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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생기발랄 민중신학~!</title>
		<link>http://blog.jinbo.net/minjung/</link>
		<description>
<![CDATA[
민중신학의 존재론적 재구성 : 스피노자의 &quot;다중&quot;개념을 통하여
]]>
		</description>
		<language>ko</language>
		<dc:creator>김강(mailto:)</dc:creator>
		<pubDate>Fri, 03 Jul 2009 19:47:16 +0900</pubDate>
		<image>
			<title>생기발랄 민중신학~!</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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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민중신학의 존재론적 재구성 : 스피노자의 &quot;다중&quot;개념을 통하여]]></description>
		</image>
		<item>
			<guid>http://blog.jinbo.net/minjung/?pid=256</guid>
			<title>NCCK 평화통일위원회 토론회에 다녀오다.</title>
			<link>http://blog.jinbo.net/minjung/?pid=256</link>
			<description>
<![CDATA[
<!--FCKeditor--><p>아아. 무려 박순경 선생님부터 해서 60-70년대의 노장들과 80년대의 꼰대들까지 모였더랬다.</p>
<p>토론 시간까지 참가하지는 못했고, 발제만 듣고 왔다.</p>
<p>&nbsp;</p>
<p>최영실 선생님께서 "한국 교회 평화 통일 vision문서"(선언문임)초안을 발표하셨는데</p>
<p>사실 서두의 '신앙고백' 부분은 내가 썼다는..ㅡㅡ;</p>
<p>&nbsp;</p>
<p>발제문과 토론문을 보면서 아쉬웠던 것은</p>
<p>에큐메니컬 교회의 평화/통일 운동이 라인홀드 니버 류의 "기독교현실주의" 류에 깊이 침윤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교회 자신의 삶의 대안보다는 정치권에 호소하는 식의 선언문.</p>
<p>&nbsp;</p>
<p>지난 20년간 이 노선은 큰 승리를 거두었다. 누가 뭐래도 지난 민주정부의 통일 정책의 산파역할을 한 것은 에큐메니컬 기독교권이었다. 독재정권 시절의 문익환 목사로부터, 이재정 신부, 한완상 선생을 필두로 많은 이들이 직접 입각하여 통일 정책을 진두지휘하기까지 했다.</p>
<p>&nbsp;</p>
<p>하지만 그 승리는 곧 "민주주의의 패배"이기도 했다. 이전엔 이야기를 꺼내는 것만으로 "정치" 담론이었던 통일 담론은 이제 민주화 엘리트 세력의 "통치"담론이 되어버렸던 것이다. 사실상 나 같은 한 사람 한 사람이 이 문제에 관하여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단 말인가. 통일 문제란 이제 국가 정책 엘리트들, 시민사회의 지도 세력들, 그리고 국제관계 문제이지, 실정적으로나 '정서적'으로나 民의 문제는 아니게 된 것이다.</p>
<p>&nbsp;</p>
<p>나 스스로는 "민족통일"이라는 구호에 어떤 감정적 동요도 느끼지 않고, 현실적으로도 이 구호에 동의도 하지 않지만, "한반도 평화", 더 나아가 "동아시아의 평화", "동아시아 민중의 평화"에 대해서는 간절한 필요를 느낀다. 그런데 이 문제에 관하여 교회가 가져야 할 태도가 여전히 - 민주정부 10년의 실험을 끝낸 - 기독교 현실주의일까?</p>
<p>&nbsp;</p>
<p>노장들, 꼰대들께서는 오늘의 상황을 80년대의 '회귀'로 보시는 듯 하다만, 그럴 수는&nbsp;없다. 그저 '다른 미래'가 도래해버린 것 뿐이다. 따라서 오늘의 대안 역시&nbsp;80년대의 대안과 같을 수 없다. 지금 기독교 현실주의의 선언문 하나가 나와밨자,&nbsp;그냥 시민사회 일각에서 글 하나가 발표된 것일 뿐, 그것이 '정치적' 효과를 갖는다고 보기는 힘들다.&nbsp;</p>
<p>&nbsp;</p>
<p>이런 건&nbsp;어떨까?</p>
<p>&nbsp;</p>
<p>문서 이름이 Vision문서 아닌가?&nbsp;vision이란 성서적 입장에서 본다면 '묵시'라 할 수 있다.&nbsp;기왕 비전 문서를 낼 것이면, 하나의 묵시종말적 관점의 문서를 내는 것은 어떨까? 묵시종말적 관점이란, 우리가 살아가는 이 정치적인 세계가 공간적으로나 시간적으로나 유일한 것이&nbsp;아님을 뜻한다.&nbsp;지금 이 세대가 아닌&nbsp;다른 세대가 온다.(유대교, 세례 요한) 혹은 이미 왔다(예수)는 것. 이것이 묵시종말적 관점이다.&nbsp;</p>
<p>&nbsp;</p>
<p>그리스도 교회가 만약 지금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없는&nbsp;것처럼, 이미 하느님의&nbsp;나라가&nbsp;온 것처럼 평화를 살아버리면 어떨까? 그래서 군대에 안 가버리고(부담된다면 요즘 문제가 되고 있는 예비군훈련부터 거부해보자), 군부대에 들어가 상징적으로 무기를 해체하고(70년대에 미국의 수녀님 세분이 해군 미사일 하나를 못 쓰게 만들어서 평화운동의 상징이 된 일이 있다.), 마치 국경선이 없다는 듯이 허가받지 않고&nbsp;북으로 넘어가보고(이것도 새롭지 않다. 문익환 목사님이 이미&nbsp;하셨던 일이다.)</p>
<p>&nbsp;</p>
<p>교회가 이런&nbsp;실천에 갑자기 나선다면, 혹은 이 정도까지가 아니더라도,&nbsp;근본적인 차원에서 '국가의 평화'를 넘어가버리는 다른 평화 실천들을 하기 시작한다면, 매순간 정치가 열리게 될 것이다. 이것이 모든 정치적 메시야니즘을 넘어가는 '메시야적 정치'가 아닐까. vision문서라면, 마치 자신들이 시민사회의 지도부라도 되는 듯 행세하지 말고, 이 국가와 시민사회의 외부(묵시적 용어로는 '그의 나라')를 창안하는 실천이 필요한 시점이 아닐까.</p>
<p>&nbsp;</p>
<p>뭐.. 그러기엔 이미 NCCK는 너무나도 시민사회의 '일부'일 뿐이다. 기독교 현실주의는 신학이 아니다. 신학화된 정치공학일 뿐이다. 나는 뭔가 새로운 교회의 '신학적 정치'를 보고 싶다.</p>
]]>
			</description>
			<author>김강</author>
			<category>정치/사회 뒷담화</category>
			<category>평화</category>
			<category>통일</category>
			<category>예수</category>
			<category>NL</category>
			<category>메시야</category>
			<category>꼰대</category>
			<category>최영실</category>
			<category>종말</category>
			<category>묵시</category>
			
			
			<pubDate>Fri, 03 Jul 2009 19:37:46 +0900</pubDate>
		</item>
		<item>
			<guid>http://blog.jinbo.net/minjung/?pid=255</guid>
			<title>스피노자 &lt;에티카&gt; 꼼꼼히 읽기, 7월 6일부터 매주 월요일 2시</title>
			<link>http://blog.jinbo.net/minjung/?pid=255</link>
			<description>
<![CDATA[
<!--FCKeditor--><p><span style="font-size: 14px"><strong><a target="_blank" href="http://transs.pe.kr/guro">&lt;수유 너머 구로&gt;</a>에서 스피노자의 "에티카" 강독 세미나를 엽니다.</strong></span></p>
<p>&nbsp;</p>
<p><em>&nbsp;"철학자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스피노자주의자가 되어야한다. 스피노자주의 없이는 철학도 없다"&nbsp; - 헤겔</em></p>
<p>&nbsp;</p>
<p>서구 근대의 출발점에서 가장 반근대적인 사유를 구축한 철학자!</p>
<p>네덜란드의 "야성적 별종" 스피노자를 만나봅시다.</p>
<p>난해하기로 유명한 그의 대표 저작 &lt;에티카&gt;를 천천히, 꼼꼼히 씹어먹어보려 합니다.</p>
<p>&nbsp;</p>
<p><strong>스피노자를 주제로 석사논문을 쓴 친절한 반장^^;</strong>이 준비되어 있습니다.</p>
<p>&nbsp;</p>
<p>&nbsp;교재: 스피노자, &lt;에티카&gt;, 강영계 역, 서광사</p>
<p>7월 6일부터 매주 월요일 2시</p>
<p>정원: 15명, 문의: 김강 010-3424-7316</p>
<p>회비: 매워 만원(세미나 회비 만원을 내시면 수유 너머 구로의 모든 세미나에 참가하실 수 있습니다.)</p>
<p>&nbsp;</p>
<p>*첫 시간에는 "스피노자의 생애와 사상"에 대한 간략한 소개와 오리엔테이션이 있습니다.</p>
]]>
			</description>
			<author>김강</author>
			<category>교회 뒷담화</category>
			
