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을 성적 주체로 여기지 않는 성교육 표준안의 세 가지 문제 
 
 
글 | 쥬리
 
공교육이 사회적으로 어떤 기능을 하고 있는가에 대해, ‘자본주의적 계급구조에 순응시키는 노동자 양성 과정(보울즈와 긴티스)’으로 기능한다고 보는 관점이 있습니다. 이와 더불어 현재의 공교육은 순응적이고 무성적인 청소년, 성적으로 억압된 여성, 이성애중심주의를 내면화한 국민, 성소수자임을 숨기는 성소수자를 만들어내는 기능을 하고 있습니다. 공교육의 이러한 기능은 성교육 과정에서 여실히 드러나며, 특히 교육부가 발표한 <학교성교육표준안>에서 명문화되었습니다. 아래에서는 교육부 성교육표준안에 따른 성교육 과정 자료를 참조하면서 현재 공교육의 성교육에서 ‘무성적인 청소년 만들기’ ‘성적으로 억압된 여성 만들기’ ‘이성애중심주의를 내면화한 국민 만들기’의 기능을 하고 있음을 드러내려고 합니다. 
 
 
무성적인 청소년 만들기
 
 
성교육표준안에 따른 중학교 성교육 과정 중 한 차시는 그 주제를 <성 욕구의 조절>로 두고 있습니다. 이 차시의 학습문제는 ‘청소년기의 성 욕구와 금욕이 필요한 이유’와 ‘청소년기의 성 욕구 조절 방법’을 알아보는 것입니다. 이 차시에서는 ‘운동이 부족할 때 자위를 하고 싶은 마음이 많아’진다며, 성 충동이 생기면 운동을 하거나 ‘창조적인 활동’, ‘또래 활동’으로 성 에너지를 발산하라고 말합니다. 성욕을 회피하라는 것이죠. 
 
고등학교 과정에서는 <건전한 이성 교제와 예절>, <성에 대한 책무성>, <효과적인 거절 방법>, <성관계와 임신의 책무성>, <성욕과 성 욕구의 해소> 등을 제목으로 한 차시들이 있습니다. <건전한 이성교제와 예절> 차시에서는 건전한 이성교제를 위한 예절로 ‘학생 신분에 어울리는 복장’을 입고 만날 것, ‘청소년기는 미완성 단계이므로 일시적인 충동에 따라 움직이지 말’것을 제시합니다. 또한 청소년들이 이성 교제를 하는 이유로 입시 위주의 경쟁 교육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위한 탈출구를 찾기 위해서라고 말하는데, 보통의 배타적인 로맨스 관계는 자연스러운 것으로 여겨지는 것과 달리 청소년기의 그것은 원인이 설명되어야 할 만큼 부자연스러운 것으로 보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또한 이성 친구를 사귄다면 공부에 집중하기 힘들 것이라는 간접적인 경고도 하고 있습니다. 
 
<성에 대한 책무성>과 <효과적인 거절 방법> 차시에서는 ‘성적자기결정권’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만, 성적자기결정권의 내용으로 제시하는 부분은 성 행동을 ‘거절’할 수 있는 능력밖에 없어요. 여기서 활용하는 ‘성적으로 무책임한’ 사례는 고등학생 커플이 술을 마시고 남학생이 여학생에게 성관계를 제안하고, 여학생은 곤란해 하는 사례입니다. 
 
<성관계와 임신의 책무성> 차시에서는 청소년이 성관계를 하는 이유를 ‘성호르몬의 분비’ ‘정상적인 성적 능력을 지니고 있는지 확인’ ‘성적 호기심의 충족’ ‘또래집단의 압력’으로 제시하면서, 청소년기에는 행복하고 책임 있는 성관계가 가능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또한 청소년의 성관계 자체를 문제로 보면서 성관계를 하면 심리적인 상처를 받을 것이고, 미혼모가 될 것이며, 질병을 얻게 될 것이고, 낙태를 하게 될 것이라고 말하죠. 또한 성관계를 하기 위해서는 ‘성관계를 하는 것이 사회구성원에게 인정받을 수 있’는 요건이 갖추어져야 한다고 말합니다. 
 
 
 
 
<성욕과 성 욕구의 해소> 차시에서는 ‘건전하게 성욕을 해소하기 위한 방법’을 알아보자며 학습 문제를 제시하는데, ‘식욕을 채우기 위해 다양한 종류의 음식을 먹듯이 성욕 또한 여러 가지 방법으로 해결 가능’하다며 운동, 취미 활동, 봉사 활동 등을 하며 성 욕구를 해소하라고 말합니다. 이성과 단 둘이 있을 때 성적 충동이 일어나면 ‘화제를 바꿔 보거나 밖으로 나가’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성교육표준안의 내용은 청소년의 성이 그 자체로 문제라는 주장과 성적 행동을 한다면 무서운 일들이 벌어질 것이라는 협박을 완곡하고 상세하게 풀어 쓴 것에 불과합니다. 청소년의 성을 낙인찍는 사회, ‘불건전한 이성교제’라며 청소년의 관계를 처벌하는 학교와 발맞추어, 청소년 스스로가 자신의 욕구에 대해 문제적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성에 대한 두려움을 내면화하게끔 성교육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성적으로 억압된 여성 만들기
 
 
 
 
성교육표준안에 따른 중학교 성교육 과정 중 한 차시는 <남녀의 성적 반응의 이해>입니다. 이 차시에서는 남성과 여성의 성 인식과 성적 반응이 판이하게 다르다고 규정합니다. 남성은 성기자극과 시각적 자극만 느낀다면 여자는 다양한 요건이 갖추어져야 자극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남성은 친밀감이 없이도 스킨십을 하고 싶어 하고, 여자는 친밀감이 생겨야 스킨십을 하고 싶어한다고 말합니다. ‘성적 존재로서의 나 발견하기’ 활동 결과 예시 자료로는 남학생용과 여학생용이 따로 제시되는데, 남학생용에서는 몽정을 했을 때 쾌감과 남자가 된 느낌을 받으며, 친구들과는 야동에서 본 내용을 이야기하고, 여자와 성관계하는 상상을 한다고 말합니다.  여학생용에서는 월경을 했을 때 불편했고 여자가 된 느낌을 받으며, 로맨스소설의 주인공이 되는 상상을 하며, 친구들과는 남자친구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좋아하는 연예인과 포옹하는 상상을 한다고 말하죠. 성교육표준안은 여성은 사랑하지 않는 상대에게는 성욕도 느끼지 않고, 성욕도 성관계를 하고 싶은 욕구로 느끼는 것이 아니라 포옹이나 데이트 같은 것을 원하는 욕구로 느낀다는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고등학교 과정의 <건전한 성생활의 조건> 차시에는 ‘남자는 누드에 약하고 여자는 무드에 약하다’는 문장까지 제시됩니다. ‘성적 합리적 의사 결정’ 차시에는 성적 의사결정을 위한 조언이 나오는데, 자신의 의지대로 거절하라는 조언은 여성에게, 성관계를 강요하지 말라는 조언은 남성에게 발화합니다. 
 
중학교 과정의 <성 욕구의 조절> 차시에서는 성 충동이 생긴 청소년들의 사례를 여섯 가지 제시하는데, 이 중 한 사례만이 여성의 사례힙니다. 게다가 남성들의 사례는 불특정다수에 대한 강한 성욕이나 자위와 관련한 사례인데 반해 여성의 사례는 남자친구와 스킨십을 하고 싶어 하는 사례입니다. 남성의 자위행위에 대해서는 상세히 설명하고 있지만, 여성의 자위행위에 대해서는 ‘남성에 비하여 수는 적지만 여성에게도 있는 일’이라는 언급밖에 없습니다. 
 
성교육표준안은 여성의 성욕을 남성에 비해 약한 것, 성관계에 대해서는 직접적으로 느끼지 않는 것으로 규정하고, 여성의 자위행위에 대해서는 예외적인 현상으로 여기며 내용으로 다루지도 않습니다. 이는 여성의 성욕을 비정상적인 것으로 여기는 문화를 답습하는 동시에 강화하는 교육을 초래하며, 교육을 받는 여학생들이 자신의 성에 대해 억압하는 태도를 내면화하게 할 위험이 있습니다. 
 
 
이성애중심주의를 내면화한 국민 만들기
 
 
성교육표준안에 따른 중고등학교 과정의 차시 제목들은 <바람직한 이성 교제>, <건전한 이성 교제와 예절>, <배우자의 선택과 이성관>, <이성과 의사소통 기법 익히기> 등입니다. 성교육표준안에서는 로맨스적 관계맺기를 ‘연애’라고 칭하는 대신 ‘이성 교제’라고 칭합니다. 동성 간 연애에 대한 언급은 어디에도 없으며, 제시되는 사례들도 모두 시스젠더 이성애자의 고민과 경험에 대한 내용이죠. 
 
 
 
 
중학교 과정의 <청소년기의 성 정체성> 차시를 보면, 성정체성에 대한 고민(성전환 수술에 대한 생각 등)과 동성 친구에게 감정을 느끼는(설레는 감정, 스킨십 욕구) 비율이 중학생보다 고등학생에게 적게 나타났다며 ‘연령이 높아짐에 따라 자신의 성 정체성을 확립해가는 비율이 높아지고 있다’고 결론짓습니다. 또한 성정체성 확립을 자신의 출생 시 부여된 성별을 수용하는 것으로 서술하면서 건강한 가정에서는 자녀들이 안정적으로 정체감을 발달시킨다며 성정체성에 대한 고민이나 시스젠더가 아닌 성정체성을 ‘건강하지 못한 것’으로 낙인찍습니다. 
 
연애란 곧 이성 교제며, 이성 교제의 갈등은 연애에 참여하는 구성원이 다른 성별이라는 데서 기인한다고 말하는 성교육에서, 동성 간 연애에서 부딪히는 어려움에 대처하는 방안은 응용을 해도 알 수가 없습니다. 성소수자인 학생들이 살면서 경험하는 차별 문제나 그 차별에 대처하는 방법에 대해서도 언급이 없습니다. 이런 성교육은 이성애자가 아닌 학생들에게는 쓸모가 없습니다. 단순히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을 넘어, 성교육 표준안은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을 강화하고 성소수자인 학생들이 스스로를 비정상이라고 인식하게 만들 위험 또한 있죠. 공교육에서 소수자에 대한 차별과 배제의 태도를 교육시키는 것은 심각하게 문제적인 상황입니다. 
 
