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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에 갇힌 불쌍한 사랑 기계들
--김혜순
화가가 세필을 흔들어
자꾸만 가는 선을 내리긋듯이
그어서 뭉그러지려는 몸을
자꾸만 일으켜세우듯이
뭉개진 몸은 지워졌다가
또다시 뭉개지네
카페 펄프의 의자는 욕조처럼 좁고
저 사람은 마치 물고기 흉내를 내는 것 같아
입술 밖으로 퐁퐁 담배 연기를 내뿜고 있네
저 사람은 마치
비 맞은 개처럼 욕조마다 붙은
전화기를 붙잡고 혼자 짖고 있네
전화기는 붉은 낙태아처럼 말이 없고
나 전화기를 치마 속에 감추고 싶네
나는 내 앞에 있으면 좋을
사람에게 말을 거네
--한번만 다시 생각해봐요
더러운 걸레 같은 내 혀로
있으면 좋을 그 사람의
젖은 머리를 닦네
탐조등은 한번씩 우리 머리를 쓰다듬고
나는 이제 몽유병자처럼
두 손을 쳐들고
물로 만든 철조망을 향해
걸어나가네
쇠줄에 묶인 개처럼
저 불쌍한 사랑 기계들
아직도 짖고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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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출봉에 해뜨거든 날 불러주오
.불쌍한 사랑 기계 -김혜순시집
.법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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