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BC 3세기 경 중국 서북변, 즉 감숙성, 신장, 위구르 지역에서 도망쳐온 진나라 노예들이 현대 경상인의 조상이다. 마한은 진나라 노예들을 경상도에 수용하고 진한이라고 불렀다. '찐다쌔끼'라는 말은 '진나라 새끼'라는 말로 한국인(마한)이 경상인을 멸시하며 부른 이름이다.
2. BC 1세기 경 드라비디언 계통의 타밀 흑인종이 싱가포르를 거쳐 일본 이즈모와 경상도 지역에 식민지를 세웠고, 이들이 세운 나라가 신라와 가야이다.
4. 신라 건국 때 일본 왜구가 유입되어 신라인의 조상이 되었다. 그 이후에도 왜구들이 수 없이 경상도에 유입된 기록들로 볼 때, 왜구와 경상인은 유전적으로 구분이 어려울 정도이다. 경상도는 소백산맥 첩첩산중에 둘러쌓인 일종의 섬이므로 경상도에서 서울을 가는 것보다, 배를 이용해 일본과 왕래하는 것이 더 수월하다.
결론: 경상인은 진나라 노예, 타밀 흑인종, 일본 왜구로 구성된 이민족이다.
노예, 흑인종, 왜구라는 열등 유전자를 한국인 유전자 풀에서 배제하기 위해 경상인의 몰살이 요망된다.
한국인이란 만주의 부여인을 말하고, 이들의 근거지는 영산강, 금강, 한강 유역이 전부이다. 현재 만주에는 '원래적 의미의 한국인(부여)'이 없다. 경상도, 강원도는 한국인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참고: 강원도는 에벤키족이라는 몽골 초원 지역의 미개부족이고 이들이 기원 전후에 강원도 지역에 세운 부족국가가 옥저이다. 옥저는 한국인인 고구려인들에게 예속되었다. 에벤키는 현대 강원인의 조상으로 추정된다.
경상도는 큰 도(道)인데도 군대의 정원(定員)은 겨우 2만 명이니, 그것은 천인(賤人)이 많고 양인(良人)이 적으며 또 양인 가운데 다른 역사(役事)를 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입니다.
경주(慶州) 한 고을만 살펴보아도, 수륙군(水陸軍)의 정병(正兵)과 보정(保丁)<sup>5298) </sup>을 모두 합쳐야 겨우 9천 명인데 공천(公賤-공노비)은 1만 7천 5백여 명이나 되며 사천(私賤-사노비를 의미함)은 반드시 이보다 많을 것입니다. 9천 명의 정원(定員)도 또한 실제수효는 아닙니다.
호적(戶籍)을 고칠 때에 본래의 숫자에 따라서 그 수효만을 허위로 보충해 두었을 뿐으로 절호(絶戶)된 자가 많습니다. 신이 망령되게 생각한 바로는 허위(虛僞)로 늘려놓은 수효를 없애 버리고 현재 있는 대로 호적을 만들거나 또는 백정(白丁)으로 그 정원을 채우는 것이 옳겠습니다.
나라에서 백정은 다른 종류(種類)로 여겨 군역(軍役)을 정하지 않기 때문에 도리어 수령(守令)들의 사역(使役)하는 바가 되었는데 그 고생이 10배나 되어 도둑이 되는 사람이 많으니, 지금에 있어 사역할 만한 한민(閑民)은 다만 이들뿐입니다.”
중종 21권, 9년(1514 갑술 / 명 정덕(正德) 9년) 10월 13일(임인) 3번째기사
지중추부사 안윤덕 등 14명의 무신이 변방 방비책을 서계하다
위의 기사에서 알 수 있듯이, 그리고 통계에 따르면, 전국 팔도에서 천민, 노예의 수가 가장 많은 지역은 경상도였다.
