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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병호와 이석행, 그곳에 숨은 집회의 비밀
1990년 전노협 창립대회 VS 2008년 전국노동자대회
주최와 참석자가 불분명한 엉성한 집회가 감동이다
집회의 감동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훌륭한 기획과 뛰어난 연출가의 능력일까?
멋진 공연과 화려한 무대일까?
집회 기획자는 아니라고 답했다.
지난여름 무대도 프로그램도 없이 부산 영도를 밤새 뛰어다녔던 ‘희망버스’, 많은 이들이 ‘감동 먹은’ 집회였다고 손꼽는다.
노동자 집회하면 떠오르는 기억이 있다. 1990년 1월 22일에 수원 성균관대학교에서 열린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노협) 창립대회’와 2008년 11월 9일 서울 대학로에서 열린 ‘2008 전국노동자대회’다. 스무 해 가까운 시차가 있지만 두 집회의 조건은 너무나 닮았다. 1990년 전노협 초대 위원장인 단병호는 수배 중이었다. 2008년 민주노총 위원장인 이석행도 수배 중이었다. 두 대회 모두 행사장에 위원장이 나타날 경우 경찰들이 검거를 하겠다고 강한 입장을 밝혔다. 경찰의 철통같은 경계 속에서 두 대회는 열렸다. 두 집회 모두, 참석자들의 긴장이 최고조에 다다랐다. 참석자들은 수배 중인 위원장이 나타날 지에 대해 떨린 가슴으로 집중했다.

위원장의 인사말 순서, 이 순간 역사는 달라졌다. 두 집회가 끝난 뒤 민주노조운동에 미친 영향도 확연히 달랐다. 한 쪽은 희망을 찾았고, 한 쪽은 절망의 나락으로 곤두박질쳤다.
왜일까? 역사를 더듬는다.
1990년 전노협 창립대회
전노협 출범을 앞두고 경찰은 단병호에게 사전구속 영장을 발부하였다. 서울시경은 그를 검거하려고 특별수사본부를 설치하고, 각 경찰서마다 전담반을 꾸렸다.
전노협 창립대회를 하루 앞둔 1월 21일 밤, 준비위원회 회의는 신속하게 안건을 처리했다. 문제는 단병호였다. 유난히 키가 커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모여도 단병호는 금방 드러났다. 그가 대회장 인근까지라도 올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갑론을박이 이어졌다. 전노협의 상징적인 존재인 단병호가 검거된다면 전노협의 존립자체가 위태로우니 창립대회에 참석하지 않아야 한다는 의견과 전노협의 지도자가 참석하지 않은 결성은 있을 수 없다는 의견이 부딪혔다. 오랜 논의 끝에, 참석할지 말지의 판단을 단병호에게 맡겼다.
1월 22일 아침. 경찰은 갑호비상령을 내렸다. 서울거리에는 눈발이 흩날렸다. 창립대회 장소로 공개된 서울대학교 주변은 2만5천 명의 경찰병력이 배치되었다.
단병호는 용산역에서 수원행 전철을 탔다. 휴일인데도 전철 안은 출퇴근 시간 때처럼 붐볐다. 신도림역을 지나자 더 이상 사람이 탈 수 없을 정도로 꽉 찼다. 전철이 성대앞 역에 멈추자 누군가의 손짓에 따라 수백 명의 노동자들이 전철 밖으로 뛰쳐나왔다. 역을 빠져나온 노동자들은 우당탕탕 요란한 발자국 소리만 거리에 남긴 채 성균관대학교 수원캠퍼스로 한꺼번에 달려갔다. 학교 앞에 배치된 경찰이 손 쓸 틈조차 없었다.
창립대회가 시작되었다. 민중의례, 내빈소개에 이어 단병호가 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때까지도 대회장에는 단병호가 보이지 않았다. 권처홍 전노협 고문의 축사가 시작될 쯤, 대회장은 갑자기 환호와 열광의 도가니였다. 훤칠한 키의 단병호가 나타났다. 집회 참석자들은 갑호비상령을 뚫고 단병호가 들어왔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노동자의 힘, 전노협의 위력을 확인했다. 어떤 연설도 어떤 공연도 필요 없었다. 단병호의 등장, 이 순간 집회는 형식과 내용을 떠나 성공했고, 참석자들은 감동했다.
단병호가 나타나자 경찰은 대회장으로 진입하려고 했다. 2백 명의 선봉대들이 급하게 구한 각목을 들고 대회를 지켜내려고 경찰의 진입에 맞섰다. 각목도 미처 구하지 못한 이들은 몸으로 경찰에 맞섰다. 참석자들도 밖으로 뛰쳐나갔다. 눈 쌓인 교정에는 경찰에 맞설 돌멩이 하나 없었다. 눈을 뭉쳐 던지며 저항하는 이도 있었다.
대회는 무사히 끝났고, 단병호는 유유히 대회장을 빠져나갔다.

2008년 전국노동자대회
2008년 11월 9일 전국노동자대회가 열릴 예정인 서울 대학로는 살벌했다. 수배 중인 이석행을 잡으려고 대회장은 물론 역 주변과 골목길에 사복형사들이 배치되었다. 서울 사대문 곳곳에서는 차량 검문검색도 있었다.
전국노동자대회에 수배 중인 이석행이 나온다는 말이 돌았다. 노동자들은 나올 것이라고 믿었다. 경찰은 이석행이 나타나면 집회를 불허하고 곧바로 대회장에 병력을 투입해 검거를 하겠다고 했다. 민주노총 조합원들은 대회 중간에 경찰의 침탈이 있으면 곧바로 참석자 전원이 한 치의 물러섬 없이 어깨를 걸고 위원장을 지키겠다는 결의를 했다. 언론사들의 카메라들도 이석행의 등장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고 첫 번째로 맞이하는 전국노동자대회는 1990년 노태우 정부 시절 전노협 창립대회와 판박이처럼 닮았다.
여느 해 대회보다 행사내용도 격했다. 위원장을 대신해 대회사를 한 부위원장 진영옥은 “수배생활 몇 개월째를 맞는 이석행 위원장의 민주노총 조합원들에 대한 충정을 담아 대회사를 한다”고 말문을 열었다. 참석자들은 이석행의 충정을 가슴 뜨겁게 기다렸다. 대회 중간의 공연도 격렬했다. 광우병 촛불시위 이후 수세에 몰린 민주노총은 ‘명박산성을 넘어, 신자유주의를 넘어 현장에서 대반격을 시작하자’라는 상징공연을 대회 무대에 올리면서 참석자들의 투쟁을 선동했다. 노동자문선대와 함께 노동자들은 ‘반격’을 노래하자 열기가 최고조로 올랐다.
여느 해보다 대회가 길었다. 연설도 많았다. 하지만 지루하지 않았다. 참석자들은 긴장하며 연설과 공연을 가슴에 품었다.
“이석행 위원장 동지 인사말을 듣겠습니다.”
진행자의 말에 참석자들은 온몸이 파르르 떨려왔다. 사복형사들이 무대 주변으로 달려왔다. 투쟁가가 울렸다. 한 곡이 끝났지만 무대는 비었다. 두 번째 곡이 울렸지만 여전히 무대는 침묵이었다. 세 번째 투쟁가가 울렸다. 여전히 무대에는 아무도 오르지 않았다. 참석자들은 분위기를 고조시키려는 집회 기획자의 고도의 연출이리라 여기며 깊은 침묵으로 기다렸다.
그 순간 이석행의 목소리가 들렸다. 무대가 아닌 집회 대오 안이라 생각했다. 무대는 여전히 비었기 때문이다. 그때 이석행이 나타났다. 영상으로.
이석행은 그날 대회장에 나타나지 않았다.
집회를 준비한 사무총국 사람들도 그가 나타나리라 생각했던지 영상으로 위원장이 등장하자 낭패를 본 얼굴들이었다.
이 뒤에 민주노총에서 일어난 사건은 치욕이었다. 이석행을 숨겨주었던 여성 조합원을 민주노총의 한 간부가 성폭행한 일로 민주노총은 만신창이가 되었다.
두 집회를 소개한 까닭은 집회의 감동은 어디서 올까를 찾고 싶어서다. 단순히 수배 중인 위원장이 나타나고 나타나지 않고의 따지려는 게 아니다. 여기서 찾고 싶은 것은 마음이다. 무대에 오르는 사람의 마음과 무대 아래 사람의 마음이 하나가 되었을 때와 그렇지 않을 때를 찾고 싶어서다.
또 하나는 형식이다. 과연 형식이 집회에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될까? 두 집회의 규모나 형식을 시험 점수 매기듯 따지면 당연히 21세기 집회인 전국노동자대회가 뛰어났을 거다. 전노협 창립대회 때는 투쟁을 선동하는 상징공연도 없었다. 하지만 그 이후 투쟁의 전개는 어땠을까? 역사가 증명하니 굳이 그 답을 쓰지는 않겠다.
