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 대중조직을 위한 전국 순회간담회 -광주 간담회" 후기 

 

 

 

 어제 광주에서 청소년 대중조직을 위한 전국순회간담회를 가졌습니다. 수도권 간담회 이후 비수도권 지역 중에서는 첫 스타트를 끊은 셈인데요, 참석하신 분 중에는 아수나로 광주지부에서 활동하는 청소년활동가들도 있었고 전교조 조합원이신 교사 분도 있었습니다. 아직 청소년운동을 해본 적은 없지만 관심을 갖고 있다가 찾아오신 분도 있었고요.

아시겠지만, 청소년 대중조직을 위한 전국순회간담회는 청소년 대중조직의 계획을 세워 실제로 시도해보자고 모인 청소년 대중조직 추진모임에서 주최하고 있습니다. 저희가 준비해간 것은 청소년 대중조직을 왜 지금 시도하려는 것이며, 우리는 어떤 대중조직의 상을 그리고 있고, 앞으로 어떤 것이 필요하고 어떤 단계를 밟아나가야 할 것으로 예상하는지에 대한 내용이었습니다.

 대부분 대중조직이란 것에 관심과 필요성을 느끼고 오셨던 덕분인지 대중조직의 필요성 자체에는 공감대가 형성된 느낌이었고, 대중조직의 상과 대중조직을 만드는 계획 및 전략에 대한 논의가 있었습니다. 제가 느꼈던 이번 간담회에서 나온 주요한 논의지점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었어요.

 

1. 문제를 해결해주는 곳이 아니라 아래에서부터의 운동을 만들어내는 대중조직


 참석하신 분 중 한 분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청소년 대중조직이 노동조합처럼 지도부가 존재하고 조합원들이 겪는 문제를 해결해주는 역할을 하게 된다면, 문제를 해결하는 역할에 한정될까봐 우려가 되는 것이 있다. 청소년운동에서 말하는 것 중에 ‘인권은 셀프’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청소년들의 행동을 이끌어내는 조직이 되어야 한다.” 
 운동이 문제를 해결해주는 신고센터처럼 역할을 하게 되지 않을까 우려하게 되는 것은, 문제 해결을 위해 운동에 문을 두드렸던 청소년들이 운동에 남지 않게 되는 것을 우려하게 되는 것이죠. 청소년 대중조직을 문제를 해결해주는 신고센터와 같은 상으로 그리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의 청소년운동이 역할을 하고 있듯 청소년 인권침해가 발생했을 때 당사자를 지원하고 조직적으로 대응에 함께하게 될 겁니다. 그 과정에서 다양한 층위의 욕구를 가지고 운동에 문을 두드렸던 청소년들이 최대한 조직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이 대중조직이 아래에서부터의 운동을 만들어내는 역할을 하도록 장치를 마련해야겠지요.

 

2. 청소년 관련 정책이나 예산이 편성되는 사업에 개입과 실질적 의견 개진, 정책 협상이 가능한 대표성 있는 조직으로 부상해야


 광주 지방자치 차원에서 ‘어린이 청소년 친화도시’를 만들기 위해, 또 ‘민주시민교육’을 강화하기 위해 정책이 추진되고 예산이 편성되고 있는데, 그 과정에 청소년운동의 개입이 어렵고 청소년 주체들이 드러나지 않아 다른 기관 등에서 청소년을 대변하는 역할을 하고 있는 상황이라는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청소년 관련 정책, 청소년 사업으로 집행되는 예산은 물론 양적으로도 부족하지만 질적으로 청소년을 보호대상으로 한정하거나 오히려 억압하는, 혹은 청소년의 현실에 무지해서 예산 낭비를 하는 경향이 있어 더욱 문제입니다. 이런 문제가 나타나는 이유는 정책과 사업을 기획할 때 청소년 집단을 통제해야 할, 시혜의 대상인, 단일하고 단순한 존재로 간주하기 때문이며, 이러한 잘못된 접근을 교정할 수 있는 청소년 관점의 자문인력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바깥에서 청소년운동은 여러 이야기를 다 하고 있는데 이 운동이 아직 그만큼의 역량이나 공식적 대표성은 가지지 못하였기에 ‘제도권’에 대한 개입이 어려운 것이죠. 대중조직이 필요한 가장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유의미한 대표성을 가졌다고 제도권 안팎에서 인정할 수밖에 없는 규모와 힘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3. 청소년 활동가, 청소년 당사자들만이 아니라 지역 시민사회단체들도 우리가 만나러 다니고 설득하고 이해시키고 조직화해야


 청소년 대중을 어떻게 조직할 것인가 하는 문제도 논의되었습니다. 변화한 이 시대에 청소년 대중을 본격적으로 조직해본 경험이 청소년운동에 부족하기 때문에 시행착오를 겪으며 여러 시도들을 해야 한다는 이야기도 나왔고, 청소년활동가의 숫자가 부족하고 청소년을 조직할 수 있는 공간-학교 등-에 있는 청소년 당사자 활동가도 부족한 부분이 한계일 수 있는 부분으로 지적되었습니다. 때문에 어느 정도 규모로 대중조직이 성장하기 전까지는 만나는 청소년의 숫자가 확보된 지역의 단체들과, 교사 단체 및 학부모 단체들의 지원이 필요할 것입니다. 그래서 대중조직을 준비하는 단계에서 우리가 설득하고 만나야 할 대상은 청소년활동가들과 청소년 당사자들만이 아니고, 각 지역의 시민사회단체들도 우리가 적극적으로 조직해야 할 대상입니다. 청소년이 동네에서 일상적으로 접할 수 있는 단체로 대중조직의 상을 그리고 있기 때문에, 출범 이후에도 공간거점 및 기타 자원을 마련하는 데에 지역 단체들의 협조와 지지가 필요하겠죠.

 

 광주 간담회 참가자 중에는 90년대 초반 광주에서 청소년 조직에 함께했던 분이 계셨습니다. 당시 규모가 꽤 있었고, 발행하는 신문의 구독자만 만 명이 되었으며, 신문은 청소년 주체들이 배달선이 되어 청소년 구독자들에게 전달되었다고 합니다. 광주의 권역마다 ‘토요교실’을 열었는데 학교 앞에서 홍보지를 나눠주며 조직했고 집회에 권역별 깃발을 들고 나가는 등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는 이야기를 나눠주셨습니다. 과거의 경험과 현재에 대한 진단을 토대로, 시행착오를 예상하면서도 담대하게 한 걸음씩 떼려고 합니다. 부디 많은 분들이 이 시도에 조언을 해 주시고, 지지를 보내 주시고, 무엇보다 함께해주시기를 바랍니다. 다음 지역순회간담회는 20일 부산에서 진행됩니다. (글쓴이: 쥬리)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16/03/02 17:00 2016/03/02 17:00
태그 :
트랙백 주소 : http://blog.jinbo.net/walls/trackback/28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머슴둘레 2016/03/08 21:56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청소년들은 러시아혁명사를 공부하라!!

