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20대 미디어캠프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디지털 음악의 정치경제학

* MP3와 음악   /  휴대폰과 음악  /  저작권과 음악에 관해 교육할때

 

-자본과 기업이 음악이라는 공공의 문화예술에 끼치는 영향력 인식

-미디어 환경 변화에서 어떤 관점으로 현재 내가 향유하는 있는 미디어문화컨텐츠를 다르게 생각해 보기

 

 

 

 

디지털 음악의 정치경제학

 
강헌 | 음악평론가
 
1877년 토머스 에디슨이 소리를 가두는 축음장치를 개발하면서 음악은 20세기 개막과 함께 음반으로 표상되는 산업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그리고 이 격렬한 전진의 세기가 거의 저물 무렵 음반의 형태는 마술처럼 사라지고 MP3라는 디지털 포맷의 음원(音原)이 SP 레코드에서 CD까지 진화해온 음반의 시대를 대체하기 시작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이 디지털 음원은 인터넷이라는 이름의 새로운 네트워크를 통해 음악의 생산과 수용 그리고 유통의 패러다임을 혁명적으로 재편하는 중이다.

문화산업의 총아로 꼽히는 영화와 제반 영상콘텐츠가 여전히 오프라인을 핵심 교두보로 삼는 것과 달리 음악은 온라인과 모바일 쪽으로 급격하게 헤게모니가 이전되었고, 십년도 채 걸리지 않아 PC와 핸드폰, 그리고 휴대용 MP3 플레이어를 통해 음악은 우리 일상에 동행하는 이른바 유비쿼터스 체제로 돌입하기에 이르렀다.

한국 음악시장의 몰락과 독점체제의 시작

혁명은 시대를 따라잡는 데 실패한 모든 반혁명 세력을 일거에 하관시켰다. 공중파 TV의 스타씨스템에 의존했던 기존의 영세한 음반산업은 순식간에 괴멸했으며 도소매상 체제의 음반유통 또한 단숨에 붕괴되는 비극을 피할 순 없었다. 새로운 밀레니엄의 개시와 더불어 한국의 기존 음악시장은 어이없이 무너졌고, 이 땅의 음악 수용자들은 불법과 공짜에 길들여졌다.

이 대목에서 한가지 짚어야 할 것이 있다. 미국과 일본 등 음악산업 선진국에서처럼 기존의 패러다임과 새로운 패러다임의 조화로운 공존은 도저히 불가능했던가? 음반의 소멸이 불가피했다면 그 이유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IMF 환난사태를 전후해 밀어닥친 IT산업에 대한 전국가적 환상? 전근대적인 천민 음반자본에 대한 혐오? 담 밖에선 한류라는 돌개바람이 일었지만 탈일국주의(脫一國主義)의 천재일우의 기회는 빈곤한 내부의 인프라로 인해 무산되고 만다.

이렇게 음반산업에서 음원산업으로 재편되는 와중에 중원의 패권은 선대 회장 시절 카세트테이프를 생산한 전력 말고는 음악과 별로 상관없었던 SK텔레콤으로 넘어간다. SKT의 음악시장 장악은 온라인상의 불법복제로 인해 유일한 유료화 모델이 모바일상의 음악 판매였다는 것, 그리고 국내의 이동통신 단말기 시장이 이미 포화상태에 이르러 단말기의 판매보다는 그 속에서 구현되는 콘텐츠 시장을 개척해야 한다는 절박한 요구가 만나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SKT는 원활한 음악콘텐츠의 수급을 위해 서울음반을 인수했고, 국내 음원 중 60% 이상에 대한 권리를 확보함으로써 모바일뿐 아니라 온오프라인에서 절대적인 영향력을 손쉽게 확보했다. 더군다나 2005년부터 온라인상의 저작권 및 저작인접권의 보호가 정책적으로 추동되면서 SKT는 온라인 음악써비스 싸이트 ‘멜론’을 개설하여 모든 유통과정을 일원화했다. 이는 오랫동안 중소기업보호법의 우산 아래 있던 한국의 음악산업을 이동통신 대기업이 원천 콘텐츠부터 유통 네트워크까지, 그것도 독점적으로 장악하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보호를 명목삼은 배타적 독점

하지만 한국의 SKT뿐 아니라 세계 디지털 음악산업의 선도기업인 미국의 애플도 안고 있는 심각한 문제는 DRM(디지털저작관리체제)의 배타적 독점에 관한 것이다. 무슨 말이냐면 저작권 보호를 명분으로 자사의 음원 데이터베이스는 오로지 자사의 단말기에서만 운용되도록 해서 다른 회사의 단말기와는 호환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곧 애플의 온라인 음악스토어 '아이튠스'의 음원은 같은 회사의 MP3플레이어인 '아이팟'에서만 유효하지 다른 회사 제품에선 작동되지 않는다. SKT는 한술 더 떠서, 자신들이 확보한 인기신곡은 발매 후 일정 기간은 자사 싸이트와 모바일로만 유통시키는 독점권을 거리낌없이 행사하고 있다.

