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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2001년 10월 25일 <친구>를 상영하는 장애인 영화제에 다녀왔다. 일요일 아침, 미사를 드리고 점심을 먹은 다음 아트선재센터로 갔다. 은하, 허중, 성도, 경수, 우석, 현진, 그리고 우리 부부, 하은까지. 폐막식에 맞춰 갔는데 친구들은 약간 지루한 듯했다. 폐막식이 끝난 시각은 3시. <친구>상영까지는 30분이나 남아있었다. 사람들은 우수수 빠져나가고 상영장에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나와 친구들은 여기저기 구경도 다니다가 후원받았다는 바나나도 먹으면서 영화상영 시간을 기다렸다. 바나나를 나눠주던 자원봉사자가 내게 물었다. "저, 은하씨랑 허중씨랑 결혼한다면서요?" 깜짝 놀라서 "누가 그래요?" 하고 물었더니 은하씨랑 허중씨가 그 분에게 "우리 12월에 결혼해요. 꼭 오세요" 그랬다고 한다. 희망사항인가..... 또다른 자원봉사자들은 <친구>를 꼭 봐야만 한다는 얘기를 하고 있었다. 전날 <무사>를 보러왔던 센터의 친구들이 자봉들에게 "내일 우리가 출연하는 영화를 하니 꼭 보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시간은 가고 상영시간이 되었다. 삼동이와 정화가 와서 무척 반가웠다. 밖에서 푸른영상 식구들을 만나는 건 100일도 더된 오래전 얘기니까. 영화가 시작되자 하은이는 소리 때문에 깜짝깜짝 놀랬다. 아기를 안고 밖에 나와서 모니터로 영화를 보았다. 삼동이가 했다는 수화자막은 무척 맘에 들었다. 자막본에다가 수화자막을 한다고 해서 어떻게 들어가나 궁금했었는데 무척이나 신경을 많이 쓴 듯 했다. (삼동아, 정말 정말 정말 고맙다~~!) 영화가 끝나고 관객과의 대화시간이 되어 남편에게 애를 맡기고 무대에 올라갔다. 전화로 미리 주최측에 부탁을 했기 때문에 우리 친구들도 같이 무대에 올랐다. 한 명씩 돌아가며 다들 인사를 했다. 연출의도를 얘기하라는 사회자의 말에 따라 얘기를 하다보니 너무 길어지는 것같았고, 내가 얘기하는 동안 가만히 서있는 친구들을 보니 나도 모르게 조바심이 났다. 다행히 사람들은 우리 친구들에게도 많은 질문을 했다. 난 또 조바심이 났다. 얼른 들으면 동문서답일 듯한 대답들이 많았는데 그 얘기에 대해서 설명을 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하고 생각했기 때문. 그렇지만 가능한한 같이 들으려했다. 같이 했던 관객들에게 무척이나 고맙다. 그들은 친구들의 동문서답도 웃지 않고 들어줬고 솔직한 말이 끝나고 나면 박수로 격려해주었다. 나중엔 신이 나서 서로 말을 하려고 하는 친구들을 보니 빙그레 웃음이 나오도록 기분이 좋아졌다. 사실 걱정이 많았다. 센터의 친구들은 사흘을 연달아 아트선재센터를 찾았다. 폐막식 끄트머리에 30분 후, <친구>를 상영한다는 사회자의 말을 들은 허중은 내게 "선생님, 우리 영화를 상영하는 거예요?" 하고 물었다. 그렇다는 내 대답을 들은 허중의 얼굴이 굳어졌다. 나는 여러 번 말을 했고 다들 알고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허중의 반응에 갑자기 걱정이 밀려왔다. 허중은 은하에게 전화카드를 빌려 집에 전화를 했다. 영화가 끝나면 집에 들어간다는 내용일 뿐이었는데 지켜보는 나는 조마조마했다. 허중에게 기분이 안 좋으냐고 물었더니 허중은 점심때 먹은 추어탕 때문에 배가 아프다는 거였다. 남편은 허중은 긴장하면 원래 그런다고 안심하라고 했지만 난 미안하기도 하고 어떻게 해야할지 몰랐다. 그런 시간을 보냈기 때문에 관객과의 대화 시간에 보였던 친구들의 모습이 좋았다. 친구들이 점점 활발해져 갈 즈음, 시간 관계상 대화는 끝났다. 상영장을 나서는데 유오성이 나오는 <친구>를 보려는 관객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줄을 서 있었다. 