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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3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12/04/17
    커피필터 틀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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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12/04/14
    비지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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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2012/04/13
    예수 믿고 천당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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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2012/04/13
    2012/04/13
    ou_topia
  5. 2012/04/12
    4.11 총선 관련 알 수 없는 점(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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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2012/04/12
    당은 백화점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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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2012/04/11
    메스꺼운 조선일보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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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2012/04/06
    MB는 빅 브러더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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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2012/04/02
    토마스 브라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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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2012/03/31
    한국 정치판과 레스비아
    ou_topia

커피필터 틀었어?

„커피필터 틀었어?“

„응?“

짝지가 좀 짜쯩난 목소리로 반복한다.

„커피필터 틀었냐고?“

나는 되묻는다.

„커피필터 틀었냐고?“

짝지의 목소리 뚜겅 열리기 일보직전.

„커피필터가 터졌나고?“

그제야 짝지가 한 말이 그대로 뇌에 전달된다.

„아니, 필터를 버리는 과정에서 좀 흘렸나봐.“


부엌  라디오에서 팝송이 흘러나왔다. 티나 터나, 사이먼 가펑클 등 에버그린. 항상 듣는 라디오 방송이 아니다. 커피와 바질리쿰 향이 은은한다. 오래된 커피머신이 망가진 후로 핸드드립으로 커피를 내려먹는다. 유리 주전자를 버릴 수 없어서 벼룩시장에서 사기 핸드드립를 구해다가 커피를 내려먹는다. 물이 완전히 다 내려가지 전에 성급히 커피 한잔을 따라 먹었다. 아직 축축한 커피필터를 핸드드립에서 꺼내는 과정에서 싱크대에 커피를 좀 흘렸다.

화장실에서 고양이 세수를 하는 짝지에게 다른 방송을 틀였나고 물었다. 어제 저녁 잘못하다가 다른 방송을 틀게되었고 평소 듣는 방송을 잡을 수 없었다고 한다. 내 뇌는 아직 이 대화의 말들을 재현하면서 부엌에 돌아와 커피를 마시고 있었고 짝지는 아침 세면을 마치고 싱크대에 흘린 커피를 보고 나에게 이렇게 질문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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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지론

비지? 한국 사회주의권의 논쟁에 익숙하지 않은 나로선 종종 이게 무슨 말이지 하고 의아해 할 때가 있다.

비지하면 얼른 떠오르는게 비지찌게. 고기가 귀한 시절 (1년에 한 두어번 정도 먹었었나?) 삼겹살을 넣고 끓인 비지찌게.

그래서 그런지 내 머리는 비지론에 비지와 삼겹살을 연상하고 침샘에 명령하여 군침을 흘리게 한다. 근데 뭔지 알고보니 맛이 싹 가신다.

거슬러 올라가보니 비지론은 국공합작에 기대고 있다 (노정협의 <임박한 4.11 총선과 노동자의 전략 전술> 참조).

쉽게 말해서 삼겹살이 되자는 이야긴데, 오류가 심해도 보통 심한 게 아니다. 내 뇌주름의 오류야 연상착오라고 어여쁘게 봐 줄 사람이 있을 수도 있겠다. 근데 국공합작에 기대어 야권연대, 비지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오류는 좌파라는 사람들이  어떻게 저런 관념론에 빠질 수 있을까 내 눈과 귀를 의심하게 만든다.

우선 존재론적 오류를 범하고 있다. 뭐가 있는지도 모르면서 뭔가를 열심히 이야기한다.  아예 눈을 감고 알려고 하지도 않는 것 같다. 있지 않는 것을 어디다 갖다 붙였다  떼었다 한다. 한국에 중국의 공산당과 같은 공산당을 만드는 것이 현안인데, 공산당이 이미 존재하는 것처럼 논증한다. 마오를 읽기 전에 먼저 비트겐슈타인 읽기를 권하고 싶다.

 기초적인 존재론적 오류가 범주의 오류로 이어진다. 계급 동맹을, 다시 말해서 조직된 계급, 즉 당 간의 동맹을 사안적인 동맹과 혼돈하고 있다. 예컨대 무상급식과 같은 사안적 동맹과 조직적 동맹을 혼돈하고 있다. 사안적 동맹은 조직, 즉 당이 부재해도 이야기될 수 있는 범주다. 그러나 조직적 동맹은 당을 전제하지 않고서는 이야기 될 수 없다. 고등교육이 필요없는 상식이다.