			
			<pubDate>Fri, 26 Jun 2009 15:03:36 +0900</pubDate>
		</item>
		<item>
			<guid>http://blog.jinbo.net/minjung/?pid=253</guid>
			<title>근황</title>
			<link>http://blog.jinbo.net/minjung/?pid=253</link>
			<description>
<![CDATA[
<!--FCKeditor--><p>연구실이 분리 실험을 하게 되면서 논문 집필과 &lt;수유 너머 구로&gt; 활동을 동시에 진행했다.</p>
<p>&nbsp;</p>
<p>&nbsp;</p>
<p>그 어간에 나의 기독교계 동료들은 사무실을 내고 &lt;집단지성의 실험실 CAIROS&gt;를 만들었고</p>
<p>그 활동에도 얼마간의 에너지를 쏟고 있다. </p>
<p>&nbsp;</p>
<p>독일어와 라틴어도 쉬임 없이 계속 배우고 있다.</p>
<p>&nbsp;</p>
<p>어... 바쁘고나.ㅡㅡ;</p>
<p>&nbsp;</p>
<p>&nbsp;</p>
<p>요즘은 거의 생각을 하지 않고 산다. </p>
<p>당장의 문제를 처리하고, 또 세미나며 공부며 수유 너머 구로에서의 일상의 훈련들을 하다보면 </p>
<p>별다른 생각을 할 틈이 없다. 근 몇년간 가장 잡념 없이 살고 있는 것 같다. </p>
<p>&nbsp;</p>
<p>대신 길 위에서 많은 시간을 보낸다. </p>
<p>집에서 구로에 갔다가 용산에 회의하러 갔다가, 다시 구로에 갔다가 집으로.</p>
<p>중간에 삼각지에 있는 카이로스를 한 번 찍기도 하고..</p>
<p>&nbsp;</p>
<p>엉덩이를 가볍게하는 훈련중이다. 그래야 앉아 있을 때 그 시간이 아까워서 열심히 앉아 있게 된다.</p>
]]>
			</description>
			<author>김강</author>
			<category>앞담화?</category>
			
