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넷 첫화면으로 블로그홈 | 메일 | 공동체 로그인내정보
민주주의 없는 법치는 무법천지



민주주의 없는 법치는 무법천지
오동석(아주대 교수/ 헌법학)

Ⅰ. 이명박 정부의 법과 법질서

1. 어떤 내용의 법?


- 정부는 2007년 7월 ‘물산업 육성 5개년 추진계획’을 발표하고 “물은 더 이상 공공재가 아닌 경제재이며, 먹는 물을 공급하는 ‘공공수도 사업’을 ‘물산업’으로 규정하겠다”고 밝혔고, 환경부는 물산업지원법'(가칭)을 만들어 2008년 상반기 중 입법예고할 계획이다.
- 정부는 모든 병·의원, 약국이 국민건강보험 환자 진료를 의무화하는 당연지정제를 완화하여 건강보험이 적용되지 않는 비보험 의료 서비스가 가능하도록 하겠다는 목표를 제시했다가, 김성이 보건복지가족부 장관이 이를 없던 일로 하겠다고 밝혔지만, 의료기관의 영리법인화, 민영의료보험 확대 등은 여전히 정부의 추진 대상이다. 프레시안, 2008. 5. 8 오전 10:39:30, “출범 두 달 반 만에 ‘공안정국’?”, 강이현(
http://www.pressian.com/ scripts/section/article.asp?article_num=60080508091657&s_menu=사회)

2. 어떻게 법질서를?  

- 검찰은 2008년 5월 7일 문자 메시지와 인터넷을 통해 유포되는 소위 ‘광우병 괴담’을 놓고 ‘엄정 대처’에 나서겠다고 밝혔으며 경찰은 이날 실제로 경기도 지역 고등학교를 방문하는 등 수사에 착수했다. 교육과학기술부도 이날 오후 서울 세종로 정부중앙청사에서 전국 16개 시·도교육감 회의를 개최하고 학생들의 촛불문화제 참여에 대한 대응책을 논의했다. 한승수 총리도 8일 허위사실 유포와 불법집회에 대한 엄정 대처 방침을 대국민 담화를 통해 분명히 했다.
- 경찰은 2008년 5월 6일 청계천 광장에서 예정됐던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문화제에 대해 애초에는 ‘금지’하겠다고 밝혔다가 반발이 거세자 ‘정치적 구호’만 금지한다고 밝혔었다.
- 경찰과 국가정보원이 ‘한반도 대운하를 반대하는 전국교수모임’ 참가교수들의 성향을 광범위하게 조사한 것으로 드러나면서 ‘정치사찰’ 파문이 일기도 했었다.
- 경찰은 집회 및 시위의 자유를 제한하는 조치로서 2008년 3월에는 집회나 시위 참가자의 복면 착용을 금지하고, 쇠파이프·죽창 등을 소지한 것만으로도 형사처벌을 할 수 있도록 법을 개정하는 방안을 추진하는 것으로 밝혀졌으며, 이미 체포 전담반 부활, 전기 충격총(테이저건) 사용, 시위 예상자 사전 검거, 참가자 즉결 심판 강화, 경찰의 면책권 보장 등의 조치는 발표됐다. 위와 같음


Ⅱ. ‘법대로’가 법치인가?