정리
 
교육부가 성교육표준안을 발표함으로 인해 공교육에서의 성교육이 특별히 후퇴한 것은 아닙니다. 성교육은 원래 대부분 가부장적이고 이성애중심적이며, 청소년에게 순결과 금욕을 강요했습니다. 다만 이제껏 대안적인 성교육을 해왔던 일부 성교육자들, 성교육단체들에 재갈을 물리는 것이 된 셈이지만, 전반적으로 성교육이 예전에는 더 나았던 것은 아닙니다. 한국의 정치 상황과 청소년은 판단력이 없으므로 까다롭게 엄선된 ‘건전한’ 것만을 교육해야 한다는 나이주의적인 인식, 교사의 수업 재량권에 대한 제약과 교과서 검인정제도 등이 작용하여 공교육은 전반적으로 보수적이고, 조금이라도 논란이 될 만한 내용을 제거하다 보니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지 않는 겉핥기식의 내용으로 채워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한국 사회에서 청소년, 여성, 성소수자는 성적 욕구를 느끼는 것과 성적 실천을 주체적으로 하는 것을 금지 당합니다. 그들의 존재나 성적 실천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공적으로 드러나기에 부적절한 것, 금기시돼야 할 것으로 여겨집니다. 국가와 공교육이 존재하는 이상 공교육에서 어떤 내용이 어떠한 관점으로 교육될 수 있는가는 공적인 공간에서 무엇이 이야기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로써, 투쟁과 정치의 결과로 존재할 것입니다. 좋은 교육이란 ‘어른들 보시기에 좋은’, 권력 집단의 이익에 부합하는 사회를 만드는 교육이어서는 안 되기에, 성교육이 청소년과 여성, 성소수자의 존재와 성을 배제하고 차별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는 목소리는 계속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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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0/04 00:29 2016/10/04 0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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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수저당 논평] 16세 정당가입 추진 환영하며청소년의 정치적 권리는 더 확대해야한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이하 선관위)가 16세 청소년의 정당가입을 허용하는 정당법 개정작업을 추진하고 있다현재 정당법에는 당원의 자격을 국회의원 선거권이 있는 자로 하고 있어 19세부터 당원이 될 수 있다선관위가 오는 9일까지 개정의견을 확정짓고,공청회를 거쳐 개정의견을 제출하면 국회 안전행정위원회가 법 개정작업에 들어간다청소년의 정치적 권리를 확대하는 선관위의 법 개정 추진은 늦었지만 환영 할 일이다.

 

이미 2012년 국가인권위원회(이하 인권위)는 선거연령을 낮추는 것과 정당가입 연령은 선거권 연령보다 낮춰야 한다는 상임위원회 결정을 국회의장에게 보냈다인권위는 정치적 판단능력을 갖추는 연령이 낮아지는 추세로전통사회의 성인이나 성숙의 개념을 기계적으로 적용할 수 없다고 하였다그리고 정당이라는 시민의 자유로운 결사체의 구성원 자격은 되도록 많은 사람에게 개방되는 것이 민주주의 원칙에 부합한다며 정당가입 연령을 선거권 연령보다 더 낮추는 방향이 바람직하다고 입장을 밝혔다인권위는 헌법아동의 권리에 관한 협약 등을 판단근거로 삼아 19세 미만 청소년은 정치적으로 미성숙하다는 근거 없는 편견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보여줬다.

 

선관위의 2012년 보고서인 「주요국가의 정당제도」에서는 영국독일프랑스미국호주일본 등의 당원 제한요건을 비교하고 있다연령 제한을 살펴보면미국의 민주당호주의 진보당일본의 민주당공명당민나노당 등이 연령 제한이 가장 높은 18세 이상이었다영국의 노동당은 15세 이상독일의 기민당은 16세 이상사민당은 14세 이상이었다프랑스의 대중운동연합호주의 노동당처럼 연령 제한이 없는 정당도 있다이 보고서에서 우리나라와 같은 19세 이상 또는 그보다 높은 연령제한을 두고 있는 정당은 없었다.

 

당원의 자격은 정당 스스로 정할 수 있어야 한다정치활동의 자유는 헌법이 보장하는 기본권이다정당의 당원이 되는 것은 국민의 자유로운 선택이며정당이 구성원인 당원의 자격을 정하는 것은 자유로운 결사체인 정당의 권한이다정당법에서 당원의 자격을 제한하는 것 자체가 과도한 규제이다때문에 선관위가 16세 청소년의 정당가입을 추진하는 것은 부족하지만 환영할만한 일이다.

 

세계적으로 청소년의 정치적 권리가 확대되고 있는 추세이다지난 달그리스가 선거 연령을 17세로 낮췄고일본에서는 선거법 개정 후 18세가 참여하는 첫 선거를 했다유럽 여러 나라에서는 17세 선거권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다우리나라에서도 20대 국회가 열리고 두 달여의 기간 동안 18세로 선거 연령을 낮추는 공직선거법 개정안이 5건 발의되었다그리고 선관위가 16세 정당가입을 추진한다청소년의 정치적 권리 확대민주주의 발전이라는 역사적 방향에 맞게 법률 개정이 이루어지도록 정치권과 정부가 적극 나서야 한다.

 

 

 

2016.08.08.

 

민중연합당 흙수저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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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9/28 12:57 2016/09/28 1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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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2병에 전염되는 아이들?

중2병에 전염되는 아이들?
스스로에게 만족하지 못하는 청소년들에게는 그 자신을 만족할 수 있도록 칭찬과 격려를 더 많이 해줘야 할 필요가 있다. 반면 그 자신에게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청소년들에게는 그러한 만족감이 자신감이 될 수 있게, 그래서 미래의 가능성으로 연결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양기민 사회적기업 노리단 공동대표    

‘중2병’이란 신종플루 
인터넷 검색창에 간단하게 중2병을 치면 다음과 같이 나온다.
<중2병>
중2병(일본어: 中二病 주니뵤[*])은 중학교 2학년 나이 또래의 사춘기 청소년들이 흔히 겪게 되는 심리적 상태를 빗댄 언어로, 자아 형성 과정에서 ‘자신은 남과 다르다’ 혹은 ‘남보다 우월하다’ 등의 착각에 빠져 허세를 부리는 사람을 얕잡아 일컫는 인터넷 속어이다. <위키백과> 발단은 90년대 말 일본의 한 라디오 방송 이후였다고 한다. 진지한 시사교양 프로그램도 아니고 연예인이 나와서 시시껄렁한 잡담을 하는 흔한 라디오 프로그램이었다. 방송 이후 중2병은 유행어가 되었고, 십년이 훨씬 지난 후 한국의 인터넷상에서도 유행하는 말이 되었다. 
게다가 최근 여러 신문에서는 ‘중2병’에 대해서 진지하게 분석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분석 사이에서는 괴리와 겹쳐지는 부분이 존재한다. 무엇보다 기사에 나오게 되면, 그 병이 실재하는지 안하는지에 대한 실재적인 판단과 무관하게, ‘이미존재하는’ 병처럼 규정된다. 
중2병을 이야기하는 순간 새로운 병이 발명되는 것이다. 이반 일리치는 “근대적 병원이 만들어지면서, 병들이 발명 되었다”고 말했다. 과도한 비약 같아 보이지만, 실제로 병원이라는 체계가 발명되면서 그동안 병이 아니었던 것이 병으로 만들어지게 되는 메커니즘을 꼬집은 비유일 것이다. 중2병은 언어가 범람하는 인터넷 시대에 장난스럽게 만들어진 신종플루 같은 것이다.

질병의 은유 
흔히 근대사회 이후에 ‘정신의학’이 발달하고 현대사회가 변화하면서 그동안 병이라고 불리지는 않은 것들이 병적인 것으로 불리게 된다. 예컨대 과체중의 문제는 옛날에는 부의 상징이었기에, 부러워하고 권장할 만한 체형이었지만, 현대사회에서는 다이어트를 통해서 제한되어야 할 몸의 규율이 되어버린다. 규율화를 통해 사람들은 병적으로 집착하게 되어 오히려 실제 병인 것처럼 증상으로 나타나게 된다. 
또한 새로운 현상이 과도해질 때, 기존 세대의 윤리를 작동하며 ‘병’이라고 규정한다. 예컨대 인터넷이 탄생되면서, 인터넷을 많이 한다는 것을 자체적으로 ‘많다/적다’라는 기준을 임의적으로 설정해, 많은 것을 인터넷 중독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균형이 깨져버린 일상생활의 현대인에게는 앞으로 더 많이 ‘병적인’ 것들에 집착할 수밖에 없는 삶의 조건에 처하게 된다. 
에티엔 발리바르는 이러한 병들이 만들어지는 근원에는 ‘대중들의 공포’가 근거한다고 말한다. 새로운 현상에 대한 공포나 우려는 비일상적인 것으로 규정되며, 합리적인 설명을 포기한 채 병으로 규정된다. 또한 가장 우려스러운 것은 현대 사회의 병들은 사람에 의해서든 사회적으로 전염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해 ‘전염병’으로 여겨지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이는 현대 사회에서 유행을 통해서 병적인 것들이 확대될 것이라는 우려가 바탕이 되었다. 이러한 병이 극단적으로 진행된다면 결국 배제와 차별 등의 현상이 발생된다. 푸코는 이러한 것을 ‘정신의학의 권력’이라고 진단했다.

청소년에 대한 차별적 시각
문제는 중2병은 중학교 2학년을 ‘허세’를 부린다는 이미지로 고정시킨다는 것이다. 이와 비슷하게 초등학생을 빈정거리며 일컫는 ‘초딩’이라는 말도 비슷한 메커니즘이다. 실제 초등학생이 모두 초딩이란 말뜻처럼 ‘개념’ 없지는 않다. 일부 초등학생이 그럴 수 있으나, 전체 초등학생을 비하할 수는 없는 것이다. 실제 초등학생들은 어른들에게 초딩이란 말을 듣는 것을 기분 나빠한다. 하지만 또래 사이에서는 스스럼없이 ‘초딩’이라는 말을 서로 주고받기도 한다. 모순적으로 느껴질지 모르지만, 이유는 어떤 호칭도 권력 관계를 수반하면 당사자들에게 모욕적으로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중2병 역시 중학교 2학년 학생들에게는 모욕적으로 느껴진다. 그러나 이 말은 단지 특정한 중학교 2학년만 지칭하는 것은 아니다. 청소년들 모두에게 해당하는 말이다. 이는 어른들이 보기에 청소년들은 공상만을 하는 무능력한 존재로 각인시킨다. 이러한 인식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인지도 모른다. 
한국 사회의 ‘학생’들은 주체적인 존재가 아닌 ‘객체’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상당히 제한되었고, 그렇기에 자연스레 어떠한 이상과 야망, 포부도 모두 ‘허세’로 비춰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결국 초딩이나 중2병이 유행하는 것은 실존하는 문제라기보다는 언론에 의해서 유행처럼 흘러가는 가상적인 인식의 프레임이다. 
이는 어떠한 문제도 해결하거나 설명하지 못한 채, 우리 사회의 청소년들에 대한 차별적 시선과 객체화된 존재로 대접하는 것을 은폐시킨다.