위 기사대로라면 경상도 경주의 인구 가운데 양인은 9,000명에 불과하고, 공노비는 1만 7000명이다. 양인보다 공노비가 거의 2배가 많았다. 그런데 이는 사노비가 제외된 숫자이고, 사노비의 숫자는 공노비보다 더 많다고 진술되어 있다. 저 수치만 가지고도 경주 인구 3사람 중 2명 꼴로 노예였다는 의미이고, 여기에 사노비를 합치면 그 비율이 훨씬 높아진다.
아울러 위 경주 인구와 더불어, 1,600년대 경상도 울산의 인구 가운데 40% 이상이 노예 신분이었다. 울산 인구의 거의 2명 중 한 명꼴로 노예였던 것이다.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수치이지만 엄연한 팩트이다. 위 경주와 울산의 노예 비율을 경상도 전체에 확대 적용하면 경상인 노예 인구 수치를 대강 산출할 수 있다. 결론은 경상인은 대개가 노예 신분이라는 것이다.
경상도 – 개상도 – 개쌍도 – 개쌍놈의도라는 말은 현실을 반영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래서 경상인하고는 결혼도 하지 마라. 며느리도 들이지 말라고 그러는 것이다. 잘못하면 노예 또는 노예의 후손하고 결혼을 하는 수가 있으니까. 경상도의 사투리를 듣고 있으면 정말 천박하다는 생각이 드는데, 바로 경상도 사투리가 노예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개명박 아비도 이름이 덕쇠인가 뭔가 되는데, 이러한 덕쇠, 마당쇠 등의 이름은 천민에게 붙이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리고 종미노예반란역적친일매국노 다까끼 마사오의 구미 생가를 보면 단칸 흙집인데 이는 전형적인 개천민의 주거지이다. 어떻게 저렇게 흙집에서 미개하게 살던 놈의 딸, 다까끼 근혜가 공주 행세를 하는지 참 어이가 없을 따름이다. 저런 흙집에서 양반이 산다는 말은 들어보지를 못했다. 저렇게 미천한 놈이기에 반란을 일으킨 것이겠지.
또 모르지 카더라족은 주둥이만 벌리면 거짓말을 하는 것이 종특이니까, 이 말이 퍼지는 순간 천민 주거지인 저 단칸 흙집을 어떻게 미화, 왜곡, 날조해버릴지.. 카더라족은 시인, 지식인, 학자, 교수들까지 나서서 미화, 왜곡, 날조, 은폐를 한다고 하더라..
경상인하고 결혼을 하지 말라고 그러는 이유는 또 있다. 아래의 기사를 보자..
흉노(匈奴)들이 그 어미를 증(蒸=奸)하고 아들을 보(報=奸)하는 것과 같은 것은 이보다 더 심한 것이라고 하겠다. – 삼국사기 신라본기
경상도의 흉노 스키타이 오랑캐 미개인들은 본시 중국의 서북변, 즉 지금의 감숙성, 신장, 위그르 지방에서 도망쳐 온 놈들이다. 흉노 스키타이들은 오줌을 받아서 세수를 하고, 짐승의 창자(곱창 막창)을 생으로 쳐먹고, 위 기사에서 보듯이 근친상간의 풍속이 있다. 흉노 스키타이 수컷 한 마리가 자신의 딸하고 교미를 해서 애를 낳으면 이 애는 아들인가 손자인가? 흉노 스키타이 수컷 한 마리가 제 어미와 교미를 해서 아이를 낳으면 이 아이는 동생인가 자식인가?
이래서 경상인하고는 결혼도 하지 마라, 며느리도 들이지 말라고 그러는 것이다. 한국인은 상상도 할 수 없는 해괴 망측한 근친상간이 경상인들 사이에서는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대대의 풍속인 것이다. 경상인하고 결혼했다가는 바로 콩가루 집안되고 폐가망신한다. 괜히 인생 절단 나기 싫으면 경상인하고는 결혼할 생각조차 하지 마라.
