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쿨미투, 추방해야 할 것은 성(性)이 아니라 ‘폭력’
청소년 성폭력 피해자들이 직면하게 되는 문제들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쥬리 
 
 

※ 서울 노원구, 광주, 경남 창원, 부산 등 전국각지의 고등학교에서 교사 성폭력을 폭로하는 학생들의 ‘스쿨미투’(#SchoolMeToo)가 잇따르고 있는 가운데, 이러한 움직임을 지지하면서 청소년 성폭력 문제를 바라보는 사회의 태도에 변화를 촉구하는 기고를 싣습니다. 필자 쥬리 님은 촛불청소년인권법제정연대 공동집행위원장입니다. [편집자 주]

 

▶ 지난 5월 3일 서울 북부교육지원청 앞에서 노원 스쿨미투를 지지하는 시민모임이 주최한 기자회견. 교사 성폭력에 항의하는 용화여고 학생들의 용기를 지지하며, 학교와 교육청의 책임을 물었다. ⓒ촛불청소년인권법제정연대

 

부모 동의 없인 성폭력 사건 수사를 못한다고?

 

내가 ‘미성년자’로 분류되었던 몇 해 전, 성폭력 피해를 신고하러 경찰서에 간 적이 있다. 건물 문을 열고 들어가 “성폭력을 신고하러 왔는데요”라고 이야기할 때 목소리를 얼마나 크게 또는 작게 내야 할지 고민이 되었다. 너무 큰 소리로 이야기하면 ‘성폭력 피해자답지 않다’고 여겨질 것 같았다. 그렇다고 너무 작게 이야기하긴 싫었다. 성폭력을 신고하러 왔다고 하자 남자 경찰이 여자 경찰을 불렀다. 여자 경찰은 나를 작은 방으로 데려가 진술을 받았다. 그날,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은 최초의 증언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최초의 증언이 있은 후, 같은 내용의 증언을 몇 번이고 되풀이해야 했다. 경찰차를 타고 해바라기센터에 가서 상담원에게, 수사 담당경찰에게, 법률 조력인에게, 또 형사들에게. 증언을 되풀이하는 게 힘들었던 건, 그 일련의 사건에서 내가 얼마나 바보 같이 굴었는지 스스로가 이해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되풀이되는 증언 행위는 당시의 행동들을 계속 후회하게 만드는 과정이었다. 하지만 정말 눈앞이 캄캄해졌던 순간은, “피해 사실을 부모에게 이야기해야 수사가 진행될 수 있다”는 상담원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였다.

 

부모에게 그 사실을 알리려고 고려해본 적도 없었다. 나는 부모와 함께 살고 있지도 않았고, 친구들에게도 하지 못한 이야길 부모에게 할 자신도 없었다. 부모에게 알려야만 수사가 진행될 수 있다면 차라리 신고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부모에게 알리고 싶지 않아 수사를 원치 않는다고 말해도, 주민등록상 등록된 부모에게 연락을 해서 내 동의 없이 알려 버릴까봐 두려왔다. 그들은 충분히 그렇게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미성년자는 부모의 동의가 있어야 신고를 할 수 있는지’ 성폭력상담소와 법률 조력인에게 문의했다. 아니라고 했다. 그래서 피해자인 내가 오히려 경찰과 해바라기센터에 “법적으로 미성년자도 단독으로 범죄 피해를 신고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어야 했다. 법률 조력인에게 부모에게 알려지지 않는 조건으로 수사와 재판이 이루어지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부모에게 알려지지 않도록 우편과 전화 등을 통한 고지를 하지 말라고 몇 번이고 신신당부를 했다.

 

경찰이 이 사실을 몰랐던 것일까? 학생 본인이 야간자율학습을 할 것인지조차 부모의 의사만을 묻고, 통장 개설부터 집 계약까지 모두 부모가 동의해야 할 수 있는 사회라서 당연히 미성년자에겐 범죄 신고를 할 권리조차 없다고 여기고 있었던 걸까? 아니면 본인의 의사에 따라 신고를 받아줬다가 나중에 부모가 항의하는 골치 아픈 상황이 전개될까봐 관행적으로 그렇게 하는 걸까?

 

왜 이런 부정의한 관행이 되풀이되는데 국가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언론은 이 문제를 보도하지 않은 것일까? 이후 주변에서 다른 청소년들의 비슷한 증언들을 들을 수 있었다. 경찰에 범죄 신고를 하러 갔는데 부모랑 같이 오라고 해서 신고를 포기했다는 증언들을.

 

‘청소년’이라서 ‘피해자’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수사 과정에서 형사들과 사건이 일어났던 장소(모텔)에 함께 찾아간 적이 있다. 사건이 일어난 구체적인 장소를 증언하기 위함이었다. 남자 형사 한 명이 의아하다는 듯 내게 물었다. “그런데 왜 속아 넘어갔어요?” 나는 대답하지 못했고, 그는 스스로 이렇게 덧붙였다. “아 맞다, 열아홉 살이었지.”

 

한편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성인이었다면 진술의 신빙성을 의심받았을 내 행동이-모텔에 따라 들어간 것- 미성년자라는 이유로 “판단력이 없어서” 그랬던 것으로 그들이 이해해줬으니까. 하지만 모욕감에 치가 떨렸다. 나를 기만하고 이용하기 위해 가해자가 했던 행위들보다 내가 미성년자인 게 사건 수사에 더 중요했다. 평소에 나는 ‘미성숙하다’고 낙인찍히며 권리를 박탈당하고 폭력으로 내몰렸는데, 그 낙인이 이 사건에선 피해자성을 증명하는 요인이 되었다.

 

가해자는 유죄 판결을 받았다. 나에게 폭력을 저질렀던 수많은 어른들 중 처음으로, 또 유일하게 처벌받은 사람이다. 때리고 모욕하고 빼앗던 어른들의 행위는 ‘교육’과 ‘훈육’, ‘사랑의 매’ 따위의 이름이 붙었지 폭력이라고 간주되지는 않았다. 나에게 성폭력을 가했던 사람의 행위가 처벌받은 건, 그 행위가 폭력이어서라기보다 ‘성’이어서 그랬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벌 근거가 된 법 이름은 ‘아동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이었다. 국가는 청소년인 나의 ‘성 보호’를 위해 가해자를 처벌했다.

 

지난 4월, 제주지방법원에서 미성년 딸에게 폭력과 성폭력을 행사한 부친에 대한 괄목할 만한 판결이 내려졌다. 수차례 폭행하고 성폭행한 부친의 행위는 ‘성폭력은 유죄’, ‘폭행은 무죄’ 판결을 받았다. 딸이 문신을 하고 흡연을 했으므로 아버지가 딸을 때리고 물건을 집어던진 행위는 폭력이 아닌 훈육으로 본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그 피해당사자의 입장에서 ‘때리는 아버지’와 ‘강간하는 아버지’는 다른 사람이었을까? 이 사회가 실제로 보호하려 하는 것은 청소년의 ‘폭력으로부터 안전할 권리’가 아닌, ‘성으로부터의 격리’라는 점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판결이라고 생각한다.

 

스쿨미투, ‘성’에 가려진 ‘폭력’의 문제들

 

지금, 교사(어른)에 의한 성폭력을 증언하는 여성 청소년들의 목소리가 곳곳에서 터져 나오고 있다. 하지만 온라인 공간에서 증언되는 만큼 실제 처벌로 연결되진 못 하고 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경찰에 진술하는 것을 피해자의 부모가 반대하고, 부모가 반대하면 경찰은 수사를 진척시키지 않으며, 수사가 개시되지 않으면 학교 측에서도 교사를 제대로 징계하지 않는 상황이 되풀이되고 있기 때문이다.

 

어른이 청소년에게 성폭력을 가하고, 부모-경찰-학교라는 어른들의 사회가 그 성폭력을 방조한다. 청소년은 성적 주체가 될 수 없다(되어선 안 된다)고 여겨지며, ‘이성교제’를 했다는 이유로 학교에서 처벌을 받는 학생들이 아직도 많다.

 

‘스쿨미투’(#SchoolMeToo)를 바라보는 언론의 태도 역시, 여성 청소년에 대한 ‘폭력’보다는 ‘성’에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있다. 어떤 언행들이 이루어졌는지 그 묘사에 지대한 관심을 쏟으면서 “어떻게 어른이 청소년에게 성적 언동을 할 수 있는지” 경악한다. 성폭력이 일어나고 은폐되는 원인인 권력 관계 자체의 폭력성은 쉽게 가려진다. 일상적으로 자행되는 체벌‧폭언‧차별에 대한 심각한 무관심과 한 쌍을 이루는 대목이다.

 

청소년(학생) 간의 성폭력도 끊임없이 발생하고 있으나, 피해자는 침묵을 강요당하고 가해자 개인만이 악마화되는 현상이 반복되고 있다. 청소년이 성폭력 가해자인 사건이 발생해 알려지면, 이러한 사건 자체가 청소년의 미성숙함이나 열등성을 입증하는 사례로 활용되는 경향이 있다. 이는 청소년 인권을 위축시키는 효과를 낳는다.

 

성폭력 사건의 책임은 가해자 본인 뿐 아니라, 성폭력을 가능하게 한 구조와 집단의 책임자들에게도 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현재의 학교폭력대책위원회 방식의 처리로는 가해자 개인의 처벌만 가능할 뿐 학교 측의 책임을 묻기는 불가능하다. 성폭력을 발생시키고 은폐하는 학교 내 성 불평등, 성소수자 차별, 교사-학생 간 위계 등은 현재의 학교 시스템에서 반성의 대상조차 되지 않고 있는 것이 문제다.

 

가부장적이고 무익한 내용의 성교육만을 제공하여 청소년을 성폭력에 더욱 취약한 상태로 내몬 교육부, 일상적 생활지도를 통해 여학생의 성적 주체성을 위축시키는 학교들, 그리고 성소수자를 혐오하는 발언을 농담인 척 지속해온 교사들과 학생들 모두 ‘스쿨미투’에 책임이 있다. 가해자와 피해자의 ‘성’이 문제시되고 폭력을 재생산하는 구조는 계속해서 은폐된다면 학내 성폭력이 줄어들기는 어려울 것이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18/08/27 23:21 2018/08/27 23:21
태그 :
트랙백 주소 : http://blog.jinbo.net/walls/trackback/73

댓글을 달아 주세요

대입제도 개편을 위한 의견수렴 과정의 일환으로, 교육부에서 학생부 기재항목 간소화 관련 ‘시민정책참여단’을 운영한다고 한다. 그런데 이 참여단에 지급되는 수고비가 나이에 따라 다르다. 성인에게는 20만 원을 현금으로 지급하는 반면, 청소년에게는 6만원 상당의 상품권을 준다. 이것은 차별일까? 이처럼 청소년을 다르게 대우하는 행위는 만연한데 대개는 차별로 여겨지지 않는다.