이를 아날로그 시대로 거슬러올라가 대입해보면 어느 인기가수의 새 음반이 특정한 회사의 앰프와 스피커축에서만 흘러나오는 이치와 같고, 나아가 그 음반을 특정한 음반 가게체인에서만 파는 셈이다.

이는 명백히 소비자의 자유로운 향유 권리를 침해하는 행위이다. 그리고 인터넷이라는 가장 자유로운 쌍방향 소통 매체가 대자본에 의해 얼마든지 배타적으로 제어될 수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이다. 실제로 애플은 반독점법으로 기소되었고, SKT는 공정거래위로부터 과징금 부과와 시정명령을 받고 유료로 구입한 MP3음원의 이동성을 보장하는 호환체제에 합의한 상태이다.

그러자 애플의 스티브 잡스는 아예 DRM을 모두 폐기하고 자유로운 이동을 보장하자고 메이저 음반사들을 향해 포문을 열었다. 자사 제품 사용자들의 단말기 사용실태를 분석해보니 아이튠스에서 구입하는 음원이 전체 사용량의 3%를 넘지 않더란 얘기다. 제일 먼저 배타적인 DRM으로 열매를 독식한 쪽이 시장을 장악하고 난 뒤 그것을 폐기하자고 하니 음반사들은 어안이 벙벙한 모양이다. 하지만 EMI 같은 굴지의 레이블이 잡스의 의견에 동조하는 입장을 보여 귀추가 주목된다.

물론 저작과 제작의 권리는 철저히 보장되어야 한다. 그러나 문화가 대자본의 배타적 독점 논리 속에 갇히는 순간 그것은 순식간에 향기를 잃는다. 시장의 자율성을 최대한 보장하면서도 정책이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할 지점은 바로 여기이다.

자유롭고 민주적인 음악 패러다임을 위하여

이런저런 논란에도 불구하고(이 글을 쓰고 있는 동안 회원수 최대의 온라인 음악싸이트 ‘벅스’가 DRM을 해제하겠다는 충격적인 발표를 내놓았다), ‘월드와이드웹’이라는 인터넷의 이상이 음악에서 실현될 날이 멀지 않았다. 언어와 유통의 장벽을 넘어 어느 지역의 음악이 언제 어디서건 원하는 이의 가슴에 즉시 도달하는 시대가 눈앞에 와 있는 것이다.

따라서 글로컬리즘(glocalism)이야말로 새로운 음악 패러다임에 적절한 용어이다. 온라인과 모바일, 그리고 위성체제에 의해 구축된 새로운 미디어 네크워크는 강대국의 일방주의가 아닌 다국적 다원주의의 가치를 자연스럽게 고양시킨다.

자본은 시장을 통해 성장했으며 테크놀로지를 통해 진보해왔다. 이제 자본은 예술적 감수성과 철학적 성찰로 무장하여 자신을 비약적으로 끌어올릴 때가 되었다. 그것이 이윤이라는 자신의 고유한 목적을 더욱 효율적이며 인간적으로 획득할 수 있는 길이기도 하다.

 
필자 소개 강헌
음악평론가, 한국대중음악연구소장. 단국대 대중문화예술대학원 겸임교수. 저서 《음악의 파장 공명의 파장》 등이 있음.
 
2007.02.13 16:00 l ⓒ 강헌 2007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이거 하자고 한 것 아닌데...

년초마다 받는 전화인데, 어제는 전화를 끊고 이게 나의 "업보인가"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와 닿는 느낌이 작년과 다른 이유는 뭘까를 지금도 고민하고 있다.

 

원래 의도는 그게 아닌데... 자꾸 사람들은 왜 그렇게 이해하고 접근하는 걸까?

내가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 이유일까? 나도 아직 준비되어 있지 않은데, 나의 완성된 생각이 다른 사람들에게 너무나도 빠르게 번져가고 있는 것이다. 내가 너무 많은 이야기를 하고 다니는 것은 아닐까?

 

생각은 많은데, 어떻게 이 문제의식을 정리하고 대응해 나갈지가 막막하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온전한 삶이란

나를 돌아보고 내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고 무엇을 고민하고 있는지를 알게 될 때야 난 나의 삶에 대해 생각해 본다.

과연 나의 삶은 온전한가? 힘들어서 대충대충, 귀찮아서 설렁설렁, 어려워서 못해못해 하며 온전한 삶과 멀리 떨어져 있었던 것은 아닌가? 