경상타밀흑인컬럼: 한국의 흑인 성씨 - 경상인의 뿌리
2015년 6월 30일 오후 9:11
인도반도에는 오래 전부터 타밀(Tamils)라고 불려진 흑인종 토착민이 있었다. 인류학자들은 그들을 인도 반도 남부의 이름을 따서 드라비디언(Dravidians)라고 불렀다. 이 인종들이 언제 어디에서 왔는지 또는 나가(Naga)족들 보다 인도에 먼저 왔는지 혹은 뒤에 왔는지 아무런 기록이 없다. 막연히 그들은 중앙 아세아의 어느 곳에서 왔다고 사학자들은 가정할 뿐이다. 그러나 저자는 이들을 파미르고원의 흑소(黑巢) 씨족으로 생각한다. 드라비다 언어는 타밀어(Tamil), 델그어(Telague), 카나라스어(Canarasse), 말라야람어(Malayalam)로 구성되어 있다(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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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남부의 드라비다 계열의 타밀 흑인종은 BC 1세기경부터 경상남도와 경상북도에 식민지를 건설하였다. 경상타밀흑인들이 경상도에 건국한 나라가 신라와 가야이다. 신라와 가야는, 우리가 아는 것과는 다르게, 경상타밀흑인이 경상도라는 식민지에 건설한 국가들의 이름이다. 경상타밀흑인들은 인도로부터 배를 타고 경상도로 곧바로 들어와서 경상도에 식민지를 건설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경상타밀흑인이 신라 및 가야를 건국하던 시기에 왜(일본)에서 건너온 것으로 사료에 기록되어 있는 호공이라는 인물이 있다. 호공이라는 인물은 항상 허리에 호리병박을 차고 다녔는데, 이는 열대 지방에 살았기 때문에 수시로 물을 섭취해야 했던 타밀 흑인종의 전형적인 습성이다. 일본 토착인들이 호리병박을 허리에 차고 다녔다는 기록은 없으므로 호공은 타밀 흑인종이라고 할 수 있다. 호공 세력은 자신보다 먼저 경상도로 들어와 신라, 가야라는 식민지 국가를 건설한 경상타밀흑인들을 이미 알고 있었던 듯하고, 추정하건대, 일본에서 건너온 경상타밀흑인과 일본 내에서 지리적으로 같거나 근접하게 위치했던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해 경상타밀흑인들은 신라와 가야 식민지를 경상도에 건설하기 전에 일본의 일부 지역들에서 정착해있던 상태였고, 그 증거는 싱가포르의 지명들과 거의 유사한 지명들을 일본 내에서 찾아볼 수 있다는 것이다. 경상타밀흑인종들은 해양 루트를 따라 동남아를 거쳐 일본에 정착한 후 경상도에 들어와 신라와 가야를 건국한 것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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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타밀 흑인의 언어와 한국어는 약 3,000개의 단어가, 일본어는 약 1,000개의 단어가 서로 같거나 거의 유사하다고 알려졌다. 이는 타밀 흑인 언어와 한국어의 분기 등 언어적 친연성을 연구하는데 매우 중요하다. 이와 다른 정보원을 인용하자면, 타밀 흑인 언어와 한국어는 문장 어순도 같고, 토씨가 있는 것도 같으며, 또 기초 어휘가 무려 1천여 개 이상이 같거나 유사하다(인용). 그리고 인터넷의 한 출처에 따르면 인도에서 타밀 흑인이 말하는 것을 들으면 마치 경상도 사투리를 듣는 듯한 착각이 든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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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학자 강길운 박사는 ‘고대사의 비교언어학적 연구(새문사)’에서 "고대 가야에서 지배층이 쓰던 말들은 거의 드라비다어(타밀어)이다"고 했다. 한국어를 타밀어 등의 드라비다 계통에 속하는 언어로 분류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한국어와 드라비다 어족과의 친연성을 주장한 사람은 헐버트(Homer Bezaleel Hulbert)이다. 