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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7/10/16
    반전(끝)(10)
    알엠
  2. 2007/10/11
    반전(1부)(10)
    알엠

반전(끝)

글을 쓰기로 마음을 먹었을 때에는 상태가 괜찮아서

모든 게 희망적이었고 희망적인 글을 쓰고 싶었는데

1편을 쓴 후 급격한 의욕상실로 어찌할 바를 모를 시간을 보냈다.

단 두 조각 뿐인데도 이렇게나 힘든데...

연재하는 사람들, 특히나 '말하는 벌레', 대단하십니다~ ^^

 

마음만 먹다가 충동적으로 글을 시작한 건

오랜만에 학교 사람들을 만나고 그 자리가 참 좋아서였다.

20대에는 학교 사람들을 만나면 선 자리들이 너무 다르고

그래서 고민하는 게 또 너무 달라서 좀 외롭다고 해야하나 그랬었는데

같이 나이들어가는 처지라서 그런지 통하는 게 많더라.

역시 사람은 서로 어울려가며 살아가야하는 것같다.

친밀하지 않은 사람들과의 만남은 신경을 곤두서게 하고

행간의 뜻을 고민하게 되고 말해지는 것 이면을 혼자 상상하느라 골치아픈데

함께한 시간이 많은 사람들은 10년이 지나도 20년이 지나도

어제 만난 듯 스스럼이 없다. 그게 관계의 소중함이겠지.

 

드디어 <천개의 공감>을 빌렸다.

동작도서관에는 비슷한 취향의 독자들이 많아서(뭐 어디나 그렇겠지만)

읽고 싶은 책들은 예약자가 줄을 서있다.

최근 읽은 책들은 다 성공이다.

<남쪽으로 튀어>, <핑거 스미스>,<그리고 삶은 나의 것이 되었다>, <천개의 공감>

모두 재미있고 의미있고 유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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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에....

음....며칠에 걸려 쓴 반전 2부를 more에 몰아넣고서

잡담삼아 이 글을 쓰는 중이었는데 은별이를 재우고 온 사이에

웬일로....more가 없어졌다.

결국....이렇게 글이 날아간 거구나.

참 허탈.

 

다시 써야 한다니..ㅠ.ㅠ

 

 



오빠나 언니들을 보며 세상에 뭔가 문제가 있다는 건 어렴풋이 알았다.

어느 성탄절에는 교회에서 밤을 새고 돌아와보니 집안이 휑했다.

오빠와 언니들이 샀던 <중국의 붉은 별>이나 김남주의 시집같은 것들을

경찰이 싸그리 가져가버려서이다.

행방불명이었던 세째언니가 며칠 만에 경찰서라고 울먹이며 전화를 했을 때

엄마는 가슴에서 올라오는 열기를 감추지 못한 채 한숨을 쉬었다.

그런 언니가 변해갔다.

셋째언니는 빛나던 사람이었다.

항상 활기에 차있었고 주변 사람들에게 그 활기를 나눠주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언니는 변해버렸다.

내가 대학에 들어갔을 때 언니는 휴학을 한 채 사람들과의 만남을 피했다.

나한테 운동이란 그렇게 무서운 것이었다.

한 사람의 인생에서 빛을 송두리째 뽑아가는 블랙홀 같은 것.

 

대학에 들어가서,아니 들어가기도 전, 신입생 교양시간에

영화를 보고 <껍데기를 벗고서>같은 책들을 읽으면서

나는 내 앞에 펼쳐지는 새로운 세상에 황홀해했다.

건강하고 열정적인 선배들을 보며 내 마음과 몸은 활기로 가득찼다.

하지만....

언니도 이런 시간을 거쳤을 거라는 생각을 하면 우울해졌다.

누군가의 길을 따라가는 것같다는 불안감,

그 길 끝에 우울과 은둔이 있다는 사실 때문에

첫 걸음부터 나는 망설였다.

그리고 생전 처음 학교 바깥에 나갔다가 경찰에 잡힌 것이다.

국가권력의 끝자락을 만났을 뿐이었는데도

그 무자비하고 잔인함에 깊은 충격을 받았다.  

 

4월 30일 아침, 나는 그 사람이 잡힌 사실을 직접 알려야할 것같아서 학교에 갔다.

학교는 텅 비어있었고 선배언니가 단과대 사무실에 갔다오더니 따라오라고 했다.

언니를 따라 버스를 타긴 했지만 솔직히 부질없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버스가 다니는 길 마저 막아섰고 산 까지 다 둘러서서 막고 있는데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겠냐는 생각 뿐이었다.