감동, 규모의 문제인가
미군 장갑차에 숨진 미선이 효순이 사건으로 일었던 촛불집회는 노무현 대통령 탄핵, 광우병 파동으로 이어졌다. 이제는 사안이 크든 작든, 촛불을 집회 형식으로 앞세운다.
백일 넘게 이어진 2008년 촛불도 열릴 때마다 감동의 도가니는 아니었다. 시청광장이 넘치게 사람이 모이면 감동이 컸다. 그렇다고 백만 명이 모인 집회에 비해 적은 수가 모였다고 감동이 적지는 않았다. 때론 대규모 촛불집회 때가 더 허탈했다는 사람도 있다.
노동자 집회도 마찬가지다. 80년대의 대부분 집회는 조건 없이 원천봉쇄였다. 그 봉쇄를 뚫고 모이는 일이 집회의 중심이었다. 그 시절 경찰을 뚫고 사람들이 많이 모일수록 감동이 더욱 증가했다.
요즘 들어 큰 집회보다는 농성장에서 열리는 작은 규모 집회에서 감동을 얻었다는 이들이 많다. 많이 모이는 집회일수록 감동은커녕 뒷말이 많다.
집회문화란 보이는 무엇에 있지 않다. 무대가 있고 없고, 연설이 많고 적고, 공연이 좋고 나쁘고의 문제가 아니다. 문화란 형식이 만들어 내는 게 아니라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공유하는 의식과 행동의 종합이다. 그래서 문화란 실체가 무엇이라고 확 까발릴 수는 없다. 유령처럼 그 시대를 지배하고 있을 뿐이다.
집회문화란 어느 누구의 의도나 뛰어난 기획자의 ‘재주’에만 기대지 않는다. 뛰어난 기획자는 공동체 구성원의 의식과 행동의 흐름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이다. 그 흐름에 맞춰 공간을 만드는 게 기획자의 몫이다. 공간에 채워질 내용은 바로 참석자의 몫으로 비워둘 때 집회가 주입식 전달이 아닌 모든 이의 말 그대로의 ‘집회’가 될 수 있다.
재능 많은 기획자는 참석자에게 많은 것, 훌륭한 것, 좋은 것, 세련된 것, 기똥찬 것을 보여준다. 그걸 통해 참석자에게 감동을 주입한다. 하지만 여기에 길들여지는 순간 참석자들은 관객으로 바뀐다. 갈수록 기획자에게 더 진한 감동만을 요구한다. 집회를 ‘참석’하는 게 아니라 집회를 ‘보러(구경) 가는’ 존재로 바뀐다.
스스로 참여하는 집회와 목적을 지니고 동원한 집회에서 받는 감동이 다른 이유도 여기에서 비롯한다.
감동은 사람이 만든다
감동은 어디서 오는 걸까. 행사내용, 무대, 공연, 연설. 물론 여기서도 올 거다. 하지만 감동의 전달 주체는 사람이다. 무대에 서는 사람은 무대 아래에 앉아 있는 사람한테 감동을 받고, 무대 아래에 있는 사람은 무대 위의 사람한테 감동을 받는다. 때론 무대를 함께 바라보고 앉은 동료의 손에서 찾는 이도 있다.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부를 때 서로 마주 잡은 손. 동료의 손바닥에는 구호를 외칠 때 얼마나 힘껏 주먹을 꽉 쥐었는지 손바닥이 땀으로 가득하다. 그 땀에서 어떤 말보다 진한 감동을 받는다.
집회가 끝나면 주최 측도, 참석자도 뒤풀이 술자리로 간다. 그때 집회 장소에 남아 쓰레기를 치우는 시민이 있다. 그 모습에 뭉클한 사람도 있을 거다. 무대와 음향을 밤늦도록 정리하는 노동자의 노동에서 감동이 오기도 한다.
어떤 형식도 사람이 전하는 감동을 따라 잡을 수 없다. 집회를 준비하는 사람과 참여하는 사람이 구분이 되지 않을 때, 더 큰 감동이 온다. 주최가 불분명했던 촛불집회나 희망버스가 이를 고스란히 증명한다. 전노협 창립대회 선봉대는 대회를 구경조차 못했다. 경찰에 맞서 싸운 게 다였다. 하지만 이들은 어느 누구보다도 그날 집회가 평생의 감동으로 남아 있다.
집회는 만들어가는 과정에 성패가 달려있다. 소수가 아니라 다수가 만드는 집회일수록 감동은 크다. 참석자의 많고 적음이 아니라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 같은 주제를 가지고, 발걸음 하는 사람이 많을 때, 그 집회는 목적의 달성 여부를 떠나 성공한 집회고, 감동이 넘치는 집회다.
집회문화, 그건 사람의 마음에 있다.
그 마음들이 한 곳에 모일 때 감동은 움튼다.
당신은 어떤 마음으로 집회를 참석하나요?
글 오도엽
판이 깨져도 싸우면 즐겁다
확 도는 데모꾼 이사라 _노동문화기획 판
뭔가 짠하는 거 없나
요즘 들어 상징의식이 이벤트화 돼버린 거죠. 그전까지만 해도 집회 참가자들이 노동자대회나 메이데이 하면 대동놀이 형식을 많이 고집했어요. 다 같이 어울려서 하는 게 한계에 부딪치다 보니까 상징의식화 되면서 이벤트화 되는 거죠. 보여주는 쇼. 그러다보니 기획자한테 항상 요구하는 게 참여자들이 같이 하는 것은 기본이지만 그거보다는 뭔가 보여 줄 짠하는 거 없나, 화려한 거 없나, 쇼 같은 느낌으로 자꾸 요구하니 기획하는 사람들도 힘들죠. 집회 마무리가 투쟁을 안 하는 대신에 뭔가 그래도 화려한 걸로 느낌을 주게끔, 자꾸 오더를 내려주니까 기획하는 사람 입장에서 김이 빠지는 거죠. ‘투쟁으로 마무리 되어야 맞다’는 사실이 있는 건데 말이죠. 투쟁으로 가기 위한 중간 매개로 행사를 하고 싶은데, 집회 끝나고 투쟁을 안 하니까 대신에 뭔가를 해라, 이러면 사실 고민하고 싶지가 않은 거죠.
모이는 것 자체가 어려웠던 시절에는 투쟁을 통해 공간을 확보하는 순간 감동스럽고 고맙고 행복스럽고 이런 거였죠. 진짜 건반 하나 들고 담 넘어서 집회 현장 들어가서 앰프 없이 대충 공연해도 사람들도 감동 받고 부르는 사람도 감동 받았죠. 이젠 빠방한 음향에 어떤 준비된 공연을 해도 사람들은 굉장히 식상해지는 거죠.
기획하지 말고 공간을 열어라
식상한 집회 형식을 탈피해서 뭔가 새로운 집회를 해보자. 문제는 집행부에서 받아들이지를 않는 거예요. 준비 주체가 어떤 기획을 해도 어렵거든요. 새로운 시도에 대해 겁나는 것도 있고. 집회 담당 주체의 강인한 의지로 약간의 자유를 얻어서 기획한다 할지라도 이거는 꼭 넣어야 되고, 뺄 수 없는 연설들이 있는 거잖아요. 노동의례를 뺄 수 없듯이 주최 측 대회사는 해야 하고, 오시는 분 연대사는 해야 되는 거고, 투쟁결의문 있어야 되는 거고. 이렇게 따지면 똑같은 거예요. 거기에 어떤 문화행사 배치하느냐, 가수를 뭔가 색다른 사람을 배치하느냐, 이런 문제지. 연설 자체를 없애지 않는 이상은 똑같은 포맷이거든요.
촛불이나 용산, 평택이 정말 자유로울 수 있었던 건 공간 자체가 확보 되었잖아요. 그 안에서 무대를 쓸 수 없어요. 무대가 없는 자체가 더 자유로울 수 있는 거거든요. 자신들이 뭔가 가져와서 할 수 있는 공간들이 확보되어 있다는 자체가 기존 집회를 탈피할 수 있다는 거죠. 사실 촛불 때도 무대 설치하고 이러면서 식상해지는 거죠. 무대가 없는 상황에서 돌멩이 주워 오고 흙 퍼다 나르고, 이런 부분들이 집회거든요. 사람들이 와서 뭔가를 할 꺼리가 있는 거. 자잘하게 거리 곳곳에서 자기가 하고 싶은 노래 부르고, 풍물 치고, 율동하고, 이렇게 자유스럽게 열려져 있는 공간들이 있으면 좀 더 다양하게 참여한 사람들이 고민해서 행동해요. 일단 (무대를 중심으로) 모아 놓고, 소리가 나야 되고, 연설을 해야 되고, 이런 순간 다 짜여 버린 거잖아요.