사춘기적 증상 중2병, 허세라도 좋다 
중2병을 정신의학적으로 병으로 규정하기는 사실 어렵다. 단지 일반인들에게 병이란 말 때문에 혼동이 될 뿐이다. 
청소년기, 사춘기 시절의 예민함은 과거에서부터 사회학적으로 확인되었다. 사춘기는 질풍노도의 시기로서 자신의 세계가 팽창되는 과정에서 심리적인 불일치가 발생하게 된다. 이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다만 과거의 청소년과 현재의 청소년은 일정 정도의 차이를 보일 수 있다. 사춘기의 예민함을 반영하며, 과거의 사춘기 소년, 소녀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읽었다. 자살이라는 비극적인 선택을 하는 베르테르는 사실 ‘애정’의 문제였다. 이루지 못할 사랑이라 할지라도 열정이 수반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청소년들은 ‘애정’ 문제에는 상당히 둔감하다. 과거보다는 좀 더 이성관계가 자유로워져서 이기도 하지만, 오히려 애정을 부차적인 문제라고 생각해서다.
오히려 현재의 청소년들이 고민하는 것은 ‘불확실한 미래’인 것이다. 일본에서도 중2병 현상이 등장한 것은 일본 서브컬처(애니메이션, 만화, 게임, 라이트노벨 등) 문화에서 기인한다. 특히 그 중에서도 <신세기 에반게리온>에 원류를 두는 세카이계(セカイ系)의 세계관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일본의 문화평론가 아즈마 히로시는 세카이계 서브컬처의 문화에서 대부분 주인공은 과잉된 자의식을 바탕으로 위기에 빠진 세계에 도전하는 묵시론적인 세계관과 연관된다. 중2병의 세계관은 이러한 세카이계의 세계관과 닮아있다.
세카이계의 세계는 대부분 위기와 모순으로 중첩된 세계이다. 요즘 청소년들이 바라보는 현실세계도 이와 다르지 않다. 이러한 세계에서 문제는 뚜렷한 해결방법이 보이지 않는 것처럼 느끼는 것이다. 어른들이 해결하지 못하는 세상의 문제점을 결국 해결할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허세를 부리면서 지나친 자신감을 보이는 것이다. 젊었을 때, 이런 허세라도 없으면 청춘이라 할 수 있을까? 오히려 점점 위축되어가는 요즘 청소년들에게 이런 자신감들은 더더욱 표현되어야 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러한 것을 ‘지나치다’라고 평가하는 것은 문제가 된다. 
청소년기를 통과하면서 아이들은 자신이 계획했던 것들이 무너지는 경험을 통해서 성장하게 된다. 세상일이 쉽지 않을 것이라고 미리 냉소하는 것보다 그 때 그 시절 허세라도 부릴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오히려 어른들의 배려일지도 모른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청소년들의 내면 성장이 진행되는 것이다. 오히려 이런 의미에서라면 중2병은 성장을 위한 예방 질환인 ‘천연두’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중2병, 아무도 다치지 않지만 스스로 아픈 질환 
중2병은 증상이라기보다는 ‘징후’로 읽어야 한다. 중2병에 해당하는 것은 단지 중학교 2학년생이 아닌, 다른 연령층에서도 충분히 사용될 수 있다. 그것은 결코 전염되지 않는 질환이지만 유행되고 있다. 이것은 현대인들의 감정이 변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떤 사람이 중2병의 징후, 곧 허세를 부린다고 피해보는 것은 없다. 허세라는 것은 실속 없이 겉으로만 드러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허세는 상대방에게 피해를 주는 것이 아닌 당사자의 문제이다.
당사자의 입장에서도 허세란 자신감의 과대표현일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허세가 공격성으로 발휘될 수 있는 가능성에 있다. 하야미즈 도시히코는 “그들은 왜 남을 무시하는가”라는 책에서 요즘 청년들의 ‘타인경시’ 현상을 분석한다. 저자의 표현에 의하면 요즘 아이들은 ‘나만 빼고 다 바보’인 시대에 살아가고 있다고 진단한다. 이는 ‘자기중심’이라는 말과 더불어 심해지면 사람들이 자신만 돌볼 뿐, 남의 처지는 전혀 눈여겨보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즉, 과거와 달리 타인을 쉽게 경시하고 경멸하게 된다는 가설을 제기했다.
그는 가상적 유능감(假想的 有能感)에 의해 습관적으로 ‘나는 남보다 잘났어, 유능해’라고 생각하게 된다고 설명한다. 중2병도 이러한 습관의 한 차원이다. 

경쟁 앞에 직면한 요즘 청소년들의 공포 
결국 이러한 중2병, 가상적 유능감은 경쟁 사회의 공포 앞에서 있을 수 있는 반응이라는 것이다. 경쟁에서 이겨내기 위해서는 실제로 더욱 공부를 잘하거나 뛰어나야 한다. 그러나 그러한 학생은 본질적으로 소수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대다수의 청소년들은 자괴감을 느낄 수 없도록 구조화 되어 있다. 이러한 청소년들 스스로는 자신을 보호할 필요가 있다. 자존감마저 버려지면 결국 경쟁사회에 뒤처진 사람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요즘 청소년들은 자존심만은 어떻게든 지켜야 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아무도 자신을 잘 평가해주지 않기에, 스스로만이라도 자신을 과대평가하게 된다. 이것은 과대평가가 아닌 자신을 지키는 유일한 심리적 방어책이기도 하다. 그래서 청소년들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문제에 대해서는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다. 청소년들에게 쉽게 다가서기 어려운 지점이다.
그리고 중2병의 증상인 ‘허세’를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자신에게 만족하지 못하면서 느끼는 ‘가상적 유능감’과 자신에게 만족하면서 느끼는 ‘가상적 유능감’에 따라 차이를 보인다. 청소년 스스로가 진짜 자신에 대해서 어떤 고민을 하고 있는지를 들어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선생님들이 살펴보아야 할 것은 청소년 스스로가 자신에 대한 어떠한 만족도를 가지고 있느냐이다. 스스로에게 만족하지 못하는 청소년들에게는 그 자신을 만족할 수 있도록 칭찬과 격려를 더 많이 해줘야 할 필요가 있다. 반면 그 자신에게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청소년들에게는 그러한 만족감이 자신감이 될 수 있게, 그래서 미래의 가능성으로 연결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러한 역할이 교사로서의 역할인 것이다. 단지, 중2병으로 허세를 부린다고 치부하고 가볍게 생각하기에는 요즘 아이들의 심리상태는 점점 더 불안해지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청소년들에게 세밀한 관심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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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9/17 14:59 2016/09/17 1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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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의 해방을 위해서

-<우리시대 대중문화와 소녀의 계보학>에 대한 비평

 

쥬리(십대섹슈얼리티인권모임)

 

한지희 선생님께서 저술하신 <우리시대 대중문화와 소녀의 계보학>에서는 20세기와 21세기 한국의 대중문화에서 소녀가 어떤 존재로 재현되어왔는가를 계보학적으로 정리하고 있다. 소녀를 남성중심적 판타지에 부응하는 ‘순진열렬’한 존재로 재현하는 대중문화에 비판적 입장을 취하면서, 한국의 소녀들이 가지게 되는 여성의 육체와 성애에 대한 지식과 양태가 자기 이해와 배려에 기반한 것이 아닌 대중매체를 통해 그들에게 일방적으로 주어진 양상들을 모방하는 형태로 형성된다고 본 저서는 지적하고 있다. 본 저서는 한국 대중문화에서 주류적으로 재현된 소녀의 표상의 허구성과 남성중심성을 밝혀냈다는 점에서 매우 의미 있는 내용을 담고 있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본 저서에 대해 첨언하고 싶은 부분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 본 토론에서는 한국사회를 살아가는 이십대 초반의 여성으로서, 그리고 청소년기부터 청소년운동에 몸담아온 활동가로서, 특히 십대섹슈얼리티인권모임에서 여성 청소년의 성적 권리를 주제로 활동해온 사람으로서 <우리시대 대중문화와 소녀의 계보학>을 비평하고자 한다.

 

0. 소녀, 누구인가?

 

본 저서에서는 전반적으로 ‘소녀’를 십대 여성과 동의어로 사용하고 있는 것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소녀라는 용어가 현대 시기에 이르러서는 9세 이상 19세 미만 여성을 이르는 것으로 법률적으로는 규정되었으나 초중고대학생 여성을 아우르는 용어로 사용되기도 하고, 연령과 상관없이 소녀적 특성을 가진 여성에게 소녀라는 명칭을 붙이는 경우도 있다고 서두에 밝힌 부분이 있으나, 전반적으로 본 저서에서 소녀의 주체성이 필요함을 역설할 때 이는 십대 여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읽을 수 있었다. 그러나 대중문화에서 어떤 소녀상이 재현되어왔는가에 대해 서술한 부분들에서는 그 소녀가 십대 여성만을 의미하는지, 혹은 보다 광범위한 범주인 젊은 여성을 의미하는지, 혹은 여성 재현 전반의 맥락에서 파악하는 것인지 모호한 부분들이 있었다. 이를테면 대중문화 속 걸그룹 비평에서 현아가 청소년기본법상 24세 이하이므로 청소년에 해당된다고 소녀의 범주로 놓는데, 만약 소녀를 정치적, 시민적 권리를 박탈당한 미성년의 여성으로 정의하는 경우 현아는 소녀에 해당할 수는 없을 것이다. 청소년운동에서 청소년의 범위에 대한 고민이 있어왔지만 나이를 이유로 정치적, 시민적 권리를 박탈당하는 계층인 청소년의 인권을 주장한다는 측면에서 20세 이상, 만 19세 이상의 권리를 청소년운동의 의제로 놓기는 어렵다는 쪽으로 합의되고 있다(24세 이하 20대가 청소년으로 명명되는 때는 권리를 제약당할 때가 아니라 할인 혜택이나 복지 수혜의 순간인 경우가 많다). 소녀시대 또한 본 저서에서 비평한 <Oh!> 활동 당시와 그 이후에는 전 멤버가 20대였으니 청소년은 아니었던 셈이다. 이효리의 경우도 <10 minutes> 활동 당시 20대 중반이었다.

