심적 사고와 하느님 나라 중심적 사고 사이의 상호작용에 관한 재미있는 예화로서 [...] 동성애자들은 매우 '하느님 나라'적("그 나라에는 남자도 여자도 없고....")인데, 왜 그들은 교회 안에서 완전한 승인을 얻으려고 애쓰는 것일까? 왜 그토록 이들은 열심히 양서류<span style="color: rgb(153,153,153)">(양서류는 어류와 파충류의 성질을 모두 가지며 수륙 양쪽에서 생활)</span>가 되려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종교개혁에 관한 답변을 준다. '개념 미술'은 그것이 예술로서 인정받을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해주는 전통적인 미술관이 아직도 필요한 것이다.<span style="color: rgb(153,153,153)">(개념미술이란 오늘날 '비재현'을 특징으로 하는 현대 미술의 경향을 말한다. 개념미술 작품들은 더 이상 이전의 미술관과 갤러리를 벗어나는 것이 이론적으로 타당할지 모르지만 여전히 거기에서 전시되고 있기도 하다. - 인용하며 덧붙임)</span> 이와 유사하게, 새롭게 떠오르는 하느님 나라 종교는 그 혁신적인 종교적 의미가 가장 분명하게 읽혀질 수 있는 무대를 제공해주는 교회 배경이 필요한 것이다. </span></p><iframe src="http://www.facebook.com/plugins/like.php?locale=ko_KR&href=http%3A%2F%2Fblog.jinbo.net%2Fminjung%2F&layout=standard&show_faces=true&width=445&action=like&colorscheme=light&" scrolling="no" frameborder="0" allowTransparency="true" style="border:none; overflow=hidden; width:445px; height:60px; margin-top:10px; margin-left:5px"></iframe><script type="text/javascript" src="http://tweetmix.net/js/widgetV2.js"></script><script type="text/javascript">if(("TMXW" in window)) { new TMXW.Widget({"shape":"default","target_url":"http://blog.jinbo.net/minjung/","widget_title":"\uc774 \uae00\uacfc \uc5f0\uad00\ub41c \ud2b8\uc717","default_msg":"","width":"445","height":"450","color_upper_back":"93C9E6","color_upper_text":"FFFFFF","color_tweet_back":"FFFFFF","color_border":"EBEBEB","color_text":"888888","color_link":"2ABBD4","widget_type":"1","btn_type":"1","max_messages":"10","is_show_avatar":"1"}).render().start();} </script><div class="buttons-bottom center jinboblog-i-like-this-buttons"><a class="button-jinboblog" href="javascript:void(0);" title="스크랩으로 글 링크를 저장하세요" onclick="recommend('2377',354,'/minjung','');"><img src="/plugins/../jplugins/ILikeThis/images/mini_chuchon.png" alt="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a><a class="button-twitter" href="http://twitter.com/home?status=http%3A%2F%2Fblog.jinbo.net%2Fminjung%2F354+%22%EB%8F%88%20%ED%81%90%ED%95%8F%2C%20%ED%8F%AC%EC%8A%A4%ED%8A%B8%EB%AA%A8%EB%8D%98%20%EC%9D%B4%ED%9B%84%20%EC%8B%A0%EC%95%99%EC%9D%98%20%EC%84%B8%20%EC%9C%A0%ED%98%95%EC%97%90%20%EB%8C%80%ED%95%B4...%22" target="_blank" title="트위터로 리트윗합니다"><img src="/plugins/../jplugins/ILikeThis/images/twitter.png" alt="트위터로 리트윗하기" /></a><a class="button-facebook" href="http://www.facebook.com/sharer.php?u=http%3A%2F%2Fblog.jinbo.net%2Fminjung%2F354&t=%EB%8F%88%20%ED%81%90%ED%95%8F%2C%20%ED%8F%AC%EC%8A%A4%ED%8A%B8%EB%AA%A8%EB%8D%98%20%EC%9D%B4%ED%9B%84%20%EC%8B%A0%EC%95%99%EC%9D%98%20%EC%84%B8%20%EC%9C%A0%ED%98%95%EC%97%90%20%EB%8C%80%ED%95%B4..." target="_blank" title="페이스북에 공유합니다"><img src="/plugins/../jplugins/ILikeThis/images/facebook.png" alt="페이스북에 공유하기" /></a><a class="button-delicious" href="http://delicious.com/save" onclick="window.open('http://delicious.com/save?v=5&noui&jump=close&url=http%3A%2F%2Fblog.jinbo.net%2Fminjung%2F354&title=%EB%8F%88%20%ED%81%90%ED%95%8F%2C%20%ED%8F%AC%EC%8A%A4%ED%8A%B8%EB%AA%A8%EB%8D%98%20%EC%9D%B4%ED%9B%84%20%EC%8B%A0%EC%95%99%EC%9D%98%20%EC%84%B8%20%EC%9C%A0%ED%98%95%EC%97%90%20%EB%8C%80%ED%95%B4...','delicious','toolbar=no,width=550,height=550'); return false;" title="딜리셔스에 북마크합니다"><img src="/plugins/../jplugins/ILikeThis/images/delicious.png" alt="딜리셔스에 북마크" /></a></div><p><strong><a href="http://blog.jinbo.net/minjung/354?commentInput=true#entry354WriteComment">댓글 쓰기</a></strong></p>“로마서, 또는 바울을 읽기 위하여”에 대하여.김강http://blog.jinbo.net/minjung/3292010-02-11T02:00:32+09:002010-02-11T02:00:32+09:00<!--FCKeditor--><p><span style="color: rgb(0, 128, 128); ">*이글은 "로마서, 또는 바울을 읽기 위하여"(손기태, 수유너머N 2010.2.9 화요토론회발표문)에 대한 논평입니다. 올라가 있던 발표문은 허락을 받지 않은 것이어서, 다시 미공개 상태로 돌려두었습니다. 죄송합니다.</span>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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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오늘 우리는 왜 ‘바울’을 읽어야 할까? 아무리 ‘좋게’ 읽는다 해도 그는 1세기에 로마 제국의 한 하위문화를 구성하고 있던 소집단의 이데올로그일 뿐이다. 더욱이 발표자가 취한 서술방식인 사회사적 비평(성서의 사회사를 분석함으로써 텍스트의 의미를 밝히는 작업)은 철저히 바울을 그가 처한 사회적 상황 속에서 고려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 그를 21세기의 우리가 읽어야 할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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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그러나 이 질문은 잘못 던져진 질문이다. 사실 “우리”라는 어떤 ‘주체’가 바울을 읽어야 할 당위나 이유는 존재하지 않는다. 바울은 그저 논평자에게, 그리고 오늘 이 자리의 청중들에게 던져졌을 뿐이다. 그리고 그것이 던져졌기에 어떤 식으로든 반응할 수밖에 없는 상황 속으로 우리는 들어가게 된 것이다. 사실은 모든 바울 읽기는 (그리고 모든 텍스트 읽기는) 이렇게 이루어진다. 그러나 이런 ‘읽기’는 또한 ‘주체’에게는 경험될 수 없는 읽기이기도 하다. 우리가 주체이기 위하여(혹은 주체이기 때문에) 텍스트는 목적론 속으로 타락한다. 그리고 통상 바울은 우리가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기 위해” 읽혀져야 했을 텍스트가 된다. 여기에서 바울이 만든 하나의 세계가 구축된다. 그것을 우리는 ‘기독교’라고 부른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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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따라서 발제자의 바울 독해는 그것이 바울을 철저히 하나의 사회적 상황 속에서 읽는다 할지라도 단지 그 상황 속에 있는 “바울”을 단지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의 ‘바울 기억’에 대한 해체를 수행하는 것이 된다. 이 때 사회사적 비평의 방법은 단지 ‘역사적(진정한) 바울’의 모습을 찾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역사를 넘어갈 수 없는) 바울’을 드러내는 역할을 한다. 바울은 이제 어떤 ‘교조’나 ‘교의’로서가 아니라 우리와 똑같은 ‘역사 속의 인물’로서 우리에게 던져지게 된다. 그리고 이렇게 던져진 ‘바울 읽기’는 결국 오늘날의 교회, 혹은 비단 교회 뿐 아니라 지금 우리가 속해 있는 어떤 ‘조직’을 탈신비화하도록 이끈다. 알고 보니 우리가 자랑스럽게 내새우던 교리, 혹은 윤리는 하늘로부터 떨어진 것이 아니라 어떤 역사적 갈등 상황을 반영하고 있는 생산물이었으며, 그리고 가만 들여다보면 사람 사는 데는 어디나 비슷한 법이라는 것. 바울의 ‘역사화’는, 곧 우리교회 목사님과 장로님의 ‘역사화’이기도 한 것이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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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그러나 발표문의 서술 속에서 이 해체는 다시금 위기 속에 처하는 것처럼 보인다. 역사 속으로 걸어 들어갔던 바울은 다시 역사 밖으로 나온다. 이번에는 ‘사도’로서가 아니라 ‘진보적 사상가’의 모습으로 말이다. 그는 유대교의 구별의 논리와 비유대인들(헬라인)의 차별의 논리를 벗어난 평등의 사상가이며, 로마의 지배 대신 새로운 세상이 열릴 것을 기대하며, 그 씨앗을 평등공동체인 기독교회에서 찾았던 혁명가로 등장한다. 이 서술 속에서 바울은 재신비화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사도 바울’은 ‘혁명가 바울’이 되어 다시금 규범적 위치를 점하는 듯 보인다. 바울은 당시 교회의 갈등 상황 한 복판에 있는 등장인물임에도, 마치 그 갈등상황의 외부에서 그것을 해결할 사상적 과제를 제시하는 사상가처럼 보인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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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그렇다면 과제는 역사적 갈등 상황 속에서 바울이 무엇을 주장했는가에서 멈추지 않고, 바울이 그런 ‘주장’을 하게 만든 바울의 역사적 위치, 그리고 그의 주장과 실천이 또 어떤 상황을 낳았는지에 대해서까지 나아가는 것이 아닐까. 우리가 조금 더 역사적(상황 속의) 바울이라는 주제를 밀고 나가면서 그의 서신들을 다시 뜯어보면 그것은 매우 정세적인, 즉 교회 내의 정치 문제에 개입하기 위한 글로 나타나게 된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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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이를테면 “하느님은 세상의 약한 자들을 택하셔서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신다.”는 바울의 말은 단지 평등주의와 전복의 선언이기만 한 것일까? 이것은 바울의 집요한 사도권 주장과 연결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저 문장이 들어가 있는 고린도전서에서 바울은 자신에 대해 “내가 여러분에게로 갔을 때에, 나는 약하였고, 두려워하였고, 무척 떨었습니다.”라고 주장함으로써 자신이 바로 교회 내의 ‘약한 자’들의 대변자임을 주장하고 있다. 우리는 이런 모습을 요즘도 자주 볼 수 있다. 주로 선거철에. 이명박도 리어카를 끌던 ‘서민’이라서 서민의 아픔을 아주 잘 아신다고 주장하지 않으셨던가. 또한 예루살렘에 올라간 바울이 유대인들에게 핍박당하고 예루살렘 교회로부터도 버려진 것은 불의한 주류가 반-시대적 사상가인 바울을 핍박한 것일까? 바울도 엄청난 교인들과 지지자들을 거느린 교회의 지도자가 아니었던가. 그것은 어쩌면 여야대립에 더 가까운 것은 아닐까. </p>