			
			<pubDate>Sat, 20 Jun 2009 23:46:20 +0900</pubDate>
		</item>
		<item>
			<guid>http://blog.jinbo.net/minjung/?pid=252</guid>
			<title>논문 제목과 목차 (아마도 II장은 들어낼 듯ㅜㅜ)</title>
			<link>http://blog.jinbo.net/minjung/?pid=252</link>
			<description>
<![CDATA[
<!--FCKeditor--><!--StartFragment--><!--StartFragment-->&nbsp;
<p class="HStyle1" style="TEXT-INDENT: 0pt; TEXT-ALIGN: center"><span style="FONT-WEIGHT: bold; FONT-SIZE: 22pt; LINE-HEIGHT: 200%; FONT-FAMILY: "나눔명조"; LETTER-SPACING: -2.2pt">스피노자의 &lsquo;다중&rsquo; 개념의 민중신학적 함의</span></p>
<p class="HStyle1" style="TEXT-INDENT: 0pt; TEXT-ALIGN: center"><span style="FONT-WEIGHT: bold; FONT-SIZE: 14pt; LINE-HEIGHT: 200%; FONT-FAMILY: "나눔명조"; LETTER-SPACING: 0.8pt">B. Spinoza's concept of &lsquo;multitude&rsquo; and its implications </span></p>
<p class="HStyle1" style="TEXT-INDENT: 0pt; TEXT-ALIGN: center"><span style="FONT-WEIGHT: bold; FONT-SIZE: 14pt; LINE-HEIGHT: 200%; FONT-FAMILY: "나눔명조"; LETTER-SPACING: 0.8pt">for Minjung Theology</span></p>
&nbsp;
<p class="HStyle0" style="LINE-HEIGHT: 200%"><span style="FONT-SIZE: 11pt; LINE-HEIGHT: 200%; FONT-FAMILY: "나눔명조"; LETTER-SPACING: 0.7pt"></span></p>
<p class="HStyle0" style="LINE-HEIGHT: 200%"><span style="FONT-SIZE: 11pt; LINE-HEIGHT: 200%; FONT-FAMILY: "나눔명조"; LETTER-SPACING: 0.7pt">I. 서론: 연구의 목적과 방법<span style="HWP-TAB: 1">&nbsp;</span>1</span></p>
<p class="HStyle0" style="LINE-HEIGHT: 200%"><span style="FONT-SIZE: 11pt; LINE-HEIGHT: 200%; FONT-FAMILY: "나눔명조"; LETTER-SPACING: 0.7pt"><br /></span></p>
<p class="HStyle0" style="LINE-HEIGHT: 200%"><span style="FONT-SIZE: 11pt; LINE-HEIGHT: 200%; FONT-FAMILY: "나눔명조"; LETTER-SPACING: 0.7pt">II. 스피노자 시대의 신학적 주권체제와 주권적 신학체제<span style="HWP-TAB: 1">&nbsp;</span>5</span></p>
<p class="HStyle0" style="LINE-HEIGHT: 200%"><span style="FONT-SIZE: 11pt; LINE-HEIGHT: 200%; FONT-FAMILY: "나눔명조"; LETTER-SPACING: 0.7pt">&nbsp;&nbsp;&nbsp;&nbsp;1. 17세기 네덜란드의 정치 ․ 사회적 상황<span style="HWP-TAB: 1">&nbsp;</span>6</span></p>
<p class="HStyle0" style="LINE-HEIGHT: 200%"><span style="FONT-SIZE: 11pt; LINE-HEIGHT: 200%; FONT-FAMILY: "나눔명조"; LETTER-SPACING: 0.7pt">&nbsp;&nbsp;&nbsp;&nbsp;&nbsp;&nbsp;(1) 경제성장과 정치적 위기<span style="HWP-TAB: 1">&nbsp;</span>7</span></p>
<p class="HStyle0" style="LINE-HEIGHT: 200%"><span style="FONT-SIZE: 11pt; LINE-HEIGHT: 200%; FONT-FAMILY: "나눔명조"; LETTER-SPACING: 0.7pt">&nbsp;&nbsp;&nbsp;&nbsp;&nbsp;&nbsp;(2) 정무관파와 오란녜파<span style="HWP-TAB: 1">&nbsp;</span>7</span></p>
<p class="HStyle0" style="LINE-HEIGHT: 200%"><span style="FONT-SIZE: 11pt; LINE-HEIGHT: 200%; FONT-FAMILY: "나눔명조"; LETTER-SPACING: 0.7pt">&nbsp;&nbsp;&nbsp;&nbsp;&nbsp;&nbsp;(3) 정치 갈등과 종교의 문제<span style="HWP-TAB: 1">&nbsp;</span>9</span></p>
<p class="HStyle0" style="LINE-HEIGHT: 200%"><span style="FONT-SIZE: 11pt; LINE-HEIGHT: 200%; FONT-FAMILY: "나눔명조"; LETTER-SPACING: 0.7pt">&nbsp;&nbsp;&nbsp;&nbsp;2. 17세기 네덜란드의 주권적 신학체제와 신학적 주권체제<span style="HWP-TAB: 1">&nbsp;</span>10</span></p>
<p class="HStyle0" style="LINE-HEIGHT: 200%"><span style="FONT-SIZE: 11pt; LINE-HEIGHT: 200%; FONT-FAMILY: "나눔명조"; LETTER-SPACING: 0.7pt">&nbsp;&nbsp;&nbsp;&nbsp;&nbsp;&nbsp;(1) 관용 속에서의 갈등<span style="HWP-TAB: 1">&nbsp;</span>10</span></p>
<p class="HStyle0" style="LINE-HEIGHT: 200%"><span style="FONT-SIZE: 11pt; LINE-HEIGHT: 200%; FONT-FAMILY: "나눔명조"; LETTER-SPACING: 0.7pt">&nbsp;&nbsp;&nbsp;&nbsp;&nbsp;&nbsp;(2) 칼뱅주의의 대두<span style="HWP-TAB: 1">&nbsp;</span>10</span></p>
<p class="HStyle0" style="LINE-HEIGHT: 200%"><span style="FONT-SIZE: 11pt; LINE-HEIGHT: 200%; FONT-FAMILY: "나눔명조"; LETTER-SPACING: 0.7pt">&nbsp;&nbsp;&nbsp;&nbsp;&nbsp;&nbsp;(3) 칼뱅파 내부의 갈등: 아르미니우스 파와 고마루스 파<span style="HWP-TAB: 1">&nbsp;</span>11</span></p>
<p class="HStyle0" style="LINE-HEIGHT: 200%"><span style="FONT-SIZE: 11pt; LINE-HEIGHT: 200%; FONT-FAMILY: "나눔명조"; LETTER-SPACING: 0.7pt">&nbsp;&nbsp;&nbsp;&nbsp;&nbsp;&nbsp;(4) 비 주류 종파들<span style="HWP-TAB: 1">&nbsp;</span>13</span></p>
<p class="HStyle0" style="LINE-HEIGHT: 200%"><span style="FONT-SIZE: 11pt; LINE-HEIGHT: 200%; FONT-FAMILY: "나눔명조"; LETTER-SPACING: 0.7pt">&nbsp;&nbsp;&nbsp;&nbsp;&nbsp;&nbsp;(5) 칼뱅파의 주권적 신학체제<span style="HWP-TAB: 1">&nbsp;</span>14</span></p>
<p class="HStyle0" style="LINE-HEIGHT: 200%"><span style="FONT-SIZE: 11pt; LINE-HEIGHT: 200%; FONT-FAMILY: "나눔명조"; LETTER-SPACING: 0.7pt">&nbsp;&nbsp;&nbsp;&nbsp;&nbsp;&nbsp;(6) 오란녜파의 신학적 주권체제<span style="HWP-TAB: 1">&nbsp;</span>15</span></p>
<p class="HStyle0" style="LINE-HEIGHT: 200%"><span style="FONT-SIZE: 11pt; LINE-HEIGHT: 200%; FONT-FAMILY: "나눔명조"; LETTER-SPACING: 0.7pt">&nbsp;&nbsp;&nbsp;&nbsp;3. 반(反)주권, 반(反)신학의 사상가 스피노자<span style="HWP-TAB: 1">&nbsp;</span>17</span></p>
<p class="HStyle0" style="LINE-HEIGHT: 200%"><span style="FONT-SIZE: 11pt; LINE-HEIGHT: 200%; FONT-FAMILY: "나눔명조"; LETTER-SPACING: 0.7pt">&nbsp;&nbsp;&nbsp;&nbsp;&nbsp;&nbsp;(1) 유대교적 배경<span style="HWP-TAB: 1">&nbsp;</span>17</span></p>
<p class="HStyle0" style="LINE-HEIGHT: 200%"><span style="FONT-SIZE: 11pt; LINE-HEIGHT: 200%; FONT-FAMILY: "나눔명조"; LETTER-SPACING: 0.7pt">&nbsp;&nbsp;&nbsp;&nbsp;&nbsp;&nbsp;(2) 사상가로서의 명성<span style="HWP-TAB: 1">&nbsp;</span>18</span></p>
<p class="HStyle0" style="LINE-HEIGHT: 200%"><span style="FONT-SIZE: 11pt; LINE-HEIGHT: 200%; FONT-FAMILY: "나눔명조"; LETTER-SPACING: 0.7pt">&nbsp;&nbsp;&nbsp;&nbsp;&nbsp;&nbsp;(3) 야생적 별종<span style="HWP-TAB: 1">&nbsp;</span>19</span></p>
<p class="HStyle0" style="LINE-HEIGHT: 200%"><span style="FONT-SIZE: 11pt; LINE-HEIGHT: 200%; FONT-FAMILY: "나눔명조"; LETTER-SPACING: 0.7pt"><br /></span></p>
<p class="HStyle0" style="LINE-HEIGHT: 200%"><span style="FONT-SIZE: 11pt; LINE-HEIGHT: 200%; FONT-FAMILY: "나눔명조"; LETTER-SPACING: 0.7pt">III. 신과 세계: 존재의 일의성과 관개체성<span style="HWP-TAB: 1">&nbsp;</span>21</span></p>
<p class="HStyle0" style="LINE-HEIGHT: 200%"><span style="FONT-SIZE: 11pt; LINE-HEIGHT: 200%; FONT-FAMILY: "나눔명조"; LETTER-SPACING: 0.7pt">&nbsp;&nbsp;&nbsp;&nbsp;1. 존재의 일의성: 신은 어떤 존재인가?<span style="HWP-TAB: 1">&nbsp;</span>22</span></p>
<p class="HStyle0" style="LINE-HEIGHT: 200%"><span style="FONT-SIZE: 11pt; LINE-HEIGHT: 200%; FONT-FAMILY: "나눔명조"; LETTER-SPACING: 0.7pt">&nbsp;&nbsp;&nbsp;&nbsp;&nbsp;&nbsp;(1) 신을 사랑한 무신론자<span style="HWP-TAB: 1">&nbsp;</span>22</span></p>
<p class="HStyle0" style="LINE-HEIGHT: 200%"><span style="FONT-SIZE: 11pt; LINE-HEIGHT: 200%; FONT-FAMILY: "나눔명조"; LETTER-SPACING: 0.7pt">&nbsp;&nbsp;&nbsp;&nbsp;&nbsp;&nbsp;(2) 긍정신학, 부정신학, 표현의 신학<span style="HWP-TAB: 1">&nbsp;</span>23</span></p>
<p class="HStyle0" style="LINE-HEIGHT: 200%"><span style="FONT-SIZE: 11pt; LINE-HEIGHT: 200%; FONT-FAMILY: "나눔명조"; LETTER-SPACING: 0.7pt">&nbsp;&nbsp;&nbsp;&nbsp;&nbsp;&nbsp;(3) 실체(신), 속성, 양태<span style="HWP-TAB: 1">&nbsp;</span>27</span></p>
<p class="HStyle0" style="LINE-HEIGHT: 200%"><span style="FONT-SIZE: 11pt; LINE-HEIGHT: 200%; FONT-FAMILY: "나눔명조"; LETTER-SPACING: 0.7pt">&nbsp;&nbsp;&nbsp;&nbsp;&nbsp;&nbsp;(4) 자기원인<span style="HWP-TAB: 1">&nbsp;</span>30</span></p>
<p class="HStyle0" style="LINE-HEIGHT: 200%"><span style="FONT-SIZE: 11pt; LINE-HEIGHT: 200%; FONT-FAMILY: "나눔명조"; LETTER-SPACING: 0.7pt">&nbsp;&nbsp;&nbsp;&nbsp;2. 존재의 관개체성: 세계는 어떻게 존재하는가?<span style="HWP-TAB: 1">&nbsp;</span>32</span></p>
<p class="HStyle0" style="LINE-HEIGHT: 200%"><span style="FONT-SIZE: 11pt; LINE-HEIGHT: 200%; FONT-FAMILY: "나눔명조"; LETTER-SPACING: 0.7pt">&nbsp;&nbsp;&nbsp;&nbsp;&nbsp;&nbsp;(1) 범신론을 넘어<span style="HWP-TAB: 1">&nbsp;</span>33</span></p>
<p class="HStyle0" style="LINE-HEIGHT: 200%"><span style="FONT-SIZE: 11pt; LINE-HEIGHT: 200%; FONT-FAMILY: "나눔명조"; LETTER-SPACING: 0.7pt">&nbsp;&nbsp;&nbsp;&nbsp;&nbsp;&nbsp;(2) 관개체성의 존재론<span style="HWP-TAB: 1">&nbsp;</span>34</span></p>
<p class="HStyle0" style="LINE-HEIGHT: 200%"><span style="FONT-SIZE: 11pt; LINE-HEIGHT: 200%; FONT-FAMILY: "나눔명조"; LETTER-SPACING: 0.7pt">&nbsp;&nbsp;&nbsp;&nbsp;&nbsp;&nbsp;(3) 개체의 능력: 코나투스<span style="HWP-TAB: 1">&nbsp;</span>39</span></p>
<p class="HStyle0" style="LINE-HEIGHT: 200%"><span style="FONT-SIZE: 11pt; LINE-HEIGHT: 200%; FONT-FAMILY: "나눔명조"; LETTER-SPACING: 0.7pt"><br /></span></p>
<p class="HStyle0" style="LINE-HEIGHT: 200%"><span style="FONT-SIZE: 11pt; LINE-HEIGHT: 200%; FONT-FAMILY: "나눔명조"; LETTER-SPACING: 0.7pt">IV. 다중의 무능력의 전개<span style="HWP-TAB: 1">&nbsp;</span>43</span></p>
<p class="HStyle0" style="LINE-HEIGHT: 200%"><span style="FONT-SIZE: 11pt; LINE-HEIGHT: 200%; FONT-FAMILY: "나눔명조"; LETTER-SPACING: 0.7pt">&nbsp;&nbsp;&nbsp;&nbsp;1. ������윤리학������: 부적합한 인식과 수동적 정념<span style="HWP-TAB: 1">&nbsp;</span>44</span></p>
<p class="HStyle0" style="LINE-HEIGHT: 200%"><span style="FONT-SIZE: 11pt; LINE-HEIGHT: 200%; FONT-FAMILY: "나눔명조"; LETTER-SPACING: 0.7pt">&nbsp;&nbsp;&nbsp;&nbsp;&nbsp;&nbsp;(1) 신체와 정신의 평행론<span style="HWP-TAB: 1">&nbsp;</span>44</span></p>
<p class="HStyle0" style="LINE-HEIGHT: 200%"><span style="FONT-SIZE: 11pt; LINE-HEIGHT: 200%; FONT-FAMILY: "나눔명조"; LETTER-SPACING: 0.7pt">&nbsp;&nbsp;&nbsp;&nbsp;&nbsp;&nbsp;(2) 부적합한 관념<span style="HWP-TAB: 1">&nbsp;</span>46</span></p>
<p class="HStyle0" style="LINE-HEIGHT: 200%"><span style="FONT-SIZE: 11pt; LINE-HEIGHT: 200%; FONT-FAMILY: "나눔명조"; LETTER-SPACING: 0.7pt">&nbsp;&nbsp;&nbsp;&nbsp;&nbsp;&nbsp;(3) 수동적 변용과 정념<span style="HWP-TAB: 1">&nbsp;</span>50</span></p>