물론 대중문화에서 걸그룹 표상은 해당 인물의 나이와 상관없이 소녀의 재현으로 해석할 수 있는 부분이 있고, 십대를 포함한 대중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으므로 무조건 분석에서 제외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소녀의 범위를 보다 명확히 정의하고 일관된 용어사용이 필요하다는 문제의식은 있다. 미성년자로 취급되는 사람과 성년으로 인정받는 사람이 이 사회에서 누릴 수 있는 권리와 받는 대접에는 심각한 간극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십대에서 20대 초중반의 여성들이 어린 여자로 비슷하게 받는 취급이 존재하지만, 그러한 맥락에서 분석하더라도 그들 집단을 어떻게 명명할지에 일관성이 필요할 것이다.

나이가 십대인 여성 연예인들이 재현되는 방식이 아니라 ‘소녀성’ 혹은 여성 청소년에 대한 관념이 주류 대중문화에서 재현되는 방식을 분석하는 것도 유의미한 작업이다(본 저서에서도 드라마와 영화에 대해서는 후자의 분석이었다). 20대인 걸그룹들도 청소년의 상징인 교복을 입고 공연을 하거나 뮤직비디오를 찍는 경우가 많은데, 이들이 성인임에도 교복을 입게 되는 이유, 교복을 입은-십대인 척 하는-걸그룹이 대중과 이른바 삼촌팬에게 어필하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우리 사회에서 십대 여성들이 어떤 존재로 취급받고 있는가와 연관 지어 분석해도 좋을 듯했다. 이효리의 경우 <10 minutes>이나 <유고걸> 보다는 자신을 억압하는 부모에게 복수하고 붉은 립스틱을 아무렇게나 바른 채 카메라를 노려보는 여자 어린이와, 학생을 체벌하고 추행하는 교사를 골탕 먹이고 학생들을 선동해서 교실을 난동과 파티의 장으로 만드는 여학생이 등장하는 <Bad girls> 뮤직비디오를 분석하는 것이 대중문화 속 대안적 십대 여성상의 표상으로 해석하는 데 적합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1. 소녀를 분석하기 위해서는 청소년에 대한 분석도 필요하다

 

다중적 소수자 집단이 모두 그렇겠지만, 여성 청소년의 문제는 여성문제, 혹은 청소년문제 중 하나로 환원될 수 없다. 여성 청소년은 ‘청소년’인 여성이기에 이 사회에서 여성에게 가해지는 폭력과 차별을 극대화된 형태로 경험하기도 하고, ‘여성’인 청소년이기에 청소년에게 가해지는 폭력과 차별을 극대화된 형태로 경험하기도 한다. 여성 청소년이 겪는 문제는 비청소년 여성이 겪는 것과도 다르고 남성 청소년이 겪는 것과도 다른 지점들이 있다.

 

여성 청소년을 둘러싼 사회적 맥락의 변천을 살피기 위해서는 이 사회가 청소년을 어떤 존재로 대우하고 재현해왔는지, 그 속에서 청소년의 실천들은 무엇이 있었는지에 대한 분석이 반드시 필요하다. 소년을 민족해방을 위한 주체로 여기는 민족주의자들의 시선은 유효성을 잃었고 오히려 황국신민으로 길러내고 우량아를 선발하고 아동을 보호/애호하자고 외쳤던 일제의 시선을 근대 남한은 계승하였다. 근대 국가의 청소년에 대한 관념과 정책에서 기본적으로 남성 청소년을 전제한 것은 명확하지만, 소녀 서사도 이러한 청소년 전반의 문제와 분리되지 않고 동시에 연관되어 변화해온 것이다. 오늘날 청소년은 미디어와 언론에서 위험한 존재로-무서운 십대들, 병적인 존재로-사춘기, 중2병, 게임중독자 등, 미성숙하고 무능력한 존재로 재현되고 있다. 청소년의 지위와 재현의 연관성 속에서 여성 청소년의 문제를 논의하지 않으면 간과하는 부분이 생길 수밖에 없다.

 

2. 실제 소녀들은 어떻게 사는가?

 

많은 여성주의자들이 성 상품화와 외모지상주의를, 특히 청소년이 접하는 성 상품화와 외모지상주의를 우려하고 있다. 교복 광고에 걸그룹을 모델로 삼는 것이라든지, 화장품 광고를 십대 여성을 타겟으로 하는 일 등에 대해 비판하는 목소리가 적지 않다. 하지만 이런 사안은 한 가지 관점으로만 볼 일은 아니다. 첫 번째로 여성에게 특정한 외모를 갖출 것을 요구하고 외모지상주의를 조장하는 문화의 측면에서 볼 수 있고, 두 번째로 자본주의 하에서 청소년 소비자에게 팔 수 있는 상품을 생산하고 청소년을 타겟으로 광고가 이루어지는 측면에서도 분석할 수 있다. 그리고 세 번째로는 ‘학생다운’ 용의를 강요하는 학교와 청소년의 외모 꾸미기를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사회적 시선을 비판하는 관점으로도 접근해야 한다. 이 가운데서 여성 청소년들은 특정한 외모를 갖고 싶은 욕망을 가진, 또 여자라면 외모가 어떠해야 한다는 사회적 압박을 받는 여성으로 성장한다. 그러면서도 외모를 꾸미고 싶은 욕망을 억압하는 학교를 다녀야 하고, 외모를 꾸민다는 이유로 어른의 얼굴을 한 사회의 눈초리를 견뎌야 한다. 용돈과 알바비를 모아 화장품을 샀는데 화장을 한다는 이유로 학교에선 벌점을 받고 화장품을 뺏기는 상황, 알바를 하거나 친구들과 만날 때는 화장을 하지 않는다고 핀잔을 듣는 상황이 여성 청소년의 상황이다. 그렇기에 여성 청소년의 외모 꾸미기는 성인 여성의 그것과 똑같은 관점으로 분석해서는 안 된다. 여성 청소년에게 외모 꾸미기란 순응이면서도 저항이고, 개인적인 취향의 실천이면서도 사회적 메시지를 던지는 행위다.

 

문화적으로 표상되는 상과 실제 사람들의 삶 내지는 실천을 뒤섞어서 동일시하는 경우 놓치는 부분들이 생기기 쉽다. 가령 본 저서에서는 주류적 대중문화에서 소녀가 어떻게 표상, 생산, 소비되는지를 보여주지만, 실제로 촛불집회 등 여타 정치적 순간에 ‘소녀’라고 할 수 있는 여성-유청년들의 실천이나 행동은 구체적으로 다루어지지 않고 주류 대중문화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것처럼 묘사가 되는데, 과연 그러한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본 저서에서 다룬 최근의 대중문화는 주류 드라마와 영화, 대중가요에 해당하는데, 자본에 의해 의도적으로 기획되고 생산되는 대중문화는 아니지만 대중에게 통용되는 문화까지 포함하여 대중문화를 정의한다면 보다 다룰 수 있는 범위가 넓어진다. 이를테면 각종 집회시위와 정치의 장에 등장하는 여성 청소년들은 어떤 요구를 하고 있으며 그들을 언론과 미디어는 어떻게 재현하는가, 그리고 대중은 그들을 어떤 존재로 바라보는가에 대해 분석할 수 있다. 현재 많은 여성 청소년들이 읽고 쓰는 팬픽을 대중문화의 한 부분으로 다룬다면, 남녀 간, 남성 간, 여성 간 로맨스와 섹스에 대해 그들이 어떤 관념과 환상을 공유하고 생산해내는지를 분석할 수 있을 것이다. 청소년 ‘여덕’들의 존재에 초점을 맞춘다면 자본이 각계각층의 요구에 부응할 수 있도록 어떤 측면에서는 획일적이면서도 또한 다양한 대중문화 상품을 생산해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고, 남/녀 아이돌 그룹에 대한 그들의 열정과 다양한 팬 활동에서 드러나는 일종의 성적 주체성을 발견할 수도 있을 것이다. f(x), 레드벨벳 등은 여덕이 많은 대표적인 걸그룹이다. 그들 걸그룹도 대체로 가부장적 미의 기준에 부합하고 남성중심적인 이상적 소녀상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는 한계를 보이기도 하지만, 여성 청소년을 포함한 여성들이 그녀들에 열광하는 것은 단지 가부장제가 요구하는 이상적 소녀상을 주입 당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3. 대안적 소녀문화의 장은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가?

결국 소녀들에게 필요한 것은 그 여성 청소년 개개인이 신체에 일어나는 변화를 이해하고 정신적·심리적으로 여성으로 살아가야 하는 미래를 준비(그녀들은 이미 여성으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나는 준비라는 단어에는 동의하지 않는다)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라고 본 저서는 제시하고 있다. 여성 청소년들이 롤모델로 삼기에 바람직한 대중문화의 소녀 재현(분노하는 소녀)의 등장이 필요함을 역설하고 있기도 하다. 그 필요성에 반대하는 것은 전혀 아니나, 여성 청소년들이 무력화되고 주류 대중문화가 남성중심적인 소녀상을 제시하는 것은 현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라는 것, 그리고 그 구조를 바꾸기 위해서, 여성 청소년이 개인의 자질로써 주체성을 갖추기 위해서는 조직화된 청소년의 실천과 투쟁이 필요함을 이야기하고 싶다.

