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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태,솔/까/말][13]임신과 낙태, 내 몸에 대한 나의 권리 그리고 굴레

임신과 낙태, 내 몸에 대한 나의 권리 그리고 굴레


 

  설화


 

임신을 원하는 나


 

며칠 전 이사갈 집을 보러 갔는데 아이들 세 명이 우르르 달려 나와 얼굴도 모르는 나를 반겼다. 아이의 엄마는 내 또래의 젊은 여성이었다. 지친 일상에 아이들이 주는 웃음들로 집안은 꽉 차 있는 듯 했다. 예전에는 마냥 남의 이야기인 듯 했던 출산과 양육이 어느 새 내게 가까이 있는 일처럼 느껴졌다.


 

나는 남성과 결혼을 했고 5년이나 지났지만 아직 아이가 없다. 연애 초반에는 이러다 결혼하면 나는 덜컥 애부터 갖겠구나 하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실제 살아보니 아이를 가져서 키울 시간적, 경제적 여유가 나질 않았다. 한 동안 ‘내가 무성애자인가?’하는 생각을 했었는데 우리는 거의 섹스를 하지 않았다. 주변 사람들은 나에게 ‘배란일에 딱 맞춰 성기결합섹스를 하고 수정란이 내 자궁에 안착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굳이 섹스가 없이도 괜찮은 일상을 살고 있기 때문에 나는 그 말들이 보통 성가신 게 아니었다. 임신이 안 되고 있는 상황, 그 원인이 나에게 있다는 듯 주변 사람들은 나를 재촉했다.


 

내 삶 속에 가족 관계가 깊이 들어와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래서 남성과 결혼한 기혼 여성으로 정체화하는 것에 대하여 인정하며 타협하는 부분들이 많아지고 있음을 느끼기도 한다. 임신과 출산, 양육을 계획하는 문제도 그렇다. 아이에 대한 생각이 아예 없지는 않았기 때문에 어느 정도 준비가 충분히 되었을 때 임신과 출산을 계획하자는 생각은 서로 공유해왔다. 그럼에도 출산에 대한 나의 결정과 선택은 주변을 둘러싼 압력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었다. ‘아이만 낳아 키우면 가족의 완성’이라는 후진 통념 속에서 나와 남편의 삶은 비뚤어진 것이었다.


 

몇 년 동안 이에 대해 무시해왔지만 지금은 다소 지쳐있는 것 같다. 솔직히 아이가 예뻐 보이기도 한다. 개인적으로 여러 힘든 일들을 겪었을 때 주변의 선배 여성 활동가들이 아이를 권유한 적이 있었다. 한없이 나만 바라보는 존재가 내 곁에 있다는 것, 그게 엄청난 부담일수도 있지만 때로는 마냥 주기만 하는 사랑을 할 수 있어서 좋다고 했다. 종종 주변에서의 출산 소식을 들을 때, 조카나 친구의 아이들이 활짝 웃는 얼굴로 나를 반길 때면 솔직히 아이와 함께 하는 삶도 나쁘지는 않구나 하는 생각을 한다. 현재의 나는 아이를 원하며, 마땅히 여성 스스로 임신을 선택할 수 있는 사회가 오기를 간절하게 바라고 있다.


 

맴도는 이야기들


 

몇 달 전 친한 동생의 낙태 이야기를 들었다. 덤덤하게 이야기를 꺼내던 동생의 얼굴을 떠올리며 나의 경험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도 너와 같은 경험을 했다는 말을 너무도 해주고 싶었다. 찌질하게 울지 않으리라 다짐했으면서도 우리는 손을 꼭 붙잡고 울었다.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조건으로 몰아넣고 아이를 지우면 범죄자 취급하는 세상이, 새삼 여성들에게 너무 냉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이슬람 사회에서 돌로 쳐 맞아 죽는 여성들이 된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우리는 서로에게 “괜찮다, 다 괜찮다”라는 말을 하면서 위로했다. 낙태를 전면적으로 불법화하고 있는 지금, 터무니없이 비싼 수술비에 놀라기도 했지만 친구가 한 동안 받고 있을 심리적 고통이 걱정되었다. 그리고 다시금 내 모습을 떠올렸다.