언니, 다 부질없는 일이지 않아?

 

나는 지금 '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경험'에 대한 글을 쓰고 있다.  

제목이 '반전'이긴 반전이라고 할만한 사건이 이 글에선 없다.

개인적인 의미의 반전이 있을 뿐이다.(그러니..너무 기대+실망하지 마세요) 

그 사람은 몇 년 동안 감옥에 갇혀있었고 나는 2003년에 다시 그사람을 만났다.

만났다기 보다는....이라크 파병에 반대하는 반전 평화집회에서 그 사람을 보았다.

내가 너무 오래 쳐다봐서인지 그가 나를 봤고 그래서 그냥 고개를 돌렸을 뿐이다.

긴 시간이 지났어도 나는 그 사람을 알아봤다.

나는 자주 그 사람 꿈을 꾸었다. 장면은 항상 같았다.

탈출을 시도하던 그 창가.

어떨 때엔 내가 창문을 넘기도 했고

또 어떨 때엔 그 사람이 넘다가 잡힐 것같아 내가 소리를 치는 것이다.

불행하게도 항상 다리는 굳어있고 혀 조차 굳어있어서 소리는 나지 않았다.

어린 내게 그 사건은 그만큼 큰 충격이었다.

 

89년 4월 30일, 선배언니를 따라가서 본 거리 풍경도 내겐 충격이었다.

선배언니가 신촌 근처라고 말해준 그곳은 봄나들이 나온 사람들로 붐볐다.

화장을 한 여자들, 단정하게 차려입은 남자들, 팔짱을 낀 커플들...

세상에, 아니 세상이 어쩌면 이럴 수가 있냐는 생각이 들었다.

남쪽의 어느 도시에서는 민주노조운동 때문에 식칼테러가 일어나고

경찰들은 노동절 집회에 참석하고 싶어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개패듯 사람을 패고

또 어떤 사람은 창살에 갇혀 몇 년을 살아야한다는데

이렇게들 즐거워도 되는거야?

눈썹 하나 까딱 않은 채 잘 돌아가는 세상

그 백색의 평화가 절망스러웠다.

그렇게 한참을 혼자 우울해하고 혼자 절망하고 있는데

저만치서 어떤 사람이 "진군, 진군, 총 진군!"이라고 외치며 차도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봄나들이 나왔다고 생각했던 그 모든 사람들이 한꺼번에 차도로 뛰어들었다.

 

그 순간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시간이 지난 후에 나는 그 순간을 삶이 내게 준 선물로 기억한다.

서울지리를 모르고 가두투쟁 경험이 없었던, 그런 나만이 받을 수 있었던 선물.

서울에 익숙해진 후 그 곳을 다시 알게 된다.

아현동 가구거리, 그 곳은 평소 사람이 많이 다니는 곳이 아니었다.

그리고 나는 몇 번의 가투를 거치면서 인파 속에서 우리 편을 알아보게 된다.

화장한 얼굴 너머, 정장 차림 너머의 진심을.

 

그 선물을 오랫동안 잊고 살았다.

화장한 얼굴과 정장차림 때문에 선을 그었던 그 시절과

지금의 나는 얼마나 다른가?

나는 여전히 현실에 선을 긋고 세상에 혼자인 듯 살아간다.

그리고 세상은 점점 더 나빠지는 것같기만 하다.

최근엔 00재단 사태를 지켜보며 절망했다.

290명이 넘는 사람이 죽었는데도 여전히 건재한 그들.

89년에도 2007년에도 노동자들에게는 그토록 치밀하고 무자비한 국가권력은

가진 자들에게는 왜 이다지도 무기력한건지

정의란 건 어디에 숨어있는 건지

역사는 과연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건지

돈이 사람 위에 서는 세상은 이토록 영원해야 하는 건지.

 

하지만...

나쁜 놈들은 송곳처럼 날카로워 주머니를 뚫고 그 모습을 드러내지만

착한 이들은 물처럼 공기처럼 눈에 띄지 않으면서도 제 할 일은 다 한다.

추석연휴에 풀무학교에 갔다가 마을만들기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고

여러 사람들의 노력으로 00재단사태는 느리지만 앞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신문이나 TV에 나오지 않는다고 해서 세상이, 역사가 뒤로 가지는 않는다는 것.

아주 많은 사람들이 더 나은 세상을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고 믿고 싶다는 것.

희망을 가지고 살아가야겠다.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을 다시 한 번 생각해야겠다.