가령 본 저서에서 대안적인 소녀 재현의 예로 이야기하고 있는 이효리의 경우, 이효리는 가장 해방적으로 자신을 재현하는 순간에도 결국 자유주의적인 개인으로 자신을 묘사하고 있다. 대중문화에 등장하는 어느 아이콘이 대중적 움직임을 불러일으키는데 계기가 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여성 청소년들이 어떤 정도로든 조직화된 힘으로 목소리를 내고 변화를 만들어낼 힘을 갖지 못하는 상황이라면 어떠한 아이콘이 등장하더라도 유의미한 대중적 움직임을 만들기는 어려울 것이다. 자본에 의해 주류 대중문화 상품이 기획되고 생산되는 이상, 그리고 청소년이 경제적 독립성을 갖지 못하고 부모와 국가의 부양과 호의에 기대어 살아갈 수밖에 없는 구조가 변하지 않는 이상 주류 대중문화가 여성 청소년 친화적으로 변화하지는 않을 것이다. 본 저서에서 서론과 결론에 대안으로 제시하는 것은 여성 청소년의 자율적 민주시민으로서의 역량 강화인데, 자율적 민주시민으로서의 역량이란 결국 개인의 역량이라기보다는 사회구조가 누구에게 시민됨을 허용하고 있는가에 달린 문제이다. 그렇기에 여성 청소년들은 자율적 민주시민의 역량을 가지기 이전에 먼저 뭉치고 연대하고 투쟁하는 주체가 되어야 한다. 청소년운동을 하는 활동가의 입장에서는, 여성 청소년 개개인을 자유주의적 주체로 교육시키는 기획이나 주류 대중문화에서의 대안적 롤모델 제시보다 청소년을 경제적/정치적 무능력자의 위치에 놓이게 하고 여성 청소년의 몸과 성을 억압하는 학교와 사회를 조직화된 청소년의 힘으로 바꾸어내기 위한 정치적 전망을 만들어내고 싶은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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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07 19:26 2016/08/07 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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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주의와 청소년인권] 우리 사회의 청소년혐오

 
쥬리
 
 
 
‘청소년혐오’, 아마 당신이 처음 들어보는 말일 것이다. 소수자 집단에 대한 사회적 대우를 명명하는데 사용하는 용어로는 혐오, 차별, 배제, 폭력, 낙인 등이 있다. 모든 소수자 집단이 혐오와 차별과 배제와 폭력과 낙인을 겪고, 이 용어들의 의미는 종종 중첩되지만, 집단에 따라 그 양상이 미묘하게 다르다. 특히 어떤 집단에 대한 어떠한 대우는 특정한 용어로 명명하는 것이 더 적절하거나 그 본질을 드러내는 데 더 효과적일 수 있다. 청소년에 대한 사회적 대우가 ‘혐오'로 명명되어 분석된 적이 아직 한국에서는 거의 없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 분명히 존재하는, 청소년을 비하·경멸하고 공포스러운 타자로 간주하는 문화는 청소년혐오로 해석되어야 한다. 청소년에 대한 비하와 경멸은 일상에서 만연하게 드러나며 청소년의 권리를 제한하는 제도를 정당화한다. 청소년을 공포스러운 타자로 간주하는 문화는 청소년이 저지른 범죄에 유독 나이를 강조하여 ’무서운 십대들‘이라고 수식하는 언론, 청소년을 통제하기 위해 폭력적인 방식을 도입해야 한다는 주장들, 청소년이 길에 모여만 있어도 무섭다고 반응하는 사람들의 인식 속에서 드러나고 재생산된다. 이 글에서는 청소년혐오라는 용어를 소개하고, 현재 온오프라인에서 청소년을 지칭하는데 사용되는 혐오어와 체벌을 중심으로 청소년혐오 현상을 간략히 분석해보려고 한다.

청소년혐오, 'Ephebiphobia'

청소년운동에 대해 공부하고 이론화 작업을 하는 '청소년운동 우물모임'에서는, '성인중심주의(Adultism)'에 맞선다고 스스로를 소개하는 미국의 단체 'The Freechild Project'에서 발간한 자료들을 함께 읽었다. 그 중 ‘Ephebiphobia’에 대해 설명하는 자료가 있었다. Freechild Project는 ephebiphobia를 아동 및 청소년에 대한 공포로 정의하고, 미디어와 정치, 그리고 학교 현장 등에서 만연한 아동 및 청소년에 대한 전사회적 공포를 총칭하는 용어로 사용한다. 이는 아동과 청소년에 대한 고정관념을 기반으로 하여 거대 미디어가 아동과 청소년을 (부정적으로) 묘사하는 방식을 통해 강화된다고 그들은 설명한다.

Freechild Project는 이 ephebiphobia가 민주주의, 사회문화, 교육, 그리고 경제에 영향을 미친다고 주장한다. 민주주의의 측면에서는 청소년의 참정권을 부정하고 공동체의 의사결정에서 배제하는 것, 정치인이나 정치 조직에서 청소년의 권리를 대변하지 않는 결과가 나타난다. 사회문화적 측면에서는 청소년을 악마화(demonize)하는 현상, 가족 안에서 부모가 청소년 자녀와 자녀의 친구들에게 공포를 느끼는 현상 등으로 결과가 나타난다. 교육의 측면에서 의무교육제도, 체벌, 학교에서의 나이(학년)구분은 ephebiphobia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설명한다. 19-20세기 많은 청소년들이 일자리를 찾지 못하고 거리에서 시간을 보내자, 그들에게 공포를 느낀 사회와 어른들이 학교를 의무화하여 청소년이 낮 시간동안 거리에 모여 있지 않도록 만들었다는 것이다. 다양한 연령의 청소년들이 서로 소통하고 협력하는 것을 두려워한 결과가 나이(학년)구분이라고도 설명한다. 경제 측면에서는 청소년이 의미 있는 직업을 가질 수 없도록 하는 구조, 가게들이 ‘보호자 동행 없이 18세 미만 출입 금지’ 간판을 내거는 현상, 청소년이 거리에 많이 보이는 동네를 어른들이 피하는 바람에 상권이 변화하는 현상도 ephebiphobia의 결과라고 말한다.

우물모임에서는 위 자료를 읽고 한국 사회가 청소년을 대우하는 방식을 ephebiphobia 개념을 차용해 분석하는 것이 유의미하며, 한국에서도 미국과 비슷한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고 판단했다. 우리는 ephebiphobia를 청소년혐오로 번역했다. -phobia는 개인의 병리적인 공포증과 사회적 혐오 현상을 설명할 때 모두 쓰이지만, 비슷하게 –phobia의 결합어인 호모포비아의 경우 한국의 맥락에서는 ‘공포증’보다는 ‘혐오’로 번역되는 것이 적절하고, 실제로도 동성애 혐오나 성소수자 혐오로 번역되어 쓰인다. 공포증으로 번역하였을 때는 폐소공포증이나 첨단공포증처럼 개인의 병리적 증상을 나타내는 뉘앙스가 강해, 그것이 일부 개인의 문제가 아닌 전사회적 현상이라는 맥락이 옅어질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청소년 혐오어의 등장과 확산

다음의 말들을 들어 본 적이 있는지 생각해보고, 어떤 뜻일지 짐작해보라.
1. 급식충
2. 등골브레이커
3. 중2병

위 세 가지 단어는 최근 온오프라인에서 청소년을 지칭할 때 흔히 쓰이는 말들이다. 언어로 드러난 혐오만이 혐오의 전부는 아니지만, 혐오현상을 진단하는 데 특정 집단에 대한 어떠한 용어들이 통용되는가를 지표로 삼을 수 있다. 이 글에서는 위 세 가지 단어를 중심으로 이 사회가 청소년을 어떤 존재로 간주하고 혐오하고 있는지 살펴보려고 한다.

급식충, 너넨 무상급식 먹을 자격 없어!

급식충은 ‘급식’ ‘충(벌레)’의 결합어이다. 급식을 먹는 초․중․고 학생을 경멸하는 말이면서, 무상급식의 맥락에서 (사회에 기여도 안 하면서) 복지의 수혜를 받는 집단이라고 청소년을 비하하는 말이기도 하다. 중학생은 ‘중급식충’, 고등학생은 ‘고급식충’으로 이르기도 한다. 무상급식 먹을 자격 없다는 맥락에서 청소년을 급식충으로 부르기 시작한 것은 비교적 최근이지만, 이전에도 청소년을 사회에 기여하지 않는, 그러면서 특혜를 누리거나 의무를 면제받는 존재로 간주하는 인식은 만연했다. 형사처벌의 감경을 특권으로 묘사하며, 청소년이 그 특혜를 누릴 자격이 없음을 주장하는 것은 주로 청소년이 위법한 행위를 했을 때 대중이 분노하는 방식이다. 뿐만 아니라 형사처벌의 감경을 근거로 청소년은 ‘책임을 다하지 않으므로’ 성인과 동등한 권리를 주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 성립하기도 하는데, 청소년의 참정권을 논할 때도 성인과 동등하게 처벌받지 않는 존재가 참정권을 가질 자격이 있냐는 반응이 되돌아오는 식이다.

부모님 등골 빼먹는 등골브레이커들

(부모의)등골을 부수는 존재라는 의미의 ‘등골브레이커’도 청소년을 지칭할 때 자주 사용된다. 이 말은 모든 청소년이 부모의 부양에 의존해서 살아간다는 편견에 기댄 말이기도 하면서, 청소년이 부모의 부양에 기대어 살아가게끔 만드는 사회구조를 비판하는 대신 청소년을 기생하는 존재로, 기생하면서 고마움도 모르는 배은망덕한 존재로 비하하는 말이다. 청소년의 소비와 관련해서 이 말이 자주 사용되는데, 청소년이 입시공부와 관련 없는 소비-옷, 화장품, 신발 등-를 할 때면 ‘등골브레이커’라는 딱지가 붙는다. 여성의 소비를 사치로 간주하고 남자의 돈으로 그것을 샀을 것이라 간주하며 비난하는 것과 비슷한 메커니즘이 청소년의 소비에 대해서도 적용되는 것이다.
 
위 사진:2014년 '취재파일K'라는 시사프로그램에서 중2병이 교실과 교사를 힘들게 하고 있다고 방송을 함.

중2병을 치료하자?!

중2병은 비교적 예전부터 흔히 사용되어온 말이다. 초기에는 주로 남들이 공감하지 못하는 지나친 진지함이나 ‘오글거리는’ 말과 행동을 지칭하는 데 쓰였다. 하지만 점차 그 의미가 약간 변질되어 쓰이기 시작하는데, 초기의 의미에 더해 부모나 교사에 반항하거나, 우울하거나 염세적인 것, 성적 호기심을 가지는 것, 감정적으로 행동하는 것, 공부를 안 하는 것 등 매우 포괄적인 언행에 중2병이라는 딱지를 붙이기 시작한 것이다. 이 단어는 은어처럼 쓰이던 단계를 지나 현재는 각종 언론, 심지어는 공공기관이 개최하는 강의명에도 쓰이고, 교육감 후보의 공약에서도 활용되는 단어가 되었다. 하지만 중2병이라는 병은 없다. 의학적으로 실증되지 않은 병인데도 이 단어가 무분별하게 사용되며 청소년 집단을 병리화하고 있는 상황은 청소년혐오를 이 사회가 얼마나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는가를 방증한다.

체벌의 혐오범죄적 특성

혐오범죄는 소수자집단에 대한 혐오를 기반으로, 소수자집단 전체를 위축시키려는 명시적이거나 암묵적인 의도를 가지고 소수자집단에 속한 특정 개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범죄이다. 혐오범죄 가해자가 목표하는 바는 무엇일까. 가장 큰 목표는 해당 소수자집단이 위축되거나 사라지는 것일 테지만, 자신이 마주한, 구체적인 개인으로 드러난 피해자에 대하여 목표하는 바도 있을 것이다. 짐작컨대 ‘~로서 ~하면 안 된다’는 교훈을 주거나,‘ ~하는 행동이나 특성을 고치도록 만드는 것’일 것이다. 흡연하는 여성에 대한 구타는 여자가 길거리에서 건방지게 담배를 피우면 안 된다는 교훈을 주고 싶다는 욕망을 기반으로, 레즈비언을 대상으로 하는 ‘교정강간’은 성적지향을 고쳐놓고자 하는 목표 의식적으로 행해진다. 