과거 쿠데타로 집권한 정권은 제 입맛대로 멋대로 만든 ‘법(에 의한) 질서’ 준수를 외치며 다수 국민을 윽박질러 집권과정에서 민주적 정당성 부재 문제를 물리력으로 돌파하였다. 국민적 저항에도 불구하고 버틸 수 있었던 또 다른 밑천은 경제권력을 비롯한 각 부문 어용권력과의 유착이었다.
그런데 헌법이 정한 대통령 선거를 통해 집권한 이명박 정부는 절차적으로는 민주적 정당성을 갖추었음에도 불구하고 출범 초부터 그 어느 독재정권 못지않게 강압적인 경찰국가로서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아마도 또 다른 차원의 민주주의적 정당성을 결여하고 있음이 틀림없다. 이명박 대통령이 입만 열면 공언하듯 경제 살리기 묘안을 기업 또는 소수 돈 있는 자들에게만 프렌들리하게 짜내려다보니 무리수를 둘 수밖에 없기 때문일 것이다.
이쯤 되면 그토록 강조하는 법질서에서 법도 내팽개치고 오로지 질서만 부여잡고 정치적인 ‘선전목적의 상투적 문구’ Philip Kunig, Das Rechtsstaatsprinzip: Überlegungen zu seiner Bedeutung für das Verfassungsrecht der Bundesrepublik Deutschland, J.C.B. Mohr, 1986, 123쪽 아래: 국순옥, 「법치국가의 신화와 현실」, 『민주법학』 제18호, 2000, 98쪽에서 재인용.로 법치를 동원하는 지경에 이를 것은 뻔히 보이는 결말이라고 말할 수 있다. 법치주의가 “정치적 개념으로 악용될 경우 지배체제에 대한 절대적 귀의를 강요하는 일종의 준법논리로 변질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Philip Kunig, 앞의 책, 124쪽 아래: 위와 같음. 민주주의 토대 없는 법치는 무법(無法)천지와 다를 바 없으되, 굳이 법치가 있다고 우긴다 해도 그것은 무력에 방점이 찍힌 ‘무’(武)법일 뿐이다. ‘무늬만 법치’인 무법천지에서 법은 폭력의 외피일 뿐이다.
헌법상 대한민국이 민주공화국으로서 국민주권원리를 명령하고 있음을 끌어대지 않더라도, 민주주의가 법치주의의 요체임은 상식이다. 다수이면서도 약자인 자들이 지배하는 것이 민주주의 핵심이기에 그들이 최대한 지배할 수 있도록 또는 최소한 권력으로부터 소외받지 않도록 민주주의제도를 마련하고 민주적 인권을 최대한 보장해야 하는 것이 민주주의 내용이다. 이때 법치주의는 민주주의를 구현하는 형식원리 중 하나일 뿐이다.
그런데 법치주의 담론에서 지배권력은 ‘법의 실체는 무엇인가’와 ‘법의 실체는 무엇이어야 하는가’의 질문을 의도적으로 회피하며 교묘하게 뒤섞어 버린다. ‘법은 누구의 편인가’ 하는 현실[존재]과 ‘법은 누구의 편이이어야 하는가’ 하는 규범[당위]은 엄연히 다르다. 또한 ‘법이 어떻게 만들어지는가’와 ‘법이 어떻게 만들어져야 하는가’는 판이하다. 각 질문 중 후자, 즉 규범과 당위의 문제에서 민주주의를 제거해 버리고 전자, 즉 현실과 존재의 문제에서 성찰 없는 ‘묻지마 법치’를 강요한다면, 법은 지배의 도구 아닌 그 무엇도 아니다. 국민 개인들은 법의 칼자루를 쥐기는커녕 법의 칼날 아래 놓일 것이며, 그 칼질을 고스란히 감내해야 할 것은 힘없는 다수 국민일 수밖에 없다.


Ⅲ. 법을 지배하는 것은?

1. ‘법률 형식에 의한 법치’의 한계

1) 법률은 ‘국민의사’인가?


