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림 아주머니 이야기

from 문학 2012/03/11 17:55

오랜 만에 만난 친구가 한 말. “결국은 어쩔 수 없어. 정직하거나 정의롭게 산다고 해서 인정받는 건 아니거든. 나 역시도 남들 하는 대로 따라가면서 내 목표를 이루고 살 수밖에 없지. 물론 그 목표도 많은 사람들이 흔히 갖고 있는 목표이긴 하지만 어쨌든 내가 그걸 바라는 한 그건 내 목표인 셈이니까.”


결국 대박이 나고 성공을 하고 돈을 많이 벌어 자기가 하고 싶은 것-그게 무엇인지 불분명하다는 게 문제다-을 할 수 있는 자유를 얻어내야 한다. 그 방식은 유행을 하루빨리 터득하고 마침내 자기 것으로 소화해내는 것, 그리고 거기서 하나의 권력을 얻는 것이다. 그렇게 하려면 ‘자기만의 원칙’ 같은 이상론이 아니라 ‘가장 그럴듯한’ 다른 본보기를 모방하고 그 모방을 자꾸 반복해서 남보다 우월해져야 한다. 이것은 피할 수 없는 숙명론이다.

 

친구와 나누던 대화는 벽에 부딪혀 잠시 침묵이 흐른다. 듣고 있던 나는 친구의 성격을 잘 알기에 억지로 수긍해준다. 다음에는 좀더 여유 있고 흐뭇한 시간을 갖자고 서로 기약하며 소박하게 복을 빌어주고 헤어진다. 그러나 심사는 여전히 엉켜 있다. 친구 사이를 현상 유지한다는 것이 어느새 숙명론의 벽을 부수지 않고 내버려두는 일과 같아졌다. 그렇지 않으면 위험해지고 감당하기 힘들 테니까. 그런데 이런 판단도 하나의 유행하는 인생관이고 그것이 정말로 그런 것인지는 끝내 검증되지 못한 채 끊임없이 복제되고 유포된다. 자본주의 성공 이데올로기에 압도되다가 삶의 진상은 미궁에 빠진 채 그냥 그렇고 그런 것으로 끝나버린다.
 

노신(魯迅)의 소설 <축원례[祝福]>에 나오는 상림(祥林) 아주머니는 죽기 직전에 한 가지 절박한 질문을 한다. “사람이 죽은 뒤에 영혼이 있나요, 없나요?” 오랜 만에 고향을 찾아왔다가 우연히 길거리에서 이 여인과 마주친 소설 속 화자(話者)인 ‘나’는 ‘있을 것 같다’고 대답했다가 거듭되는 다른 질문에 말문이 막혀 결국은 “정확하게는 모릅니다”라고 대답하고 만다. 한해의 복신(福神)을 맞아들이고 행운을 비는 섣달 그믐날의 축원례 전날 밤 상림 아주머니는 죽었다. 이 여인은 비참한 신세 속에서 몸부림치며 살아왔지만, 자신에게 돌아오는 것은 갈수록 늘어나는 멸시와 천대였고, 절망과 기억 상실 속에서 스스로를 잃어가야 했다.
 

열 살 아래인 첫째 남편은 시집간 지 얼마 못 되어 죽었고, 시가에서 도망쳐 나와 머슴살이 하던 중에 다시 끌려가 두메산골로 강제로 재가해야 했다. 끌려가는 혼례 가마에서 악을 쓰며 발버둥치고 혼례식 향로상에 일부러 머리를 찧어 피가 흘렀다. 신방에 처넣어진 상림 아주머니. 그래도 운명은 일 잘하는 남편과 귀엽고 착한 아이를 상림에게 허락하는 듯했지만, 이내 남편은 열병에 목숨을 빼앗기고 어린 아들은 마당에서 어머니를 돕겠다고 콩을 까다가 늑대에게 물려가 죽고 말았다. 믿기 힘든 이 비참한 사연은 상림 아주머니와 마을 사람들을 이어주는 끈이다. 상림 아주머니의 육성:


“전 정말 바보였어요. 정말…. 전 그저 눈이 쌓인 때라야 산 속에 먹을 것이 없어 짐승들이 마을로 내려오는 줄로만 알았지요. 봄철에도 내려올 줄은 몰랐어요. 전 아침 일찍 일어나서 대문을 열어놓고 작은 바구니에 콩을 담아서 우리 아모(阿毛)한테 문턱에 앉아 그걸 까라고 했지요. 그 앤 내 말이면 뭐든 다 고분고분 들었어요. 그 애가 나오기 전 뒤란에 가서 장작을 팬 다음 쌀을 씻어서 솥에 안치곤 콩을 삶으려고 아모를 불렀지만 대답이 없었어요. 그래서 나가보았더니 땅바닥에 콩만 널려 있고 우리 아모는 온데간데없지 안겠어요. 그 애는 남의 집에 잘 놀러 가지도 않았지만 그래도 이 집 저 집 다니며 물어보았지요. 어디에도 없었어요. 나는 너무도 속이 타서 사람들한테 찾아달라고 부탁했지요. 한낮이 기울 때까지 찾아다니다가 산 속에서 가시덤불에 걸린 그 애의 조그만 신짝을 하나 발견했어요. 모두들 그걸 보고 이젠 틀렸어, 늑대가 물어간 게로군 하고 말하는 거예요. 그래도 좀더 들어가 보았더니 그 애가 풀숲 웅덩이에 누워 있는데 오장은 다 파먹히고 없잖겠어요. 그래도 손엔 그 작은 바구니를 꼭 틀어쥐고…”(<축원례(祝福)>, 노신문학회 편역, «노신 전집 1», 여강출판사).
 