  2. 머슴둘레 2016/03/08 21:57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청소년들은 마르크스주의 입문서를 읽어라!!

  3. 하쿠노미야 마르코 2016/03/12 12:33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http://cafe.daum.net/Labour/
    공산당 창당준비위원회입니다. 많이 사랑해주세요 ^^

<‘성년의제제도’ 도입>

 

취지: 한국은 민법상 성년 기준을 만 19세로 두고, 나이가 그에 달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성년의 지위와 자기결정권을 보장하고 있지 않다(유일한 예외는 만 18세 이상이 혼인한 경우 민법상 성년의 권리를 인정한다). 이렇듯 예외를 두지 않는 성년 기준은 청소년의 생존권과 관련한 여러 권리들을 침해하는 결과를 낳고 있다. 부모 및 보호자와 함께 살지 않으며, 경제적으로 부양받지 않고 독립하여 살아가는 청소년이 미성년의 지위라는 이유로 민법상의 권리를 행사하지 못하여 임대차·주거매매 계약, 의료조치에 대한 결정, 학업에 대한 결정 등을 직접 하지 못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게 생긴다. ‘성년의제제도’는 미국 대부분의 주 등 외국에서 이미 실시하고 있는 제도이다. 부모 및 보호자로부터 독립하여 살아가는 청소년의 권리 보호를 위해 한국에도 이와 같은 제도가 도입되어야 한다.

-‘성년의제제도(Emancipation)’의 예: 미국 캘리포니아 주

방법: 결혼을 하거나, 군입대하거나, 혹은 성년으로 의제되기를 원하는 미성년 당사자가 법원에 신청을 하여 법원이 허가하면 성년으로 의제된다.

조건: 당사자가 만 14세 이상이며, 스스로를 부양하여 경제적으로 독립할 수 있으며, 부모와 함께 살기를 원하지 않으며, 성년으로 의제되는 것이 미성년 당사자의 최선의 이익에 부합하는 경우

성년으로 의제되는 경우 보장되는 권리: 원하는 곳에서 살 권리, 의료조치 및 학교 진학 등을 스스로 결정할 권리, 스스로 결정하여 노동할 권리 등 보통 민법상 성년의 권리

참고자료:
캘리포니아 법원 홈페이지 http://www.courts.ca.gov/selfhelp-emancipation.htm
US Legal
http://minors.uslegal.com/…/california-emancipation-of-min…/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16/03/02 16:58 2016/03/02 16:58
태그 :
트랙백 주소 : http://blog.jinbo.net/walls/trackback/27

댓글을 달아 주세요

의제강간 연령상향의 한계

쥬리(십대섹슈얼리티인권모임)

 

의제강간의 의미

 

의제강간이란 국가가 설정한 성관계 동의 연령 미만인 사람과의 성관계를 말합니다. 현재 한국은 만 13세 미만인 사람은 성관계 동의 능력이 없다고 간주하고, 만 13세 미만과 성관계한 사람을 처벌합니다. 12월 15일 남윤인순 의원 등에 의해 발의된 형법 및 성폭력특례법 개정안은 만 16세 미만인 사람을 성관계 동의 능력이 없다고 간주하며, 다만 만 16세 미만과 성관계한 사람 중 만 19세 이상인 사람만 처벌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 기준 연령은 한국과 일본, 스페인 등은 만 13세 미만, 독일, 이탈리아, 중국 등은 만 14세, 프랑스와 스웨덴 등은 만 15세, 미국 대부분의 주와 영국, 호주 등은 만 16세가 기준입니다.

 

 

의제강간 연령 상향 옹호 논리들

 

의제강간 연령을 상향해야 한다는 주장은 오래 전부터 있어 왔고, 특히 최근에 미성년자에 대한 성폭력 혐의로 기소된 비청소년 남성이 무죄 판결을 받는 등의 사건이 있으면서 빈번해졌습니다. 급기야 지난 12월에는 법 개정안 발의로 이어졌지요. 그렇다면 의제강간 연령을 상향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논리들은 무엇이 있는지 살펴봅시다.

 

1) 청소년의 성적자기결정 능력과 권리를 동시에 부정하는 논리

“어린 것들이 섹스하면 안 되지!”

어느 새누리당 의원은(허핑턴포스트에서 봤는데 어떤 기사였는지 못 찾았습니다) ‘중학생들의 성적 자유가 너무 많이 보장되고 있다’는 취지로 의제강간 연령 상향을 주장했습니다. 의제강간 연령 설정이 공식적으로는 ‘아동 및 청소년을 비청소년의 폭력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있는 것이라는 점에서 볼 때 이와 같은 주장은 의제강간의 기본 취지도 모르는 소리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오해는 생각보다 만연합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의 머릿속엔 아동 및 청소년이 성행위를 하는 것에 대한 혐오감이 있고, 이것이 아동 및 청소년의 성을 보호해야 한다는 당위와 크게 구분되지 않는 부분이 있는 것이죠. 이 논리는 ‘보호’를 빌미로 하지만 실상은 혐오와 금기를 유지시키고자 하는 욕망이 작동하는 것이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2) 청소년에게 성적 욕망을 품거나 청소년과 성관계 하는 사람을 혐오하는 논리

“변태 아냐?”

어떤 비청소년이 청소년과 연애를 한다고 하면 사람들이 ‘철컹철컹’이라며 놀리는 경우가 흔합니다. 실제로는 현 만 13세 미만이 아닌 이상 청소년과 (합의된)성관계를 한다고 해서 ‘철컹철컹’될 일은 없지만, 그만큼 청소년-비청소년 간의 성적 관계는 범죄적, 비도덕적이라는 인식이 있는 것이죠. 아마 많은 사람들은 의제강간 연령 기준이 몇 살인지도 모를 것입니다. 청소년-비청소년 간의 성적 관계가 사회적으로 금기시되는 상황에서, 명확한 근거 없이 이뤄지는 의제강간 적용은 사회적으로 금기시되는 관계를 공권력으로 처벌하는 형태가 될 수도 있습니다. 물론 청소년에게 성적 욕망을 품는 것은 아주 공적인 공간에서야 금기시되는 것이고, 일상에서는 (여성)청소년을 성적 대상화하는 비청소년 남성들의 욕망 드러내기는 만연합니다만.

 

3) 00세 미만에게 성적 자기결정 능력이나 성적 욕구가 당연히 없다고 전제하는 논리

“(여자)중학생이 어떻게 자발적으로 성관계를 할 수가 있죠?”

