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링크의 발견들

 

간혹 웹서핑을 하다가 재미있는(야매고시생인 내가 쓸 때 이 표현의 문제성은 더욱 적실히 드러난다!) 곳들을 발견할 때 마다 귀중한 곳간과 하릴없는 놀이터로 혼재된 이 블로그의 링크에 걸어놓기가 귀찮고 민망해 그냥 흘려보내기가 일쑤였는데 고시생이 웹서핑에 쏟을 수 있는 시간과 노력에 한계가 있는 만큼 링크를 하루빨리 재정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당장 다음주 월요일부터 기말고사 기간이니까 끝나고 금요일 어음수표법 시험 끝나면 하자. 그 전까지는 기억나는대로 한줄 업데이트. 블로그 관리가 제대로 안되서 마치 허섭스레기장 같다. 글 두어 개가 전부이지만 비공개 글창고는 카테고리화 안되는 신변잡기, 어린아이 같은 칭얼댐이 태반이라 정리가 불가능ㄷㄷ

 

어쨋든 링크 정리들 조만간 하자

 

한윤형

조정환

이택광

최원

강유원

marishin

http://blog.naver.com/non_organ/700487384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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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글] 노무현이라는 이름이 '우리'에게 의미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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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슴츠레님의 글을 퍼왔다. 지금까지 접했던 노무현의 죽음과 관련된 글 중 가장 종합적이다. 여러 사람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글이다.

 

 


 



게슴츠레. (담론공간 “지갱프", http://cafe.naver.com/think2wice)


죽은 자는 말을 할 수 없다. 죽은 자는 자신이 행했던 말과 행동들에 대해 쏟아지는 이야기들에 일일이 답할 수 없으며, 당연히 자신의 장례식에 찾아온 이들의 반응에 대해 고개를 끄덕일 수도 화를 낼 수도 없다. 때문에 죽은 자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죽은 자의 몫이 아닌 산 자의 몫이다. 산 자가 죽은 자의 행적과 그의 죽음 자체를 마주하며 던지는 이 말들을 가리켜 우리는 “애도”라 부른다.

그런데 왜 우리는 애도를 하는가? 생물학적으로 사망에 이르면 청세포가 기능을 상실한다는 현대 의학의 성과를 인용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죽은 자가 애도를 듣지는 못한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우리는 죽은 자를 향해 머리를 쥐어짜며 말을 던지는 수고를 감수하는가? “남들의 시선이 있어서…”라는 의례적인 이유도 이 소외된 노동을 행하는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허나 이런 실용주의적인 시각은 왜 우리가 그 혹은 그녀의 죽음에 세상의 시선이 닿지 않는 내면 속에서 격렬한 감정의 동요를 경험하며 때로는 밥을 굶거나 멍하니 손에서 일을 놓고 홀로 소주잔을 기울이는 등의 ‘비합리적인’ 행위를 하는지에 대해서 ‘이성적이지 못하다’라는 비난조의 말 이외에는 어떤 설명도 제공해 주지 못한다.

이쯤에서 잠시 질문을 바꿔서 다시 던져 보자. 죽은 이를 기리는 말, 애도의 말을 듣는 사람은 과연 누구인가? 이미 우리는 애도의 말을 죽은 이가 들을 수 없음을 안다. 상주와 고인의 주변인에의 위로라는 목적을 가질 수도 있지만 앞서 우리는 이런 실용주의적 설명의 불충분성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 바 있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애도의 편지의 궁극적인 수신자는 죽은 자가 아니라 바로 애도의 말을 던지고 있는 산 자 자신이라는 것이다. 산 자는 죽은 자와 대화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죽은 자에 대한 산 자 자신의 의식과 감정의 흔적들로 구성된 ‘산 자의 죽은 자’와 대화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죽은 자의 이미지를 통한 자기반성적 대화를 통해 결국 변하는 것은 죽은 자의 명예보다는 산 자의 삶을 대하는 태도이다. 산 자는 애도의 과정을 통해 죽음이라는 하나의 충격으로 자신의 삶의 한 계기로 흡수한다. 한편에는 유쾌했던 기억은 그리움의 대상으로, 불쾌했던 기억은 용서 혹은 이해의 대상으로 전환되어 죽은 자를 과거형으로 봉인하여 죽음 이전의 본래의 삶을 지속하는 ‘이별’의 방법이 있는가 하는 반면, 다른 한편으로는 고인의 실제적 죽음을 인정하는 동시에 상징적인 죽음을 부정하며 그의 삶을 이어나가겠다고 나서는 ‘계승’의 방법이 있다.

현재 노무현의 죽음에 대한 뜨거운 반응들이 일시적인 감정의 분출을 통해 이별을 고하기 위한 방법인지 아니면 그가 미처 이루지 못한 꿈(그렇지만 어떤 ‘꿈’인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에 따라 우리는 상이한 정치적 결과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을 이루어 나가겠다고 하는 계승의 태도인지 판단하기에는 우리는 충분한 시간적 거리를 확보하지 못했다. 다만 내 생각에 확실한 것들은 첫째 현재의 (진보 진영의 ‘비-애도’까지를 포함한) 애도정세가 우리 사회가 지금 처해 있는 (아마도 ‘위기’라 부를 수 있을) 치명적인 정치적·사회적 단면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는 것이며, 둘째 이에 대해 명확히 ‘인식’하지 않는 이상 ‘우리’는 현재의 재앙과 과거의 실수, 즉 이명박이냐 유시민이냐 식의 폭력적인 양자택일의 구도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그 어떤 좌파적 관점에서의 정치적 실천도 감행할 수 없을 것이라는 점이다.

여기서 나는 먼저 미디어와 웹을 통해 주로 표출되고 있는 노무현 애도 담론의 탈정치적 경향을 지적한 뒤, 이에 대처하는 좌파들의 절충적 애도 혹은 비애도 담론들의 맹점과 한계에 대해 이야기해 보겠다. 그리고 이에 기초해 과연 노무현의 죽음과 그에 대한 애도가 과연 어떤 정치적 결과를 산출해 나갈지 전망해 보고, 나아가 노무현에 대한 ‘좌파적 애도’라는 것이 가능할지에 물어보고자 한다. 또한 지금 바로 이 공간, 2009년의 대학에서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을지’에 다루고자 하는데, 왜냐하면 이런 가능성에 대한 인식이 뒷받침되지 않는 ‘무엇을 할 것인가’는 자기만족적인 좌익소아병으로 끝날 우려가 크기 때문이다.