소설의 무대인 노진(魯鎭) 마을 사람들은 한편으로는 이 버림받는 여인의 인생을 멸시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 사연의 절절함에 귀 기울이며 어떤 후련함, 일종의 눈물을 쏟고 난 뒤의 상쾌함 같은 걸 구한다. 상림 아주머니에게는 이제 이 이야기가 대화의 유일한 소재이다. 그런데 이야기가 반복되어 듣는 사람이 다 외울 지경에 이르자 사람들은 억지 웃음과 싸늘하고 가시 돋친 반응을 해 보인다. 이제 상림은 점점 말이 없어지고 주인집에서 시키는 일거리는 줄어들고 기억력도 상해가고 있다. 때마침 주인집에 축원례 준비를 위해 임시 일꾼으로 들어온 유씨 어멈은 액땜을 해보라는 말을 상림 아주머니에게 건넨다. 죽은 두 남편과 아들을 위해 토지묘에 문지방을 시주하면 큰 죄를 벗을 수 있다는 유 어멈의 말은 어쩌면 한번 던져본 생각이었을 테지만, 상림은 그 후 1년 동안 모멸과 치욕 속에서 꾹 참아가며 일한 대가인 삯을 털어 문지방을 시주했다.
 

신명이 난 상림이 주인집 제사상을 도우려 움직인다. 그러나 여전히 상림 아주머니는 제사 준비를 하기에는 부정한 여인이었다. 제사에서 쫓겨난 상림은 두려움에 떨다가 정신은 더욱 흐리멍덩해졌고, ‘사람이 죽고 나면 영혼은 있나요, 없나요?’라는 질문의 답도 얻지 못한 채 거지 신세가 되어 삶을 마감했다. 소설의 화자는 상림 아주머니의 마지막 질문에 ‘정확히는 모르겠다’는 변명으로 답했다. 그러나 자기 운명에 마지막 순간까지 저항했던 이 여인의 삶을 회상하고 연결해내면서 어렴풋이 깨닫는 바가 있었을 것이다. 상림 아주머니가 죽은 다음날 새벽, 흩날리는 눈송이 속에서 터지는 축원례의 폭죽 소리는 마을 사람들에게는 언제든 찾아오는 행복한 순간이겠지만, 그 행복에 숨어 있는 비참하고 형언할 수 없는 사연들이 바로 그 순간들을 떠받치고 있다는 것을. 이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 암시된 그 사상을 들여다본다:


“이 들뜬 소리에 얼싸안긴 나는 마음이 한결 거뜬하고 가벼워졌으며, 대낮부터 초저녁까지 품고 있던 의혹은 이 축원례의 공기에 밀려 가뭇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오로지 천지간의 거룩한 신선들이 제물과 향내를 기꺼이 운감하고 거나하게 취하여 하늘을 비틀비틀 거닐면서 노진 사람들에게 끝없는 행복을 마련해주려는 것만 같았다.”
 

운명과 대결하느라 육신과 정신이 완전히 소멸된 한 여인의 삶을 통해 노진 마을이란 곳의 모습이 비로소 뚜렷하게 드러난다.
 

읽는 순간에는 흥미와 감동을 받는 것 같다가도 읽고 나면 머릿속에서 싹 사라져버리는 소설들이 유명한 작가의 대표작들 중에도 많이 있다. 그런데 이 소설의 뚜렷한 각인 기능은 재삼 곱씹을 만하다. 노신이 마흔셋에 발표한 이 소설을 통해 ‘희망’이란 말 속에 밴 고통을 생각하게 되며, 문학이란 것의 긍정성을 수긍하게 된다. 억지 수긍이 아닌 진실한 수긍을 통해 삶의 무기력을 벗어나 한 걸음 나아가야 할 이유를 갖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자본주의적 인간관계에 짙게 밴 숙명론, 곧 몸부림쳐봐야 소용없다는 일종의 훈계, 그 모호하고 뜨뜻미지근한 삶, 마침내 값싼 행복주의로 전락하는 삶을 넘어서는 길로 안내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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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3/11 17:55 2012/03/11 1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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