공연 못해도 기분 좋은 날
희망버스 때도 부산역이나 이런 데서 연설 듣고 공연 보는 것보다 뛰어다니는 것이 더 재미있었잖아요. 그곳에 가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은 굉장한 결의로 간 거잖아요. 일박이일로 먼 거리까지. 가서 날밤 새우면서 술을 먹든, 집회 참석하든, 싸우든 간에 내가 거기에 자발적으로 각오하고 결의하고 가는 부분들. 그 안에서 뭐를 해도 다 재밌거든요.
갑자기 (경찰이나 구사대와) 싸움 붙어서 공연 못하면 기분 좋아요. 그 상황이 멋(?)있죠. ‘빨리 나가 함께 싸우자!’ 이런 분위가 되죠. 그런데 집회 하다가 경찰과 합의가 안 되었으니 빨리 접어라, 빨리 끝내라. 이때 제일 열 받아요. 이 순간에 확 돌죠.
참여자를 괴롭히는 못된 공연자
몸짓 데모꾼 박현욱 _노동예술단 선언
무대 설치, 그럼 얼마죠?
문화의 생산과 향유의 주체가 최대한 같아져야 한다는 거죠. 그래서 저희 선언이라는 팀이 추구하는 것은 가급적이면 엘리트 문화적인 것들이 아니라 현장의 노동자들이 끊임없이 자기 집회건 뭐건 그 공간을 채워 넣게끔 하고, 유도하는 거예요.
이천년대부터는 힘들게 집회를 만들려고 하지 않는 거예요. 과거에는 공장에서 임단투 출정식을 해야 된다. 그러면 선언이 들어가요. 저희가 ‘무대를 여기다 놔야 한다’ 그러면 ‘(무대 만드는데) 사람을 몇 명을 보내야 할까요?’ 물었어요. 지금은 그게 아니라 ‘그럼 얼마죠?’ 이렇게 나와요. 공장에서 집회를 하면 공장 노동자들이 자신의 손으로 얼기설기 반생이 엮어가지고 무대를 만들고 그랬는데, 이젠 그럴 필요가 없는 거예요. 왜냐면, 이벤트사하고 계약서에 사인하면 끝나거든요.
현장 문화패가 전노협 시절에는 노동조합 조직하는데 핵심이었잖아요. 지금은 그게 귀찮은 일이 된 거예요. 문화패 모아야 되지. 연습하고 나면 밥값 줘야지. 관리 유지해야지. 그리고 문화패들이 말을 잘 안 들어요. 맨날 집행부 뭐하면 반기들지. 왜냐면 문화패들이 의식이 높을 수밖에 없거든요. 계속 연대 다니고 하니까. 그러느니 집회 때 전화하면 되는 거예요. 임단협 출정식할 때 율동패 필요하면 선언에 전화하는 게 편한 거예요. 그게 익숙해지고, 지금은 그게 아무 의심의 여지도 없어지고. 이게 집회 문화가 행사화 되는 것과 궤를 같이 하는 거죠.
집회 발언 절대 지겹지 않다
집회 때 발언이 많아 지겹다는 말은 원칙적으로 잘못된 거라고 생각해요. 저는 집회에 가서 듣는 발언이 감동적이었어요. 정말 많이 눈물도 흘리고. 그게 왜 그러냐면 발언이 생동감이 있었기 때문에.
‘지겹기 때문에 공연이 많아야 된다.’ 그게 틀린 말은 아니지만 공연으로 때우는 것은 옳지 못해요. ‘발언이 풍부한 게 집회 맞다.’ 중요한 것은 발언을 누가 하고 발언의 내용이 뭐냐가 중요한 거지. 막말로 이야기해서 김진숙 선배가 한 세 시간 떠들어도 지겹지 않아요. 근데 산별, 총연맹 위원장 이런 분이 마이크 잡으면 삼분만 들어도 지겨워요. 왜냐면 변화 없는 발언, 고민 없는 발언, 의례적인 행사치레 발언들이고, 숱하게 들어왔던 발언들이기에. 소위 말하는 그런 짱들의 발언을 배치해야 되기 때문에 시간이 없어 정말 생동감 있는 투쟁 발언들은 다 빠져요.
집회가 동원되는 순간, 춤추자 그러면 굉장히 싫어해요. 귀찮아하고. 어차피 시간 때울 거. 노동조합에서 출석체크 하니까 안 나오면 욕먹으니까 왔고, 시간만 채우면 되는데 앞에서 자꾸 하자고 그러니 짜증나죠. 집회 참여가 회사 업무의 연장이라는 개념도 있어요. 노동조합에 찍히기 싫어 집회 나오긴 했는데 앉아 있는 것도 짜증나 죽겠는데 ‘일어나서 합시다’하면 당연히 짜증나죠. 그 짜증이 누구한테 가냐면 집회 가자고 했던 간부한테 가요. ‘집회 나가면 자꾸 시키고 지랄이야!’ 그러면 간부들이 우리 조합원들은 이런 거 싫어한다. 이렇게 된다고요.
삼십년 노동자 문화의 산 증인
노동자집회 데모꾼 이준용_민주노총
지축을 울린 라면박스
87년 노동자대투쟁이 일어났는데, 당시 파업에 문화 프로그램이 다 빠졌죠. 처음에는 메고 다니는 커다란 녹음기에다 테이프 틀어 놓고 하루 종일 춤을 췄는데, 이것도 한두 시간이지. 그래서 담 너머 들어가서 율동을 가르치고, 이제 풍물을 가르쳤지요. 풍물이 없기 때문에 작대기 두 개 가지고 라면박스를 장구 대신 치면서 덩더 쿵따쿵 이랬죠. 처음에 열 명이 칠 때는 재미없다가 오십 명이 라면박스를 쳐버리면 소리가 어마어마해요. 그게 실내일 경우 지축을 흔들고 천둥이 울리는 소리가 나요.
그 다음에 시도한 것이 극이에요. 누구는 사장 역할하고 누구는 무슨 역할하고. 사람을 패는데 사실적으로 하라니까, 진짜 관리자가 여성 조합원 귀싸대기를 때리듯이 때려요. 이건 연극이 아니라 진짜 처절하게 때리고 맞고 울고 나중에는 부둥켜안고, 거기서 보는 사람이 다 울기도 하고. 파업이 장기화 되다보니 다른 사업장과 서로 돌려가면서 공연하고, 그게 연대투쟁의 계기가 되는 거죠. 이 힘이 지역노조협의회를 만들고 전노협까지 만드는 과정에서 일조를 했죠.
사람의 탑을 쌓아라
90년대 초반인가 성균관대학교에서 집회를 했어요. 풍물패 한 삼백 명 동원하고, 노래패도 백여 명, 미술패도 한 이십여 명 해서 여러 행사를 준비했었죠. 참여한 사람들도 금잔디 광장에 꽉 찼었고. 당시의 집회는 네다섯 시간 정도 되어 상당히 길었죠. 집회 마치고는 풍물치고 정문 바깥으로 나가고. 참여하는 모든 사람들이 집회를 함께 만들고 했던 거죠. 그 당시에 사람의 탑을 쌓는데 그게 잘 안되더라고요. 이삼십 명 동원해서 삼단을 쌓으려고 했는데 계속 실패해요. 거기에 참여했던 이삼백 명이 자발적으로 나와요. 기획이 예측했던 거는 삼단을 쌓으려고 했는데 그게 나중에 오단을 쌓게 되더라고요. 무너지려야 무너질 수 없게. 지도부가 설사 자체 준비한 역량과 프로그램이 부족했더라도 그것이 대중의 힘으로 더 큰 것을 만들어냈을 때 주는 감동은 그 어떤 감동보다 컸죠. 그리고 다른 어떤 예술적 기재나 도구를 활용하는 것보다 사람이 만들어내는 예술이 주는 감동은 어마어마하다는 것. 거대한 흐름들이 하나로 모여지고, 그게 쓰러지니까 더 모여 가지고 쓰러지지 않게 만들고, 그래도 올라가면 쓰러지니까 더 모여들고.
하여튼 저는 집회 기획할 때 핵심적으로 고민한 게 안타깝게도 대부분 실패가 많아요. 실제 대중의 상태를 고려하지 못했다든지, 아니면 연출이나 내용의 기법이 부실했다든지 해서. 요즘 같은 경우에는 워낙 시간이 짧아요. 대중들의 결단과 참여가 동원되려면 참여자의 생각과 의식이 정돈되고 그것을 변화하려는 의지가 생겨 행동에 도달하려면 세 시간에서 다섯 시간 정도 되어야 하죠. 요즘은 통상 한두 시간 안에 다중의 집회를 끝내야 하니, 스스로의 행동을 도모하기 전에 행사를 끝내든지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 때문에, 대부분의 경우는 실패를 하죠. 결국 가장 핵심은 사람을 관리하고 조직하는 거거든요. 그게 빠지면 어떤 훌륭한 기획안이라도 승리를 담보할 수 없다고 봐요.