 

청소년은 차별받아도 되는 인간인가

 

<십대라는 이름의 외계인>이라는 제목의 책이 있다. ‘소통하지 못하는 십대와 부모를 위한 심리 치유 에세이’라는 부제를 달았고, 자녀로 인해 고민하는 부모를 위한 서적으로 소개되어 있다. 십대와 성인이 소통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십대는 외계인에 비유된다. 성인은 지구인이라는 뜻일 것이다. 모두가 동등하게 주인이라고 선언하는 민주주의 사회에서도 청소년은 그 ‘모두’에 포함되지 않는다. 세상의 주인은 어른들이고 청소년은 아직 인간이 아니다. 민주주의의 꽃이라 불리는 공직선거에 만 19세 미만 청소년은 참여할 수 없는 현실이 의미하는 바다.

 

19세기의 과학자들이 성별과 인종에 따른 열등성을 입증해내려고 애썼다면, 21세기의 과학자들은 청소년의 뇌와 호르몬을 연구한다. 그리고 청소년이 성인에 비해 열등하다는 증거를 찾아낸다. 설령 과학자들에게 별다른 의도가 없었다 하더라도 그들의 발견이 사회적으로 활용되는 방식은 청소년에게 불리하다. 청소년이 미성숙하고 따라서 권리를 제한당해도 된다는, 또는 차별받아도 된다는 근거가 되는 방식이다.

 

차이가 있다는 것이 곧 어느 한 쪽의 열등함과 다른 한 쪽의 우월함을 증명하는 것은 아니다. 청소년 전체를 동질화해서 그 안의 차이를 보지 못하는 것도 문제고, 드러난 차이를 확대해석해서 성인에게 있는 것이 청소년에게는 전혀 없다는 흑백논리로 접근하는 것도 문제다. 생물학적 차이라고 여겨지는 것들은 종종 사회적으로 구성된 차이임이 드러난다. 청소년의 신체와 행위를 ‘미성숙함’이라는 가치판단으로 읽어내는 것은 사회적 해석이다.

 

청소년에 대한 차별이 정당화되는 주요한 요인 중 하나는 그것이 시효 있는 차별이며, 그러므로 차별을 해도 평등하다는 관념이 있기 때문이다. ‘보통선거’ 원칙이 ‘일정한 나이에 이른 모든 국민에게 선거권을 부여하는 것’이란 의미인 것이 그 예이다. 장애나 성별, 인종, 성정체성 등이 ‘영구한 정체성’으로 간주되는 반면 미성년이라는 지위는 시효가 있기에 어떠한 차별이 부당하다고 여겨지더라도 그렇게까지 심각한 문제는 아닌 것으로 취급된다.

 

혹자들은 청소년이라고 받는 차별은 시간이 지나면 해소될 것이기에 문제가 아니라고 말할지 모르겠다. 나도 청소년기에 고통 받았으니, 너도 평등하게 고통 받으라고. 하지만 왜 그래야 하는가? 20살이 되면 평등한 사회보단 날 때부터 평등한 사회가 낫다. 청소년이라는 이유로 받는 차별과 자신의 다른 정체성들 때문에 받게 되는 차별이 혼합되어 끔찍한 청소년기를 보내고 급기야 목숨을 끊게 되는 청소년들이 있다.

 

2등 시민으로 취급받는 것에 왜 20년씩이나 익숙해져야 하는가? 왜 남들이 만들어놓은 틀에 스스로의 인격을 끼워 맞추는 식으로만 ‘성장’ 할 수 있는가. 흔히 차별은 특정한 소수자 집단이 겪는 문제를 지칭하는 것으로 여겨지지만, 차별의 해소는 그 집단만이 아닌 사회구성원 모두를 변화시키는 일이다. 지금과는 다르게 청소년기를 살 수 있는 사회에서는 인간의 삶 전반이 다를 것이다. 나이에 따른 차별을 줄여나가는 과정은 이 사회의 잠재능력을 발견하는 여정이다. 물론 나이에 따른 차별 뿐 아니라 여타의 차별을 해소하는 일들도 모두 마찬가지다.

 

청소년 차별을 차별이라 부르고 싶다

 

‘성숙하다’의 사전적 의미는 ‘어른스럽다’이다. ‘유치하다’에는 뜻이 두 가지 있는데, 하나는 ‘나이가 어리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수준이 낮거나 미숙하다’는 것이다. 차별이 가장 심한 상태는 차별이 차별로 여겨지지 않는 상태이다. 청소년에 대한 차별은 차별이 아닌 구분으로, 합리적 차별로 여겨지고, 동시에 청소년 스스로를 위한 것(보호)으로 정당화된다.

 

차별을 포착하는 전통적인 방식은 같은 상황에서 다른 처우를 받게 되는 요인을 발견하는 것이다. 그러나 청소년은 애초에 같은 상황에 놓일 수 없는 경우가 많다. 우리 사회에서 청소년의 공간과 성인의 공간이 극명하게 나뉘어 있기 때문이다. 청소년을 가까이서 만날 수 있는 성인은 청소년을 교육·보호하는 직업의 종사자이거나 청소년 자녀를 둔 사람들에 한정된다. 청소년을 동료나 친구로 만날 수 있는 성인은 드물다. 이는 바꿔 말하면 청소년 입장에서는 보호자-피보호자라는 수직적 관계를 통해서만 성인을 만날 기회가 있다는 뜻이다.

 

같은 일을 하는데 다른 대우를 받는 상황이라면 차별을 발견하기 더 쉬울 것이다. 그러나 청소년이 놓이는 상황은 애초에 같은 일을 할 수 없는 상황이다. 바꿔 말하자면 청소년이라는 이유로 가장 불안정한 근로형태인 아르바이트로밖에 일자리를 얻지 못하는 현실이 바로 차별이다. 청소년 노동자에게만 요구되는 ‘보호자 동의서’ 때문에 일을 하고 싶어도 하지 못하는 것, 또는 돈을 벌어야 생존할 수 있어서 불법 노동으로 밀려나게 되는 것이 차별의 결과다.

 

헌법적 권리인 사생활의 비밀과 자유, 양심의 자유, 집회·결사와 표현의 자유, 그리고 법률에 의거하지 않고 압수나 수색을 당하지 않을 권리는 청소년의 삶을 쉽게 비껴간다. 공공기관인 초·중·고등학교에서 학생의 소지품을 뒤지고 압수하는 일이나 집회 참여 및 의사표현을 처벌하는 행위, 서약서와 반성문 작성을 강요하는 행태는 너무 흔하다. 학칙으로 이러한 인권침해를 공식 허용하는 경우도 많지만, 경찰도 정부도 해결에 나서지 않는다.

 

학교만의 문제인가. 과거에는 정부가 나서서 청소년들이 계좌 개설을 하도록 유도했지만, 대포통장이 문제가 되자 가장 발 빠르게 계좌 개설이 차단되기 시작한 것도 청소년들이었다. 보호자의 동의나 동행이 없으면 통장 하나 만들기도 어렵고 알라딘 중고서점에 책을 팔지도 못하며 밤늦은 시간 몸 누일 숙소를 이용할 수도 없다. 심지어 범죄 피해를 당해 경찰에 신고하려 할 때조차 부모의 동의가 없으면 신고를 받아주려 하지 않는 관행 때문에 발길을 돌려야 하는 청소년들이 있다. 성인이 청소년에게 행한 폭력은 ‘사회상규상 허용되는 훈육’이라며 무죄 판결을 받거나 불기소 처분되는 경우도 흔하다.

 

청소년의 인권 문제는 대개 ‘인도적인 대우’ 차원으로만 제기되고, 청소년과 성인 간의 나이에 따른 차별을 해소하는 문제로는 잘 여겨지지 않는다. 청소년이 받는 차별이라고 하면 청소년 간의 차별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되는 경우가 잦은데, 그만큼 우리 사회가 청소년 인권 문제를 반차별과 평등의 관점으로 바라본 경험이 적다는 의미다. 차별을 해결하려는 관점 없이 인도적 대우만을 강조한다면 시혜적 태도가 되기 쉽고 시혜의 결과는 당사자들의 욕구를 비껴나가는 일이 잦다. 그러나 인도적인 대우를 받기 위해서라도 평등은 필요하다. 제도적·사회문화적 차별로 인해 공동의 의사결정과정에서 배제되고 역량을 발휘할 수 없게 된다면 인도적인 대우를 받을 가능성 또한 적어지기 때문이다. 존중은 너와 내가 평등할 수 있을 때 할 수 있는 행위다. 청소년을 차별함으로써 그들을 폭력으로 내몰았던 역사를 우리 사회는 이미 너무 오래 겪었다.

 

평등한 사회를 상상하는 움직임이 차별금지법 제정 운동으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차별금지법안의 자체 내용보다도 그 법안을 통해 평등한 사회를 그려나가는 흐름이 세상을 바꿀 것이다. 청소년 차별을 발견하고 언어화하고 드러내고 문제 삼는 목소리들이 차별금지법 제정 운동과 함께 탄생할 수 있길 바란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18/08/27 23:17 2018/08/27 23:17
태그 :
트랙백 주소 : http://blog.jinbo.net/walls/trackback/71

댓글을 달아 주세요

농성이 끝난 후

선거연령 하향 4월 통과를 외쳤던 43일간의 농성, 마지막 일정은 44일째였던 금요일에 끝났고 주말 내내 누워있으니 이제 몸은 좀 살 것 같다. 후회, 불안, 허무 같은 감정들이 밀려왔는데 계속 생각하다보니 답은 몰라도 질문이 어떤 건지는 감이 잡히기 시작했다.

1. 청소년 참정권 운동은 ‘선거연령 하향 조정(정치개혁) 운동’일 뿐 아니라 ‘청소년인권운동’이라고 말해왔다. 전자라면 무게가 덜해지는 것이 아니다. 다만 전자로 여겨졌을 때 현장 없이 당위만 있는 문제로 간주되어온 경향이 있기 때문에 ‘참정권은 인권’임을 더 힘주어 이야기하게 될 뿐이다. ‘18세’라는 나이 기준을 요구할 것인지 아닌지, 얼마나 강조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은 이 부분 때문이기도 하다.
18세로의 연령 하향을 요구하는 것은 그것이 가장 정의로운 선거연령 제한 기준이기 때문이 아니다. 민주주의에서 배제되어온 청소년이라는 집단의 참정권을 보장하기 시작하자고 요구하는 것이며, 고등학생이 포함되는 18세 연령이 선거권을 갖게 된다면 청소년 참정권의 큰 장벽을 하나 넘어갈 수 있으리란 기대로 요구하는 것이다. 그러나 농성 이전까지 우리가 말하는 청소년 참정권은 ‘18세 선거권’으로 자동 번역되어 받아들여졌고 논의는 ‘18세면 판단력이 있는가 없는가’ ‘18세는 납세, 국방 등 의무를 지는데 권리를 주어야 하지 않은가’에 기울었다. 촛불청소년인권법제정연대는 고민 끝에 ‘16세 선거권’ 법안을 국회에 청원했지만 논의의 지형을 바꾸기는 어려웠다.
농성이 끝난 후 스스로 평가했을 때 우리의 농성이 이끌어낸 가장 큰 성과는 이와 관련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선거연령 하향 문제가 단순히 선거연령 제도를 약간 조정하는 것 그 이상의 의미가 없다면 삭발을 하고 길바닥에서 농성을 하며 연대하기 위해 전국에서 달려올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참정권은 인권’임을 이야기했던 수많은 구호들이 일조했겠지만 결국 논의의 지형을 바꾼 건 말이 아니라 행동이었던 것 같다. 한국 최초로 선거연령 폐지를 요구하는 운동을 시작하고 싶은 욕심이 생기고, 그 날이 그렇게까지 멀지는 않다는 기대도 생긴다.

