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즘 님 블로그에 링크타고 와서 간혹 눈팅만 하고 가던 사람입니다. 허경 선생님의 강의에 오셨었군요ㅎㅎ강연평에 전반적으로 동의하는 편입니다. 그래도 공부를 해나가는 데 잇어 강연이 큰 도움이 되었던 사람의 입장에서 한 마디 덧붙이자면, 푸코가 주체, 인식, 대상이나 정신의학같은 실천들 등처럼 당연시되어왔던 사태들이 '역사적'인 구성물임을 드러내는 데는 부단한 노력을 했으나, '지리적'인 구성물임을 드러내는 데에는 소홀했다고 지적하면서 푸코의 이론이 과연 '유럽의 입장'에서만 타당한 것이 아닌지 검토해야 한다며 "푸코를 푸코적인 방식으로 다뤄야 한다"고 말하신 부분이 이 강연에서의 빛났던 부분 중 하나가 아닌가 싶습니다. 저는 푸코의 문제의식에 (젠더정치와 더불어) '식민주의'의 문제가 빠져있다는 앤 로라 스톨러의 주장이 떠오르더군요. 참신한 시각의 이론들이 몇몇 분들의 활약을 통해 급속도로 수입되고 있지만, 이를 한국이나 동아시아의 구체적인 정세와 역사적인 맥락에 적용하는 작업은 미진하다는 점을 고려할 때 강연자의 그러한 지적은 매우 적절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물론 강의에서 최근 주목받고 있는 삶정치, 통치성에 대한 내용은 직접적으로 언급이 되어 있지 않고 있습니다만 저는 오히려 강의를 듣고 나서 생각이 든 게 최근 불고 있는 '푸코의 재발견' 열풍이 임의적으로 마치 '두 명의 푸코'가 있는 것처럼 몰고가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리고 이와 같은 푸코에 대한 '진화론적 인식'은 푸코를 그간 '미시-권력의 이론가'로 규정해왔던 한국의 푸코 수용에 있어서의 문제가 아닌가 싶었습니다. 『감시와 처벌』에서 푸코가 '개체화'하는 규율권력에 대한 상세한 서술을 제공하며 권력의 초월적 실재를 '존재론'적인 층위에서 상정하는 것을 거부했을 때, 그는 병원 학교 공장 등 다양한 장치에서의 규율권력을 고립된 원자로서 본 것이 아니라 권력이라는 개념을 일종의 '관계론'적인 순환고리로서 상정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태도는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에서도 전혀 바뀌지 않습니다. 푸코는 삶정치를 설명할 때도 '국가 권력'이라는 주체를 연상시키는 개념을 사용하기 보다는 사회보장제도, 의료화, 위생시설정비와 같은 구체적인 '장치'들을 나열하는 것을 선호합니다.
즉 제가 하고 싶은 말은 푸코에게 어떤 일관된 이론적 태도가 있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삶정치와 통치성같은 개념과 사유들이 주목받고 있는 것처럼 '완전히 새롭지는 않다'는 게 강연을 듣고 나서 든 생각입니다. 그래서 '개체화'의 미시권력 이론가의 푸코가 있었는데 '전체화'의 거시권력의 이론가로서의 푸코가 재발견되었다는 식의 이해는 정치적 아이디어를 캐내는 데에는 유효할 수 있겠으나, "푸코"라는 고유명이 가지는 이론적 태도를 파악하는 데 있어서는 위험하지 않겠냐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 이론적 태도란 제가 생각했을 때는 강연자가 말하신 "나는 달력도 지도도 없는 것에 대해 말하지 않습니다"라는 말에 잘 집약되어 있지 않나 싶습니다. 저는 최근 떠오른 삶정치도 통치성도 중요하게 다뤄져야 할 푸코의 부분이다만, 사물을 자연적인 방식이 아니라 철저히 역사적 지리적인 맥락 하에서 파악하려 한 '계보학'적 태도가 푸코에게 궁극적으로 배워야 할 이론적 '미덕'이 아닌가 싶더군요. 그런 맥락에서 이 강연은 '대중강연'임에도 불구하고 기존의 푸코에 대한 통념을 단순반복하는 것이 아닌 그 통념을 반성해볼 계기를 제공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이론적 태도를 강조하는 것이 '철학자'의 독법으로서 정치성을 제거할 수 있다는 데에는 동의합니다. 허나 '정치성'이라는 말이 즉각적인 현상 분석을 위한 통찰을 제공한다는 측면에 국한되지 않고, 사물을 다르게 보는 시각을 제공해 준다는 측면에서 본다면 앞서 말한 이론적 태도 역시 '정치성'을 가진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으음. 물론 이렇게 정치성이라는 개념을 폭넓게 사용하면 개념 자체가 가지는 의미가 희미해지는 측면을 우려할 수도 있겟지만요. 푸코와 정신분석의 오묘한 관계에 대해서는 강의가 끝나고 나서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었는데 본인께서도 <저자란 무엇인가?>에서의 언급같은 개론적인 내용만을 언급해서 아쉬웠다고 하시더군요. 이 주제에 관해서는 또 다른 기회에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으면 좋겠다 싶었습니다.