노동조합 문화의 현주소
현재 (민주노총) 간부들의 문화에 대한 태도와 인식은 투쟁의 한 수단과 도구로 바라보고 있고, 크게 보면 이벤트 정도로 바라본다고 할까? 과거에 문화를 만드는 과정, 문화패를 양성하는 과정이 간부를 양성하는 과정이고, 투쟁을 조직하는 과정이고, 연대투쟁의 주요한 고리가 되기도 했다면 지금은 하나의 이벤트, 조금 더 멋지고 조금 더 대중이 참여해서 할 수 있는 것들을 요구하지만 그 정신과 내용이 빠진 것을 바라보지 못하고 있죠.
전노협 때는, 지노협마다 문화 담당자가 상근으로 없는 곳이 없었죠. 서노협 같은 경우에는 상근 부장까지 포함해서 다섯 명이 있었던 적이 있었고. 지금은 총연맹 문화 담당자 회의를 하면 금속, 전교조, 공무원, 보건 요렇게 되고, 공공운수는 문화 담당자는 아닌데 역할을 하는 사람이 참여하고. 지역본부는 열여섯 개 본부 가운데 다섯 개 지역본부에 문화 담당자가 있는데, 그것도 세 가지 역할 중에 하나로. 총연맹 안에서 문화사업의 지위와 역할이 어떤가는 이걸 보면 알 수 있죠.
틀에 저항하는 자유로운 영혼
희망버스 데모꾼 신유아 _문화연대
가수 이승환과 용산참사
내가 감동으로 느꼈던 것은, 용산 철거민들이 경찰에 죽임을 당했을 때야. 처음에 사람들이 확 붙었다가 점점점점 빠져나가기 시작할 때야. 그때 용산참사 희망콘서트를 한번 해보자 했어. 기획하고 뮤지션들한테 연락을 쭉 돌렸는데, 공연비 이런 자체가 없었는데, 흔쾌히 하겠다는 거야. 가수 이승환 같은 경우는 본인이 직접 전화를 했어. 다른 뮤지션들 섭외하니까 어떻게 알고 자기도 참여하고 싶다는 거야. 그래서 내가 그때 튕겼잖아. 라인업이 다 차서 한 번 얘기해보고 다시 연락 주겠다. 사람들한테 이야기 했더니 다들 당연히 오케이래. 그때 이승환이 내겐 쇼킹한 사람이었어. 콘서트 끝나고 나서 며칠 있다가 이승환이 용산참사 관련한 일이나 유가족에게 쓰라고 꽤 큰돈을 보내왔어. 그때 용산참사가 운동권들만 하는 게 아니구나. 그런 생각이 처음 들었어. 대중적으로 이렇게 인기 있는 사람도 용산에 관심이 있는데, 다들 어떤 식으로 참여해야 하는지 잘 몰라 주저하고 있구나.
그 공연보기 전까지만 해도 용산참사 현장에서 음악은 금지였어. 사람이 죽었는데 어떻게 풍악을 울리냐 그래가지고. 유족들이 다 반대를 했거든. 근데 콘서트 이후에는 뮤지션 오는 것에 대해 아무도 뭐라고 한 사람들이 없고, 오히려 왜 안 오냐고 물어볼 정도. 시각이 바뀐 거지. ‘투쟁은 굉장히 다양한 방식들이 있는 거구나’라는 걸 유가족이 알게 된 거 같아.
정치인이 싫어하는 기획자
내가 기획한 집회에는 당사자, 그것도 ‘급’ 있는 사람들이 아닌 진짜 일반 참가자들이 되도록 올라갈 수 있게 가장 신경을 많이 써. 특히나 정치인들이나 대표급 이런 사람들의 발언은 되도록 안 넣으려고 노력해. 왜냐면 그 사람들은 이야기할 장소들이 많고, 설 공간들이 너무나 많아. 근데 일반인들은 설자리가 없다고. 참가자들이 집회의 당사자고 주쵠데 그 사람들이 늘 관객으로만 존재하잖아.
난 정치권이나 노동단체에서 문제제기 굉장히 많이 받아. 현장에서 싸운 적도 많아. 자기네 발언 안 시켜준다고 말이야. ‘니가 나한테 욕하려면 욕해라. 원래 이 집회는 처음부터 기조가 당신네들 올라가는 게 아니었다.’ 이러지. 내가 눈도 마주치지 않으니까 사회자한테 가서 조르고 어르고 해.
희망버스가 특별한 까닭
너무 뻔히 보이게 동원되는 집회는 안 했으면 좋겠어. 희망버스 하면서 민주노총에서 일 년 살다보니 그 조직문화가 어떤 건지 많이 알게 됐어. (상급단체에서) 지침을 때렸을 때만 움직여. 굉장히 중요한 집횐데 지침이 없으면 안 움직여. 뭔가 내려와야지만 움직이는 사람들이 돼버린 거야. 만약에 (동원되어) 와도 이 사람들은 불만인 거야. ‘집회 가면 앉아만 있다가 오고 아무것도 안한다.’ 그게 불만인 거야. 근데 스스로 움직이질 않아. 불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움직이질 않아.
집회라는 게 뭐야. 소리를 내는 거잖아. 근데 우리의 소리를 내는 것이 아니라 집행단위의 소리만 내고 가니까 그게 문제라는 거지. 위에서 지침 때리니까 올라오는 거야. 이 사람들이 와서 뭔가를 발산하고 표현하고 갈 수 있는 장이 아니라는 거지. 와서 쭈그리고 앉아 있다 가는 장이지. 만약 오만 명이 모였으면 멀뚱멀뚱 보고 가는 게 아니라 그 지역마다 자기들이 할 수 있는 거 만들어서 오라고 하면 되잖아. 그런 지침은 한번도 내린 적이 없거든. ‘몇 명 만들어 와. 버스 몇 대’ 이런 거잖아. 지역에서 타고 올라오는 버스라고 꾸며가지고 올라오라고 하면 되잖아.
희망버스와 조직운동에서 하는 집회의 차이가 뭔 줄 알아? 조직운동은 판을 다 짜놓고, ‘짜놨으니까 옆에 와서 부대행사 해라’ 이거야. 근데 희망버스는 이걸 하려고 하는데 ‘어떻게 만들었으면 좋겠냐’ 이렇게 제안을 하거든. 그러면 그 사람들이 아이디어를 주는 거야.
롯데백화점 비정규직 노동자

지하 노동자에게는 한 가닥 빛도 없다
근로기준법도 무시하고 결혼 앞둔 이에게 계약종료 통보
롯데백화점 유일한 민주노총 사업장 … 48곳, 도미노 현상 두렵다
환한 조명과 번쩍이는 대리석, 그리고 사람의 마음을 유혹하는 상품들이 가득한 백화점. 그곳에서 일하던 노동자들이 아프다. 연말연시를 앞두고 시민들의 발길이 백화점으로 무수히 이어지던 날, ‘근로계약종료통보서’ 받았기 때문이다.
웨딩 촬영 때 웃지 못했다
2011년 12월 22일 롯데백화점 창원점에서 시설관리를 해오던 노동자 35명 전원은 아흐레 뒤인 그달 31일자로 해고 통보를 받았다. ‘사용자는 근로자를 해고(경영상 이유에 의한 해고를 포함한다)하려면 적어도 30일 전에 예고’하여야 한다는 근로기준법조차도 필요 없었다. 생계의 대책을 세울 시간조차 주지 않고 한겨울에 거리로 내몬 것이다.
이들은 백화점을 화려하게 보이도록 하는 일을 했다. 백화점을 찾는 고객이 겨울에는 따뜻하게, 여름에는 시원하게 쇼핑을 할 수 있도록 냉온방기를 관리했다. 진열대의 상품이 더욱 빛나게 조명을 관리했다. 더럽혀진 곳이 있으면 화사하게 페인트를 칠했다. 하지만 이들이 있는 곳은 화려함과는 거리가 먼 백화점 지하5층이다. 뿌연 먼지와 혼탁한 공기를 마셔가며 상품의 화려함을 위해 묵묵히 어두운 곳에서 살았다.
스물여덟 김종기 씨(가명)는 한 달 뒤 결혼식을 앞둔 예비신랑이었다. 결혼 청첩장을 돌리며 가정을 꾸린다는 꿈에 부풀어 일터에 들어섰는데, 마주한 것은 축하의 말이 아니라 해고통지였다.
김종기 씨는 웨딩촬영을 하면서도 웃을 수가 없었다. “신부를 위해서라도 환하게 웃어야 하는 얼굴 뒤로 뒤죽박죽인 마음 한 곳에 말로 할 수 없는 공허함”이 밀려들었다.