 

딴 생각 하나.

선거때만 되면 '민노당을 지지하는 독립영화인 선언'을 한다.

나는 한 번도 함께 하지 않았는데

그건 현실정치에 대한 기대가 별로 없기 때문이다.

그래도 사표가 아깝다는 가족들의 권유에 따라서

결혼 전에는 오빠가 시키는대로, 결혼 후에는 남편이 시키는 대로 표를 찍어왔다.

그런데 촬영 때문에 보육노조를 따라다니다가 멋진 민노당 의원을 알게되었다.

그 의원은 최근의 00재단 사태에서도 현명하고 적극적으로 제 역할을 해냈다.

레닌의 의회전술에서 한걸음도 나아가지 못한 채

오빠나 남편이 시키는대로만 표를 찍어왔던 나는

이제 내 삶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화석화된 이론에서 벗어나서

뭔가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하는 중이다.

이수정의원을 보면서 나는 생각했다.

민노당을 지지한다고 해서 내가 의회주의자가 되는 건 아니잖아?

그냥 너무 많이 생각하지 말고 저 사람을 믿으니까

저 사람의 활동에 힘이 되고 싶으니까 마음만이라도 보탠다고 생각하면 되지않을까.

그래서 아주 평범한 생활인인 내 처지에 맞게 

지지하는 당도 하나 만들고 당비도 내고 그러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

(그런데 이런 생각 하던 즈음에 피에로님이 탈당을 하셨다고....) 

 

어쨌든

바닥만 보지 말고

사소한 차이와 오해 때문에 선을 그은 채 움츠러들지만 말고

눈을 들어 세상을 보며 살고 싶다.

그런 다짐을 글로 쓰는 데에 너무 많은 시간이 흘렀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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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전(1부)

'말하는 벌레' 따라서 연재를 해볼까, 생각했으나

그건 너무 허덕이는 일인 것같아 그냥 1,2부로 나눠 쓴다.

누군가가 보낸 인터뷰 문항 1번이 

'대학생활 중 기억나는 사건, 향후 인생에 영향을 미쳤던 경험'이었다. 

 

그동안 대학생활은 별로 돌아보고 싶지 않아 내 인생에서 없었던 시간인양

그렇게 여기고 있었는데 요즘 자주 돌아봐야할 기회가 만들어진다. 

어제는 십몇년만에 반가운 선배를 만났고 또...

꿈을 자주 꾸는 거다~!

그동안 꿈 속의 나는 항상 어린아이였다.

아니면 공부를 하나도 안했는데 시험지를 받아들고서 당황하는 장면.

이 장면은 정말 몇 번이고 반복되었는데

꿈 속에서도 나는 "이상하다, 대학에 갔던 것같은데..." 그렇게 의아해하며

진땀을 뻘뻘 흘리는 거다. 마음이 편치 않을 때 그런 꿈을 꾸는 것같다.

 

또다른 당황스런 꿈은

내가 과외를 가기로 한 약속을 어기고 독촉전화를 받는 거다.

그런데 그 집이 어딘지 찾지 못한 채 버스를 타고 헤맨다.

헤매는 곳은 정릉 어디쯤이기도 하고(정릉에 있던 과외집 학생은 나랑 동갑이었다)

여의도 어디이기도 하다.

여의도 학생은 그 어머니에게서 싫은 소리를 많이 들어서 기억 속에 박힌 것같다.

 

그런데 이제 꿈 속의 나는 대학생이다.

꿈 속의 나는 부푼 꿈을 안은 채 기대에 찬 눈빛을 하고 있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 내게 너무나 잘해준다.

내게 너무나 잘해주는 사람을 보면서

꿈 속의 나는 또 혼자서 중얼거린다,

"이렇게 잘해주는 사람이 왜 나를 그렇게 아프게 했을까?"

그래도 나는 꿈에서 깨면 기분이 좋다.

내 속의 아이가 이제 조금씩 자라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내맘대로 해몽이지만 내 속의 아이는 지금 열아홉살이다.

열아홉살에 있었던 일, 그 기억.



89년에 나는 1학년이었고, 다른 사람보다 한 살 어린  열아홉이었으며,

이미 없어져버린 대학생 회수권 대신에  중고생  회수권을 썼다.

그 89년에 우리 학교는 '학원 민주화'를 위한 수업거부와 휴업과

도서관 철야농성이 있었으며 

'운동'이라든지 '운동권'이라는 것에 대해서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던 새내기 우리들은

적어도 일부의 농성과 시위에는 제한적으로 참여했다. 