<p> </p>
<p>바울이 주로 그의 ‘말의 내용’을 통해 재현될 때 우리는 얼마든지 안락하게 그의 말을 소비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진보적인 목사가 목회하는 교회에서 이런 일은 아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목사님은 평등과 사회정의의 하느님 나라에 대해 소리 높여 설교하고, 성도들은 자신들이 진보적인 사상을 가진 공동체 속에 있음을 확인하며, 주중에 자신이 그다지 진보적으로 살지 못했던 것에 대한 꺼림칙함을 씻어내는 것이다. 그러나 그 ‘설교’가 지금 한참 목사님과 장로님이 두 패로 갈라져서 싸우고 있는 와중에 나온 것이라면? 그것은 결코 ‘소비’의 대상이 될 수 없을 것이다. 그 설교에 어떤 식으로 반응하는가가 그 공동체 안에서의 그의 실존을 결정하게 될 테니까.(그리고 이런 예는 단지 교회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바울 이야기는 우리에게 이렇게 - 말하자면 ‘유물론적으로’ - 던져지고 읽혀져야 하는 것은 아닐까. </p>
<p> </p><iframe src="http://www.facebook.com/plugins/like.php?locale=ko_KR&href=http%3A%2F%2Fblog.jinbo.net%2Fminjung%2F&layout=standard&show_faces=true&width=445&action=like&colorscheme=light&" scrolling="no" frameborder="0" allowTransparency="true" style="border:none; overflow=hidden; width:445px; height:60px; margin-top:10px; margin-left:5px"></iframe><script type="text/javascript" src="http://tweetmix.net/js/widgetV2.js"></script><script type="text/javascript">if(("TMXW" in window)) { new TMXW.Widget({"shape":"default","target_url":"http://blog.jinbo.net/minjung/","widget_title":"\uc774 \uae00\uacfc \uc5f0\uad00\ub41c \ud2b8\uc717","default_msg":"","width":"445","height":"450","color_upper_back":"93C9E6","color_upper_text":"FFFFFF","color_tweet_back":"FFFFFF","color_border":"EBEBEB","color_text":"888888","color_link":"2ABBD4","widget_type":"1","btn_type":"1","max_messages":"10","is_show_avatar":"1"}).render().start();} </script><div class="buttons-bottom center jinboblog-i-like-this-buttons"><a class="button-jinboblog" href="javascript:void(0);" title="스크랩으로 글 링크를 저장하세요" onclick="recommend('2377',329,'/minjung','');"><img src="/plugins/../jplugins/ILikeThis/images/mini_chuchon.png" alt="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a><a class="button-twitter" href="http://twitter.com/home?status=http%3A%2F%2Fblog.jinbo.net%2Fminjung%2F329+%22%E2%80%9C%EB%A1%9C%EB%A7%88%EC%84%9C%2C%20%EB%98%90%EB%8A%94%20%EB%B0%94%EC%9A%B8%EC%9D%84%20%EC%9D%BD%EA%B8%B0%20%EC%9C%84%ED%95%98%EC%97%AC%E2%80%9D%EC%97%90%20%EB%8C%80%ED%95%98%EC%97%AC.%22" target="_blank" title="트위터로 리트윗합니다"><img src="/plugins/../jplugins/ILikeThis/images/twitter.png" alt="트위터로 리트윗하기" /></a><a class="button-facebook" href="http://www.facebook.com/sharer.php?u=http%3A%2F%2Fblog.jinbo.net%2Fminjung%2F329&t=%E2%80%9C%EB%A1%9C%EB%A7%88%EC%84%9C%2C%20%EB%98%90%EB%8A%94%20%EB%B0%94%EC%9A%B8%EC%9D%84%20%EC%9D%BD%EA%B8%B0%20%EC%9C%84%ED%95%98%EC%97%AC%E2%80%9D%EC%97%90%20%EB%8C%80%ED%95%98%EC%97%AC." target="_blank" title="페이스북에 공유합니다"><img src="/plugins/../jplugins/ILikeThis/images/facebook.png" alt="페이스북에 공유하기" /></a><a class="button-delicious" href="http://delicious.com/save" onclick="window.open('http://delicious.com/save?v=5&noui&jump=close&url=http%3A%2F%2Fblog.jinbo.net%2Fminjung%2F329&title=%E2%80%9C%EB%A1%9C%EB%A7%88%EC%84%9C%2C%20%EB%98%90%EB%8A%94%20%EB%B0%94%EC%9A%B8%EC%9D%84%20%EC%9D%BD%EA%B8%B0%20%EC%9C%84%ED%95%98%EC%97%AC%E2%80%9D%EC%97%90%20%EB%8C%80%ED%95%98%EC%97%AC.','delicious','toolbar=no,width=550,height=550'); return false;" title="딜리셔스에 북마크합니다"><img src="/plugins/../jplugins/ILikeThis/images/delicious.png" alt="딜리셔스에 북마크" /></a></div><p><strong><a href="http://blog.jinbo.net/minjung/329?commentInput=true#entry329WriteComment">댓글 쓰기</a></strong></p>크리스마스의 한 기억김강http://blog.jinbo.net/minjung/3012009-12-18T20:31:33+09:002009-12-18T20:31:33+09:00<!--FCKeditor--><blockquote>
<p><span style="color: rgb(51, 102, 255);">“우리가 귀를 기울여 듣는 목소리들 속에는 이제는 침묵해버린 목소리들의 메아리가 울리고 있지 않은가? ……만약 그렇다면 과거 세대의 사람들과 우리 사이에는 은밀한 약속이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지상에서 기다려졌던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우리 이전에 존재했던 모든 세대와 희미한 메시아적 힘이 함께 주어져 있는 것이고, 과거는 이 힘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발터 벤야민,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span><br />
</p>
</blockquote>
<p>"커플 천국, 솔로 지옥"이라는 말조차 이제는 먼 옛날의 경구가 되어버린 지금. '크리스마스'에 대해 다시 말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여기, 엄숙한 기독교인의 의고주의가 있다. "크리스마스는 너무나 세속적이고 상업적인 축제로 변했다. 다시금 아기 예수 탄생의 의미를 되새기자." 그러나 교회라는 '산업'의 구조를 생각하면 아기 예수 탄생이라는 '시즌'에 '종교재화'의 대물량공세를 펼치는 기독교야말로 이미 세속적이고 상업적이 된지 오래다. 크리스마스라는 과거의 '진정한 이미지'는 사실은 교회 밖에서만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br />
<br />
태초에 무슨 일이 있었을까? 우리는 그것을 알지 못한다. 크리스마스라는 절기 자체가 기독교의 탄생기에는 있지도 않았던 후대의 창작물일 뿐더러, 그 크리스마스 이야기를 채우는 복음서의 예수 탄생 이야기도 그것을 전해주는 유일한 두 문서 - 마태복음과 누가복음 - 의 차이가 너무나도 크다. 이래서 어릴 적 예수 탄생 이야기를 교회에서 공연할 때 마다 언제나 헷갈렸던 거다. 도대체 동방박사가 먼저 등장해야 하는가, 아니면 목동들이 먼저 등장해야 하는가. 요셉과 마리아는 본래 베들레헴 사람이었다가 나사렛으로 이주하는가, 아니면 원래 나사렛 사람인가. 태어난 뒤 예수 가족은 헤롯왕의 추격을 피해 이집트로 도망치는가, 반대로 수도 예루살렘의 성전에서 안전하게 예배를 드렸는가.<br />
<br />
그렇다면 우리는 날조된 이야기에서 출발하여 '크리스마스'라는 절기의 의례를 반복하고, 그걸 통해 종교재화를 팔아먹고, 또 거기에 기생해 모텔과 카페와 식당과 백화점이 한철 대박을 내고 있는 것일까? 원본 없는 복사물들(시뮬라크르)의 연쇄? <br />
<br />
하지만 태초에 이런 일은 있었다. 우리는 이 '이런 일'과 성서 이야기 사이에서만 '과거의 진정한 이미지'를 발견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것은 학살이다. 서로 모순되는 두 예수 탄생 이야기에도 일치하는 이야기가 두 개 있다. 하나는 예수가 '성령으로 잉태되어 태어났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예수는 '아비 없는 자식'이었던 것이다. 당시 나사렛에 아비 없는 아이는 매우 흔했다. 예수가 태어났으리라 추정되는 BC 4년 경, 나사렛에서 고작 5~6km 떨어진 세포리스에서 봉기가 일어났던 것이다. 로마는 잔인하게 그들을 짓밟았다. 세포리스와 주변 지역 전체가 초토화되고, 그 후 몇 년간 지역민들은 '재건'을 명목으로 강제노역에 동원되었다. 학살의 절망 속에서 그 절망을 상기시키는 아이들이 계속 태어났을 것이다. 그 중에 '예수'도 있었다. <br />
<br />
하지만 사람들은 그를 '절망의 기억' 속에만 두지 않았다. 두 복음서가 일치하는 또 하나의 이야기는 예수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났다는 것이다. 베들레헴에서 태어나는 아이. 그 아이는 팔레스타인에서 전통적으로 '언젠가 올 메시아'를 상징했다. 도저히 끝이 날 것 같지 않는 지배와 폭력의 세상 속에서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언젠가 야훼의 통치를 실현할 메시아가 예언에 따라 '베들레헴'에서 태어날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성서를 기록한 사람들은 예수가 바로 '그'였다고, 학살의 절망 속에서 태어난 '아비 없는 자식' 예수가 곧 그들의 '구원자'라고, 그를 기억해달라고 우리에게 말을 걸고 있는 것이다. <br />