 

현 지점에서 과거를 반추하는 것, 아이를 원하는 현재의 내가 덜컥 임신이 되었던 과거의 나를 돌이켜봤을 때, ‘혹’과도 같던 내 몸의 일부를 떼어내는 일과 그 ‘혹’에서 자라날 어떤 인간의 모습을 그리며 고대하는 일이 이렇게 종이 한 장 차이였는지 생각도 못했다. 내가 처한 상황과 맥락에 따라 임신, 출산은 다른 의미일 수밖에 없다. 원치 않는 임신을 하는 여성들이 많다는 것, 임신을 원해도 낳아서 키울 조건 자체가 되지 않는다는 것, 사회 경제적 사유에 의한 낙태는 허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해도 그것이 낙태하는 여성들의 고통을 온전히 경감시켜주지는 못 한다. 나에게 그 고통은 몸에서 오는 게 아니라 ‘말을 할 수 없는 것’에서 왔다.
 


 


 


묻어둔 기억


 

묻어두었던 기억들을 다시 하나 하나 꺼낸다. 페이지를 집어서 넘기고 싶은 과거이지만 애써 그러지 않기로 한다. 벌써 8년이나 흘렀다. 학생 운동하며 지냈던 너무 바쁘고 지쳤던 나날들, ‘임신’ 자체는 내 삶에서 없는 단어였다. 그렇게 생각해야 했다. 운동을 정리하는 선배들이 많았기에 개인적으로 악감정이 받쳐 있던 지라 연애는 그냥 섹스만 즐길 수 있는 통로 정도로만 여겼다. 연애 당시에 했던 섹스가 진정 나의 욕구였는가 하는 질문도 던져보지만, 그 때는 그냥 나의 욕구라고 규정해야 했다. 아무런 준비 없는 섹스를 한다고 순진하고 멍청하다고 타박할 겨를조차 없었다.


 

정확히 난 두 번의 임신중지 경험이 있었다. 첫 번째는 응급피임약을 복용했다. 배란일에 관계를 가졌고 피임을 하지 않았던 터라 매우 불안했다. 당시에는 여성들이 임신이 된다면 응급피임약을 복용하거나 낙태수술을 하는 것은 당연한 거라고 생각했지만 ‘내 일이’ 될 거라는 생각은 미처 못 했다. 나는 바로 산부인과로 달려갔다. 여성 의사를 찾아 달려갔는데 당시 여성 의사는 임신이 아닌 것 같다고 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약을 복용해보자고 했다. 나는 주의사항에 대해 제대로 듣지도 못했고, 바로 노레보 약을 복용하였다. 헌데 약을 먹은 당일 밤새 잠을 못 이루었다. 질염에 걸린 듯 가려웠고 통증이 이어졌다. 임신을 하지도 않았는데 괜히 약까지 먹었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내가 참 바보 같구나 하는 신세 한탄을 했다. 당일에 밤새 써야 할 글이 있었다. 죽치고 컴퓨터 앞에 앉아 약 먹은 사실을 잊기 위해 애썼다.

두 번째는 산부인과에서 낙태시술을 받았다. 그 때는 생각지도 못한 임신이었다. 당시 애인은 나에게 ‘칼처럼 냉정했다’고 말했는데 나는 생각 이상으로 침착하고 냉정했었다. 그렇지만 매 순간마다 나에게 각인된 기억은 또렷하다.


 

학교 화장실에서 임신테스트기에 양성 반응이 나왔을 때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바로 학교 앞 산부인과로 달려갔을 때
엄지만한 아기집이 내 자궁에 있는 것을 봤을 때
딱딱할 줄 알았던 의사가 의외로 친절하여 마음이 놓였을 때 - 학교 앞 산부인과였는데 그 때는 참 많은 사람들이 이 공간을 다녀갔구나 싶었다.
통증이 무서워 계속 아프냐고 질문했을 때
전신마취하면서 저항하기 어려운 뻣뻣함이 온 몸을 휘감을 때
기분 좋은(?) 꿈을 꾸었을 때
침대에 쓰러져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고 잠에 빠졌을 때
샌드위치와 주스를 먹으며 허기를 달래던 때
관절이 아파서 먹고 있던 약을 임신 중절 때문에 못 먹게 되었을 때
수술 당일에는 겨를이 없었는데 생각해보니 수술비는 학생회하면서 받았던 장학금으로 냈던 것임을 알고 경악했을 때
전신마취 수술을 받으면 깜빡한다던데 자꾸만 기억들이 정지되는 것 같아 불안했을 때
몸 추스릴 겨를 없이 농활대장으로 농활에 다녀와야 했을 때


