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게시물에서 찾기ou_topia

780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19/09/05
    2019/09/05
    ou_topia
  2. 2019/05/12
    [번역] 아우구스티누스-삼위일체론-1권 2/3
    ou_topia
  3. 2019/05/10
    [번역] 아우구스티누스-삼위일체론 1권 서설/1(1)
    ou_topia
  4. 2019/03/22
    멜란히톤 - loci communes - 2 (자유의지)
    ou_topia
  5. 2019/03/19
    멜란히톤 - loci communes - 1
    ou_topia
  6. 2019/02/12
    2019/02/12
    ou_topia
  7. 2019/02/05
    2019/02/05
    ou_topia
  8. 2018/12/09
    번역: 메크켈 총리의 당수로서의 마지막 연설 일부
    ou_topia
  9. 2018/07/24
    횡설수설
    ou_topia
  10. 2018/07/22
    이민/난민레짐과 국가사회주의(2)
    ou_topia

2019/09/05

조국 사태?

 

"[도시/polis라 할 수 없는, 아무런 질서/결속력이 없는] 먹고자는 집만이 종양처럼 무성하게 자란" (apoikia oikias, 아리스토텔레스, 정치학 1252b) 곳에서 자란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거란 결국 "같은 젖꼭지에서 젖을 빨던 자와 자기 새끼와 그 새끼를" (homogalaktas, paidas te kai paidon paidas, 같은 곳) 위하는 일?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센스
Creative Commons License
이 저작물은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코리아 저작자표시 2.0 대한민국 라이센스에 따라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번역] 아우구스티누스-삼위일체론-1권 2/3

2. 그래서 성경은 인간의 (animus)에서 이런 종류의 오류들을 씻어내려고 어린 아이의 눈높이에 맞추듯 실체(res) 대한 (verba)이라면 어떤 종류도 마다하지 않고 인용하였다. 우리들의 지성(intellectus) 이런 말을 영양분으로 삼아 강건하게 되어서 점진적으로 거룩하고 숭고한 영역을 향해 일어설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에 대해서 말 때에주님의 날개 그늘에 나를 숨겨 주시고에서와 같이 물체에서 취한 말을 사용하기도 하고, „나는 질투하는 하나님이다“, 또는내가 사람을 만든 것을 후회한다에서 있듯이 영적 피조물에서 여러 말을 옮겨와(transtulit) 사실은 그렇지 않지만 말로는(dici)그렇게 밖에 표현할 방법이 없다는 것을 알려준다. 그러나 성경은 전혀 없는 것에서 이런저런 말을(vocabula) 억지로 끌고와(traxit) (locutiones) 만들거나 이상야릇한 (aenigmata) 엮어 짜는 법이 없다. 세번째 종류의 오류를 범하는 자들은 하나님에 관하여 하나님에게서도 찾아볼 없고 어떤 피조물에서도 찾아 없는 것을 추정하는 자들로서 자신을 스스로 진리로부터 차단하여 공허하기 그지없고 위험하기 짝이 없는, 연기처럼 사라지는 삶을 사는 자들이다. 성경은 피조물에서 찾아 있는 사물을 바탕으로 하여 마치 어린 아이가 즐거워하고 쫓는 것과 같은 것을 만들어, 연약한 자들의 시선을 (aspectus) 이끌어 점진적으로 각자의 도에 따라 고귀한 것은 찾고 야비한 것은 버리게 한다. 그러나 모세에게 말씀나는 있는 자다“,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냈다등과 같이 하나님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마땅한 서술이지만(dicuntur) 피조물과 관련해서는 전혀 찾아볼 없는 서술은 성경이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있다〉(esse) 물체(corpus)뿐만 아니라 (animus)에도 어떤 식이로든 서술될 있기 때문에 성경이 말을정확하게 수야 없지만어쨌든 하나님에 대한 고유한 서술로 이해되도록 분명하게 두기를 원치 않았다면 저렇게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오직 분에게만 불사가 있고라는 사도의 말도 마찬가지다. (anima)  모종의 방식으로 죽지 않는다고 서술되고 사실 그렇기 때문에 진정한 불사란 피조물은 전혀 가질 없고 오직 조물주의 속성인 불변이라고 말하려고 하지 않았다면오직 분에게만이라고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야곱 역시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는가.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다윗 역시 똑같이 말한다. „주께서 그것들을 바꾸시면 바꿔지겠으나 주는 한결같으십니다“.