해고자가 되어 결혼식을 올린 김종기 씨는 여전히 해고자다. 아내가 벌어오는 수입으로 끼니를 해결하고, 차비와 용돈을 받으며 농성장으로 출근한다.
김종기 씨를 만난 날은 농성 82일째인 3월 13일 백화점 오픈을 앞둔 오전이었다. 해고 노동자들은 롯데백화점 창원점 앞에서 피켓을 들고 구호를 외치고 있었다.
노부모 요양원 보낸 불효자
출근 선전전을 마치고 농성장 천막에 들어온 마흔셋 이상구 씨. 창원에 롯데백화점이 오픈하던 날부터 일해 왔다. 벌써 10년의 시간이 흘렀다. 미혼인 이상구 씨는 몸이 불편한 노부모를 모시며 진해에 살고 있다. 지금 그는 부모님을 모실 수 없어 요양원에 보냈다.
“롯데백화점이 소박하게 살아가는 노동자들의 목을 잘라 가정에 심각한 파탄을 일으킨 것은 사회의 지탄을 받아야 마땅합니다. 대기업으로서 사회적 책무를 하기는커녕 임금이 몇 푼이나 된다고 힘없는 노동자의 삶을 짓밟는 것은 사람의 할 짓이 아니죠. 저도 부모님을 모시고 소박하게 살아가고 있었는데, 부모님을 요양원으로 보내고…. 비참하고, 정말 서럽습니다.”
시설관리에서 일해오던 노동자들은 용역업체 소속이다. 10년 동안 세 번 용역업체의 이름이 바뀌었지만 일하던 이들의 고용은 보장되었다. 10년 동안 계약이 갱신된 자신들은 ‘무기계약직’이라고 말한다.
해고된 노동자들은 자신들을 거리로 내몬 것은 용역업체가 아니라 롯데백화점 경영진이라고 말한다. 26일에 용역회사는 ‘경영이 어렵다’고 롯데백화점에 사업 포기 각서를 제출했다. 그리고 단 5일 만에 롯데백화점은 새 업체를 선정했다.
이상구 씨는 “이렇게 노동자가 대응할 틈도 주지 않고 단 오일 만에 새 용역업체를 선정한 것을 보면 이미 롯데백화점과 용역회사 간에 짜고 치는 고스톱이 아니겠느냐”고 한다. 실제로 경영이 어렵다고 포기 각서를 낸 용역회사의 계약기간은 2012년 1월 3일까지로 열흘도 남지 않은 상태였다.
유일한 민주노총 사업장 우려
창원시는 지난 2월 20일 김정부 부시장을 롯데백화점 본사에 파견하여 문제해결을 촉구하였다. 이날 김 부시장과 면담을 한 롯데쇼핑 백화점 사업본부 신헌 대표이사는 “사태 심각성을 인식하고 지역여론을 수렴하겠다”며 “임원을 창원으로 보내 빠른 시일 내에 해결하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아직까지 협상의 진전은 없다. 해고자들은 “석 달이 되어가건만 롯데백화점과는 전혀 접촉이 없었다”고 한다. 3차례에 걸쳐 협상에 나선 용역업체 경영진은 ‘5명 만을 선별적으로 복직 시키겠다’는 입장이고, 노동자들은 ‘농성 중인 14명의 전원 복직’을 요구하고 있다.
농성 중인 노동자는 “롯데백화점이 나서지 않고서는 이 문제가 해결이 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전국 48곳 롯데백화점 가운데 민주노총 소속인 노동조합은 정규직, 비정규직 조합을 통틀어 이곳(민주노총 일반노동조합 롯데백화점 비정규직지회)이 유일하다. 민주노총 소속이었던 노동조합들이 있었으나 한국노총이나 기업노조로 전환한 상태다.
이상구 씨는 “지난해 롯데백화점 대전점에서 민주노총 소속 노동조합이 만들어지자 벌어졌던 탄압과 현재 창원점 상황이 같다”고 말한다. 또한 “새 용역업체가 계약 해지된 사람 가운데 민주노총 조합원은 고스란히 빼놓고 한국노총 소속 조합원과 비조합원들만 재고용했다. 이 사실을 보더라도 롯데의 민주노조 탄압 정책 말고는 달리 이해될 수가 없다”고 주장한다. 비정규직지회는 창원에서 백화점이 오픈한 해에 설립되었다.
김종부 부시장도 신헌 대표이사를 면담한 뒤 언론과 만나 “롯데는 (창원점) 하나가 (민주노총에) 무너지면 (다른 백화점도) 다 무너진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며 “도미노 현상이 일어날 것을 크게 우려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롯데백화점 창원점 주차장 앞에는 다섯 살 난 아이를 둔 비정규직 노동자 부부가 한 날 한 시에 해고되어 농성장을 지키고 있다. 해고로 생계가 어려워지자 마을 어귀에서 붕어빵 장사를 시작한 아내를 미안한 마음으로 바라보며 남편은 농성장으로 출근한다. 지하 5층에서 하루 11시간씩 밤낮으로 일했지만 이들이 받았던 돈은 300%의 상여금을 포함해도 정규직 노동자의 절반 수준이었다. 하루빨리 롯데백화점의 화려한 조명이 농성중인 비정규직 노동자의 삶에도 비춰지기를 바란다.
글 오도엽
사진 참여와혁신 봉재석 기자
아버지를 여의고 이소선을 만났다.
이른 아침에 감나무에 올라 잔가지를 정리하고, 마당에 떨어진 감잎마저 깨끗이 쓸었던 아버지는 홀로 걸어서 병원에 갔다. 그리고 보름 뒤, 아버지는 붉게 익은 감을 보지 못할 곳으로 떠났다.
감나무가 주렁주렁 등불을 밝히고 있는 그해 가을에 이소선을 만났다. 이소선의 방은 전태일기념사업회 사무실 아래층에 있었다. 창문을 열고 사무실에 앉아 있으면 엄마의 방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고스란히 알 수 있다. 전화 통화며 텔레비전 소리가 스멀스멀 올라온다. 이소선은 밤이 깊을수록 정신이 맑아지고 기억도 또렷해진다. 낮에 토막잠을 자는 습관 때문만은 아니다. 이소선은 밤이 그립다. 아니 밤은 그리움의 정체와 함께 이소선을 깨운다.
글이 써지지 않는 밤, 모니터와 눈씨름을 하고 있으면 창문너머로 주절주절 이야기 소리가 들린다. 이 오밤중에 사람이 찾아올 일도 없는데 말이다. 조심조심 엄마의 방으로 내려가 열린 문틈으로 불 꺼진 방을 훔쳐본다. 이소선이 성경책을 머리맡에 두고 무릎을 꿇은 채 엎드려 기도를 하고 있다. 귀를 쫑긋 세우고 무슨 소린가 듣는다. 기도가 아니다. 누군가와 끝없는 이야기를 나눈다.
“어머니 주무셔야지?”
“아이쿠 깜짝이야. 써글놈아, 놀랬잖아. 근데 약을 먹었는데도 잠이 안 온다.”
이소선은 신경안정제를 먹지 않으면 잠들지 못한다. 벌써 마흔 해를 밤과 씨름하고 있다. 가슴에 불이 일어 약 없이는 잠들 수 없다고 한다. 어떤 날은 약을 먹어도 잠들지 못한다.
“여기 파스 좀 붙여라.”
이소선이 겨드랑이 위로 내의를 바짝 추켜올리며 등을 내민다.
“비 온다 했냐?”
“비는 무슨 비, 별이 총총하구먼.”
“아니 무슨 사단이 있지, 그냥 이리 아플 리 없다.”
“기계가 낡아 그런 거지. 괜한 날씨 탓이야.”
“이 써글놈. 내가 말하면 고분고분 한 적이 없네. 그러니 니를 건다리(건달)라 부르지.”
이소선의 몸을 파스로 도배한 날은 거짓말처럼 비가 온다. 몸을 점령한 파스의 면적이 강우량과 정비례한다. 기상청 예보가 이소선의 몸을 쫓아가지 못할 때도 있다. 이소선의 몸은 독재와 맞선 한국현대사가 새겨져 있다. 군홧발에 이겨져 살갗 곳곳이 패여 있다. 정강이뼈가 움푹 들어간 곳도 있다. 이소선의 다리를 주무르면 여든의 삶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이제 바짝 말라버린 종아리 살은 흐물흐물하고, 뼈는 마른가지처럼 뚝하고 부러질 것 같다.
이소선의 몸을 주무르다 검게 탄 심장을 만난다. 아니 이미 타버려 텅 비어 있을 이소선의 심장. 그래서 이소선의 숨은 깊은지 모른다. 말 중간 중간 ‘푸우’하며 내뿜는 한숨, 그 한숨과 한숨 사이의 숨결이 이소선의 진짜 목소리다.