<br />
학살의 절망 속에서도 아이는 태어난다. 성서 이야기 속에 흔적처럼 남아 있는 이 기억이 오늘날 '크리스마스의 진정한 이미지'를 구성한다. 올 한 해 한국사회는 그야말로 무차별 학살을 겪었다. 처음에는 철거민들이 불태워 죽임당하고, 다음에는 전직 대통령이 사법 살인을 당하고, 마지막으로 민주노조운동이 절망 속에서 죽어가고 있다. 그 어느 때보다도 스산한 올 해의 크리스마스에, 우리는 조용히 학살의 절망 속에서 태어난 메시야를 기억한다. 이 조용함이 시끄러움으로, 그래서 '커플 천국'과 '소망 교회'의 모든 소란스러움을 압도하는 요란함으로 전환될 때 우리는 메시야의 도래를 확인하게 될 것이다. <span style="color: rgb(51, 102, 255);">"메시아는 구원자로서만 오지 않는다. 그는 '적그리스도'를 극복하는 자로서 온다……"(벤야민,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span></p><iframe src="http://www.facebook.com/plugins/like.php?locale=ko_KR&href=http%3A%2F%2Fblog.jinbo.net%2Fminjung%2F&layout=standard&show_faces=true&width=445&action=like&colorscheme=light&" scrolling="no" frameborder="0" allowTransparency="true" style="border:none; overflow=hidden; width:445px; height:60px; margin-top:10px; margin-left:5px"></iframe><script type="text/javascript" src="http://tweetmix.net/js/widgetV2.js"></script><script type="text/javascript">if(("TMXW" in window)) { new TMXW.Widget({"shape":"default","target_url":"http://blog.jinbo.net/minjung/","widget_title":"\uc774 \uae00\uacfc \uc5f0\uad00\ub41c \ud2b8\uc717","default_msg":"","width":"445","height":"450","color_upper_back":"93C9E6","color_upper_text":"FFFFFF","color_tweet_back":"FFFFFF","color_border":"EBEBEB","color_text":"888888","color_link":"2ABBD4","widget_type":"1","btn_type":"1","max_messages":"10","is_show_avatar":"1"}).render().start();} </script><div class="buttons-bottom center jinboblog-i-like-this-buttons"><a class="button-jinboblog" href="javascript:void(0);" title="스크랩으로 글 링크를 저장하세요" onclick="recommend('2377',301,'/minjung','');"><img src="/plugins/../jplugins/ILikeThis/images/mini_chuchon.png" alt="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a><a class="button-twitter" href="http://twitter.com/home?status=http%3A%2F%2Fblog.jinbo.net%2Fminjung%2F301+%22%ED%81%AC%EB%A6%AC%EC%8A%A4%EB%A7%88%EC%8A%A4%EC%9D%98%20%ED%95%9C%20%EA%B8%B0%EC%96%B5%22" target="_blank" title="트위터로 리트윗합니다"><img src="/plugins/../jplugins/ILikeThis/images/twitter.png" alt="트위터로 리트윗하기" /></a><a class="button-facebook" href="http://www.facebook.com/sharer.php?u=http%3A%2F%2Fblog.jinbo.net%2Fminjung%2F301&t=%ED%81%AC%EB%A6%AC%EC%8A%A4%EB%A7%88%EC%8A%A4%EC%9D%98%20%ED%95%9C%20%EA%B8%B0%EC%96%B5" target="_blank" title="페이스북에 공유합니다"><img src="/plugins/../jplugins/ILikeThis/images/facebook.png" alt="페이스북에 공유하기" /></a><a class="button-delicious" href="http://delicious.com/save" onclick="window.open('http://delicious.com/save?v=5&noui&jump=close&url=http%3A%2F%2Fblog.jinbo.net%2Fminjung%2F301&title=%ED%81%AC%EB%A6%AC%EC%8A%A4%EB%A7%88%EC%8A%A4%EC%9D%98%20%ED%95%9C%20%EA%B8%B0%EC%96%B5','delicious','toolbar=no,width=550,height=550'); return false;" title="딜리셔스에 북마크합니다"><img src="/plugins/../jplugins/ILikeThis/images/delicious.png" alt="딜리셔스에 북마크" /></a></div><p><strong><a href="http://blog.jinbo.net/minjung/301?commentInput=true#entry301WriteComment">댓글 쓰기</a></strong></p>스피노자의 마지막김강http://blog.jinbo.net/minjung/2242009-02-26T16:43:59+09:002009-02-26T16:43:59+09:00<!--FCKeditor--><p><font color="#339966">동서문화사 전집 시리즈(World book)로 나온 <에티카/정치론> 뒤에 딸린 상당히 자세한 스피노자에 대한 전기자료에서 발췌.(참고로 이 책은 독일어판 전집에서 번역한 것이며, 가격은 무려 <strong>9,800</strong>원. 98,000원이 아니다! 할렐루야!) 전기의 마지막 부분을 읽다가 눈시울이 붉어졌다. 나는 이 사람에 관한 한 거리두기가 안 되는 듯 싶다. 그는 진정 나의 슈퍼스타인 것이다.</font></p>
<p> </p>
<p> </p>
<p>"1676년 겨울부터 이듬해 봄에 걸쳐 추위가 예상 외로 혹독했다. 스피노자의 건강은 현저하게 나빠졌다. 1677년 2월 의사인 슈라(스피노자의 마지막 제자이기도 하다.)는 라이프니츠에게 스피노자의 증세가 나날이 악화되어 죽음이 눈 앞에 이르렀음을 알렸다. 스피노자도 자신의 죽음을 예감했는지 주변 정리를 시작했다. 그의 주변 정리는 자신의 연구 성과라고 할 수 있는 정신적인 유산에 한정되었다. 이 때 스스로 납득할 수 없었던 성과, 예를 들면 구약성서의 네덜란드 어 번역 같은 것들은 태워버렸다. 다른 논문은 사후 암스테르담의 친구이며 서점 주인이기도 한 류웰츠에게 보내도록 집주인에게 의뢰했다. 그 외의 다른 물질적인 유산에 대해서는 아무런 지시도 없었다. 죽음을 목전에 두고서도 그의 생활 태도는 평소와 전혀 다름이 없었다. <에티카>에서 말한 '자유로운 인간'의 생활태도로 일관했다. </p>
<p> </p>
<p>사망 당일, 2월 21일은 일요일이었다. 그는 극도로 쇠약해졌음에도 불구하고 침대에서 일어나 아래층으로 내려가서 주인 부부와 잡담을 하고, 낮에는 암스테르담에서 슈라가 가지고 온 닭고기로 끊인 수프를 맛있게 먹었다. 하지만 주인 부부가 오후에 교회에 갔다가 돌아왔을 때, 스피노자는 슈라에게 기대어 오후 3시쯤 숨을 거두었다는 말을 듣게 되었다. </p>
<p> </p>
<p>집주인 스페이크는 스피노자와의 약속을 충실하게 지켰다. 그는 공증인에게 재산목록을 만들게 하고 봉인했다. 이 재산목록은 그의 생활이 얼마나 알뜰하게 채워져 있었는지를 보여 준다. 침대, 방석, 이불, 모자 두 개, 구두 두 켤레, 속옷, 낡은 여행 가방, 책상, 의자, 체스 도구, 렌즈 연마기 약간의 렌즈와 작은 초상화, 은 버클 2개, 논문 표지에 자주 찍힌 '조심할 것'이라 쓰인 은 인장 등이었다. 현금은 거의 없었고, 친구들로부터의 연금은 값비싼 책으로 바뀌어 있었다.(그의 후원자들이 준 돈은 거의 대학 교수의 임금에 상응할만큼이었다. 하지만 그 당시의 책값은 우리의 상상 이상이었다.) 귀중한 기록이나 원고가 들어 있던 책은 암스테르담에서 그의 친척이 도착하기 전에 류웰츠에게 옮겨졌다. </p>
<p> </p>
<p>스피노자의 장례식은 1677년 2월 25일에 행해졌고, 스포이의 신교회에 매장되었다. 이것은 과거 비트(주1)를 지지했던 사람들의 도움에 의한 것으로 장례에는 이들 명사들이 장례용 마차 6대를 동원하여 관을 뒤따르게 했다. </p>
<p> </p>
<p>암스테르담에서는 그의 친구들이 스피노자의 초고를 팔 것인가에 대해 한때 고민을 했으나, 곧 초고를 책으로 만들어 유고집의 형식으로 세상에 내놓기로 했다. 마이엘이 라틴 어 원문을 교정하고, 이에레스가 네덜란드 어로 서문을 썼다. 슈라가 편지를 정리하고, 바우메스텔이 라틴 어로 송사를 썼다. 유고집에는 라틴 어 판과 네덜란드 어 판 2 종류가 있고, 전자는 1677년 겨울에, 후자는 그 이듬해에 출판되었다. 이것은 프라제마켈에 의해 라틴 어에서 네덜란드 어로 번역된 것이다. </p>
<p> </p>
<p>이에레스의 서문은 스피노자의 주장을 비호하고 그를 무신론자라고 하는 비난에서 지키기 위해, 그의 주장이 그리스도교의 주장과 일치하는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선의에 넘치는 스피노자에 대한 변호도 그 유고집을 이단의 운명에서 구할 수는 없었다. 신학자와 관헌은 이 유고집을 1678년 6월 25일 금서로 지정해 버렸다. "</p>
<p> </p>
<p><font color="#99cc00">주1 - 비트 형제는 네덜란드가 아직 왕국으로 바뀌기 전 공화파의 지도자였다. 그들은 깔뱅파의 공격에 맞서 스피노자의 자유로운 학문 연구를 후원했다. 그러나 프랑스가 네덜란드를 침공하자 깔뱅주의자들의 사주를 받은 민중에 의해 잔인하게 살해당하고 만다. 이후 네덜란드는 권위주의적인 총독정치로 복귀하게 되며, 이것은 이후 왕정으로 이어진다.