여기서 우리는 체벌의 혐오범죄적 특성을 파악할 수 있다. 체벌은 청소년으로서 ‘~하면 안 된다’는 교훈을 주기 위해, ‘~하는 행동이나 특성을 고치도록’ 만들기 위해 목표 의식적으로 행해진다(물론 단순히 분풀이를 위해 행해질 때도 많지만, 그렇더라도 청소년을 위축시키려는 의도는 관철된다). 때로는 청소년 집단이 특정 청소년이 체벌당하는 것을 목격하게 함으로써 집단 전체가 위축되도록 하는 의도를 달성하기도 한다. 교사가 굳이 반 전체 학생이 보는 앞에서 특정 학생을 체벌하는 것은 한 명을 때리지만 그 위축감을 반 전체 학생들이 공유하기를 바라기 때문에, 그래서 그 반의 학생 모두가 자신의 권위에 도전하지 않고 고분고분해지기를 욕망하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체벌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명확한 이유 없이 감정적으로 행해지는 체벌만이 문제라고 말한다. 그러나 체벌과 혐오범죄의 가장 극명한 형태는 오히려 뚜렷한 목표를 갖고 행해지는 형태이다. 체벌은 비청소년에 의해 (어린이) 청소년에게 행해진다는 점에서, 그리고 앞서 밝힌 그러한 특성들을 갖추고 있다는 점에서 부모-자식, 교사-학생, 비청소년-청소년 간의 권력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구조적으로 발생하는 혐오범죄적 특성이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

청소년혐오, 앞으로의 이론화 작업

청소년혐오는 청소년 억압을 정당화하는 데 근저에 깔린 사회적 감정이며, 나이에 따라 권리와 자원을 차등 배분하는 나이주의의 양상이다. 지면상 이 글은 청소년혐오 현상에 대해 몇몇 혐오어들과 체벌을 중심으로 설명하는 데 그쳤지만, 앞으로 청소년운동에서는 우리 사회의 맥락에서 청소년혐오의 내용을 채우고 그 개념을 활용하여 사회현상을 분석해나가는 작업을 진행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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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05 02:11 2016/08/05 0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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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등한 민주주의의 봄을 바라는 청소년 참정권 요구 선언

 


올봄, 축제가 열린다. 피어나는 봄꽃들과 사람들의 소망들이 어우러져 열리는 그 축제는, 우리 사회의 방향을 결정하고 함께 지킬 법을 만들 사람들을 정하기 위한 것이다. 바로 2016년 4월 13일 제20대 총선이다. 그렇다. 우리는 흔히 선거를 가리켜 민주주의의 축제라고 한다. 그러나 그 축제에 참가 자체를 불허당한 사람들이 있음을 잊지 말라. 바로 19세 미만의 청소년들이다.

 

 

어른들만의 정치, 배제된 청소년들

 

19세 미만의 청소년들은 선거권이 없다. 피선거권도 없다. 그런데 ‘표’가 없는 걸로도 모자라서 선거철만 되면 ‘입’과 ‘손발’조차 묶이게 된다. 청소년은 선거운동을 할 수 없다는 선거법에 따라서 후보나 정당에 대해 지지하거나 반대하는 의견 표시를 하는 것조차 불법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어느 후보의 공약이 청소년들을 위해 바람직한 것 같으니 뽑아달라는 호소조차도 위법이 되고 선거관리위원회로부터 고발을 당한다.

그뿐만이 아니라, 법적으로 청소년은 정당에 가입할 수 없다. 자신의 생각이나 정치적 의견에 따라 정당에 가입하고 활동할 수 있는 결사의 자유조차도 부정당하고 있는 것이다. 청소년은 ‘미성숙’해서 정치적 의견을 가져서는 안 된다는 반민주주의적이고 반인권적인 편견만이 이러한 법을 변호하는 유일한 근거이다.

선거와 정당만의 문제가 아니다. 청소년들은 일상 속에서도 정치로부터 눈을 돌리고 입을 다물 것, 그리고 삶의 온갖 결정들에 참여를 금지당하며 명령에 따르기만 할 것을 요구받는다. 학교는 학생들의 생활에 관한 각종 규칙과 사안들을 정하면서 학생들의 참여를 보장하지 않는다. 심지어 학교의 일에 대해 뜻을 모아서 의견을 전달하는 이들이나 학교의 문제점을 학교 밖에 알린 이들은 ‘선동’을 했고 ‘학교 명예를 훼손’했다며 징계를 당할 위험에 처한다.

청소년들이 우리 사회의 문제들에 대해서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하고 거리에서 행동하고자 한 적이 여러 번 있었다. 그때마다 정부는 청소년들이 말하고 행동하지 못하게 ‘지도’하라고 학교에 지시했으며, 학교들은 때로는 징계로 때로는 비공식적인 압박과 폭력으로 청소년들을 막아섰다. 많은 언론들은 청소년들에게 집회‧사상‧표현의 자유를 보장하자는 것을 무조건적으로 반대하는 사설들을 부끄러움도 없이 쏟아냈다. 경찰 등 행정기구들도 청소년의 집회‧결사의 자유를 위축시키고 침해한 일이 적지 않다. 우리 사회는 청소년을 민주주의 바깥으로 내몰고 지시에 따르기만 하고 돌봄을 받기만 하는 위치에 묶어놓는 것에 아무런 주저함이 없었다.

 

 

말할 수 있는 권리를

 

오랜 시간 동안 청소년들은 대한민국의 역사를 함께 만들어왔다. 그리고 많은 청소년들은 비록 나이가 적더라도 청소년도 이 사회를 함께 살아가는 민주시민임을 인정하고 참정권을 보장할 것을 요구해왔다. 청소년들로부터 시작된 4.19혁명의 결과 선거권 제한 연령은 20세가 되었고, 청소년들도 함께한 87년 민주화운동과 2000년대에 이어진 청소년들의 ‘18세 선거권’ 운동의 결과로 이는 다시 19세가 되었다.

그러나 반복해서 국회와 법원의 문을 두드리고 있는 청소년들은 여전히 선거권은 물론이요, 표현의 자유나 결사의 자유조차도 짓밟히고 있다. 헌법재판소는 "정치적 판단능력이 미약", "정신적‧신체적 자율성이 불충분"하다는 언사와 함께 청소년의 인권을 부정했다. 국회의원들은 선거권 제한 연령의 문제를 민주주의가 아닌 표의 유불리 계산 문제로나 보고 있고, '18세 선거권'을 거론하여 우리가 일말의 기대를 가지게 했던 때조차도 "고등학생은 제외"한다는 등 청소년을 따돌리는 타협안을 논의하고 있는 형편이다. 정부는 국제인권법과 국제인권기구의 권고도 무시하고 학교나 경찰 등을 통해 청소년의 정치적 권리 행사를 방해하기 일쑤이다.

그 결과, 2016년의 총선에도 청소년들은 없는 취급을 당하고 있다. "청소년‧아이들"을 명분으로 삼는 표어는 많지만 청소년과 함께하는 정치, 청소년이 참여하는 정치는 없다. 우리도 함께 말하고 싶다. 우리의 말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하라.

봄은 이 땅의 사람들에게 평등하게 왔지만, 민주주의의 봄과 축제는 청소년들에게는 남의 이야기일 뿐이다. 봄이 왔으나 봄 같지가 않은 우리는, 제20대 총선을 맞이하여 다시 한 번, 우리를 따돌리는 정치의 현실을 고발하고, 평등한 민주주의를 바라며 청소년의 참정권 보장을 다음과 같이 요구한다. 또한 청소년들의 참정권 보장을 지지하는 이들 역시 이에 함께한다.

 

1. 선거권과 피선거권 등의 제한 연령을 낮춰서 청소년들도 참여할 수 있게 하라!

1. 나이에 상관없이 선거운동의 자유, 선거기간의 지지와 비판 등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라!

1. 청소년이 자신의 뜻에 따라 정당에 가입하고 활동할 자유를 존중하라!

1. 학교와 국가 등에 의한 청소년들의 정치적 발언과 활동에 대한 탄압을 금지하라!

1. 청소년을 민주시민으로 인정하고 모든 시민적·정치적 권리를 보장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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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05 02:09 2016/08/05 0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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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성명]

'술은 들어가지만 청소년은 들어갈 수 없는'
- 퀴어문화축제의 19금 애프터파티에 대하여

 

지난 6월 11일, 서울광장에서 퀴어문화축제가 열렸습니다. 퀴어문화축제는 이 사회의 성소수자들에게 각별한 의미가 있는 날입니다. 그러나 올해도, 퀴어문화축제의 애프터파티는 19금으로, 청소년의 참여가 제한되는 파티로 진행되었습니다.

지난 몇 년간, 퀴어문화축제가 모두의 축제일 수 있기 위해 축제의 일부인 애프터파티에도 청소년이 배제되지 않아야 한다는 문제제기가 있어왔습니다. 그런데 올해도 파티는 비청소년들만의 잔치였습니다. 심지어 올해의 파티 장소였던 세빛섬은 현행법상 청소년출입이 불가한 공간이 아닌데도 청소년은 입장을 거부당했습니다.

파티에서 술을 판매하기 때문에 법적인 처벌을 받을 위험이 있어 청소년의 참여를 배제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비청소년들끼리 술 마시는 것이 청소년의 참여를 보장하는 것보다, 소수자가 배제되지 않는 장을 만드는 것보다 중요한 가치인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현행법을 어길 수 없다면 술을 판매하지 않더라도 청소년의 참여를 보장해야 한다는 이야기는 몇 년째 있어왔습니다.