몰역사적인 오류를 범하고 있다. 국공합작이 있기 전에 중국 공산당은 국민당과 생사를 건 싸움을 했다. 그리고 당의 생존을 위해서 국민당 치하로 들어가지 않고 대려 국민당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진 곳으로 갔다. 그리고 합작은 주도권을 잡을 수 있다고 자신 했을 때 했다. 이게 국공합작의 역사적 교훈이다.

암튼, 삼겹살은 좋아하지만 비지론은 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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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믿고 천당가자

„예수 믿고 천당가자“가 기독교의 키포인트다.

이건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 형제>에 등장하는 스타브로긴의 „지옥에 가도 예수를 따르겠다“, 즉 예수 믿는 걸로 족하겠다는 무조건적인(kategorisch) 고백에 견주어 보면 예수 믿는 것과 천당가는 걸 수단과 목적 혹은 전제와 결론의 관계로 추락시키는 천박한 고백이다. 그러나 이 점은 차지하고 이 표현을 좀 살펴보자.

이게 기독교의 가장 역겨운 표현이라는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다.

작은 계시록이라고 불리는 마태복은 25장 31절 이하 최후심판에 대한 예수의 말을 두려운 마음으로 읽어 내려가면서 예수를 믿어야 천당 갈 수 있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33절-46절 이하 이렇게 쓰여있다.

„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바로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그들도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헐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하지 아니하더이까/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바로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강조는 ou)

여기에 누가 뭘 척도로 하여 최후심판을 하는지 분명히 적혀 있다.

척도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람이라면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고 야훼가 모범적으로 보여주었던 사랑과 자비의 행동이다.

이런 사랑과 자비의 행동이 예수를 믿는 것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

믿음이 관계의 표현이라면 예수를 믿는 것은 예수와 직접 관계하는 것이다. 여기서 예수는 자기와 관계하는 법을 가르쳐 주고 있다.

„내가 주렸고, 지극히 작은 자가 바로 나 였으며, 이런 형제와 관계하는 것이 직접 나와 관계하는 것이다.“라고 가르치고 있다. 자신과 지극히 작은 자가 하나라고 말하고 있다. 은유도 아니고 직유도 아니다. 구별할 수 없는 하나다. 여기서 지극히 작은 자와 관계하는 것은  마치 예수와 관계하는 것이 아니다. 혹은  마태복음 10장 42절에 따라 누구의 이름으로, 예컨대 예수의 이름으로 행하는 행위가 아니다. 원문„ καὶ ἀποκριθεὶς ὁ βασιλεὺς ἐρεῖ αὐτοῖς, Ἀμὴν λέγω ὑμῖν, ἐφ' ὅσον ἐποιήσατε ἑνὶ τούτων τῶν ἀδελφῶν μου τῶν ἐλαχίστων, ἐμοὶ ἐποιήσατε.“에서 이런 직유, 은유, 혹은 누구의 이름이란 표현을 찾아볼 수 없다.

세상 어디에서 살던지 지극히 작은 자에게 위와 같은 행위를 하는 사람은, 그가 역사적인 예수를 알던 모르던, 예수와 직접 관계한다. 바로 이것이 예수를 믿는 것이고 야훼의 나라를 업으로 받는 행위다.

그래서 마태복음 25장 31절 이하는 항상 읽기가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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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4/13

블로그 공간에서 날 보여줄 때도 있다. 여기서 „나“라는 건 나의 옛이야기다.  그러나 블러그 공간에서 보여주는 이런 나는 극복되었거나 이상화된 나다. 보여줘도 쑥스럽지 않는 나다.

오늘 이곳 블로그에 올려진 김지하의 시를 가사로 한 노래를 들으면서 한 사람을 그리워한다.    

들어본지 정말 오래 되었다. <금관의 예수> 공연 중 불렀던가? 어딘지는 생각나지 않지만 삐쩍 말라 윤곽이 뚜렸했던 누님의 모습은 생생하다.  보고 싶다.

떠돌이 생활을 하다보면 짐을 자주 챙기게 된다. 뭘 버리고 뭘 가지고 가지? 가지고 가는 양은 점점 준다. 전엔 버릴 수 없다고 생각했던 걸 버리고 가게 된다. 버리고 가면 뭔가 내 한쪽을 버리고 가는 것 같아서 망설이면서 다시 한번 생각해 본다.