일반적으로 의제강간 연령 상향을 논의할 때는 아동 및 청소년을 여성으로, 상대 비청소년을 남성으로 은연중에 설정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동 및 청소년을 여성으로 설정해서 그런지 나이의 문제인지 00세 미만에게 성적 자기결정 능력이나 성적 욕망은 당연히 없을 것이라고 전제하게 됩니다. 기준 연령이 만 13세인 지금은 상대의 처벌 기준 연령이 설정되어 있지 않아, 만 12세 두 명이서 성관계를 하면 ‘상호 강간’이라는 우스갯소리도 나오고 있는 실정입니다. 하지만 저 윗선에선 만 13세 미만에게 성적 욕구가 없다고 당연하게 전제하고 있을 것입니다. 만 16세 기준도 마찬가지인데, 의제강간 연령 상향을 주장하는 쪽에서 내세우는 ‘만 16세 미만’은 피해자일 뿐 성적 욕구의 주체는 아닙니다. 여성인 만 15세가 만 19세 이상인 사람에게 성적 욕망을 품는 일이 그들에겐 상상되지 않는 일이죠. 이 논리는 (만 16세 미만)청소년을 일방적으로 피해자화하며, 욕구 없는 존재로 타자화시킨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논리에서 만 16세 미만인 남성의 성적 욕구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남성 중학생에게 성적 욕구가 있다는 것은 정당화되지는 않더라도 우리 사회 구성원 모두가 인정하는 바이며, 만 16세 미만 남성이 성인 여성에게 성폭력을 가하는 일이 없는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도 이 논리는 공백이 있습니다.

 

4) 청소년-비청소년 간의 비대칭적 권력관계 때문에 의제강간 연령 상향과 같은 비청소년에 대한 제재가 필요하다는 논리

이 논리는 청소년 인권의 관점에서도 일부 지지할 여지가 있는 논리입니다. 청소년과 비청소년 간의 권력관계는 너무나 뚜렷하고, 학생-교사, 노동자-사장, 자식-부모와 같은 관계에서라면 더더욱 권력관계가 강하게 작동하는 법입니다. 권력관계가 강하게 작동하는 관계 속에서는 자발-비자발의 구분이 명확하지 않은 경우가 드물지 않습니다. 권력을 이용해서 청소년의 성을 착취하려는 비청소년이 없는 것이 아니고, 착취하기 쉽다는 이유로 성적 상대로 청소년을 찾는 비청소년도 드물지 않습니다.

얼마 전 저는 어느 빈곤한 동네의 중학교에 다니는 청소년과 대화를 한 적이 있습니다. 빈곤한 동네라는 것을 언급하는 이유는 계급에 따라 청소년의 방과 후 일상이 달라지고, 부모의 청소년에 대한 일상적 감시 및 보호의 여부와 정도가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그 중학교 주변에는 하교할 시간이 되면 어슬렁거리는 비청소년 남성들이 있다고 합니다. 여자 중학생들과의 연애 혹은 성관계를 목적으로 갖고 말이죠. 빈곤한 부모를 둔 청소년과 부유한 부모를 둔 청소년 중 어떤 청소년이 더 많이 억압당하는지는 논쟁의 여지가 있지만, 빈곤한 청소년, 혹은 탈가정 청소년이 비청소년의 성적 착취에 노출될 가능성이 높은 것은 사실입니다(친족 내 성폭력의 경우 계급 차이가 나타나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나이권력, 계급, 성별 권력까지 함께 고려하면 가장 어려운 상황에 있는 청소년을 위해서라도 의제강간 연령을 상향해서 청소년을 ‘이용’하려는 비청소년을 처벌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문제는 의제강간 기준 연령을 만 16세로 상향한다고 해도, 만 17, 18세의 청소년들이 똑같이 겪을 문제입니다. 또한 권력관계에서 약자이기 때문에 성적 착취에 노출될 가능성이 높은 집단은 청소년만이 아니기 때문에, 일관성을 유지한다면 의제강간의 기준이 되는 것은 나이 뿐 아니라 다양한 요소가 되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문이 남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이 논리에 반박하기 위해 저의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성폭력과 성폭력 아닌 것 그 사이

 

성폭력 사건에서 쟁점이 되는 것은 이 두 가지입니다. 1) 동의의 여부 2) 폭행, 협박, (아청법 보호대상인 미성년자의 경우에는)위계(사기)와 위력 행사 등의 여부. 형사처벌의 여부를 가리려면 이 두가지를 놓고 시시비비를 가려야겠지요. 하지만 본질적인 의미에서 그것이 폭력이었는가 아닌가를 고민하게 되는 때에, 저는 이러한 성폭력의 성립 기준이 내 경험을 해석하는 데에 ‘미끄러지는’ 느낌을 갖게 됩니다.

 

얼마 전, 어느 자리에서 의제강간 연령 상향이 쟁점으로 논의되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 자리에는 여성단체 활동가도 있었고, 아동 지원 단체 활동가도 있었습니다. 어느 분은 ‘한 아이라도 보호할 수 있다면 의제강간 연령 상향을 해야 한다’라는 말을 하셨습니다. 그 자리에서 제가 이에 반대하기 위해 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발언은 ‘나는 만 16세 미만일 시절 자발적으로 여러 차례 성관계를 했고, 그것은 폭력이 아니었다’ 라는 것이었으며, 저는 그렇게 발언했습니다. 그런데 사실 그 발언을 하고 나서 찝찝한 것이 있었습니다. 만 16세 미만일 당시 저는 자발적으로 여성, 남성 애인과 성관계를 했지만, 그 외 남성들과의 성관계는 여전히 그것을 무엇이라 불러야 할지 고민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형법의 기준으로 보면 그 성관계들은 강간이 아니었습니다. 만약 의제강간 기준 연령이 만 16세 미만이었다면 그것은 ‘의제강간’이었겠지요. 하지만 제가 만 16세 미만이었다는 이유로 ‘성관계 동의 능력’이 없어서 그것이 의제강간이었다고 누군가 해석한다면 그 또한 저는 말이 안 되는 해석이라고 느낄 것입니다. 더불어 제가 만 16세 미만이었을 당시 애인들과의 자발적이고 합의된 성관계를 가졌다는 사실은 두말할 나위도 없고요. 제가 겪었던 관계들, 성관계들이 폭력적이었던 건 제가 어려서 성관계 동의능력이 없어서 그랬던 것이 아니라, 제가 놓인 사회적 위치 때문이었습니다.

