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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상의 모든 음식은 어디에서 오는가 - 15개 언어를 구사하며 세계를 누빈 위대한 식량학자 바빌로프의 숭고한 이야기 |
지상의 모든 음식은 어디에서 오는가
게리 폴 나브한 저 / 강경이 역 / 아카이브, 2010
"전체주의 아래에서 어떤 다양성이 꽃 필 수 있겠는가? 공산주의든, 파시즘이든, 종교근본주의든, 자본주의든, 또는 자본주의의 부산물인 사유재산권 우선의 법칙이든, 맹목적인 신념 속에서 성장한 전체주의 체제에서는 '식량민주주의'가 발붙일 땅이 없다. 모든 시민이 건강에 좋으며, 영양이 풍부하고, 독소가 없을 뿐 아니라 문화적으로 적합한 음식을 어떤 방식으로 생산하고 먹을지 결정할 수 있는 체제가 바로 식량민주주의다." - 본문 중에서
저자 게리 폴 나브한의 할아버지는 농업이 최초로 발생했다고 알려진 티그리스-유프라테스 강 유역 '비옥한 초승달 지대'에 위치한 나라 레바논의 농부였다. 세계적으로 손꼽힐 정도로 다양한 작물들이 자라던 레바논은 터키 지배 하에서 제 1차 세계대전에 휩쓸리며 대규모 기근을 겪었다. 전쟁 탓이었다. 버티다 못해 다음 해에 심을 종자마저 놓아 버린 농부들은 고향을 떠나 이민길에 올랐다.
나브한은 21세기 초 할아버지가 떠난 땅 레바논을 방문했다. 골짜기마다 고도를 달리하며 자라고 있는 다양한 고유종 작물들을 바라보며, 한때 레바논의 작물다양성이 전쟁으로 인해 무너지지 않았더라면 자신은 여전히 고향에서 밭을 갈고 있었을까 상념에 잠긴다. 그의 레바논행은 제 1차 세계대전과 제 2차 세계대전 사이의 혼란한 시기에 작물다양성이란 새로운 개념을 제시하며 식량안보와 식량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전 세계를 탐험했던 소련의 농업학자 니콜라이 바빌로프(Nikolay Vavilov, 1887-1943)의 여정을 따른 것이었다.
바빌로프는 소련, 나아가 전 세계의 식량위기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각각의 경작지에 적용성이 뛰어난 작물다양성을 유지, 발전시켜야 한다고 생각했으며 종자 선별과 교환을 통해 환경에 가장 적합한 종을 육성해내는 농부들의 역할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100번이 넘는 원정조사를 나가 세계 구석구석을 돌았으며 재배식물들의 기원지와 작물다양성이 특히 높은 지역을 선정하여 '다양성 중심지'로 보존발전시킬 방안을 모색했다. 그가 전 세계에서 수집한 종자와 구근 등은 하나의 종자은행이 되어 수많은 작물의 육종과 보존, 개선에 기여했다.
나귀를 끌고 외부와 고립되어 지역에 특화된 작물종이 많은 험한 지형들을 돌아다니며 농부들의 종자 선별과 종자 교환 방식, 재배방법, 재배환경 등을 농부들의 입을 통해 듣고 꼼꼼하게 기록했던 바빌로프는 밭에서 자라는 작물들 뿐만 아니라 야생에서 자라는 야생근연종의 씨앗과 구근들까지 조사하고 채집하여 작물의 기원지에서 벌어지는 변화와 변이의 과정을 풀어내려 했다. 바빌로프는 작물다양성이 높은 지역을 직관적으로 알아보는 능력과 뛰어난 관찰력, 고도의 종합능력에다 꼼꼼함까지 갖춘 사람이었다. 나브한이 바빌로프의 여정을 따라 세계를 돌면서 70여 년 만에 작물재배종과 재배환경이 얼마나 바뀌었는지 과학적으로 조사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꼼꼼하고 상세한 바빌로프의 기록 덕분이었다.
그러나 세계적으로 존경받던 이 농업학자의 말로는 비참했다. 레닌의 전폭적인 지지에 힘입어 소련의 식량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세계를 누비던 바빌로프는 스탈린의 집권 이후 생산력증대를 지상과제로 삼아 과학을 비롯한 모든 영역의 자율성과 다양성을 말살한 스탈린식 전체주의와 인위적인 환경조정으로 짧은 시간 안에 생물의 변이와 진화를 이끌어낼 수 있다는 리센코주의에 밀려 설 자리를 잃어갔다. 강제적인 집단농장화를 단행한지 얼마 되지 않아 대규모의 기근이 소련이 덥쳐 수백만 명이 목숨을 잃는 사태가 발생하자 스탈린은 그 회생양으로 바빌로프를 지목했다. 전 세계 작물의 기원을 찾아 세계를 떠돌며 누구보다도 다양한 식물종을 맛보고 경험했던 바빌로프는 스탈린의 감옥에 갖혀 사실상 굶어죽었다.
사람들은 어떤 이야기를 이 책에서 끌어낼 수 있을까? 전 세계 식량작물을 연구하고 조사한 한 천재적인 학자의 삶, 레닌그라드 봉쇄 당시 굶어 죽으면서도 종자보관소를 지켰던 헌신적인 연구원들, 종자 선별과 교환을 통해 끊임없이 새로운 형질의 작물을 길러내는 농부들, 야생 밀과 보리가 자라고 야생 사과나무가 숲을 이루는 다양성 중심지의 섬세하고 치밀한 생태환경, 불과 70여년 만에 망가지는 작물다양성과 전통농법들, 기후변화와 세계화, 효율과 성과에 집착하며 단일화, 규격화를 통해 다양성을 말살하는 전체주의, 생산력 증대와 기술력 향상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것이라는 스탈린적 환상, 과학의 정치성과 과학계 내부의 정치적 갈등과 포퓰리즘...
이 책은 읽는 이의 관점에 따라 굉장히 다양하게 읽힐 수 있다. 20세기 초 100차례가 넘는 원정을 했던 바빌로프의 이야기와 그로부터 70여년 후에 바빌로프의 궤적을 따라 가며 그 사이의 변화를 조사하는 나브한의 이야기를 두 축으로 그 사이에 많은 이야기들이 다채롭게 얽혀 있다. 한 과학자의 삶을 다룬 감동 스토리로 볼 수도 있지만 식량주권과 식량민주주의, 더 나아가 생물다양성과 기후변화의 문제에 접근하는 방식에 질문을 던지는 쉽지 않은 책이기도 하다. 어떤 주제로 읽든 비교적 매끄러운 번역이 몰입도를 높여준다.
나는 이 책을 보며 모든 형태의 전체주의는 어떤 형태로든 다양성을 말살하는 게 아닌가 생각했다. 진화의 목적은 다양성 그 자체이다. 생물이든 사회든 마찬가지가 아닌가? 다양성을 말살한다는 것은 가능성을 죽이는 것과 같다. 개인의 사상과 표현을 검열하며 옥죄는 이 사회에 가능성이 있을까? 아무 힘도 없는 소수는 괜한 분열 일으키지 말고 다수에 복무하라고 요구하는 이 사회는 가능성이 있을까? 다양성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힘이 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