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용자 삽입 이미지

어느새 까맣게 잊고 있던 이름 페트라 켈리를 최근 우연찮게 마주쳤다. 독일 녹색당의 리더이자 평화운동가, 여성과 생태 의제의 정치적 해결을 위해 비타협적으로 싸우고 온 몸으로 실천하다가 45세의 나이로 비극적 죽음을 맞았던 유능하고 이지적인 정치인이다.

우리나라에 소개된 페트라 켈리의 연설문과 원고는 2004년 달팽이 출판사에서 [희망은 있다(Um Hoffnung kämpfen)]라는 책으로 출판되었다. 독일에서 1983년에 간행된 책이 20년이 넘어서야 우리나라에서 번역되었는데 분량이 많지 않은 책이었다. 그리고 8년이나 흘렀지만 페트라 켈리나 독일 녹색당에 대한 연구는 아직 널리 공유되지 않은 것 같다. 환경운동 진영에서 가끔씩 언급되었던 것 같고. 어쨌든 200쪽이 채 안 되는 이 책에는 지금도 검토하고 파고들 만한 많은 주제들이 풍부했다.

무엇보다 관심이 갔던 부분은, 페트라 켈리가 역설한 평화, 녹색, 생태, 반전, 반핵, 여성 같은 가치 그 자체보다는(이미 보편 의제로 자리 잡았다. 물론 실질적 해결과 논의는 아직도 요원하지만) 그가 생각한 정당과 의회정치의 철학이다.

켈리는 강자 중심의 사회적 불평등 관계가 구조화되어 국가와 세계 차원에서 죽음과 폭력을 제어할 시스템이 붕괴했다는 기본 인식을 갖고 있었다. 독일에서 나고 자란 뒤 미국에서 고등교육을 마치고 정치 분야에서 젊은 20대 초반에 이미 훈련을 거쳤고, 다양한 시민운동과 결합했던 그는 교육, 이주 노동자, 임금 평등, 노동자 문제, 건강과 환경 보호 등 세계와 인류 미래의 위협으로 다가온 이슈들에 적극 뛰어들었다. 그 경험이 밑바탕이 되어 1979년 녹색당을 창당하고 유럽의회 선거에서 3.2%의 지지를 받는다. 1983년에 26명의 녹색당 동료들과 함께 연방의회에 입성했고, 녹색당이 사민당과 연합 정권을 이루어 독일 집권당이 되는 데 씨를 뿌렸다.

켈리는 기성 정당과 엘리트 중심의 의회로는 전체 국민을 대변할 수 없음을 인식했다. 또한 덜 나쁜 쪽을 선택하는 것보다 근본적인 내용에서 옳다고 생각하는 쪽을 선택하는 것이 점점 중요해지고 있다고 말한다. 그는 기존 정치 시스템과 관계를 맺으면서도 대안운동, 노동운동, 시민운동이 더 많이 생기고 성장해야 하며 입구가 차단되지 않은 진정한 정당 시스템을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켈리의 연방의회 사무실 문에는 로자 룩셈부르크와 마틴 루터 킹의 포스터가 붙어 있다. 그리고 독일 사회민주당이 결정적 상황에서 평화에 대한 국민의 갈망을 무시하고 제국 치하에서 전쟁 비용을 승인했던 과거 역사를 잊지 않고 비판했다.

정당 정치에 대한 페트라 켈리의 주장 한 대목을 인용해본다.

 

“우리 녹색당의 정치적 의무는 기존의 정치권 내에서 양지를 추구한다거나 권력과 특권의 유지를 위한 일치된 행동에 동참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우리는 결코 다른 정당과의 연합이나 연정을 형성하기 위한 목적으로 시스템 안으로 편입하려는 전술을 원하지 않는다. 이것이야말로 자신들의 정권 획득이나 유지를 위해 녹색당을 악용하려는 낡은 정당들이 바라는 바이기 때문이다. 본질적으로 완전히 새로운 정당인 녹색당의 마지막 바람은 녹색당의 새로운 사고로 활기를 불어넣어 다른 정당들을 개혁의 길로 이끄는 것이다. 녹색당에게 손을 뻗치는 사민당의 구애는 권력의 오만함을 보여준다. 정신적인 불임 상태에 빠진 고착화된 낡은 정당들의 혼탁한 정치적 시선을 여실히 증명해준다.”
 

또한 정당의 자기 비판의 중요성을 역설한 대목이 있다.
 

“지금까지의 연방의회를 구성한 정당들이 보여준 것처럼 하나의 정치 정당이 그 자체로 목적이 되는 일은 결코 없어야 한다. 정당은 신념과 관심사를 표출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다. 여기서 정당이 표방하는 관심사와 정당의 역할에 대해 끊임없이 자기 비판을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우리는 만들어진 이데올로기가 파괴와 공격으로 변질되는 과정을 과거의 역사를 통해 충분히 보아왔다. 녹색당은 결코 그 어떤 완성된 이데올로기도 제공하지 않을 것이고, 자만에 빠지거나 다른 사람들에게 그 어떤 일도 강요하지 않도록 우리 자신을 경계할 것이다. 삶에 대한 자신의 이해를 다른 누군가에게 위임하거나 강요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한국의 진보정당이 발전하기 위해서라도 한 번은 거쳐야 할 주제가 페트라 켈리와 독일 녹색당의 정치 철학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독일도 분단국가 체제를 겪었고 우리나라 노동자들이 독일로 돈 벌러 나간 경험도 있고, 또 한국의 법 체계는 독일법 체계를 많이 수용한 것으로 안다. 어떤 한 인물이나 한 나라의 사례를 너무 추종해서는 안 되겠지만 영미식 스탠더드만 글로벌 표준으로 생각하는 보수의 낡은 사대주의, 또 진보라고 하면서 스웨덴 복지국가나 핀란드 교육 모델, 네덜란드 모델만 수박 겉핥기로 반복 언급하는 건 좀 아니지 않을까?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12/05/29 22:42 2012/05/29 22:42

Trackback Address >> http://blog.jinbo.net/solbangul/trackback/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