 

3. 하나님의 본질(substantia) 본질의 어떠한 변함없이 변하는 것들을 만들고, 본질의 어떠한 시간적인 움직임없이 시간적인 것들을 창조한다는 것을 통찰하고 완전히 안다는 것은 어렵다. 그래서 우리 마음(mens) 정화(purgatio) 필수다. 그래야먄 형언할 없는 것이 형언할 없는 상태로 비춰질(videri) 있게 된다. 그러나 이런 정화의 능력을 아직 갖추지 못한 우리는 믿음으로 양육되고 믿음의 인도 아래 그래도 견디고 있는 길에 올라 여정을 마치고 마침내 형언할 없는 것을 납득하기에 적합하고 용이하게(habilis) 만들져야 한다. 그래서 사도는 그리스도 안에 지혜(sapientia) 지식(scientia)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다고 말하면서도 그리스도의 은혜로 거듭 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carnalis) 세속(animalis) 속해 있는, 그리스도 안에서 보자면 마치 어린 아이와 같은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선포할 하나님 아버지와 동등한 그의 권능을 내세워 선포하지 않고 십자가에 박힌 그의 인간적인 약함을 받들어 선포한다. 사도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박히신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그리고 이어서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 한다. 조금 가서는 이렇게 말한다.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없어서 육신에 속한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하지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이런 말을 들으면 벌컥 화를 내고 의도적인 기쁜 나쁜 말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자들은 대개 위와 같은 말을 들으면 말이 없는 사람들의 말이라고 생각하지 그들 스스로 듣는 말을 담을 만한 그릇이 못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물론 이런 자들에겐 종종 근거(ratio) 제시하기도 한다. 그러나 저들이 하나님을 연구의 대상으로 삼고 뭔가 알려고(quaerere) 하면서 요구하는 그런 근거가 아니다. 왜냐하면 저들 스스로 그런 [다자가 인정하는] 근거를 규정할(sumere) 만한 힘이 없고, 우리 역시 어쩌면 그런 근거를 찾아내거나(apprehendere) [만인 앞에서] 서술할(proferre) 힘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제시하는 근거는 어디까지나 저들이 연구의 대상으로 삼아 알기 원하는(exigere) 것이 도대체 뭔지 저들 스스로 인식하기에 너무 무딜(inhabilis) 뿐만 아니라 그러기 위해 갖춰야 자질이 전혀 없다는(minimeque idonei) 보여주는 것이다. 원하는 것을 듣지 못하기 때문에 저들은 우리가 학식이 없는 것을(imperitia) 감추기 위해서 간교한 행동을 하거나 아니면 그들이 학식있는 [전문가](peritia) 되는 시기해서 악의에 행동을 한다고 믿는다. 그래서 격분하고 이성을 잃은 자리를 뜬다.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센스
Creative Commons License
이 저작물은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코리아 저작자표시 2.0 대한민국 라이센스에 따라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번역] 아우구스티누스-삼위일체론 1권 서설/1

서설 (책과 함께 아우렐리우스 주교에 보낸 편지)

 

한없는 축복을 누리고 지극히 순수한 사랑으로 존경 받아야 마땅한 아우렐리우스 주교님께, 성스러운 형제임과 동시에 동료이신 주교님께 아우구스티누스가 주님 안에서 누리는 평강의 인사를 드립니다.

 

온전하고 참으로 하나님이신 삼위일체에 관하여 청년기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가 이제 늙은이가 되어서 책으로 발간하게 되었습니다. 아시다시피 저는 책을 집필하고 나서 다시 꼼꼼히 교정하려고 작정했습니다. 근데 누군가가 전에 책을 슬쩍 훔쳐가버렸습니다. 저는 사실을 알고나서 집필을 중단했습니다. 저는 앞에서 말했던 것처럼 편이 완성될 때마다 따로따로 발간하지 않고 전체를 한묶음으로 발간하겠다고 단단히 결심했던 겁니다. 왜냐하면 연구의 진전과 함께 뒤의 내용이 앞의 내용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결국 이런 저의 결심이 제가 원했던 것보다 먼저 책을 손에 쥐게 자들 때문에 성사될 없게 되어서 저는 집필을 멈추고 사실을 저의 다른 글에서 폭로하여 저들의 양심에 호소하는 고려해 보았습니다. 저들로 하여금 가능하면 돌아다니는 편들이 제가 발간한 책이 아니라 제가 저의 저서로 발간하기에 마땅하다고 평가하기 이전에 도난당한 편들이라는 알게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나 정말 수많은 형제들의 간절한 청구와 특히 주교님의 요청에 결정적으로 강요되어서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 힘든 책을 완성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제가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대로 교정할 수는 없었습니다. 도난 당한 편들이 이미 사람들 손에 널리 펴져 있었기 때문에 교정본이 저들과 너무 차이가 나면 안되어서 있는 만큼만 교정했습니다. 이렇게 완성된 책을 주교님께 헌사하도록 우리가 매우 아끼는 형제 집사를 통해서 보냅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듣고 사본을 따고 읽을 있도록 허락합니다. 책이 원래의 명제를 담고 있긴 하지만 제가 저의 원래 계획을 이행할 있었다면 책은, 책에서 다루는 문제를 설명하는 어려움과 저의 능력이 허용하는 한도 내에서, 틀림없이 훨씬 상세하고 분명하게 집필되었을 것입니다. 서설없이 책의 혹은 다섯 편만 가지고 있거나 또는 열두 편을 가지고 있지만 적지 않은 부분을 차지하는 마지막 편들이 없는 사람들은 발간본을 접할 있는 기회가 주어지고 원하고 하기만 하면 빠진 부분을 모두 보충할 있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편지를 아무런 변경없이 그대로 받으신 책의 앞에 두어 서설로 쓰라고 지시해 주시기를 부탁합니다. 저를 위해 기도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본문