그는 1905년에 <한국어와 인도 드라비다 방언의 비교문법(A Comparative Grammar Of the Korean Language and the Dravidian Dialects of India)>을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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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4년 8월 서울대 의대 서정선 교수와 한림대 의대 김종일 교수는 강원 춘천시에서 열린 한국유전체학회에서 약 2,000년 전 가야 왕실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곳에서 나온 가야 시대 유골의 DNA 테스트 결과 DNA 배열(유전정보)이 인도 남부 타밀 흑인과 유사한 것으로 확인되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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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 김씨의 시조로 알려진 금관국의 수로와 대가야의 아진사지는 형제간이고 이들의 타밀어 이름은 뇌질청예(惱窒靑裔), 뇌질주일(惱窒朱日)이다(신동국여지승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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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료(경상도지리지)에 따르면 김수로의 부인인 허황옥은 남천축국 출신이다. 아유타(阿喩陀)는 인도 남부의 타밀나두주의 아요디야 쿠빰(Ayodhya Kuppam)이며, 아요디야는 인도의 12 성스러운 도시의 하나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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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혁거세는 타밀어로 박히야거세(Pakkiyakose)’ 또는 ‘박히야거사이(Pakkiyakosai)이고, 행운의 우두머리라는 뜻이다. 박혁거세의 또 다른 이름인 불구내(弗矩內)는 타밀어 부루구나이(Purugunai)와 일치하는데, 인도의 남부 밀나두주의 한 마을 이름이다.(인용)
‘서나벌’은 당시 산스크리트어 및 고대 타밀어로 황금을 뜻하는 ‘서나(Sona)’와, 벌판(field)을 의미하는 ‘벌’ 또는 ‘펄(Pol)’이 합쳐져 황금 벌판(Gold Field)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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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로 6촌의 촌장들의 이름은 타밀 사람들의 이름과 비슷하다. 알천(閼川) 양산촌(楊山村)의 알평(閼平)은 아리야판(Aryappan)과, 돌산(突山)의 소벌도리(蘇伐都利)는 소벌두라이(Sobolthurai)와, 자산(紫山) 진지촌(珍支村)의 지백호(智伯虎)는 씨빠이코(Chippaiko)와, 무산(茂山) 대수촌(大樹村)의 구례마(俱禮馬)는 구레마(Kurema)와, 금산(金山) 가리촌(加리村)의 지타(祗陀)는 씨타(Cheetha)와, 명활산(明活山) 고야촌(高耶村)의 호진(虎珍)은 호친(Hochin)과 각각 특이하게 이름이 같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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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제3대 유리왕은 서기 32년 육촌을 육부로 개편하고 각 부에 성씨를 하사함으로써 6촌의 각 촌장들은 자동적으로 각 성의 시조가 된다. 소벌도리는 최(崔)씨의, 알평은 경주 이(李)씨의, 구례마는 손(孫)씨의, 지백호는 정(鄭)씨의, 지타는 배(裵)씨의, 호진은 설(薛)씨의 조상이 된다.(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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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탈해는 자신이 “숯과 숯돌을 사용하는 대장장이 집안”이라고 밝혔는데 석탈해의 성(姓)인 ‘석(Sok)’은 당시 타밀어로 ‘대장장이’를 뜻하는 ‘석갈린감(Sokalingam)’의 줄인 말로 성과 집안 직업이 그대로 일치한다. ‘석갈린감’ ‘석’ ‘석가(Soka)’등은 영어의 Blacksmith, Goldsmith나 Smith처럼 대장장이 집안의 이름으로 통용됐으며 지금도 타밀인의 남자이름에 남아 있다. 또 ‘탈해(Talhe)’는 타밀어로 ‘머리, 우두머리, 꼭대기’를 의미하는 ‘탈에(Tale)’나 ‘탈아이(Talai)’와 거의 일치한다. 따라서 ‘석탈해’라는 이름은 타밀어로 ‘대장장이 우두머리’를 가리켜 그가 바다 건너 한반도에 함께 들어온 대장장이의 지도자임을 이름에서 암시하고 있다.