근대 서구에서 비롯된, 사람이나 폭력이 아닌 법에 의한 지배(법치)에서 법규범의 근간은 법률이라는 형식이다. 법률은 이른바 ‘국민대표기관’인 의회가 제정하는 법규범 형식이다.
그런데 여기서부터 법치원리는 삐걱거린다. 왜냐하면 정치적·이념적 통일체로서 국민을 관념하는 한 그것은 허구(fiction)이므로, ‘전체 국민의 대표’ 역시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국회의원이 곧 죽어도 이른바 ‘국민대표’라고 우기는 것은 그에 대한 참칭이거나 자신이 곧 국민이라는 오만한 권력자의 야만성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일 뿐이다. 집합적 현실 개념으로서 국민의 모순적 통일체성을 이해한다면, 국민대표는 자신이 국민의 뜻이라고 또는 국민이익이라고 ‘의식’한 바를 반영하기 때문에 그 다수 여하를 불문하고 부분대표일 수밖에 없다. 국회의원이 소수자를 보호하면서 가능한 한 다수의 의사와 이익을 반영해야 할 헌법적 의무를 지고 있지만, 그것이 현실에서 어느 정도나 실현되고 있는지 즉 그들이 과연 누구를 얼마만큼 대표하고 있는가는 또 다른 문제이다. 따라서 법치주의는 규범으로서의 민주주의가 얼마나 관철되고 있는가 하는 독립변수에 철저히 종속된 변수일 뿐이다.

2) 재판은 정의로운가?

한편 법치의 실현은 흔히 재판과정에서 사법권이 담보하는 것으로 이해되는데, 이것도 일정한 유보조건이 필요하다. 영국 법사회학자 로저 코터렐은 “법절차가 최고도의 법적 기준에 의하여 지배될 것을 보증하는데 필요한 전문가적 지식이 상급법원에서 발견될 가능성이 더욱 많고, 보다 많은 지식과 부와 영향력을 가진 자가 그러한 상급법원을 이용할 가능성이 가장 크다는 사실은 명백한 것 같다. 이처럼 법의 지배는 무산자보다 유산자에게 훨씬 더 도움이 된다” Roger Cotterrell, 김광수 외 옮김, 『법사회학입문』, 터, 1992, 201쪽.고 말한다.

3) 누구를 위한 법치인가?

법치주의의 목적이 ‘국민의 자유와 권리의 보장’이라지만, 권영성, 『헌법학원론』, 법문사, 2008, 147쪽. 법이 과연 국민 모두에게 형평에 맞게 적용되는 것인지에 대하여 대부분 사람들은 고개를 가로저을 것이다. 일상어가 되어버린 ‘유전무죄 무전유죄’, 또 다르게 ‘유권무죄 무권유죄’라는 말이 이를 대변한다. 그 역사적 연원을 “법의 장엄한 평등성이 부자나 가난뱅이 모두에게 다리 밑에서 자는 것, 거리에서 구걸하는 것, 빵을 훔치는 것을 금지한다” 19세기 소설가 프랑스 아나똘의 말이다(Roger Cotterrell, 앞의 책, 152쪽).는 말에서 찾아도 무방할 것이다. 결국 법이든 국가 정책이든 그 여파에 노심초사하고 길거리에서 맨몸으로 맞서지 않으면 도저히 생존조차 버거운 이들은 늘 정해져 있다. 이들에게 법치는 민주주의 생명줄을 옭아맬 뿐이다.
반면 일부 소수의 뭐든 가진 사람들은 굳이 법이든 자유나 권리이든 그것을 골치 아프게 들먹이지 않아도 전혀 사는 데 지장 없고 오히려 그런 것들이 거치적거린다. 이들에게 법치는 민주주의, 특히 장외민주주의로부터 자신들의 재산과 탐욕의 자유를 수비하기 위해 감수해야만 하는 필요악일 터이다. 성난 민중의 민주주의는 자칫 일거에 지배자로서의 권력을 통째로 내어주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한편 그들에게는 민주주의 대가로 내어준 법치주의조차도 성가실 수는 있다. 예컨대 ‘강부자’ 공직자들에게 재산공개제도, 인사검증시스템이나 국민의 알권리, 언론 자유 등은 별 것도 아닌 걸 가지고 시비 거는 귀찮은 일이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웬만하면 때로는 무시하고 밀어붙일 수 있기에 민주주의를 무마하기 위한 고육지책으로서 감수하고 있을지 모를 일이다.