2. 농성 중 자유한국당 다음으로 가장 나를 힘들게 했던 건 ‘비청소년이면서 청소년인권운동을 하고 있는 나의 존재 이유는 무엇인가’를 되풀이해서 묻게 하는 상황들이었다. 언론이 ‘청소년 당사자’ 내지는 ‘삭발한 청소년’만 찾아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여겼다(인터뷰가 소수 몇몇에게만 너무 쏠려 이들은 기진맥진하게 되었다). 하지만 함께하는 사람들과의 상황 속에서 자문하게 될 때는 너무 괴로웠다. 나 뿐 아니라 다른 비청소년인 청소년인권활동가들은 비청소년이 되면서 스스로를 대변하는 대신 ‘청소년’이라는 이름 뒤에서 성명과 입장과 보도자료와 때론 타인(청소년)들의 발언문들을 쓰게 된다. 자유한국당 현판식에서 기습시위한 세 명 중 두 명은 만 18세가 넘은 청소년인권활동가들이었지만 언론에는 ‘청소년들’로 보도되었고 홍준표는 ‘학생인지 아닌지’ 의문스러워했다. 언론은 그렇다 치더라도 다 아는 우리 운동에서도 ‘청소년들의 기습시위’로 부르는 게 괴로웠다. 기습시위의 명칭 문제는 단지 한 사례이고 농성 내내 매일 이런 고민을 하게 하는 상황에 부딪혔다. 특정한 얼굴이나 '청소년 당사자들의 의견'이 필요할 때는 만 18세를 기준으로 당사자와 아닌 사람이 갈라지고 그렇지 않을 때는 청소년인권활동가들이 대충 ‘청소년들’로 퉁쳐지는. 다른 사람들에게는 가벼운 오해나 별 것 아닌 현상으로 여겨질지 몰라도 이 간극이 괴로워지는 건 청소년인권운동을 앞으로의 전망으로 고민하고 있는 사람으로서 자리와 역할과 미래와 내게 부여될 이름이 사회적으로도 운동적으로도 없기 때문이다. 이걸 만들어가는 일도 결국 비청소년인 청소년인권활동가들이 해야겠지만.

3. 촛불청소년인권법제정연대의 상근자(?) 같은 역할로 6개월을 좀 넘게 활동해왔다. 인권운동사랑방과 인권교육센터 들이 사용하는 사무실의 책상 하나를 얻어 신세를 졌고 우편물을 받고 여럿이 해야 하는 작업을 하는 공간으로도 사용했다. 이제 곧 이 사무실이 이사를 하면서 내가 쓸 공간도 없어질 예정이다. 청소년인권단체 몇몇이 공동으로 쓰는 사무실에서 책상 하나를 쓸 수 있지 않을까 하기도 하는데, 동료 없는 사무실에 출근을 하는 이유는 무엇이 될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이 고민을 하게 되는 건 내게 조직이 없기 때문이다. 풀뿌리 청소년운동의 모델을 만들어보자고 모였던 ‘청소년인권연대 추진단’은 목표한 바를 달성하려고 시도할 주체와 역량이 부족하고 목표 자체도 지금의 운동과 사회적 상황에서 가능하고 필요한 일인지 다시 점검해 결론을 내려야 한다. 농성 때는 그래도 매일매일 보고 상의할 동료들이 있었는데.

4. 선거연령 하향을 위한 국회 대응 활동도 계속해야 한다. 자유한국당이 마음을 고쳐먹게 하는 것과(정당 간 협상과 합의), 더민주와 바른미래 등 다른 정당들이 이 문제를 반드시 관철시켜야 할 우선순위 과제로 가져가게 하는 것(신속처리안건 지정) 중 어떤 게 더 현실적인지 모르겠다. 자유한국당만 타겟 삼는 운동이 훨씬 쉽긴 하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18/05/07 15:50 2018/05/07 15:50
태그 :
트랙백 주소 : http://blog.jinbo.net/walls/trackback/70

댓글을 달아 주세요

*탄원서 서명하기: https://goo.gl/forms/IwFyvNX2uOfy79UC2

*사건 관련 기사: http://www.hani.co.kr/arti/society/schooling/798787.html

[탄원서] 김포외고에서 일어난 교사의 학생 대상 각목 위협·대걸레 폭행 사건의 기소 처분을 촉구합니다.

  지난 3월, 김포외고의 학생 5명은 자율학습 시간에 화장실을 다녀왔다는 이유로 부러진 각목을 이용한 협박을 당했습니다. 가해교사는 학생들에게 욕설을 하고 각목으로 주변 사물함을 내리쳐 부러뜨린 후, 부러진 각목을 학생의 목에 겨누고 “찔러 죽이기 딱 좋다”며 위협했습니다. 두려움을 느낀 피해학생들은 경찰에 신고를 했는데, 다음날 이 교사는 각목 위협을 당한 학생들을 다시 불러 모아 대걸레로 폭행했습니다.

 이 사건은 처음에는 ‘인지사건’으로 고소인 없이 수사가 진행되었습니다. 검찰은 해당 교사가 부러진 각목을 들고 행한 위협이 "가해의 의사가 없“는 것이었다고 판단하면서, 대걸레를 활용한 폭행은 학생 당 "1회 씩 때린 것"이기 때문에 "지도과정"이며 "사회상규상 위배되지 않는다”고 불기소 처분을 하였습니다. 이 사건을 뉴스를 통해 알게 된 시민들은 형법, 아동복지법, 초중등교육법이 모두 위법행위로 규정하고 있는 범죄가 왜 불기소 처분이 되며 이것이 어떻게 ‘사회상규’라 할 수 있는지 분노와 부끄러움을 느꼈습니다. 체벌 금지가 제도화된 지 5년이 지났습니다. 폭력을 지도과정이라 미화하고, 피해자가 느낀 두려움과 고통보다 가해자의 입장에 이입한 종래의 판단이 개탄스럽습니다. 단지 피해자가 학생이고 가해자가 교사라는 이유로 불기소 처분한 것이라면, 21세기의 대한민국 검찰은 청소년 국민의 생명과 인권은 경시해도 된다고 여긴다는 뜻일 것입니다.

 위협·폭행 사건이 있은 후, 김포외고 측에서는 해당 교사와 피해학생들을 분리하는 조치 등 필요한 초기 조치를 취하지 않았습니다. 때문에 피해학생들은 한 달여 동안 그 교사를 마주하면서 학교를 다녀야 했습니다. 해당 교사는 학생들과 접촉하며 “그 새끼들은 선생님을 엿먹이려고 신고한 새끼들이다. 우리 학교 질을 다 떨어뜨리고 있다. 이거 니들이 알고 앞장서서 걔네들 찾아내서 다 조져라” 등으로 피해학생들을 비방하고 추가적인 폭력을 조장하는 발언을 서슴지 않고 행했습니다. 이로 인해 다른 학생들과 학부모들도 나서서 피해학생들을 비난하고 따돌리는 결과가 나타나 피해학생들 일부는 욕설이 담긴 익명의 쪽지들을 받기도 하고 온갖 허위 소문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피해학생들은 본래의 사건 이후에도 정신적 학대 상황에 놓여 방치되었습니다. 사건이 신고된 뒤 해당 교사가 보인 행동에서 반성의 기미는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피해학생들 중 일부의 부모님이 다시 고소를 진행하여, 다행히 대한민국 검찰은 ‘아동학대 옹호하는 검찰’이라는 오명을 씻고 새로 판단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습니다. 이 사건을 담당하고 계신 인천지검 부천지청 담당 검사님께서는 지금도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고 있는 피해학생들과 그 부모님들의 마음, 그리고 아동학대에 대한 엄중한 대처와 정의로운 검찰을 염원하는 시민들의 바람에 부디 기소 처분으로 응답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수신 부천지청 황성연 검사실

*본 탄원서는 8월 중 취합하여 기자회견과 함께 해당 검찰청에 제출할 예정입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17/08/14 10:28 2017/08/14 10:28
태그 :
트랙백 주소 : http://blog.jinbo.net/walls/trackback/69

댓글을 달아 주세요

기사 원문: http://www.ildaro.com/sub_read.html?uid=7682&section=sc1&section2=일반

 

권력에 맞서는 힘은 ‘진실을 기억하는 것’

올해의 인권 뉴스들을 꼽아보자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쥬리
배너
 

※ 인권10대뉴스 선정을 위한 온라인캠페인 참여를 독려하며, 십대섹슈얼리티인권모임과 학생인권상담소 ‘넘어’에서 활동하고 있는 쥬리 님의 기고를 싣습니다. -편집자 주


 

▶ 인권10대뉴스 선정을 위한 카드뉴스  ⓒ http://bit.ly/2fTarVd


박근혜와 최순실, 그리고 그 측근들의 비리와 기행들이 연일 톱뉴스로 떠오르고 있다. 하지만 박근혜 대통령이 퇴진해야 하는 이유는 보톡스와 프로포폴, 비아그라와 “섹스 테이프” 때문이 아니다. 국가 기밀을 유출하고, 최순실과 그 측근들에게 특혜를 주는 비리를 저질렀기 때문만도 아니다.

 

나는 박근혜 정권이 우리의 목숨과 삶, 미래와 존엄성을 희생시켜 대기업과 기득권의 이익에 봉사했기 때문에 퇴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대통령이 보톡스를 맞았는지 아닌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사람을 구조할 수 있었던 참사의 시간동안 대통령이 무엇을 ‘하지 않았’는지, 국민의 인권 보장에 대한 어떤 책임을 방기했는지를 추궁해야 한다.