논자의 역량을 고려해 볼 때,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이 작업을 수행해 보려는 데에는 좌파적 정치의 실현가능성을 모색한다는 전략적인 이유도 있으나 나름대로 고인을 애도해보고자 하는 개인적인 이유도 자리잡고 있다.

 

 

1. “바보 노무현”과 탈정치화의 현주소 - 애도의 단면들

{이 절과 다음 절의 1) 부분의 논지를 전개하는 데 있어서는 진보넷 블로거 캐즘 님의 포스트의 도움이 압도적으로 컸다. 이 글은 아마 해당 포스트들의 요약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관심이 있으신 분들은 “포스트 히스토리와 정치(http://blog.jinbo.net/chasm/?pid=107http://blog.jinbo.net/chasm/?pid=108)” 을 참고하기 바란다.}

 

주로 미디어-웹에 의해 폭발적으로 생산되고 있는 애도 담론들 간에는 보편적이라고까지는 할 수 없어도 일반적이라고 할 만한 경향성이 존재하는데 그것은 노무현에 대한 추도가 지극히 ‘개인사’, ‘인간사’에 초점이 맞춰져 일대기 혹은 전기를 그리는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인간으로서의 노무현’이라는 내러티브를 뒷받침하는 가치는 크게 두 가지로 축약해 볼 수 있을 텐데 ‘진정성’과 ‘인간성’이 그것이다. 3회 연속 부산 시장에 낙선하면서 얻었고 지금에는 대표적인 애도의 레토릭으로써 활용되고 있는 “바보 노무현”이라는 말에는 이런 성향이 잘 드러나 있다. 여기서 우리는 ‘정치인 혹은 집권자 노무현’과 ‘인간 노무현’의 이분법을 확인할 수 있다. 바보 노무현은 여기서 후자 인간 노무현 쪽에 위치한다. 젊은 시절에는 뜨거운 “열정”과 단단한 “고집”을 가지고 있었으며, 늙어서는 동시에 주민들과 막걸리를 나눠 마실 정도로 “소탈”했으며 관광객들의 방문에도 눈살을 찌뿌리지 않았던 참 “사람좋”은 인간 노무현이라는 캐릭터가 생산되고 서민에의 “헌신”과 정치 현실을 고려하지 않은 “솔직함”들이 양념으로 첨가되어 “바보 노무현”이라는 이상적인 인격(어디선가는 ‘진정한 나랏님’으로까지 불리우는)이 탄생된다.

노무현을 개인적으로 알 기회가 없었던 나로서는 이런 노무현의 인격적 평가가 거짓이라고 구태여 주장하고 싶은 생각이 없다. 내가 주목하고 싶은 것은 그저 자원봉사자도 아니었고 한 나라의 ‘대통령’까지 했던 사람에 대한 애도가 어째서 ‘정치인’으로서가 아니라 ‘인간’으로서 다루어지고 있느냐는 것이다. 노무현 집권 시절 정치가 순탄했던 것도 아니었다. 한미FTA에의 기반을 닦아 신자유주의의 문을 활짝 열어놓은 것도, 대추리의 농지를 쓸어내고 미군기지를 이전한 것도, 정책실패로 부동산 가격을 폭등시켜놓은 것도, 2003년 분신자살을 한 비정규적 노동자에게 ‘민주화된 시대에 노동자들의 분신이 목적 달성을 위한 투쟁 수단으로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라고 말한 것도 모두 노무현 정권 때 일어났던 일이다. 이런 정치적·사회적 사건들이 한 발 물러서서 ‘잘못이다’라고 딱 잘라 말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적어도 스리슬쩍 넘어갈 수는 없는 ‘논쟁적’인 사안들임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이는 노무현 정권이 현 정권에 비해 얼마나 긍정적인 정책을 많이 폈는지를 강조하더라도 쉽게 면죄부를 받을 수는 없는 일들이다. 더구나 사실 정치적으로는 대립하는 듯 보이지만 정책적인 면에서는 연속성을 보이고 있는 게 이명박 정권과 노무현 정권의 오묘한 관계가 아니던가. 또한 노무현의 정치적 실패는 이명박의 당선을 끌어낸 정세적인 원인이기도 하였다.

헌데 인간 노무현, 바보 노무현에의 애도 속에서 이와 같은 정치인 노무현에 대한 평가는 회피되거나 유보된다. 물론 매체에서 정치인 노무현이 상연되지 않고 있는 것은 아니다. 말년의 고향에서의 친환경농업 장려와 같은 ‘얌전한’ 부분 이외에도 민주화 운동 변호사부터 청문회 때에서의 전설적인 모습, 그리고 선거유세 중 정치연설들까지 ‘격렬한’ 정치인의 노무현의 모습이 공중파 매체를 통해 반복적으로 상연되며, 블로그·싸이월드·웹커뮤니티(심지어는 소녀시대 팬클럽에까지)들에 동영상이나 텍스트의 형태로 유통되고 있다. 허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와 같은 스펙타클의 유통이 복잡하지만 주의를 요하는 정치적 맥락과 정책적 효과 등을 고려하지 않은 채 하나의 이미지, 스펙터클로서 상연되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정치인 노무현은 그 구체적인 당파성은 고려되지 않은 채, ‘진정한 정치인’ ‘민주화의 기수’ 등의 추상적인 ‘텅 빈 기표’로 전환되어 궁극적으로는 ‘더러운 정치판에서 인간다움을 지킨 바보 노무현’으로 수렴된다. 이는 사적 개인에 대한 도덕적이고 인격적인 평가일 수는 있으나 공적 정치인, 그것도 국가의 대표에 대한 정치적이고 역사적인 평가는 될 수 없다.

재밌는 것은 이런 애도 분위기에 반발하는 정치인 노무현의 지도자가 딱히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인간 노무현의 신화화는 정치인 노무현을 ‘죽임’으로써 그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뿐만 아니라 긍정적인 평가까지도 가로막아 버린다. 정치인으로서 노무현이 추가했던 가치들의 무참히 추상화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경향에 대해 항의하는 ‘노무현 지지자’가 그리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사실 노무현 지지자들이 옹호했던 것은 정치인 노무현이 아니라 진정성의 아이콘으로서의 인간 노무현이었다는 사실을 역설적으로 드러내준다. 정치인 노무현은 죽은 뒤에나 이전에나 참 외로운 사람이지 않았을까.