2. ‘실질적 법치’의 과잉 문제

1) 실질적 법치를 어떻게 확보할 것인가?


법률 형식에 의한 법치주의는 나치스 지배 하 독일의 경험을 매개로 하여 “독재권력이 법률을 개인의 권익보호를 위한 장치로서가 아니라 개인을 억압하기 위한 수단으로 악용하는”, 즉 “법률을 도구로 이용한 합법적 지배, 즉 외형적 법률주의” 권영성, 앞의 책, 149쪽.라는 비판에 직면하였다. 비록 개인적 관점에 머물러 있기는 하지만, ‘악법의 지배’를 거부하는 측면에서는 실질적 법치를 내치기가 쉽지 않다. “인간의 존엄성존중과 실질적 평등 그리고 법적 안정성의 유지와 같은 ‘정의의 실현을 그 내용으로 하는 법’에 의거한 통치원리” 권영성, 앞의 책, 149쪽.라는 설명에는 더욱 그렇다.
그런데 차근차근 따져보면 그럴싸한 미사여구에 현혹될 일만은 아니다. 실질적 법치의 무거운 짐을 아홉 명의 헌법재판소 재판관들에게 지우고 있는 현행 헌법재판제도를 놓고 고민하면 더욱 그렇다. 사실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누가 어떻게 입법자의 목에 지속적으로 민주주의의 고삐를 맬 것인가의 문제이다.
먼저 생각할 수 있는 경우는 민주주의적으로 구성된 의회의 다수파가 민주주의적 지향성을 가지고 있는 경우이다. 입법자 구실을 하는 의회가 제대로 된 내용의 법률을 만들도록 민주주의적으로 의회를 구성하고 늘 민주주의적으로 국회의원을 통제한다면 굳이 법률의 내용을 문제 삼을 일은 없어 보인다. 물론 이 경우에도 다수결원리로 표상되는 민주주의 작동방식으로 인한 소수자 보호 문제는 있지만, 입법과정이 민주주의적인 한 소수자 인권을 침해하는 법률이 걸러지지 못할 것은 아니다. 필요하다면 소수자 인권 보호 구실에 한정된 의미에서만 헌법재판소 권한을 인정해도 무방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 이상의 권한을 헌법재판소에 주는 것이 오히려 민주주의를 축감시키는 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다음의 경우는 의회다수파가 국민 다수의 의사를 반영하지 못하고 입법적 횡포를 부리는 경우이다. 여기에서는 민주주의적 지향성을 가진 의회소수파, 결과적으로는 입법과정에서 민주주의와 인권 내용을 어떻게 확보할 것인가가 문제이다. 헌법상 민주적 정당성의 우위가 의회에 있기는 하지만, 헌법재판소가 일정한 민주적 역할을 할 가능성이 없지는 않다. 다만 그 핵심적 관건은 헌법재판소의 민주주의적 정당성과 인권친화성을 확보하는 것인데, 의회와 별도로 헌법재판소만을 민주주의적으로 구성하고 통제할 수 있는 경우를 상상하기가 쉽지 않다. 법률 제정의 출발점인 의회를 민주적으로 통제할 수 없다면, 헌법재판 방식으로 이 문제를 푸는 것은 적절한 것이 아니며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2)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와 과잉사법국가의 위험성