 

만 14-15세였을 당시, 저는 네 명의 애인 아닌 남성과 성관계를 했습니다. 첫 번째 남성은 처음 만난 사이였으며, 삼십대 정도 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사람과의 성관계는 제가 동의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강간이라 부르기도 애매한 무엇이었는데, 뭐라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제가 어버버하다가, 저의 저항도 협조도 없이 성관계가 이루어진 그런 것이었습니다. 그 사람은 콘돔을 쓰지 않았고 저는 사후피임약을 처방받아 먹었습니다. 강간은 아닌 것 같은데, 매우 수치스럽고 싫었습니다. 두 번째 남성은 이십 대였는데, 성관계는 미리 합의한 것이었습니다. 그 사람과 성관계를 함으로써 저는 그 사람 소유의 자가용을 탈 수 있었고, 술집에서 술을 마실 수도 있었습니다. 세 번째 남성은 사십 대였고, 성관계는 미리 합의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성관계 후 무언가 때문에 제가 기분이 상했을 때 그 사람은 ‘아이스크림 사줄까?’라고 말했습니다. 그 사람에게 저는 인간이라기보다는 아이스크림으로 달랠 수 있는 ‘아이’였다는 사실을 깨닫고 다시 만나지 않았습니다. 네 번째 남성은 저보다 나이 많은 십대였습니다. 첫 번째 남성과 비슷하게, 강간으로 처벌하긴 애매하지만 제가 동의하지는 않은 성관계가 치러졌습니다. 다만 그 경우에는 제가 미약하게나마 ‘저항’을 했기 때문에 저는 당시 그것을 강간으로 불렀습니다. 제가 그것이 강간이었다고 말하자 그 사람은 주변인들에게 제가 정신병이 있다고 소문을 내고 다녔습니다.

 

저는 지금까지도 제가 대체 왜 그런 성관계에 나를 ‘내몰았’는지, 내가 나를 내몬 것인지 내몰린 것인지 자문하고 있습니다. 당시 저는 학교를 자퇴하고, 다른 여성 청소년들보다 ‘자유로운’옷차림으로 다녔습니다. 머리를 파마하고, 짧은 치마를 입고, 구두를 신고 다녔죠. 길거리를 다닐 때면 휴대폰 번호를 요구하는 비청소년 남성들, 같잖은 성희롱을 하며 지나가는 나이 많은 남성들이 심심찮게 있었습니다. 물론 길거리에서 담배를 피운다고 훈계질 하는 남성들도 있었고요. 당시 온라인 커뮤니티 활동도 했는데 온라인에서 만남을 제안하거나 치근덕대는 비청소년 남성들도 있었습니다. 저는 당시에 제가 매력이 있어서(웃음) 남자들이 꼬이나 했는데 이제는 그것이 아니란 걸 압니다. 어린 여성 청소년이, 딱 봐도 노는 것 같은 애가, 옷은 야하게(?) 입고 다니니까 성관계하기 ‘쉬워’ 보여서 그랬던 것이란 걸요. 또 어릴수록 좋다는 남성 중심적 판타지도 자극받았겠죠.

 

살이 비치는 스타킹과 뒤꿈치가 까지는 구두, 짧은 청치마를 입고 달콤한 향수를 뿌린 채 밤거리를 돌아다니던 그 시절. 자가용 가진 남자의 옆좌석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노라면 겨우 그만큼의 자유로도 섹스 한 번은 해줄 수 있었던. 어디냐, 언제 오냐는 화난 엄마의 전화를 애써 무시하며 휴대폰을 꼭 쥐고, 빨리 취하는 것만이 목적인 음주를 해대다 길거리에서 구토를 하고. 외로움이 극에 달아 치를 떨면서도 아직까지 누군가로부터 구원받을 수 있다는 희망을 스스로 부정하지는 않았다. 늦은 시간 집이 아닌 곳에 있다는 것으로 가슴이 두근거렸던 그 밤들. 그저 들뜨고 연약한, 그래서 이용해먹기 쉬운 소녀, 스스로의 존엄을 어떻게 지킬 수 있을지 상상하지 못했고, 어른들의 영악한 세상에서 발을 헛디디던, 열다섯과 열여섯의 그 시절을 잊지 않겠다. 부정하지도 비하하지도 않겠다.

 

이것은 제가 스물 무렵 쓴 일기의 일부입니다. 저는 그 당시 저를 이해하기 위해, 그 상황을 ‘자가용 가진 남자의 옆좌석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노라면 겨우 그만큼의 자유로도 섹스 한 번은 해줄 수 있었던’ 상황으로 해석했습니다. 제가 원했던 것은 ‘자유’였고, ‘구원’이었는데 그 대가로 제가 지불할 수 있었던 것은 성관계였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자유나 구원을 얻었는가, 그것은 아니었습니다. 건조하게 이야기한다면 당시 제가 바랐던 자유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늦은 시간 길거리든 어디든 내가 원하는 시간과 장소에 있을 수 있는 자유, 술 마시고 담배 피울 자유, 내가 원하는 옷차림을 할 자유, 내 결정과 행동을 일일이 (어른에게)해명하지 않아도 되는 자유. 제가 바랐던 구원의 내용은 나의 본질 그대로 이해받을 수 있는 관계와 사회적 인정이었습니다. 저에겐 은밀한 욕망이 있었는데, 그것은 ‘아이’가 아니라 ‘인간’으로 인정받고 싶은 욕망이었습니다. 때론 ‘아이’로 취급받는 것 보다는 ‘성적 대상: 여자’로 취급받는 게 더 인간 취급을 받는 것에 가깝다고 느꼈기에 제가 즐겁지 않은 성관계들을 한 것 아닌가 생각합니다. 탈학교 청소년으로써 다가온 비청소년 및 청소년 남성들을 자기결정권을 갖고 판단하기에는 인간관계 없이 고립되어 있었던 것도 한 몫 했을 것입니다.

 

저는 자유나 구원을 얻기 위해, 인간 취급을 받고 싶어서, 인정받고 싶어서, 사랑받고 싶어서 아동·청소년이, 혹은 여성이 성관계를 하게 되지 않는 세상을 바랍니다. 때때로 성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한 거래 조건으로 유용하게 쓰이지만, 성을 거래 조건으로 놓아야 하는 위치의 사람은 이미 불공정한 거래를 할 수 밖에 없는 위치에 놓인 것입니다. 여성 청소년으로써 제가 겪었던 그 성관계들은, 개별 사건은 법적 의미에서 폭력이 아닐지라도 제가 놓였던 전체적인 상황 자체는 폭력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아동, 청소년과 여성을 성폭력으로 내몰지 않는 사회가 되려면, 약자들이 성관계를 하든 하지 않든 자유와 관계와 존중을 누릴 수 있는 사회여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청소년의 성폭력 피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해결책은 청소년운동에서 이야기해왔던 청소년의 자유와 인권이며, 나이 위계와 권력의 철폐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의제강간 연령 상향을 반대하는 논의에서 염두에 두었으면 하는 것들

 

1) 성적자기결정권은 유무의 문제가 아니다.