허나 우리는 이 사태를 노무현 개인의 불행으로 읽어내기 보다는 대략 길게는 90년대 짧게는 2000년대 이후 한국 정치-공간을 지배했던 주요한 특성의 징후로서 파악할 줄 알아야 한다. ‘공적 정치’가 ‘사적 도덕’으로, 정치적인 정의의 차원이 착하네 나쁘네 수준의 도덕성 논란으로 환원/축소되는 탈정치화, 정치적 도덕주의 패러다임이 바로 그것이다. 국가·사회·경제와 함께 중간 레벨에 위치한 정치는 개개인의 감성적인 차원으로 축소(노무현의 죽음을 정치적 비전의 좌절의 차원에서가 아니라 ‘아버지’의 죽음으로 받아들이는 지지자)되거나 노무현을 암살한 배후 세력이 있었다는 식의 음모론의 레벨로 확장(사회적 타살이라는 말은 여기서 그 구조적인 의미는 거세된 채 신비주의적인 방식으로 전유된다)된다. 이는 오늘날 우리의 정치적 상상력이 처해 있는 처참한 빈곤을 보여준다. 그 어떤 정치적 ‘내용’도 상상하지 못하는 빈곤한 주체들은 “인간성과 진정성의 신화”로서의 노무현에 고착되어 있다.

하지만 이런 주체들의 비합리성을 주장하는 것이 이 글의 목표는 아니다. 멍청해 보이든 어리석어 보이든 어쨌든 간에 이는 한국 사회가 처해있는 주요한 정치적 국면 중 하나이며, 바로 이것이 세계가 존재하고 있는 방식이다. 만약 현실이 비합리적으로 구성되어 있다면, 이렇게 구성된 현실을 ‘비합리적’이라고 비판하는 사람이야말로 비합리적이다. 주관적으로 현실의 존재 양태를 아무리 부정해 봤자 객관적 현실은 바뀌지 않으며, 틀린 것은 결국 현실이 아닌 바로 ‘나’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이 현실을 무턱대고 긍정하라는 것은 절대 아니다. 내 초점은 현 상황의 명백한 물질성과 이를 가능케 한 황폐한 정치적 토양을 인식하지 못한 상태에서 행해지는 비판은 벽에 대고 소리를 지르는 식의 분풀이 혹은 꼰대 식의 개탄을 그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어서 이런 현실에 제대로 대응하고 있지 못하는 비판적 대응들의 맹점과 한계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겠다[주로 3-2)참고].

 

 

2. 좌파가 노무현을 애도한다는 것이 가능한가? - 절충적 애도 혹은 비-애도의 단면들

 

노무현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해 오던, 어쩌면 노무현에 반대한다는 점에서 ‘진보’라는 이름을 공유하던 다양한 정치세력과 개인들은 혼란에 빠졌고 아직도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한 듯싶으나 차차 각자의 입장들을 어느 정도는 전개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 다양한 입장들은 크게 두 명의 노무현을 나눠 한 노무현을 긍정하고 한 노무현을 부정하는 ‘절충적 애도’와, 두 노무현의 분리불가능성을 주장하며 애도를 거부하거나 노무현의 죽음의 특수성을 부정하고 여타 개인의 죽음과 동일한 차원에서 애도를 하려는 ‘비-애도’의 입장으로 나뉜다.

 

1)절충적 애도: 두 노무현 론

먼저 절충적 애도의 첫 번째 형태는 진중권 씨가 진보신당 게시판에 올린 글(“내가 만나 본 정치인 중 가장 매력적인 정치인”)처럼 인간 노무현과 정치인 노무현을 분리해서 전자를 애도하는 것이다. 진중권 씨가 노무현을 ‘개인적’ 즉 ‘인간적’으로 알고 있었던 이로서 이런 식의 애도를 표명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며 앞서 강조했다시피 나는 이런 애도의 도덕적 정당성을 평가하는 데는 관심이 없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이런 애도 자체는 ‘지인’의 입장에서 발언될 수는 있으나 ‘진보지식인’의 입장으로서는 부적절하다는 것이다. 탈정치화라는 배경 하에서 “잘 먹고 잘 살게 해주겠다”는 ‘이미지’로 당선된 경제대통령이 행하고 있는 재앙적 결과들을 매일같이 접할 수 있는 사회에서, 애도의 탈정치적 성향에 대해 우려는커녕 그 구도를 공유하는 애도를 책임감있는 지식인의 태도로 볼 수는 없다(그렇다고 진중권 씨가 탈정치적이라는 이야기까지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그에 관해서는 진중권 씨의 공식적인 추도사가 따로 나오길 기다려본다).

또 다른 절충적 애도의 방식으로는 보다 구체적인 역사적 맥락에서 민주화 운동 시절의 ‘원형’ 노무현을 발굴해 집권 시절의 신자유주의자 노무현을 분리하고 후자를 비판하고 전자를 애도하는 것이다. 즉 순수했던 노무현과 그의 ‘타락’에 방점을 두어 안타까움을 동반한 애정어린 애도를 수행하는 것이다. 이 입장은 구체적인 역사적인 맥락에 기반을 두어 정치인 노무현을 추상화하는 함정에 빠지지 않으면서 정치적 성향을 기준으로 애도를 한다는 점에서 앞서의 도식보다는 ‘신중’하고 좌파로서의 정체성에도 위배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는 장점을 가진다. 허나 이 입장이 간과하고 있는 것은 바로 집권자이자 신자유주의자 시절의 노무현 정권이 우파적 정책을 수행해 나가는 데 있어 바로 그 원형 노무현의 이미지를 충분히 활용했다는 것이다. 과거의 기억으로부터 비롯된 노무현의 ‘진정성’에 대한 신뢰는 비판의 칼날을 무디게 만들었고 노무현 본인이 의도하든 하지 않았든 원형 노무현의 이미지 자체가 집권자 노무현의 정치적 힘을 강화시켜줬던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또다른 형태의 절충적 애도의 논변이 나올지 모르겠지만 두 노무현은 어떤 식으로든 탈정치화에의 공모 혐의를 벗어나기는 힘들 것으로 보인다. 좌파들이 이렇게 힘을 들여가면서 노무현을 애도하려고 하는 데에는 다양한 이유가 있을 것이나 대강 두 가지 유형 정도가 이야기해볼 수 있을 것 같다. 첫째로는 노무현에 대한 개인적인 호감이나 정치적인 기대를 죄다 버리지 않은 경우이다. 둘째로는 일반 시민들의 노무현에 대한 호감과 지지를 현 정권에의 저항운동과 같은 실용적인 이유에서 이용할 수 있지 않겠냐는 전략적인 주장의 경우이다. 즉 노무현을 ‘비판적 계승’의 방식으로 애도함을 통해 정치적 실천으로 나아가자는 것이다. 이 “그를 (전적으로) 지지하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식의 모호한 입장은 아무리 그 기대의 마음을 소중히 생각한다 해도 ‘좌파’가 취할 태도가 아니라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노무현’이 오늘날 한국 사회의 정치적․역사적 지형에서 좌파정치의 희망이 될 수 없는 이유에 대해서는 3절에서 보다 상세히 다루기로 한다.