 

제1권

 

1. 삼위일체론을 읽고자하는 사람은 먼저 알고지나가야 것이 하나 있다. 다름 아니라 내가 굴리는 펜은 믿음을 출발점으로 삼는 것을 업신여기고 이성(ratio) 대한 주제넘고 그릇된 욕망(amor)으로 인해 오류에 빠지는 사람들의 궤변에 눈을 부릅뜨고 대항한다는 점이다. 이들 일부는 물체에(res corporea) 관하여 신체적 감각기관을 통해 경험하여 알게 것을, 혹은 타고난 인간재능 이를 삶에서 십분 활용하는 부지런함으로 또는 축적된 학문의(ars) 도움으로 취득한 개념을 감히 물체가 아닌 영적 실체에 (res incorporea et spiritalis) 적용하여, 전자를 후자로 헤아리고 해석하려고 덤비는 자들이다. 다른 이들은 관심이 없으면서 의견을 내놓으라 하면 인간 (animus) 본능(natura) 경향(affectus) 따라 하나님에 관한 생각을 내놓고, 하나님에 관하여 논할 때면 오류를 출발점으로 삼아 그들의 말에 주절주절 비틀어지고 기만적인 기준을 부여하는 자들이다. 그런가하면 이런 유의 사람도 있는데 다름 아니라 창조된 세계를, 우리가 보듯이 정말 변천하는 세계를 초월하려고 애쓰고 눈을 들어 의식이(intentio) 변함 없는 실체, 높은 곳에 계신 하나님께 향하게 하려는 자들이다. 그러나 이들 역시 허무와 무상의 운명에 얽매인 자들이라 한편으로는 알지 못하는 것을 아는 것처럼 보여지기를 원하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원하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들의 선입견을 더욱 담대하게 주장하고, 옹호하는 입장을 바꾸기 보다는 그릇된 의견을 정정하지 않으려고 많은 정성을 들여 본인 스스로 통찰의 길을 차단하는 자들이다. 이거야말로 참으로 이런 부류의 사람들에게 공통된 병이다. 하나님 알기를 마치 물체를 아는 것처럼 하는 , 하나님이 무슨 [](anima)이라도 되는 하나님 알기를 마치 영적 피조물을 아는 것처럼 하는 , 마지막으로 하나님 알기를 물체를 아는 것처럼 하지도 않고 영적 피조물을 아는 것처럼 하지도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에 관하여 그릇된 것을 믿는 자들이다. 이들이야말로 그들이 안다고 하는 것이 물체에서 뿐만 아니라 만들어져 어딘가 거하는 영적 존재에도, 그리고 조물주 자신에게도 발견되지 않는 만큼 누구보다 멀리 진리로부터 떨어져 있는 자들이다. 예를 들어 하나님은 희다거나 빨갛다고 생각하는 자는 분명 잘못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희고 빨간 것은 적어도 물체에서는 발견된다마찬가지로 하나님은 한때 잊으시고 한때 다시 기억하신다거나 이와 유사한 일을 하신다고 생각하는 자는 결코 작은 오류를 범하는 아니다. 그러나 이런 일은  적어도 영적 존재에서는 발견되는 일들이다. 반면 하나님의 권능은 자신을 스스로 낳을 있는 종류의 것이라고 믿는 자들은 하나님이 그렇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영적 피조물과 함께 물체적 피조물이 그렇지 않는 만큼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주 어디를 보아도 자신을 스스로 낳아서 실존의 영역으로 옮겨진 것이 없기 때문이다.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센스
Creative Commons License
이 저작물은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코리아 저작자표시 2.0 대한민국 라이센스에 따라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멜란히톤 - loci communes - 2 (자유의지)