 

국정원 정치공작, 테러방지법, 故백남기 죽음…

 

벌써 12월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시간이 빨리 흐르지만, 우리의 기억 소멸은 그보다 더 빠른 것 같다. 故 백남기 농민이 공권력의 물대포에 의해 죽음을 맞이한 것이, 강남역 부근의 공중화장실에서 어느 여성이 ‘여자라는 이유로’ 살해된 것이, 구의역에서 스크린도어를 수리하던 용역업체 청년노동자가 사망한 것이, 어버이연합의 정치공작을 국정원이 사주하였음이 드러난 것이, 그리고 국회와 거리에서 필리버스터가 이어졌음에도 테러방지법이 통과된 것이 모두 올해 일어난 일이라면 믿어지시는지.

 

올해 일어난 일들을 기억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먼 과거부터 해결되지 않고 계속되어 온 문제, 그 문제들을 해결하려는 당사자들의 현재 목소리를 기억하는 것도 중요하다. 1970-1980년대 노숙인, 장애인 등을 감금 수용하여 현재까지 밝혀진 사망자만 500명이 훨씬 넘는 ‘형제복지원 사건’은 아직도 제대로 진상규명되지 않았다. 진실을 규명하기 위한 특별법이 올해 20대 국회에서 재발의되었다.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지 벌써 2년 반이 지났고, 용산 참사는 7여 년이 지났는데 둘 다 제대로 된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성소수자 등 사회적 소수자들이 차별금지법을 제정하라고 10년이 가까운 세월동안 요구해왔지만, 아직도 제정되지 않았다. 장애운동단체 등에서는 부양의무제와 장애등급제를 폐지하기 위해 1500여일이 넘도록 농성하고 있다.

 

오랫동안 여성들이 낙태죄를 폐지하라고, 성판매여성에 대한 처벌 조항을 폐지하라고 요구해왔지만 악법들은 건재하다. 20년이 넘도록 청소년들은 ‘청소년의 참정권을 보장하라’고 요구해왔지만 현실은 변하지 않고 있다.

 

▶ 인권10대뉴스 선정을 위한 카드뉴스  ⓒ http://bit.ly/2fTarVd

 

기억되어야 할 것들이 기억되지 않는 사회

 

우리 사회에선 기억되어야 할 것들이 기억되지 않고, 드러나야 할 것들이 드러나지 않는다. 무언가 기억되고 드러나려면 공론장의 주요한 의제로 자주 등장해야 하는데, 오늘날의 주요 공론장인 언론과 포털사이트와 소셜서비스는 기업과 힘 있는 자들이 장악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한 사회가 무엇을 기억해야 하고 무엇을 기억하지 않아도 된다고 판단하는지, 국가권력은 무엇을 기억하는 국민을 길러내고자 하는지를 알아보는 가장 간편한 방법은 바로 역사교과서를 살피는 것이다. 지금 교육부는 정부가 내놓은, 친일과 독재를 미화하는 국정화된 역사교과서야말로 올바른 역사교과서라고 역설하고 있다.

 

진실을 기억하는 사람들, 드러나지 않는 소수자의 목소리를 귀담아 듣고 연대하는 사람들. 이 사람들이야말로 권력이 가장 무서워하는 종류의 사람들일 것이다.

 

인권운동 진영에서는 1993년부터 한 해의 끝 무렵에 그 해 기억해야 할 인권뉴스들을 선정하여 발표해왔다. 투표결과 10대뉴스 안에 들었다고 해서 더 중요한 인권 문제이고, 못 들었다고 해서 덜 중요한 인권 문제이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 수많은 올해의 인권 문제들을 하나하나 상기해보고, 잘 모르거나 처음 들은 이슈라면 인터넷 검색을 통해 정보를 찾아보고, 언론이나 포털사이트에는 잘 등장하지 않았지만 우리 사회가 꼭 기억해야 할 중요한 문제는 무엇일지 생각해본다면, 우리는 끝내 ‘기억하는 사람’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올해를 정리하며, 누군가는 자신의 1년을 정리하는 일기를 쓸 것이고, 누군가는 한 해의 마지막 날 석양을 보러 갈 것이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또 다른 좋은 방법으로 인권10대뉴스 투표에 참여해보기를 권한다.

 

▶ 인권10대뉴스, 숨겨진 인권뉴스 투표와 결과 발표 일정.  ⓒ http://bit.ly/2fTarVd

 

※ 2016 인권10대뉴스와 ‘숨겨진 인권뉴스’ 투표는 12월 1일(목)~11일(일)까지 진행됩니다. 투표 참여하. http://bit.ly/2fTarVd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17/08/14 10:17 2017/08/14 10:17
태그 :
트랙백 주소 : http://blog.jinbo.net/walls/trackback/68

댓글을 달아 주세요

 기사 원문: http://www.ildaro.com/sub_read.html?uid=7927&section=sc7&section2=책/문학

 

성(性) ‘가장 일상적인 수탈’을 증언한 여성들

<아주 작은 차이 그 엄청난 결과> 릴레이 서평②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쥬리
배너
 

※ 알리스 슈바르처의 저서 <아주 작은 차이 그 엄청난 결과> 출간 기념으로, 여성의 섹슈얼리티에 관한 릴레이 서평을 연재합니다. 두 번째 필자 쥬리님은 십대섹슈얼리티인권모임 활동가입니다. -편집자 주

 

성적 자유를 누린 경험이 별로 없는 성교육 강사단

 

청소년 성평등 교육이나 성교육을 하게 될 강사단을 대상으로, ‘청소년의 성’을 주제로 한 강의를 진행할 때가 있다. 참여자는 주로 40-50대의 여성이고 자녀가 있는 어머니의 입장인 경우가 많다. 이러한 강의의 경우 보통 진행에 앞서 참여자들에게 빈칸을 채워보도록 요청하는 문장들을 제시한다. 2분여의 시간 동안 참여자들은 돌아가면서 아래 문장에 자신이 채운 빈칸을 이야기하는 시간을 가진다.

 

“지금 나는 성적으로 ___한 사람이다.”
“청소년기 나는 성에 관해 ___한 생각을 했고 ___를 했었다.”

 

처음 이 문장들을 제시하기 시작한 이유는, 청소년(혹은 자신의 자녀)을 대상으로 성교육을 하려는 분들 스스로가 자신의 성적 경험을 해석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결과는 생각보다 다양하지 않았다. 지금의 자신에 대해서는 ‘성적으로 자유롭고 싶은’, ‘개방적으로 생각하려 노력하는’, 또는 ‘한물간’ 사람이라고 평가하는 경우가 많았다. 청소년기 자신에 대해서는 성에 대해 ‘나쁜 것이라고 생각’, ‘무관심’, ‘애써 생각하지 않으려’ 했으며 ‘몰래 로맨스 소설을 읽’거나 ‘혼자 상상’하거나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등의 응답이 다수였다.

 

이 문장 채우기 프로그램을 몇 회 정도 진행하고 난 뒤, 나는 잠정적인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청소년기 자녀를 둔 40-50대 여성들 다수는 청소년기에, 어쩌면 지금까지도 성적 자유를 누린 경험이 별로 없다는 것. 청소년의 성적 권리를 인정하고 존중해야 하는 위치인데 스스로의 성적 권리조차 인정받거나 존중받은 경험이 부족한 상황이었다.

 

▶ 알리스 슈바르처 <아주 작은 차이 그 엄청난 결과> (전 유럽을 뒤흔든 여자들의 섹스 이야기)

 

엄마가 딸의 섹슈얼리티를 적극 통제하는 이유

 

“그이가 너무 원했거든요. 하지만 가장 중요한 이유는, 두려웠어요. ‘절대로 안 된다면 할 수 없지. 우리 사이는 이 정도밖에 안 되나 보군.’ 그가 행여 이런 말을 하면서 나를 떠날지 모른다는 생각에 겁이 났어요.” 그녀의 첫 경험은 고통과 수치심 그리고 두려움이 범벅이 된 그런 것이었다. - <아주 작은 차이 그 엄청난 결과> 중 ‘힐데가르트’의 인터뷰

 

만약 어머니의 성적 경험이 즐거운 것이었다면, 고통보다는 쾌락에 가깝고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것이었다면 어머니는 딸의 섹슈얼리티를 가장 적극적으로 통제하는 역할을 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섹슈얼리티의 통제가 ‘너를 위한 것’이라는 어머니의 변명은 사실 어머니 자신의 성적 경험이 그토록 고통스러웠다고 에둘러 말하는 것은 아닐까?

 

나의 어머니는 청소년기 나의 섹슈얼리티를 가장 가시적으로 억압하는 사람이었다. 미니스커트나 굽 높은 구두 같은 것들은 그녀가 허락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런 것을 입으면 남자들의 눈요깃감으로 전락한다”, “세상(남자들)이 얼마나 무서운데…”라며, 그녀는 허락할 수 없는 이유를 밝혔다.

 

연애와 섹스는 당연히 용인되지 않았다. 용인되지 않는 것에 대해 용인해달라고 말을 꺼내봤자 좋을 게 없는 상황이었다. 나는 미니스커트와 구두를 몰래 챙겨나가 밖에서 갈아입고 일을 본 뒤 다시 원래 옷으로 갈아입은 후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연애와 섹스는 밖에서, 남몰래 했다.

 

지금에 이르러 내가 엄마와 나 사이에 있었던 상흔들을 수용할 수 있는 까닭은, 엄마도 스스로가 가진 경험의 한계 속에서만 반응할 수 있는 인간이라고 전제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엄마는 스물여섯에 결혼을 했고 이듬해 나를 출산했다. 딸이 남편감으로 데려온 남자가 마뜩찮아 결혼을 반대하던 외조부모를 설득하느라 고생했다는 이야기는 여러 번 들었다. 하지만 아빠가 엄마의 인생에서 유일한 연애 상대였다는 이야기는 최근에야 처음 들었다. 나에겐 충격적인 이야기였다. 첫 연애상대와 어떻게 결혼할 결심까지 했을까, 왜 그랬을까.

 

엄마는 자기를 좋아해서 졸졸 따라다녔던 여자친구도, 나중에 생각해보니 연애를 할 수도 있었을 법한 남자도 있었다고 말했지만(이 여자친구와 남자의 존재에 대해 엄마는 돌리고 돌려서 이야기를 했기 때문에, 내가 엄마가 한 말을 조합해 해석한 것이다), 어쨌거나 연애 상대는 아빠가 유일했다. 물론 연애 경험의 횟수는 성적 경험의 질과 무관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시대 보수적이고 엄격한 개신교 집안에서 성장한 그녀가 성적 권리를 인정받고 존중받았으리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결혼과 섹스, ‘정상적인 폭력’을 증언하다

 

<아주 작은 차이 그 엄청난 결과>는 40여 년 전 독일에서 발간되어 전 세계적인 호응과 논란을 이끌어낸 인터뷰집이다. 이 책에서 여자들은 섹스 경험을 이야기한다. 그녀들은 페니스는 ‘성교의 기본’인데 나만 그게 안 되는 게 괴로웠다고, 어떤 성구매자도 자신을 남편이나 남자친구만큼 악랄하게 괴롭히지는 않았다고, 혹은 발기불능인 남자를 만나 차라리 속이 편했다고 증언한다.