약간 씁쓸했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사실 우리의 <친구>가 상영하는 동안 밖에 앉아있는 내 옆에는 이미 곽경택 감독의 <친구>를 보려는 사람들이 와있었다. 아줌마, 아저씨 등 비장애인들이 많았다. 나는 하은이를 재우면서 그들의 대화내용을 들으면서 내가 뭘 바라나...하는 생각을 했었다. 솔직히 난 많은 사람들이 우리 영화를 봤으면 했다. 폐막작으로 선정되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내가 기뻤던 것은 폐막식에 참석한 많은 사람들이 우리의 영화를 볼 거라는 기대감때문에 맘이 설레었다. 그러나 폐막식엔 너무나 사람이 적었고 그나마도 식이 끝나자마자 우수수 빠져나가버렸다. <나는 행복하다> 정도의 관객들이 함께 하였을 뿐이다. 하지만 관객과의 대화를 끝내고 나오면서 서운한 기분은 별로 없었다. 정말 '내가 뭘 바랬나...'하는 생각 뿐이었다. 물론 더 많은 관객들이 함께 하면 좋았겠지만 우리들을 이해해주고 따뜻한 시선을 가지고 지켜봐주는 적지만 친구같은 관객들이 함께 했다는 사실만으로도 기뻤다. 햇빛을 쬐러 밖에 나갔다가 마당에서 놀고있는 친구들을 만났다. 경수씨는 "선생님, 저 또 그런 데에 가고 싶어요" 했다. 친구들은 일요일의 경험을 좋았다고 말한다. 또 같이 하지 않았던 친구들에게 그때의 경험을 자랑스럽게 말한다. 다시 또 그런 기회가 있기를 나 또한 바란다. 영화가 우리들을 서로 자라게 할 수 있다는 것을 믿기에.
2001년 8월 6일 센터의 아버님들이 강원도로 놀러가셨다. 센터에서는 별다른 프로그램을 준 비하지 않았다며<친구>를 봤으면 한다고 했다. 일요일 저녁, 남편이 돌아오 자마자 난 아버님들의 반응을 물었다. 당신들 자식이 다들 착하게만 나온 게 아니라서 어떻게 생각하실지 무척 걱정되었다. 경수씨 아버님의 반응이 가장 걱정스러웠는데 별다른 말씀은 없으셨다고 한 다. 허중씨 아버님은 한 사람이 너무 부정적으로 나온 건 문제라고 말씀하 셨다고 한다. 다행스럽게도 상훈씨 아버님이나 다른 분들이 좋게 봐주셨다 고 한다. 작년에 <나는 행복하다> 테이프를 집에 보내드렸지만 보신 분들 은 많지 않았다. 이번 <친구>를 본 아버님들은 당신 자식들의 몰랐던 모습 들을 볼 수 있어서 좋았다는 말씀을 하셨다고 한다. 아버님들이 가장 좋아 했던 장면은 경수씨를 제주도로 데려갈 것인가, 말 것인가를 논의하는 자리 에서 민철씨가 "그래도 우리 식구니까, 가족이니까 데려가자"는 부분. 센터 친구들의 부모님들이 가장 걱정하는 건 센터가 계속 당신들의 자식을 책임질 것인가이다. 특히 작업을 제대로 수행해내지 못하는 광수씨나 상훈 씨의 아버님은 그런 걱정이 더 크다고 한다. 그런 아버님들에게 세 번에 걸 쳐 돈을 훔친 경수씨를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감싸안는 센터 친구들의 모습 이 크게 다가갔나보다. 세차팀이 전혀 나오지 않는 부분에 대한 지적도 있었다고 한다. 은하씨 아 버님은 CCTV설치까지 얘기하면서 앞으로도 계속 찍자고 말씀하셨다고 해 서 마음이 놓였다. 남편은 이번엔 경수씨 도벽이 확실히 고쳐질 것같다고 말했다. 그 전엔 경수씨는 부모님께 혼만 났었는데 이번에 영화를 본 아버 님이 경수씨에게 조용히 타일렀다고 한다. 영화가 현실을 반영하고, 그렇게 만들어진 영화가 다시 현실을 변화시킬 수 도 있다는 가능성을 보는 건 기분좋은 경험이다. 여전히 나의 영화는 등장 인물들에 전적으로 기대고 있고 난 많이 부족하다는 걸 안다. 그러나 '나아 졌다'는 푸른영상 식구들의 평가나, 센터 선생님들의 칭찬은 큰 힘이 된다. 앞으로 푸른회원들을 비롯해 몇 번의 상영 기회가 있을 것이다. 듣지 못한 더 많은 말들을 듣고 또 나의 뜻이 관객에게 가닿지 못하는 냉정한 시간을 보내며 속이 상할 수도 있겠지만 그런 모든 시간들이, 그 경험들이 새로운 작업의 밑거름이 될 것을 믿는다. 믿어야만 하는 것이다.