</font></p><iframe src="http://www.facebook.com/plugins/like.php?locale=ko_KR&href=http%3A%2F%2Fblog.jinbo.net%2Fminjung%2F&layout=standard&show_faces=true&width=445&action=like&colorscheme=light&" scrolling="no" frameborder="0" allowTransparency="true" style="border:none; overflow=hidden; width:445px; height:60px; margin-top:10px; margin-left:5px"></iframe><script type="text/javascript" src="http://tweetmix.net/js/widgetV2.js"></script><script type="text/javascript">if(("TMXW" in window)) { new TMXW.Widget({"shape":"default","target_url":"http://blog.jinbo.net/minjung/","widget_title":"\uc774 \uae00\uacfc \uc5f0\uad00\ub41c \ud2b8\uc717","default_msg":"","width":"445","height":"450","color_upper_back":"93C9E6","color_upper_text":"FFFFFF","color_tweet_back":"FFFFFF","color_border":"EBEBEB","color_text":"888888","color_link":"2ABBD4","widget_type":"1","btn_type":"1","max_messages":"10","is_show_avatar":"1"}).render().start();} </script><div class="buttons-bottom center jinboblog-i-like-this-buttons"><a class="button-jinboblog" href="javascript:void(0);" title="스크랩으로 글 링크를 저장하세요" onclick="recommend('2377',224,'/minjung','');"><img src="/plugins/../jplugins/ILikeThis/images/mini_chuchon.png" alt="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a><a class="button-twitter" href="http://twitter.com/home?status=http%3A%2F%2Fblog.jinbo.net%2Fminjung%2F224+%22%EC%8A%A4%ED%94%BC%EB%85%B8%EC%9E%90%EC%9D%98%20%EB%A7%88%EC%A7%80%EB%A7%89%22" target="_blank" title="트위터로 리트윗합니다"><img src="/plugins/../jplugins/ILikeThis/images/twitter.png" alt="트위터로 리트윗하기" /></a><a class="button-facebook" href="http://www.facebook.com/sharer.php?u=http%3A%2F%2Fblog.jinbo.net%2Fminjung%2F224&t=%EC%8A%A4%ED%94%BC%EB%85%B8%EC%9E%90%EC%9D%98%20%EB%A7%88%EC%A7%80%EB%A7%89" target="_blank" title="페이스북에 공유합니다"><img src="/plugins/../jplugins/ILikeThis/images/facebook.png" alt="페이스북에 공유하기" /></a><a class="button-delicious" href="http://delicious.com/save" onclick="window.open('http://delicious.com/save?v=5&noui&jump=close&url=http%3A%2F%2Fblog.jinbo.net%2Fminjung%2F224&title=%EC%8A%A4%ED%94%BC%EB%85%B8%EC%9E%90%EC%9D%98%20%EB%A7%88%EC%A7%80%EB%A7%89','delicious','toolbar=no,width=550,height=550'); return false;" title="딜리셔스에 북마크합니다"><img src="/plugins/../jplugins/ILikeThis/images/delicious.png" alt="딜리셔스에 북마크" /></a></div><p><strong><a href="http://blog.jinbo.net/minjung/224?commentInput=true#entry224WriteComment">댓글 쓰기</a></strong></p>“민중이 세계를 구원해야 한다면, 민중을 구원할 이는 누구인가?”김강http://blog.jinbo.net/minjung/2062008-12-07T18:13:46+09:002008-12-07T18:13:46+09:00<!--FCKeditor--><p><em><font size="4">“민중이 세계를 구원해야 한다면, 민중을 구원할 이는 누구인가?”</font></em> </p>
<p> </p>
<p>몰트만이 민중신학자들에게 던진 비판적 질문이다. 이것은 민중신학자들이 상징론(서남동), 혹은 사건론(안병무)적으로 “고난 받는 종”(이사야53장)과 예수, 그리고 민중을 동일시하는 것에 대한 문제제기였다. 그는 이러한 민중신학의 방법론이 예수를 민중의 상징으로 “위축”시킨다고 보았다. </p>
<p> </p>
<p>그는 인류의 구원은 “타자와 함께 하는 현존”이라는 연대행위와 “타자를 위한 현존”이라는 대리행위의 변증법적 종합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그는 민중신학의 민중메시야론은 연대행위만을 이야기할 뿐 민중의 바깥에서, 민중을 위하여 죽임당하는 대리행위의 기독론을 보지 못한다고 비판한다. “대리행위 없는 단순한 연대는 고난을 극복하지 못하고, 오히려 고통을 증가시킬 뿐이다 ……그러므로 하느님만이 감당할 수 있는 속죄의 고난과, 극복되어야 할 백성의 고난을 구분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p>
<p> </p>
<p>그러나 정말 그럴까? 민중의 연대만으로는 구원은 불충분한 것일까?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이 있어야 그 위에서 민중의 연대, 민중의 자기 초월이 의미가 있는 것일까? 몰트만은 변증법을 신학에 도입함으로써 세계와 분리되어도 별 상관이 없는 기존의 군주적 절대신론을 극복하고 신과 세계를 연결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한 편으로 그러한 변증법은 다시금 그를 기존의 신학체제 속으로 포섭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p>
<p> </p>
<p>“민중이 세계를 구원해야 한다면, 민중을 구원할 이는 누구인가?” 몰트만의 이 질문에 대해 민중신학은 다른 질문을 던지는 것으로 족하리라. <em>“도대체 2000년 전에 살았던 한 사람이 - 그 사람이 사실은 신이었다 한들! - 어떻게 오늘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가?”</em>라고 말이다.(혹은 “예수가 세상을 구원한다면, 예수를 구원할 자는 누구인가?”라고 그의 질문을 뒤집을 수도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기독론은 결국 “인간과 세상을 창조한 하느님, 범죄한 인류, 내려져야 할 징벌”이라는 프레임이 전제되어야만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p>
<p> </p>
<p>민중신학은 애초에 구원자와 구원받는 사람의 구분(혹은 심판받아야 할 세상과 심판할 하느님의 구분)이라는 신학의 프레임 바깥에 서 있다. 구분이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데 변증법적 종합이 있을 필요도 없다. 우리는 오히려 몰트만의 구원론이야말로, “고난을 극복하지 못하고, 고통을 증가시킬 뿐”이라고 비판받아야 할 것은 아닐까. 왜냐하면 이제 고통 받는 사람은 고통을 극복하기 위해 심지어 그가 이전엔 믿지도 않았던 신을 믿어야 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p>
<p> </p>
<p>때문에 민중신학의 중요한 과제는 몰트만의 비판적 질문에 응답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변증법적 프레임 바깥으로 더욱 탈주하는 것이다. “민중 사건이 곧 예수 사건”이라는 안병무의 주장이나, 서남동의 “두 이야기의 합류”는 곧잘 변증법으로 오해받곤 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그것을 변증법에 대한 완전한 폐기로 이해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즉 민중 사건과 예수 사건을 변증법적으로 종합되어야 할 것이 아니라 양자를 모두 하나의 탈주의 사건으로, 그리하여 또 다른 탈주를 촉발하는 하나의 감응(affect)적 사건으로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 아닐까. 안병무가 성서와 역사에서 “화산맥”을 발견했을 때 그것은 역사 안에서 하나의 결정적이고 유일회적인 사건으로서의 예수 사건, 십자가와 부활 사건이라는 개념을 폐기한 것이었다. 그 대신 민중신학이 발견한 것은 수다한 민중의 분출이요, 그리하여 수다한 예수 사건들이었던 것이다. <br /> <br />이것은 민중신학이 해방신학과도 매우 다르다는 것을 보여준다. <strong>정통신학과 해방신학은, 말하자면 만 사람이 있어도 하나의 구원,즉 그리스도 예수를 통한 하느님의 구원만이 있다</strong>. 다만 정통신학이 그 하나의 구원을 인류의 죄에 대한 대속으로, ‘믿는 자’의 천국행으로 이해했다면, 해방신학은 그것을 고통 받는 사람을 향한 우선적 선택으로 이해함으로써 내용적으로 구분될 뿐이다. </p>
<p> </p>
<p>민중신학은 이러한 신학의 틀과 ‘형식적’으로도 구분된다. <strong>만 사람이 있으면 만 개의 구원이 있다. 구원은 수없이 일어나고, 또 그 구원사건들은 서로 소통하고 촉발한다.</strong> 따라서 민중신학의 과제는 하나의 구원론을 조직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구원의 사건들을 발견하고 증언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신학은 정치적 행동에 있어 기존 신학의 대리적 기독론에 상응한다 할 수 있는 대의적/주권적 정치와 구별되도록 이끈다. 오직 대중의 아래로부터의 해방실천만이 대중 스스로를 구원하는 것이다. 여기에 다른 초월적 구원자 - 교회든, 정당이든, 예수든 - 는 없다.</p>
<p><br /><font color="#808080">p.s. 복음서에서 우리는 이러한 예수 사건의 한 모습으로서, 수로보니게 여인과 혈루병 걸린 여인의 구원 사건을 볼 수 있다. 그들의 구원은 위로부터 주어진 것이 결코 아니다. 그들은 구원을 위해 호소하고 투쟁한다. 그들은 예수가 가졌던 이방인에 대한 통념을 깨뜨려 예수로 하여금 새로운 시각을 열게 하고(수로보니게 여인), 감히 정결하지 못했던 손으로 예수의 옷을 잡음으로 그의 능력이 유대의 정결법을 깨뜨리고 흘러가도록 한다.(혈루병 걸린 여인) </font></p>
<p><font color="#808080"> </font></p>
<p><font color="#808080">이러한 깨뜨림의 순간에 그들은 자신들뿐만 아니라 예수마저 구원한다. 예수가 유대 민족주의에서 멈추지 않도록, 남성 중심의 정결법 체제로 흡수되지 않도록 그들은 예수에게 있어 메시야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다. 하느님 나라는 예수가 설한 말들에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예수 주위의 이러한 민중들, 단지 고통받고 억눌려 있기만 한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사건을 창조하는 민중들의 운동을 통해 드러나는 것이 아닐까.</font></p><iframe src="http://www.facebook.com/plugins/like.php?locale=ko_KR&href=http%3A%2F%2Fblog.jinbo.net%2Fminjung%2F&layout=standard&show_faces=true&width=445&action=like&colorscheme=light&" scrolling="no" frameborder="0" allowTransparency="true" style="border:none; overflow=hidden; width:445px; height:60px; margin-top:10px; margin-left:5px"></iframe><script type="text/javascript" src="http://tweetmix.net/js/widgetV2.js"></script><script type="text/javascript">if(("TMXW" in window)) { new TMXW.Widget({"shape":"default","target_url":"http://blog.jinbo.net/minjung/","widget_title":"\uc774 \uae00\uacfc \uc5f0\uad00\ub41c \ud2b8\uc717","default_msg":"","width":"445","height":"450","color_upper_back":"93C9E6","color_upper_text":"FFFFFF","color_tweet_back":"FFFFFF","color_border":"EBEBEB","color_text":"888888","color_link":"2ABBD4","widget_type":"1","btn_type":"1","max_messages":"10","is_show_avatar":"1"}).render().start();} </script><div class="buttons-bottom center jinboblog-i-like-this-buttons"><a class="button-jinboblog" href="javascript:void(0);" title="스크랩으로 