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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과 실향

고향은 관습이 비교(秘敎)적인 코드로 암호화되어 [실재하는] 거주공간(Wohnung)이다. 이 공간에서는 관습이 신성화되어 있다. 고향에 뭍혀 사는 사람은(der Beheimatete) 그를 그곳의 사람과 사물에 은밀하게 묶어 놓는 그물망에 엮어져 있다. 이 그물망의 실은 깨어있는 의식을 넘어서 말못하는 갓난아이의,  태아의, 어쩌면 더 깊은 심령(Psyche)의 영역까지 이어져있다. 이 실은 대부분 의식할 수 없기 때문에 감정으로 장전되어 있다. [그래서] 고향의 사람과 사물은 사랑의 대상, 아니면 혐오의 대상이 된다. 이 실이 산천초목, 주택,  혹은 기후와 같은 사물과 관계되어 있는 경우, 그 실을 끊어 버려야 하는 실로 인식하는 일은 비교적 간단하다. 이런 것들은 사물의 의인화, 즉 어떤 것과 어떤 이를 착오하는 것이다. 바로 이런 사물을 향한 사랑을 그리스 철학자들은 뮈투스로, 유대 선지자들은 이교로 하여 대적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저 실이 가족, 이웃, 그리고 이른바 이들의 ‘개성’과 관계되어 있는 경우, 그 실을 자유의 [발목]을 결박하는 관습으로 밝히는 일은 훨씬 더 어렵다. 왜냐하면, 이런 종류의 실은 [의인화의 경우처럼 일방적인 관계가 아니라] 주고 받는 말이 그 근간을 이루고(dialogisch), 고향에 뭍혀 사는 사람들로 하여금 동포에(Mitmenschen) 대하여 책임을 지게하기 때문이다. [알다시피] 책임감은 자유를 동반하는 현상이다. 이런 실은 – 예컨대 구아타마가 그랬던 것처럼 – 거침없이 끊어 버릴 수 없는 실이다. 그래서 고향에서 강제로 뽑혀지는 게 (혹은 스스로 자신을 뽑아내는 게) 아픈 것이다.

(빌렘 플루서, Heimat und Heimatlosigkeit: Das brasilianische Beispiel, in: Dericum, Christa/Wambolt, Philipp (Hrsg.), Heimat und Heimatlosigkeit, Berlin-Neukölln 1987, S.  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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