 

“남편은 매일 밤 그걸 원해요. 자기는 그래야만 한대요. 내가 원치 않을 때 남편이 요구해오면 가능한 빠르고 편하게 일을 끝낼 수 있도록 자세를 취하지요. 그래서 아주 편리한 자세를 찾아냈어요. 절반쯤 등을 구부려 남편 쪽에 대주는 자세를 하면, 남편 쪽을 보지 않고도 일을 치르게 해줄 수 있어요. 그러는 게 남편 쪽에서도 너무 좋대요. 그렇게 해주면 남편도 이제는 내가 정상이래요.” - <아주 작은 차이 그 엄청난 결과> 중 ‘도르테아’의 인터뷰

 

이 대목을 읽는 순간, 나는 마음 속 어딘가에 있던 실 하나가 툭 끊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거친 소음을 동반하고 피가 낭자하거나 가시적인 흔적을 남기는 종류의, 그래서 일상에서 툭 튀어나와 예외적인 것처럼 보이는 폭력이었다면 오히려 덜 잔혹하다 느꼈을까. 나의 어머니는 1980년대에 십대 시절을 보냈다. 여자들에게 한국의 상황은 다르지 않거나 혹은 더 나빴을 것이다. 어쩌면 지금도 그렇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정상적이고 정례화된 폭력, 가장 일상적인 수탈을 증언한 이 책은 읽기 편한 책은 결코 아니지만, 그래서 더 읽혀야 하는 책이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17/08/14 10:15 2017/08/14 10:15
태그 :
트랙백 주소 : http://blog.jinbo.net/walls/trackback/67

댓글을 달아 주세요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134649

 

[4.13 총선 인권올리고 가이드 ③] 참정권을 박탈당한 사람들, 청소년

 

중학생인 A 씨는 정치에 관심이 많습니다. 최근에는 청소년 당원을 인정하는 몇 안 되는 정당 중 하나에 당원으로 가입해 정당 활동도 하고 있습니다. 대의민주주의 정치체계의 한계를 느끼지만 그래도 제도 정치를 통해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A 씨는 선거권이 없습니다. 국민의 당연한 권리라고 헌법에도 나와 있는 참정권은 A 씨가 만 19세 이상이 아니라는 이유로 부정당합니다. A 씨를 비롯한 청소년들은 참정권을 가지기에 '미성숙하다'는 것이 그 이유입니다.

하지만 A 씨는 알고 있습니다, 참정권을 비롯한 인간의 기본적인 권리는 '성숙함'이라는 '자격'이 있어야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라면 누구든지 공평하게 누려야 하는 종류의 권리라는 것을요. 게다가 그 '성숙함'이라는 것의 기준은 얼마나 모호한지요. 화가 나면 학생들을 때리는 교사, 사회적 약자를 비하하는 말을 공개적으로 하는 정치인, 자식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자식을 존중하지 않고 불행하게 만드는 부모 등 이른바 '미성숙한' 어른들을 A 씨는 너무 많이 보아 왔습니다. A 씨가 주장하는 바는 '성숙'과 '미성숙'이라는 모호한 기준으로 사람을 구별하고, 기본적인 권리에서 차별을 두는 행태가 없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A 씨가 청소년의 참정권을 요구하는 활동을 시작한 이유입니다. 

청소년의 참정권을 요구하는 활동을 하면서, A 씨가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청소년이 투표를 하게 되면 공부를 해야 할 학교에서 정치 문제를 둘러싸고 갈등이 일어나지 않겠느냐. 교실이 정치화될까 우려된다." A 씨는 정치란 우리 공동체의 일을 함께 고민하는 과정이고, 민주주의를 위해서는 국민이 정치에 관심을 가지고 서로 논쟁하며 설득하는 일이 많이 일어날수록 좋은 것이라고 반박합니다. 지금은 청소년이 정치적으로 무력화되어 있기 때문에 선거철이 되어도 교실은 잠잠하지만, 청소년의 참정권이 보장된다면 청소년들도 자신의 이익과 공공의 이익을 고려하여 가치 판단을 내리고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과 논쟁하고 정치 문제를 놓고 소통할 것입니다. 국민이 정치에 무관심해지도록 만드는 정치는 나쁜 정치입니다. 청소년 국민이 정치에 무관심해지도록, 무력해지도록 만드는 정치 또한 나쁜 정치이지요. 

선거철 정당과 후보자가 내놓는 공약이나 정책을 보면, 진정으로 청소년을 '위하는' 공약이나 정책은 거의 없습니다. 청소년 관련 내용이 아예 없거나, 있더라도 '교육' 분야의 일부로 사교육비를 줄여주겠다거나 동네 학교 시설을 보수해주겠다거나 하는, (사실 청소년 자녀를 둔 학부모의 표심을 의식하는) 피상적이고 시혜적인 내용이 많지요. 청소년을 권리의 주체로 상정하고 이 사회에서 청소년의 권리를 어떻게 확대해나가겠다, 청소년의 삶의 질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높이겠다는 공약이나 정책은 눈을 씻고 봐도 찾기가 어렵습니다. 당연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정당과 정치인들이 국민의 요구와 삶에 신경을 쓰도록 선거라는 장치가 있는 법인데, 청소년은 선거에 참여할 수가 없으니까요. 

A 씨는 한국의 높은 청소년 자살률, 법적으로 금지되어도 근절되지 않는 체벌과 열악한 학생 인권 실태, 아동학대와 가정폭력 문제의 원인에는 청소년을 정치의 장에서 배제하는 행태가 큰 몫을 차지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A 씨는 정말로 궁금합니다. "여성 참정권은 20세기부터 보장되기 시작했는데, 청소년의 참정권은 과연 21세기에 보장될 수 있을까요?"

 

 

ⓒ청소년운동 총선대응 네트워크


위 글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둔 상황에서 선거에서 누군가를 배제하는 제도와 문화의 문제를 인식하자는 취지로 '4.13 총선 인권올리고 가이드'에 실은 글 일부이다. 선거를 비롯한 제도 정치의 장에서 청소년은 '제도적으로' 배제된다. 제도적으로는 유권자이지만 선거에 참여하는 데 필요한 사회 문화적 지원이 거의 부재하여 실질적으로 배제되는 사람들도 있다. 장애인, 비정규직·임시직·아르바이트 노동자, 홈리스 등이다. 한국은 법적으로 '국민'이라면, 그리고 만 19세 이상이라면 누구에게나 선거 참여, 정당 가입, 선거 운동 등 참정권을 행사할 권리를 보장하고 있다(피선거권은 연령 기준이 더 높다). 우리나라는 민주주의 국가라며 자랑스럽게 이야기할 때 근거로 등장하는 보통선거의 원칙이 위 내용이다. 그 민주주의는 청소년은 원천적으로 제도 정치의 장에서 배제하며 유지되고 있는 불완전한 민주주의다.

청소년은 제도 정치의 장에서 배제되어 왔지만, 모든 정치의 장에서 등장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거슬러 올라가면 19세의 나이로 사망한 유관순 열사를 비롯하여 독립운동의 장에 청소년 주체들이 있었다. 이후 민주화운동의 장에도 중고등학생 운동은 역할을 했으며, 1991년 고등학생운동가 김철수 열사는 노태우 정권 퇴진과 참교육 실현을 외치며 분신하였다. 2008년 촛불집회, 세월호 집회, 역사교과서 국정화 반대 시위 등 여느 굵직한 집회시위의 장에도 청소년들이 함께하지 않았던 적이 없다. 

그들은 종종 '같은 편'인 비청소년들에 의해 '기특한 청소년'으로 취급되고 '교복 입은 청소년들마저 나왔다'며 선전의 도구로 활용되었다. 반대파들에 의해서는 '전교조에 의해 선동된 청소년' 취급을 받았고 '저들이 청소년들마저 이용한다'는 선전의 도구로 활용되었다. 청소년 주체들이 한국의 독립과 민주화, 이후 사회운동에서 한 역할은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청소년이 해온 정치적 참여와 기여들은 몽땅 잊어버리고 “청소년은 정치적 주체여선 안 된다”며 선거권조차 보장하지 않는 것이 한국의 현주소다.

청소년이 박탈당한 참정권의 내용은 크게 네 가지로 볼 수 있다. △선거권, △피선거권, △정당 가입권, △선거 운동권이다. 정당 가입에 대한 권리의 경우, 정당 가입을 할 수 있는 사람을 유권자로 한정한 법 때문에 생기는 문제인데 당원의 신상 정보를 국가에 공개하고 당원 자격의 승인을 얻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청소년 당원 지위를 인정할 것인가의 문제는 실질적으로는 각 정당의 결의이자 결정인 측면도 있다. 현재는 녹색당과 노동당만이 청소년 당원의 지위를 인정하고 있으며, 정의당 등에서는 청소년 당원 지위 인정 여부를 두고 논쟁이 일어나고 있다. 

선거 운동을 할 권리에 관련한 대표적인 사례는 2012년 대선 때 한 청소년이 트위터에 이정희 후보 지지 글을 게시했다가 선관위 경고를 받은 사례이다. 선관위 경고의 근거는 '미성년자는 선거 운동을 할 권리가 없다'는 것이었다. 선거 운동이라고 하면 정당에 소속되어 길거리 유세라도 해야 선거 운동일 것 같지만, 트위터에 글을 올리는 것을 비롯하여 특정 정당이나 후보에 대한 지지나 반대를 표하는 모든 행위들이 선거 운동으로 해석될 수 있다. 정말로 청소년은 '말'도 못하게 하는 것이다. 

이번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서는 청소년 선거 운동 금지에 대한 '불복종 행동'을 하려고 한다. 행동의 내용은 간단하다. 온라인과 거리에서 청소년이 특정 정당이나 후보에 대한 의견을 표현하면 그것이 곧 불복종이다. 4월 초에 불복종 행동을 하는 청소년들이 모여 불복종하는 우리의 모습을 드러내고 청소년 참정권을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할 예정이다. SNS에서 해시태그'#청소년선거 운동금지에대한불복종행동', '#청소년_선거법불복종'을 주시해 주시라.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17/08/05 18:24 2017/08/05 18:24
태그 :
트랙백 주소 : http://blog.jinbo.net/walls/trackback/66

댓글을 달아 주세요

[청소년 성적 권리 선언]

 

*2013년 십대섹슈얼리티인권모임 발표

 

제 1장. 모든 청소년은 자신의 몸을 긍정적으로 경험할 권리가 있다.

 

제 1조. 청소년은 2차 성징에 따른 몸의 변화를 수치심 없이 경험할 권리가 있다.