의제강간 적용에서 핵심이 되는 부분은 누구에게 성적자기결정 능력이 있는가의 여부입니다. 국가가 일률적으로 몇 살까지는 성적자기결정 능력이 없고 몇 살부터는 없다고 법으로 명문화하는 것은, 청소년운동에서 20살 되면 갑자기 성숙해지냐고 제기하는 것처럼 매우 오류가 많은 시도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인간에게 성적자기결정 능력이 있는지 없는지를, 그것도 나이를 기준으로 제한하고 공권력이 개입하는 것 자체에 문제제기를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저는 성적자기결정 능력이라는 것은 유무의 문제, 있거나 없거나 흑백의 문제가 아니라고 봅니다. 오히려 정도의 문제에 가깝겠지요. 저는 올해 만 20세를 넘었지만 제가 성적자기결정 능력을 온전히 발휘하며 사는지 의문입니다. 사실 우리는 좁은 의미에서 자신의 욕망을 위해서 뿐 아니라, 상대방을 위해서, 관계 유지를 위해서, 증명을 위해서, 다른 보상을 위해서 성관계를 하거나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여성 등 약자의 위치에 놓인 사람일수록 더욱 자신의 욕망 외의 다른 것을 위해서 성관계를 하거나 하지 않게 될 여지가 커지지요. 경계가 애매하지만, 그런 상황이 지속된다면 성적자기결정 능력을 온전히 발휘한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2) 성적자기결정권이 있어야 성적자기결정 능력도 있다.

앞서 말했듯, 약자의 위치에 놓인 사람일수록 성적자기결정 능력을 온전히 발휘하기 어려워진다는 면에서, 저는 성적자기결정권이 있어야 성적자기결정 능력도 있을 수 있다고 판단합니다. 제가 말씀드렸던 저의 만 16세 미만 시절에서의 성관계들이 폭력적이었던 건 제가 미성숙해서 성적자기결정 능력이 없기 때문에 일어났던 것이 아니라, 저의 위치에서 성적자기결정권을 가지기 어렵도록 조직된 구조 때문에 일어난 일입니다.

성인 여성 중에 성적자기결정 ‘능력’이 부족한 사람이 참 많습니다만, 여성운동에서는 이것을 여성의 성적자기결정권과 관련한 사회 구조의 문제로 제기합니다. 성적자기결정 능력은 개인의 능력치 문제라기보다는 그 개인이 얼마만큼의 능력을 가질 수 있는 사회인가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왜 청소년의 경우도 같은 논리로 이야기될 수 없는지 문제를 제기하고 싶습니다.

 

3) 성폭력 사건이 제대로 형사처벌이 되지 않는 것은 의제강간 기준 연령이 낮아서가 아니다.

의제강간 연령 상향을 지지하는 가장 중요한 근거는 청소년에 대한 성폭력 사건이 제대로 형사처벌을 받지 않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폭력 사건이 제대로 형사처벌이 되지 않는 다른 강력한 원인들이 많습니다.

먼저 강간 여부를 가르는 기준으로 폭행, 협박 등이 설정되어 있기 때문에, 가시적 폭행이나 협박이 없었던 성폭력 사건들-주로 친밀한 관계에서 일어나는 권력형 성폭력-은 강간으로 인정받기 어려운 한계가 현행법에 있습니다. 또한 연인이나 부부 등 친밀한 관계에 있었다는 이유로 강간 성립에 더 까다로운 요건을 설정한 판례들을 볼 수 있습니다. 가해자가 ‘너도 즐겼잖아’등으로 피해자가 동의했음을 주장하는 상황, 혹은 특히 어린 나이의 피해자가 당시 그 순간에는 동의로 여겨질 수 있는 언행을 했지만 전체 상황을 볼 때 자발적 동의가 아니었던 상황에도 피해자중심적으로 세밀하게 접근할 수 있는 제도와 사법 기관의 변화가 필요합니다. 여성 및 소수자 친화적이지 않은 경찰과 사법기관은 성폭력 피해자들의 피해호소를 어렵게 하고, 2차가해를 하기도 합니다. 청소년 성폭력 피해자들이 신고를 꺼리게 되는 원인 중에는 신고하면 부모 등 가까운 사람에게 알려질까 하는 우려가 있습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 대신에 의제강간 연령 기준을 상향하는 것은 쉬운 길처럼 보일지 모르나 위험한 길입니다.

 

4) 의제강간죄의 적용 여부가 피해자에게 도움이 되는지 의문이다.

2011년에 세 명의 성인 남성이 12세인 사람을 강간한 사건이 있었는데, 무죄 판결을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의제강간으로 기소하는 것보다 특수강간(윤간)으로 기소하는 것이 형량이 높아 특수강간으로 기소를 한 것인데 특수강간으로 보기에는 증거가 불충분하다고 무죄판결을 받은 것입니다(당시 가해자들은 피해자가 12세인 줄 몰랐다고 했습니다). 의제강간을 기소하는 것보다 위력을 이용한 강간, 특수강간으로 기소하는 것이 형량이 높기 때문에 검찰은 형량이 높은 쪽으로 기소를 하고, 피해자 측에서도 그러기를 원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다시 말해 의제강간죄의 존재는 일반적으로 법원에서 강간으로 인정받기 어려운 사건의 경우에는 가해자 처벌에 도움이 되겠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그다지 피해자에게 유의미한 법이 아닌 것입니다. 그리하여 앞서 말했듯 의제강간 연령을 상향하는 것보다 성폭력과 관련한 제도 및 사법 처리 체계가 피해자에게 유리하도록 변화하는 것이 더 요구되는 상황이라 하겠습니다.

 

5) 개인은 복잡하고 구조는 선명하다.

위 문장은 제가 지인의 페이스북에서 본 문장을 인용한 것입니다. 성폭력은 개별 사건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전체 사회 구조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여성과 소수자를 억압하는 기제로써 성폭력이 활용되고, 나이와 성별과 지위 등을 이용해 권력을 유지하고 강화하는 수단으로써 성폭력이 활용되는 구조가 있습니다. 이 구조는 선명합니다. 그러나 개별 성폭력 사건들은 복잡합니다. 성폭력과 성폭력 아닌 것 경계에 서 있는 개인들의 경험은 더욱 다양하고 복잡합니다. 개별 사건을 다룰 수밖에 없는 사법 절차에서 나이라는 일률적 기준으로 강간 여부를 결정하면서, 청소년이 성폭력에 취약할 수밖에 없는 구조의 문제는 건드리지 않는 의제강간 연령 상향은 복잡한 개인과 선명한 구조의 문제를 거꾸로 접근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청소년운동으로써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며 할 수 있는가의 문제도 이 간담회에서 꼭 논의되기를 바랍니다. 가장 간단하게는 청소년운동의 논평, 성명 등 입장을 내는 것이 있을 것입니다. 십대섹슈얼리티인권모임에서는 개별 차원에서 미러링 논평을 내려는 논의가 되고 있습니다. 성폭력, 데이트폭력, 가정폭력이 독보적으로 높게 일어나는 이성애 관계의 문제는 남성과 여성이 성적 관계를 맺기 때문에 일어나며, 여성을 보호하기 위해 이성애를 금지해야 한다는 논평을 내려고 합니다. 물론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을 테니 해설을 덧붙여야겠죠. 오늘 자리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16/03/02 16:52 2016/03/02 16:52
태그 :
트랙백 주소 : http://blog.jinbo.net/walls/trackback/24

댓글을 달아 주세요

최근 교육부는 각 교육청에 '교복 위 겉옷 착용 금지 규제를 개선하라'는 내용의 공문을 발송했습니다. 이 내용은 각 지역 교육청을 통해 단위 학교로 전달된 상태입니다. 하지만 학생의 기본권을 침해하는 규제는 이 뿐만이 아닙니다. 아직도 남아있는 '불량학칙'을 고발합니다. [편집자말]
청소년, 교육, 인권단체 등이 모여서 만든 연대체 '인권친화적 학교+너머 운동본부'(아래 운동본부)는 지난해 가을 '불량학칙 공모전'을 진행했다. '공모'를 해준 것은 대부분 학생으로, 자신이 다니는 학교의 불량학칙을 제보했다. 때로는 부모나 지역 시민, 교사가 제보를 한 경우도 있었다. 

