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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7/11/21
    한 쪽 문이 닫히면(13)
    알엠

한 쪽 문이 닫히면

1.

한 쪽 문이 닫히면 다른 쪽 문이 열린다.

 

첫눈 오던 날,  문득 이 속담이 생각났다.

지난 달 지출이 너무 과하여 이번 달 통장이 텅 비어버렸다.

월초 카드결제 후 텅 비어버린 통장을 보니 나오는 건 한숨 뿐.

육아 때문에 모든 일을 접은 지금 매달 보름이 넘어서면 머리가 아프다. 

내 주변 사람들은 나라는 사람이 가정경제에 기여하는 바가 별로 없다 생각하지만

(엄마, 아이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같다. 심지어 나 조차도)

이런 상황을 맞을 때마다 내가 얼마나 큰 일을 해왔는지 알 수 있다! (^^;)

 

어쨌든 한 달의 절반도 못 왔는데 어찌 사나 싶었는데

갑자기 강의를 하게 된 것이었다!

강의가 끝난 후 여느 때와 다르게(보통은 계좌번호를 알아간 후 몇날 며칠 후에 입금)

흰 봉투를 받았다.

돌아오는 길, 365코너에 들러 입금을 하니 마음이 든든.

집에 도착할 즈음 진눈깨비가 함박눈으로 변해있었다.

어른들은 길 막히기 전에 잘 왔다고 기뻐하고

아이들은 눈이 쌓이겠다고 기뻐하며 기분좋은 하루를 마감했다.

 

2.

지금은 새벽. 한 달에 한 번 쓰는 영화 원고 때문에 깨어있다.

담당기자가 출산때문에 육아휴직에 들어가서 새로 담당기자가 왔는데

원고마감을 잘 지켜야만 할 것같았다.(좀 무서웠다고나 할까)

그런데 몇 달 전, 내가 쓴 글이 잘못 나가는 사고(?)가 발생했고

처음으로 긴 얘기를 나누게 되었는데

메일에 "항상 마감을 잘 지켜주셔서 감사합니다.

원고가 제 때 안들어와서 속상할때가 많아요 "라는 내용이 있었다.

아...원고를 제 때 안내는 사람이 많구나.

그런 깨달음을 얻은 후부터는 어찌된 일인지 마감을 꼬박꼬박 어기고 있다.

월요일이 원고마감인데 지금 보냈다.

마감증후군이라는 거...참 이상하다.

놀 때까지 놀다가,

놀기 힘들면 청소나 빨래처럼 평소엔 미뤘던 일들을 열심히 하고

아기가 평소보다 100배는 더 예뻐 보여서 괜히 미적거리다가

막판에 겨우 책상 앞에 앉는다.

 

그런데... 마감 안 지키는 사람이 많다는 얘기를 듣는 순간

나도 모르게 막판이 원고마감 다음날이 되어버렸다.

참 이상한 일이야. 나도 어쩔 수 없는 나.

 

 



가끔 생각한다.

사는 게 구차하다고.

학력고사를 보자마자 담임선생님이 과외를 소개시켜주셨다.

학비를 벌어야만 대학에 갈 수 있다는 걸 아셨기 때문이다.

12월부터 시작했던 과외는 3월에 짤렸다.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을 가느라 과외를 미뤘는데

그집 엄마가 엄청 칼같은 성격이라서 짤렸다.

처음 과외에 짤리던 날, 집에 와서 내쳐 잠만 잤다.

그 때 처음 알았다. 내가 감당하기 힘든 일을 겪으면 자는구나.

그 집 엄마가 내게 실망했다고 말하며 그만 오라고 말하던 그 순간을

나는 오랫동안 잊지 못했다. 어린 마음에 상처였던것 같다.

그 뒤로도 끊임없이 과외를 했고 짤리는 데에 익숙해졌다.

 

과외를 더이상 할 수 없게 되자 학교앞 서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그 때 우리 학교 앞에는 장백이라는 큰 서점과 황토라는 작은 서점이 있었다.

장백은 커서 분류가 잘된 반면, 황토는 작아서 책 위치를 외우는게 쉽지 않았다.

황토에서 먼저 일했었던 점원이 친한 선배라서 나는 점원 채용소식을 미리 들었고

그 선배가 그림을 그려가며 책 분포도를 알려준 탓에 나는 곧 채용이 되었다.