2001년 7월 22일 밀린 일기를 쓰는 기분으로 글을 쓴다. 휴일의 센터엔 아무도 없고 전용선 이 깔린 유일한 컴퓨터 앞에 앉아있다. 아기는 어제 친척동생으로부터 얻은 유모차에 누워 옆에서 자고 있다. 아직도 아기의 이름은 짓지 못했다. 7월 5일, 병원 예정일 이틀 빨리 아기를 낳았다. 낳았다기 보다는 꺼내졌다 는 말이 맞겠지만. 예정대로라면 7월 3일까지 <친구>의 작업은 끝났어야 했다. (음악이 만들어지는 날이었다) 그러나 자막 작업에서 생각지 못한 문 제가 생기자 두줄 자막을 모두 한 줄로 바꾸는 데에 3일 정도가 더 소요되 었다. 음악이 온 7월 3일, 랜더링을 걸고 집에 갔다. 다음날 와보니 랜더링 은 멎어있었다. 용량 부족이 이유였다. 전체 60분 분량을 세개로 나눠 가기 로 했다.
20분을 랜더링, 테잎으로 받고 프리뷰파일을 지워다시 용량을 확보하는 식 이었다. 또다른 문제가 발생했다. 완성본을 테잎으로 받는데 자꾸 튀는 것이었다. 마치 예전에 LP판이 튀면 노래의 같은 소절이 반복되듯이 에러가 발생하면 같은 장면이 자꾸 반복되고 반복되는 모양 그대로 테잎에 담기는 현상이다.그러다 컴퓨터는 다운이 된다. 이런 일이 반복되고 또 랜더링에 많은 시간이 소요되는 동안 나는 드디어 지치고 말았다. 3월부터 시작된 작업 어느 시기에도 고민은 있었지만 지치진 않았었다. 그러나 출산을 앞둔 며칠 동안 그래, 자막에서 문제가 발생할 때부터 나는 무척 초조해졌고 지쳤고, 짜증이 났고, 마지막엔 울고 싶어졌다.
7월 4일 밤, 마지막 부분을 랜더링을 걸고 집으로 갔다. 밤 12시 경에 도착 해보니 남편이 밥을 해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내 생각에 그는 무척 참고 있 는 듯 보였다. 며칠 전에 약간의 서운함을 비쳤고 이제 다 와서 그만 둘 수 는 없다는 내 말에 수긍하는 듯 했지만 그래도 아기와 남편에겐 미안했다. 내일, 테잎에 받기만 하면 된다고, 이제 정말 출산 준비를 할 수있다는 말을 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날 아침 5시 30분 쯤 이상한 기분에 눈을 떴다. 뜨거운 물이 쏟아지고 있었고 화장실에 가보니 갈색의 분비물이었다. 이슬인가 하고 병원에 가보 니 아기가 태변을 본 거라고 했다. 태변을 본 건 좋은 증상이 아니다. 당직의사는 "아기가 스트레스를 받을 때, 괄약근을 열어버리는 경우가 있다"고 말했다. 4시간 정도의 시간이 흐르고 담당의사가 출근, 태변 색깔이 너무 진하니 수술을 해야 한다고 했다. 아기가 태변을 먹으면 위험하다며. 자궁은 3분의 1정도 열린 상태였다. 언젠가 책에서 아기가 태변을 먹으면 정신지체가 될 확률이 높다는 글을 읽은 기억이 났다. 우리 부부는 눈물을 글썽이며 의사의 말에 따랐다. 수술준비를 하는 동안 선호형에게 전화를 했다. 자연분만만 기대하고 그것만 준비했던 나는 수술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잘 몰랐기 때문에 누군가에게 뒷마무리를 부탁해야만 했다. 선호형과의 통화가 끝나자마자 수술에 들어갔다. 마취과 의사인 듯 싶은 남자가 "이제 자요"라는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나는 의식을 잃었다. 깨어나보니 남편이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입원실로 옮기고 얼마 안 있어서 정훈형과 통화를 했다. (내가 전화를 했는 지, 정훈형이 전화를 했는지 잘 기억이 나지않는다) 나중에 들어보니 창영 이 마무리를 했다고 한다. 미안하고도 고맙다. 나머지 분량을 테잎에 받는 일도 순조롭지만은 않은 듯했다. 가편집 없이 곧바로 프리미어 편집으로 들 어간 탓에 캡쳐 분량이 많았고 집의 컴퓨터와 사무실 컴퓨터의 용량을 거의 다 써버렸기 때문에 마지막 랜더링 작업이 어려워진 듯했다. 아기는 4킬로그램, 자연분만을 했어도 무척 고생을 했을 거라고 수술을 한 게 잘한 일이라고 남편은 위로를 했지만 사실 말하지 못한 미안함이 있다. 아기가 스트레스를 받은 건 내가 스트레스를 받았기때문은 아닐까, 그래서 태변을 보고 수술을 해야 했던 건 아닐까, 그런그런 생각에 미안함은 오래 갔다.