누님이 보냈던 엽서들을 읽는다. 생일 때 내가 어려워 할 때 날 챙기고 위로하는 엽서들이다. 무심히 읽었던 것들을 찬찬히 읽어내려갈 때  누님의 마음이 물씬 다가온다. 몸이 그립다. 안아주고 안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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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1 총선 관련 알 수 없는 점

1.

붉은 색은 좌파의 전용으로 알고 있는데 새누리당이 붉은 점퍼를 입고 다닌다. 노란색은 독일의 경우 친기업 정당인 자유민주당의 색인데 매우 헷갈린다.

2.

야권연대란 걸 이해할 수 없다. 독일의 경우 진보적 좌파는 결정적인 순간에 항상 야권연대를 거부해 왔다. 1차대전 전쟁신용법안에 찬성한 사민당에서 독립사민당이 떨어져 나와 공산당을 결성하였고, 원자력과 나토이중결정에 찬성한 사민당에서 반전.반핵.평화주의자들이 떨어져 나와 녹색당을 결성하였고, 비정규직, 노동자파견법, 실업자수당 사회수당으로 하락 등 신자유주의 개혁정책 <아젠다 2010>를 실행한 사민당에서 <노동과 사회정의를 위한 선거대안/WASG>이 떨어져 나와 민주사회당과 <좌파당>을 결성했다. WASG의 경우 심지어 사민당 당수가 탈당하여 WASG에 합류했다. 통합진보당으로, 그러니까 결국 민주통합당으로 간 한국의 진보거물(?)들을 이해할 수 없다. 야권연대란 게 어디서 유래하는 것인지 궁금하다.


3.

4.11 총선 결과에 대한 평가 관련, 야권연대를 지지하는 언론은 총선결과에 잠깐 얼어붙더니 금새 회복하고 긍정적인 평가로 말머리를 돌린다. 야권연대가 수도권에서는 먹혀 들어갔다는 것이다. 이런 견해에 물음표를 달고 싶다. 여야를 왔다갔다하는 17대, 18대, 19대 총선의 결과를 보면 서울이란 대도시의 특성이 더 작용한 게 아닌가 한다. 서울을 몰라서 이렇다저렇다 할 순 없지만 일반적인 차원에서 말하자면 일정한 정당에 투표하는 밀리외(millieu)가 서울 같은 대도시에는 없거나 다양해서 투표결과가 매우 유동적이지 아닌가 한다. 만약 그렇다면 수도권에서의 총선결과를 대선까지 끌고 갈 수 있다는 판단은 속단이다. 이런 맥락에서 이번 총선결과는 여촌야도가 되살아난 게 아니라  인증샷수준의 순간포착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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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은 백화점이 아니다

당을 백화점으로 생각하고 아무런 강령없이 이것저것 늘어논 무리들이 참패.

 

유권자를 탓할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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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스꺼운 조선일보 칼럼

종종 성경책을 들여다 본다. 신앙이 좋아서 그러는 것이 아니다. 성경책 읽기가  메스꺼운 느낌에 약이 되기 때문이다.

오늘 조선일보 [최보식 칼럼]의 "젊은 친구, 현실에는 '메시아'가 없네"란 글을 읽고 속이 메스꺼워졌다. 음식이라면 시원한 소주 한잔으로 속을 달랠 수 있겠지만 글로 그렇게 되면 달리 방법이 없다.

마태복음 5장 37절의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좇아 나느니라.“가 성경의 말하기 원칙이 아닌가 한다. 그래서 그런지 종종 읽기 힘들고 속이 탈 때도 있지만 메스꺼운 느낌은 주지 않는다. 아니 소주와 함께 성경 읽기가 메스꺼운 느낌엔 최고의 약이 된다.

„오십줄“이 아니라 오학년 인생으로, 그것도 스스로 삶을 향유하지 못하고 „직업상 세상의 잘난 인물들을 만나“온 전형적인 기생의 인생으로 젊은이들에게 뭔가를 은근슬쩍 권한다.

대화체를 차용해서 배려의 제스춰까지 취하지만 말 그대로 차용일 뿐이다. 자질구레한  걸 홀로 나열하면서 구렁이 담 넘어가듯 이리저리 구불거리지만 마지막에 나오는 것은 용이 아니라 찌라시 미꾸라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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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는 빅 브러더가 아니다?