그런데 실질적 법치의 중요한 제도적 축을 이루고 있는 헌법재판소가 독일연방헌법재판소의 ‘자유로운 민주주의적 기본질서’의 정식을 계승·확장하여 국민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헌법충성’이다. 그것은 “준법의 논리가 압도적 우위를 차지하는 사이비법치국가, 즉 가장 타락한 형태의 준법국가로 전락함을 의미한다. Philip Kunig, 앞의 책, 124쪽 아래: 국순옥, 앞의 글, 111쪽.
독일연방헌법재판소는 자유로운 민주주의적 기본질서를 “모든 폭력적 지배와 자의적 지배를 배제하고, 그때그때의 다수의 의사와 자유 및 평등에 의거한 국민의 자기결정을 토대로 하는 법치국가적 통치질서” BVerfGE 2, 1[12]; BVerfGE 12, 45[51] 라고 정의하면서, 그 내용적 요소로서 인간의 존엄과 인격의 존중을 기본으로 하는 인권의 보장, 국민주권의 원리, 권력분립의 원리, 책임정치의 원리, 행정의 합법률성, 사법권의 독립, 복수정당제와 정당활동의 자유 등을 들고 있다. 권영성, 『헌법학원론』, 법문사, 2008, 136쪽.
한편 우리 헌법재판소는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위해를 준다)라 함은 모든 폭력적 지배와 자의적 지배, 즉 반국가단체의 1인독재 내지 1당독재를 배제하고 다수의 의사에 의한 국민의 자치·자유·평등의 기본원칙에 바탕한 법치국가적 통치질서(의 유지를 어렵게 만드는 것)이고, 이를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기본적 인권의 존중, 권력분립, 의회제도, 복수정당제도, 선거제도, 사유재산제와 시장경제를 골간으로 하는 경제질서 및 사법권의 독립 등(우리의 내부체제를 파괴·변혁시키려는 것으로 풀이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판시하였다. 헌재 1990. 4. 2, 89헌가113, 헌판집 2권, 49[64]
‘법치국가적 통치질서’에 포섭된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대한 개념정의 자체는 일면 별 문제없어 보이지만, 그 쓰임새는 민주주의에 적대적이다.

전투적 민주주의를 헌법판단의 기준으로 삼는 1969년 이후의 연방헌법재판소 판례들 가운데 법치국가의 이데올로기적 도구화와 관련하여 우리의 주목을 끄는 것은 1970년 2월 18일의 이른바 병사결정이다. 병사결정은 군복무중 한 정치토론 모임에서 독일연방공화국의 인권상황에 대하여 비판적 발언을 한 혐의로 징계처분을 받고 불명예 퇴역한 한 전직 하사관이 제기한 헌법소원심판청구사건이다. 이 사건에서 연방헌법재판소는 군징계재판소의 입장을 지지하며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개진한다. 군징계재판소는 본기본법의 가치질서를 법적 판단의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 Entscheidungen des Bundesverfassungsgerichts, 28. Bd., 48쪽 이하.. 정치적 의견의 표명은 본기본법이 내린 헌법정책적 기본결단의 테두리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위와 같음.. 독일연방공화국은 시민들로부터 자유로운 질서의 수호를 기대하는 민주주의국가이다 위와 같음.. 전투적 민주주의에 바탕을 둔 공동체에서는 군상급자가 복무 중 부대 안에서 공동체의 자유로운 질서를 투쟁이나 비판의 대상으로 삼는 것을 용납하여서는 안 된다 Entscheidungen des Bundesverfassungsgerichts, 28. Bd., 49쪽.. 국순옥, 앞의 글.

우리 헌법재판소는 독일연방헌법재판소의 판시사항에 ‘사유재산제와 시장경제를 골간으로 하는 경제질서’를 추가하여 자유민주적 기본질서 정식을 수용하였다. 현행 헌법의 주요 내용을 추상적으로 망라하여 정치적 비판 금기 사항으로 격상시킨 자유민주적 기본질서 정식이 국가보안법상 찬양·고무죄에 대한 형사처벌을 합헌인 것으로 옹호함으로써 국가보안법에 사실상 면죄부를 주었음은 주지하는 바이다.
독일연방헌법재판소가 판시하듯 “법치국가원리가 헌법차원의 상세하고 일의적인 명령과 금지를 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실제상황에 따라 구체화를 필요로 하는 하나의 헌법이념”이라고 이해하면, 헌법재판소는 법치국가원리의 유연성을 증폭시켜 상황에 따라 구체화하여 헌법질서를 재단하는 헌법지배자로의 변신술을 꿰차고 있는 결과가 되는 것이다.