 

2)비-애도: 한 노무현 론

“그를 위한 통성기도를 강요하지 말라(http://blog.jinbo.net/rollingstone/?pid=109)”, “★좌빨은 왜 노무현을 추모하지 않나요?(http://blog.jinbo.net/picotera/?pid=300)”. 각기 진보넷 블로거 ‘구르는돌’님과 ‘laron’님이 노무현의 죽음과 애도에 대한 그의 경제적․정치적 행보에 비판적인 의식을 가진 좌파로서의 생각을 솔직하게 쓰신 글이다. 눈에 확 들어오는 제목에서 이미 알다시피 이 입장들은 노무현에 대한 애도를 거부하거나, 혹은 노무현의 죽음을 애도는 하나 그 죽음이 딱히 다른 개인들의 죽음보다 특별할 이유는 없다고 본다. 인간 노무현은 정치인 노무현과 분리되어 평가될 수 없으며, 오히려 정치인 노무현의 행적은 오히려 비판을 받았으면 받았지 어떤 방식으로든 정당화될 수 없다는 것이 이 분들의 공통적인 입장이다. 정세를 핑계로 자신의 기본적인 정치적 입장에 대해 타협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런 글들은 좌파로서의 필요조건을 충족시키는 동시에, 두 노무현 론에서 옹호되는 ‘인간 노무현’이 특정한 정치적 효과를 산출하고 있기에 ‘인격적’인 평가가 ‘정치적’인 평가와 깔끔하게 분리될 수는 없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는 점에서 절충적 애도론보다 뚜렷한 논리적 일관성을 가진다.

허나 이런 입장이 (특히 laron님의 경우, 예감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놓치는 것은 노무현의 죽음이 가지는 현실적 물질성, 즉 산 노무현과 죽은 노무현은 다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나는 여기서 두 노무현 론의 또 다른 판본을 제시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노무현이 죽고 나서 비록 일시적일지 지속적일지 알 수는 없다만 한국의 정치-공간에서 어떤 중대한 변화가 일어났다는 명백한 ‘사실’이다. 여기서 좌파는 “노무현의 힘”을 “있는 그대로의 ‘현실’로 받아들여야 할 것”{데일리안, <전여옥 “노무현의 힘, 현실로 받아들여야”>, 09년 5월 31일자, http://www.dailian.co.kr/news/n_view.html?id=159030}이라는 전여옥의 교활하면서도 예리한 통찰을 주의깊게 듣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앞서 1절의 말미에서 말했다시피 사태의 원인을 파악하지 못한 비판은 현실에 대해 냉소하거나 불평할 수는 있으나 현실을 바꿔놓을 수는 없다. 노무현의 죽음에 대한 애도 열풍은 단순한 허위의식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상징적인 힘을 가진 강력한 정치적 현실이다. 이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좌파는 스스로와 사람들 간의 거리를 다시 확인하게 되며 자기만족적인 담론을 생산하는 것을 넘어설 수 없을 것이다.

노무현을 신화화시키고 있다며 사람들의 비합리성을 비판하는 것은 심리적으로는 만족을 가져다 줄 수는 있으나 정치적으로는 그 어떤 의미도 지니지 못한다. ‘정치’는 이론적으로는 합리성을 지향해야 하지만 실천적으로 이성적으로는 이해할 수가 없는 비합리적인 방식으로 ‘발생’한다. 이번 사태와 등치시킬 수는 없지만 2008년 촛불시위의 사례만 봐도 이를 명확히 알 수 있다. '이성적'임을 자처하는 보수 세력이 언급하다시피 광우병으로 사망할 통계적 확률은 그리 높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몇몇 진보 논자들의 주장처럼 거리에 나온 촛불들이 쇠고기개방이 한국 사회와 경제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완벽하게 인지하고 있었던 것도 사실은 아니었다. 그러나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거리로들 뛰쳐나왔다는 사건의 '비합리적'인 성격이 촛불시위의 정치적이고 역사적인 의의를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아직 그 의의의 평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남아있지만, 우리는 이 때 일어났던 일들이 단순히 ‘감상적’이거나 ‘충동적’인 ‘난동’으로 환원될 수 없다는 것을 안다, 아니 그렇게 환원시킬 권리가 우리에게 없다는 것을 안다. 여기서 우리는 정치의 근본적인 속성 중 하나가 '비합리성‘임을 경험적으로 알 수 있다. 역사에서 일어났던 모든 대중들의 봉기는 그것이 반동적인 것이든 심지어 혁명적인 것이든 간에 진보적 학습을 거친 수 만명의 사람들에 의해 기획된 '합리적'인 과정은 절대 아니었다. 항상 거리에 불을 지르는 것은 항상 ‘비합리적’인 대중들이었다. 관조적 위치의 이론가들이 그에 대해 아무리 맹목적이라고 비이성적이라고 비판한다한들 정치는 그렇게 일어나고, 또 역사는 그렇게 움직인다.