1. 인간의 능력, 특히 자유 의지에(liberum arbitrium) 관하여


아우구스티누스와 베른하르트 (베르나르 드 클레르보)는 자유 의지에 관하여 기술하였다. 그리고 전자는 알다시피  펠라기우스파를 대항하여 집필한 후기 저서들에서 예전에 한 말을 여러 번 철회했다. 베른하르트 [또한] 한결같이 않았다1. 이 주제에 관하여서는 그리스인들 사이에도 이런저런 애기들이 있지만 산만할 뿐이다. 나는 정말 사람들의 의견을 추종할 생각은 없다. 다만 이 사태를,  성서를 해석하는데 있어서 성서와 함께 동시에 인간 이성(ratio)의 판단을 충족시키기를 원했던 옛날 저자들과 새로운 저자들이 번갈아 가면서 거의 알아볼 수 없게 만든 이 사태를, 아주 단순하고 명쾌하게 드러내고 싶을 뿐이다. 인간은 필연적으로 죄를 짓게 된다고 가르치는 게 관용이 빈약하고 세련된 에티켓이 없는 무례한 놈(parum civile)으로 비치고, 자신을 악습에서 덕으로 옮길 힘이 없는 의지를 꾸짖는 게 무자비하게 비친 것이다. 그래서 저들은 인간의 능력에 어울리지 않게 사실보다 더 많은 능력을 할당하는데 그 모습이 놀랍게도 천차만별이다. 이유는 성서가 이러나저러나 항상 이성의 판단과 모순 관계라는 걸 보았기 때문이다. [자유 의지란] 이 관점의 영역에,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이 철저하게 철학과 인간 이성과 구별됨에도 불구하고, 철학이 쥐도 새도 모르게(sensim) 그리스도교에 기어 들어와  자유 의지란 타락한 (impius) 도그마가 수용되고 그리스도가 행하신 선한 일들을 저 더럽고(profanus) 허구한(animalis) 인간 이성의 지혜로 어둡게 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뜻하시는 바와 판단과는 완전히 딴판인(alienissima) 자유 의지란 말(vox liberi arbitrii)이 통용되었다.  우리가 보건데, 이 말의 [덧에 걸려] 성인들조차 헛발질하고 넘어지지 일쑤였다. 여기에 플라톤의 철학에서 뽑아온 이성이라는 단어가(vocabulum rationis) 더해졌다. 똑같이 망하는 길로 이끄는 말이다. [중세] 교회에서 그리스도 대신 아리스토텔레스를 끌어안았듯이 교회가 세워지고 난 후 얼마 되지 않아서 이미 그리스도 가르침(doctrina)이 바로 플라톤 철학에 의해서 곤두박질치게 되었다. 그 결과 교회에 정경[성경]외 왜곡되지(sincerus) 않은 글이란 하나도 없다. [그래서] 주석을 달고 전해지는 모든 게 철학 냄새를 풍긴다.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센스
Creative Commons License
이 저작물은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코리아 저작자표시 2.0 대한민국 라이센스에 따라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1. 멜란히톤 역시 나중엔 [신학총론 등에서] 경배의 대상이라고 한 신, 삼위일체 등에 이런저런 말을 한다. 텍스트로 돌아가기

멜란히톤 - loci communes - 1

[번역: Melanchton, Loci Communes seu Hypotyposes Theologicae, 1521]

 

신학의 주요 관점(loci communes) 혹은  [본이 되는/본받아야 하는, 딤후 1.13] 전형(hypotyposes)

 

각 학문마다 보통 그 전체를(summa) 담고 있는가 하면 동시에 그 목표로서 모든 연구를 지도하는 몇몇의 주요 관점들을 정리한다. 신학에서도 옛 교부들이 이런 [관례를] 따른 걸 볼 수 있다. 다만 흔치 않고 볼품이 없다. 최근의 교부들 중에서는 다마스케누스와 롬바르두스의 [정리를 예로] 들 수 있는데, 둘 다 쓸모가 없다. 다마스케누스는 너무 철학에 치우쳐 있고, 롬바르두스는 성경의 말씀을(sententia) 전하기(referre)보다는 인간의 생각들을(opiniones) 주워 모으는데 급급하다. 앞에서 이야기했다시피, 이런 유의 대전(summa)으로 학생들의 발목을 잡고 늘어질 생각이야 없지만, 그래도 연구가 어느 방향으로 지도되어야 하는지 인식할 수 있도록 어떤 주요 관점들에 사태의 전체가(summa) 달려있는지 최소한 암시해 주는 게 필수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다음과 같이 대략  신학의 주요 관점들을 정리해 본다.