Ⅳ. 법을 지배해야 할 것은?

1. 민주주의적 법치의 가능성


민주주의원리상 국민이 단순히 법치의 객체가 아님은 명확하다. 오히려 민주주의적 법치의 대상은 국가권력이다. 다시 말하면, 법치주의는 민주주의적 ‘의회주의원리를 확인하고 보완하는 법기술적 장치’이며, 그 결정적 징표는 ‘법치행정과 법치사법’ 국순옥, 앞의 글.이다. 이렇게 “의회주의원리가 입법권 우위의 수평적 권력분립의 형태로 현실화되면, 형식적 법치국가는 민주주의적 법치국가로 발전할 수 있는 내발적 추동력을 얻게 된다.” 국순옥, 앞의 글, 104쪽.
헌법재판소조차도 “오늘날 법률유보원칙은 단순히 행정작용이 법률에 근거를 두기만 하면 충분한 것이 아니라, 국가공동체와 그 구성원에게 기본적이고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 영역, 특히 국민의 기본권실현과 관련된 영역에 있어서는 국민의 대표자인 입법자가 그 본질적 사항에 대해서 스스로 결정하여야 한다는 요구까지 내포하고 있다”(의회유보원칙)고 판시하고 있다. 헌재 1999. 5. 27, 98헌바70

2. 민주주의적 의회주의

그렇다면 민주주의적 법치 문제는 단순히 의회에 의한 민주주의를 의미하는 의회민주주의가 아니라 의회를 민주주의 고삐 아래 두는 민주주의적 의회주의를 정립하는 것이 관건이다. 먼저 의회민주주의 근거인 선거제도가 민주주의적으로 혁신되어야 한다. 선거운동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고 국민의 민주적 의사를 반영하는 선거제도 개혁(예컨대 비례대표국회의원 후보의 정당내 민주주의적 선정을 전제로 한 비례대표제 확장, 봉쇄조항 폐지를 통한 국민의사의 완전비례 반영 등)이 필요하다.
나아가 국회의원 당선 이후 국회의원에 대한 민주주의적 통제가 가능한 제도를 정립해야 한다. 국회의원에 대한 국민소환·파면권을 비롯하여 ‘평의회민주제’ 구현 조건은 선거구민의 동질성, 이성적 행동, 지속적인 참여, 정보의 공유 등이다(박병섭, 「민주적 대표제에 대한 연구: 독일의 기층민주주의를 중심으로-」, 『민주법학』 제21호, 2002, 116쪽).까지 아우르는 광범위한 제도적 대안을 검토해야 한다.
더 나아가 국민들이 직접적으로 지속 가능하게 민주주의적으로 참여하고 통제할 수 있는 다양한 형태를 제도화하고 실천하는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지방 차원에서의 주민발안, 주민투표, 주민소환, 주민소송, 참여예산제, 주민감사청구, 정보공개 등 다양한 직접민주주의적인 제도들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지, 그렇지 않다면 문제점은 무엇인지를 고민하여 활성화할 수 있는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  


Ⅴ. 민주주의와 법치주의의 갈등?