예전에는 퀴어문화축제 주최의 애프터파티로 비청소년만이 들어갈 수 있는 파티를 열고 따로 청소년이 들어갈 수 있는 파티를 연 적도 있었습니다. 청소년이 들어갈 수 있는 파티는 술을 판매하지 않고 밤 10시에 마감을 했고, 비청소년만이 들어갈 수 있는 파티는 새벽까지 운영하며 술을 판매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방식도 평등한 참여를 보장하는 방식은 아닙니다. 비청소년의 입장에서는 여러 파티 중 하나를 골라 가면 될지도 모르지만, 청소년은 그렇지 않기 때문입니다. 가장 많은 돈을 들이고 홍보를 하는 파티가 비청소년만이 들어갈 수 있는 파티였다는 점에서, 청소년들은 우리는 따로 놀라는 건가 하는 느낌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많은 성소수자 커뮤니티들이 청소년의 참여를 거부하고 있습니다. 이는 성소수자운동 안에서도 비청소년이 중심이 되기에 청소년들을 잘 고려하지 못하는 문제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지만, 청소년들이 성에 대한 정보를 접하는 것을 금기시하며 이를 성소수자들을 비난하는 핑계거리로 들곤 했던 혐오의 역사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기도 합니다. 이런 상황의 책임은 물론 성소수자를 차별하고 청소년이 성적 지향이나 정체성에 대해 정보를 접하는 것조차 금기시하는 청소년 차별적인 국가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기에 더욱, 이런 비난과 규제를 넘어 청소년 성소수자들도 평등하게 인권을 보장받기 위해서는, 청소년들이 더 많이 퀴어문화축제를 포함한 성소수자들의 커뮤니티와 행사에 참여할 기회를 보장해야 합니다. 그리고 청소년들 중에도 성소수자가 있는 것, 청소년들이 성소수자와 성에 대해 알고 이야기하는 것이 당연한 권리임을 성소수자 커뮤니티 안팎으로 보여주고 말해야 합니다. 우리는 성소수자 운동이 청소년들의 처지와 현실에 관해 이런 점을 특별히 더 고려해서라도 청소년이 배제되지 않는 행사 진행에 신경쓰길 바랍니다.

이 사회는 여러 소수자들을 다양한 방식으로 차별하고 배제하며, 때로는 법과 제도를 통해 그 차별과 배제를 공고히 합니다. 더 나은 세상을 위해 싸우는 사람들의 공간에서, 성소수자를 배제하지 않고 성적 다양성을 존중하는 것이 '기본'이어야 하는 것처럼, 성폭력이 발생하지 않도록 다 함께 노력하고 성인지감수성을 키우기 위한 계기를 마련하는 것이 ‘기본’인 것처럼, 청소년을 배제하지 않는 것도 이 운동사회에서 ‘기본’으로 여겨지기를 바랍니다.

 

2016.06.25

 

관악청소년연대 여유 / 노원청소년인권동아리 화야 / 십대섹슈얼리티인권모임 / 청소년사회동아리 발걸음
 /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 청소년 정의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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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05 02:08 2016/08/05 0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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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평]
강요와 금지를 벗어난, 인권친화적 학교와 수업이 가야 할 길이다
- 국가인권위원회의 학생의 휴대전화 사용 보장 권고에 대하여

 



지난 6월 국가인권위원회가 학교에서 학생의 휴대전화를 금지·압수하는 문제에 대해 권고를 발표했다. 국가인권위원회는 휴대전화 사용을 완전히 금지하는 학교 규정이 “행복추구권에 바탕을 둔 일반적 행동의 자유와 제18조 통신의 자유를 침해한다고 판단”했다고 밝히며, 피진정 학교들에 학교 구성원의 의견을 반영하는 절차를 거쳐 제한을 완화할 것을 권고했다. 인권친화적 학교+너머 운동본부는 국가인권위원회가 학생의 휴대전화 소지 및 사용에 관해 이것이 인권의 문제임을 확인한 것에 대해 환영하는 바이다. 그리고 국가인권위의 권고 내용 이상으로, 인권친화적 학교 문화를 만들어가기 위해 더 많은 개혁과 노력이 필요하다는 점을 역설하고자 한다.

시의적절하지만 만족스럽진 못한 인권위 권고 내용

인권친화적 학교+너머 운동본부는 지난해 ‘불량학칙 공모전’이라는 이름으로 학교 현장의 잘못된 학교 규칙과 관행들에 대해 공모를 받았던 적이 있다. 이 당시에 많은 제보가 있었는데, 그 중 ‘지각시 휴대전화 압수’, ‘종례 이후에 휴대전화를 사용해도 벌점과 압수’, ‘다른 학생이 휴대전화를 쓰는 것을 신고하면 상점’ 등 휴대전화 금지 및 압수에 관한 내용도 다수였다. 이러한 사례들은 서울과 전북 등 휴대전화 소지 자체를 금지해서는 안 된다고 명시한 학생인권조례가 시행되고 있는 지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국가인권위원회가 휴대전화에 대한 금지 등이 인권침해임을 인정한 것은 학생들의 현실에 맞는 시의적절한 입장 표명이라 평가한다.

휴대전화의 소지 자체를 원천 금지하는 것은 과한 권리 제한이며, 함부로 휴대전화를 압수하거나 일괄 수거하는 관행과 학칙 역시 여러 문제를 낳고 있다. 국가인권위의 권고 내용은 휴대전화 소지를 완전히 금지하지는 말고 학교 구성원의 의견을 반영하는 절차를 거쳐 만든 학교 규칙에 따라 필요할 경우 휴대전화 사용만을 제한하라는 취지로 풀이할 수 있다. 교육부와 교육청, 학교는 권고를 수용하여 이러한 학교 규칙과 관행을 없애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또한 교육 주체들 역시 학교에서의 학생 휴대전화 금지에 대해 성찰하고 인식을 달리 해야 할 것이다.

사실 이번 국가인권위의 권고는 2007년에 국가인권위가 했던 권고와 별반 다르지 않다. 2007년 1월 국가인권위원회는 휴대전화 소지를 금지한 규정과 학교가 휴대전화를 압수한 행위는 행복추구권, 사생활의 비밀과 자유, 통신의 자유 등을 침해한 것이라고 결정했던 적이 있다. 국가인권위의 이러한 결정들은 국가인권기구로서 가져야 할 당연한 입장이며, 이번 발표 역시 이를 재차 확인한 것뿐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2007년의 권고와 이번의 권고 모두, 인권친화적인 학교를 만들기 위한 종합적 문제의식이 충분히 반영되지 못한 채로, 여전히 학교 현장에서 자의적인 규제와 압수가 벌어질 위험성이 큰 내용이라는 점에서 아주 만족스럽지는 못하다.

 
교육의 본질은 학생의 참여와 자발성이다

교총은 지난 6월 23일, 국가인권위원회의 발표에 대해 “교육 본질 훼손하는 권고를 자제하라”라는 논평을 내며 반발하고 나섰다. 교육의 본질이 학생들의 휴대전화 소지를 금지하는 것이나 체벌이나 일기장 검사에 있다는 교총의 논평 내용은 상당히 충격적이다. 여기에서 드러나는 인권의식 부족도 심각한 문제지만, 한국에서 가장 큰 교원단체의 교육에 대한 인식이 이러하다면 매우 걱정스러운 일이다. 교총이 해당 논평에서 근거로 제시한 것이 교원 중 다수가 학생의 휴대전화 사용으로 수업을 방해 받는다고 답한 설문 결과라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즉 교총이 말하는 ‘교육의 본질’이란 ‘교사가 방해 받지 않고 수업을 진행하는 것’이라는 소리다.

그러나 바로 이와 같은 교육관 자체가 인권친화적 학교를 만드는 데 걸림돌이다. 학생 휴대전화 금지를 둘러싼 문제는 교사가 학생을 통제하고 일방적으로 수업을 진행하는 학교의 현실, 그리고 강요와 금지가 지배하는 학교 규칙과 문화가 낳은 것이다. 많은 학교들의 현실은 어떠한가? 교육과정은 과다하고 어려우며, 학급당 학생 수도 많고, 수업은 시험을 중심으로 진행되며 학생들의 자발적 참여가 아닌 강요에 바탕을 두고 이루어지고 있다. 적지 않은 학생들은 수업 내용을 잘 수용하지 못하거나 학교 교육에서 의미나 재미를 느끼지 못하고 있다. 이런 상황 속에도 수업을 꾸려나가야 하는 교사들과 싫어도 억지로 수업에 참여해야만 하는 학생들 사이의 충돌과 갈등이 휴대전화 문제의 배경에 있는 것이다.

우리가 교육의 본질에 관해 정말로 고민해야 할 것은 휴대전화를 금지할지 여부가 아니라, 학생들이 학교까지 와서 교육 활동에 참여하기보다는 휴대전화를 보는 이유일 것이다. 학생들 중 상당수는 설령 휴대전화가 없더라도 제대로 수업에 참여하지 않을 가능성이 큰 것이 현실이다. 이런 현실을 개혁함으로써 학생들과 함께 교육적인 활동을 만들어 가는 데는 무관심하면서, 교사가 학생의 휴대전화 때문에 방해를 받아서 문제라며 휴대전화를 금지해야 한다고 반발하는 것은 ‘교육의 본질’에 대한 심각한 오해이다.

우리는 학생의 휴대전화를 과도하게 규제해야만 운영될 수 있는 학교의 현실 자체가 변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인권친화적인 학교를 만들기 위해서는, 학생도 함께하고 흥미와 자발성에 의해 꾸려지는 수업이 되어야 하며, 이를 위해 교육혁신과 교육환경 개선 등이 필요하다. 학생의 휴대전화는 무조건 금지할 대상이 아니라 학생들이 스스로 적절한 사용 방법과 문화를 익히고 만들어 갈 생활의 도구이다. 제대로 된 교육은 학생의 참여와 인권친화적 학교가 있어야만 이루어질 수 있다. 강요와 금지의 논리를 벗어나서, 교육의 현실을 개선함으로써 인권친화적 학교와 수업을 향해 나아가자.

  

 


2016년 7월 9일

인권친화적 학교+너머 운동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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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05 02:08 2016/08/05 0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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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평] 교육당국은 학생들의 집회의 자유를 보장하라 
–사드 배치에 반대하는 학생들의 집회 참여를 위축시키는 교육당국을 규탄하며
 
 사드(THAAD) 배치 지역으로 경북 성주 지역이 선정된 이래 주민들의 반대가 계속되고 있다. 주민들은 집회를 열고 시위에 참여하며 총리가 참여한 설명회에서 반대 의견을 피력하는 등 적극적인 활동을 재개하는 중이다. 초중고학생을 비롯한 청소년 주민들도 사드 배치 반대 활동에 참여하고 있다.
 
 지난 15일에 총리 방문을 계기로 열린 사드 배치 반대 집회를 기점으로, 경북도교육청은 집회에 참여한 초중고학생 인원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교육청 발표에 따르면 결석하거나 외출, 조퇴한 후 이날 집회에 참여한 초중고학생은 827명이다. 며칠 뒤 교육청은 이 학생들에 대해 무단결석·무단결과 처리를 하겠다는 방침을 내놓았다. 뿐만 아니라 교과활동이 없는 방과후 시간과 방학 중에도 집회에 참여하는 학생들에 대해서도 ‘조사’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와 같은 교육청의 방침에 비판 여론이 거세지자 무단결석·무단결과 처리는 유보하겠다고 다시 밝혔지만, 논란은 지속될 전망이다.
 