 

신 - 하나님 (Unus) – 삼위(Trinus) – 창조 - 인간, 인간의 능력 (vires) – 죄 - 죄의 열매, 악습 – 벌 – 율법 – 약속 - 그리스도에 의한 거듭 태어남 – 은혜 - 은혜의 열매 – 믿음 – 소망 – 사랑 – 예정 - 성사적인 표징(signa sacramentalia) - 인간의 신분(hominum status) - 공권력(magistratus/위에 있는 권세) - 주교 – 저주[지옥행] - 복(beatitudo)

 

이런 주요 관점들 중 몇몇은 [당장은] 전혀 (prorsus/[앞으로 있을 결과를 봐야 비로소 이해되는?]) 이해할 수 없으나, 다른 몇몇은 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이라면 모두가 [듣고 경험한 것을 돌이켜보면서?](rursus) 최대한 엄밀하게 깨닫기를 원하신다. 신성의 비밀들은 우리가 경배해야지 탐구의 [대상]으로 삼아서는 안된다.  신성의 비밀들을 조사의 대상으로 삼고 시험하는 건(tentari), 성인들조차 몸소 자주 경험해야만 했듯이, 항상 커다란 위험을 동반하는 일이다. 이루 말할 수 없이 선하시고 위대하신 하나님께서 성자를 육신의 모양으로 우리에게 보내 시사 그로 하여금 우리를 하나님의 존엄을 바라보는 일에서 육신을, 곧 우리들의 허무함을(fragilitas) 바라보게 하는 데로 인도하시게 하였다. 마찬가지로 사도 바울 또한 고린도 교회에 서신을 보내어(고전 1.21) 지혜 가운데 계신 하나님을 세상이 자기 지혜로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는 전도의 미련한 것(stultitia praedicationis)으로, 즉 온전히 새로운 방법으로 알게 되기를 원하신다 하였다. 따라서 신학의 가장 고귀한  주요 관점들, 즉 신, 유일성, 삼위성, 창조의 비밀, 성육신이 어떻게 되었는지 [탐구하는데] 그토록 많은 노력을 투자해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네게 묻겠는데 단지 이런 주요 관점들만 가지고 수백 년 동안 엎치락뒤치락해온  스콜라 신학들이 달성한 게 도대체 무엇인가? 그들이 주고받은 말들이(disceptatio), 사도 바울이 말했듯이, 공허한 것이 되어버리지 않았는가? 평생 동안 고작 보편적인 것, 형식적인 것, 주해 등 여기 다 나열할 수 없는 무의미한 말들을 놓고 지껄이다가 그걸 기록하기만 했기에 그렇지 않았는가? 그들이 주고받은 멍청한 말들이 복음과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선하신 일들을 어둡게 하지만 않는다면 그들의 미련함을 가만 놔 둘 수도 있겠다. 이런 하찮은 것들을 놓고 내게 통찰력이 있다는 걸 보여 주는 게 딱 내키지는 않지만, 하려고 한다면 그들이 교조적인 믿음의 증명이라고 내놓는 것들은 모두 쉽게 무너뜨릴 수 있겠다. 그리고 이런 증명들을 제시하는 그들이야말로 [정말] 가톨릭의 교리보다 일종의  이단들을 더 지지하는 게 아닌가 한다. 그 외 나머지 주요 관점들, 즉 죄의 권능, 율법, 은혜 등을 모르는 사람이 있다면 그를 어떻게 그리스도 인이라고 칭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왜냐하면, 이런 주요 관점들을 출발점으로 삼아야만 [비로소] 그리스도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안다는 건 그가 행하신 선한 일들을 아는 것이지 저들이 가르치는 것, 즉 그리스도의 본성이나 그의 성육신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눈 여겨 보는 게 아니다.  어떤 필요를 충족하기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육신을 마다하지 않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힘을 당하셨는지 모른다면, 그 생의 줄거리를(historia) 줄줄 아는 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의사가 약초의 형상과 색깔을 알고 그 겉모양을 그릴 줄만 안다면, 그걸로 충분한가? 약초의 본능인 치유하는 힘을 아는 것, 이게 중요하지 않는가?  마찬가지로 우리는 치유제로, 성경의 말씀을 따르자면 구원자로 오신 그리스도를 스콜라 학자들이 제시한 방법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알고자 해야 한다. 궁극적으로 율법이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어디로부터 율법을 지킬 수 있는 능력을 공급 받을 수 있는지, 어디로부터 죄사함의 은혜를 받을 수 있는지, 어떻게 미끄러져 넘어지는 정신을 일으켜 세워 악마와 육신과 세상을 대항하게 할 수 있는지, 어떻게 깨진 양심을 위로할 수 있는지 등을 아는 것이야말로 그리스도 인의 앎이 될 것이다.  스콜라 학자들이 이런 걸 가르치는가? 사도 바울이 로마 교회에 보낸 서신에서 그리스도 인의 가르침의 개요를 집필할 때 삼위일체의 비밀, 성육신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능동적인 창조, 수동적인 창조 등을 놓고 철학 했는가? 아니면 뭘 다뤘는가? 그리스도의 앎을 온통 담보하는 주요 관점, 즉 율법과 죄와 은혜를 다룬 게 확실치 않는가. 사도 바울은 신자들이 그리스도에 대한 폭넓은 앎을 얻기 바란다고 [셀 수 없이] 증언한다. 이유는 구원의 주요 관점들을 방기하면 우리가 어떤 일을 저지를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정신을 생명이 없고(frigidus) 그리스도와는 동 떨어진 논쟁으로 돌릴 거라고 미리 내다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우리 마음에 심어 주고(commendare), 양심을 강건하게 하고(confirmare), 정신을 일으켜 세워 사탄에 대항하게 하는 주요 관점들의 이모저모를 살펴보고자(rationem delineare)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성경에서 단지 덕과 악습에 관한 상투적인 지침들(locos) 만을 주문한다. 그러나 이 따위 일에 신경을 쓰는 건 철학자나 할 일이지 그리스도 인이 할 일은 아니다. 내가 왜 이렇게 말하는지 잠시 후 알게 될 것이다.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센스
Creative Commons License
이 저작물은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코리아 저작자표시 2.0 대한민국 라이센스에 따라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19/02/12