글 링크를 저장하세요" onclick="recommend('2377',206,'/minjung','');"><img src="/plugins/../jplugins/ILikeThis/images/mini_chuchon.png" alt="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a><a class="button-twitter" href="http://twitter.com/home?status=http%3A%2F%2Fblog.jinbo.net%2Fminjung%2F206+%22%E2%80%9C%EB%AF%BC%EC%A4%91%EC%9D%B4%20%EC%84%B8%EA%B3%84%EB%A5%BC%20%EA%B5%AC%EC%9B%90%ED%95%B4%EC%95%BC%20%ED%95%9C%EB%8B%A4%EB%A9%B4%2C%20%EB%AF%BC%EC%A4%91%EC%9D%84%20%EA%B5%AC%EC%9B%90%ED%95%A0%20%EC%9D%B4%EB%8A%94%20%EB%88%84%EA%B5%AC%EC%9D%B8%EA%B0%80%3F%E2%80%9D%22" target="_blank" title="트위터로 리트윗합니다"><img src="/plugins/../jplugins/ILikeThis/images/twitter.png" alt="트위터로 리트윗하기" /></a><a class="button-facebook" href="http://www.facebook.com/sharer.php?u=http%3A%2F%2Fblog.jinbo.net%2Fminjung%2F206&t=%E2%80%9C%EB%AF%BC%EC%A4%91%EC%9D%B4%20%EC%84%B8%EA%B3%84%EB%A5%BC%20%EA%B5%AC%EC%9B%90%ED%95%B4%EC%95%BC%20%ED%95%9C%EB%8B%A4%EB%A9%B4%2C%20%EB%AF%BC%EC%A4%91%EC%9D%84%20%EA%B5%AC%EC%9B%90%ED%95%A0%20%EC%9D%B4%EB%8A%94%20%EB%88%84%EA%B5%AC%EC%9D%B8%EA%B0%80%3F%E2%80%9D" target="_blank" title="페이스북에 공유합니다"><img src="/plugins/../jplugins/ILikeThis/images/facebook.png" alt="페이스북에 공유하기" /></a><a class="button-delicious" href="http://delicious.com/save" onclick="window.open('http://delicious.com/save?v=5&noui&jump=close&url=http%3A%2F%2Fblog.jinbo.net%2Fminjung%2F206&title=%E2%80%9C%EB%AF%BC%EC%A4%91%EC%9D%B4%20%EC%84%B8%EA%B3%84%EB%A5%BC%20%EA%B5%AC%EC%9B%90%ED%95%B4%EC%95%BC%20%ED%95%9C%EB%8B%A4%EB%A9%B4%2C%20%EB%AF%BC%EC%A4%91%EC%9D%84%20%EA%B5%AC%EC%9B%90%ED%95%A0%20%EC%9D%B4%EB%8A%94%20%EB%88%84%EA%B5%AC%EC%9D%B8%EA%B0%80%3F%E2%80%9D','delicious','toolbar=no,width=550,height=550'); return false;" title="딜리셔스에 북마크합니다"><img src="/plugins/../jplugins/ILikeThis/images/delicious.png" alt="딜리셔스에 북마크" /></a></div><p><strong><a href="http://blog.jinbo.net/minjung/206?commentInput=true#entry206WriteComment">댓글 쓰기</a></strong></p>구 좌파와의 논쟁, 그리고 기독교...김강http://blog.jinbo.net/minjung/1702008-08-17T22:05:35+09:002008-08-17T22:05:35+09:00<!--FCKeditor--><p>1. <br />때때로 구좌파와 논쟁을 벌여야 할 때가 있다. 최근엔 촛불집회와 관련해서 쓴 몇 편의 글 덕에 그럴 기회가 전보다 자주 있었다. 그들과 논쟁을 할 때면 그 내용보다 그네들의 논쟁 방식에 많은 관심이 가곤 한다. 그들의 논쟁 방식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다. </p>
<p> </p>
<p>1) 상대방의 이야기 자체를 반박하기보다는 상대방을 카테고리화 한다. 이를테면 “그런 주장은 아나키즘이다.”, “자율주의다.” 식으로 상대방에게 범주를 부과한다. 그러고 나서 그들은 상대방의 주장이 아니라 “아나키즘”과 “자율주의”를 비판한다. </p>
<p> </p>
<p>2) 그러면 그게 그 사람에 대한 비판이 된다고 믿는다. 즉, “당신의 주장은 아나키즘이다. 아나키즘은 이러이러해서 틀렸다. 그러므로 당신의 주장도 틀렸다.” 라는 식이다. </p>
<p> </p>
<p>3) 이들이 이런 식으로 논쟁을 하는 이유는 안으로는 자신들의 교조를 사수하기 위해서 - 그리고 그것을 통해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 이며 밖으로는 상대방을 ‘이기기’ 위해서이다. 즉, 상대방의 주장을 있는 그대로 듣지 않고 어떤 “주의”의 교조로 환원한 후, 자신의 프레임에 집어넣고 지금까지 늘 그래왔던 방식으로 그 “주의”를 비판한다. 자신의 프레임 속에 있는 한 그 논쟁은 이길 수밖에 없는 논쟁이 된다. 그들은 이김으로써 자신의 교조와 자신(의 공동체)을 지키려 한다. 가장 황당하고 안타까운 경우는 트로츠키주의자들과 논쟁을 하게 될 경우인데, 이들은 자신들이 스탈린주의자들에게 똑같은 방식으로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 역시 그런 식의 논쟁을 멈추지 않는다. </p>
<p> </p>
<p>고백하건데, 사실 나도 이런 방식의 논쟁에 꽤나 익숙한 사람이었다. 왜냐하면 나는 이전에 근본주의적인(혹은 복음주의적인) 기독교인이었고, 통상적인 기독교의 “변증”(혹은 그에 이어지는 전도, 선교)은 바로 구좌파의 논쟁과 똑같은 형식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전도에 있어 자신들이 상대방을 진심으로 생각하고 위한다고 생각하는 반면에 비기독교인들은 그들이 자신에게 관심이 없다고 느끼는 건(최근 이에 대한 흥미로운 책이 출간된바 있다.) 바로 이 때문일 것이다. 그들은 상대방을 진심으로 사랑할 때조차도 그들을 이기고, 자신들의 교조와 공동체에서 한 치도 벗어나려 하지 않는 것이다. </p>
<p> </p>
<p> </p>
<p>2.<br />대화란, 혹은 논쟁이란 무엇일까? 난 어느 시점에서 내가 해오던 논쟁이 나를 정말로 피폐하게 고갈시키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무엇보다 그건 내가 계속해서 “똑같은 이야기”를 반복하고 있고, 그래서 하나도 성장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런 논쟁을 하면 할수록 반짝거리는 “승리감”과, 내가 “진리” 속에 있다는, 또 그 진리를 공유하는 “공동체” 속에 있다는 안도감을 느낄 수 있었지만 이내 그 안도감은 권태와 피로로 바뀌어갔던 것이다. </p>
<p> </p>
<p>한동안 무력감 속에 빠져있던 나는 근본주의적 기독교 대학을 졸업한 이후 <연구공간 수유+너머>에서 공부를 시작하면서 새로운 “논쟁의 이유”를 발견하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변화되기 위해” 논쟁을 한다는 것이었다. 즉, 그곳에선 상대방을 논파하고 내가 가진 교조(혹은 진리, 혹은 공동체)를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논쟁을 통해 즉 상대방 주장과의 “마주침”을 통해 이전의 나와는 다른 나를 생산해내는 것이야말로 “논쟁의 이유”였던 것이다. 이후로 나의 논쟁방식에 있어 가장 크게 바뀐 것은 상대방의 논리를 교조로 환원하지 않고, 그 사람의 주장 자체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이었다. 그의 주장 속엔 지금의 나와는 다른 나를 만들어 줄 수 있는 가능성이 어디에서 반짝이고 있을지 모르는 일이었기 때문이다.(물론 근본주의자들과 그런 논쟁을 벌이기는 여전히 참 힘들다. 좋은 논쟁 상대방을 만난다는 것은 얼마나 기쁜 일인지.)</p>
<p> </p>
<p>이전과 끊임없이 다른 나를 창조해가며 살아가는 것! 그것은 참으로 멋진 일이다. 많은 이들이 사람을 이렇게 성장시키는 것을 내용(“진리”같은...)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보다는 형식이 더 큰 영향을 미친다. 사실 “근본주의자”란 “근본주의 교리”라는 내용으로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근본주의 교리를 “지키려고만 하는” 그래서 타자와의 마주침에서 아무것도 배우려 하지 않는 사람이다. </p>
<p> </p>
<p> </p>
<p>3.<br />갑자기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된 까닭은 최근에 SBS 다큐멘터리 “신의 길, 인간의 길” 방송 이후 기독교계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기 때문이다. 한기총 차원에서 공식적으로 “자유주의적” 신학을 가진 교회나 신학자에 대한 이단사냥이 시작될 것이란 흉흉한 소문도 떠돌고 있다. 어쩌면 교회보다도 더욱 더 바깥 세계와의 마주침을 피하고만 있는 강단 신학계는 별다른 저항 없이 동료 “자유주의 신학자”들을 사냥하라는 교회의 명령에 굴복할 가능성이 높다. </p>
<p> </p>
<p>자신의 동일성을 지키려고만 하는 사람이나 공동체는 결코 성장할 수 없다. 성장하지 않는다는 것은 노화한다는 것이고, 결국은 죽음으로 달려가는 것이다. 니체가 “신은 죽었다.”는 매우 다의적인 의미의 선언을 했을 때 그 의미들 중 하나는 바로 이런 “동일성 속에서 죽어가는 기독교 서구 사회의 죽음”을 말하는 것이었다. 한국 교회도 여기서 그다지 멀지 않으리라. </p>
<p> </p>
<p>한편 니체는 “역사상 오직 한 사람의 기독교인만이 있었다. 그런데 그는 십자가 위에서 죽었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그에게 예수는 바로 기존의 동일성 속에서 죽어가고 있는 유대교 공동체의 “타자”였다. “거듭나야 한다.”는 예수의 선언은 어쩌면 “내용”(진리)을 지칭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마주침”이라는 “형식” 속으로 들어가라는, 그리하여 너의 기존의 모습에, 교조라는 동일성에, 너를 붙들고 있는 공동체에 안주하지 말고 그 바깥으로 나오라는 선언일 지도 모른다. </p>
<p> </p>
<p> </p>
<p>4.<br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다.”고 성서는 말한다. 나는 근본주의자들이(그리고 구좌파들도) 자신의 삶을 사랑했으면 좋겠다. 자신의 과거의 삶이 아니라 미래의 삶을 말이다. 자신의 교조와 공동체와 동일성 속에 안주하며 죽어가기보다, 두려움을 물리치고 자신의 바깥과의 마주침을 통해 새로운 삶 속으로 들어가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p>
<p> </p>