전여옥이 지적하듯이 노무현의 죽음과 그것이 일으킨 정치적 파장에는 지지자들이 숭배하는 '진정한 인간성'(노짱님)으로도, 모름지기 건강한 좌익이라면 당연히 물을 '정치적 책임/죄'(미적지근한 신자유주의자)로 환원되지 않는 어떤 곤혹스러운 ‘잉여’가 남아 있다. 그리고 그 잉여 때문에 우리는 그와 개운하게 이별의 인사를 고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는 ‘애도의 마무리’를 짓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3. 노무현이라는 ‘꿈’에 관하여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무현이 미래가 될 수 없는 이유

 

절충적 애도의 입장은 현재를 인정하는 동시에 과거를 부인하나, 비-애도의 입장은 과거를 인정하는 동시에 현재를 부인한다. 허나 과거와 현재가 분리될 수 없다는 점에서 양자의 입장 모두 완성된 애도라고 보기에는 불충분한 점들을 가지고 있다. 전자가 대중에 묻어가려는 기회주의적 성격을 보인다면 후자는 대중을 믿지 않거나 혹은 포기하는 허무주의적인 성격을 보인다. 나는 양자를 섣불리 기각하기 보다는 각자 입장이 기반하고 있는 논거를 보다 진지하게 고민하는 데에서 앞서의 질문 “좌파가 노무현을 애도한다는 것이 가능한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진퇴양난의 위치에서 세 번째 방법이 등장한다. 노무현을 도덕적 이상으로도 정치적 죄인으로도 환원하지 않고 앞서 말한 곤혹스러운 ‘잉여’, 80년대 한국 정치사와 그 굴곡을 같이 한 삶의 여정과 드라마틱한 죽음에서 비롯되는 ‘꿈-노무현’의 이름으로 그를 기리는 것이다. 이는 인간-노무현-신화와는 엄밀히 다른데, 이 꿈 자체는 노무현 자신이 의도적이었는지는 알 도리가 없으나 충실하게 지켜나가는 데 실패했던 꿈이기 때문이다. 그 “꿈”은 결코 관념적인 것이 아닌 그가 2002년 대통령 후보 수락 연설의 말미에서 이미 말한 바가 있다. 조선 건국 이래 600년 동안 유지되어 왔던 뿌리깊은 권력과 싸워 이기겠다는 꿈, 정의와 진리가 더 이상 좌절되지 않도록 하겠다는 꿈, 그리하여 후손들에게 ‘너는 뒤로 빠져라’라는 비겁한 교훈을 반복하지 않고 그들로 하여금 떳떳하게 정의를 이야기하고 떳떳하게 불의에 맞서 ‘새로운 역사’를 만들 수 있게끔 바로 “지금 차례”에 권력을 쟁취하겠다는 꿈이 그것이다. 그리고 이 꿈은 노무현의 당선, 그리고 탄핵안 부결 때 일순간 마치 기적처럼 이 지상에 실현되어 사람들로 하여금 90년대 이후 시들해졌던 더 나은 세상, 유토피아에의 희망을 품게끔 해주었다. 이를 386세대의 마지막 정치적 산화로 보는 의견 역시 존재하지만 이런 주장은 사후적인 관점에서만 가능한 주장이다. 당시에는 세대를 초월한 보편주의적 정치적 이상의 문이 열린 것은 분명한 사실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또 하나의 두 노무현 론을 반복하는 것을 회피하기 위해서는, 과연 이 ‘꿈-노무현’이 ‘인간-노무현’과 ‘정치인-노무현’과 무관하게 이야기될 수 있는지, 혹은 함께 이야기될 수밖에 없음에도 불구하고서도 아직도 (혹은 그러기에) 좌파가 미래에 추구해야 할 정치적 이상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 설득력있는 논변을 제시할 필요가 분명히 있다. 그리고 아마도 이 작업은 순수한 이론적․논리적 맥락에서는 고려될 수는 없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앞서 말했듯이 죽기 이전의 노무현과 죽고 나서의 노무현을 동일선 상에서 비교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2002년의 노무현과 2009년의 노무현을 동일선 상에서 비교하는 것 역시 무리한 시도이기 때문이다. 꿈-노무현은 이미 한 번의 시험을 거쳤고 적어도 좌파들에게 있어서는 좌절스러운 결과를 가지고 왔다. 문은 열린지 그리 머지않아 다시 닫혔고, 역설적이게도 그 문이 닫히는 데 적지 않은 책임을 지고 있는 사람은 바로 노무현 자신이었다. 이런 역사적 맥락에서의 ‘실패’를 고려하지 않은 꿈-노무현은 낭만주의적 환타지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허나 이 말은 동시에 역사적 ‘실패’를 철저하게 고려할 경우 이 실현되지 못한 꿈은 다시 하나의 이상으로 승화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의미한다{이에 대해서는 노무현에 대한 “다른 애도”를 요구하고 있는 최원 씨의 글 “책 읽어주는 남자와 노무현(http://blog.aladdin.co.kr/droitdecite/2871999)”과 죽은 노무현과 이명박 정권과의 관계를 카이사르와 브루투스에 비유하고 옥타비아누스의 등장의 가능성을 묻고 있는 우공 님의 “노무현을 추모하며 - 역사적 맥락에서의 징후(http://blog.naver.com/zelord/140068920004)”를 참고하라.}.

그렇다면 과연 2002년의 노무현은 오늘날에도 어떤 ‘정치’, 보다 정확히 말하면 ‘좌파적 정치’의 이름이 될 수 있을 것인가? 여기서 앞서 현 사태의 (비록 ‘자의식’의 레벨에서는 ‘도덕’적임에도 불구하고 ‘효과’의 레벨에서는 명백히 가진) ‘정치’적 성격을 강조하기 위해 사례로 들었던 촛불시위와의 비교를 좀더 꼼꼼하게 밀고 나가보자. 비록 정치에는 항상 의식적 과정으로 포착되지 않는 끈적끈적한 것(비합리성)이 묻어있다는 점을 설명하기 위해 촛불시위의 사례를 끌어 들였으나, 촛불시위와 현 애도열풍은 ‘비합리적’이고 ‘정치’적이라는 성격을 공유함에도 불구하고 그 ‘재현(representation)’ 방식에 있어 명백히 차이를 가지고 있기에 양자를 등치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전자가 비교적 순수하게 현 정권에 대한 저항과 국민주권 혹은 인민주권에의 요구로서 재현(“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되었다면, 후자는 한 시대를 집권했던 논쟁적인 정치인에 대한 휴머니즘적 물신화가 주이고 현 정권에 대한 비판 역시 그런 향수에 기초해서 이루어지고 있다. 두 사례 모두 대중이라는 추상적 집단이 비교적으로 일의적인 목소리를 직접 내고 있다는 점에서 급진적인 ‘정치’ 행위임에는 틀림없으나, 후자의 경우 현재 한국 사회의 모순들의 원인이기도 하였던 과거의 정치적 과오를 무화 혹은 청산하는 방식으로 재현되고 있다는 점에서 현 정권과 대립하고 있음에도 반동의 위험을 가진다.