그리고 작업 또한 제대로 마무리를 짓지 못해서 창영이, 정훈형이, 선호형이 테잎으로 받는 것때문에 동분서주했고 경화가, 삼동이가, 시홍이가 자료집 작업 때문에 품을 팔아야 한단다. 아 참, 진열이가 나 때문에 머나먼 홍릉까지 갔다왔다는 얘기도 들었다. 그밖에도 많이 애써주고 관심가져준 푸른영상의 식구들 "미안하고 참 고맙습니다." 우리 아기는 '짱구는 못말려'의 짱구를 닮은 것같다. 남편의 통통한 볼을 그대로 빼닮아서 그렇게 보인다. <친구>가 푸른회원들에게 보여진다는 얘기 를 들었다. 문병을 왔던 먼지네 미영이는 제목이 친구라니까 "어어, 유행에 영합하는 거 아냐?" 하는 반응을 보였는데 절대 아니라고 말하고 싶지만.... 많은 분들의 도움으로 완성한 <친구>가 나름대로 의미를 가질 수 있었으면 정말 좋겠다.
2001년 6월 30일 복병은 예상치 못한 곳에서부터 치고 나온다. 그림 편집을 한 고비 넘겼다 고 생각했더니 자막 작업이 상상을 초월하는 시간을 끌고 있다. 포토샵 밖 에 못 쓰다가 비주얼CG를 배워서 좋아하며 자막 정리를 다 끝냈는데 줄간 간격이 먹지 않는다. 두줄 자막은 몽땅 다 줄이 딱 붙어 있어서 글씨가 겹 쳐질 정도이다. 보기 불편해도 그냥 해버리려고 임포트까지 받았는데 그래도 좀 망설여져 정훈형에게 문의를 해봤더니 방법은 달리 없지만 줄간 간격을 조정하는 게 좋겠다는 의견이다. 그래서 다시 자막을 다 한 줄로 바 꾸었다. 지금 토요일 2시. 예전에 영어 자막을 이틀만에 끝내봐서 넉넉 잡아서 금요 일까지는 끝날 줄 알았는데 여전히 자막넣기를 못하고 있다. 전체 대사를 다 자막으로 하려니까 넣어야 할 게 대사만 800개, 소개 자막까지 하면 850 개 정도 될 거 같다. 이쯤 되니 비디오편집이 단순 노가다라는 걸 절실히 느낀다. 그래도 상엽이를 보면서 위로를 얻는다. <4월 9일> 영어자막을 넣 는 상엽이는 인물만 100명이라니까... 상엽이 보단 훨씬 나으니까. ^^ 6월 30일, 수치상으로는 오늘이 출산예정일인데 병원에서는 7월 7일 정도로 보고 있다. 화요일까지 음악이 오고... 가능하면 내 손에서 끝내고 싶은데 그건 아기 맘이지. 작업에 신경쓰느라 아기에게 많이 마음을 못 주고 있지만 뭐...그건 다 낳고 나서 잘 키우려고 하는 맘 때문이니까 아기도 이해하리라 믿는다. 산다는 게 다리를 건너는 것같이 명확한 마디로 이뤄져있다고 생각을 했는 데 요즘엔 그저... 모퉁이 길을 걸어가듯이 미지의 어떤 것을 발견하거나...당하면서 살아가는 것같다. 지금만 해도 한치 앞을 내다보기 힘드니까. 어느 날은 작업도 그렇고 출산도 그렇고 희망에 차 있다가 또 어느 날은 나한테 미래가 있을까,불안해지기도 한다. 김장김치를 묵혀서 가을에 먹으려고 냉동실에 한 포기씩 넣다가 잠깐 그런 생각을 했다. '내가...이 김치를 먹을 수 있을까?' 그런 식으로 불안이 밀려오면 시간이 별로 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또 어떤 때는 내 앞에 펼쳐질 새로운 인생이 날 많이 넉넉하게 해줄 것같다는 기대감에 가슴 벅차 하기도 한다. 엄마, 언니들, 그리고 수많은 선배들이 다 그렇게 살아갔겠지. 이제 내 삶은 또다른 모퉁이로 접어들 것이다. 다들 그렇게 살아간 것처럼.