<p class="HStyle0" style="LINE-HEIGHT: 200%"><span style="FONT-SIZE: 11pt; LINE-HEIGHT: 200%; FONT-FAMILY: "나눔명조"; LETTER-SPACING: 0.7pt">&nbsp;&nbsp;&nbsp;&nbsp;2. ������신학정치론������: 다중은 왜 예속을 욕망하는가?<span style="HWP-TAB: 1">&nbsp;</span>53</span></p>
<p class="HStyle0" style="LINE-HEIGHT: 200%"><span style="FONT-SIZE: 11pt; LINE-HEIGHT: 200%; FONT-FAMILY: "나눔명조"; LETTER-SPACING: 0.7pt">&nbsp;&nbsp;&nbsp;&nbsp;&nbsp;&nbsp;(1) 미신의 발생<span style="HWP-TAB: 1">&nbsp;</span>53</span></p>
<p class="HStyle0" style="LINE-HEIGHT: 200%"><span style="FONT-SIZE: 11pt; LINE-HEIGHT: 200%; FONT-FAMILY: "나눔명조"; LETTER-SPACING: 0.7pt">&nbsp;&nbsp;&nbsp;&nbsp;&nbsp;&nbsp;(2) 미신적 종교와 정치의 결탁<span style="HWP-TAB: 1">&nbsp;</span>54</span></p>
<p class="HStyle0" style="LINE-HEIGHT: 200%"><span style="FONT-SIZE: 11pt; LINE-HEIGHT: 200%; FONT-FAMILY: "나눔명조"; LETTER-SPACING: 0.7pt">&nbsp;&nbsp;&nbsp;&nbsp;&nbsp;&nbsp;(3) 다중의 무능력의 역사적 전개<span style="HWP-TAB: 1">&nbsp;</span>55</span></p>
<p class="HStyle0" style="LINE-HEIGHT: 200%"><span style="FONT-SIZE: 11pt; LINE-HEIGHT: 200%; FONT-FAMILY: "나눔명조"; LETTER-SPACING: 0.7pt">&nbsp;&nbsp;&nbsp;&nbsp;3. ������정치론������: 내란과 폭정의 악순환<span style="HWP-TAB: 1">&nbsp;</span>57</span></p>
<p class="HStyle0" style="LINE-HEIGHT: 200%"><span style="FONT-SIZE: 11pt; LINE-HEIGHT: 200%; FONT-FAMILY: "나눔명조"; LETTER-SPACING: 0.7pt">&nbsp;&nbsp;&nbsp;&nbsp;&nbsp;&nbsp;(1)자연권<span style="HWP-TAB: 1">&nbsp;</span>57</span></p>
<p class="HStyle0" style="LINE-HEIGHT: 200%"><span style="FONT-SIZE: 11pt; LINE-HEIGHT: 200%; FONT-FAMILY: "나눔명조"; LETTER-SPACING: 0.7pt">&nbsp;&nbsp;&nbsp;&nbsp;&nbsp;&nbsp;(2) 내란과 폭정의 악순환<span style="HWP-TAB: 1">&nbsp;</span>61</span></p>
<p class="HStyle0" style="LINE-HEIGHT: 200%"><span style="FONT-SIZE: 11pt; LINE-HEIGHT: 200%; FONT-FAMILY: "나눔명조"; LETTER-SPACING: 0.7pt"><br /></span></p>
<p class="HStyle0" style="LINE-HEIGHT: 200%"><span style="FONT-SIZE: 11pt; LINE-HEIGHT: 200%; FONT-FAMILY: "나눔명조"; LETTER-SPACING: 0.7pt">V. 다중의 능력의 전개<span style="HWP-TAB: 1">&nbsp;</span>64</span></p>
<p class="HStyle0" style="LINE-HEIGHT: 200%"><span style="FONT-SIZE: 11pt; LINE-HEIGHT: 200%; FONT-FAMILY: "나눔명조"; LETTER-SPACING: 0.7pt">&nbsp;&nbsp;&nbsp;&nbsp;1. ������윤리학������: 공통-되기와 능동성으로의 이행<span style="HWP-TAB: 1">&nbsp;</span>64</span></p>
<p class="HStyle0" style="LINE-HEIGHT: 200%"><span style="FONT-SIZE: 11pt; LINE-HEIGHT: 200%; FONT-FAMILY: "나눔명조"; LETTER-SPACING: 0.7pt">&nbsp;&nbsp;&nbsp;&nbsp;&nbsp;&nbsp;(1) 공통 개념<span style="HWP-TAB: 1">&nbsp;</span>64</span></p>
<p class="HStyle0" style="LINE-HEIGHT: 200%"><span style="FONT-SIZE: 11pt; LINE-HEIGHT: 200%; FONT-FAMILY: "나눔명조"; LETTER-SPACING: 0.7pt">&nbsp;&nbsp;&nbsp;&nbsp;&nbsp;&nbsp;(2) 정서모방과 사회적 관계의 형성<span style="HWP-TAB: 1">&nbsp;</span>67</span></p>
<p class="HStyle0" style="LINE-HEIGHT: 200%"><span style="FONT-SIZE: 11pt; LINE-HEIGHT: 200%; FONT-FAMILY: "나눔명조"; LETTER-SPACING: 0.7pt">&nbsp;&nbsp;&nbsp;&nbsp;&nbsp;&nbsp;(3) 기쁨의 정서와 능동적 변용<span style="HWP-TAB: 1">&nbsp;</span>70</span></p>
<p class="HStyle0" style="LINE-HEIGHT: 200%"><span style="FONT-SIZE: 11pt; LINE-HEIGHT: 200%; FONT-FAMILY: "나눔명조"; LETTER-SPACING: 0.7pt">&nbsp;&nbsp;&nbsp;&nbsp;&nbsp;&nbsp;(4) 공통-되기<span style="HWP-TAB: 1">&nbsp;</span>72</span></p>
<p class="HStyle0" style="LINE-HEIGHT: 200%"><span style="FONT-SIZE: 11pt; LINE-HEIGHT: 200%; FONT-FAMILY: "나눔명조"; LETTER-SPACING: 0.7pt">&nbsp;&nbsp;&nbsp;&nbsp;&nbsp;&nbsp;(5) 신에 대한 사랑 <span style="HWP-TAB: 1">&nbsp;</span>76</span></p>
<p class="HStyle0" style="LINE-HEIGHT: 200%"><span style="FONT-SIZE: 11pt; LINE-HEIGHT: 200%; FONT-FAMILY: "나눔명조"; LETTER-SPACING: 0.7pt">&nbsp;&nbsp;&nbsp;&nbsp;&nbsp;&nbsp;(6) 영원하게-되기<span style="HWP-TAB: 1">&nbsp;</span>78</span></p>
<p class="HStyle0" style="LINE-HEIGHT: 200%"><span style="FONT-SIZE: 11pt; LINE-HEIGHT: 200%; FONT-FAMILY: "나눔명조"; LETTER-SPACING: 0.7pt">&nbsp;&nbsp;&nbsp;&nbsp;2. ������신학정치론������: 양심의 자유와 상상력의 전복적 활용으로서의 보편종교<span style="HWP-TAB: 1">&nbsp;</span>81</span></p>
<p class="HStyle0" style="LINE-HEIGHT: 200%"><span style="FONT-SIZE: 11pt; LINE-HEIGHT: 200%; FONT-FAMILY: "나눔명조"; LETTER-SPACING: 0.7pt">&nbsp;&nbsp;&nbsp;&nbsp;&nbsp;&nbsp;(1) 상상력의 전복적 활용<span style="HWP-TAB: 1">&nbsp;</span>81</span></p>
<p class="HStyle0" style="LINE-HEIGHT: 200%"><span style="FONT-SIZE: 11pt; LINE-HEIGHT: 200%; FONT-FAMILY: "나눔명조"; LETTER-SPACING: 0.7pt">&nbsp;&nbsp;&nbsp;&nbsp;&nbsp;&nbsp;(2) 보편종교<span style="HWP-TAB: 1">&nbsp;</span>85</span></p>
<p class="HStyle0" style="LINE-HEIGHT: 200%"><span style="FONT-SIZE: 11pt; LINE-HEIGHT: 200%; FONT-FAMILY: "나눔명조"; LETTER-SPACING: 0.7pt">&nbsp;&nbsp;&nbsp;&nbsp;&nbsp;&nbsp;(3) 민주주의의 가능성<span style="HWP-TAB: 1">&nbsp;</span>87</span></p>
<p class="HStyle0" style="LINE-HEIGHT: 200%"><span style="FONT-SIZE: 11pt; LINE-HEIGHT: 200%; FONT-FAMILY: "나눔명조"; LETTER-SPACING: 0.7pt">&nbsp;&nbsp;&nbsp;&nbsp;&nbsp;&nbsp;(4) 스피노자의 그리스도 이해<span style="HWP-TAB: 1">&nbsp;</span>88</span></p>
<p class="HStyle0" style="LINE-HEIGHT: 200%"><span style="FONT-SIZE: 11pt; LINE-HEIGHT: 200%; FONT-FAMILY: "나눔명조"; LETTER-SPACING: 0.7pt">&nbsp;&nbsp;&nbsp;&nbsp;3. ������정치론������: 절대적 민주주의<span style="HWP-TAB: 1">&nbsp;</span>90</span></p>
<p class="HStyle0" style="LINE-HEIGHT: 200%"><span style="FONT-SIZE: 11pt; LINE-HEIGHT: 200%; FONT-FAMILY: "나눔명조"; LETTER-SPACING: 0.7pt">&nbsp;&nbsp;&nbsp;&nbsp;&nbsp;&nbsp;(1) 이성과 복종<span style="HWP-TAB: 1">&nbsp;</span>90</span></p>
<p class="HStyle0" style="LINE-HEIGHT: 200%"><span style="FONT-SIZE: 11pt; LINE-HEIGHT: 200%; FONT-FAMILY: "나눔명조"; LETTER-SPACING: 0.7pt">&nbsp;&nbsp;&nbsp;&nbsp;&nbsp;&nbsp;(2) 정치체제의 분석<span style="HWP-TAB: 1">&nbsp;</span>92</span></p>
<p class="HStyle0" style="LINE-HEIGHT: 200%"><span style="FONT-SIZE: 11pt; LINE-HEIGHT: 200%; FONT-FAMILY: "나눔명조"; LETTER-SPACING: 0.7pt">&nbsp;&nbsp;&nbsp;&nbsp;&nbsp;&nbsp;(3) 공포스런 존재: 자유로운 다중<span style="HWP-TAB: 1">&nbsp;</span>96</span></p>
<p class="HStyle0" style="LINE-HEIGHT: 200%"><span style="FONT-SIZE: 11pt; LINE-HEIGHT: 200%; FONT-FAMILY: "나눔명조"; LETTER-SPACING: 0.7pt">&nbsp;&nbsp;&nbsp;&nbsp;&nbsp;&nbsp;(4) 혁명: 영원하게-되기, 신-되기<span style="HWP-TAB: 1">&nbsp;</span>98</span></p>
<p class="HStyle0" style="LINE-HEIGHT: 200%"><span style="FONT-SIZE: 11pt; LINE-HEIGHT: 200%; FONT-FAMILY: "나눔명조"; LETTER-SPACING: 0.7pt">&nbsp;&nbsp;&nbsp;&nbsp;&nbsp;&nbsp;(5) 민주주의와 소수자의 문제: 여성 참정권 불가론에 대한 재해석<span style="HWP-TAB: 1">&nbsp;</span>100</span></p>
<p class="HStyle0" style="LINE-HEIGHT: 200%"><span style="FONT-SIZE: 11pt; LINE-HEIGHT: 200%; FONT-FAMILY: "나눔명조"; LETTER-SPACING: 0.7pt"><br /></span></p>
<p class="HStyle0" style="LINE-HEIGHT: 200%"><span style="FONT-SIZE: 11pt; LINE-HEIGHT: 200%; FONT-FAMILY: "나눔명조"; LETTER-SPACING: 0.7pt">VI. 스피노자와 민중신학<span style="HWP-TAB: 1">&nbsp;</span>103</span></p>
<p class="HStyle0" style="LINE-HEIGHT: 200%"><span style="FONT-SIZE: 11pt; LINE-HEIGHT: 200%; FONT-FAMILY: "나눔명조"; LETTER-SPACING: 0.7pt">&nbsp;&nbsp;&nbsp;&nbsp;1. 스피노자의 현재성<span style="HWP-TAB: 1">&nbsp;</span>104</span></p>
<p class="HStyle0" style="LINE-HEIGHT: 200%"><span style="FONT-SIZE: 11pt; LINE-HEIGHT: 200%; FONT-FAMILY: "나눔명조"; LETTER-SPACING: 0.7pt">&nbsp;&nbsp;&nbsp;&nbsp;&nbsp;&nbsp;(1) 민주주의의 영원성<span style="HWP-TAB: 1">&nbsp;</span>104</span></p>
<p class="HStyle0" style="LINE-HEIGHT: 200%"><span style="FONT-SIZE: 11pt; LINE-HEIGHT: 200%; FONT-FAMILY: "나눔명조"; LETTER-SPACING: 0.7pt">&nbsp;&nbsp;&nbsp;&nbsp;&nbsp;&nbsp;(2) 변용과 탈주체성으로서의 주체성: 다중-되기<span style="HWP-TAB: 1">&nbsp;</span>107</span></p>
<p class="HStyle0" style="LINE-HEIGHT: 200%"><span style="FONT-SIZE: 11pt; LINE-HEIGHT: 200%; FONT-FAMILY: "나눔명조"; LETTER-SPACING: 0.7pt">&nbsp;&nbsp;&nbsp;&nbsp;&nbsp;&nbsp;(3) 탈근대 자본주의 속에서의 다중<span style="HWP-TAB: 1">&nbsp;</span>112</span></p>
<p class="HStyle0" style="LINE-HEIGHT: 200%"><span style="FONT-SIZE: 11pt; LINE-HEIGHT: 200%; FONT-FAMILY: "나눔명조"; LETTER-SPACING: 0.7pt">&nbsp;&nbsp;&nbsp;&nbsp;&nbsp;&nbsp;(4) 스피노자의 사유에서 &ldquo;신학&rdquo;의 한계와 가능성<span style="HWP-TAB: 1">&nbsp;</span>115</span></p>
<p class="HStyle0" style="LINE-HEIGHT: 200%"><span style="FONT-SIZE: 11pt; LINE-HEIGHT: 200%; FONT-FAMILY: "나눔명조"; LETTER-SPACING: 0.7pt">&nbsp;&nbsp;&nbsp;&nbsp;2. 서남동 ․ 안병무의 민중신학의 재해석<span style="HWP-TAB: 1">&nbsp;</span>117</span></p>
<p class="HStyle0" style="LINE-HEIGHT: 200%"><span style="FONT-SIZE: 11pt; LINE-HEIGHT: 200%; FONT-FAMILY: "나눔명조"; LETTER-SPACING: 0.7pt">&nbsp;&nbsp;&nbsp;&nbsp;&nbsp;&nbsp;(1) 公과 物: 민중신학적 존재론<span style="HWP-TAB: 1">&nbsp;</span>117</span></p>
<p class="HStyle0" style="LINE-HEIGHT: 200%"><span style="FONT-SIZE: 11pt; LINE-HEIGHT: 200%; FONT-FAMILY: "나눔명조"; LETTER-SPACING: 0.7pt">&nbsp;&nbsp;&nbsp;&nbsp;&nbsp;&nbsp;(2) 탈-향(脫-向)과 민중의 자기 초월<span style="HWP-TAB: 1">&nbsp;</span>123</span></p>
<p class="HStyle0" style="LINE-HEIGHT: 200%"><span style="FONT-SIZE: 11pt; LINE-HEIGHT: 200%; FONT-FAMILY: "나눔명조"; LETTER-SPACING: 0.7pt">&nbsp;&nbsp;&nbsp;&nbsp;&nbsp;&nbsp;(3) 종말론적 민중 메시아와 화산맥&nbsp;&nbsp; <span style="HWP-TAB: 1">&nbsp;</span>127</span></p>
<p class="HStyle0" style="LINE-HEIGHT: 200%"><span style="FONT-SIZE: 11pt; LINE-HEIGHT: 200%; FONT-FAMILY: "나눔명조"; LETTER-SPACING: 0.7pt"><br /></span></p>
<p class="HStyle0" style="LINE-HEIGHT: 200%"><span style="FONT-SIZE: 11pt; LINE-HEIGHT: 200%; FONT-FAMILY: "나눔명조"; LETTER-SPACING: 0.7pt">VII. 결론<span style="HWP-TAB: 1">&nbsp;</span>130</span></p>
]]>
			</description>
			<author>김강</author>
			<category>신학/철학 뒷담화</category>
			