좌파들이 똑같은 대중적 행동임에도 불구하고 촛불시위에는 관대하고, 현 애도정세에는 불만을 가진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즉, 현 사태는 그것이 가지고 있는 명백한 정치적 물질성에도 불구하고 매우 모호한 당파성{이 또한 탈정치화의 징후 중 하나일 것이다. “노무현”, “민주주의” 등등 현 정치적 상황에서의 공통분모라고 사용되고 있는 기표들은 그야말로 텅텅 비어 있다. 또 오히려 그런 탈정치적 성향을 가지고 있기에 공통분모로 작용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이는 촛불시위 때 이미 예견되었던 것이기도 한데 촛불시위 당시 “좌빨은 시민들을 선동하지 말라”를 생각해 보라). 어쩌면 우리는 ‘탈정치적 정치’라는 기묘한 현상을 지금 목도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여기서 혁신적인 정치적 개혁이 이끌어질 가능성은 매우 낮아 보인다. 나는 두 가지 정도의 시나리오를 한 번 예상해 보겠다. 1)하나는 그야말로 냄비처럼 현 애도열풍이 다시 사그라지고 정치적 도덕주의의 종말, 노무현 시대의 종료를 맞이하는 것이다. 허나 노무현만큼의 정치적 카리스마를 가진 인물이 딱히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지금의 나로서는 이런 경로를 쉽게 상상하기 힘들다. 그리고 만약 이 정치적 도덕주의가 퇴화한다고 하더라도 이것이 다시 '정치의 계절'을 불러일으킬 수 있을지에 대해서도 의문이다. 어쩌면 우리는 유럽의 신인종주의의 경우처럼 강렬한 민족주의적 반동이나 극단적인 현실주의 등의 또다른 탈정치화의 양태를 맞이하게 될런지도 모른다. 2)다른 하나는 노무현의 상징적 위력이 강하든 약하든 지속되어 ‘옳은 정치인’을 평가하는 바로미터로 모든 정치가 경유해야 할 하나의 필수통과지점이 되는 것이다.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적어도 노무현 시절의 실수를 다시 반복하지 않고 싶어한다는 의미에서의) 좌파들에게는 더 안 좋은 상황인데 적어도 정당민주주의적 관점에서 의석수를 당장 얻는 데 따르는 곤란은 제외하더라도 노무현과 변별되는 정치적 메시지나 정책을 제안하기가 힘들어 지기 때문이다. 지금은 이명박이라는 누구에게나 당혹스러운 아이콘이 자꾸만 불을 지피면서 좌파에게 기회를 주고 있는 것 같지만 이는 역설적으로 대항세력들 간의 변별적 차이를 무화시켜 결국에는 ‘진보’와 ‘좌파’라는 이름의 내용을 비워내고 정치적 에너지를 분산시키기에 이른다(오늘날 ‘진보’라는 타이틀만큼 추상적인 타이틀이 또 어디 있는가?) 노무현의 죽음으로 인해 이 에너지가 노무현으로 모여 뭔가를 이뤄낼 수도 있겠다는 게 많은 이들의 전망이지만 이전의 실수에 대한 반성도 이뤄지지 않았고 그 공백을 대체할 아무런 ‘준비’도 갖춰지지 않은 상황에서 대체 무엇을 ‘이룰’ 수 있을지 나는 잘 모르겠다.

 

 

4. 노무현이라는 이름이 ‘우리’에게 의미하는 것

 

비록 향후 전망을 예시해 봤다만 나는 정세 예측에 능한 사람도 아니고 자신도 없으며 사실 은밀하게는 내 어줍잖은 예상이 빗나가 뭔가가 움직이지 않을까하는 기대도 가지고 있다. 내가 자신있게 할 수 있는(보다도 ‘하고 싶은’) 말은 프랑스 마르크스주의 정치철학자 에티엔 발리바르의 말을 빌리자면 “우선 인식하라”라는 것이다. 죄를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옛말이 있다. 구조가 의식에 선행하다는 마르크스의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이라면 그 옛말을 ‘구조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고 바꿔볼 수 있을 것이다. 지금 가시적인 정치적인 결과를 얻기는 힘들다 하더라도 ‘좌파’라는 이름을 또 하나의 트렌디한 심미적 취향이 아니라 자신의 정치적 정체성으로 받아들이는 이라면 현상에 대한 불평과 냉소를 넘어서야만 한다. 대중의 '비합리성'을 비난하며 ‘생떼’를 부리는 것도 아니고, 이런 대중의 혁명적 성격을 물신화하고 이에 묻어가며 정치와 새 사회에의 고민을 방기하는 것이 아니라, 일단 어떻게 이런 '비합리적인' 사태가 일어났는지 '합리적'으로 분석해 내고 거기에서 구조와 권력에 포착되지 않은 작은 빈틈을 찾아내 그를 통해 정치를 실현해야 한다.