 

낙태 합법화를 요구하며 싸웠던 나는 순간마다 무력해졌다. 잊고 싶었으나 잊혀지지 않아 괴롭기도 했다. ‘애써 잊어야 하는가, 내가 살면서 충분히 겪을 수 있는 거라 생각하자’며 긍정할 수 있는 나의 경험이라 여겨도 의외로 낙태의 기억은 나를 계속 짓눌렀다. 무엇보다 수술 이후 바로 농활대를 꾸려 농활을 가야 했을 시기에는 정말 절망적이었다. ‘내가 너무 힘들고 아프다’고 한 소절만이라도 입 밖으로 꺼내 말해보고 싶었다. 헌데 그럴 수가 없었다. 나는 나에게 돌아올 화살들이 두려웠다. 농활을 준비해야 하는 사람은 나와 동기 단 두 명이었고, 졸업한 선배에게 나의 사정을 알리며 도움을 요청하자 선배는 “왜 피임을 하지 않았느냐”고 동정어린 말들로 타박했다. 야속했지만 유일하게 내 말을 들어주어 고마웠다. 최소한 나라는 존재가 인정을 받을 수 있었던 시간 같았다.


 

아무런 생각조차 누구를 향한 원망조차 할 수가 없었다. 내 스스로 내 몸에 커다란 폭력을 저질렀다는 생각에 온종일 휩싸여 있었다. 제일 답답했던 것은 나 ‘이래서 아프다’고 말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봉인된 내 아픔을 말할 수가 없는 것, 자꾸만 기억이 깜빡거리고 관절이 아프고 뼈마디가 쑤셔도 왜 그런지 말할 수가 없었다. 나를 다그치며 더욱 운동에 매진해야 했다. 말하는 것 자체가 힘들지 않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하기 위해 후배들과 세미나하면서 내 이야기를 전하기도 했었고 나름 학생운동을 한다고 자부하면서 ‘여성의 몸에 행해지는 통제에 저항하자’고 외치던 것도 생각이 난다. 그렇지만 어떤 것이 나를 계속 휩쓸고 있었다. 이야기가 통하지 않는 다수의 대중들(!)에게는 내 사연을 말할 수가 없었다. 사실 말할 필요도 없었지만, 너무도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래서 더욱 결정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침묵을 강요당했다. 더욱 힘들었던 것은 자책이었다. 십대 때 나를 지배하던 기독교적 세계관으로 인해 자꾸만 죄책감에 시달렸다. 분명 ‘나에게 어떤 큰 고난이 올 것이다’라고 생각했고, 자살에 대한 충동과 우울증을 겪으며 병원을 드나들었다. 불행은 늘 겹쳐온다던데 나에게 ‘낙태’ 역시 당시 닥쳐 온 불행들 중 하나였다.
 


 


 

내가 듣고 싶은 낙태하는 여성들의 이야기


 

난 여전히 ‘낙태’에 대해 떠올렸을 때 냉정해진다. 프로라이프 의사회가 말하는 것처럼 ‘낙태’가 여성의 몸과 태아의 생명 둘 다를 위협하는 일이라면 나는 태아보다 나를 살리기 위한 선택을 할 것이다. 어느 여성이 그렇지 않겠는가. 임신과 출산은 단순히 ‘행위’자체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임신’을 할 ‘가능성’이 있는 여성들이라면 ‘아무하고나 섹스하고 다닌다는 낙인’과 ‘평생 누군가를 보호하고 책임져야 하는 노동’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본인이 임신을 선택한 것이라면 생애주기로 봐 줄만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즉 피임에 실패하거나 성폭행에 의한 임신을 하게 된다면 삶의 구성 요소 하나하나가 완전히 뒤바뀌게 되는 매우 ‘폭력적인’ 상황에 이르러야 한다. 하지만 법을 중시하는 사람들, 태아의 생명권을 중요시하는 사람들은 여성의 삶을 쉽게 또 철저하게 무시한다. ‘절대적인 생명론’에만 갇혀 있는 현재의 낙태 관련 쟁점은 실제 낙태의 주체인 여성들의 목소리들은 철저히 배제하고 있다. 임신과 낙태, 이 사이의 선택이 내 몸에 대한 나의 권리라 해도 결국 내 삶에 일어날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모든 문제들이 함축되어 있는 것이기에 쉽게 결정하기 어렵다. 아이를 원하는 현재의 내가, 아이를 낳을 생각도 키울 능력도 없는 당시의 내가 임신과 낙태에 대해 고민하는 것은 결코 같은 맥락 속에 있지 않은 것처럼. 아직까지도 그 불안과 혼돈 속에서 내가 내려야 할 선택을 한 큐에 정리해준 당시 산부인과 의사의 말들 하나하나가 기억난다. 그리고 안도한다. 붙잡을 사람이 없었으니 수술이라도 잘 되게 해달라고 빌 수 있는 대상은 그 뿐이었으므로. 나의 고통이나 경험을 말할 수 있는 대상이 그만큼 없었으므로.