			
			<pubDate>Tue, 16 Jun 2009 20:59:15 +0900</pubDate>
		</item>
		<item>
			<guid>http://blog.jinbo.net/minjung/?pid=251</guid>
			<title>논문 심사</title>
			<link>http://blog.jinbo.net/minjung/?pid=251</link>
			<description>
<![CDATA[
<!--FCKeditor--><p>논문 심사 받고 나왔다.</p>
<p>&nbsp;</p>
<p>일단 전달 사항은</p>
<p>&nbsp;</p>
<p>1. 분량이 너무 많다. 적당히 뺄 건 빼도록.(아.. 아까운데...ㅜㅜ)</p>
<p>2. 서론의 문제제기를 결론에서 완전히 해명하고 있지 못하다.(이건 민중신학 2, 3세대를 다루지 못한 탓..)&nbsp; 서론을 고치던지, 결론을 고치던지 하도록.</p>
<p>&nbsp;</p>
<p>&nbsp;</p>
<p>이하 덕담.ㅡㅡ;(자세했지만 대략은..)</p>
<p>1. 창의적 시도</p>
<p>2. 애썼네. 책 내라.</p>
<p>3. 젊구나...(뭥미?)</p>
]]>
			</description>
			<author>김강</author>
			<category>신학/철학 뒷담화</category>
			
