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성명서와 기고글

단체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쓰는 글이 아마도 성명서와 기고글일것이다. 뭐 회의문서도 있지만 그것은 여러사람에게 읽히기 위한 글보다는 다분히 기능적인 글이니까 논외로 하고, 성명서과 기고글이 받는 대접, 성명서와 기고글을 쓰는 사람들은 또 어떻게 다른지를 생각해봤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성명서는 언제나 기고글들에 비해 푸대접을 받는다. 좋은 성명서쓰기가 어려운 것은 사실이다. 성명서는 대개의 경우 급하게 써야하는 일도 많고, 아무래도 적절한 분량이라는 것이 정해져 있는 편이고, 그래서 글을 아주 잘쓰는 사람들도 좋은 성명서를 쓰기란 쉽지 않을 일이다. 하지만 성명서들이 처한 이러한 핸디캡들을 애써 보상해주더라도 성명서는 기고글에 비해서는 푸대접을 받는 것이 사실이다. 나부터도 기고글을 쓸 때와 성명서를 쓸 때 들이는 노력은 크게 다르다. 그것은 정보 수집 등과 같은 노력뿐만 아니라 글을 쓸 때의 감정적 정서적 깊이까지도 포함하는 이야기다. 곰곰히 생각해보면 성명서는 단체의 명의로 나가고, 여타의 기고글들은 개인의 명의로 나가기 때문이 아닐까. 나의 이름자가 걸려서 나가는 글들에 대해서는 아무래도 더 신경을 쓰고 더 노력을 기울이게 된다. 하지만 성명서는 비록 내가 쓰더라도 그것은 나의 글이라기 보다는 우리의 입장이기 때문에 그 글에 대한 온갖 칭찬이나 비판도 왠지 나에게 향한다고는 잘 느껴지지 않는다. 해탈한 성인군자가 아닌 이상 아무래도 자기 자신에게 보다 직접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기고글에 더 많은 신경이 쓰이는 것은 어느 정도는 당연하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이 도를 넘어 자신의 개인적인 명성을 신경쓰게 된다면(게다가 그 경계는 모호하기 짝이 없다) 마땅히 경계해야할 일이다. 알량한 몇글자의 끄적거림으로 이름을 알리고싶은 허영심, 좋게 말해봤자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겠지만, 아무튼 어떤 글이 내용과는 별개로 한 개인에게 집중된 결과를 낳는다면 운동에서의 성과 또한 집단보다는 그 한 사람에게 귀결될 수밖에 없다. 기고글과 성명서를 쓰는 사람들은 누군인가를 생각해보면 조금 더 재미있어진다. 성명서를 쓰는 사람들은 활동가들이고, 기고글은 주로 교수라던지 대학원생이나 학위소지자등 소위 가방끈 긴 사람들이다. 물론 활동가들도 각종매체에 기고글을 쓰기도 하지만 섭외 우선순위는 박사님들이나 교수님들일것이다. 그리고 예외적인 케이스라도 그런 분들이 성명서를 쓰는 경우는 못봤다. 이를테면 한홍구선생님이 병역거부연대회의의 성명서를 쓰는 경우는 없다. 물론 한홍구 선생님이 글을 재미있고 어렵지 않게 잘쓰기 때문에 한홍구가 병역거부관련 기고글들을 많이 쓰는 것에 대해서 일말의 불만도 없다. 다만 어떤 전문가라 불리는 집단과 단체나 현장에서 일하는 활동가들에 대한 우리사회의 인식, 혹은 대우가 성명서와 기고글을 대하는 방식에서 드러나는 것 같아서 조금 화가 나기도 한다. 글쓰는 일이 생업과 보다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사람들이 활동가들보다 글쓰는 능력은 뛰어나겠지만, 진실은 항상 머릿속의 합리적 사고와 논리만으로는 접근할 수 없는 것인데, 과연 활동가들의 신체에 각인된 무수한 경험들이 아무래도 찬밥신세인거 같아서 화가 난다. 뭐 열심히 좋은 글을 쓰시는 분들을 뭐라고 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성명서보다는 기고글을 쓰는데 훨씬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이는 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되먹지도 못한 글 따위 가지고 허영심부리는 모습이 싫고, 소위 전문가들의 꽁무니만 졸졸 쫓으며 진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사람들을 무시하는 한국사회의 찌질한 모습이 나한테도 보이는 것이 화가 나는 거다. 물론 기고글을 쓸 기회들에서는 당연히 많은 노력과 감정을 들여서 써야겠지만, 앞으로 성명서를 쓸 일이 있다면 더 큰 노력을 기울일 것을 다짐해야겠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