 

1.

 

미국 극우매체 브라이트바트( Breitbart)한테서 배운 것처럼 보이는 자한당의 „5.18 광주 민주화운동 폄훼극에 여기 예술인생님의 포스팅이 떠오른다

 

동시에 90년대의 전환 속에서 광주는민주화운동으로폄훼되었다.“ (http://blog.jinbo.net/alternativeasia/327)

 

진리라는 생명이 있는 , 현실이 되려는 충동과 경향이 있는 거라면, 누가 진리로부터 떨어져있는지 모르겠다. 5.18 생명력을 거세한 마찬가지가 아닌가?

 

 

2.

 

저런 극이 자행될 때마다 쇼아를 부인하는 행위를 형법으로 다스리는 독일 사례가 등장한다. 5.18 광주가 그져 도살장으로 끌려간 사람들의 이야기인가?

 

이런 아니었던가?

 

(홍성담:대동세상)

 

 

 

3. 

 

5.18 가죽을 벗겨 자들이 어디서 주서온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뭔가 뼈다귀처럼 보이는 것을 보여주면서광주!“ 하는 몇몇을 이구동성멍청이 나무란다. 그러나 먹혀들어 거다. 가죽이나 뼈다귀나 생명이 없는 마찬가지

 

4.  

 

짝퉁 제국주의자“(정희진) 반열에 오른 한국에서 5.18 광주는 아마 게세당할 수밖에 없었을 거다.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센스
Creative Commons License
이 저작물은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코리아 저작자표시 2.0 대한민국 라이센스에 따라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19/02/05

베네수엘라 분쟁에 관한 독일방송(Deutschlandfunk/도이치란트풍크)의 평론이 사뭇 다르다. 들어가는 몇 줄을 번역한다.

 

원문

 

 

...

이건 식민지 시대로 굴러떨어지는 뒷걸음질이다. 베를린 외무성은 베네수엘라 국회의장 후안 과이도를 임시대통령으로 인정했다. 현직 대통령 니콜라스 마두로의 정당성을 부인한 것이다. [헛것이 보이나 싶어서] 눈을 비벼본다. 지구 남반구 국가들에 대한 유럽의 온정주의자 정치의 시대가 영원히 막을 내리지 않았던가? 파렴치하게 독일 외무상 하이코 마쓰(Heiko Maas)가 베네수엘라 내정에 간섭하고 있다. 민주주의 가치를, 굶주리고 의료혜택이 열악한 베네수엘라 주민들의 고통을 내세우면서.

 

....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센스
Creative Commons License
이 저작물은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코리아 저작자표시 2.0 대한민국 라이센스에 따라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번역: 메크켈 총리의 당수로서의 마지막 연설 일부

메르켈 총리의 권력이양 계획이 잘(?)진행되고 있다. 기독민주연합 내 남성동맹인 안덴동맹의 마지막 교란사격을 잘 막았다. 당수로서의 마지막 연설이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 것 같다.

