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겁지 아니한 기다림

2005/11/02 10:56

모든 기다림은 즐겁다.

오랫만에 만나게 되는 친구를 기다리는 시간은 지루하지 않다.

오히려 만남을 준비하고 상상하며 여러가지 계획들을

세우고 다시 세우다 보면 대체 달력이나 시계따위가 눈에 들어올 일이 없다.

 

계획된 만남과 기다림보다 더 재미있는 것은

기다리고 있는지 모르고 기다리는 것이다.

옛 애인을 길을 가다 우연히 만난다.

예정에 없던 일이라 우리는 그 만남을 기다리고 있지는 못했지만,

그리고 헤어져 돌아오는 발걸음과 아련한 마음은

우리가 그러한 만남을 은연중에 기다리고 있었다는 증거이다.

 

이렇듯 삶은 기다리는 재미로 이어진다.

오히려 '헤어짐'을 예약하는 '만남'보다

'만남'을 준비하는 '기다림'이 더 즐거운 법이다.

 

그런데 지금 난 그다지 즐겁지 아니한 것을 기다리고 있다.

어제 집에 들어오니 등기가 와있었다.

사람이 없어서 오늘 12시에서 2시사이에 다시 온다는 메모...

나에게 집으로 올 등기는 '입영영장'

 

처음받아보는 입영영장도 아니고,

갑작스레 날라온것은 더더욱 아니다.

또한 이미 병역거부를 하기로 마음먹은지도 오래,

여러 병역거부자들을 감옥에 보내면서

나름대로의 준비도 오랫동안 해왔다.

그리고 난 나의 병역거부가 그다지 슬픈일이거나

안타까운일이 아니라 기쁘고 즐거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내 뜻대로 살아가는 일만큼 즐거운 것은 없고,

그럴 수 있는 사람만큼 축복받은 사람은 없다)

 

그런데도 기분이 나쁘다.

사무실에 일찍 나가려고 했는데 그걸 기다리느라고 못나간것도 싫고,

내 삶의 즐거움인 기다림이 이럴수도 있다는 것도 싫고

무엇보다도

 

국가가 나에게 강제적인 어떤 것을 강요하는 것이 마음에 안든다.

 

물론 국가라는 것이 내 삶에 강요하는 것이 징병뿐이겠냐만은

이렇게 직접적으로 다가오는 강요를 기다리는 것이 어찌 즐겁겠는가.

 

그래도 난 즐겁게 살아갈거다.

어떠한 거대한 권력집단이 아무리 나에게 즐겁지 아니한 기다림을 강요하여도

난 나름대로 즐거운 기다림들을 상상하고 만끽하며 살거다.

 

친구들과의 만남을 기다리며,

눈과 목도리와 호빵(이미 나와버렸지만), 그리고 겨울을 기다리며,

옛 연인과의 우연한 만남을 기다리며,

그리고 앞으로의 새롭고 향긋한 만남들을 기다리며,

 

살다보면,

달력넘어가는 소리도 시계바늘 소리도,

무엇보다도 즐겁지 아니한 기다림따위는

신경쓸 겨를이 없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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