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보수 정당이 김영삼 정권 전반기 수준의 개혁 노선, 즉 ‘어느 우방도 민족보다 나을 수는 없다’든지, 이인모 노인을 송환했다든지 하던 식으로 북한을 악마화하지 않고, 대미 사대주의 태도에서 벗어나 남북 협상에 대한 주도적 노선을 실천하고, 적어도 노동의 양극화 폐해를 전향적으로 수정할 정책 의지를 실천한다는 보장이 있다면, 집권해도 좋다고 생각한다. 박근혜도 2012년 대선에 나오면서 평화 프로세스 중 하나로 북한에 평양 대표부를 설치하겠다고 공약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물론 다 뻥이었고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집권을 민주당이 하든 보수정당 누가 하든, 사회 이슈에 대한 논쟁과 토론이 벌어지고 생산적 합의가 나오고 예측 가능한 정치가 전개된다면 누가 뭐라고 하겠냐 말이다. 나도 한국에서 일하는 노동 대중의 이익을 대변하는 정당이 연정 형태로라도 집권하는 날도 오기를 굴뚝 같은 마음으로 바라기도 한다. 영국의 노동당이라든지, 독일 지방정부에서 종종 사민당(SPD)과 좌파당 링케(Die Linke) 및 녹색당의 적-적-녹 연정을 하듯이 한국에서도 진짜 좌파 정권이 들어설 날도 와야 한다. 그런데 개혁적 보수정당의 재생, 진보 좌파의 정치적 도약의 조짐이 안 보인다.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이후 보수정당은 오히려 더 옛날로 돌아가고 공허한 프로파간다 수준의 대결 정치의 늪으로 빠졌다. 민주당은 여론조사 프레임과 촛불 정부라는 막연한 정당성으로 맞대응 하고 있다. 정의당은 뚜렷한 비전을 제시하지 못하고 여론 지형에 갇혀서 선거제 개혁을 통한 의석수 증가에 연연하는 것 같다. 민중당, 노동당, 녹색당은 지난 몇 년 지리멸렬하고 어떤 참신한 실천과 대안을 보여주지 못했다.
 
문재인 정부에 대한 심각한 불만과 반발은 자유한국당-바른미래당 지지자가 아니라도 분명히 갖고 있다. 언론이 효과적으로 다루지 못하는 부분 같다. 개혁의 내용과 형식에 민주적 절차가 반영되지 못하는 점이다. 국회 절차 거친다더니 북한의 ICBM 실험 이후 즉각 사드 임시 배치 결정하고, 공약 기한 지킨다며 조급하게 만든 대통령 발의 개헌안 좌초, 최저임금법 개악, 무노조 삼성 경영 총수 이재용 국정농단 뇌물죄 재판도 안 끝났는데 자주 만나기, 유난히도 강조하는 4차 산업혁명 명분으로 온갖 개인정보 빅데이터 수집 쉽게 하려는 것, 규제 샌드박스, 예비 타당성 조사 면제, 일본의 경제 보복 명분으로 주 52시간도 또 유예하려고 하고, 소재 부품 개발한다는 명분으로 또 무슨 규제 완화 조치를 하려는지 모르고, 보건의료 부문의 민영화 논란 정책 토론도 충분하지 못한 상태로 추진하려는 것 등등. 전 공정위 위원장이자 현 청와대 정책실장 김상조는 시민사회의 비판을 오히려 나무라고 마치 새로운 기득권 저항인 것처럼 이야기한 적이 있다. 갈등과 대립과 비판을 감수하고 청와대와 정부가 뭔가 뚜렷한 방향 설정을 하지 못한 것을 오히려 탓해야 하지 않겠나.
 
개혁의 절차는 그 내용과 형식이 민주적으로 충분히 뒷받침되어야 한다. 그런데 과연 그러냐? 내용이 충분히 검토되지 않고 논란의 여지가 있는데도 단지 반대해서 곤란하다는 이유로, 마냥 늦출 수 없다는 이유로 논점이 제대로 형성되지 않는다. 그러다가 형식적 절차를 버틸 수 있는 수준까지 거쳐서 이만 되었다 싶으면 밀어붙이는 것이다. 조국 법무부 장관 임명이 바로 그 모순과 자기 오류의 결정체였다고 생각한다. 대학생들이 조국 법무부 장관 임명 반대하는 것이 과연 불공정, 박탈감, 특권층 행태에서 오는 상처, 뭐 그런 것들일까?
 
검찰 개혁을 명분으로 청와대 민정수석 하던 사람이 이런저런 논란과 반대에도 불구하고 후보로 지명되었는데, 의혹과 논란을 해소하지도 못했고 오히려 수사 대상이 되었다. 그래도 임명이 된다. 역사적으로 한국 검찰은 무엇보다 대통령 권력과 거리를 둬야 한다. 그리고 검찰 조직이 민주적으로 개혁되려면 검찰총장을 비롯한 인사권을 대통령과 정부가 좌지우지하지 않아야 하고, 적어도 검찰총장은 직선으로 뽑아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윤석열 현 검찰총장은 직선제 검찰이 탄생하기 전 마지막 총장으로서 검찰 내부의 개혁을 마무리하는 것이 중요 임무가 되었으면 하는 게 내 바람이다.
 
검찰의 본질적 기능은 사법적 수사와 기소 과정이 시민의 자유와 인권을 침해하지 않는 가운데 형사사법 작용이 수행되고, 한편으로 권력의 남용과 부패를 견제, 통제, 감시하는 데 있어야 하는 것 아니겠나. 수사권 조정은 검찰의 민주적 사법수사 기능의 하위 범주에 있는 것이지, 수사권을 단순히 배분하는 것은 아니여야 한다. 이러한 첨예한 사안을 본인과 그 가족이 수사받는 법무부 장관이 지금 시점의 정치 대립 구도나, 문재인 정부가 그동안 보여준 개혁의 방식으로 보건대 버티면서 해결하기 힘들 것이다. 여론도 그렇게 우호적이지 않다.
 
그런데도 계속 법무부와 검찰의 갈등 구도가 부각되면, 결국 크나큰 문제가 발생할 것 같다. 심히 걱정되는 것은 문재인 정권을 그냥 지지하는 수준이 아니라 감싸도 옹위하는 사람들이 균형 감각을 잃고 있는 것 같다는 점이다. 자유주의 이론가 존 스튜어트 밀이 그랬던가. 극단적인 반대 의견을 허용하고 토론하는 것이 오히려 민주주의를 강화한다는 점을 되새겨야 한다. 선과 악의 구도로 정치적 반대자들을 낙인 찍는 순간, 그리고 그러한 폐해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이 둔감해지는 순간, 민주주의는 정말 후퇴하는 것 아닌가.
 
자발적으로 무조건적으로 정권을 지지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커지면 위험이 닥쳐온다는 신호이다. 한국에서는 아직까지 파시즘이 성공한 적이 없고 민중들에 의해 번번이 퇴치되었다. 앞으로도 쉽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자본과 권력이 밀착해서 오히려 '민주주의와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자기 정당화를 반복하면, 그런 날이 안 온다는 장담도 못한다. 언론, 일하는 시민들, 대학의 역할이 점점 중요해지고 있다. 구체적이고 내용 있는 토론의 장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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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9/15 23:57 2019/09/15 2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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