특히나 친했던 여자동기들끼리는

"사회 민주화는 잘  모르겠지만 학원 민주화 싸움은 참여하는 게 옳다"

는 말을 주고 받곤 했었다. 

 

내 안의 그 경계가 허물어진 것이 바로 노동절이었다.

참여는 못해봤지만 아직도  기억나는 연대 4,30집회.

선배언니의 이야기를 듣고 나는 연대에 가고 싶었다.

모두들 며칠 전부터 집회장에 들어가 있어서

끈 떨어진 연처럼 수업도 없는 썰렁한 학교를 돌아 다니다

종교 동아리 선배를 만나 함께 가게 되었다.

 

우리 일행은 넷이었다.

그리고 같은 버스를 탔다가 우연히 행선지가 같아서 합류하게 된 또 한 사람. 버스를 타고, 그리고 다시 갈아타고...

내 안의 벽과 집안의 허락만 얻으면 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그 곳은,

버스가 가는 길 마저 바리케이트로 막혀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어딘가에 내렸다.

독립문이 보이는 곳이었고, 선배는 산을  타고  가야 한다고 말했다.

저 산을 넘으면 연대가 있나보다...

낯선  동네였다.

 

산을 타듯 마을을 타고, 마을이 끝나갈 즈음에 정말 산이 나타났다. 

거의 아무 생각없이 산을 타고....우리는 모두  긴장했었나보다. 

산을 거의 다 올랐을 무렵, 또다른 선배가 웃으며 말했다.

"여긴 경찰이  없나 봐. 그런데 내려갈 때 있으면 어떡하지?

그런 얌체짓은  안하겠지? 이렇게 힘들여 올라왔는데 말야."

같이 있던 모르는 사람이  말했다.

"그런 소리 말아요...난 이번에 잡히면, 3년을 썩어야 해요."

나는 몰랐지만 그는 모두에게 유명한 사람이었다. 

"집행유예기간인데 며칠 전에 로타리 파출소를 뽀갠 것으로 수배중이거든요"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하면서 앞서가는 그의 뒤에서

선배는 그 사람이 **투본의 단대장이라고 얘기해주었다.

 

정말 좋은 날씨였다.

이제 봄은 제 철에 접어들어 햇살은  적당히 따사로웠으며

내려가는 길은 올라온 길보다 훨씬 편안했다.

절 같은 게 보이면서부터 우리들의 표정은 훨씬 부드러워졌다.

그러다 정말 땅에서 솟아난 것 같이 백골들이 나타났다.

청카바를 입은 그들이 손을 뻗으면 닿을 듯한 거리에서 나타났다. 

때 선배들은 왜 뛰지 않았을까.

그건 아마 그들의 표정이 너무나  심드렁해서였을 거다.

그들은 귀찮다는 듯이 여기서 뭐하냐고 그랬다.

누군가가 절에 왔다고 그랬다.

그들은 다른 쪽을 가리키며 여기는 위험하니까 저~~ 쪽으로 가라고 그랬다. 무성영화같은 기억이다. 어쩌면 필름이  끊겼을 수도...

우리 중의 누구도 뛰지 않았고 어느 순간  수많은 백골과 전경들이 있었고

우리는 차 안에 들어가 있었다.

 

짐승의 시간이었다. 그들은 숨을 쉬듯  오가며 때렸다.

어떤 남자의 머리를 움켜쥐며 "너 머리속도 빨간가  한 번 깨뜨려  볼까..."

라는 장난으로 차 안의 소수를 웃겼으며,

지금은  없어진 '월간 노동자'의 기자는

"이것도 기자증이냐"는 코웃음 한마디와  함께

사람이 저렇게 맞고도 살 수 있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맞았다.

 

나는...

내 소지품에서는 중고생 회수권이 나왔다.

그들은 "얘는 보내야 해" 하면서도 나중에 사람수가 맞아야 한다나

뭐  비슷한  말을 하면서 앞에 앉혀놓았다.

나는 "날씨 좋아서 땡땡이 치고  놀러다니는 뺀질이 고등학생"이 되어서

뺀질거리게 생겼다고 때리는 한 대만  맞으며...

앉아서 그 모든 것들을 다 보았다. 

우리가 탔을 때 반도 안  차있던 그 차 안에서,

그들이 채워야 하는 숫자가 될 때까지, 그  시간까지,

새로이 사람이 들어오면 행해지는 구타와 욕설과  비아냥과

특히나 여학생들에게 가해지는 모욕까지....