(1) 청소년은 초경과 월경을 수치심 없이 경험할 권리가 있다. 청소년은 월경에 필요한 생리대 등의 물품을 저렴하고 쉽게 구할 권리가 있다.

(2) 청소년은 몸과 목소리, 심리상태의 변화를 존중받고, 2차 성징이 진행됨에 따라 필요한 정보를 공교육과 지역사회로부터 충분히 제공받을 권리가 있다.

(3) 청소년은 본인이 원하는 방식으로 2차 성징을 경험할 수 있도록 필요한 의료적 지원을 제공받을 권리가 있다.

 

제 2조. 청소년은 자신의 몸에 대해 자긍심을 가질 권리가 있다.

(1) 청소년은 무게, 모양, 크기, 색깔에 상관없이 자신의 몸에 대해 자긍심을 가질 권리가 있다.

(2) 청소년은 건강상태나 체력에 상관없이 자신의 몸에 자긍심을 가질 권리를 가지며, 몸 상태에 따른 배려와 지원을 받을 권리가 있다.

(3) 청소년이 자신의 몸에 대해 자긍심을 가질 수 있도록 교육당국은 충분한 자긍심 교육을 제공하여야 하고, 언론에서는 획일화된 미적 기준과 정상 기준을 퍼뜨리는 행위를 중단하여야 하며, 학교와 지역사회에서는 청소년이 몸에 따른 차별을 받지 않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4) 섭식장애 등 사회가 강요하는 기준에 자신의 몸이 맞지 않아 고통을 겪는 청소년은 적절한 의료 지원과 사회적 지지를 받을 권리가 있다.

(5) 자신의 몸을 특정한 성별에 맞게 바꾸기를 원하는 청소년은 당장 필요한 의료 지원 뿐 아니라 생애 주기에 맞춘 트랜지션을 설계하도록 지원받을 권리가 있으며, 이 전 과정에서 사회적 지지를 받을 권리가 있다.

(6) 청소년은 자신의 몸 크기에 적당한 시설을 이용할 권리가 있다. 정부와 교육당국은 정상적인 성인이라고 간주되는 몸에 맞춘 시설 뿐 아니라 다양한 몸 크기를 가진 청소년이 편하게 이용할 수 있는 시설을 확충하여야 한다.

 

제 3조. 청소년은 본인이 원하는 방식으로 몸을 표현할 권리가 있다.

(1) 청소년은 본인이 원하는 의상을 입고 모발을 가꿀 권리가 있다. 피어싱이나 타투 등 반영구적인 몸의 표현에 대해서도 자신의 선택을 존중받을 권리를 가지며, 청소년이 자신의 몸을 표현하는 과정에서 학교나 가정, 사회의 부당한 개입은 있어서는 안 된다.

(2) 청소년은 본인이 원하는 성별을 드러낼 권리를 가지며, 본인의 의사에 따라 비폭력적인 방식으로 자신의 몸을 성적으로 표현할 수 있다.

 

제 4조. 청소년은 본인이 원하는 방식으로 몸을 활용할 권리가 있다.

(1) 청소년은 비폭력적인 방식으로 본인의 의사에 따라 자신의 몸을 활용하여 성적 만족을 얻을 권리가 있다.

(2) 청소년은 본인이 원하지 않는 몸의 활용을 거부할 권리가 있으며며, 청소년의 몸은 타인에 의해 성적으로 착취당해서는 안 된다. 정부와 교육당국은 청소년 성폭력 피해자를 지원하고 생존자를 지지하기 위해 노력해야 할 의무를 진다.

(3) 청소년은 타인으로부터 몸을 침범당하지 않을 권리가 있다. 모든 종류의 체벌은 폭력이며, 교사-학생, 부모-자식, 고용주-노동자 관계 등 청소년이 약자로써 경험할 수 있는 관계에서 벌어지는 권력을 이용한 폭력에 정부와 교육당국은 더욱 단호히 대처하여야 한다.

 

제 5조. 청소년은 본인이 원하는 방식으로 임신과 출산을 경험할 권리가 있다.

(1) 청소년은 임신을 선택하기 위해 필요한 교육과 정보에 접근할 권리가 있으며, 교육 당국은 청소년에게 이러한 접근권을 보장하여야 한다. 또한 청소년은 피임을 위해 필요한 물품을 쉽게 구하도록 지원받을 권리가 있다.

(2) 교육 당국은 청소년이 실제 성생활에서 본인의 의사에 따른 피임을 하기 어려울 수 있다는 것을 배려하고, 청소년이 파트너와 피임에 대한 협상을 하는 데 필요한 실질적인 정보를 제공하여야 한다.

(3) 청소년은 본인의 의사에 따라 임신, 출산, 피임, 낙태를 결정할 권리가 있다. 청소년이 이러한 결정권을 행사하는 과정에서 외부의 개입이 없어야 하며, 청소년은 자신의 결정을 존중받고 차별당하지 않을 권리가 있다.

(4) 청소년은 임신, 출산, 피임, 낙태 과정에서 안전한 의료 지원을 받을 권리가 있으며, 의료 조치를 선택하는 과정에서 원하지 않는 학교나 가정의 개입 없이 본인의 결정만으로도 의료 지원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 정부와 의료 당국은 청소년이 안전한 의료서비스를 저렴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5) 청소년은 임신과 출산, 양육 과정에서 필요한 지원을 받을 권리가 있다. 정부와 교육 당국은 출산 및 양육을 하는 청소년이 본인의 의사에 따라 학업 및 노동을 계속하거나 스스로 원하는 인생을 살 수 있도록 필요한 지원을 하여야 한다.

 

제 6조. 청소년은 본인의 의사에 따라 최적의 건강을 유지할 권리가 있다.

(1) 모든 청소년은 건강할 권리가 있으며, 질병을 예방하고 치료하기 위한 정보에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

(2) 모든 청소년은 성 건강을 유지할 권리가 있다. 정부와 사회는 청소년이 수치심 없이 산부인과와 비뇨기과 등 성 건강 병원을 이용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며, 모든 청소년이 접근할 수 있도록 저렴하고 안전한 의료서비스를 제공하여야 한다. 또한 청소년이 제공받는 의료조치가 원하지 않는 학교나 가정의 개입 없이 본인의 선택만으로 행해질 수 있어야 한다.

(3) 교육 당국은 학교의 보건실 등을 통해 청소년이 쉽게 건강과 성 건강에 대한 정보를 얻고 필요한 일차적 서비스를 제공받도록 보장하여야 한다.

 

제 2장. 모든 청소년은 본인이 원하는 관계를 맺을 권리가 있다.

 

제 1조. 청소년은 본인이 원하는 사람과 관계를 맺을 권리가 있다.

(1) 청소년은 상호간에 협상하고 본인의 의사에 따라, 본인이나 상대방의 나이, 인종, 성별, 사회적 위치 등과 상관없이 관계를 맺을 권리가 있으며, 성적 관계인 경우에도 동일하다.

(2) 정부와 사회는 특정한 관계를 차별하는 풍조에 대항하여야 하고, 특정한 관계가 권력화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제 2조. 청소년은 본인이 원하는 방식으로 관계를 맺을 권리가 있다.

(1) 청소년은 상호간에 협상하고 본인의 의사에 따른 내용과 합의를 가진 관계를 맺을 권리가 있으며, 성적 관계인 경우에도 동일하다.

(2) 교육 당국은 청소년이 본인이 원하는 관계맺음의 방식을 찾고 실천하도록 지원하여야 한다.

 

제 3장. 청소년은 자신의 정체성을 자유롭게 탐구하고 존중받을 권리가 있다.

 

제 1조. 청소년은 자신의 정체성을 자유롭게 탐구할 권리가 있다.

(1) 청소년은 자신의 욕구와 지향을 찾기 위한 과정에서 정보와 매체로부터 배제되지 않을 권리가 있다. 정부와 언론은 나이에 따라 접할 수 있는 정보와 매체를 제한하여서는 안 된다.

(2) 교육당국은 청소년이 다양한 정체성과 사람이 가지는 무궁무진한 욕구와 지향을 두루두루 접하고 탐구할 수 있도록 지원하여야 하며, 교육의 목표를 청소년이 특정한 정체성과 욕구, 지향을 가지는 사람으로 성장하는 것으로 두어서는 안 된다.

 

제 2조. 청소년은 자신의 정체성을 존중받을 권리가 있다.

(1) 청소년은 본인의 정체성에 스스로 이름을 붙이고 자긍심을 가질 권리가 있으며, 차별과 낙인으로부터 자유로울 권리가 있다.

(2) 청소년은 나이, 성별, 인종, 사회적 지위, 성적 지향, 성별 정체성, 장애 등을 비하하기 위한 부정적인 이름을 거부할 권리가 있으며, 어떠한 조롱과 희롱도 당하지 않을 권리가 있다. 정부와 사회는 청소년이 있는 그대로 자긍심을 가질 수 있도록 차별과 배제를 없애기 위해 노력하여야 한다.

(3) 청소년은 타인의 정체성을 존중할 권리가 있으며, 정부와 교육 당국은 청소년이 다양한 정체성을 가진 사람을 존중할 수 있도록 교육을 제공하여야 한다.

 

제 4장. 청소년은 본인이 원하는 노동을 할 권리가 있다.

 

제 1조. 청소년은 본인이 원하는 노동을 할 권리와 원하지 않는 노동을 거부할 권리가 있다.

(1) 청소년은 관계를 맺거나 유지하고 원하는 활동을 하기 위한 자원을 획득하는 일환으로써, 본인이 원하는 노동을 할 권리가 있다. 만약 원하는 노동이 특정한 훈련기간을 요한다면 교육 당국은 청소년이 원하는 시기에 원하는 노동을 할 수 있도록 모든 청소년이 접근가능한 필요한 교육과 지원을 제공하여야 한다.

(2) 청소년은 본인이 수행하는 노동의 성격으로 인하여 사회로부터 차별당하지 않을 권리가 있으며, 성적인 특성을 가지는 노동인 경우에도 동일하다.

(3) 청소년은 본인이 원하지 않는 노동을 거부할 권리가 있으며, 학교나 가정, 사회는 청소년에게 특정 노동을 강요할 수 없고 공부 등의 학습노동의 경우에도 동일하다.

(4) 정부와 사회는 노동의 위계화가 생기지 않도록 노력해야 하며, 사회적으로 가치를 인정받지 못해 임금을 벌 수 없는 노동을 하는 청소년도 자유롭고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지원하여야 한다.

 

제 2조. 청소년은 노동하며 충분히 휴식할 권리가 있다.

(1) 청소년은 본인이 원하는 만큼 노동하고 충분히 휴식할 권리가 있으며, 정부와 사회는 이러한 권리가 실현되도록 복지를 실행하여야 한다.