이쯤에서 이 글에서 독자를 고려하지 않고 무반성적으로 사용된 ‘좌파’라는 말을 의미에 대해서 해명하는 것이 본 글의 두서없는 논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듯싶다. 내가 생각하는 좌파는 ‘저항하고 있다’는 사실에 도덕적 정당성을 찾는 사람도 아니요 무슨 일만 터지면 얼른 달려가서 일단 좌파매뉴얼에 나온 주장들을 무반성적으로 읊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기본적으로 내가 생각하는 유물론적인 좌파는 ‘공부하는 사람’이다. 좌파와 비판적 시민단체 간의 차이가 있다면 둘 다 사람 잘 사는 세상을 만들고자 하지만 좌파는 문제의 시작점을 공간적으로는 넓게(세계적 차원), 시간적으로는 깊게(멀게는 저 멀리 근대의 형성)에 잡는다는 것이다. 허나 좌파가 이렇게 나가는 이유는 사람들 상대로 잘난 척을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정말 문제가 거기에서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를 ‘인식’하지 않는 ‘꿈’들이 얼마나 많이 좌절되어 왔는지 보았기 때문이다. 꿈없는 인식은 그야말로 자위에 지나지 않으나, 인식없는 꿈은 너무도 안쓰럽다. 내 좌파에 대한 정의는 대중들의 꿈을 공유하나 그 실현을 위해 온 힘을 다해 인식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이는 지금껏 실현된 적이 없었던 역사의 단계로의 ‘한 걸음 전진’이라는 의미에서 ‘진보’에의 준비에 다름아니다. 혁명이란 프랑스혁명이니 러시아혁명이니 하는 것들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차례”에 발명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근본적으로 아직까지 ‘있었던 적이 없었던 일’이다. 있었던 적이 없던 일을 하기 위해서는 뭐가 있었던 일인지 꼼꼼히 따져보는 과정이 필요할 것이고 이 과정을 가리켜 나는 ‘공부’라 부르고 싶다.

위에서 잠시 말했듯이 지금의 열기는 짧고 좁게는 90년대 이후 가속화된 정치적 도덕주의의 경향성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무현의 당선으로 순간적으로 실현된 것처럼 보였던 “꿈”의 좌절과 현 정부에 대한 불신과 정세에 대한 경제적 사회적 불안의 투사가 겹쳐서 일어난 일이고, 또 길고 넓게는 현실사회주의의 조락 이후 소위 “역사의 종말”로 불리는 전지구적인 탈정치화의 경향과 현 상황을 대처할만한 정치적 기획에의 부재 등의 온갖 복합적인 맥락들이 교차되어 일어난 사태이다. 놀랍게도 노무현이라는 이름에는 이 모든 것이 다 들어있다. TV에서 상연되는 스펙터클에서 우리는 이미 노무현이라는 인생의 굴곡이 한국사의 그것과 교묘하게 겹치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주의를 기울인다면 거기에서 우리는 ‘진정성’, ‘인간성’ 등의 추상적인 가치 이외에도 집단적인 차원의 정치적 꿈의 열림과 닫힘들을 볼 수 있다. 그 꿈은 노무현이 말했듯이 최소 600년은 묵은 매우 오래된 꿈이다. ‘우리’는 그 꿈에 참여할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만약 역사와 함께 움직이고 싶다면 노무현을 애도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사태이다{굽시니스트 님은 "본격정치만화"(http://homa.egloos.com/4152404)에서 이전 30년간 한국정치사를 구조화해왔던 기표 박정희를 예로 들며 앞으로 노무현이야말로 (그를 긍정하든 부정하든 간에) 이후의 한국의 정치-공간을 구조화하는 기표가 될 것임을 암시하며 이를 "대한민국 공화국 후반전"이라 부른다. 이를 단순히 노무현 지지자의 낭만적 프로파간다로 생각해서는 곤란하다. 앞서 말했듯이 이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하건 부정적으로 생각하건 간에 이 시나리오야말로 가장 유력한 '현실'이기 떄문이다. 시나리오를 거부할 권한은 우리에게 없다. 다만 확실한 것은 이 시나리오를 주관적으로 거부할 경우, 좌파는 그 "후반전"에 초대조차 받지 못할 것이라는 점이다. 시험공부와 달리 정치는 벼락치기가 불가능하다. 시험준비는 미리미리 해놔야 한다. 좌파는 '지금 바로' 노무현을 애도해야 한다.}. 다만 그 애도는 ‘속죄’와 ‘위로’의 평화로운 독백의 방식이 아니라, (그 불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조언’과 ‘힐난’의 거친 대화의 형태가 되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이 한 인간으로서 뿐만이 아니라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임을 앎에도 불구하고 ‘정치인’으로 살아가고자 했던 고인에 대한 예우이기 때문이다. 노무현을 골골거리는 환자로 무력한 갱년기의 남성으로 축소시키는 지금의 애도는 분쇄하고 진짜 떳떳한 성인 대 성인으로서 그와 대결하는 애도가 필요하다. 절충적 애도도 비-애도도 불충분하기는 마찬가지다. 좌파는 더 이상 애도를 감행하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비록 정면대결은 아니었지만 이 글은 내 나름대로 고인과 씨름을 해보고자 했던 시도였다. 노무현이라는 이름은 지금까지 한국 정치와 사회의 모순과 그 극복의 시도를 집약해놓은 하나의 압축적인 외상이다. 이를 정면돌파할 때 (확신은 못하겠지만) ‘우리’는 어쩌면 다른 ‘기회’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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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nk Again' 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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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슴츠레 님의 까페 'Think Again' 소개 글이다. 블로그에 올리기로 약속드려서 올린다. 관심있는 분들은 가입을 권한다. 개인적으로는 게슴츠레님의 성실한 스크래핑에 큰 도움을 얻고 있다.

 


 

2000년대 이후 한국 사회에 참 많은 종류의 비판이론들이 들어왔고, 또 그를 가르치고 공부하는 많은 장소들이 자리를 잡았습니다. 다지원, 문지문화원, 새움, 사회과학아카데미, 철학아카데미, 수유+너머 등 오프라인에 물리적 공간을 가지고 있는 곳부터 어디서들 그렇게 공부를 하고 있었는지 참 신기한 각양각색의 웹 상의 블로그들까지. 최근 들어서는 출판시장과 주류 언론에서도 이러한 최신 담론들의 유입과 확장에 눈길을 슬며시 보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허나 이런 흐름을 마냥 긍정적으로 보시는 분들만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뭔가 새로운 것이 나올 것이다'하는 기대감의 옆에는, 이것이 그저 '한철을 넘기지 못할 유행'에 지나지 않는다는 이야기나 '그저 출판 시장의 새로운 아이템'에 불과하다는 비판이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이런 양가적인 시선들 앞에서 저의 입장은 분명히 전자에 보다 가까이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렇다고 전자를 옹호하며 후자를 냉소주의에 불과하다고 기각하고 싶은 생각은 없으며, 그럴 수 있는 위치에도 놓여 있지 않습니다.