나중에는 하얗게  질려서, 구역질이 나서 물을 얻어먹어야 했던...그 무기력. 분노라고 이름붙이기엔  너무나  비참했던 비애...

 

경찰서에 갔다. 넓은 홀에는 많은 사람들이 앉아있었다. 

아마도  우리 같은 사람이었나보다.

수배중이라는 그는 창가에  앉아있었고,나는  그 사람옆에 앉아있었다.

창문이 열려있었다.

그는 자기를 보지 말라고  했다.

만약에 같이 잡혔다는 것이 알려지더라도 자기를 안다고 하지 말라고 했다.

그리고 그는 창을 보았다.

 

그를 피해서 멀리 보았던 창으로 보이는  바깥세상.

건물그림자 만큼의 어둠과 금을 그으며

햇살은 저기 저만큼서 찬란한 밝음을 쏟아내고  있었고,

마치 국민학교 근처에서 듣는 것 같은 소란함이  아련히  들려왔다.

무심히 걷는 사람들.

바로 이만큼의 거리를 두고서 어떤 이는 일상을 살아가고

어떤 이는 탈출을 꿈꾸는 것이다.

그 사람의 움직임에  집중되었던 그 시간,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던.

 

의외로 끝은 빨리 왔다.  제복이 아닌 옷을 입은 어떤 아저씨가 말했다.

"다른 곳으로 간다....." 그 소리밖에 듣지 못했다.

주위에서 소곤거렸다.

"사람이 너무 많아서 외곽에 버린대."

그러면...이제 그 사람은  안전하겠다.

휘경여고라고 쓰고 주민등록번호를 쓴 내 이름 밑에  동대문상고

라고 쓰고 가짜 주민등록번호를 쓴 그 사람은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나와 똑같이,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으로 취급되어서  함께  자유로워질 수 있겠다.

경찰서를 떠나는 버스안에서 나는 그와  같이  앉았다.

창은 가려져 있었고 머리는 숙여야 했으며,

머리가 조금이라도 들리는 사람은 까만 막대기로 맞았다.

그리고 차는 떠났다.

 

그가 소곤거렸다. ".......밖으로 나가지 않아."

정말 차소리는 더 많이 들렸고,차는 천천히 움직였으며,

그 때부터 나는 울었다.

아까 본 창밖 햇살을 생각하며 울었다.

모든 소리가 들리지 않았던 바로 그 시간.

탈출이 가능했었을 것  같은  그  순간을  놓치고...

이제 그 사람은 햇살로부터 격리가 되는 것이다.

길고 긴 시간동안.

 

기억난다, 종로서.

담장은 높고도 단단했고  다시 들어간 곳은 열려진 창도 보이지 않았다.

똑같이 커다란 홀이었지만 여자들은 따로  모여있어야 했다.

얘기도 할 수 없었고 할 얘기도 없었다. 긴 시간.... 

우리들은 탁자에 있는 휴지로 사랑운을 점쳤다.

휴지로 심지를 만들고

아래 위를 묶은 다음 하나의 고리가 되면  사랑이  이루어진다는...

말없이 할 수 있는 건, 생각말고는 그런 것 밖에 없었다.

하루가  그렇게 저물어 갔다. 일찍부터 시작된 그 날 하루는.

간장만 넣었을 것 같은 상치조림에 푹 퍼진 보리가 들어있는 밥을 먹었다.

네모난 알루미늄 도시락에 담겨져있는.

그것은 점심이었을까, 저녁이었을까.

 

그리고 조서라는 걸 쓰기 시작했다. 기억이 안난다. 

그냥.. 약수터에 물먹으러 갔다라고 썼던 것 같고,

세미나 한 책을 쓰라고 해서 옆에 언니 걸 보고

'꽃들에게 희망을'이라고 쓴 기억밖에.

(나중에 선배들은 그럴 땐 '세미나가 무슨 말인지 모름'이라고 쓰라고했다)

그리고 TV에서 보던 것 같이 타이프를 치는 사람앞에 앉아서 얘기를 했다.

한 명씩 한 명씩 그렇게 조사를 받는 동안

그 사람은 또다른 어떤 이와 함께 철창 안에 있었다.

멀리서 보이는 그는 계속 뭔가를 말하려고 했다.

입모양... '..연락'

 

집에서 오빠가 데리러 왔다.

엄마가 두부를 주셔서 먹고,학교에 전화를 했고....

다음날 처음으로 거리에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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