(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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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혁거세의 비 알영(閼英•BC 53 ~?)부인은 아리영이라고도 불리는 데 타밀 여성이름 아리얌(Ariyam)과 거의 일치한다. 아리얌은 아리야말라(Ariyamala)의 줄인 이름으로 기원전 타밀 왕국역사에 나오는 캇타바라얀(Kaththabarayan)왕의 부인 이름인데 이를 신라 초대 왕비 이름으로 원용한 것으로 보인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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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8년 신라 2대 남해(南解)왕의 사위가 된 석탈해는 2년 뒤 국무총리 격인 대보(大輔)라는 중책을 맡았는데 당시 타밀 나라에선 왕의 신하 가운데 측근을 뜻하는 ‘데보(Devo)’와 일치한다. ‘데보’는 남자신(God)을 뜻하는 ‘데반(Devan)’과 여자 신(Goddess)및 왕비(queen)을 뜻하는 ‘데비(Devi)’와 같은 뿌리로 ‘신의 다음 자리’(next to God)’와 ‘막강한 사람(a powerful man)이라는 2가지 뜻을 갖고 있다. 당시 왕은 신처럼 받들어졌기에 ‘신의 다음자리’와 ‘막강한 시람’이라는 2가지 뜻을 갖는 ‘데보(Devo)’가 바로 왕 다음의 권력자를 가리키는 것이다. 이를 한자어로 표기한 대보(大輔)자리에 석탈해가 신라 역사상 처음으로 오른 것은 그가 타밀 흑인 출신임을 시사한다.(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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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김씨가 경상타밀흑인이라는 주장의 근거를 아래에 인용한다:
다음의 기록을 보면, 신라의 김 씨 왕계도 타밀족의 찰라 왕국 출신이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신라 승려 지장은 불보살과의 접촉에서 지혜를 얻으려고 노력했다. 그는 그리스의 반대편에 있는 유라시아 대륙의 동쪽 끝에 살았다. 그의 열망은 지혜의 보살인 문수보살을 친견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당나라에 있는 청량산(淸凉山)으로 향했다. 그 산에는 제석천이 기술자를 데리고 와서 만들었다고 전하는 문수보살의 소상이 있었다. 지장이 소상 앞에서 기도하고 명상하니, 꿈에 문수보살의 소상이 이마를 만지며 범어로 된 게(偈)를 주었다. 다음 날 아침 이상한 중이 와서 그 게를 해석해주고 가사와 사리 등을 주고 살아졌다(삼국유사 의해편 자장성률).
신라의 자장이 중국의 청양산에서 수행하던 중 지혜의 보살인 문수보살에게서 신탁을 받았다. 그 신탁의 내용에 우리 겨레가 남방에서 항해하여 왔다는 설을 뒷받침 하는 다음의 기사가 있다.
“너의 국왕은 인도의 찰라 종족의 왕인데 이미 불기(佛記 : 약속)를 받았으므로 남다른 인연이 있으며, 동이(東夷) 공공(共工)의 족속과는 같지 않다. (汝國王是天竺刹利種族 豫受佛記 故別有人緣 不同東夷共工之族).(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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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경주 덕천리 유적 발굴 작업에서 출토된 목관 묘 11기와 청동기 항아리의 흔적이 남아 있는 무문토기, 그리고 매장된 사람의 지위가 높음을 알려주는 오리모양 토기 11개와 말과 호랑이 모양의 허리띠 고리 등을 당시 인도 타밀의 역사적 유물들과 비교, 추적해 정확하게 확인해야 할 것이다. 그럴 경우 6촌장들은 물론 박혁거세의 정체를 밝힐 수 있을 것이다.(인용) 그리고 덕천리 유적에서는 65기의 옹관묘군도 무더기로 발굴되었다. 이는 초기 신라의 형성 과정과 문화를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가 될 것으로 학계에서는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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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하자면,
경남 - 타밀 흑인종의 식민지 - 가야(금관가야, 대가야 등) ...