<p>자신과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 자신의 공동체 바깥에 있는 사람과의 대화, 혹은 논쟁은 바로 자신을 성장시킬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이다. 논쟁을 하는 이유는 상대방을 이겨서 나를 지키기 위함이 아니라 상대방도 변화하고, 나도 변화하기 위해서이다. 그리하여 - 약간의 공간적 비약을 하자면 - 끊임없이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가기 위함이다. 사실 “바깥”은 혹은 “세상”은 그들의 생각보다 별로 무서운 곳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리고 적보다는 친구가 많은 편이 한세상 살아가기에는 더 즐겁고 좋은 법 아닌가! </p><iframe src="http://www.facebook.com/plugins/like.php?locale=ko_KR&href=http%3A%2F%2Fblog.jinbo.net%2Fminjung%2F&layout=standard&show_faces=true&width=445&action=like&colorscheme=light&" scrolling="no" frameborder="0" allowTransparency="true" style="border:none; overflow=hidden; width:445px; height:60px; margin-top:10px; margin-left:5px"></iframe><script type="text/javascript" src="http://tweetmix.net/js/widgetV2.js"></script><script type="text/javascript">if(("TMXW" in window)) { new TMXW.Widget({"shape":"default","target_url":"http://blog.jinbo.net/minjung/","widget_title":"\uc774 \uae00\uacfc \uc5f0\uad00\ub41c \ud2b8\uc717","default_msg":"","width":"445","height":"450","color_upper_back":"93C9E6","color_upper_text":"FFFFFF","color_tweet_back":"FFFFFF","color_border":"EBEBEB","color_text":"888888","color_link":"2ABBD4","widget_type":"1","btn_type":"1","max_messages":"10","is_show_avatar":"1"}).render().start();} </script><div class="buttons-bottom center jinboblog-i-like-this-buttons"><a class="button-jinboblog" href="javascript:void(0);" title="스크랩으로 글 링크를 저장하세요" onclick="recommend('2377',170,'/minjung','');"><img src="/plugins/../jplugins/ILikeThis/images/mini_chuchon.png" alt="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a><a class="button-twitter" href="http://twitter.com/home?status=http%3A%2F%2Fblog.jinbo.net%2Fminjung%2F170+%22%EA%B5%AC%20%EC%A2%8C%ED%8C%8C%EC%99%80%EC%9D%98%20%EB%85%BC%EC%9F%81%2C%20%EA%B7%B8%EB%A6%AC%EA%B3%A0%20%EA%B8%B0%EB%8F%85%EA%B5%90...%22" target="_blank" title="트위터로 리트윗합니다"><img src="/plugins/../jplugins/ILikeThis/images/twitter.png" alt="트위터로 리트윗하기" /></a><a class="button-facebook" href="http://www.facebook.com/sharer.php?u=http%3A%2F%2Fblog.jinbo.net%2Fminjung%2F170&t=%EA%B5%AC%20%EC%A2%8C%ED%8C%8C%EC%99%80%EC%9D%98%20%EB%85%BC%EC%9F%81%2C%20%EA%B7%B8%EB%A6%AC%EA%B3%A0%20%EA%B8%B0%EB%8F%85%EA%B5%90..." target="_blank" title="페이스북에 공유합니다"><img src="/plugins/../jplugins/ILikeThis/images/facebook.png" alt="페이스북에 공유하기" /></a><a class="button-delicious" href="http://delicious.com/save" onclick="window.open('http://delicious.com/save?v=5&noui&jump=close&url=http%3A%2F%2Fblog.jinbo.net%2Fminjung%2F170&title=%EA%B5%AC%20%EC%A2%8C%ED%8C%8C%EC%99%80%EC%9D%98%20%EB%85%BC%EC%9F%81%2C%20%EA%B7%B8%EB%A6%AC%EA%B3%A0%20%EA%B8%B0%EB%8F%85%EA%B5%90...','delicious','toolbar=no,width=550,height=550'); return false;" title="딜리셔스에 북마크합니다"><img src="/plugins/../jplugins/ILikeThis/images/delicious.png" alt="딜리셔스에 북마크" /></a></div><p><strong><a href="http://blog.jinbo.net/minjung/170?commentInput=true#entry170WriteComment">댓글 쓰기</a></strong></p>나의 신앙생활김강http://blog.jinbo.net/minjung/1432008-07-03T15:39:47+09:002008-07-03T15:39:47+09:00<!--FCKeditor--><p>오늘 개신교 주최의 시국기도회에 갈 거냐는 질문을 몇 번 들었다.</p>
<p> </p>
<p>안 갈 거다. </p>
<p>사실은 일정이 있기 때문이지만, 없더라도 가지 않을 거다. </p>
<p> </p>
<p>나는 '종교'라는 매개 없이 즉각적으로 하느님-세계와 마주하길 원한다. </p>
<p>즉, 나의 촛불집회 참여는 매 순간 신앙적 혹은 영성적 행위이기도 했다.</p>
<p>굳이 '종교'라는, '기도회'라는 매개를 거쳐야만 그것이 신앙적 행동이 되는 것은 아니다. </p>
<p> </p>
<p>여하간, </p>
<p> </p>
<p>안 간다. 가시는 분들은 열심히 하시길^^</p><iframe src="http://www.facebook.com/plugins/like.php?locale=ko_KR&href=http%3A%2F%2Fblog.jinbo.net%2Fminjung%2F&layout=standard&show_faces=true&width=445&action=like&colorscheme=light&" scrolling="no" frameborder="0" allowTransparency="true" style="border:none; overflow=hidden; width:445px; height:60px; margin-top:10px; margin-left:5px"></iframe><script type="text/javascript" src="http://tweetmix.net/js/widgetV2.js"></script><script type="text/javascript">if(("TMXW" in window)) { new TMXW.Widget({"shape":"default","target_url":"http://blog.jinbo.net/minjung/","widget_title":"\uc774 \uae00\uacfc \uc5f0\uad00\ub41c \ud2b8\uc717","default_msg":"","width":"445","height":"450","color_upper_back":"93C9E6","color_upper_text":"FFFFFF","color_tweet_back":"FFFFFF","color_border":"EBEBEB","color_text":"888888","color_link":"2ABBD4","widget_type":"1","btn_type":"1","max_messages":"10","is_show_avatar":"1"}).render().start();} </script><div class="buttons-bottom center jinboblog-i-like-this-buttons"><a class="button-jinboblog" href="javascript:void(0);" title="스크랩으로 글 링크를 저장하세요" onclick="recommend('2377',143,'/minjung','');"><img src="/plugins/../jplugins/ILikeThis/images/mini_chuchon.png" alt="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a><a class="button-twitter" href="http://twitter.com/home?status=http%3A%2F%2Fblog.jinbo.net%2Fminjung%2F143+%22%EB%82%98%EC%9D%98%20%EC%8B%A0%EC%95%99%EC%83%9D%ED%99%9C%22" target="_blank" title="트위터로 리트윗합니다"><img src="/plugins/../jplugins/ILikeThis/images/twitter.png" alt="트위터로 리트윗하기" /></a><a class="button-facebook" href="http://www.facebook.com/sharer.php?u=http%3A%2F%2Fblog.jinbo.net%2Fminjung%2F143&t=%EB%82%98%EC%9D%98%20%EC%8B%A0%EC%95%99%EC%83%9D%ED%99%9C" target="_blank" title="페이스북에 공유합니다"><img src="/plugins/../jplugins/ILikeThis/images/facebook.png" alt="페이스북에 공유하기" /></a><a class="button-delicious" href="http://delicious.com/save" onclick="window.open('http://delicious.com/save?v=5&noui&jump=close&url=http%3A%2F%2Fblog.jinbo.net%2Fminjung%2F143&title=%EB%82%98%EC%9D%98%20%EC%8B%A0%EC%95%99%EC%83%9D%ED%99%9C','delicious','toolbar=no,width=550,height=550'); return false;" title="딜리셔스에 북마크합니다"><img src="/plugins/../jplugins/ILikeThis/images/delicious.png" alt="딜리셔스에 북마크" /></a></div><p><strong><a href="http://blog.jinbo.net/minjung/143?commentInput=true#entry143WriteComment">댓글 쓰기</a></strong></p><다중> 서평, "촛불 앞에서, 진보적 복음주의자들께 드리는 고언" [복상 213호] 김강http://blog.jinbo.net/minjung/1252008-06-13T00:13:56+09:002008-06-13T00:13:56+09:00<!--FCKeditor--><p class="HStyle0"><font color="#808080">진보적 복음주의 기독교인들이 만드는 잡지 <복음과 상황>에 연재하는 글입니다...만, <다중>의 내용을 충실히 쓰고 있기에 기독교와 상관 없는 분들도 일독을 권합니다. 뭐, 별로 잘 쓴 글인진 모르겠지만요^^;</font></p>
<p class="HStyle0"> </p>
<p class="HStyle0"><hr /></p>
<p class="HStyle0"> </p>
<p class="HStyle0">안토니오 네그리 & 마이클 하트, <다중>, 세종서적 2007</p>
<p class="HStyle0"><br /></p>
<p class="HStyle0">김강기명_성공회대 대학원생</p>
<p class="HStyle0"><br /></p>
<p class="HStyle0"><br /></p>
<p class="HStyle0"><span style="FONT-WEIGHT: bold">성서한국의 구교형 목사님께. </span></p>
<p class="HStyle0"><span style="FONT-WEIGHT: bold"><br /></span></p>
<p class="HStyle0">목사님 6월 9일의 만남은 참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이런 때가 아니면 언제 저같이 부족한 사람이 복음주의권의 오피니언들과 평등하게 이야기를 섞을 수 있었을까요. 촛불을 들고 거리로 쏟아져 나오는 저 자발적 대중들 - 특히 10대, 20대의 모습들이 복음주의권의 오피니언들에게도 놀라움과 경탄, 그리고 겸손함을 낳게 한 것 같습니다. 저는 그날 "솔직히 열심히 한다곤 하지만 결국 386 '꼰대' 목사님들 아니야?"라고 불신하던 저의 많은 감정들을 녹일 수 있었습니다. 적어도 9일의 시국토론회와 이어진 뒤풀이 자리에 참여하셨던 분들은 운동권과 시민단체 못지않게 복음주의 운동도 변해야 한다는 공감대를 분명히 갖고 계셨다고 생각합니다. 식사 자리에서 구 목사님의 "내가 청년들을 정말 잘 모르고 있었구나."라는 자기고백은 저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 왔었지요. </p>