 뿐만 아니라 경북도교육청은 ‘사드 관련 자료안내 및 학생생활 지도 철저 요청’이라는 제목으로 25일 성주교육지원청에 공문을 보내기도 했다. 이 공문은 성주 지역 내 초중고학교로 전달되었다. 공문의 내용은 사드의 안전성이 입증됐다는 국방부 자료를 학생들에게 교육하라는 내용과 더불어, 사드 관련 집회에 학생들이 참여할 경우 안전사고 등의 우려가 있으므로 생활지도에 만전을 기하라는 내용이었다. 사실상 학생들이 집회에 참여하지 않도록 교사들과 학교장이 지도하라는 내용인 셈이다. 교육청 관계자는 “학생들이 집회에 나가면 학습권이 침해되니 학부모들이 좀 자제해 주십사하는 내용이다. 어른들은 상관없지만 학생들이 나가는 것은 문제가 될 수 있다”라는 입장을 밝혔다.
 
 초중고학생들의 집회 참여와 의사 표명을 탄압하는 것은 교육부와 교육청만이 아니었다. 집회가 예정되어 있던 15일, 성주고등학교 학생들은 ‘외출 금지’ 통보를 받았다. 전날까지는 등교를 했다가 외출을 하여 집회에 참여할 수 있다고 알고 있었지만, 집회 당일 학교장이 모든 학생들을 대상으로 외출 금지 처분을 내린 것이다. 이날 성주교육지원청 관계자는 “오늘 아침 4개 고등학교 학교장들이 모여 외출 금지 방침을 정했다. 아직 충분히 판단하는 지각력이 안 된 상태에서 학생들이 집회에 가는 부분은 염려가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성주고등학교 뿐 아니라 성주여자중학교, 성주중학교에서도 “시위에 참여하기 위한 등교거부, 조퇴는 무단 결석, 무단 조퇴에 해당한다”는 내용의 가정통신문을 학부모들에게 보내 학생들의 집회 참여에 제동을 걸기 위해 노력했다.
 
 정부와 교육부, 교육청, 교육지원청과 학교장들이 모두 초중고학생들의 집회 참여와 의사 표명을 방해하기 위해 애쓰는 형국이다. 그들은 청소년이 집회에 나가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있지만, 역사적으로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에서부터 민주화운동과 다양한 사회적 부정의에 맞서는 운동에 청소년들은 늘 정치적 주체로 참여해왔다. 사드 배치를 반대하는 성주 지역의 청소년들뿐 아니라 오늘날 많은 청소년들은 학교에서, 거리에서, 온라인에서 정치적 의견을 피력하며 자신을 정치적 의견을 가진 주체로 인식하고 있다. 청소년은 정치적 판단을 할 능력도 의사도 없다는 듯이 사회는 이미 정치의 장 속에 존재해온 청소년 주체들을 은폐한다. 그러나 동시대를 살아가는 시민으로서, 그리고 이 땅의 모든 정책과 정치적 결정에 영향을 받는 당사자로서 청소년들의 참정권과 정치적 의사를 표명할 권리는 당연히 보장되어야 한다. 
 
 지금 성주 지역의 청소년들은 이 사회의 시민으로서 부정의에 분노하고, 사드 배치로 인해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 주민으로서 반대 의사를 표명하고 있다. 청소년의 의견은 비청소년의 의견보다 결코 덜 중요하지 않다. 집회시위를 통해 의사를 표명할 권리는 청소년에게도 침해되어서는 안 된다. 방과후 시간과 방학 기간 중의 집회 참여도 ‘조사’하겠다는 교육청, 외출금지령을 내리는 교육지원청과 학교장들, 학생들의 의사와 상관없이 사드의 안전성이 입증되었다는 내용의 교육을 진행하라는 교육부 모두 청소년의 인간으로서의 권리, 시민으로서 목소리를 낼 권리를 침해하고 있다. 이들 기관은 모두 학생의 인권 보장에 힘써야 하는 책무를 지는 곳들이며, 집회의 자유는 방해해야 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적극적으로 보장해야 하는 권리이다. 교육부와 교육청이 진정으로 교육과 학생들의 권리를 생각한다면, 해야 할 일은 혹시라도 경찰이나 학교에서 학생들의 표현의 자유, 집회의 자유 등을 침해하지는 않는지 감시하고 감독하는 것이다. 우리는 교육부·교육청·학교 등이 정권의 입맛에 맞추려고 학생들의 인권과 민주적 교육의 가치를 외면하는 행태를 당장 중단할 것을 촉구한다.
 
2016년 8월 3일
인권친화적학교+너머운동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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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05 02:06 2016/08/05 0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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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너머(강민진)

 

그동안 청소년들이 학교를 통해 받아온 성교육은 거의 무의미한 교육이 많았습니다. 대부분의 교육은 실질적 정보도 없고 청소년에게 성적으로 무지할 것만을 요구하는, 성교육이라기보다는 ‘성 통제’ 교육에 가까웠습니다. 교육부는 이번 「학교성교육표준안」을 통해 학생들에게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성교육을 하려 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본 표준안 내용을 보면, 학교 성교육의 내용을 더욱 후퇴시키려는 것으로 보입니다. 본 표준안의 내용에는 청소년기에는 금욕이 필요하다면서 청소년의 성을 통제하고 금기시해야할 대상으로 보고, 끊임없이 ‘건전한 이성교제’를 강조하면서 청소년기의 성적 행동에 낙인을 찍는 내용들이 있습니다. 본 표준안은 일선 학교의 성교육을 지금보다도 더 무의미한 수준으로 후퇴시키는 효과를 낳을 뿐 아니라, 일부 열정적인 성교육 강사들에 의해 조금씩이라도 행해져 왔던 실질적 도움이 되는 성교육이 더 이상 지속되지 못하도록 막는 조치가 될 것입니다.

 

교육부는 본 성교육 표준안에 대해 ‘청소년의 성을 문제행동으로 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면서도, 청소년의 성 행동은 문제행동이라는 전제 하에서 교육을 진행하라고 합니다.

 

교육부 학생건강정보센터 학교성교육자료실에서 제공하는 성교육 자료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들이 있습니다.

 

‘이성 친구와의 만남은 공개된 장소에서 이루어져야 함.’

‘(이성 교제 예절) 옷차림은 평범하고 단정하게 하기, 지나친 감정 표현이나 스킨십 자제하기, 감정을 자극하는 비디오나 인터넷 안 보기’

‘이성교제의 어려운 점: 학업을 소홀히 할 수 있음, 성 충동으로 인하여 건전한 관계를 유지하기 어려움’

‘이성 교제가 건전하지 못했을 때: 혼전 임신, 성폭력, 청소년 비행, 학교 중도 탈락’

(중학교 성교육 자료, 8차시 ‘바람직한 이성교제’ 중)

 

‘성 욕구를 성관계를 통하여 해결하는 것은 성인이 되어 결혼할 때까지 자제하는 것이 바람직함’

(중학교 성교육 자료, 15차시 ‘성 욕구의 조절’ 중)

 

‘이성교제 예절: 학생의 신분에 어울리는 단정한 복장이나 교복을 입기, 청소년기는 정신적, 신체적으로 미완성 단계이므로 일시적 충동에 따라 움직이지 않기’

(고등학교 성교육 자료, 7차시 ‘건전한 이성 교제와 예절’ 중)

 

‘건전한 성 욕구 해소 방법: 운동, 취미 활동, 사회 활동, 봉사 활동, 문화 활동, 이성과 단 둘이 있을 때 성적 충동이 일어나면, 화제를 갑자기 바꿔 봄, 이성과 단 둘이 만나기보다는 여러 사람과 함께 만나면서 이성 교제를 하는 것이 좋음’

(고등학교 성교육 자료, 16차시 ‘성욕과 성 욕구의 해소’ 중)

 

지난 2월 교육부 성교육 표준안 전달연수 자료에는 이러한 내용들까지 있었습니다.

-표준안을 넘어선 실습은 고려 대상이 아니다: 정자 관찰 등의 실습을 하지 말 것

- ‘남녀의 성적 반응의 이해’를 ‘남녀의 성 인식 차이의 이해’로 용어 변경

- ‘자위행위’를 성 욕구의 해소로 용어 변경

-인간의 성적 반응에 대한 내용 삭제

-준비된 성 관계에 대한 내용은 중학교에서 직접적 활동으로 다루지 말 것

-준비된 성 관계에 대한 교육은 임신예방 차원에서 진행할 것

 

“중고등학교의 성교육은 절제가 아닌 금욕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고 밝히는 본 표준안은, 이미 인간으로서 사랑과 연애를 하고, 성 욕구를 가지고 살아가는 청소년의 실제 삶을 전혀 고려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교육부도 이미 이 표준안을 발표하며 ‘중학생의 2.1%, 고등학생 6.5%가 성관계 경험’을 하고 있는 상황에서 실질적인 성교육이 필요하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교육부의 본 성교육 표준안은 ‘성 통제 교육’을 통해 청소년의 성적 실천을, 나아가서는 청소년의 성 자체를 삭제해버리려는 이때까지의 성교육에서 내용적으로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정부의 개입으로 학교 성교육을 더 보수화하는 방향입니다. 그런데 청소년은 인간이고, 특히 성적으로 활동적일 수밖에 없는 연령층의 인간입니다. 인간으로서 성 욕구를 갖고,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하고 사랑 받으며 살고 싶은 욕구는 너무나 당연하며, 헌법이 보장하는 행복 추구권에 해당합니다. 청소년을 성적인 존재이자 주체로 간주하지 않는 성교육은 결국 ‘하지 마라’는 명령과 성에 대한 공포심을 주입시킬 뿐입니다. 다른 교육과 마찬가지로 성교육에서 청소년은 주체적 참여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본 표준안을 낸 교육부는 청소년이 스스로 자신의 성에 대해 탐색할 기회를 마련하고 살아가는 데 실질적으로 필요한 성적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교육을 제공하는 데는 아무런 관심이 없는 것 같습니다. 교육은 학생을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교육부는 성교육 표준안을 따라 행해질 성교육이 과연 학생들에게, 이미 연애와 사랑을 하고 성적 실천들을 하고 있는 성적 주체인 청소년들에게 어떤 도움이 될 수 있을지 다시 고민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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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3/24 12:29 2016/03/24 1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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