경북 - 타밀 흑인종의 식민지 - 신라(경주 사로국(서나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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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진술에서 보듯이, 경상타밀흑인들은 약 2,000년 전에 경상도에 신라와 가야라는 식민지를 건설하고 경상도의 토착민이 되었다. 이들이 사용한 성씨로 알려진 성씨들은 현재에도 한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성씨이다. 유전자 염기배열 연구와 비교 언어 연구를 근거로 했을 때, 경상타밀흑인 성씨라고 생각할 수 있는 성씨는 석씨, 김해 김씨, 박씨, 허씨, 그리고 사로 6성(이, 손, 정, 배, 설, 최)이 있다. 그리고 경주 김씨 역시 경상타밀흑인 성씨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아직 사료와 증거가 부족한 실정이고, 중국의 마구간 노예였던 김일제를 시조로 하는 설이 현재로서는 더욱 유력하다. 그리고 마구간 노예 김일제는 흉노 오랑캐 미개인으로 알려져 있지만, 타밀 흑인종과 마구간 노예 김일제 간의 연관성에 대한 추가적인 연구가 필요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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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서 인용된 진술들은 대개가 고고학적 유적 및 유골 연구, 비교 언어 연구에서 나온 결과들이니, 상당한 신빙성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과거에 잘 알려진 역사와 전문적인 비교 검증이 필요하고, 이를 통해 역사를 바로 세우는 것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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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울러 현재 경상타밀흑인 성씨라고 알려진 성씨뿐 아니라 이러한 경상타밀흑인 성씨에서 파생한 또는 분파한 성씨들 역시 추적해야 할 것이다. 예를 들어서 김해김씨가 분파하여 다른 본관의 김씨나, 심지어 다른 성씨로 변하는 경우이다. 그러한 사례는 매우 많을 것이다. 과거 신라가 당나라에 나라를 팔아먹은 후 한반도 남부를 점유할 때, 흉노족 미개인 또는 타밀 흑인종으로 구성된 경상인을 제외하고, 한반도의 타 지역에 살던 부여계 한민족 계열의 토착민들이 신라계 성씨를 차용한 사례들이 많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경상타밀흑인과 아무런 연관이 없으면서 사회 분위기에 편승하여 경상타밀흑인 성씨를 차용한 경상도 외의 부여 한국인 성씨들에 대한 구분도 필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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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조선 후기, 즉 지금으로부터 약 100년 전 갑오경장이 있었던 시기에 한반도에서 성씨를 가지고 있었던 사람은 당시의 인구 2,000만 중에서 약 30%에 불과했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조선 후기에 성씨를 가졌던 인구 비율 30% 역시 당시의 극도로 혼란했던 사회상황을 반영한다면 상당히 높은 비율이었다. 정상적인 사회 상태였다면 성씨를 가졌던 인구의 비율이 훨씬 더 낮았을 것이다. 다시 말해 갑오경장 이전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성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갑오경장에 의해 김씨, 박씨 등의 성을 의무적으로 사용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현재 김씨나 박씨는 김씨나 박씨가 아닐 확률이 실제로 김씨나 박씨일 확률보다 훨씬 더 높다. 조선 중기부터 작성된 사적 문서인 '족보'라는 것은 사실상 신빙성이 없다고 봐야 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항들 역시 고려해야 할 것이다.
결국 경상도는 2,000년 전부터 타밀 흑인종의 식민지였어.. 신라, 가야 모두 타밀 흑인종들이 대거 몰려와서 세운 나라들이야.. 김, 박, 석, 허, 사로 6성(설, 정, 배, 손, 이, 최)가 모두 타밀 흑인종의 성씨일 확률이 높아. 비교 언어학, 유전자 염기 서열 검사로 밝혀진 것이라서 거의 확정적이야.. 이게 왜 2000년이 지나서야 밝혀졌을까.... 현지 인도 타밀인이 말하는 것을 듣고 있으면 마치 경상도 사투리를 듣는 느낌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