			
			<pubDate>Tue, 16 Jun 2009 10:35:42 +0900</pubDate>
		</item>
		<item>
			<guid>http://blog.jinbo.net/minjung/?pid=250</guid>
			<title>결론</title>
			<link>http://blog.jinbo.net/minjung/?pid=250</link>
			<description>
<![CDATA[
<!--FCKeditor--><p><!--StartFragment-->젠장. 세 시간 동안 붙들고 못 쓰던 걸 보드카 세잔, 진 한잔 마시고 일필휘지로..ㅡㅡ;;</p>
<p>&nbsp;</p>
<p>&nbsp;</p>
<p>&nbsp;</p>
<p class="HStyle1">VII. 결론</p>
<p class="HStyle2"><br /></p>
<p class="HStyle2">지금까지 우리는 스피노자의 &ldquo;다중&rdquo; 개념을 중심으로 그의 존재론과 윤리학, 정치학을 검토하고, 그것이 민중신학과 관련하여 갖는 의미들을 탐구해 보았다. 스피노자는 17세기 네덜란드의 주권적 신학체제와 신학적 주권체제에 맞서, 다중의 능력으로부터 출발하는 절대적인 민주주의를 제시했다. 그는 평생 칼뱅주의자들의 선동 아래에서 자발적으로 예속을 욕망하던 다중의 무능력한 모습을 보았으면서도, 그러한 다중이 자신의 정치적 이상을 실현할 수 있는 유일한 주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p>
<p class="HStyle2">&nbsp;</p>
<p class="HStyle2">다중에 대한 그의 이러한 긍정은 존재론에 대한 새로운 성찰을 통하여 이루어졌다. 스피노자에게 있어서 신과 세계는 분리되거나 구분될 수 없는 일의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 신 즉 실체는 세계의 수많은 양태들로 무한히 많은 방식을 따라 표현된다. 그런 점에서 신은 만물의 내재적인 원인이다. 그러나 양태들은 단지 수동적이기만 한 전체의 부분들이거나, 실재성 없이 전체에 복속하고 있는 것들이 아니다. 신이 실존한다는 것은 자연의 양태들이 무한한 방법으로 변용되며 실존한다는 것과 다른 말이 아니다. 신만이 모든 개체들을 근거지우고 있는 것이 아니라 각 개체들의 끊임없는 변용이 또한 신을 근거지우고 있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양태들의 관계와 변용을 &ldquo;관개체성&rdquo;이라는 개념을 통해 분석하였다. 신의 양태인 각 개체들은 결코 독립적인 존재로 고찰될 수 없으며, 항상 관계 속에서, 관-개체로서 존재한다. 각각의 개체는 관계 안에서 변용됨/함으로써 신의 능력의 일부인 자신의 고유한 능력을 표현하며 실존한다. 스피노자는 이것을 코나투스라고 부른다. </p>
<p class="HStyle2">&nbsp;</p>
<p class="HStyle2">스피노자의 윤리학과 정치학은 이 코나투스로부터 시작한다. 그는 모든 개체는 관계 속에서 존재하므로, 각 개체가 자신을 보존하고, 지속적으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다른 개체와 합력하여 공동체를 구성해야 한다고 보았다. 윤리학과 정치학에서 이 개체는 &lsquo;다중&rsquo;으로 나타난다. 각각의 다중이 자신의 코나투스에 입각하여 공통-되기로 나아가는 것, 그리고 그것을 통하여 능력의 증대를 체험하고 능동적인 존재로 변용하는 것, 이것이 스피노자의 &ldquo;민주주의&rdquo;였다. 스피노자는 이러한 공통-되기의 정치학을 통하여, 위로부터 초월적 규범에 의해 성립되는 권위주의적 국가의 형상이나, 자연상태의 각인이 자신의 능력(자연권)을 양도하는 계약을 통해 성립되는 자유주의적 국가의 형상을 폐기한다. 이 두 입장은 모두 관계 속에서 존재하는 다중을 각각의 개인으로 분리하고, 또 각 개인을 그가 가진 코나투스로부터 분리하는데서 그들의 국가학을 세운다. 따라서 국가와 지배자는 다중에 대하여 외부적이고, 초월적인 매개자의 모습으로 나타나며 다중은 수동적인 대상으로밖에 존재할 수 없게 된다. 스피노자는 다중의 민주주의야말로, 모든 다른 정치형태의 존립을 근거지우는 절대적인 통치라고 주장한다. </p>
<p class="HStyle2">&nbsp;</p>
<p class="HStyle2">스피노자는 이러한 다중의 공통-되기를 가로막고 다중을 항구적인 수동적 상태에 머무르게 하는 것을 당시의 종교에서 찾았다. 종교는 다중으로 하여금 초월적인 신에 대한 상상 속에서 성직자들과 권력자들에게 복종하게 만드는 기능을 수행한다. 그러나 다중은 각각의 코나투스를 가지고 있고, 또 다양한 방식으로 실존하고 있기 때문에 신에 대한 상상 역시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게 된다. 때문에 성직자들과 권력자들은 종교의 자유를 다중에게서 박탈하는 수많은 법과 제도, 규율을 통해 주권적인 신학체제를 구성한다. 다중은 이러한 종교체제 속에서 적합한 원인에 대한 인식이 아니라 통념과 교조에 따라 행동하게 된다. </p>
<p class="HStyle2">&nbsp;</p>
<p class="HStyle2">그러나 스피노자는 그렇기 때문에 종교를 폐기해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그는 종교적 상상력이 다중들로 하여금 공통-되기로 나아갈 수 있게 하는 강력한 도구가 될 수 있다고 보았다. 스피노자에게 종교는 철학과는 다른 방식으로 세계를 설명하는 상상의 체계이기도 했다. 성서의 이야기들은 많은 신화와 역사 서술을 담고 있지만, 그 대의는 &ldquo;신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rdquo;는 공통-되기의 윤리로 집약된다는 것이다. 다중은 세상의 이치를 적합하게 앎으로써 공통-되기로 나아갈 수도 있지만, 종교적 상상력을 통해서도 공통-되기로 나아갈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신앙의 자유가 절대적으로 보장되어야 했다. 각 개인이 자유롭게 신앙적 상상력을 갖고 이웃과의 유대를 나누는 것, 그것이 스피노자가 생각한 &ldquo;보편 종교&rdquo;의 이상이었다. 이러한 종교의 전복적인 활용을 통해 다중은 민주주의를 향해 나아갈 수 있게 된다. </p>
<p class="HStyle2">&nbsp;</p>
<p class="HStyle2">VI장에서 우리는 이러한 스피노자의 사상이 오늘날 우리 현실과 만나는 지점을 탐구하여 보았다. 스피노자의 이론 속에서 우리는 대의제 민주주의로로 다 설명할 수 없는 절대적인 민주주의를 발견하게 된다. 민주주의는 어떤 제도나 체제로 환원될 수 없다. 그것은 끊임없는 다중의 실천, 예속적인 통치를 넘어서서 자율적인 자기-통치로 나아가는 다중의 실천이라 할 수 있다. 2008년 촛불집회는 이러한 절대적인 민주주의가 대의제 민주주의의 &ldquo;대의 불가능성&rdquo;을 폭로하며 솟아오른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안토니오 네그리를 참조하여, 탈근대 자본주의의 생산의 변형 속에서 이러한 다중의 현재적 가능성을 탐구하였다. 촛불을 통해 가시적으로 나타난 다중은 점차 사회화되어가며, 삶을 생산하는 것으로 변해가는 현대의 노동형태 속에서 그 잠재성을 키워왔던 것이다.</p>
<p class="HStyle2">&nbsp;</p>
<p class="HStyle2">이러한 스피노자의 존재론과 다중의 개념은 그동안 중요하게 부각되지 못하였던 민중신학의 존재론적 측면을 새롭게 사유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다. 민중신학은 그동안 전통적인 기독교 신학으로부터 예수와 민중, 하느님과 민중을 구분하지 않는다는 비판을 받아 왔다. 또한 궁극적인 구원과 지금 이 자리에서의 정치적 해방을 구분하지 않고 같은 것으로 바라봄으로써 구원론에 있어 큰 오류를 범하고 있다는 비판 역시 받아 왔다. 그러나 이것은 민중신학이 추구하는 그것을 곧 비판의 내용으로 한다는 점에서 부적절한 비판이라 할 수 있다. 민중신학이 극복하려 한 것이 바로 그런 주객도식과 존재의 양의성 위에 세워진 서구 신학의 구원론이 아니었던가. </p>
<p class="HStyle2">&nbsp;</p>
<p class="HStyle2">신과 세계, 신과 다중(민중)이 주체과 객체로 구별되지 않는 물(物)과 공(公)의 존재론을 통해 민중신학은 어떤 초월적 구원자가 아니라 민중 스스로에게서 구원의 가능성을 찾는다. 때문에 민중신학의 중요한 과제는 서구신학의 이러한 비판적 질문에 응답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이원론적 존재론 바깥으로 더욱 탈주하는 것이다. 민중신학은 &ldquo;민중 사건이 곧 예수 사건&rdquo;이라고 주장한다. 그것은 역사 안에서 하나의 결정적이고 유일회적인 사건으로서의 예수 사건, 십자가와 부활 사건이라는 개념을 폐기한 것이었다. 그 대신 민중신학이 발견한 것은 수다한 민중의 분출이요, 그리하여 수다한 예수 사건들이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ldquo;예수 사건&rdquo;이라는 이름은 세계 속에서 끊임없이 이루어지는 민중의 해방 사건, 스피노자 식으로 말하면 다중의 공통-되기의 사건을 신학적 상상력의 언어로 포착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민중신학이 해방신학과도 매우 다르다는 것을 보여준다. 전통적인 신학과 해방신학은, 말하자면 만 사람이 있어도 하나의 구원,즉 그리스도 예수를 통한 하느님의 구원만이 있다. 다만 정통신학이 그 하나의 구원을 인류의 죄에 대한 대속으로, &lsquo;믿는 자&rsquo;의 천국행으로 이해했다면, 해방신학은 그것을 고통 받는 사람을 향한 우선적 선택으로 이해함으로써 내용적으로 구분될 뿐이다. 민중신학은 이러한 신학의 틀과 존재론에서부터 구분된다. 하느님이 주체가 되어 대상인 세계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다. 세계 속에 구원 사건들이 있는 것이다. 만 사람이 있으면 만 개의 구원, 혹은 그것들의 마주침이 만들어내는 n개의 구원&lsquo;들&rsquo;이 있다. 구원사건은 수없이 일어나고, 또 그 구원사건들은 서로 소통하고 촉발한다. 따라서 민중신학의 과제는 하나의 구원론을 조직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구원의 사건들을 발견하고 증언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p>
<p class="HStyle2">&nbsp;</p>
<p class="HStyle2">물론 민중신학은 2000여년의 기독교 신학의 전통 위에 놓여 있다. 민중신학의 언어 역시 야훼, 그리스도, 메시야, 구원, 종말 등의 전통적인 신학 용어에 의해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가 스피노자의 종교관을 참조할 때 이러한 전통적인 기독교의 용어들은 민중신학에 있어 종교적 상상력을 선용하는 한 방법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민중신학은 거리낌 없이 &ldquo;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rdquo;과 &ldquo;전태일의 죽음&rdquo;을 한 지평에서 사유할 수 있었던 것이다. 김희헌이 잘 지적<a href="http://blog.jinbo.net/minjung/FCKeditor/editor/fckeditor.html?InstanceName=content&amp;Toolbar=Default#FOOTNOTE1"><sup>1)</sup></a>했듯이, 우리는 전통신학의 &lsquo;속죄의 기독론&rsquo;이 민중의 고난의 &lsquo;실재성&rsquo;(actuality)을 제거할 수 있는 것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것이 가능하다고 해도 그것은 심리학적인, 혹은 상상계의 차원에서 그러하다. 고난을 받는 사람이 그리스도의 대속을 &lsquo;믿음&rsquo;으로서 자신의 고난에서 놓여남을 심리학적으로 경험할 수 있지만, 그것 자체가 고난의 실정성을 제거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대속이란 종교적 언어로 이해되어야지 형이상학적 ․ 과학적 언어로 이해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즉 고난에 대한 위대한 공감자 ․ 대속자로서의 하느님에 대한 믿음은 종교적인 희망의 문제이지만, 그것의 실재적 극복은 여전히 민중의 계속되는 자기초월에 의해 가능한 것이다. 민중의 이러한 실천은 지금 여기에서, 그리고 끝나지 않을 영원의 시간 속에서 펼쳐진다. 여기에 다른 구원은 없다. &ldquo;이는 만물이 민중에게서 나오고 민중으로 말미암아 민중으로 돌아감이라. 민중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rdquo;(롬 11:36, 수정은 필자)</p>
<p class="HStyle2">&nbsp;</p>
<hr align="left" width="300" /><a name="#FOOTNOTE1">
<p class="HStyle3">1)&nbsp;김희헌, &ldquo;과정신학의 범재신론 지평에서 본 안병무의 민중 메시야론&rdquo;, 247쪽 </p>
</a><br />
]]>
			</description>
			<author>김강</author>
			<category>앞담화?</category>
			