(2) 청소년은 쉼을 위해, 관계를 맺고 유지하기 위해, 창조적이고 활기찬 삶을 살기 위해 노동으로부터 자유로운 시간을 가질 권리가 있으며, 이러한 활동을 할 수 있을 만큼의 휴식시간이 보장되어야 한다.

 

제 5장. 청소년은 자신의 시간과 공간에 대한 권리가 있다.

 

제 1조. 청소년은 자신의 시간을 본인의 의사에 따라 자유롭게 활용할 권리가 있다.

(1) 청소년은 자신이 원하는 시간대에 자신이 원하는 만큼의 시간을 활용하여 원하는 활동을 할 권리가 있다. 청소년은 자신이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사람과 함께 있을 권리가 있다.

(2) 학교와 가정은 청소년의 시간에 대한 권리를 존중하며, 특정 시간대 혹은 시간동안 일정한 장소에 머물거나 특정한 활동만을 하도록 강요할 수 없다. 통금 시간을 두거나 외출을 금지하는 행위는 금지된다.

 

제 2조. 청소년은 자신의 공간을 가질 권리가 있다.

(1) 청소년은 본인의 의사에 따라 자신만의 공간을 가질 수 있다. 본인의 허락 없이는 누구도 그 공간을 침범하지 않아야 하며, 건물 안의 공간 뿐 아니라 가방 속, 일기장 등의 공간도 동일하다. 학교와 가정에서 청소년의 의사에 반하여 소지품을 뒤지는 행위는 금지된다.

(2) 청소년은 혈연과 상관없이 원하는 사람과 공간을 공유하며 생활할 권리가 있으며, 원하지 않는 사람과의 생활은 거부할 권리가 있다.

(3) 청소년은 자신의 공간과 공유지를 활용하여 타인과 관계를 맺고 원하는 활동을 할 권리가 있다.

(4) 청소년은 자신의 의사에 따라 자신의 공간을 배치하고 꾸밀 권리가 있다.

 

제 3조. 청소년은 사생활에 대한 권리가 있다.

(1) 청소년은 개인 정보와 기록을 원하는 범위 내에서만 공개할 권리가 있다. 학교와 가정에서도 이러한 권리를 침범할 수는 없다.

(2) 청소년이 사생활로 간직하고 싶어 하는 성적 정보, 의료 정보, 성정체성과 관련한 정보 등은 사생활로 존중받아야 한다. 청소년은 자신의 성에 대해 원하는 사람에게만 이야기할 권리가 있고, 자신이 맺고 있는 관계를 원하는 사람에게만 알릴 권리가 있다. 학교와 가정에서도 이러한 권리를 침범할 수는 없다.

 

제 4조. 청소년은 생활공간 내에서 타인과 평등한 관계를 맺으며 살아갈 권리가 있다.

(1) 청소년은 가족 등의 생활을 공유하는 집단 내에서 다른 구성원과 동등한 의사결정권을 보장받을 권리가 있다. 민주주의는 생활공간 내에서부터 실현되어야 한다.

(2) 청소년은 비폭력적인 일상을 살아갈 권리가 있다. 청소년은 성적으로 평등한 집단 내에서 가정 내 폭력을 경험하거나 목격하지 않으며 살아갈 권리가 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17/07/30 18:30 2017/07/30 18:30
태그 :
트랙백 주소 : http://blog.jinbo.net/walls/trackback/53

댓글을 달아 주세요

[참정권간담회자료집.pdf (217.22 KB) 다운받기]

 

 

청소년 참정권 운동의 과거와 오늘

 

공현

 

▶ ‘18세 선거권’이 이슈로 제기되기 시작한 것은 생각보다 오래된 일로, 1990년대부터 시민단체와 대학생단체 등은 18세 선거권을 요구하는 입장을 발표하고는 했다. 당시 ‘만20세’이던 선거권 제한 연령으로는 대학생 상당수도 선거권을 행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2002년 이후 ‘18세 선거권’ 운동은 청소년 참정권의 맥락에서 주장과 운동이 이루어져 왔다. 18세 선거권만이 아니라 청소년의 참정권을 요구하는 운동들의 전례를 몇 가지 살펴보면서 현재 시점에서 청소년 참정권 운동의 지향과 방식을 생각하는 데 참고해 보자.

 

▶ 2002년 대선, 청소년모임 ‘낮추자’는 18세 선거권을 주장하며 명동 거리에서 청소년들이 참여하는 모의투표 행사를 진행했다. ‘낮추자’는 2000년 ‘노컷운동’을 진행했던 사람들 중 일부가 다시 모여서 진행한 운동이었다는 점에서 청소년운동의 연속성을 보여주기도 한다. 또한 ‘낮추자’에는 문화연대, 학벌없는사회 등 교육·시민사회단체들이 폭넓게 참여했다. 부산이나 원주, 대전 등 여러 지역에서도 동시에 모의투표 캠페인이 이루어졌다. 18세 선거권 운동을 청소년운동의 입장에서 대외적 활동으로 만든 2000년대 최초의 사례이다.

 

▶ 2004년 총선, ‘낮추자’에서도 다시 한 번 모의투표 행사 등을 진행했다. 이 당시 ‘낮추자’의 자료에서는 국회에서 18세 선거권이 아닌 19세 선거권으로 개정하자는 주장이 나오는 것에 대해, ‘19세 vs. 18세’ 토론 등을 하면서 18세는 안 되고 19세는 된다는 주장은 곧 대학생/고등학생 - 성숙/미성숙이라는 틀로 구분 지으려는 것이라고 비판하며 청소년 참정권의 맥락에서 18세 선거권을 요구했다.

‘낮추자’와는 또 다른 움직임으로 2004년에는 ‘18세선거권낮추기공동연대’가 꾸려졌다. 이 공동연대는 청소년들의 자발적인 모임들과 시민단체 등이 연대하여 만든 연대체였으며, 2004년에서 2005년까지 18세 선거권 운동을 해나갔다. ‘낮추자’가 문화제와 모의투표 행사를 중심으로 했던 것에 비해 공동연대는 직접 국회를 상대로 공직선거법 개정을 위한 운동을 하는 데 더 초점을 맞추고 이슈파이팅을 해나갔다. 2004년 총선 직전부터 시작된 공동연대의 활동은 2005년까지도 이어졌고, 입법청원 제출과 국회의원 설득, 기자회견, 퍼포먼스 등을 하며 19세 선거권이 아닌 18세 선거권으로 개정해야 한다는 주장을 했다. 공동연대는 청소년 참정권의 맥락에서 18세 선거권을 이야기했으나, 대외적으로 내건 주된 주장은 대부분 국가들이 18세 기준이라는 것과 18세면 법적으로 납세, 병역 의무 등을 지며 결혼도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국회에서는 의원들의 논의 끝에 선거권 제한 연령을 19세로 개정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 2000년대 후반에는 교육감 직선제가 도입되었다. 2008년에는 촛불집회를 배경으로 하여 서울시교육감 선거에서 ‘기호 0번 청소년 교육감 후보 운동’이 이루어졌다. 이 운동은 청소년들이 교육의 주체임을 선언하는 퍼포먼스인 동시에 청소년의 참정권을 요구한 운동이기도 했다. 2010년, 전국에서 동시에 최초로 교육감 선거가 이루어졌을 때는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가 전국적으로 기호 0번 청소년 후보 운동을 기획했다. 이는 ‘선거권을 몇 살부터 제한하느냐’하는 문제를 떠나 참여할 권리를 표현한 운동으로 볼 수 있다.

 

▶ 2012년은 총선과 대선이 한 해에 몰려 있었다. 청소년운동에서는 2012년 초부터 참정권 운동을 기획하고 있었다. 2012년 3월, 청소년의 선거권·피선거권, 주민발의·주민투표권, 선거운동의 자유(표현의 자유), 정당가입의 자유(결사의 자유)를 내용으로 헌법소원을 제기했다. 4월 총선 때는 전국 투표소 앞에서 동시다발 1인시위를 기획했고 정당들에 질의서를 보내서 청소년 참정권 문제에 대한 각 정당들의 입장을 확인하여 공론화했다. 또한 정치활동을 금지하는 학교 규칙들을 조사하여 발표했고, 통합진보당의 청소년 당원 제명 문제도 비판하는 활동을 했다.

12월 대선 때는 ‘내놔라 운동본부’라는 이름의 연대체를 만들어서 투표소 앞에서 청소년 참정권을 요구하는 피켓팅 등을 진행했다. 내놔라 운동본부는 이후에는 국회에서 18세 선거권 등이 담긴 선거법 개정안을 통과시키기 위해서 국회의원과 공동으로 토론회를 여는 등의 활동을 했다. 이때 내놔라 운동본부의 요구는 선거권과 피선거권 제한 연령 인하, 주민투표와 주민발의를 비롯하여 주민으로서 지역 사안에 참여 보장, 학교 운영 참여 보장 등 학교 민주주의, 정당 가입 등을 포함하여 언론·표현·집회·결사의 자유 보장, 당사자로서 정책 등에 대해 알고 결정에 참여할 권리 보장이었다.

 

▶ 2014년 지방선거 때는 청소년운동에서 ‘1618 선거권 운동’을 진행했다. 18세 선거권에 교육감 선거의 연령 제한은 16세로 하자는 내용을 더해서 ‘1618’이라고 이름붙인 것이었다. 교육감 선거권의 연령 제한은 만 16세로 하자는 주장을 최초로 제기한 운동이었다. 이 운동은 캠페인과 모의투표 형식으로 이루어졌다.

 

▶ 2016년 총선에서는 청소년 참정권을 요구하는 선언 발표와 청소년 당사자들의 선거법 불복종 행동이 있었다. 이는 청소년들의 포괄적 참정권을 요구하는 내용이었고 나아가 실제로 정당 등에서 활동하고 있는 청소년들이 선거운동을 금지한 선거법에 불복종하면서 공개적으로지지/반대 의사를 밝히는 활동이었다.

 

▶ 2016년 총선 이후 새로 구성된 국회에서는 여러 국회의원들이 ‘18세 선거권’을 포함한 선거법 개정안들을 발의한 상태이며 더불어민주당 박주민 의원은 교육감 선거권의 경우 16세로 연령을 제한하는 법안을 발의했고 정당 가입 제한은 15세로 하는 법안도 발의한 상태이다.

 

 

고려해야 할 문제들

 

▶ 참정권 운동의 사례들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대부분의 운동들은 선거 시점에 이슈화와 활동이 이루어졌으며, 그 이후에도 계속해서 청소년 참정권을 주장하고 활동하는 사례는 별로 없음을 알 수 있다. 2004년의 공동연대의 경우에만 국회 입법을 위해서 2005년까지 운동이 이어졌다. 어떻게 보면 이처럼 돌아오는 선거 시즌마다 반짝하는 운동이라는 것 때문에 청소년 참정권에 대한 논의가 10년이 넘도록 나아가지 못하고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2016~2017년의 운동의 경우에도, 2017년 대선을 바라보고 이루어지는 운동이 아니라 지속성 있는 운동으로 구상하고 만들어져야 할 것이다.