먼저 장문의 댓글에 감사하며, 전반적인 언급에 대해서 동의합니다.^^ 오해의 여지가 있는 듯한 언급을 상술하자면, 제가 '생명정치나 통치성과 관련해서는 언급이 없었다'라고 쓴 부분은 그냥 강의에서 다루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주제가 주제이니 만큼, 강좌가 좀 더 고전적인(?) 푸코에 초점을 맞추었다는 의미 정도이고, 질문도 삶정치나 통치성과 관련해서 나오지 않았었고, 개인적으로 질문을 하려고 했으나 기회를 놓쳐 그 점은 아쉽습니다. 덧붙여, 푸코의 문제의식을 단순화하자면 '정치'를 권력과 주체(화)의 측면에서 들여 본다고 할 때, 그것이 훈육-사법 장치(미시?)든 인구의 통치(거시?)든간에 그것이 '결정적으로' 중요하지는 않겠죠. 푸코 본인도 분명히 그렇게 말하고 있고요. 요즘 '푸코'의 유행은 푸코보다는 네그리나 아감벤을 경유한 경우가 많고, 푸코 말년의 강의록 출판에 따른 영향도 있을 것이고, 그것보다는 '통치성'이란 유행어를 자의적으로 전용하는 탓 때문이겠죠. 그리고 잘 알다시피 '지리적' 문제 혹은 식민주의와 관련해서, 푸코가 모든 것에 해답을 주는 존재가 아니라고 한다면, 예컨대 E.사이드의 작업은 푸코의 작업을 '충실히' 잇고 있는 셈이겠지요. 그리고, 푸코 자신도 적어도 '오리엔트' 지역(과의 비교)은 언급을 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또한, '철학자'들의 훈고학적 작업이 -- 나쁘다는 의미는 아니고, 필요한 작업이고 -- 불필요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것보다는, E.사이드처럼 푸코를 따라서, 한국에서도 자기 문제를 제기하고 실천하는 작업들이 지금보다 더욱 많아져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정치성'은 당연히 현재에 개입하는 지식인으로서 '철학자'가 견지해야만 하는 것이기에, '철학자'냐 아니냐가 중요한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저는 한국 사회에 한정해 볼 때, (적어도 이론적) 실천에서 프랑스 이론가들 중, 알튀세르와 푸코 만큼 큰 영향을 준 경우가 없다고 봅니다(브루디외도 포함시킬 수 있겠네요). 이론적 지평을 넓혔들 뿐더러 -- 이러한 기여나 효과는 다른 이들도 많지요 -- 구체적인 분석의 도구와 공간, 즉 관념이 아닌 도구를 바탕으로 한 실천영역들을 매우 확장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후자의 '구체적'인 측면에서 주로 기여한 이들은, 활동가들을 제외할 경우, 역사학자들을 포함해서 사회과학자들이 더 많다는 것이지요. 한국 철학계의 아비투스를 가만한다고 하더라도 푸코다워 지려면 좀더 '푸코적'이어야 한다는 말이죠. 덧붙이면, 푸코와 정신분석의 관계를 연구한 선행작업들이 제법 있는 것으로 아는데, 강사는 푸코 이외에는 인용하지 않았다는 점이 많이 아쉬운 점입니다. 물론 그러한 목적의 글이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만...중요한 '저항'의 문제가 강의에 많이 생략된 점도 마찬가지로 아쉬웠습니다. 덧붙이면, 강의가 끝나고, 식사자리에 참석할 기회가 있었으나, K대 철학과 교수들과 대학원생들 뿐이더군요. 개인적으로 안면이 있는 분들이 있지만, 저는 그런 자리에서 밥을 먹으면 체하기 때문에 빠졌는데, 지금 생각하니, 억지로라도 끼어서 정신분석의과의 '오묘한' 문제에 대해 좀 더 풀었으면 좋을 법했군요. 언젠가 기회가 있겠지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