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랭 바디우, 알튀세르 - 주체 없는 주체성 3

2008/04/26 01:24

그렇다면, 모든 문제는 다음과 같다. 어떻게 우리가 대상과 대상성(정치는 과학이 아니다)뿐만 아니라 주체(정치는 이데올로기가 아니며, 국가의 기능도 아니다)로부터 벗어나 있는, 정치의 개별적 공간을 명명할 수 있겠는가? 실천에 입각해서, 또한 분명히 불완전한 방식으로, 알튀세르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방식으로 이 질문에 접근했다.

 

1. ‘계급’과 ‘계급투쟁’은 정치의 유동하는(fleeting) 정체성에 끊임없이 ‘말안장을 씌우는’ 기표들이다. 이 기표들은 정치의 이름들이다. ‘투쟁’이란 단어는 정치적 대상이란 존재하지 않음을(투쟁은 대상이 아니다) 가리키며, ‘계급’이란 단어는 주체 역시 존재하지 않음을(알튀세르는 역사의 영역에서 프롤레타리아트 주체에 관한 어떠한 관념도 반대했다) 가리킨다. 이러한 명목적 동일시(nominal identification)(계급투쟁이란 ‘기표’가 ‘투쟁’과 ‘계급’의 결합, 곧 대상도 없고 주체도 없는 정치를 가리키는 표현임을 의미 한다-역자)는 엄밀히 말해 임시적이고, 심지어 의심스럽기도 한데, 라자뤼스가 설득력 있게 진전시킨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다. ‘계급’이란 단어는 순환하며, 역사의 과학(역사과학에 의하면 계급은 대상의 구성에 관련된 개념이다)과 정치 간에 모호성을 도입한다.

 

2. ‘당파성’, ‘선택’, ‘결정’ 또는 ‘혁명적 전위’와 같은 표현을 사용하여, 알튀세르는 정치에 몰입하는 것은 온전하고 진실된 주관적 질서(the subjective order)임을 가리킨다(indicates).

이제 알튀세르가 우리들을 이끌고 가는 지점은, 알튀세르 자신이 그 지점을 깨달았다고 말할 수 없을지라도, 다음과 같다. 과연 주체 없는 주체성(subjectivity without a subject)을 사고할 수 있는가? 나아가, 자신의 형상이 더 이상 (과학적) 대상이 아닌 주체 없는 주체성을 사고할 수 있는가? 소위 알튀세르의 토픽적 작업 틀 전체가 지향하는 바는 정치의 철학-내 표지로서 주체 없는 주체성이라는 바로 이러한 수수께끼인 것이다.

 

‘이미 모두 그곳에 있다’는 독트린에 따를 때, 토픽적 구조화는 세 가지 핵심 요점을 드러낸다.

 

1. 경제에 의한 물질적 결정, 이것은 강력한 안정성의 원리를 제공한다. 사실상, 경제는 대상성의 형상이며, 대상의 장소이고, 따라서 과학의 장소이다.

 

2. 상상적 종합, 이것은 개인들에 의해 지탱되며, 이들은 명목적인 비존재이다. 이것은 주체의 장소이며, 이데올로기의 장소이다. 그것은 또한 국가의 조작적 범위 내에서, 국가가 개별적 육체들을 ‘양도(take)’ 받는 한에서, 국가장치들의 기능적(대개 객관적이지 않은) 존재 내에서 국가의 장소이기도 하다.



3. 사건적 중층결정들, 파국들, 혁명들, 발명들, 비-주요 모순의 주요-[모순]되기. 여기에 당파성의 실재 재료(stuff), 전위의 기회, 선택의 계기들이 놓여 있다. 중층결정은 가능성을 의제에 올리지만, 이에 반해 경제적 장소(대상성)는 질서 잡힌 안정성의 의제이며, 그리고 국가주의적 위치(이데올로기적 주체성)는 개인을 ‘기능’으로 만든다. 중층결정은 진정한(in truth) 정치적 장소이다. 또한 비록 중층결정이 어떠한 주체-효과(그런 효과들은 국가주의적이다)도 모르고, 어떤한 대상(그런 대상들은 오직 과학의 영역에서만 존재한다)도 수정하거나 구성하지 못하지만, 중층결정은 주관적 영역(선택, 당파성, 전위)에 귀속됨을 반드시 언급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주체 또는 대상 없는 ‘주체성’을 이해해야 하는가? 그것은 전위의 물질적 형식 속에 있는 동질적인 사고의 과정이며, (과학적) 대상성을 통해 결정되지 않으며, (이데올로기적) 주체-효과에 사로잡히지 않는 것이다. 중층결정의 장소에서, 이러한 과정은 가능성 쪽으로 기울여지며, 따라서 당파성, 즉 예단(a prescription)에 조응하는 것이다. 이러한 당파성, 예단은 경제의 객관적 질서 안에서나 주체의 국가적 질서 안에서는 아무런 보장을 받지 못하지만, 상황 속에서 실재의 경로를 찾아갈 수 있게 한다.

알튀세르는 이 장소를, 최근에 라자뤼스가 시도한 것처럼, 철학적 우회를 포기하고 직접적인(철학의-역자) 조건에 접근함으로써 사고하지 않았다. 반면 그는 사변적 지형학을 추구했는데, 이것은 맑스와 엥겔스의 전망을 확대하는 것, 알튀세르의 표현대로 ‘충당하는(fulfilling)’ 것이며, 그것은 이러한 전망이 가능하도록 사고하는 것이다. 직접적으로가 아니라(실제로 알튀세르 자신은 정치적으로 활동적이지 않았다), 철학적 등재(registration)로부터 추론된 영역에서 말이다.

한 동안 그것은 매우 중요한 기획이었고, 여전히 현 시기에 대한 우리의 지적 과업에 시사점을 주고 있다. 이러한 경탄할만한 노력은, 여전히 명명되지 않은(주체 없는 주체성을 사고하는 것) 노력은, 루이 알튀세르가 우리에게 최상의 존경을 받을 충분한 가치가 있음을 보여준다. 왜냐하면, 모든 정치철학 외부에서, 정치적으로 조건 지어진 새로운 철학적 효과를 삶에 도입하려는 이러한 어려운 과업에 접근하도록 해준 사람이 바로 알튀세르이기 때문이다. 또한 정치의 추상적이고 궁극적으로 노예화된 전망과 권리의 목적론적 윤리학을 결부시키는, 결속(the bond), 혹은 공동체(being-together)의 휴머니즘적 전망을 우리가 거부하게된 것도 알튀세르가 이끌었다. 나는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정치적 결속’과 민주주의 각각에 관한 통념을 다루는 다음 두 장의 메타정치적 연구를 알튀세르에게 헌정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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