2001년 6월 15일 그동안 1차 가편집 시사회가 있었고, 인디포럼에서 <나는 행복하다> 상영 이 있었다. 두 번의 일을 거치고서 난 좀 의기소침해졌다. 가편집을 본 사람들의 의견은 크게 두가지로 갈렸다. '무척 재미있다'는 평과 '무슨 얘기를 하려는지 모르겠다'는 것. 다들 그러겠지만 나 또한 듣고 싶은 말만 들으려 했을 뿐. 그러다 인디포럼에서 <팬지와 담쟁이>와 함께 상영되는 <나는 행복하다>를 위해 아트선재에 갔다. 1년여의 시간이 지난 다음에 보는 내 영화는 빈틈도 많았고 어둠 속에서 지켜보는 관객들의 반응은 나의 의도와는 많이 달랐다. 좀 냉정한 분위기였던 것같다. 며칠 동안 부끄러워하며 보냈다. 시사회를 끝내고 나면 항상 방어적으로 반응한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게 된 다. '자신감'과 '폐쇄성'은 그 경계가 모호한 것같다. 의도가 닿지 못한 장면들에 대한 평을 듣다보면 슬그머니 화가 나기도 하고 '당신은 그렇게 생각해요. 누군가 내 뜻을 알아주는 사람은 있으니까' 따위의 생각으로 스스로를 위로하기도 한다. 그래서 결과적으로는 듣고 싶은 말들만 추려듣는 것이다.그러나 인디포럼에서의 시간은 좀 충격이었던 것같다. 푸른영상 사람들이야 애정을 가지고 내 영화를 지켜봐주는 것이고, 어쩌면 표본일 수도 있는 생각들이겠지만 인디포럼과 같은 곳에서의 외부상영은 그런 것과는 또 다른 것이다. 상영시간 동안 나는 많이 부끄러웠고 무엇보다 내가 만든 영화가 배우를 쓴 드라마가 아닌 바에야 나 때문에 우리의 등장인물들이 우스워질 수도 있다는 걸 느꼈다. 10명 중에 8명이 공감하지 못하는 장면들은 버려야 할 것같다. 특히나 내 영화의 등장인물들은 정신지체인들이기 때문에 자칫하면 웃음거리에서 끝날 수도 있으니까. 부끄럽다는 내 말에 김동원감독님은 "그런 부끄러움은 평생 간다"는 말로 더 겁을 주셨다. 그렇지, 아직도 푸른영상 창고에는 <나는 행복하다> 테이 프가 50개 정도 남아있고, 작품목록의 끄트머리에 이름이 올라있으니까. 생 각해보면 난 끝내는 것만 중요하게 생각한 것같다. 작업을 완성한다는 것이 결코 끝이 아닌 것을. 두 번째 작업이 끝난 다음에 또 부끄러워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열심히...잘....해야 할텐데. 걱정만 태산처럼 쌓여간다.