난 무엇 때문에 사는걸까? 꼭 이유가 있어서 사는 걸까?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즐거워하면서 살아야 하는데 난 확신을 못한다. 지금보다 하고 싶은 것을 해야 할 것 같고 즐거워 해야 할 것 같은 지금의 나의 생각은 무엇일까?

출근하고 퇴근하고 잠자고 밥먹고 이렇게 반복되는 생활이 온전한 삶일까? 무엇이 빠진 것일까? 치열한 공부, 끊임없는 탐구, 계속해서 나를 발전시켜 나가는 것. 그래서 난 책을 읽고, 글을 쓰고, 내가 하고 일을 정리하고, 동료와 친구와의 관계를 만들어 가려 한다. 그런데 내 몸이 고통스러워 하고, 머리가 아프고, 가슴이 답답하고, 자꾸 조급하고, 경쟁하려 하고, 미워하고 하는 지금의 내 모습에서 이러한 것을 한다고 하여 몸과 머리 그리고 가슴이 유쾌해지고 여유로워지고, 사랑하는 마음이 생길까?

궁긍적으로 온전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생활공간부터 이 사회에서 존재하는 삶의 방식을 바꿔야 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지금의 삶의 방식이 아닌 어떤 방식으로 바꿔 나가야 할까?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장애인미디어교육의 의미와 방향을 찾아서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교육과 운동의 간극 맺구기

일명 우리사회 소수자의 삶의 공간에서 미디어교육을 하다보면 이들에게 미디어교육은 이차적인 것이었다. 물론 이것은 요즘드는 나의 개인적인 생각이다. 당장 집이 필요하고 밥이 필요한 이들에게 값비싼 장비를 들려 주고 지금 나의 삶을 표현하여 사회와 이야기 해 보자고 한다. 이러한 이유들 때문에 한번도 카메라를 들어보지 못했던 이들에게 기회가 되었다는 다행스러운 의미가 있긴 하지만 교육이 끝나고 난 항상 고민하게 된다.

과연 이들의 삶에서 미디어교육은 어떤 의미가 될 것인가. 한번의 교육으로 이들의 삶의 조건을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여전히 이차적이라는 질문은 계속되고 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장애인미디어교육-비판적 미디어 읽기 수업 시나리오

도입:

-[모둠활동]나는 주로 어떤 미디어를 활용하고 접하고 있는가 -> 정리 

-우리가 자주 보고 듣는 미디어에는(TV, 라디오, 신문, 네이버 등) 누가, 어떤 이야기가 나오고 있는가 -> 정리

-[모둠활동]그렇다면 만약 내가 텔레비전 PD라면, 신문기자라면, 라디오DJ라면 어떤 이야기를 할 것인가?

-성서공동체 라디오 방송 프로그램 듣기(장애인), 퍼블릭액세스(방송) 프로그램 보기(김주영), 시민의 신문 보기(활동보조인), 인터넷 방송(참세상) 보기

 

전개: 장애인과 미디어

-장애인이 미디어에 어떻게 재현 되고 있는가? 공익광고 보기

장애인 프로그램(일반/장애인)

장애인 방송(복지방송, 시민방송)

대안미디어(참세상, 성서공동체라디오방송)  

-왜 이러한 것들이 필요할까?

-미디어접근권이란 ? : BBC OPEN DOOR 프로그램에서의 장애인 프로그램 보기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06.3.31 금요일 빨래골

교육이란 이런 것인가 보다.

 

작년 '소리로 여는 미디어 세상'에 참여했던 한 친구를 만났다.

유난히 음악과 녹음을 좋아했던 그 친구는 요즘 MP3에 음악을

다운 받는 것에 빠져 있었다. 그런데 오늘 테잎을 듣고 있는 것이다.

 

기숙사에서 함께 방을 쓰고 있는 친구들과 오디오드라마를 만든 것이다.

작년 교육을 응용해서 한번 만들어 보았다는 것이다.

미디어교육을 통해 아이들이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고

그것을 통해 소통하고 있는 것이다. 

 

난 옆에 앉아서 그 아이들의 생각을 듣고자 계속 질문을 던져 보았지만

많은 이야기를 끄집어 내지 못했다.

자꾸만 미디어교육의 효과를 확인하고 그 아이한테 확인 받고자  했었는데...

 

그래서 아이가 녹음한 오디오드라마 테잎을 빌려 오려고 했지만

아이는 빌려 주지 않았다.

 

요즘 이 아이는 사춘기인 듯 좋아하던 피아노 레슨도 학교생활에도 관심이 없어 보이더니

나에 질문에도 요청에도 반응을 하지 않는 것이다.