 

 후자의 의견은 나름 강력한 현실적 논거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프랑스 철학이나 정신분석학에 주로 기초를 둔 소위 '비판적 인문학'들의 책을 들춰보면 초입자로서는 알아들을 수 없는 개념과 용어들이 산재해서 어디서부터 도대체 뭘 봐야 할지 도저히 감을 잡을 수가 없습니다. 게다가 이 어려운 걸 공부한다는 각양각색의 사람들은 딱히 자신들의 공동체에서 벗어난 사람들과 소통하고자 하는 의지는 그리 강렬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저는 여기서 그러한 개념과 이론들의 학습이 그저 궁극적으로는 무의미한 자위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허나 만약 누구의 말대로 들뢰즈-오타쿠, 지젝-오타쿠, 인문학-오타쿠 식으로 이론들이 그저 하나의 '취미'로서 소비되는 경향성이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없다'고 부인한다면 그건 경솔한 판단일 것입니다.

 

 이런 인문학 담론의 자족적 경향성을 가속화 시킨 요인 중 하나는 폐쇄적인 방향으로 발전(혹은 퇴행)한 한국 웹문화의 변화가 있을 것입니다. 그리 멀지 않은 과거에는 누군가 문제를 제기하고 그에 대한 반론과 이견들을 거듭하며 하나의 문제에 대해 어떤 '공통된 시각'을 형성하던, 토론을 두려워 하지 않던 '게시판' 웹문화가 있었습니다. 오늘날 '아고라', '웹2.0' 등으로 불리는 문화가 이미 PC통신 때부터 월드와이드웹 초기까지의 온라인 문화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허나 이런 지적 공론장이 나름의 이유로 몰락한 이후, 오늘날 그 빈자리를 대신하게 된 지적 공간들은 기껏해야 5개 정도의 리플이 달리는 자기만족의 공간인 블로그들의 폭발입니다. 기본적으로 '게시판 웹문화'가 <대화>의 문화, <소통>의 문화였다면, 트랙백 리플 파워블로거 등의 기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블로그 문화는 <독백>의 문화, <나르시즘>의 문화입니다. 공통의 과제를 위해 지혜를 모은다는 의식은 사라졌고, 리플 하나에도 쉽게 상처받는 자아가 과잉된 사춘기 소년소녀들이 포탈들이 제공해 주는 기능을 활용해 각자 자신의 방을 '이쁘게' 꾸미고 있을 따름입니다. 싸이월드야 두말할 나위가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문제의식 앞에서 저의 입장은 이렇습니다.

1)저는 오늘날 부상하고 있는 서구 사상가들이 그저 말장난을 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분명히 그/녀들의 목소리가 가지는 잠재력은 학계에 국한되지 않고 우리 자신과 우리 사회를 되돌아 보는 데 있어서 강력한 정치적 효과를 불러일으킬 수 있을 것이라는 데 저는 한표를 던집니다. 다만, 그/녀들의 이론을 통해 끊임없이 우리의 '현실'이 무엇인지와 견주어보려는 지적인 노력이 뒤따른다는 조건 하에서만 말입니다. 현재 훌륭한 번역자들과 연구자들의 노력으로 이들의 사상을 개괄할 수 있는 물질적 조건은 어느 정도 주어졌습니다. 이제 중요한 것은 그걸 가지고 싸울 궁리를 해야 하는 '바로 지금'부터입니다.

2)오늘날의 폐쇄적이고 자족적인 웹 문화의 대안을 제가 일거에 제시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다만 저는 1)에서 말한 싸움을 지속시켜 나가기 위해서도 '게시판' 중심으로 웹문화를 살려나갈 필요가 있지 않냐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각자의 공부와 담론 생산에 열심인 블로그들이 그저 '자위'에 불과하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대화와 개방성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개개인의 지적 투쟁을 비웃는다면 그 공간은 대화의 문은 열렸으나 막상 대화할 껀덕지는 없는 그러한 알맹이 없는 껍데기가 될 것입니다. 다만 그 블로그들이 가지고 있는 잠재력을 극대화시키기 위해서도(적어도 블로그 조회수를 늘리기 위해서라도) 그/녀들이 모여서 소통하고 발언할 수 있는 '지적 광장'의 존재는 매우 중요합니다.

 

 이러한 입장 아래에서 저는 네이버에 까페를 하나 만들어봤습니다. Think again(http://cafe.naver.com/think2wice)가 그것입니다. 저는 이 공간이 공식적으로는 1)먼저 비판이론들을 공부하고자 하는 분들, 더 깊게 공부하고 싶은 분들을 위한 최소한 '데이터베이스' 정도의 역할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2)아울러 오프라인이든 웹이든 함께 모여 공부를 해나가는 '세미나'가 활성화된 공간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동시에 비공식적으로는 이런 과정이 철저히 대놓고든 그렇지 않든간에 '현실 인식에 도움이 되야 한다'는 목적론적이라고 할 수도 있을 입장을 저 자신은 견지하고 싶습니다.

 

 먼저 일단 제가 공부를 하면서 웹과 오프라인에서 만난 훌륭한 텍스트들(주로 한글로 된)을 모아놓고, 까페를 열면서 웹 세미나도 하나 시작해 '만주국'을 공부해 보려고 합니다. 제 생각으로는 한국과 중국, 일본까지 동아시아 3국의 '근대', 그러니까 오늘날을 이해하는 데 있어 만주국은 피해가기 힘든 주제입니다. 일본에서의 '근대의 초극', 중국 공산당의 주요 근거지 중 하나, 식민지를 벗어난 조선 인민을 생활 터전, 기존에 자리를 잡고 있었던 다른 부족들이나 심지어 마적 떼들까지 온갖 인간 군상들이 한 자리에 모여 있었던 이 시기를 다루지 않고서 오늘날 '동아시아'라는 주제를 이해하려는 시도는 피상적인 데 그칠 수 밖에 없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까페에 관심이 있으신 분, 아니면 세미나를 함께 해보고 싶으신 분 모두 환영합니다. 열심히 공부를 해서 보다 사회(어떤 사회냐가 중요하겠지만)에 도움이 될 수 있는, 밥공기가 부끄럽지 않은 사람으로 성장해 나가는데 함께 할 지적 동료를 저는 기대해 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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