민주주의적 법치주의 전제요건으로서 민주주의적 의회주의를 제시하였지만, 이것을 쟁취하지 못했을 경우 외견적으로 민주주의와 법치주의는 갈등 내지 충돌한다. 그렇지만 그 실질은 ‘국민’민주주의와 비민주주의적 법치주의의 대립각이며, 결국 그 대립관계는 국민 다수와 억압적 정부 사이의 문제이다. 민주주의적 정당성을 결여한 정부가 강변하는 ‘법치’는 권위주의적 후안무치(厚顔武治)일 뿐이다. 그것이 헌법재판소가 개념정의하였던, 폭력적 지배를 배제한 국민의 자기결정으로서의 국민자치(민주주의)에 터 잡은 법치가 아님은 분명하다.
국민 다수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다시 원초적 민주주의에서 출발하여 민주주의 제도적 기반을 닦는 일이다. 물론 억압적인 외견적 법치주의 아래에서 정부는 민주주의적 의사표현조차도 허용하지 않을 것이고 그 징조는 이미 충분히 나타났다. 다시 국민에게 남은 것은 저항민주주의이다.
독일연방헌법재판소가 순치시킨 내용이 수용되어 “민주적·법치국가적 기본질서 또는 기본권보장체계를 위협하거나 침해하는 공권력에 대하여 더 이상의 합법적인 대응수단이 없는 경우에, 주권자로서의 국민이 민주적·법치국가적 기본질서를 유지·회복하고 기본권을 수호하기 위하여 공권력에 저항할 수 있는 최후의 비상수단적 권리” 권영성, 앞의 책, 74쪽. 아울러 유사한 개념정의로는 헌재 1997. 9. 25, 97헌가4 참조.로 오그라진 저항권까지 당장 끌어들이지는 않아도 된다. 소 잃고 외양간도 고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기 전에 무법(無法)의 무법(武法)에 저항할 수 있는 저항민주주의는 -헌법재판소에 의존하지 않고, 아니 오히려 의존하지 않고서야- 국가보안법이나 집시법을 비롯한 악법의 철책을 넘어설 수 있는 언론·출판·집회·결사 자유를 비롯한 민주주의적 표현 자유에 의해 충분히 직접 헌법에 근거하여 뒷받침될 수 있다. 저항밖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는 사람들이 곧 주권자 자격을 가진 ‘국민’이며 새로 여는 민주주의 터전을 일구어갈 일꾼이다.    

* 출처 : 민주주의 대 법치주의, 이명박 정부 법치주의에 대한 토론회 자료집

트랙백(0)   덧글(0) 이 문서의 주소:http://blog.jinbo.net/save_nature/?pid=1685


[다큐]'돌이킬수 없는 재앙' 유전자조작식품(GMO)



[다큐]'돌이킬수 없는 재앙' 유전자조작식품(GMO)
통제할 수 없는 유전자 조작식품


원제 : Life Running out of Control

독일에서 제작된 다큐멘터리로 유전자조작식품과 제품의 위험성을 널리 알리기 위해, 제작사가 별도의 저작권료를 받지 않고 한국에 보급한 것입니다.

'죽음의 종자'를 파는 다국적농업자본(몬산토, 카킬)을 경계하라!

* 출처 : 환경정의


트랙백(0)   덧글(2) 이 문서의 주소:http://blog.jinbo.net/save_nature/?pid=1684


'우리 약국은 조중동 광고게재 제품을 판매하지 않습니다'



'우리 약국은 조중동 광고게재 제품을 판매하지 않습니다'

전국에서 '광우병 쇠고기 수입반대와 쇠고기 수입 재협상'을 위한 촛불을 밝힌 지도 어느새 50여 일이 지나고 있다. 미국과의 추가협의와 대통령의 대국민 담화, 청와대 인적 쇄신 등 촛불이 꺼지기만을 기다리는 정부의 후속대책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수많은 시민들의 손에 쥐어진 촛불은 쉽게 꺼지지 않고 있다. 매일 해가 뉘엿뉘엿 넘어갈 때면 시민들은 삼삼오오 모여 촛불을 계속 이어갈 것으로 보인다.