<p class="HStyle0"><br /></p>
<p class="HStyle0">저는 물론 복음주의자는 아닙니다. 하지만 저 수구적 목회자들의 세력 확장과, 또 사회변화와 세대교체라는 환경의 변화 속에서 이제는 더 이상 복음주의와 진보주의라는 구분으로 기독교를 양분하는 것이 너무나 소모적이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교리보다는 이슈들이, 술․담배․낙태문제 같은 개인윤리보다는 대운하․쇠고기․반전․토지정의․인권․FTA 같은 사회윤리문제가 기독교 운동의 중심이 되면서 복음주의와 진보주의, 혹은 저 같이 어린 민중신학도와 복음주의 오피니언인 구 목사님 같은 분들이 무언가를 함께 할 수 있는 자리가 앞으로 더 많이 생겨나리라 생각합니다. </p>
<p class="HStyle0"><br /></p>
<p class="HStyle0">이런 점에서 저는 복음주의 운동에 대한 '애정'을 갖고 복음주의 바깥에서 구 목사님을 비롯한 진보적인 복음주의 오피니언들께 감히 몇 마디 고언을 드리고 싶습니다. 물론 제가 "책 읽어주는 친구"인만큼, 촛불집회의 모습을 보면서 변화의 길을 모색하고 있는 복음주의 운동이 참고하면 좋을만한 책을 한 권 추천하면서 제 이야기를 해 보려 합니다. </p>
<p class="HStyle0"><br /></p>
<p class="HStyle0"><span style="FONT-WEIGHT: bold">"정상적 국민국가"의 시대가 저물고 있다</span></p>
<p class="HStyle0">제가 소개할 책은 이탈리아의 정치철학자 안토니오 네그리와 그의 제자 마이클 하트가 함께 쓴 <다중>이라는 책입니다. "다중"이란 인민이나 민중처럼 통일성으로 규정되거나, 군중처럼 획일성으로 규정될 수 없는, '수많은 차이들이 하나의 공통의 집단을 형성한 모습'을 일컫는 말입니다. 마치 촛불집회를 함께 하는 우리 시민들을 연상하게 하지요?^^ 이 책은 바로 이 "다중"을 지배하는 세계 지배체제(그것을 저자들은 <제국>이라고 부릅니다.)의 모습을 살피고, 그 지배에 저항하는 다중의 모습, 그리고 그들이 그렇게 저항하는 주체로 나타날 수 있는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문화적 조건들을 분석하는 책입니다. </p>
<p class="HStyle0"><br /></p>
<p class="HStyle0">저자들은 현재 세계는 더 이상 국민국가 단위에서 정당정치를 비롯한 "정치행위"를 통해 국민의 의사를 반영하고, 권력의 행사가 이루어지는 정상적인 국민국가들의 시대가 아니라고 이야기합니다. 즉, 자본주의가 전지구적으로 통합된 하나의 시장을 만들고 있듯이, 주권권력 역시도 더 이상 일국적 차원의 주권을 말할 수 없는 전지구적 주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세계시장과 세계주권, 이 둘은 사실상 하나입니다.) 전작인 <제국>이 세계시장의 측면에서 제국적 주권을 분석했다면, 이 책은 세계주권의 측면에서 제국을 분석하고 있습니다. </p>
<p class="HStyle0"><br /></p>
<p class="HStyle0">저자들이 분석한 제국적 주권의 모습은 "전쟁" 혹은 "전지구적 내전상태"입니다. 즉 그것이 민주주의가 되었든, 과두제나 군주제가 되었든 정상적인 정치가 기능하지 못하고, 전지구를 가로지르는 경찰-군대가 끊임없이 치안을 유지해야 하는 항구적인 "예외상태"가 바로 오늘날 지구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저자들은 "제국적 권력 하에서 고강도의 치안행위와 저강도의 전쟁 행위가 만난다."고 말합니다. 이라크에는 미국과 다른 여러 나라의 군대가 파견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작전"은 전쟁이라기보다는 사실상 "치안"행위에 가깝습니다. 다를 게 없습니다. 반대로 현재 한국 경찰은 시위대를 무력으로 짓밟고, 바리케이트를 치는 "치안행위"를 하고 있지만 그것은 사실상 저항자들을 상대로 한 "전쟁"과 비슷한 양상으로 전개됩니다. </p>
<p class="HStyle0"><br /></p>
<p class="HStyle0">이런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권력자들은 "안보"의 논리와 "정의로운 전쟁"론을 설파합니다. 우리의 안전한 삶을 위해서 테러리스트들을 소탕하자! 그러나 소탕되는 것은 테러리스트가 아니라 보통 가난한 이들입니다. 정작 테러리스트는 제대로 잡지도 못하는 이런 치안 전쟁들의 역할은 사실상 안보 선동을 통해 사람들로 하여금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도록 눈을 가리는 역할을 한다는 게 저자들의 주장입니다. 즉, 신자유주의에 입각한 지금의 세계체제(제국)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치안-전쟁이, 즉 이전에는 "예외적"이었던 상황이 항구적인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일국적 차원의 국가권력은 너무나 무능력합니다. 그토록 국민들이 재협상을 부르짖어도 "힘들다, 어렵다"를 반복하는 이명박 대통령의 모습은 단순히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라는 말만 가지고는 효과적으로 비판할 수 없습니다. 어찌보면 그는 제국의 총독에 불과할 지도 모릅니다. </p>
<p class="HStyle0"><br /></p>
<p class="HStyle0">저자들은 이런 점에서 단순히 하나의 국민국가를 "정상상태"로 되돌리려는 투쟁으로는 이러한 전지구적 시장과 권력에 제대로 맞설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이미 우리는 노무현 5년의 실험을 통해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제대로 맛본 바 있습니다. 저는 이런 점에서 과연 한국의 복음주의 운동이 정치참여 운동으로 나아가는 것에 대해 상당한 불만을 갖고 있습니다. 일단 - 죄송한 말씀이지만 - 잘 하지도 못하는 것 같고, 과연 새로운 전지구적 질서 하에서 기독교인들이 선택과 집중을 해야 할 영역이 '국민국가의 정치'인가 하는 의문이 들기 때문입니다. </p>
<p class="HStyle0"><br /></p>
<p class="HStyle0"><span style="FONT-WEIGHT: bold">전지구적 지배에 맞선 전지구적 다중</span></p>
<p class="HStyle0">이렇게 이야기하면 "그렇다면 뭘 해야 하느냐?"고 반문이 쏟아질 것입니다. 저자들이 바로 이 지점에서 강조하고자 하는 것이 전지구적인 주권권력에 맞선 전지구적 "다중"의 연대와 민주주의 운동입니다. 저자들은 현재의 주권권력이 강력하며 또 잔인하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다중의 저항이 더 강력하다고 주장합니다. 그것은 바로 이 제국은 "다중"이 만들어내는 생산물에 기생하면서 지배하고 있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p>
<p class="HStyle0"><br /></p>
<p class="HStyle0">즉, 제국은 언제가 다중이 노동현장과, 또 노동현장을 넘어 삶 시간 전체에서 생산하는 상품, 지식, 재화, 정서, 정보 등의 이른바 "공통적인 것"을 착취함으로써만 체제를 유지할 수 있는 허약한 주권체제라는 것입니다. 만일 다중이 이러한 "공통적인 것"의 착취를 거부하고, 스스로가 공통적인 것들의 생산과 재생산을 장악하려 할 때 제국의 주권권력은 위협을 느낄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p>
<p class="HStyle0"><br /></p>
<p class="HStyle0">좀 더 구체적인 예를 들어 보자면, 이를테면 인터넷 공간은 그 동안 자본이 자신의 덩치를 불리는 공간이었습니다. 특히 한국에서 IT산업의 발전은 비약적이었지요. 그들은 인터넷 공간에서 생산되는 수많은 정보, 정서, 라이프스타일 등을 절취함으로써 자본을 증식합니다. 그런데 이제 그 동일한 공간에서 사람들이 자신들이 생산한 이 공통적인 것들을 정부와 언론, 또 정부 정책에 기생하는 자본에 대한 저항을 위해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광우병, 민영화, 집시법 등등 수많은 정보들이 무료, 말하자면 공통의 것이 됩니다. 비단 인터넷뿐만 아니라 산업의 현장에서 노동자들이 파업을 통해 자본에 맞설 때, 시위 현장에서 자발적으로 김밥을 싸고, 오토바이를 타고 그것을 배달할 때 우리는 거기에서 공통적인 것을 생산하고 직접 통제하려는 다중의 저항을 만나게 됩니다.(물론 예로 든 것들은 매우 작은 예에 불과합니다.) </p>
<p class="HStyle0"><br /></p>
<p class="HStyle0">이런 점에서 다중은 결코 "단일한 집단"(인민)은 아니지만 한편으로 "공통적인 집단"입니다. 수많은 차이들을 가지고 있는 다중들은 또 한편으로는 공통적인 것들(가장 크게는 이 세계)을 함께 생산하고 있는 이들입니다. 저자들은 이전의 공산주의나 사회주의의 오류가 이 다중을 "노동계급"으로 한정한 데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그들이 만든 사회는 획일적인 독재 사회였던 것이겠지요. </p>
<p class="HStyle0"><br /></p>
<p class="HStyle0">촛불집회에 모인 사람들은 이 다중의 모습을 너무나도 잘 보여줍니다. 그 누구도 특권화되지 않는 평등한 네트워크가 이번 촛불시위의 특징입니다. 여고생, 예비군, 노동자, 유모차부대, 직업 운동가, 하이힐을 신고 나온 여성과 그녀의 손을 꼭 잡은 남자 친구, 할아버지, 장애인, 이주노동자... 그들의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받는 억압도, 그들의 삶이 생산해내는 것들도 각각 다 다르지만, 그들은 지금 광장에서 '공통의 요구'를 하고 있습니다. "안전한 먹거리를 달라", "공공성을 파괴하지 말라", "국가를 신뢰할 수 없다"는. 이 요구가 단순히 "대한민국 헌법 1조"라는 국민국가적 내용으로 나타난다 할지라도, 이미 그것은 곧바로 공통적이며, 전지구적인 요구로 나타납니다. 미국이 끈질기게 "쇠고기 문제는 한국의 국내문제다."라고 덮으려 하는 것은 오히려 이 문제가 결코 일국적인 문제가 아님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p>
<p class="HStyle0"><br /></p>
<p class="HStyle0"><span style="FONT-WEIGHT: bold">다중의 운동으로서의 "민주주의"</span></p>
<p class="HStyle0">저자들은 이러한 다중의 공통적인 것을 향한 운동을, 또 저항을 "민주주의"라는 오래된 용어를 통해 설명합니다. 저자들이 말하는 민주주의란 대의제 민주주의와도 다르고, 또 직접민주주의와도 다릅니다. 그것들이 "제도화 된" 정태적인 민주주의라면 저자들이 말하는 민주주의는 운동과정 중에 있는, "만들어 져야 할" 동태적인 민주주의라 할 수 있습니다. </p>
<p class="HStyle0"><br /></p>
<p class="HStyle0">즉 저자들은 쉽사리 어떤 정치적 시나리오나 유토피아적 상황을 그려놓고, 다중의 운동적 활력을 그 속으로 밀어넣는 것을 강하게 비판합니다. 민주주의란 바로 다중의 주권에 대항하는 운동 그 자체요, 또 공통적인 것을 생산하고 통제하려는 운동 그 자체라는 게 제가 이해한 저자들의 "민주주의"입니다. 저자들은 다중이 어떤 대의제 장치가 없이도 소통하는 능력을 가졌다고 말합니다. 물론 이것은 분명 60년대 이후 지속적으로 성장해 온 지식정보 자본주의와 인터넷 덕택이기도 합니다.(그리고 그것을 만들어낸 것도 또 다중입니다.) 저자들은 지금의 시대야말로 더 이상 대의제 정치나, 전위조직이 대중을 동원하는 형식의 운동방식이 불가능한 시대라고 이야기합니다. 때문에 저자들이 마지막으로 주문하는 것은 바로 민주주의라는 끊임없는 운동정치 속으로 과감히 들어가 "다중이 되자"는 것입니다. </p>
<p class="HStyle0"><br /></p>