이 연설에서 참 기독교인 메르켈이 보인다. 특히 복음서적인  "마음에 [가득한] 기쁨"이 정치와 삶의 원동력이었다는 고백이 참 인상적이다. 

해당 부분 원문과 번역을 올린다.

https://youtu.be/4pra6GYN5qM

(27분 30초 에서 29분 30초 까지)

 

원문:

Was wünschen wir einander?

Ich wünsche mir für uns gemeinsam, dass wir auch in schwersten Stunden, seien die Aufgaben noch so komplex und die Anfechtung von außen auch noch so stark, nie vergessen, was die christdemokratische Haltung ausmacht.

Wir Christdemokraten grenzen uns ab, aber niemals grenzen wir aus.

Wir Christdemokraten streiten, und zwar nicht zu knapp, aber niemals hetzen wir oder machen andere Menschen nieder.

Wir Christdemokraten machen keine Unterschiede bei der Würde des Menschen. Wir spielen niemanden gegen den Anderen aus.

Wir Christdemokraten verlieren uns nicht in Selbstbeschäftigung und Selbstbespiegelung. Wir Christdemokraten dienen den Menschen unseres Landes.

Die Zukunft wird von uns alles abverlangen, was wir an Kraft haben, um unsere Werte zu behaupten und zu bewahren. Die Zukunft gut gestalten können wir nur, wenn wir uns nicht mit Missmut, mit Missgunst, mit Pessimismus, sondern immer mit Fröhlichkeit im Herzen an die Arbeit machen. So habe ich es immer für mich gehalten, in meinem Leben in der DDR und erst recht und um so mehr unter den Bedingungen der Freiheit. Es ist diese Fröhlichkeit im Herzen, die ich meiner Partei auch für die Zukunft wünsche.

 

번역:

우리가 서로 소원하는 게 있다면 뭘까요? 저는 우리 모두가 다음과 같은 걸 서로 소원했으면 합니다. 힘들기 짝이 없는 시대에 빠지더라도, 주어진 과제가 감당하기 어렵게 복잡하고, 또 밖으로부터의 시련이 감당하기 힘들게 거세더라도, 기독교-민주주의의 마음가짐(Haltung)의 본질이 어떤 것인지 결코 잊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 기독민주연합 당원들은 우리 자신을 차별화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결코 배제하지 않습니다.   

우리 기독민주연합 당원들은 실컷 말다툼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결코 다른 사람들을 몰이[사냥] 하거나 깔아뭉개지 않습니다.

우리 기독민주연합 당원들은 인간의 존엄성이 걸린 일이라면 차이를 두지 않습니다. 우리는 결코 타자와 타자를 서로 반목하게 만들어 어부지리를 얻으려 하지 않습니다.  

우리 기독민주연합 당원들은 자신을 지켜 자기만족과 자아 도취에 빠지지 않습니다. 우리 기독민주연합 당원들은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봉사합니다.

우리의 [이런] 가치를 주장하고 보존하기 위해서 미래는 우리에게 있는 힘을 다 내놓으라고 요구할 것입니다.  좋은 미래 건설은 우리가 불만, 질투, 비관이 아니라 오로지 오히려 마음에 [가득한] 기쁨으로 일을 착수할 때 가능합니다. 저는 항상 그런 마음가짐이었습니다. 동독(DDR)의 삶에서 그랬고, 자유의 조건 아래에서 한층 더 그랬습니다. 제가 당이 미래에도 간직하기를 소원하는 것은 바로 이런 마음에 [가득한] 기쁨입니다.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센스
Creative Commons License
이 저작물은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코리아 저작자표시 2.0 대한민국 라이센스에 따라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횡설수설

독일 역사블럭(Blocco Storico)의 재구성

 

제목이 거창하다.

 

유럽 통합과 함께 진행된 통독 이후 독일 정치 지형이 점진적으로 변해 왔다.  

 

정당으로 국한하자면 통독전 서독 역사블럭은 기독/기사연합과 사민당, 그리고 그 사이에서 정권 창출의 추가 되었던 자유민주당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시민권에 방점을 두는 리버럴한 세력과 자유[질서]시장주의를 추종하는 세력이 공존하는 자유민주당에서 누가 당권을 장악하느냐에 따라 연정이 정해지고 차기 정권이 창출되어 왔다.

 

그러나 유로위기와 난민사태를 거치면서 이 기존 역사블럭이 재조직되고 있다.

