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09_사라지는 것에 대한 기록


펜끝이 기억하는 자리


글 민균


빠른 것이 대접받는 세상에 손글씨는 유물 같은 존재다. 속도와 편리함을 따라가지 못해 장농 한 구석을 밀려난 필름 사진기처럼. 썼다가 지우고, 잘못 쓴 글 위에 길게 줄을 긋고, 오자를 감추려고 까맣게 덧칠하는 손글씨는 ‘미련’하고 ‘느린’ 작업이다. 디지털 자판에 익숙한 사람들은 “컴퓨터가 있는데 글씨는 왜 쓰냐?”고 되묻는다. 글을 ‘쓰지’않고, ‘’면서 무엇이 사라지고 어떤 것이 그 자리를 대신하는가?

책받침 대고 네모 칸 안에 힘주어 또박또박 써내려가던 아이들의 숙제는 한글문서로 작성해 하얀 백지에 출력해가야 한다. 선생님도 더 이상 칠판판서하지 않는다. 짙은 녹색 칠판 앞에는 하얀 가림막이 내리쳐지고 천장에서 화려한 빛이 쏟아진다. 학생들도 이제 필기하지 않는다. 누리방에 가면 모든 자료를 내려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연필 쥔 손가락 마디에 베긴 굳은살은 찾을 수 없고, 오랜 시간 자판을 두드리다 손목 디스크로 병원을 찾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저마다의 애틋한 사연이 담긴 손편지와 엽서를 나르던 우편배달부는 전기요금과 손전화요금 같은 각종 고지서를 우편함에 쌓느라 바쁘다. 골목길 앞에 정답게 서 있던 빨간 우체통은 1993년 5만7천599개에서 해마다 줄어들어 2007년 2만5천547개로 반 이상 사라졌다. 연말이면 몰려드는 성탄절카드연하장으로 날마다 야근했던 우체국 직원들도 일감이 줄었다. 간편한 전자우편과 손전화기 문자메시지가 새해인사를 대신하기 때문이다. 2007년 우리나라 하루 평균 문자메시지 이용건수 2억5천만 건. 2007년 12월31일 6억 건에 이르는 문자메시지가 저무는 한해와 함께했다.

서랍 속 일기장은 몇 년째 시간의 자물쇠로 채워져 있다. 미니홈피블로그 이용자 수가 2천만 명을 넘어서면서 일기장은 인터넷으로 자리를 옮겼다. 한 글자씩 무겁게 써내려가던 혼자만의 고민과 걱정은 이제 생각의 속도를 앞질러 블로그 게시판에서 모두의 관심을 받고 있다. 해마다 구입하는 수첩 뒤 전화번호부란은 번번이 빈칸으로 남아있고, 지갑 속 한 자리를 차지했던 전화기록부는 이제 필요 없다. 손전화기가 친절하게 이름과 번호를 알려주고, 외우는 수고까지도 덜어준다.

한때 반듯반듯한 차트 글씨를 잘 써서 출세한 공무원에 관한 뒷이야기 나돌면서 종로의 펜글씨학원은 북새통을 이뤘다. 군대에서도 특기병으로 차트병을 뽑기도 했다. 하지만 문서와 발표문을 작성하는 컴퓨터프로그램이 등장하면서 각종 서식을 전담해서 정자체로 썼던 필경사가 자취를 감췄고, 이름을 날렸던 펜글씨학원도 대부분 문을 닫고 전국에 스무 곳 남짓만 남았다. 기자실이나 기자회견장에서 취재수첩을 들고 속기하느라 열심히 볼펜을 굴리던 기자들은 이제 연신 ‘타다탁’ 소리를 내며 노트북 앞에서 자판을 두드리며 앉아 있다. 회사 인사부서에서도 더 이상 자필이력서를 요구하지 않는다. 회사 공개채용공고문에는 ‘인터넷으로만 접수’라는 문구만 덩그러니 박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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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8/19 20:21 2008/08/19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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