			
			<pubDate>Tue, 09 Jun 2009 02:05:23 +0900</pubDate>
		</item>
		<item>
			<guid>http://blog.jinbo.net/minjung/?pid=249</guid>
			<title>논문 막바지...</title>
			<link>http://blog.jinbo.net/minjung/?pid=249</link>
			<description>
<![CDATA[
<!--FCKeditor--><p>아 죽겠다.ㅜㅜ</p>
<p>&nbsp;</p>
<p>페이지는 120페이지를 넘어가고...ㅜㅜ</p>
<p>&nbsp;</p>
<p>체력은 거의 바닥났고...ㅜㅜ</p>
<p>&nbsp;</p>
<p>이 와중에도 할 일은 엄청 많고..ㅜㅜ</p>
]]>
			</description>
			<author>김강</author>
			<category>정치/사회 뒷담화</category>
			
			
			<pubDate>Sat, 06 Jun 2009 01:08:35 +0900</pubDate>
		</item>
		<item>
			<guid>http://blog.jinbo.net/minjung/?pid=248</guid>
			<title>왜 다들 집에 가셨어요...?</title>
			<link>http://blog.jinbo.net/minjung/?pid=248</link>
			<description>
<![CDATA[
<!--FCKeditor--><p>화나지 않으셨어요?</p>
<p>&nbsp;</p>
<p>열받지 않으셨어요?</p>
<p>&nbsp;</p>
<p>근데 왜 다들 그냥 집에 가셨어요?</p>
<p>&nbsp;</p>
<p>울고 나니까 맘이 후련해 지신 거에요?</p>
<p>&nbsp;</p>
<p>ㅜㅜ</p>
<p>&nbsp;</p>
<p>&nbsp;</p>
<p>&nbsp;</p>
<p>&nbsp;</p>
<p>노제 끝나고서야 저녁에 도착한 서울광장. 그 많던 이들이 어디로 갔을까...</p>
<p>&nbsp;</p>
<p>정치적인 것은 어디로 갔을까...</p>
]]>
			</description>
			<author>김강</author>
			<category>정치/사회 뒷담화</category>
			
			
			<pubDate>Fri, 29 May 2009 21:39:29 +0900</pubDate>
		</item>
		<item>
			<guid>http://blog.jinbo.net/minjung/?pid=247</guid>
			<title>죽은 공명이 산 중달을...</title>
			<link>http://blog.jinbo.net/minjung/?pid=247</link>
			<description>
<![CDATA[
<!--FCKeditor-->이길 수 있을까?
]]>
			</description>
			<author>김강</author>
			<category>정치/사회 뒷담화</category>
			
			
			<pubDate>Sun, 24 May 2009 19:22:07 +0900</pubDate>
		</item>
		<item>
			<guid>http://blog.jinbo.net/minjung/?pid=246</guid>
			<title>한 시대의 죽음</title>
			<link>http://blog.jinbo.net/minjung/?pid=246</link>
			<description>
<![CDATA[
<!--FCKeditor--><p>우리가 부정할 수 없는 한 가지 사실은</p>
<p>노무현의 죽음과 함께 이 넘의 나라의 어떤 한 시대 역시 종결을 맞았다는 것이다. </p>
<p>그 시대를 좋게 보았든, 나쁘게 보았든 말이다.</p>
<p>&nbsp;</p>
<p>물론 난 후자였다.</p>
<p>"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라는, 그 시대를 끝장내고자, </p>
<p>그의 집권 기간 동안 크고 작은 많은 싸움에 참여했지만,</p>
<p>이렇게 끝나는 것을 보니 가슴아프기가 그지 없다..</p>
<p>&nbsp;</p>
<p>가장 가슴이 아픈 것은 </p>
<p>노무현의 시대를 끝장 낸 것이 우리가 아니라</p>
<p>저 짐승들이라는 것이다. 나는 그게 가장 아프다. </p>
<p>내 손으로는 아무것도 심판하지 못했다.</p>
<p>&nbsp;</p>
<p>그는 최소한 인간이었다. </p>
<p>이제 노무현 이후 시대는 짐승과 촛불의 싸울일 것이다. </p>
<p>우리는 이길 수 있을까.</p>
<p>&nbsp;</p>
<p>아프다.</p>
]]>
			</description>
			<author>김강</author>
			<category>정치/사회 뒷담화</category>
			
			
			<pubDate>Sun, 24 May 2009 15:34:06 +0900</pubDate>
		</item>
		<item>
			<guid>http://blog.jinbo.net/minjung/?pid=245</guid>
			<title>운동권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요...</title>
			<link>http://blog.jinbo.net/minjung/?pid=245</link>
			<description>
<![CDATA[
<!--FCKeditor--><p>이택광님의 포스트 아래에 달린 댓글을 읽다가 나도 몇 줄 달고 왔다...ㅡㅡ;</p>
<p>&nbsp;</p>
<p><a href="http://wallflower.egloos.com/1906320#7280300">http://wallflower.egloos.com/1906320#7280300</a></p>
<p>&nbsp;</p>
<p>&nbsp;</p>
<p>&nbsp;</p>
<p>"운동권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요...<br /><br />음.. 그런 생각이 드네요. 한윤형 님은 말하자면 촛불이 한 측면에서 운동권의 '정체성'을 배제하는 중산층의 정체성 정치 비스무레하게 되었다는 말씀이신 것 같아요. 그런 걸 횡행했던 "일반시민" 담론에서 찾으신 것 같구요. <br /><br />그런 면도 있겠지요. 그런데 촛불집회 상승기를 되돌아보면, 거기에는 일반시민의 중간계급 욕망의 결집만 있는 게 아니라 일반시민이지만 일반시민이 아니게 되는 변용의 순간들이 많이 있었다는 생각도 듭니다. <br /><br /><br />그런데 운동권은... 음...<br /><br />저는 운동권이 이번에 참패했다고 보는데서는 한윤형님 견해에 동의해요. 근데 그것은 운동권이 가진 '지도' 아니면 '일반시민'이라는 상상력의 빈곤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결국 운동권은 처음에는 일반시민들의 지도부가 되려 했고, 그 다음에는 "운동권이 아닌 운동권"이 되지 못하고, "운동권이 아닌 일반시민"이 되어 버렸고...ㅡㅡ;<br /><br />그럼 뭐, 운동에서 어떤 힘을 발휘할 가능성은 없어지는 거죠. <br /><br />그런데 만약, 운동권이 정말로 "지도부"가 아니라 "전위"였다면, 그래서 대중에 기생해서 그들을 "지도"할 게 아니라 막힌 고비고비마다 "일반시민"의 소망을 개의치말고 어떤 교착상태를 뚫어내는 상상력과 힘을&nbsp;발휘했다면(그리고 이건 그들이 다함께 식의 주장처럼 꼭 '하나의' 운동권일 필요도 없지요. 누구든 효과적으로 해내면 전위일테니), 아님 뭐 민주노총이 단 두 주정도만이라도 지대로 총파업 한 번이라도 했다면 -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근데 못했죠. 이건 제가 보기엔 "일반시민들 때문"이 아닌 것 같습니다.ㅡㅡ; 그리고 이런 것도 못하면서 지도부 노릇하려 하면 사실 지지해주기 힘든 것도 사실이겠지요.(만약 했다면? 그 정도로 힘을 보였는데 대중이 지지하지 않았을까요..)<br /><br /><br />이건 단지 가정이 아니라, 소위 "일반 시민" 안에서 보여졌던 잠재성들(하지만 지극히 실재적으로 나타났던)을 근거로 하는 이야기에요. 촛불이 일반시민들의 촛불잔치였다 할지라도, 그 안에서 정작 벌어진 일들은 - 특히 촛불의 상승기에 - 분명 "일반시민이 더 이상 일반시민이 아닌 일반시민이 되는" 여러 모습의 변용의 계기들이었고, "일반시민"이라는 "정체성"보다 그 "변용"의 활동 속에서 운동의 가능성을 찾았다면 저는 더 나았으리라고 생각해요. <br /><br /><br />"아 씨발, 운동권이 맨날 꼰대놀음해서 졌어."<br />"아 씨발, 결국 중간계급의 소비자 운동이라 정치적인 것이 사장되어 버렸어"<br /><br />이 둘 사이에 있는 어떤 것, 어쩌면 후자가 "정치적인 것"이라고 부르는 그것은 완벽하게 도래하지 않았을 뿐, 저는 "희미하게" 도래했다고 생각해요. </p>
<p>&nbsp;</p>
<p>우리가 운동의 가능성을 사유한다면, 사실은 우리가 이루지 못한 것에 대한 반성보다는 도래한 그것에서부터 찾아야 하지&nbsp;않을까요. 뭐, 저는 벤야민 잘 모르지만, "역사철학테제"에서 벤야민이 유물론이 신학을 자기 편으로 해야 한다고 하면서 "희미한 메시야의 도래"를 말하는 맥락은 이런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p>
]]>
			</description>
			<author>김강</author>
			<category>교회 뒷담화</category>
			<category>촛불</category>
			<category>다중</category>
			<category>메시야</category>
			<category>조정환</category>
			<category>중간계급</category>
			<category>이택광</category>
			