2001년 4월 26일 촬영이 얼추 끝났다. 그동안 두 번 정도 작업일지를 올리려 했으나 한 번은 잠깐 자리 비운 사이에 누군가 창을 닫았고 또 한 번은 삼동이 컴퓨터가 다운되는 바람에 그냥 날아갔다. 촬영 기간 동안 한 번도 못 쓴 작업일지를 이제사 쓴다. 촬영을 시작하면서 난 두가지 다짐을 굳게 했다. 첫번째, 감정에 휘말리지 않기, 둘째, 자신감을 갖기. 특히 자신감의 문제는 첫번째 작업기간 동안 내내 회원들에게 피해를 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회원과 나 사이의 비밀조차도 선생님께 일러바치는 낯뜨거운 모습을 많이 보였기 때문에 정말 이번엔 좀 인간적으로 가고싶었다. 화요일마다 장애인센터에서 정신지체인에 대한 교육을 받으면서 내가 느꼈던 것은 정신지체인과 함께 생활한다는 것에는 특별한 정답은 없다는 것이었다. 나름대로 자신감을 가지고 내 생각대로행동하는 것이 회원들에게 피해만 주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한 달 가까이의 촬영 기간 동안을 난 감정적인 스스로의 모습에 실 망하며 안타까워하며 보냈다. 작년보다 훨씬 더 내 마음에 가까이 다가온 회원들의 모습은 끊임없이 날 혼란스럽게 만들었다.라르슈 공동체라는 것이 있다. 프랑스에서 시작된 것으로 사료되고 지금은 세계 곳곳에 존재하고 있는 그것은 정신지체인들의 공동생활체이다. 언제부터인가 남편은 그런 공동체를 꿈꾸고 있다. 도시생활이라는 것이 얼마나 정신지체인들을 소외시키고 힘들게하는지를 아는 그는, 라르슈공동체처럼 농촌에서 자급자족할 계획을 꾸리고 있다. 아내인 나 또한 그의 계획으로부터 자유로울 순 없다. 우리가 결혼을 하기 전부터 그는 자신의 계획을 얘기했었고 막연하게나마 난, 나도 그와 함께 공동체의 일원이 될 것을 안다. 그런 가까운 미래 때문인지 회원들의 모습은 단지 찍히는 사람으로만 다가오지 않았다. 2년 전, 처음 그들을 만났을 때 난 서로가 서로를 돌보는 그 마음에 감동했 었다. 작은 일에 기뻐하고 사람을 반가워하고 그리고.... 몸이 덜 불편한 이가 더 불편한 이를 돌보는 그 모습이 오래도록 가슴에 남았고 내가 작업을 시작하게 된 동기는 그런 모습에 대한 감동때문이었다. 그러나 2001년 4월 한 달동안 난 강한 자에겐 약하고 약한 자에겐 강한 비겁, 맛있는 것을 독차지하려는 이기, 자기보다 못난 이를 무시하고 따돌리는 차가움에 질렸다. 또한 나라는 존재는 그저 지켜보는 이이기 때문에 선생님들 앞에서는 삼가하는 행동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회원들 앞에서 지켜보기만 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를 뼈저리게 느꼈다. 어느 날, 어묵 반찬 때문에 한 회원과 싸우고(난 싸우고야 만 것이다!) 난 내 행동에 대한 후회때문에 울고 싶도록 괴로워졌다. 촬영보다도, 작업보다 도, 내 삶에 내내 밀접하게 닿아있을 그들과 그런 식으로 살아가야 할 내 미래가 암담해졌다. 그리고 무엇보다....난 그 회원이 미워졌다. 내가 미워하는 감정을 갖고 촬영을 하면 보는 사람에게도 그 느낌이 전이된다는 것을 난 작년 작업에서 충분히 알았기 때문에 내 감정이 정당한가에 대해서 자신 이 없어졌다. '내가 미워하는 저 회원을 내 영상물을 본 다른 사람들도 미워하면 어쩌 지?' 이런저런 걱정 때문에 난 작업기간 내내 괴로웠다. 그러면서 든 생각, 어쩔 수 없이 난, 카메라를 든 난, 회원들과의 관계에서 강자일 수밖에 없다는 것. 이제 써치를 한다. 촬영기간 내내 괴롭혔던 그 마음이 어떻게 그림에 담겼 는지 냉정하게 바라보고자 한다. 남편은 말한다. "좋은 씨앗이든 나쁜 씨앗이든 뿌려봐야 안다. 싹이 나고 자라봐야 잡초를 솎아 낼 수 있는 것. 네 마음밭에 이제 씨를 뿌렸으니 시간을 갖고 마음결 을 다듬어라" 냉정하지 못한 나의 특성은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사람으로서 큰 장애라는 말을 들었었다. 두번째 촬영까지 그리하고 나니 그건 바꿀 수 없는 게 아닐 까라는 생각까지 든다. 공과는 나중에 가리더라도 이번 작업 내내 계속되었 던 감정의 부침은... 어찌할 수 없이 안고가야할 내 모습인 것같다. 난 그렇게 후반작업을 시작하고 있다.