운동본부는 SNS와 블로그를 통해 공모전 기간 동안 제보된 불량학칙들 중 일부를 공개했다. 공모전 이후에는 공모 내용을 정리하여 발표하고 학칙의 문제점을 비판하는 자리를 가졌다. 사람들은 불량학칙들을 보며 '무슨 이런 이상한 학칙이 다 있어?'하는 반응을 보였다. '우리 학교도 있는데!'하며 비슷한 사례들을 제보해주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제부터 공모전에 모인 불량학칙들의 다섯 가지 유형을 소개한다. 이 다섯 가지 유형에 속하지 않는다고 해서 덜 불량한 학칙은 아니지만, 수가 많았거나 가장 사람들의 눈에 띄었던 것들을 꼽아보았다. 

운동본부는 불량학칙 공모전을 통해, 과연 학생들이 불량한 것인지 학생들을 억압하고 내모는 학교가 불량한 것인지 되묻고자 한다. 학생들에게 폭력과 차별을 가하는 '불량한 학교 규칙'들을 들여다보자.

[불량학칙 첫 번째 유형] "입시공부 말곤 아무 것도 하지 마!"

① 독서하면 '체벌'하는 울산 A고등학교

울산 A고등학교에서는 3학년 학생의 도서대출 기록을 확인한 후 책을 빌린 기록이 있으면 체벌을 한다는 제보가 있었다. 점심시간에 나가서 운동을 하는 것도 고3은 금지라고 했다. 경악스럽지만 입시경쟁에서 '승리'하는 것만을 목표로, 말에게 눈가리개를 씌워 앞만 보고 달리게 하듯이 굴러가는 인문계고의 현실을 고려하면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니다. 또한 이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이런 식으로 입시공부 외의 활동을 규제하는 사례들은 많은 학교에서 크고 작게 있는 일이다.

② 공휴일에 자율학습 강요하며 학생 '감금', 서울 B고등학교

같은 유형의 다른 사례로, 공휴일마저 자율학습을 강요하는 학교가 있었다. 서울 B고등학교가 성적 최상위권 학생들에게 공휴일에 등교하여 자습할 것을 강요한다는 제보였다. 공휴일에 학생들을 '감독'할 교직원이 없어서인지, 문을 잠가버린다고도 했다. 

제보자는 자습 중에 아파도 병원도 갈 수 없다고 호소했다. 이 학교 외에도 많은 학교가 야간자율학습, 방과후 학교, 보충수업 등을 학생들에게 강요하고 방학 중에도 등교를 시키는 사례들이 제보되었다. '방학'과 '휴일'이 어떤 의미인지부터 알게 해야 할 판이다. 게다가 자율학습 중에 물을 마시러 가거나 화장실을 가도 처벌을 하는 사례 등 자습실의 '규칙'들도  불량학칙 공모전에 들어왔다.

이는 심각한 대입경쟁과 학생인권이 존중받지 못하는 현실이 만들어낸 불량학칙들이다. '학생은 (입시)공부만 해야 하는 시기'라는 생각 속에 놀고 쉴 권리마저 제대로 보장받지 못하는 것이다. 전형적인 대학입시 외의 다른 길을 모색하는 청소년을 차별하며, 다른 활동을 하면 처벌까지 한다. 

학교에서는 "이게 다 학생들을 위한 것"이라고 항변할지도 모른다. 경쟁 교육과 그에 따른 각종 사회적 차별과 배제 등이 근본적 원인인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입시경쟁을 더욱 채찍질하는 인권침해가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어차피 상대평가와 줄세우기로 이루어진 경쟁교육 속에서는 '승리'하지 못한 학생들이 나올 수밖에 없다. 학교의 역할이 학생들이 경쟁에서 이기도록 교육하는 것이 전부일까? 게다가 일부 학생들은 우대하고 일부 학생들은 홀대하는 등, 교실 안에서 차별과 배제를 저지르는 학교들의 모습을 보면 그것이 과연 진심으로 학생들을 위한 것인지, 아니면 학교의 '명예'와 '성과'를 위한 것인지 의심스럽다.

[불량학칙 두 번째 유형] "너의 신체는 내 감시와 통제 하에 있다"

① 속옷까지 규제하는 부산 C고등학교

부산 C고등학교의 학생이 보내온 제보에는 학생의 신체와 외모를 규제하는 불량학칙이 정말로 많았다. 내용도 '깨알' 같았다. 일반적으로 많이 볼 수 있는 교복 치마길이 규정과 색조화장 금지는 물론이고, 가방은 학교에서 자체 제작한 가방만 매야 하며 신발은 학교에서 지정한 특정 브랜드의 특정 모델만 착용하도록 되어 있었다. 

머리카락은 길이와 염색, 펌을 규제하면서 반드시 '외가닥(한 가닥)'으로 묶어야 한다. 양말과 속옷은 반드시 흰색이어야 하며, 조그만 무늬나 로고도 있어서는 안 되었다. 방한 목적의 외투마저 규제의 대상이 되고 있었는데, 환절기에는 아무리 추워도 겉옷을 입을 수 없고, 한겨울에야 겉옷을 입도록 허용해주는데 그마저도 특정 색깔에 한해 제한적으로 허용하고 있었다. 

게다가 매일 아침 교문 앞과 식사시간 전 식당 앞에서 복장 검사가 이루어지고,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체육관으로 학생을 집합시켜 검사를 한다고 한다. 얼마나 숨이 막힐지 상상하기도 힘들었다.

머리카락이나 복장, 용의를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권리를 우리는 '개성을 실현할 권리'라고 부른다. 개성의 문제는 여타의 인권 문제들에 비해 덜 절박하고 사소한 것처럼 생각되기도 한다. 하지만 자신의 모습과 태도를 꾸미고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보일지를 정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이 고유한 인간임을 스스로 확인하는 일이다. 

개성을 실현할 권리가 부정되는 순간 개인은 무기력해진다.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는 책 <이것이 인간인가>에서 본인의 아우슈비츠 수용소 경험을 털어놓았다. 관리자들은 피수용인을 순종적인 인간으로 만들고, 손쉽게 관리할 전략으로 머리를 모두 깎아버렸다고 한다. 