 

 임신과 낙태라는 말 뒤로 숨어 있는 많은 이야기들이 있다. 태아를 지운다는 것, 그 수술을 해야 하는 것, 나의 고통을 알아주지 않는 것, 말할 수 없는 것, 지지와 공감이 너무도 필요한 것 등 여성들이 겪는 각각의 상황마다 너무도 여러 가지의 맥락들이 있다. 그렇지만 이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사회는 이 맥락들을 ‘생명에 대한 살해’로 삭제시켜버린다. 나는 ‘내가 죽인 생명’에 대해 ‘역지사지’를 할 수 없다. 그 때 그 엄지만한 태아가 어떻게 자라났을지 생각조차 하기 싫다. 이십대 초반, 한창 자유로울 나이에 아이가 내 몸 찢고 나오는 고통 겪으며 낳아서 입양시켜 괴로워 할 바에야 당연히 수술해서 없애는 게 낫다. 내가 하고 싶은 선택을 한 것이다. 시간을 돌린다 해도 불가피하게 선택했을 것이다. 사실 어느 것 하나 완벽한 피임이란 없기 때문에 더욱 안전한 낙태 환경, 그리고 여성들이 자유롭게 병원을 찾아 시술받을 수 있는 조건과 환경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게 현명한 것 아닌가.


 

낙태 경험 이후에 우연히 길을 지나다가 중고생들이 반낙태 캠페인을 벌이는 모습을 봤다. 정말로 화가 치밀었다. 아이들에게 반낙태 캠페인을 시킨 자들이 어떤 쓰레기들일지는 뻔했다. 아이들은 캠페인에 동원되지 않아도 교육이나 학습 속에서 쓰이는 ‘생명론’에 길들여져 있다. 종교적, 윤리적 시선 속에서 ‘낙태’는 ‘범죄’다. 그렇지만 임신을 할 수 있는 여성들에게 ‘낙태’는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나중에 자신이 범죄자가 되었거나, 이 범죄에 연루(!)되었을 때 아이들이 느낄 당혹감은 단순히 아이들만의 것이어야 하는가. 그나마 페미니즘이나 여성운동을 만났던 나에게 낙태는 ‘있을 수 있는 일’로, ‘말할 수 있는 경험’으로 각인되지만 만약 내가 이러한 가치관을 갖지 못했다면 도를 넘어선 자책감과 자기기만으로 괴로워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는 자기가 자기 자신에게 하는 살인 행위다. 왜 이 ‘살인행위’를 부추기는가.


 

연간 100만건이 넘는 낙태시술이 이뤄지고 있다고 한다. 100만건이 넘는 생명이 죽어간다는 이야기보다, 여성이 아무 말도 못하고 겪어야할 100만번의 아픔이 더 크게 다가온다. 가리고 숨길수록, 자신을 범죄자로 만들수록 사회는 낙태를 선택한 여성들을 고립시킬 것이다. 이제는 낙인과 책임감에 두려워 봉인된 나를 끄집어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 작업은 고립되고 있는 여성들의 목소리들을 조직하고 싶다는 욕구와도 맞물린다. 내가 겪은 고통을 공통으로 공유하고 있는 사람들을 더 찾고 싶고 그것이 어떤 것으로부터 강제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임신이나 낙태에 대한 우리의 욕구나 생각들은 어떠한지 툭 터놓고 이야기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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