촛불의 시작은 '광우병위험 쇠고기 수입반대'였지만 지금은 하나 둘씩 참아왔던 이명박 정부의 다른 많은 잘못들에도 불똥이 튀고 있다. 한반도 대운하, 의료민영화, 전기,수도,가스 등 공기업 민영화, 한미FTA , 0교시 및 자율학습 부활 문제 등이다. 이러한 정책들은 수혜자인 서민들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어 있어 이를 우려하는 많은 시민들이 촛불집회를 통해 자연스럽게 확대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시민들의 자발적인 촛불에 대해 조중동이라는 주류 언론의 불공정한 보도가 네티즌들의 뭇매를 맞고 있다. 자발적인 신문구독 끊기는 물론 이러한 신문에 광고를 내는 기업에 ‘오늘의 숙제’라고 하여 광고중단협조를 요청하는 새로운 소비자 불매운동까지 벌이게 된 것이다. 제품값에 포함된 광고비를 간접적으로 지불하고 있는 소비자들의 정당한 불매운동에도 재갈을 물리려는 검찰수사를 한다고 하니 한심하기 짝이 없다.



조중동 신문 열독율 44.8%1)이며, 서울지역에서 신문 구독률이 32.7%2)이다. 이 세 신문은 TV 만큼이나 여론형성에 한 축을 형성하는 가장 영향력 있는 언론사이다. 하지만 조중동은 그들의 책무인 시민들에게 정확한 내용을 공정하게 보도하기 보다는 내용을 숨긴다거나 혹은 왜곡한다거나 사실의 축소 또는 확대를 통해 그리고 정권의 바뀜에 따라 기사의 논조를 뒤바꾸는 경우가 허다했다. 대표적으로 광우병위험 미국산 쇠고기 수입에 대한 지난 정부 때의 입장과 현재의 이명박 정부에서의 보도 내용이 판이하게 달랐다. 촛불집회에 대해서도 처음에는 배후론, 색깔론을 들먹이다 규모가 커지면 진정성을 말하는가 싶더니 규모가 작아지는 틈을 타 다시 반격을 하는 모습은 정말 비겁하다.

네티즌들의 광고중단 협조 대상 기업 중에 몇몇 제약회사와 그 제품들도 단골로 등장하고 있다. 한 예로 잘 알려진 진통제의 하나인 '게보린'을 만들고 있는 '삼진제약'은 이러한 소비자들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조중동의 백기사를 자처하고 오늘도 꿋꿋하게 광고를 게재하고 말았다.

건강사회를 위한 약사회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동네 건강지킴이인 약사로서, ‘광우병쇠고기 수입반대 및 재협상’과 ‘의료의 민영화 반대’를 한결같이 이야기해왔던 것처럼 수구언론 조중동의 불공정보도를 바로잡기 위해 조중동에 광고를 게재하여 이득을 주는 제약회사의 제품을 약국에서 판매하지 않을 것이다. 약국에서의 비록 작지만, 소중한 풀뿌리 불매(不賣)운동을 함으로써 네티즌들이 연 정당한 소비자주권 운동에 동참하고자 한다. 그리고 얼마 전 ‘광우병위험 미국산쇠고기 수입을 반대하는 약사, 약대생 436명의 시국선언’을 함께했던 많은 분들의 힘도 다시금 모아가고자 한다. 많은 약국에서 건강한 약사들의 작은 노력들이 모여 마침내 조중동과 그 광고주들의 불편하고 어두운 면을 드러낼 소중한 촛불이 될 것이다.

조중동 광고게재 제품을 구매하지 않겠다는 소비자들의 불매(不買)운동과 제품을 판매하지 않겠는다는 약사들의 불매(不賣)운동이 힘을 합친다면 그간 소비자들과 약사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던 제약회사들도 시민들의 이러한 뜻을 받아 않을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조중동과 같은 수구언론을 퇴출시켜 공정한 언론 환경을 조성하는데 더욱 많은 약사들이 동참할 것이다.

2008년 6월 23일
건강사회를 위한 약사회
트랙백(0)   덧글(0) 이 문서의 주소:http://blog.jinbo.net/save_nature/?pid=1683



리장
지구를 살리기 위해서 어떤 타협도 없다!
정보공유라이선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