그리고 같은 옷과 신발을 신기며 이름을 제거하고 번호를 부여했다. 그 과정을 거치고 나면 피수용인들은 모두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서로를 발견하게 되고, 그 순간 자신의 존엄성과 개성이 모두 사라졌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고.

우리 사회 역시 학생들에게 매우 획일적이고 편협한 모습을 요구하고, 이런 요구는 학교 규칙과 용의규제로 구체화된다. 청소년들이 학생인권의 대표적 해결과제로 주장해온 것이 '두발자유'였으며, 지금도 학교 규칙 중 가장 많이 저항하는 것이 두발복장에 관한 것이다. 

학생들의 개성 실현의 권리를 짓밟는 각종 규칙들은 '불량학칙'의 대표 중 하나로 꼽기에 손색이 없을 것이다. 게다가 불량학칙 공모전이 9~10월 중에 진행되어서인지, 학교에서 겉옷을 입지 못하게 규제하는 사례들이 매우 많이 공모되었다. 

개성을 억압한다는 것은 외모만이 아니라 학생들 개개인마다 다르게 느끼는 추위나 더위, 편함과 불편함 같은 것들까지 획일적 기준에 따라 단속한다는 것이다. 이는 건강권과 쾌적한 환경에서 교육에 참여할 권리까지 저해한다. 운동본부는 이러한 겉옷 규제들에 대한 사례를 모아서 개선을 요구했고 교육부로부터 이런 사항을 개선하라는 입장을 이끌어낼 수 있었다.

[불량학칙 세 번째 유형] "너의 입을 막겠다" 

① 학교 비판하면 처벌, 충남 D고등학교

"조회시간 학생부 선생님이 SNS에서 학교를 비판하면 처벌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실제로 제가 블로그에 학교를 비판하는 글을 올렸는데, 그 뒤 교무실로 끌려가 '인성이 쓰레기다' '학교는 뭐 하러 다니느냐'는 등의 폭언을 들어야 했습니다."

충남 D고등학교를 다니는 학생이 제보한 내용이다. 한국의 대부분 학교에서 학생의 의견은 거의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처벌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학생들이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나 철도민영화 문제 등 사회적 이슈에 대해 목소리를 냈던 여러 사례들이나, 학교에 불만을 제기한 사례들을 보면 학생들은 징계나 불이익을 받을 위험과 마주해야 했다. 

학교 안에서 입이 막힌 학생들은 온라인 공간에서 말을 한다. 그러나 요즘 학교들은 인터넷까지 틀어막으려고 하고 있다. 위 제보자가 블로그에 게시한 글이 학내에서 문제가 됐다는 것은 학교가 온라인 게시글까지 모니터링하고 있었다는 의미일 것이다. 이제 학생이 인터넷에서 의견을 표명하는 것도 감시와 통제의 대상이 됐다.

불량학칙 공모전을 진행하는 와중에도, 어느 학교의 용의복장 학칙이 SNS에서 크게 이슈가 된 적이 있었다. 그러자 그 학교의 재학생과 졸업자들이 SNS로 댓글을 달고 공감을 표했다. 

그러자 제보자는 자신이 다니는 학교에서 교사들이 '학교가 명예훼손을 당했다'며 제보학생을 찾아내려 한다고 알려왔다. 이후 재학생들이 달았던 댓글 중 상당수가 삭제되었다. 학교의 유무형의 압박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학생의 사실 진술과 의견 표명에 학교가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도 된 셈이다.

학생들도 시민으로서, 자신의 의견을 자유롭게 표현하고, 소통하고, 행동할 수 있는 정치적 권리를 가지고 있다. 이는 민주주의 국가라면 더욱 보장받아야 할 가치다. 학교가 민주시민 양성을 표방하는 곳이라면 한층 더 그래야만 한다. 

학생들이 학교를 비판하고 사회적 이슈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표현하지 못한다면, 설령 학생회 등 어떠한 참여의 기회를 보장한다고 하더라도 이는 형식적인 자리가 되기 쉽다. 한국의 민주주의를 걱정하는 사람이라면 이러한 반민주주의적인 '불량학칙'들부터 없애야 한다.

[불량학칙 네 번째 유형] "분할통치, 차별을 활용한 통제"

① 학생회 출마도 성적순, 경남 E고등학교

"직전 학기 석차등급 평균이 50%이내이거나 징계를 받았으면 학급 반장, 부반장이 될 수 없다. 학생회 피선거권은 직전 학기 석차등급 평균이 30%이내거나 벌점 10점 초과인 학생에게는 주어지지 않는다."

경남 E고등학교의 학생자치활동규정 일부다. 학생회는 학생들의 자치기구인데, 학교가 성적이나 벌점 등을 기준 삼아 피선거권을 제한한다는 규정 자체가 언어도단이다. 또한 '성적' 등을 기준으로 한다는 것은 학교가 학생을 노골적으로 차별하며 모두에게 당연히 보장되어야 할 권리를 부당하게 박탈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학생회 등 학생자치기구에 참여할 권리는 학교 안의 참정권이나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처럼 성적과 벌점 등을 기준으로 피선거권을 제한하는 것은, '학교 말을 잘 따르고 우등생인' 학생들만이 학생회를 맡도록 만들어 학생회를 다수 학생들로부터 멀어지게 만들고, 기능을 왜곡시키는 원인이 된다.

② 성적순으로 독서실과 기숙사를 배분해주는, 대구 F고등학교

"저희 학교는 성적순으로 기숙사와 독서실을 배정해 줍니다. 성적순으로 뽑다 보니 집과 학교의 거리가 멀어서 통학하기 힘든 경우에도 기숙사에 들어가지 못하는 경우가 생깁니다. 성적 우수자들에게 배정해주는 우등 독서실은 일반 학생들에게 배정하는 독서실보다 시설이 좋습니다. 친구들끼리 누가 우등 독서실에 붙었는지 수근 댈 때면 순위에만 집착하는 학교 분위기가 만들어지는 것 같아 속상하기도 합니다."

대구 F고등학교 학생이 제보한 내용이다. 성적이 좋은 학생과 그렇지 않은 학생을 공간적으로 분리하고, 성적 좋은 학생에게만 눈에 띄는 혜택을 주어 혜택을 받지 못한 학생들이 박탈감을 느끼도록 하는 것이다. 

제보자가 증언했듯 이런 규칙으로 순위에 집착하는 경쟁적 분위기가 만들어지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이 학교만이 아니라 성적에 따라 학생들에게 자습실이나 독서실 시설에 차등을 두는 경우, 심하면 기숙사 방까지도 차등을 두는 사례들이 불량학칙 공모전에 제보되었다. 그밖에도 벌점이 10점을 넘을 경우 체육대회와 축제 등 학교 행사에 참여하지 못하게 해 학생들을 낙인찍는 사례도 있었다. 

