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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카소와 막걸리 보안법

[<노동자의 힘>의 기관지에서  '세상야사' 코너에 2002년 10월 썼던 글을 약간 수정했습니다]

 

막걸리 보안법이 검은 망토와 칼날을 높이 쳐들고 죽음의 거리를 활보하던 시절, '피카소'라는 이름은 남한 땅에서 절대 금기의 영역이었습니다. '피카소'라는 이름을 상표, 광고, 상호 등에 사용하는 행위는 국가보안법 위반으로서 단속대상이었을 뿐만 아니라 피카소의 미술에 대한 찬양도 금지되었으며, 미술 도구의 상호로도 쓰지 못하게 했고, 다방의 이름으로 '피카소'라고 지었다가 난데없이 구속된 사례까지 있었습니다.

 

그런데 피카소에 대해 이렇게 민감한 반응을 보인 것이 한국의 정보기관만은 아닙니다. 미국의 '정보자유법'에 의해 1990년 비밀 해제된 과거 FBI의 자료에는, 생전에 미국에 단 한번도 가 본 일이 없는 피카소에 대한 행적감시보고서가 187페이지나 되어서 사람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자료에 의하면 FBI는 피카소에 대해 1944년 이후 1973년 그가 사망할 때까지 발언과, 저술, 서명활동 등 모든 행적을 낱낱이 추적했을 뿐만 아니라, 그를 'C(공산주의자)'로 분류하고 'R(러시아)' 첩자로까지 기록하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또한 피카소는 평생 미국 입국금지자 명단에 올려져 있어서 한번도 미국에 가보지 못했습니다.

 

우리로서는 도대체 알 듯 모를 듯 이상한 그림만 그려대던 피카소를 정보기관들이 이렇게 눈발을 세워 감시하고, 거부하고자 안간힘을 썼던 이유는 바로 그가 정열적인 '프랑스 공산당원'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비뇽의 처녀들>이란 작품으로 입체주의(큐비즘)라는 새로운 분야의 대표 주자로 떠오르며 20세기 회화의 중심인 추상회화를 이끌었던 피카소는 1936년 프랑코의 우익 쿠데타에 맞서 시작된 스페인 혁명 당시 프랑코를 격렬히 비판하면서 그의 정치적 관점을 본격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합니다. 프랑코 우익군부를 지원하기 위해 바스크 지방의 게르니카를 무차별 폭격했던 독일 파시스트들을 비판하기 위해 그린 그림이 그 유명한 <게르니카(Guernica)>입니다.

 

[게르니카]

 

그는 2차대전 직후인 1944년 프랑스 공산당 입당하여 활발한 정치활동을 전개하는데, 1949년 나토협약에 반대하는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같은 해에는 반미시위에도 적극 참석하면서 자금을 지원하였으며, 공산주의자 평화대회에 대표로 참석하여 1949년 파리대회에서는 유명한 포스터 <비둘기>를 내놓습니다. 한국 땅에서 전쟁이 한참 벌어지고 있던 1950년 영국 중부의 공업도시 셰필드에서 열린 제3차 공산주의자 평화대회에 참석한 피카소는 "나는 죽음에 맞선 생명의 편입니다. 나는 전쟁에 맞선 평화의 편입니다"라고 선언했습니다. 이미 이러한 공산주의 반미 반전 평화 활동으로 미국 정보기관에 찍혀있던 터라 미국정부는 피카소가 인솔하는 '평화 대표단'을 '공산주의 전선 조직'으로 간주하고 입국을 거부한 일도 있었습니다. 

 

[한국의 학살]

 

한국 동란 중 1951년 신천에서 일어난 대학살에 대해 피카소는 <한국의 학살(Massacre in Korea)>이란 작품을 내놓는데, 이 작품은 두고두고 좌우 양측에서 많은 논쟁을 낳았습니다. 당시 우파 진영에서는 지나치게 정치적이라고 비판했고, 미국의 뉴욕타임즈는 1980년대까지도 이 그림에 대해 "저급한 스탈린 프로파간다"라고 비난했었습니다.
이 작품에 대해서는 좌파진영에서도 비판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당시 프랑스 공산당은 그 그림이 대중이 이해하기 힘들어서 대중적이지 않고, 살인자들의 정체성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고 비판하였습니다.

 

1947년 미국의 한 하원의원은 피카소의 추상주의에 대해 "퇴폐적이고 미국사회에 유해하며 소련 공산주의와도 관련되어 있다"고 공개적으로 비난한 일도 있었습니다. 냉전체제 하에서의 과도한 좌편향 역시 피카소의 추상주의에 대한 비판을 멈추지 않았는데, 피카소의 추상주의는 '사회주의적 리얼리즘 예술관'과 끊임없이 충돌합니다. 좌파진영 일부에서는 피카소에 대해 '배부른 사회주의자'라는 냉소를 쏟아붓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비판들에 아랑곳하지 않고 1953년 피카소는 <프랑스 문학>지에 스탈린의 초상화를 게재하여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고, 1956년에는 부다페스트 사태에 대해 해명을 촉구하는 서한을 프랑스 공산당 중앙위원회에 보내는 활동을 전개하기도 하는 등 그 정치적 행로를 그치지 않습니다. 왕성한 정치활동으로 1950년에 이어 1962년에 두 번째로 레닌평화상을 수상한 피카소는 1967년에는 프랑스 최고의 훈장이라는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거부합니다.

 

피카소는 여러 가지 기행으로 좌우에 다 이해받지 못했지만, 평화와 평등, 자유가 공산주의의 실체라고 믿었으며, 그 실천을 결코 멈추지 않았습니다. 피카소를 둘러싼 논쟁은 '자유로운 인간들의 공동체'로서의 공산주의에 대해 다시 고민하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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