엄마의 방에 주저앉아 엄마의 밤을 녹음기에 담았다. 그렇게 오백 날을 이소선이 해준 밥을 먹으며 살았다. 집회 장소에서 쩌렁쩌렁하게 연설하던 노동자의 어머니가 아닌 쭈글쭈글 한 살갗을 마주했다. 틀니가 시원찮아 잇몸으로 오물오물 밥을 녹여 먹던 이소선을 보며 소리 너머에 존재하는 ‘어머니’를 만났다.
이소선의 구술을 받아 적어 <지겹도록 고마운 사람들아(후마니타스)>을 펴낸 지 얼마 안 된 때다. 딱 삼년 전 오늘쯤이다. 태준식이라는 사람한테 전화가 왔다. 이소선을 카메라에 담겼다고 한다. 고마웠다. 활자로 나타낼 수 없는 이소선의 숨소리와 몸을 기록할 수 있는 기회였다. 그리고 기뻤다. 육백 날을 이소선 곁에 있었던 것도 나 같은 ‘건달’에게는 미칠 노릇이었기 때문이다. 엄마의 방에 태준식이 들어서던 날, 올 커니 싶어 도망쳤다. 태준식은 나처럼 건들거리지 않고 우직하게 기록했다. 오백 날을 주야장창 엄마의 방에 카메라를 드민 태준식. 결국 사고를 쳤다.
태준식은 나쁜 놈이다. 그가 들고 온 카메라는 사람의 몸과 행동만이 아니라 몸속을 촬영하는 ‘몰카’였다. 근로기준법을 지키라며 불꽃이 된 노동자 전태일. 전태일을 자신의 몸으로 잉태한 어머니. 태준식의 렌즈는 타버린 아들의 시신을 부둥케 안고 거리로 나선 이소선을 향해 다가가지 않았다. 방사선과 의사처럼 몸뚱이 구석구석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어머니와 함께 밥을 먹는 순간에도 쉼 없이 이소선의 내면을 쫓았다. 노동절 집회가 한창인 순간에 어머니와 고스톱을 치면서도 판돈보다는 이소선이 꺼낼 패를 읽었다.
이뿐만이 아니다. 태준식은 기억 너머에 존재하는 가상을 찍는 마법의 렌즈를 장착하였다. ‘팩트’를 기본으로 하는 다큐멘터리에 감히 마법의 지팡이를 휘둘렀다. 이소선의 삶은 몽상처럼 아득하다. 이미 마흔 해 전에 떠난 아들 전태일과 한밤중에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이소선에게 일반 카메라는 무용지물이다. 이소선은 내게 묻곤 했다. ‘내가 죽으면 태일이가 날 만나줄까?’ 태일이와 만날 날만을 기약하며 살아온 사람이 이소선이다. ‘어머니, 내 못다 이룬 꿈 이뤄주세요. 꼭 이루어 줄 수 있다고 대답하세요.’ 마지막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약속, 약속을 해달라고 애원한 태일이의 목소리를 귀에 쟁쟁하게 달고 살아온 이소선이다.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하늘나라에서 어머니를 만나지 않겠다’며 어머니한테 ‘모진 다짐’을 받는 아들과 그 약속에 다짐한 어머니. 이 기막힌 현실 앞에 모든 카메라는 늘 오프일 수밖에 없다. 태준식의 렌즈가 빛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지난겨울 <어머니> 시사회 때, 갈까 말까 주저했다. 태준식이 처음 이소선 앞에 카메라를 꺼낸 날, 난 태 감독이 무엇을 찍을지 알았기 때문이다. 카메라 렌즈가 이소선을 직시하지 않고 맴돌기만 할 때 지독한 영화를 만날 것 같다는 생각이 엄습했다. 갈등을 하다 시사회 장소에 도착하니 이미 영화는 시작되었다. 얼마나 보았을까. 새근새근 잠든 이소선이 스크린에 나오는 순간, 나는 밖으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 깊게 담배연기를 빨지 않고서는 버틸 수 없었다.
다시 <어머니>에 도전한 것은 올 초 전라도 광주의 한 중학교였다. 조잘거리는 학생들 틈에 앉았다. 자막이 오르고 응급차 사이렌이 배경음악과 함께 흐르는 순간, 화장실로 달려갔다. 꺼이꺼이 짐승의 소리를 내뱉다가 결국 속에 있는 것을 변기에 다 게워냈다. 사이렌이 향한 곳이 어딘지를 알기 때문이다. 크레인에 매달려 있는 김진숙을 만나러 가야 한다던 이소선을 방문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한 당사자 중의 하나가 나였다. 간절히 가고 싶다고 했건만 몸이 좀 나아지면 언제든지 모시고 가겠노라고 말렸다. 그런데 그 말림의 시간이 열흘 남짓 지났는데, 이소선은 숨을 멈췄다. 다시 호흡은 돌아왔는데, 말도 하지 않고 눈도 뜨지 않고 쌕쌕 잠만 잤다.
홀로 골방에서 노트북으로 DVD를 보려던 시도는 실패했다. ‘작은 천사’ 소선의 거대한 삶을 그리기에 너무 비좁았다. 결국 나만의 상영관을 만들어 <어머니>를 봤다. ‘나만의 상영관’에서 신경을 쓴 것은 사운드였다. 가수 이아립의 가사와 가사 사이의 호흡이 살아야 했고, 배경음악뿐만 아니라 바람소리 물소리가 이소선의 타버린 심장의 떨림으로 들리는 곳이어야 했다. 마지막으로 고요의 순간에 감춰진 소리를 찾아 들려주는 스피커를 찾는데 애를 먹었다.
102분짜리 <어머니>를 보는데 장장 네 시간이 걸렸다. 쉼 없이 화면을 정지시키고 멍하니 있어야 했다. 화면 속 이소선이 계속 내게 말을 걸었다. 태일이와 두런두런 속삭이던 그 밤처럼. 갓 뜯은 담뱃값은 영화가 끝나기도 전에 꾸겨졌다. 그런데 자막이 다 올라가고 까만 어둠이 화면을 가득 메우자 편안함이 찾아 왔다. 2011년 9월 3일 이소선의 숨이 멈추던 날 하지 못한 말을 그제야 건넬 수 있었다. ‘엄마 안녕’
가볍지 않은 삶이라 <어머니>가 아프거나 무거우리라 예단하는 것은 착각이다. 굵은 삶의 언저리에서 살짝 비켜 선 이소선을 마주치는 순간 웃음이 팡팡 터질 것이다. 남의 팔목에 매달려 지팡이를 띄엄띄엄 짚으며 걸어가는, 아니 매달려가는 이소선을 볼 때는 진한 여운이 당신의 눈을 스크린에 고정시킬 것이니까. 흑백의 사진이 흐를 때는 묵직한 서사시를 마주하는 울림이 퍼질 것이고, ‘하나가 됩시다, 하나가 됩시다’를 외칠 때는 심장박동 소리가 커지며 머리카락이 하늘로 치솟는 짜릿함을 맛 볼 것이니.
<어머니>야 말로 기록영화가 가야할 방향을 정확하게 가리키고 있다. 기록은 기록너머에 존재한다는 걸 고스란히 증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보이는 것 너머에 존재하는 감춰진 삶을 영화의 언어로 또박또박 적었다. 들리는 목소리에 억눌려 숨죽이던 잔잔한 소리들이 리얼하게 살아났다. 한국현대사와 노동운동사의 굵직한 사건을 이소선의 몸에 피어난 검버섯과 깊은 주름으로 들추어 낸 <어머니>는 기록만이 지닐 수 있는 독특한 상상력을 아낌없이 뽐내었다.
영화를 보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은 이 글을 쓰는 순간이었다. 너무 속속들이 알고 있는 이야기를 나 아닌 타자가 기록해서 전달할 때, 그런데 그 전달이 내가 ‘속속들이’로 여겼던 것을 무참히 뭉개고 나타날 때, 난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에 수긍하는 시간은 내가 어머니의 몸속으로 더 깊숙이 들어가는 과정이었다.
솔직히 <어머니>에 대해 말하기가 어려웠던 까닭은 태준식 감독 때문이다. 영화 곳곳에 감독이 흘려야 했던 눈물이 고스란히 이슬져 있기 때문이다. 오백 날을 엄마의 방에 스며든 사람만이 아는 연민이 태준식과 나 사이에 흐른다. 그래서 함부로 글로 옮길 수 없는 그 무엇이 있기에 아팠다.
이소선이 아들 곁으로 돌아가던 날, 난 흙바닥에 무릎 꿇고 꺼이꺼이 울었다. 울 수 있었던 난 복 많은 놈이었다. 태준식은 울 수 없었다. 눈물을 흘렸다면 <어머니>는 세상에 영원히 나오지 못했을 거다. 감독의 복받치는 울음마저도 멈추며 세상에 드러난 게 <어머니>다. 그게 이소선이다.