2012.4.5 조선일보 인터넷 칼럼에 이런 글이 실려있다.

주용중 정치부 정당팀장이 <대한민국은 정말 '빅 브러더' 사회인가>라는 수사학적인 질문을 내 던지고 덮쳐오는 파도를 즐기는 웨이브라이딩의 묘미를 보여준다. 펜이란 보드로 웨이브라이딩을 즐길 수도 있나 보다.

„빅 브러더“의 유신헌법 제정을 찬양고무했던 조선일보가 „우리가 빅 브러더 치하에 살고 있다고 자꾸 주입하면 자존심이 상한다.“라고 한다.

„빅 브러더“를 잘 알았던 조선일보에게 MB는 분명 „큰 형님“이 아닐 것이다. 아마 „Micro Brother“일 것이다. 세간에서는 „쥐“로 통한다.


변신을 거듭하다 보면 결국 본성과 현상이 일치하게 된다. 로마 시인 오비디우스가 깨달은 진리다. 이에 비춰 보면 „빅 브러더“의 본성은 „쥐“임이 분명하다.

쥐가 왜 문제인가? 위생학적으로 좋지 않다. 바이러스 보균자를 확실히 잡아야 한다. 언제 또 터질지 모른다.

그리고 1등을 좋아하는 조선일보가 한국의 민주주의 지수, 국제 투명성 지수 (corruption perceptions index, 2011년 43위), 언론자유지수 (2011년 갤럽 조사결과 133개국 중 87위) 등에서도 1등을 차지할 수 있도록 기여했으면 좋겠다.

 

쥐는 물론 쥐방망이로 때려 잡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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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브라쉬

ou_topia님의 [가우크와 다른 구동독 사회주의 지성인 - 토마스 브라쉬] 에 관련된 글.

 

베를린 도로테엔 공동묘지에 누워있는 토마스 브라쉬.

 

좀 헤맸다. 기억엔 "철의 천사 (Engel aus Eisen)"가 굉장히 컸다. 큰 동상을 찾아 돌았으나 찾지 못했다. 안내판을 다시 보고 가 보니 "철의 천사"가 생각보다 작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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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s ich habe, will ich nicht verlieren, aber
wo ich bin will ich nicht bleiben, aber
die ich liebe will ich nicht verlassen, aber
die ich kenne will ich nicht mehr sehen, aber
wo ich lebe will ich nicht sterben, aber
wo ich sterbe, da will ich nicht hin
bleiben will ich, wo ich nie gewesen bin.


내가 가진 것, 그건 잃고 싶지 않다, 나아가
내가 있는 곳에 머물고 싶지 않다, 나아가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떠나고 싶지 않다, 나아가
내가 아는 사람들을 더 이상 보고 싶지 않다, 나아가
내가 사는 곳에서 죽고 싶지 않다, 나아가
내가 죽는 곳, 거긴 가고 싶지 않다,
머물고 싶다,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는 [그] 곳에.
 

 


내가 가진 것, 그건 잃고 싶지 않다, 그러나
내가 있고 싶은 곳엔 머물 수 없다, 그러나
내가 사랑하고 싶은 사람들을 떠나야 한다, 그러나
내가 알고 싶은 사람들을 볼 수 없다, 그러나
내가 살고 싶은 곳에서 죽어야 한다, 그러나
내가 죽는 곳, 거긴 가고 싶지 않다
머물고 싶다,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는 [그] 곳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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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정치판과 레스비아

한국 정치판을 생각하는데, 특히 반MB진영을 생각하는데 로마 시인 카툴루스의 시 한편이 생각나는 이유는 뭘까?


[어 친구] 켈리우스 , [좀 봐] 우리 레스비아가, 그 레스비아가
나 카툴루스가 자신보다 더, 내가 가진 모든 것보다 더  
유일무이하게 사랑했던 그 레스비아가
이제 사거리 길에서, 비좁은 뒷골목에서
의기양양한 레물루스 손자들의 좃을 까 빨고 있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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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Caeli, Lesbia nostra, Lesbia illa, illa Lesbia, quam Catullus unam plus quam se atque suos amavit omnes, nunc in quadriviis et angiportis glubit magnanimos Remi nepotes.텍스트로 돌아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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