황토의 주인이 형부의 친구였는데 나중에 주인이 그런 얘기를 해주었다.

"00(형부 이름)가 말하기를 우리 처제가 서점에 취직하려고 공부를 열심히 하더라고"

어쨌든 그런 노력을 높이 사서인지, 아니면 책 찾기 시험에 잘 통과해서인지

서점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그 때 임금이 시간당 천원이었던가? 잘 기억이 안난다.

 

기억하기로 가장 시급이 쌌던 일은 서빙이었다. 시간당 700원.

학교 앞 호질이라는 까페에서 오후 2시부터 밤 11시까지 일하는 거였는데

나는 혼자 계산하기로 열심히 일을 하면 학비는 벌 수 있겠다 싶었다.

언니가 엄마한테 일러서 일한 기간은 한 달 뿐이었지만.

학교에 집회가 있던 어느 날, 호질 앞에 전경들이 줄지어 앉아있었고

그중 한 전경이 내게 물을 달라고 해서 물컵을 건네주며

'친구들은 싸우고 있는데 내가 물을 줘도 될까?' 하며 살짝 고민했던 기억이 난다.

생각해보면 19살의 나는 좀 멍청했고 많이 단순했던 것같다.

 

갑자기 예전 기억이 떠오르는 건 역시나 돈 때문이다.

사는 게 구차하다는 생각 또한....돈 때문이다.

몇 년 전, 어떤 영상제의 심사를 한 적이 있었는데

일이 끝난 후, 생각보다 많은 돈이 들어와 있었다.

나는 전화를 걸어서 뭔가 잘못된 것같다는 얘기를 했고

담당자는 아니라고, 정확한 액수라고 확인을 해주었다.

그 뒤로 몇 번 더 그런 경험을 하면서

심사라는 일이 글쓰기나 강의, 편집일 보다 돈을 많이 받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냥 그렇게 살아가면 되었겠지.

하지만 어느 날, 나는 내가 관여하는 그 일이

내가 정한 원칙에 어긋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자세한 얘기는 할 수가 없다 )

그래서 작년과 올해에는 후배에게 모든 사정을 다 얘기한 후 넘겼다.

그 과정 또한 구차하다.

나는 내가 거절하는 진짜 이유를 말하지 못한 채

아이가 어려서 시간이 없다고, 그래서 훨씬 더 좋은 분을 소개해드리겠다고 말했다.

후배에게는 내가 왜 그것을 할 수 없는가를 설명하고

그래도 너는 하겠느냐라고 물었고....그애는 괜찮다고 맡아주었다.

그냥 이렇게만 끝나면 또 얼마나 스스로를 대견해하겠어?

그런데... 쪼들리다보면

그렇게 거절한 일들이 하나 둘씩 머리 속에서 반짝반짝 떠오르는 거다.

그 일을 했더라면, 그랬더라면....

그렇게 흘러가는 마음을 다잡다보면 쓴웃음이 난다.

 

첫눈 오던 날 기분이 좋았던 건 내 영화들을 소개하는 강의였기 때문이다.

이제 10년. 삶이 어떻게 나를 이끌었고

나는 어떻게 영화로 삶을 기록했는지를 함께 나누는 자리였기 때문이다.

나는 이제는 부끄럽게 돌아보는 첫 영화의 기억과

머리 속 생각이 깨어지며 한 뼘 정도 세상 보는 눈을 넓혀줬던 두번째 영화와

다큐멘터리가 치유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해줬던 세번째 영화와

그리고 지금 더디게만 진행되고 있는 네번째 작업을 소개하며

내가 선 자리와 앞으로 가야할 길을 가늠할 수 있었다.

강의를 준비하며 내가 떠나왔지만 기억해야 할 사람들의 얼굴을 보며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무엇보다 내 작업을 기다리고 있을 보육노동자들을 생각하며

미안함에 낯이 뜨거워지기도 했다. 어쨌든 좋은 시간이었다.

 

한쪽 문이 닫히면 다른 쪽 문이 열린다.

괜히 닫힌 문을 바라보며 아쉬워하지 말기를.

내 선택에 대해서 후회하지 말기를.

비틀거리며 가는 것이 길이라는 걸 알지만 너무 많이 비틀거리지는 말기를.

이 새벽, 나에게 타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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