2001년 4월 20일 내가 처음 다큐멘터리를 배운 건 태일형의 <22일간의 고백> 조연출을 할 때이다. 그 때 태일형은 '말랑말랑한 작업'이란 말을 즐겨 썼었다. 아마도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장애인 작업은 '말랑말랑한 작업'에 속할 것같다. 택진의 <보이지 않는 창살>이나 태일형의 <4월 9일>과 같은 작업들처럼 경찰이 탄압하는 것도 아니고 현실의 법 때문에 발언을 피하는 일도 없을 테니까. 그런데 내 작업방식의 문제인지, 아니면 말랑말랑한 작업이라서인지 작업을 할수록 난 치사해지는 것같다. 오늘 허중씨를 따라갔다. 국회단지를 내려갈 때까지는 은하, 성도씨랑 같이 내려갔는데 큰 길에서 헤어져 돌아오는 길에 허중씨는 갑자기 "쟤네들 노래방 가는 거 아니예요?"하며 신림사거리 노래방에 한 번 가보겠다고 그랬다. 걸음빠른 허중씨를 따라가는 건 너무 힘이 든다. 난 '그냥 집에 갔으면...'하면서도 말은 못하고 그냥 따라갔다. 카메라를 들었지만 찍을 필요를 느끼진 않았다. 그러면서도 머리는 막 돌아갔다(이런 걸 잔머리라고 하는 것같다). '찍을 필요는 없지만 허중씨랑 얘기해서 찍을 거리를 만들어야지!'하며. 물 론 은하씨는 없었고 허탕을 치고 돌아오면서 갑자기 내가 치사해지는 것같 았다. 허중씨는 항상 몸이 무거운 내 걱정을 해주고 정말 순수하게 마음을 터놓는데 나는 그런 얘기들을 어떻게 작업에 써먹을까하며 듣는 것이다. 또 하나. 광수씨는 자해를 한다. 기분이 나쁘거나 스트레스가 쌓이면 자신의 뺨을 때리는데 난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센터의 선생님들은 작년에도, 올해에도 내가 없을 때에만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에 대해 신기해한다. 어떻게든 그 장면을 찍고 싶은 나는, 촬영이 막바지에 이른 지금 은근히 기다리기까지 하고 있는 것이다. 스스로에게 그 마음을 들키고 나면 난 화들짝 놀란다. 영화를 찍을 욕심에 광수씨의 상태가 나빠지는 걸 바라는 거니까. 그런 마음이나 행동들은 사실 비도덕적인 것이라 생각한다. 소재주의를 욕 하면서 사실 내 안에도 그런 경향은 없지 않다. <나는 행복하다> 뿐 아니 라 지금의 작업도 난 우연에 기대고 있는 것같다. 매일 아침 '오늘은 어떤 일이 일어날까' 하는 생각으로 하루를 시작하니 그것이 센터 친구들에게 좋 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꺼리'가 될 것인가, 아닌가로 판단하기 십상인 것이다. 좋은 작품을 만든다고해서 그런 문제들이 해결되는 건 아닐 것이다. 만약 내 친동생이나 우리 엄마를 찍는다면, 그런 상황에서도 내가 같은 태도를 보일까? 스스로 솔직해지고 고민해야할 문제인 것같다. 정말로 나는 센터 친구들을 가족이라고 생각하고 있는지 다시 한 번 되물어볼 일이다.