 

교육이란 기다리고 이후에도 만나서 이야기하고 무엇을 하고 있는지

관심을 주는 것인가 보다.

무언가를 많이 알려 주고 이건 이것이라고 일방적으로 교사의 생각을 말하는 것이 아닌

교육참여자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 무엇을 원하는지를 가만히 듣되

때로는 방향을 제시해 주는 것인가 보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06.3.27 공덕동

개나리꽃과 진달래꽃이 핀 교정으로 들어 선 나의 마음은 무거웠다.

아이들 만나는 것은 좋았지만 교육을 진행하는데 있어서 어른들과의 관계가

쉽지 않은 것이다. 밀고 당기는 힘의 관계와 알 수 없는 이해 관계가 부담스러웠다.

 

나도 어느새 이러한 관계를 읽고 파악하고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를 고민해야 함을 알게 되었다. 예전에는 그냥 좋은 의도로 좋은 사람들과 교육을 하면 좋기만 했는데

이제는 이해관계가 보인다.

 

이것이 어른이 된다는 것일까?

 

맹학교 이어 특수학급 아이들의 만남도 늘 그렇지만 설레었다.

1학년은 새롭게 만나는 아이

2학년은 또 다시 만나는 기쁨이 있었다. 아이들은 나늘 기억해 주었고

핸드폰에 담아 놓은 나의 사진을 보여 주면서 나를 확인시켜 주었다.

 

봄날 낮에 진행된 수업은 점심시간 전과 후에 진행되었다.

배고픔과 식후 나름함이 있는 가운데 수업이 있었다.

 

작년 유독 나를 잘 따르고 나도 특별하게 좋아했던 아이가

아주 작은 목소리로 인사를 했다.

세련된 검은 뿔테가 유난히도 잘 어울리는 아이의 생각이 난 늘 궁금했다.

표현을 잘 하지 않고 말이 없는 아이 그러나 묻는 것에는 자신의 의견을 분명하게 말을 했다.

 

무거운 마음으로 시작된 교육에서 어떻게 하면 좀 더 편하게

재미있게 교육을 할 수 있을까?

교육과 얽혀 있는 이해관계를 빨리 풀고 서로가 마음과 마음으로

교육을 해야 겠는데...

 

아쉽다.

특히 나에게...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06.3.24 금요일 빨래골

2006년 3월의 어느 봄날에도 어김없이 난 4호선 전철에 내렸다.

그리고 4번 출구로 나와 빨래골 가는 마을 버스를 탔다.

 

광화문 사무실에서 점심을 먹고 나오는 봄날의 외근은

나른하고 졸리는 몸과 머리를 깨울 수 있어서 좋다.

그렇다고 외근이 졸리는 몸과 머리를 완전히 깨우지는 못한다.

 

맹학교 정문에 내려 '소리로 여는 미디어 세상' 수업이 있을 교실에 들어갔다.

맹학교에서의 교육은 매년 신학기면 새로운 아이들을 만날 수 있다는 설램이 있다.

그리고 커 가는 아이들을 볼 수 있다는 보람이 있다.

맹학교 아이들은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같은 학교를 다니기 때문에

3년째 맹학교에서 교육을 하고 있는 나는 중학생이 된 재작년과 작년의 아이들을 본다.

훌짝 키가 커 버린 아이와 성숙해진 아이들은 그때의 미디어수업을 기억하고 있다.

이것이 교육의 보람의 보람이며 미디어수업이라는 같은 경험을 가지고 있으므로써

2년이 지나도 1년이 지나도 이야기를 할 수 있나 보다.

 

올해도 아이들과 이러한 경험을 하고 나누고자 교육을 시작했다.

2년째 아이들과 함께 수업을 하게 된 두명의 교사도 작년과는 다르게 여유를 갖고

아이들을 만났다. 나는 아이들과 잠깐 인사를 하고 사진기와 기록할 수첩과 펜을 들고

수업이 이뤄지고 있는 교실 뒷편에 서 있었다. 잠깐 수업과정에 끼어 들곤 하지만

되도록이면 뒤에서 수업을 보려 한다.

 

3월 24일 첫 수업은 자기소개로 시작되었다. 낯설고 쑥스러운 마음에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거나 녹음하는 것을 피했기도 했지만 처음 만져 보고 써 보는 MD 녹음기와 마이크를 아이들은 신기해 하며 자기소개를 했다.

 

아이들은 이유없이 자기를 괴롭히는 것을 가장 싫어하고 대하드라마를 좋아하고 텔레비전에 중독되어 있고 휴대폰을 가지고 있고 60살이 되면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싶은 자기를 소개 했다.

 

올해 아이들은 어떤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건지?

그들과 함께 미디어수업을 통해 무엇을 할 것인지?

 

기대해 본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