 

이게 지난 총선 후, 무산되었지만 이른바 자메이카 연정으로 불리는 흑황녹 연정 협상으로 가시화되었다. 현재 진행 중인 난민사태에서 지난 2015년 가을 독일국경을 부분적으로 연 메르켈 총리가 기대고 있던 지지기반이 한자리에 모인 것이다. 거칠게 이야기하자면 산업예비군/전문기술자/인구구성 문제의 해결을 원하는 자본 세력(Fraktion), 유럽의 정체성으로서의 인권을 내세운 녹색당으로 대표되는 좌파리버럴 세력(Fraktion)이 [노동력/주민의 자유이동과 함께 자본의 이동에 아무런 규제를 하지 않는] 쉥엔공간을 지키자는 기민/기사연합아래 모인 것이다. 기독/기사연합, 자유민주당, 그리고 녹색당이 거의 연정구성에 까지 갔다. 녹색당 당수는 터키계 이민 2세였다.

 

이 블럭이 정권 창출은 고사하고 붕괴되고 있다. 재조직되고 있다.

 

가시적으로 그 이유는 독일대안당 AfD의 연방의회 진출에 있다. 뜬금없는 게 아니다. (관련 자세한 내용은 다음으로...)

 

독일 “민주주의”형태가 달라질 게 분명하다.

 

“헤게모니 시스템 아래 민주주의는 지도하는 그룹과 지도를 받는 그룹 사이에서 존재한다. 그 존재의 정도는 [경제 발전과 따라서] [그런 발전을 표현하는] 입법이 얼마 만큼이나 {특히 지식인들의} 지도를 받는 그룹들로부터 지도하는 그룹으로의 [분자적인] 통과를 장려하는지에 달려있다.”(그람시, 옥중수고 8,§191)

(“Nel sistema egemonico, esiste democrazia tra il gruppo dirigente e i gruppi diretti, nella misura in cui [lo sviluppo dell’economia e quindi] la legislazione [che esprime tale sviluppo] favorisce il passaggio [molecolare] dai gruppi diretti al gruppo dirigente.”)

 

지도 그룹으로 AfD의 극극우 친/네오나치 회케(B. Höcke) 등이 이동하고 있다. 독일 역사블럭으로의 이동을 지향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다문화 정책과 사회통합의 얼굴마담 역할을 했던 터키계 2세 독일축구 국가대표 외질이 은퇴선언을 했다.  

 

시끄럽다.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센스
Creative Commons License
이 저작물은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코리아 저작자표시 2.0 대한민국 라이센스에 따라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이민/난민레짐과 국가사회주의

B. 회케 :

"Wir können, wir sollten und wir werden im Kraftfeld von Identität und Solidarität operieren."  "우리는 정체성[국가국민/민족]과 연대[국민/민족연대]의 역장에서 활동할 수 있고, 그러한 사명을 받았으며, 또 그 일을 수행할 것이다."

(독일 극우 정당 AfD (독일을 위한 대안)의 극우/친나치파 대표 회케의 2018년 6월 30일 전당대회 연설에서. https://www.youtube.com/watch?v=slv0xn4cvgI 2분 50초 이하)

 

Serhat Karakayali (Transit Migration Forschungsgruppe)
 

Die natioal-sozialen Zuege des Migrationskompromisses wurden unter dem Nationalsozialismus reorganisiert. (…) Neuere Arbeiten haben gezeigt, dass das “Soziale” keineswegs ausschliesslich ideologische Blendung war, sondern sein materielles Substrat in der Bereicherung und Umverteilung geraubter Vermoegen von Juden und Besatzungslaendern hatte. Die radikale Version der Unterschichtung und Ausbeutung von AuslaenderInnen als ZwangsarbeiterInnen in Deutschland durch den Nationalsozialismus kann als Teil dieser national-sozialen  Konstellation gesehen werden. Der Begriff des “national-sozialen Staats”, wie von Balibar vorgeschlagen, reflektiert eine Rationalitaet, die auch im Nationalsozialismus zur Wirkung kam. Letzteren “nur” als irrationalen Exzess oder “Zivilisationsbruch” zu kennzeichnen verhindert, sowohl den Nationalsozialismus als ein Ensemble gesellschaftlicher Verhaeltnisse zu analysieren, als auch , die systematische Unschaerfe der Grenzen zwischen freier und unfreier Arbeit zu erkennen. Tatsaechlich stellt der national-soziale Staat eine Alternative zum Nationalsozialismus dar, insofern ersterer die Widersprueche ziwischen Nationform, Kapitalismus und Klassen auf andere Weise zu loesen bestrebt ist als letzterer. (Serhat Karakayali, Gespenster der Migration: Zur Genealogie der Migration in der Bundesrepublik Deutschland/이민의 유령: 독일연방공화국 이민의 계보에 관하여)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센스
Creative Commons License
이 저작물은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코리아 저작자표시 2.0 대한민국 라이센스에 따라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