글 / 오도엽 _ 씨네21에 보냄
새누리당 텃밭에서 신호등마저도 바꾸는 기능공
“나는 서울대 나온 지식인이다. 나는 노동운동을 하기 위해 기능공으로 취업했을 뿐이다.”
1987년 4월 경남 창원시에 있는 (주)통일 노동자들이 모인 자리에서 문성현이 한 말이다. 문성현은 대학 다닌 학력을 이력서에 기재하지 않고 ‘위장취업’을 했다는 이유로 이날 징계위원회가 열릴 예정이었다. 해고가 될 것이고, 사문서 위조로 감옥에 갈 처지였다. 전두환 정권 시절에 위장취업은 ‘빨갱이’, ‘용공분자’와 같은 의미였다.
“대학 졸업자는 반드시 사장만을 위해 일하란 법이 어디 있느냐. 우리에게도 대졸 기능공이 필요하다.”
(주)통일 노동자는 문성현을 품었다. 그날 공장 식당에 바리케이드를 치고 파업농성에 돌입하였다. ‘위장’ 노동자로 살던 노동자 문성현이 대한민국 노동운동사에 화려하게 등장했다.
지난 3월 13일 새벽 6시 30분, 문성현이 살고 있는 창원시 팔용동의 아파트를 찾았다. 봄을 시샘하는 추위에 발을 동동 구르며 있는데 현관문이 살며시 열리며 문성현이 나타난다. 얼굴에는 피로가 역력하다. 촌각을 다투며 창원시 주택가에서 공단으로 들어가는 관문인 명곡로터리로 간다.
문성현은 지난 19일 창원시 의창구 국회의원 선거 야권단일후보가 되었다. 바로 옆 창원시 성산구에는 민주통합당, 통합진보당, 진보신당 세 후보가 한 치의 양보 없이 치열한 반면, 이곳은 후보 간에 단일화 합의를 일치감치 하였다. 성산구와 달리 이 지역구는 새누리당의 탄탄한 지역기반이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명곡로터리에 선 문성현은 지나가는 차량에 구두 끝에 머리가 닿을 정도로 허리를 굽히며 인사를 하거나 흰 장갑을 낀 두 손을 힘차게 흔들기도 한다. 그를 알아보는 이는 빵빵 경적으로 지지의 뜻을 밝히며 지나간다. 로터리 신호등이 바뀌기도 전에 문성현은 동서남북으로 몸을 돌린다. 문성현이 방향을 돌리면 신호등이 따라서 바뀌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다. 새누리당의 텃밭에서 진보정치를 뿌리려고 얼마나 많은 열정을 쏟았는지가 전해진다.
여당 명함이 아니면 거들떠보지도 않았다던 이곳에서 이제 문성현의 손을 덥석 잡는 장면은 쉽게 마주칠 수 있다. 의창구의 정치판에 균열이 일어나가 시작했다. 이미 새누리당을 앞선다는 말도 들린다. 하지만 문성현은 여전히 바쁘다. 그의 잰걸음이 때론 쫓아가야 하는 조급함처럼 보이기도 한다.
출근하는 시민을 만난 문성현은 선거사무소 옆에서 해장국으로 추운 몸을 녹인다. 밥숟가락을 뜨는 속도는 더디다. 손전화로 문자를 보내고 전화를 거느라 바쁘다. 결국 밥은 남기고 국물만 비우고 일어선다. 등록금과 일자리 걱정 없는 세상을 약속하려고 창원대학교 정문으로 달려간다. 등굣길 대학생들에게 노동자 문성현은 국회의원 후보 문성현으로도 낯설지 않은 듯하다. 그를 알아보고 인사를 건네는 이도 있다. 어느덧 쌀쌀했던 아침 바람은 봄 햇살에 밀려나고 있다. 다음 일정을 향해 자리를 뜨는 문성현의 등에도 햇볕이 드리워졌다.
오도엽 씀
국가공권력에 방사능 피폭을 당한 쌍용차 노동자들
[희망광장 인터뷰] 정신과 의사 정혜신
“폭력이란 것이 왜 무섭냐면 그 순간에 방사능 피폭되는 거랑 마찬가지예요.”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와 그 가족들을 심리 치유하는 정혜신 박사. 2008년 공장에서 농성중인 쌍용자동차 노동자에게 경찰과 회사가 행한 행위는 방사능 피폭과 마찬가지였다고 한다. 방사능에 쏘이면 디엔에이와 세포가 변형이 되듯, 쌍용자동차 노동자에게 가해진 폭력은 정신과 삶을 망가뜨렸다는 것이다.
‘정리해고와 비정규직 없는 세상을 향한 99%의 희망광장(희망광장)’ 여드레째가 되는 날, 평택에 자리한 ‘심리치유센터 와락’에서 정혜신을 만났다. 쌍용자동차 열네 번째 희생자 소식을 듣고 평택으로 달려온 정혜신은 “너무 늦게 찾아와 미안하다”고 하였다. 그리고 꼬박 일 년이 지났다. 토요일마다 이곳에 찾아와 해고 노동자와 가족을 만나며 함께 울고, 함께 분노했다. 자그마한 몸의 정혜신이 억센 노동자의 거친 삶을 품기 시작했다.
정혜신은 물었다. “요즘 어떻게 사세요.” 노동자들은 말했다. 나는 노동조합 간부이고, 어떻게 싸우고 있다는 걸. 정혜신은 다시 물었다. “그런 이야기 말고 요즘 어떻게들 사시느냐고요.” 갑자기 노동자의 눈에서 굵고 짠 눈물이 하염없이 쏟아졌다.
홀로 가슴에 품었던 응어리가 정혜신을 만나며 터져 나왔다. 와락을 찾은 이들은 결코 자신이 혼자가 아니고 하찮은 존재가 아니라는 걸 소통과 공감을 통해 깨우쳤다. 자신의 삶에 어느 날 순간적으로 찾아온 방사능 피폭에서 차츰 차츰 새 살갗이 돋아나고 있다. 상처 입은 가지에도 새순이 움트듯.
“쌍용자동차 공장 안에서 77일간 싸우는 동안 물도 끊기고, 전기도 끊기고, 너무나 날카롭고 극단적인 일이 벌어졌어요. 밤에 자지 못하게 계속 방패를 두들겨 공포를 일으키고, 정상적인 형태가 아니었죠. 노동자들이 싸우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거죠. 하지만 국가 공권력은 그 실체가 명확하지 않고 가공할만한 힘을 가지고 있죠. 이 힘이 와장창 깨놓고 싹 빠지면 사람의 심리가 어떻게 되냐면 가해자는 보이지 않는데 피해자만 남아 있는 상황인 거예요.”
공장에서 쫓겨나 거리로 내몰린 노동자는 자신에게 공권력이라는 가해자 대신에 자신과 가족과 동료들을 미워하게 된다. 차츰 주변과 관계가 끊어지고 끝내는 죽음을 선택하게 된다. 유독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의 희생자가 많은 이유는 여기에서 비롯한다. 바로 국가 공권력이 훑고 지나간 살인적인 진압. 이 경험은 적군과 아군을 구별하지 못한 채 싸워야 했던 ‘베트남 전쟁’과 같은 경험이라고 정혜신은 말한다.
말기 암 환자보다 에이즈 환자에게 자살이 높단다. 에이즈 환자에게는 “관계의 소멸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관계의 소멸은 “사람에게 죽음과 같다”고 한다.
“관계가 끊기면 사는 게 아니라 죽음인 거니까. 왕따 당하면 사람이 죽잖아요. 고문당해서 목숨을 끊는 사람보다 왕따를 시키면 그 사람이 목숨을 끊을 확률이 더 높아요. 나는 이렇게 처절히 고통스러운데 세상은 내 고통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완전히 끈이 끊어졌다.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 그렇게 되는 거죠.”
해고는 단순히 일터에서 쫓겨나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해고를 겪는 순간 사회관계는 물론 인간관계마저 끊긴다. 지금 서울광장에는 일터에서 쫓겨난 이들이 죽음이 아닌 삶을 위하여 찬바람에도 비닐 덮인 천막에서 한껏 몸을 웅크리고 잠을 자고 있다. 나비가 되어 푸른 하늘을 훨훨 날 그날을 준비하는 누에고치처럼.
정혜신은 쌍용자동차 노동자와 만나면서 민주노총과 금속노조의 필요성을 깨우쳤다. “임금투쟁 할 때나 집회를 보면 좀 딱딱하고 고지식하고 투쟁 일변도”라는 느낌을 갖았다.