2001년 3월 21일 지난 주 수요일부터 장애인센터 '함께사는 세상'으로 출근하고 있다. 센터는 매달 15일을 전후로 무척 바쁜데 발송해야할 세개 회사의 홍보물이 대부분 15일을 정기발송일로 잡고 있기 때문이다. 이주일전 센터 전체회의때 나의 기획안을 검토하기로 했는데 작업량이 많아서 미뤄졌다. 다행히 저번 주 화요일, 선생님들은 바쁜 와중에 시간을 내서 나의 기획안을 검토해주었고 촬영을 허락했다. 그러나 두번의 관문은 여전히 남아있다. 회원들과, 회원들의 부모님께도 허 락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찍는 것을 싫어하는 회원들에게는 카메라를 들 이대지 말아야한다고 한 선생님이 말했을 때 나는 작년의 경험을 말했다. 허중씨와 민우씨의 경우 촬영기간 내내 찍으면 싫다고 했었지만 작업의 완 성을 가장 많이 기다렸던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곤란할 때가 그런 것이다. 회원들의 말을 말 그래도 받아들이는 것이 진정 한 존중이라고 말하긴 어렵지만 또 그렇다고 설득이 가능한 것도 아니기 때 문이다. 이번 주 토요일의 부모모임이 지나고 나면 그 자리의 부모님들이 촬영을 허락하고 나면 아마도 다음주 쯤 회원들에게 촬영에 대해서 말할 것 같다. 어떻게 될지 잘 모르겠다. 이로써 작업일정은 한 달 정도 미뤄지고 있다. 출산을 생각하면 좀 암담해 지기도 하지만 나의 상황과 관계없이 정말 이번엔 제대로 잘하고 싶다는 생 각에 다시 마음을 다잡는다. 일주일 정도 센터에서 생활하다보니 여러가지 생각이 든다. 센터는 2층 양옥집 두 채를 같이 쓰고 있다. 비가 새고 카메라를 돌릴 데가 없을 정도로 좁았던 옛날의 센터에 비해 환경이 많이 좋아졌다. 작업을 하다가 잠시 쉬는 시간, 담벼락에 기대어 따뜻한 햇볕을 쬐거나 황진이,아롱이(강아지들)와 함께 노는 회원들의 행복한 모습을 보면 마음이 따뜻해진다. 황진이가 아픈 것 같다고 이마에 손을 대보는 허중씨의 엉뚱하고도 따뜻한 마음이 예쁘다. 강아지들은 내가 먹을 것을 자주 줘서인지 자꾸 올라타려고 하는데 흙묻은 발 때문에 옷이 더러워지고 만다. 새로운 회원 종범씨가 그런 강아지들을 "야, 선생님 옷에다 발을 닦으면 어떡하냐?"라고 혼내서 그 반짝이는 생각이 사랑스러워 한참을 웃었다. 공간만 넓어진 것이 아니라 활동영역도 넓어졌다. 절반의 회원들은 센터에 서, 또 절반은 강남의 세차장에서 일한다. 또 일주일에 이틀은 근처의 청소 년센터에서 풍물을 배운다. 가능하면 나레이션을 안쓰고 싶은데 그러려면 에피소드들이 공간적으로 고루 분포되어야지만이 자연스럽게 센터의 소개를 할 수 있을 것같다. 계획을 잘 세워야 할 것같다. <나는 행복하다>가 이방인의 시선에서 시작했다면 지금의 작업은 제대로 아는 사람의 제대로 된 발언이기를 바란다. 하고 싶은 말을 잘 할 수 있을 까? 나는 이번엔 우리 회원들의 "직업인으로서의 당당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 돌봐야하고 동정심을 갖게하는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스스로의 힘으로 돈을 벌고 생활을 꾸려가려하는 그런 모습을 담고 싶은 것이다. 솔직히 많은 부담과 책임감을 느낀다. 전편의 작업에 대해서, 그 작업과정에서의 관계들에 대해서 난 여전히 미안함을 가지고 있다. 나는 어떤 생각으로 작업을 끝냈던가? '지금 이렇게 불안한 시작이지만 난 계속 당신들 곁에 있을거니까...' 그런 자기위안적인 생각으로 <나는 행복하다>를 끝내고 그렇게 회원들에게 보이고 또 그렇게 사람들에게 알려지고.... 다른 선배들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부채감이 워낙 큰 것같다. 가끔 학생들이 수행평가때문에 센터에 봉사활동을 오면 선생님들은 <나는 행복하다>를 보여주곤 한다. 센터에 대한 이해를 가능하게 한다는 생각에서 이다. 6월말 완성이라는 촉박한 작업일정 속에서 나는 이번에 내가 만든 영 상물이 그럴 때 보여지는 것이었으면 한다. 너무 쉽게 가려고 하는 건 아닌 가. 그런 생각을 안하는 건 아니지만 난 또 그렇게 생각한다. '난 계속 당신들 옆에 있을 거니까...' 이런 생각이 어쩌면 독이 되진 않을까...그런 불안함도 있지만 어쨌든 지금 은 그렇게 맘 먹고 있다. 회원들의 진정한 친구가 될 수 있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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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일지 잘 읽고 있어요. 읽으면서 이렇게 작업했구나 하면서 기운도 얻고 그래요. 이글은 요즘 딱 제 심정이에요. 그저 모통이를 돌고 있다는 느낌...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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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박타박 걷는 기분으로 한걸음 한걸음 딛다보면 새로운 길이 나오기도 하고.... 그럴 거예요.^^부가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