			
			<pubDate>Mon, 18 May 2009 22:27:44 +0900</pubDate>
		</item>
		<item>
			<guid>http://blog.jinbo.net/minjung/?pid=244</guid>
			<title>어디서 사유와 실천은 시작하는가?</title>
			<link>http://blog.jinbo.net/minjung/?pid=244</link>
			<description>
<![CDATA[
<!--FCKeditor--><p>우리가 도달하지 못한 지점에 대한 반성에서 사유와 실천이 시작하는가?</p>
<p>&nbsp;</p>
<p>아니면 우리가 아주 작은 것이라 할 지라도 도달한 지점에 대한 긍정에서 사유와 실천이 시작하는가?</p>
<p>&nbsp;</p>
<p>난, 혁명을 말하기 위해서 이 질문을 꼭 던져야 할 것 같다.</p>
<p>&nbsp;</p>
<p>그리고 난 후자를 지지한다.</p>
<p>&nbsp;</p>
<p>&nbsp;</p>
<p>&nbsp;</p>
<p>물론, 도달하지도 않은 걸 도달했다고 하면서 사유와 실천을 전개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ㅋ</p>
]]>
			</description>
			<author>김강</author>
			<category>정치/사회 뒷담화</category>
			
			
			<pubDate>Sun, 17 May 2009 19:43:14 +0900</pubDate>
		</item>
		<item>
			<guid>http://blog.jinbo.net/minjung/?pid=243</guid>
			<title>내 말이 맞네...ㅡㅡ;</title>
			<link>http://blog.jinbo.net/minjung/?pid=243</link>
			<description>
<![CDATA[
<!--FCKeditor--><p>오늘 올라온 조정환의 글을 보니. 예상 적중.</p>
<p>&nbsp;</p>
<p><a href="http://blog.daum.net/nalsee/16521647">http://blog.daum.net/nalsee/16521647</a></p>
<p>&nbsp;</p>
<p>역시 두 사람의 논쟁의 근본에 자리한 건 "사상가, 혹은 지식인의 자리"에 대한 </p>
<p>근본적인 견해차라는 생각.ㅡㅡ;</p>
<p>&nbsp;</p>
<p>어째 '논쟁'은 여기서 끝나버릴&nbsp;듯 하다. 이 지점에서 생산적인 논쟁이 이어질 수 있을까.</p>
<p>조정환 선생님.ㅜㅜ 그 말을 그냥 해 버리시면 어떻게 하시나요..ㅜㅜ(듣고 싶긴 했지만.ㅜㅜ)</p>
]]>
			</description>
			<author>김강</author>
			<category>정치/사회 뒷담화</category>
			
			
			<pubDate>Fri, 15 May 2009 15:39:04 +0900</pubDate>
		</item>
		<item>
			<guid>http://blog.jinbo.net/minjung/?pid=242</guid>
			<title>조정환과 이택광</title>
			<link>http://blog.jinbo.net/minjung/?pid=242</link>
			<description>
<![CDATA[
<!--FCKeditor--><p>아. 재미있다. 논쟁에 참여하고 싶어 손이 근질근질하다... 만 논문마감임박.ㅜㅜ</p>
<p>&nbsp;</p>
<p>&nbsp;</p>
<p>내가 보기엔 둘 사이에는 "사상가의 자리"에 대한 근본적인 견해차가 전제로서 자리잡고 있다.</p>
<p>&nbsp;</p>
<p>중간에 개입...은 아니고 글을 남기신 마리신 님의 언급속에서,</p>
<p>마리신님은 자신의 글의 오독의 이유 중 하나로 현장과 거리가 없는 이들의 오독을 들고 있다. </p>
<p>나는&nbsp;이것이 조정환과 이택광,&nbsp;두 사람의 논쟁 속의 숨겨진 쟁점이라고 생각한다.</p>
<p>&nbsp;</p>
<p>두 사람의 글이 공히 매우 어렵긴 하지만</p>
<p>그리고 서로가 서로의 논지에 사용되는 개념들을 완전히 이해하고 있는 것 같지도 않다만...</p>
<p>&nbsp;</p>
<p>조정환 선생이 말하는 바, "느껴지는 정동"의 차는 확실하다.</p>
<p>이것은 개념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자리'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p>
<p>&nbsp;</p>
<p>그래서 조정환이 이택광의 글의 사실관계를 비판하는 것은 이택광에겐 별로 중요하지 않으며,</p>
<p>또한 이택광 선생이 조정환의 글을 촛불에 대한 감정적 찬사로만 읽는 것 역시 당연하다. </p>
<p>거리를 두지 않는 것은 사상가에게 있어 하나의 죄악이라고 이택광은 생각할 것이다. </p>
<p>어느 것이 맞고 틀리고를 젤 척도는 없다. 그 자리에 따라서 나름의 윤리적 / 정치적 실천이 나오게 되는 셈이다. </p>
<p>&nbsp;</p>
<p>나로선, 통상적으로 조정환의 '자리'에 대한 입장을 지지하는 편이다. </p>
<p>&nbsp;</p>
<p>&nbsp;</p>
<p>&nbsp;</p>
<p>가장 지지하는 입장은 아래 인용문에 나타난 '푸코'의 '지식인의 자리'이다.</p>
<p>&nbsp;</p>
<p>하지만 저는, 자명성과 보편성을 파괴하는 지식인을 꿈꾸는 것입니다. 현재의 무기력과 속박의 한가운데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느슨한 지점, 균열, 여러 힘의 선을 가려내어 이윽고 그것을 지적하는 자. 쉼 없이 자기 위치를 틀어, <strong>현재에 너무나 주의를 기울인 탓에 내일 자기가 어디에서 무엇을 생각할지도 정확히 알 지 못하는 자.</strong> 이동할 때마다 그 곳에서 혁명을 위해 생명을 위험에 처하게 할 각오가 있는 자들만이 응할 수 있다고 이해하면서, 희생을 감수하며 혁명을 일으킬 만큼의 가치가 있나, 어떤 혁명인지(그것은 어떤 혁명인지, 어떤 희생이 나는지를 저는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라는 물음을 던짐으로써 협력하는 자. 저는 그런 지식인을 꿈꾸는 것입니다(1977a pp.268~269). <br /></p>
<p>&nbsp;</p>
<p>&nbsp;</p>
<p>&nbsp;</p>
<p>&nbsp;</p>
<p>아, 이 논쟁을 바라보는 가장 나쁜 태도는 "아 씨발 지들끼리 어려운 이야기 하고 있어."다. 아 씨발, 그럼 읽지말고 가서 투쟁 열심히 하던가. </p>
]]>
			</description>
			<author>김강</author>
			<category>정치/사회 뒷담화</category>
			<category>벤야민</category>
			<category>네그리</category>
			<category>촛불</category>
			<category>폭동</category>
			<category>통치</category>
			<category>푸코</category>
			<category>제헌권력</category>
			<category>봉기</category>
			<category>조정환</category>
			<category>중간계급</category>
			<category>이택광</category>
			<category>환등상</category>
			
			
			<pubDate>Thu, 14 May 2009 20:39:54 +0900</pubDate>
		</item>
		<item>
			<guid>http://blog.jinbo.net/minjung/?pid=241</guid>
			<title>오늘 하루.</title>
			<link>http://blog.jinbo.net/minjung/?pid=241</link>
			<description>
<![CDATA[
<!--FCKeditor--><p>일어나기도 힘들고.</p>
<p>&nbsp;</p>
<p>배도 살살 아프고.</p>
<p>&nbsp;</p>
<p>괜시리 화가 나고.</p>
<p>&nbsp;</p>
<p>논문도 안 써지고.</p>
<p>&nbsp;</p>
<p>에잇.</p>
<p>&nbsp;</p>
<p>&nbsp;</p>
<p>&nbsp;</p>
<p>&nbsp;</p>
<p>논문 마감일 5월 29일. 쳇. 일단 대충이라도 써서 내야할텐데. 나 의외로 완벽주의?ㅜㅜ</p>
<p>&nbsp;</p>
<p>&nbsp;</p>
<p>그나마 좋은 소식이라면, 일반교통방해죄 헌재로 넘어간 거.</p>
<p>&nbsp;</p>
<p>성준 형 고마워요.ㅜㅜ</p>
]]>
			</description>
			<author>김강</author>
			<category>앞담화?</category>
			
			
			<pubDate>Wed, 06 May 2009 22:09:41 +0900</pubDate>
		</item>

	</channel>
</rss>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