<p class="HStyle0"><span style="FONT-WEIGHT: bold">복음주의 운동은 무엇을 할 것인가?</span></p>
<p class="HStyle0">저는 저자들의 진단과 제안이 복음주의 운동을 비롯한 기독교 사회운동에도 많은 시사점들을 던져준다고 생각합니다. 이번 촛불집회는 분명 어떤 대의제 민주주의로 환원되지 않는 대중의 욕구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국가는 더 이상 신뢰할 수 없는 존재가 되었습니다.(촛불 이전에도 그 불신은 투표 거부라는 소극적 행위로 나타난 바 있습니다.) 또한 국회에 있는 어떤 정당도 사실상 작금의 대중을 제대로 '대의'할 능력이 없습니다. </p>
<p class="HStyle0"><br /></p>
<p class="HStyle0">한편으로 이번 촛불집회는 기존의 시민운동과 사회운동에도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5월 2일 여고생들과 네티즌들이 이슈를 제기하자 운동단체들은 그제서야 부랴부랴 "광우병 국민대책위"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거리의 대중은 무려 1700여개의 단체가 함께 한 대책위임에도, 그들에게 권위를 부여하는 것을 한사코 거부했습니다. 그야말로 수평적인 네트워크들이 곳곳에 만들어졌고, 그 네트워크 안에서는 끊임없는 논쟁과 토론이 이어졌습니다. 대중의 지도부를 자처한 몇몇 단체는 호된 비판을 맞기도 했습니다. 저는 이러한 모습이 저자들이 말하는 움직이는 운동으로서의 "민주주의"에 상응한다고 생각합니다. </p>
<p class="HStyle0"><br /></p>
<p class="HStyle0">이미 많은 운동단체들이 자기 반성을 쏟아내고 있고, 특히 회원 없는 명망가 중심의 조직운동에 대한 자기 비판과 대중과 소통하지 못하는 운동권의 문화적 감성에 대한 비판들이 봇물처럼 터져 나오고 있습니다. 저는 이러한 움직임이 확산된다면 혹여라도 이 촛불이 잦아들고, 제국적 주권체제에 기생하는 국가권력이 그대로 존속하게 된다 하여도 아래로부터의 민주주의의 희망은 분명히 계속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p>
<p class="HStyle0"><br /></p>
<p class="HStyle0">복음주의 운동은 어떨까요? 저는 그 어느 운동단체보다도 복음주의 운동이 권위주의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물론 그것은 단지 복음주의 운동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 교회 전반의 문제입니다. 저는 가끔 선교단체들의 경배와 찬양 집회나 대형교회의 예배에서 파시스트 집회에 온 것 같은 섬뜩함을 느끼곤 합니다. 자기 주체적 신앙인으로서, 아래에서부터 한 몸 된 공동체를 이룬다기 보다는 무대 위의 인도자나 설교자의 열광적인 인도를 따르는 '청중'이 되어 그에게 가치판단을 맡겨버리는 획일적인 군중의 모습이 현재 한국교회 일반의 모습은 아닐까요? 진보적인 복음주의 운동이라고 별반 달라 보이지 않습니다. 보수파 목사들이 보수적인 설교로 대중을 동원한다면, 진보적인 목사들은 진보적인 설교로 대중을 동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래서 촛불집회가 보여준 "자유발언대"의 발랄함과 그것을 통해 진화하는 대중의 신앙적, 정치적 능력은 한국 교회 어디서도 찾을 수 없는 것은 아닐까요. 목회자들은 늘 "청년들이 너무 각성이 안 되고, 동원도 안 된다."고 푸념하시지만 스스로가 권위의 덫에 빠져 있는 것은 혹시 아닐런지요. </p>
<p class="HStyle0"><br /></p>
<p class="HStyle0">복음주의 운동의 의제들과 이슈들도 그렇습니다. 예전에 <88만원 세대> 서평에서도 썼듯이 통일운동이나 정치참여 운동이 중심의제가 될 때(특히 성서한국 등의 큰 운동이 그런 경향이 있다고 봅니다.) 그 운동은 명망가 중심, 386 목회자들 중심의 운동에 청년들이 동원되는 형식을 넘어서기 힘들지 않을까 합니다. 지금 복음주의 운동에 필요한 것은 위를 향하는 그런 운동이 아니라 저자의 표현을 빌리면 "다중"이 만들어나가고 있는 여러 가지의 민주주의 운동에 동참하는 것이 아닐까요. 사실상 몇몇 리더들 말고는 참여하기 힘든 정치운동의 틀을 벗어나 복음주의 청년들이나 교인들이 일상에서 느끼는 이슈들로부터 시작되는 운동들을 만들어나갈 수 있지 않을까요.(저는 개인적으로 환경, 평화, 학생인권, 생활협동조합, 공동체 운동 등이 종교운동의 블루오션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운동 방식에 있어서도 촛불집회의 "자유 발언대"로 상징되는, 대중들의 자발성과 창조력을 최대한 이끌어낼 수 있는 방식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p>
<p class="HStyle0"><br /></p>
<p class="HStyle0">구 목사님. 물론 제의 이런 비판은 제가 복음주의 바깥에 있기 때문에 편하게 던지는 것일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욱 구 목사님과 같이 복음주의 운동의 핵심에 계신 분들의 깊은 숙고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교회 안팎의 "다중"들은 단지 한국 보수교회의 "내용"만을 비판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들은 바로 권위 구조 전체에 대해 저항하고 있습니다. 진보적인 복음주의 운동이 여기에 대해 해답을 모색하지 않는다면 저는 한국 교회의 미래는 아마 없을 거라고, 시민사회와 동떨어진 곳에서 화석화된 늙은 종교로 남을 거라고 감히 전망합니다. </p>
<p class="HStyle0"><br /></p>
<p class="HStyle0">하느님은 결코 홀로 일하시지 아니하시고, 사람을 통해 일하십니다.(민중신학에선 그것을 "민중사건"이 곧 "하느님 사건"이다."라고 이야기합니다.) 하느님이 일하시는 그 사건의 현장 속에서 목사님과 자주 만나 뵙길 소망합니다. </p>
<p class="HStyle0"><br /></p>
<p class="HStyle0">구 목사님의 책 읽어주는 친구, 김강 드림. </p><iframe src="http://www.facebook.com/plugins/like.php?locale=ko_KR&href=http%3A%2F%2Fblog.jinbo.net%2Fminjung%2F&layout=standard&show_faces=true&width=445&action=like&colorscheme=light&" scrolling="no" frameborder="0" allowTransparency="true" style="border:none; overflow=hidden; width:445px; height:60px; margin-top:10px; margin-left:5px"></iframe><script type="text/javascript" src="http://tweetmix.net/js/widgetV2.js"></script><script type="text/javascript">if(("TMXW" in window)) { new TMXW.Widget({"shape":"default","target_url":"http://blog.jinbo.net/minjung/","widget_title":"\uc774 \uae00\uacfc \uc5f0\uad00\ub41c \ud2b8\uc717","default_msg":"","width":"445","height":"450","color_upper_back":"93C9E6","color_upper_text":"FFFFFF","color_tweet_back":"FFFFFF","color_border":"EBEBEB","color_text":"888888","color_link":"2ABBD4","widget_type":"1","btn_type":"1","max_messages":"10","is_show_avatar":"1"}).render().start();} </script><div class="buttons-bottom center jinboblog-i-like-this-buttons"><a class="button-jinboblog" href="javascript:void(0);" title="스크랩으로 글 링크를 저장하세요" onclick="recommend('2377',125,'/minjung','');"><img src="/plugins/../jplugins/ILikeThis/images/mini_chuchon.png" alt="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a><a class="button-twitter" href="http://twitter.com/home?status=http%3A%2F%2Fblog.jinbo.net%2Fminjung%2F125+%22%3C%EB%8B%A4%EC%A4%91%3E%20%EC%84%9C%ED%8F%89%2C%20%26quot%3B%EC%B4%9B%EB%B6%88%20%EC%95%9E%EC%97%90%EC%84%9C%2C%20%EC%A7%84%EB%B3%B4%EC%A0%81%20%EB%B3%B5%EC%9D%8C%EC%A3%BC%EC%9D%98%EC%9E%90%EB%93%A4%EA%BB%98%20%EB%93%9C%EB%A6%AC%EB%8A%94%20%EA%B3%A0%EC%96%B8%26quot%3B%20%5B%EB%B3%B5%EC%83%81%20213%ED%98%B8%5D%20%22" target="_blank" title="트위터로 리트윗합니다"><img src="/plugins/../jplugins/ILikeThis/images/twitter.png" alt="트위터로 리트윗하기" /></a><a class="button-facebook" href="http://www.facebook.com/sharer.php?u=http%3A%2F%2Fblog.jinbo.net%2Fminjung%2F125&t=%3C%EB%8B%A4%EC%A4%91%3E%20%EC%84%9C%ED%8F%89%2C%20%26quot%3B%EC%B4%9B%EB%B6%88%20%EC%95%9E%EC%97%90%EC%84%9C%2C%20%EC%A7%84%EB%B3%B4%EC%A0%81%20%EB%B3%B5%EC%9D%8C%EC%A3%BC%EC%9D%98%EC%9E%90%EB%93%A4%EA%BB%98%20%EB%93%9C%EB%A6%AC%EB%8A%94%20%EA%B3%A0%EC%96%B8%26quot%3B%20%5B%EB%B3%B5%EC%83%81%20213%ED%98%B8%5D%20" target="_blank" title="페이스북에 공유합니다"><img src="/plugins/../jplugins/ILikeThis/images/facebook.png" alt="페이스북에 공유하기" /></a><a class="button-delicious" href="http://delicious.com/save" onclick="window.open('http://delicious.com/save?v=5&noui&jump=close&url=http%3A%2F%2Fblog.jinbo.net%2Fminjung%2F125&title=%3C%EB%8B%A4%EC%A4%91%3E%20%EC%84%9C%ED%8F%89%2C%20%26quot%3B%EC%B4%9B%EB%B6%88%20%EC%95%9E%EC%97%90%EC%84%9C%2C%20%EC%A7%84%EB%B3%B4%EC%A0%81%20%EB%B3%B5%EC%9D%8C%EC%A3%BC%EC%9D%98%EC%9E%90%EB%93%A4%EA%BB%98%20%EB%93%9C%EB%A6%AC%EB%8A%94%20%EA%B3%A0%EC%96%B8%26quot%3B%20%5B%EB%B3%B5%EC%83%81%20213%ED%98%B8%5D%20','delicious','toolbar=no,width=550,height=550'); return false;" title="딜리셔스에 북마크합니다"><img src="/plugins/../jplugins/ILikeThis/images/delicious.png" alt="딜리셔스에 북마크" /></a></div><p><strong><a href="http://blog.jinbo.net/minjung/125?commentInput=true#entry125WriteComment">댓글 쓰기</a></strong></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