 

▶ 또한 2004~2005년의 교훈은, 18세 선거권을 주장하는 것 역시 청소년 참정권, 청소년의 정치적 활동에 관한 쟁점을 피해갈 수 없다는 것이다. 2005년 당시 국회 회의록이나 언론 보도 등을 보면 결국 반대하는 측(한나라당 등)에서는 ‘고등학생들도 정치에 관여하게 된다’라는 논리를 들고 나온다. 크게 두 가지 논리가 발견되는데, 하나는 고등학생/십대는 미성숙하다는 주장이다. 또 다른 하나로는 고등학생은 입시-공부에 전념해야 하는데 정치 같은 데 신경 쓰게 하면 안 된다(또는 부모들 표가 떨어진다.)는 노골적인 이야기를 한다.

반면 18세 선거권을 당론으로 채택한 민주당(2005년 당시 열린우리당)은 이에 대해 상당히 무력하게 ‘만18세 중에는 대학생이나 사회생활을 하는 사람도 있다’라는 식의 주장을 하는데, 이는 국회 내에서 18세 선거권을 주장하는 측 역시 청소년 참정권에 대한 인식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이를 단지 하나의 국제적 대세로나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결과가 올해 초에 민주당이 ‘고등학생은 제외’하는 안을 내놓는 등의 모습이다.

현재 우리 사회에서의 논의 지형을 보면 선거권에 대한 논의를 ‘몇 살로 할 거냐’ 정도로나 인식하고 이야기하는 게 다수이다. 정작 청소년 참정권 문제에 대한 논의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있으며 이에 따라 대중적 인식 수준도 ‘18세면 그래도 성숙하지’ 정도이다. 이러한 프레임을 벗어나야 한다. 18세 선거권과 같이 숫자를 앞세우는 논의는 문제의 당사자를 불분명하게 만들고 논의를 지엽적으로 만든다. 또한 중앙일간지들마저도 국제적 인권 기준인 집회의 자유 보장에 대해서 대놓고 반대한다는 사설을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실을 정도로 한국의 청소년 정치적 자유에 대한 인식은 열악한데, 이런 상황에서 ‘선거권’만을 통과시킨다는 것은 어려운 일일 수밖에 없다. 더 길게 보고 청소년 참정권 전반에 대한 논의로 확장시키면서 문제의 당사자와 주체를 분명히 해야 한다.

 

▶ ‘18세 선거권’이라는 주장이 십수 년간 이어져 왔기에, 이제 여기에 대해서는 사회적지지 여론이 어느 정도(대략 1/3) 형성되긴 했다. 2014년 한국 갤럽의 여론조사에서는 18세 선거권에 대해 반대가 56%, 찬성이 35%였으며, 민주당 지지자는 찬성 45%, 반대 46%로 나타났다. 1/3이라는 숫자는 상당히 고무적인 것이기는 하나 18세 선거권을 당론으로 한다고 말하고 있는 민주당의 지지자도 양분되어 있는 상황은 그리 고무적이지 않다. 이는 민주당도 18세 선거권에 대해 제대로 된 논리나 운동을 가지고 있지 않고 적극적인 정치 의제로 풀어내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18세 선거권 찬성 주장도 제대로 체계화되거나 가시화되어 있지 못하다.

논의의 프레임을 ‘~세 선거권’이 아니라 청소년의 정치 참여와 민주주의로 바꾸면서 18세 선거권 지지자들을 가시화하고 청소년 참정권의 지지자로 바꾸면서 시작하는 운동이 필요하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16/10/27 21:03 2016/10/27 21:03
태그 :
트랙백 주소 : http://blog.jinbo.net/walls/trackback/48

댓글을 달아 주세요

[논평] 청소년이 이용한다고... "룸카페 벌컥"?!
-청소년의 룸카페 이용에 대한 낙인찍기식 언론보도에 우려를 표한다

 

 최근 MBN뉴스에서 청소년들의 ‘룸카페’ 이용실태를 보도한다는 명목으로 청소년이 이용하고 있던 룸카페의 방문을 벌컥 열고 들어가 안에 있는 청소년들의 모습을 화면으로 내보내 논란이 되고 있다. 그 장면은 룸카페에서 ‘남녀 학생들이 낯 뜨거운 장면을 연출’하고 있다는 설명과 함께 보도되었다. 해당 장면이 연출된 것인지, 혹은 정말 기자가 이용자의 허락도 없이 문을 열고 들어가 카메라를 들이댄 것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만약 그들이 비청소년이었다면, 잠시 동안이기는 하지만 어느 정도 사적 공간으로 점유하고 있는 공간을 동의도 없이 열고 들어가 카메라에 담을 수 있었을까? 그렇게 무례한 취재 방식이 한국기자협회 윤리강령의 ‘정당한 방법으로 정보를 취득’해야 한다는 조항에 부합할 수 있는지도 의심스럽다. 그러나 MBN뉴스처럼 청소년이 이용하고 있는 룸카페 방문을 벌컥 열고 들어가 취재하지는 않았더라도, 여러 언론에서 룸카페가 청소년의 ‘탈선’ 장소라는 식으로 보도를 꾸준히 해온 것이 사실이다. “청소년 탈선 조장 '룸카페' 우후죽순”, “밀실에서 뭐든지?” 등으로 자극적인 기사 제목을 붙여가며 말이다.

 룸카페는 칸막이 등으로 공간분리가 되어 있고 문을 잠글 수 없는-혹은 문 대신 커튼이 달려 있기도 하다-여러 개의 룸들이 설치된, 1-4인 정도가 룸 안에서 음료를 마시거나 TV를 보거나 게임을 할 수 있게 꾸며놓은 공간이다. 비단 청소년 뿐 아니라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이 다양한 이유로 룸카페를 이용한다. 연애상대와 스킨십을 하고 싶을 때 남들 시선을 가려 줄 칸막이가 있는 공간이 필요해 가기도 하고, 친구들과 편하게 앉거나 드러누워 수다를 떨고 싶을 때 가기도 한다. 대다수 룸카페에 영화 관람이 가능한 TV, Wii 와 같은 게임기, 보드게임 용품 등이 구비되어 있기 때문에 그러한 것들을 이용할 목적으로 가기도 하며, 때로는 잠깐 낮잠을 자고 싶어서 찾는 공간이기도 하다.

 언론에서는 청소년들이 룸카페에서 데이트를 하고 스킨십을 하는 것이 대단한 ‘탈선’인 양 보도하고 있지만, 과연 그것이 부도덕하거나 해서는 안 되는 행위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크다. 만 13세 이상의 청소년들이 칸막이로 가려진 룸카페에서 서로의 동의하에 성적인 행동을 하는 것은 불법이 아니다. 현행법상 ‘공연히 음란한 행위’를 하면 공연음란죄로 처벌을 받지만, 룸카페에서 남들이 들리게끔 성적인 소리를 내지 않는 이상 공연음란죄 적용을 받기는 힘들 것이다. 오히려 그들은 사생활을 지키고자 남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공간을 찾아 룸카페에 와서 스킨십을 하고 있는 것이고, 그들이 친밀감을 나누고 있던 방의 문을 마음대로 열어 전 국민에게 공개한 것은 언론이다. 왜 어른의 얼굴을 한 사회와 언론은 청소년의 성(性)을 탈선으로, 비행으로 낙인찍고야 마는 것일까? 성적 권리와 성적자기결정권은 인권이고, 많은 사람에게 사랑과 연애와 성은 삶을 삶답게 해주는 중요한 요인이다. 법을 위반하는 것도 아니고, 딱히 남에게 해를 입히는 일도 아닌데 청소년들이 룸카페에서 상호 동의하에 스킨십을 하는 것이 왜 문제인지, 왜 언론에서는 이것이 큰 문제인 것처럼 보도하는지 납득하기 어렵다.

 룸카페가 청소년들의 탈선 장소라고 떠들고 있는 언론의 행태를 보자면 기시감이 들기도 한다. 마찬가지로 청소년들의 탈선 장소라고 지목받았던 멀티방은 2012년에, 비디오방은 1999년에 청소년의 출입이 불가해졌다. 2000년대에 청소년이었던 지금의 20대들은 멀티방에서 데이트를 했고 당시의 언론은 멀티방이 청소년의 탈선 장소라고 보도했다. 1990년대에 청소년이었던 지금의 3-40대들은 비디오방에서 데이트를 했으며 당시의 언론은 비디오방이야말로 청소년의 탈선 장소라고 보도했다. 당시의 언론 기사들을 찾아보면 비디오방에서 멀티방으로, 그리고 룸카페로 그 대상이 바뀌었을 뿐 보도하는 방식이나 기사의 논조는 놀랍도록 동일하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청소년은 어른의 감시 없는 사생활을 가져서는 안 되는 존재라고 여기는 인식, 청소년의 성적 실천을 사회가 통제해야 한다는 믿음이 수십 년째 이와 같은 언론보도를 양산해내고 있는 것이다.

 자신이 살고 있는 집에 대해 많은 청소년들은 ‘그 집은 나를 위한 집이 아니’라고 느끼곤 한다. 자기만의 방이 없거나, 있다하더라도 부모가 언제든지 동의 없이 들어올 수 있으며, 집에 머무는 동안 입시공부를 하는지 안 하는지 등으로 감시당하는 일이 잦기 때문이다. 이성인 친구는 아예 집에 초대할 수조차 없는 청소년들도 많다. 그래서 청소년들은 사생활이 필요할 때면 집이 아닌 다른 공간을 찾는데, 모텔도 비디오·DVD방도 멀티방도 출입금지당한 청소년에게 룸카페의 룸(room)은 잠시나마 자기만의 방이 되어줄 수 있는 공간이 된다. ‘탈선하려고 룸카페에 온 청소년들’을 보도하고자 의도하는 언론은 이들이 왜 이 공간을 찾는지에 대해서 진정 알려고 하지 않는다. 청소년의 성에 대한 사회적 낙인을 강화하는, 피상적이고 선정적인 언론의 보도 방식에 심각한 우려를 표하는 바이다.

 

2016.10.01.

십대섹슈얼리티인권모임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본 논평에서 다룬 보도의 내용은 MBN뉴스의 “밀실에서 뭐든지?…'룸카페' 청소년 탈선 온상” 2016.09.20.자 기사 참조.
*탈가정청소년인터뷰프로젝트가 쓴 <그 집은 나를 위한 집이 아니야> 제목에서 표현을 인용하였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16/10/04 20:26 2016/10/04 20:26
태그 :
트랙백 주소 : http://blog.jinbo.net/walls/trackback/46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