“(억울해서 미칠 것 같은 노동자의) 최소한의 목소리를 내줄 수 있는 게 금속노조나 민주노총의 집회 현장이라고 생각해요. 그 싸움이 있기에 죽지 않고 버텨낼 수 있는 사람이 꽤 있었다고 보는 거죠. 이 집회가 없었으면 스물한 명이 아니라 더 죽었을 수도 있죠. 그 방식이 딱딱하네, 투쟁일변도네 하는 것은 두 번째 문제죠.”
자신의 속마음을 무장해제 하고 내비치고 싶은 상대, 정혜신. 그의 자그맣지만 야무진 입술이 움직이면 가슴속 응어리가 흐물흐물 녹아내린다. 분노를 공감해주는 눈은 너무도 그윽해 그 깊이를 알 수 없다. 절망의 시절을 버티는 이들에게 건네는 정혜신의 공감의 눈빛이 어두운 광장에 희망의 꽃을 피우고 있다.
정혜신은 ‘희망광장’에 시민들의 눈길이 잠시라도 머물기를 바란다.
“우리가 쌍용자동차 노동자에 관심을 갖는 것만으로도 내가 누군가의 목숨을 살리는 것입니다. 이걸 시민들한테 알려주었으면 좋겠어요.”
안철수와 딱 맞는 상식의 전도사
인권운동가 박래군, 희망광장을 응원하다

자신이 살아온 날의 절반을 고스란히 인권운동에 바친 사람이 있다. ‘인권재단 사람’ 상임이사를 맡고 있는 박래군. 지금껏 박래군을 만난 곳은 차마 이곳이 대한민국이라고 여기고 싶지 않은 곳들이었다. 평택 대추리, 용산 남일당, 쌍용자동차 공장 앞, 구로 기륭전자 농성장, 한진중공업85호 크레인 앞…. 사람이 죽어 나가고, 노동자가 곡기를 끊고, 공권력의 폭력에 시민들이 피 흘리는 현장, 바로 그곳에 박래군이 있었다.
그를 마주친 공간 때문일까? 꽤 오랜 시간 만나왔건만 그와 술은커녕 차 한 잔 나누지 못했다. 물론 그의 고향은 물론 나이 조차 모른다. 다만 그가90년대 초반 전태일의 어머니 이소선과 한 공간(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에서 먹고 잤듯이 나도 한때 이소선이 지어준 밥을 먹고, 한 이불을 덮고 잤던 시절이 있어 그와 한 어머니를 둔 형제처럼 여겨지는 착각에 빠진다.
박래군을 만난 날은 서울광장에 ‘정리해고와 비정규직 없는 세상을 향한99%의 희망광장(희망광장)’이 시작된지 엿새째인3월15일 점심 때다.
박래군은 요즘 대권 후보로 오르내리는 안철수와 통한다고 한다.
“안철수가 상식이 통하는 사회를 말하잖아. 나하고 딱 맞더라고. 난 상식의 전도사라 말하고 다니거든. 인권은 상식이잖아.”
인권이란 공기와 같아야 한다. 사람이 살려면 꼭 존재해야 하나 사람이 그 존재 자체를 의식하지 않고 살아가야 한다. ‘인권’을 배우거나 주장하지 않아도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는 세상, 그게 상식이 통하는 사회가 아닐까. 인권운동이란 바로 당연히 존재해야 할 상식이 통하지 않거나 실종될 때 이를 되찾기 위한 저항이다.
희망도 마찬가지다. 절망이 깊을수록 희망을 찾는다. 희망은 행복한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잠자던 집에서 쫓겨나고, 생계를 꾸려가던 일터에서 쫓겨난 그 현장에 ‘결사’ ‘투쟁’ 이라는 구호와 함께 신기루처럼 적혀 있다.
희망광장에 일터에서 쫓겨나고, 비정규직이라 차별 받고, 특수고용직이라고 노동자지만 노동자로 살아가지 못한 이들이 모여 한 목소리를 낸지 엿새가 흘렀다. 봄을 시샘하는 추위가 여전히 두툼한 외투 차림의 노동자를 떨게 한다. 희망의 봄햇살은 쉽게 노동자의 삶을 비추지 않는다. 아니 햇살은커녕 해꼬지의 강풍을 몰고 오기도 한다. 엊그제 경찰은 자신의 밥줄을 빼앗길수 없다고 자신이 평생 일하던 일터에서 냉각수의 녹물을 받아 먹으며 77일간 공포의 낮과 밤을 보낸 노동자를 경찰 특공대를 투입해 방패와 곤봉으로 내리친 ‘쌍용자동차 옥쇄 파업’ 진압을 사죄는커녕 ‘베스트5’ 사례라고 자랑했다.
“용산에서(공권력이) 사람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죽였잖아. 이 정도면 대통령이 나서서 사죄해도 부족하거든. 그런데 국민들이 묵인하고 넘어간 거거든. 무리한 진압 보여줬잖아. 자신감 얻은 이들(공권력)은 용산 방식을 가지고 쌍용자동차에서 진압했어. 이걸 베스트 파이브에 올려논 거야. 그 소식 듣고 진짜 열받았어.”
경찰의 이 발표에 노동자의 분노가 희망광장에 가득했다. 하지만 이 분노는 서울광장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바야흐로 선거 국면이다. 정치권은 정책과 이념 대신 후보자 공천을 서바이벌 연예 프로그램으로 연출하며 유권자에게 흥행 성공을 구걸하고 있다.
각 정당의 정체성도 투표를 눈앞에 두고는 모호해졌다. 노동자에게 냉혹했던 정당조차도 총선을 맞이하여 ‘비정규직 문제 해결’을 내세우고 있다.
“심지어 박근혜도 비정규직 문제를 이야기하는 상황에 와 있어. 진보 세력이 잘한 것도 있지만(양극화 문제 등) 너무 심각한 상황을 초래하고 있어서 어째든 대안을 제시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이기도 해. 그럼 선거가 끝나면 정치권이 비정규직 문제 해결할까? 여소 야대가 되어도 그때 가서 타협이 이뤄질 거야. 여소야대가 되어도, 야당도 지금 비정규직의 요구를 전면 수용하지는 않을 거야. 여전히 정치권 압박할 수 있는 힘은 의회 바깥에서 있을 거야. 난 지금 시민들의 열기가 희망광장으로 향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희망광장이 정치권의 타협을 막기 위한 터잡기라고 생각해서 상당히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여겨. 그래서 정치권이 짜논 정치일정을 따라가는 게 아니라 그 판을 미리 만들어야 해. 그게 희망광장이야.”
국회가 사회적 약자의 권리를 신장시키는 입법기관이 아니냐고 묻자 박래군은 “그런 게 어딨어” 라며 손사래를 치며 웃는다.
상식이 통하는 사회는 저절로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걸 박래군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비정규직 문제, 양극화 문제 해결하겠다고 정당들이 앞다투어 말하지만 그 해결은 선거 뒤 국회 의사당에서 알아서 해줄 거라 믿으면 착각이다. 의사당 밖, 거리의 정치가 있어야 한다고 비정규직 문제가 해결된다고 박래군은 힘주어 말한다.
지난해 희망버스는 한진중공업 정리해고 문제에 머물지 않았다. 김진숙의 크레인 농성장에 평화가 무너지는 절망, 환경이 파괴되는 절망, 무너지는 비정규직의 삶과 같은 숱한 절망이 희망의 화살을 쏘아 올린 것이다. 한진중공업 정리해고자를1년 뒤에 복직시키겠다는 합의가 나오고 김진숙이 크레인에서 내려오자 그 숱한 절망들은 바늘구멍을 뚫고 비추는 희망의 빛을 본 거다. 그래서 희망버스는 멈추지 말아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쌍용자동차로 향하고 재능교육으로 가자고 했다. 희망비행기가 떠서 저 외로운 섬 제주도, 강정마을로 날아가기도 했다.
‘희망광장’은 지난해의 희망의 잉걸을 모닥불로 피어내는 일이다. 오는17일에는 희망광장에 비정규직 대회가 열릴 예정이다. 아직은 휑한 희망광장에 한 사람 한 사람 희망의 발걸음이 이어질 것이다. 서울광장이 무수한 절망의 발걸음이 이어져 가득 메워질 때, 무상의료, 반값 등록금, 비정규직과 정리해고 없는 세상, 바로 상식이 통하는 세상이 열릴 것이다. 그 길에 자칭 ‘상식 전도사’ 박래군도 있으리.
“썰렁한 희망광장을 어떡하면 메울 수 있을까?”
박래군이 내게 묻는다.
‘상식’이 서로 통하는 안철수와 서울광장에서 대담을 한 번 하라고 하자, 박래군은 요즘 바쁘단다. 그러려면 안철수 책도 읽으며 공부해야 하는데, 세상의 절망이 잠시도 자신을 놓아주지 않아 시간이 없단다.
오도엽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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