학생들을 성적이나 징계, 벌점 등에 따라서 차별하고 분리시키는 '분할통치'는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입시경쟁 위주의 학교 교육 때문이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학생들을 분열시키고 경쟁을 유도하면서 한층 더 쉽게 학생들을 관리하고 통제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그 결과 학생들은 열등감이나 우월감을 갖게 되며 경쟁과 차별, 개인책임론과 능력주의 등을 내면화 한다. 학교가 차별을 만들어내고 '차별에 찬성하는' 인간을 만들어내고 있다고 비판을 받는 이유다. 가장 반교육적이고 반사회적인 유형 중 하나라는 점에서 '불량학칙'의 대표 사례로 꼽힐 만하다.

[불량학칙 다섯 번째 유형] "사적인 인간관계도 규제 대상"

① 사랑을 처벌하는 학교, 충북 G고등학교

"저희 학교에는 '교내 연애 금지'라는 항목의 교칙이 있습니다. 교내 연애가 발각되면 당사자는 교내의 모든 수상 기회를 박탈당하고 교내 봉사 등의 처벌을 받습니다. 학교에는 일 년에 몇 번 학생들에게 종이를 주고 연애를 하는 학생 이름을 적어서 내라고 합니다. 

또 일부 학생들을 감시자로 삼아 친구들이 연애를 하는지 감시하게 합니다. 연애하는 학생을 교사에게 이르면 상점을 주는 등 특혜를 주고요. 남녀 학생이 손을 잡고 있는 것이 기숙사 CCTV로 적발된 적이 있었습니다. 두 학생은 한 달 동안 기숙사에서 퇴사당하고, 퇴학 협박을 당했습니다."

충북 G고등학교 학생이 제보한 내용이다. 요즘도 사랑을 이유로 처벌을 받나 싶겠지만, 학생들의 연애를 처벌하는 학교는 생각보다 매우 흔하다. 2013년의 서울시교육청의 자료에 따르면 전국 고등학교 중 절반 이상이 학생의 '이성교제'를 규제하는 학칙을 두고 있다.

불량학칙 공모전에는 '팔짱을 끼면 벌점' 등 구체적인 벌점 항목을 두고 있는 학교들도 제보됐고, '불건전한 이성교제'나 '풍기문란' 등 애매모호한 표현을 사용하여 교사들의 눈에 띄는 행동을 자의적으로 처벌을 하는 사례들도 있었다.

또한 보통의 학교에서 연애나 성적 관계를 상상하면 이성 간의 그것밖에 상상하지 못해서 그런지 학생의 연애를 규제하는 학칙은 보통 '불건전한 이성교제' 같은 단어로 채워져 있다. 그런데 간혹 동성 간의 무엇도 규제 대상임을 명시해둔 학교들이 있는데, 부산의 G고등학교가 그 예였다. '동성 간 과도한 신체접촉' 시 풍기문란으로 벌점 1점이 부과되는 것이다.

학교가 이성애이든 동성애이든 이토록 당당하게 학생의 인간관계를 규제하는 데는 청소년의 성에 대한 사회적 낙인이 한몫을 하고 있다. 성이란 그 자체로 나쁜 것이 아니고 대부분의 인간 삶에 자연스럽고 필수적인 요소인데도, 유독 청소년의 성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이 혐오한다. 이에 더해서 청소년의 사랑과 연애 자체가 일종의 일탈행동처럼 여겨지곤 한다. 

과연 학교가 개인의 사적 관계와 감정을 단속하고 규제하고 처벌할 수 있는 걸까. 그것이야말로 전체주의가 아닌지 의문이 남는다. 교육부와 국가인권위에서 비혼모인 학생의 학습권을 보장하라는 지침을 발표하면서 학교에게 이러한 규제 학칙들도 개선하라고 했으나, 현실은 여전했다. 그리고 청소년의 성과 사랑을 일탈행동처럼 취급하고 개인의 사생활을 존중하지 않는 한 이런 사례들은 계속 발견될 것이다.

학생이 불량한가, 학교가 불량한가?

이 외에도 국기에 대한 경례 시 부동자세를 유지하지 않으면 벌점을 주는 등 학생의 양심의 자유를 침해하는 유형, '교사지시 불이행' 같은 모호하고 지나치게 포괄적인 사유로 처벌 규정을 두는 유형 등 불량학칙은 셀 수 없이 많았다.

흔히 학교에서는 규칙을 잘 지키지 않는 학생, 규칙 위반으로 처벌받는 학생을 '불량'하다고 평하곤 한다. 그러나 관점을 바꿔서 생각해보면 수많은 학교들이 애초에 잘못된 규칙을 강요하고 복종을 요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니, 단지 규칙만이 아니라 경쟁과 차별과 폭력으로 채워진 학교의 풍경과 학습 시간이 지나치게 긴 교육제도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닐까? 

학생들에게 어른 말 안 듣는다고 혀를 차기 전에 학교와 교육을 바꾸는 것이 먼저이다. 운동본부는 인권의 눈으로 들여다봤을 때, 너무나 많은 학교들이 불량한 규칙과 문화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고발하고자 했다. 

특히 몇몇 지역에서 학생인권조례가 제정된 이후로 마치 학생인권은 너무나 잘 보장되고 있다는 착각이 사람들 사이에 퍼져 있었기에, 학생들이 겪는 현실을 불량학칙 공모전을 통해 보여줄 수 있기를 바랐다. 운동본부는 이후에도 학생인권 상담소를 운영하고 문제가 되는 사례들을 공론화하는 활동을 이어가기 위해 준비 중이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16/03/02 16:46 2016/03/02 16:46
태그 :
트랙백 주소 : http://blog.jinbo.net/walls/trackback/23

댓글을 달아 주세요

의제강간 연령 상향 법안 발의 소식을 들은 어느 여성 청소년이 보내는 편지 

"차라리 이성애를 금지하면 어때요?"

 

 

지난 12남윤인순 의원 등이 의제강간 연령 기준을 현 만 13세에서 16세로 상향하는 법안을 발의했습니다의제강간이란해당 기준 연령 미만의 사람과 만 19세 이상인 사람이 성관계를 했다면 그들끼리의 합의 여부와는 관계없이 만 19세 이상인 사람은 강간범으로 간주하여 처벌하는 법입니다현행법에선 만 13세 미만인 사람과의 성관계 시에 적용하고 있지만이번 법안이 통과 된다면 만 15세 그러니까 한국나이로 16, 17세인 사람과의 성관계도 강간으로 간주한다는 이야기지요. 17세인 제가 저보다 겨우 두세 살 많은 애인이랑 성관계를 한다면 제 애인은 농담이 아니라 진짜로 철컹철컹하게 됩니다제가 아무리 동의한 관계라고 설명해도 소용없겠죠의제강간법상 저는 성관계를 할지말지 결정할 능력도 없는 미성숙한 존재니까요 ...

 

 

얼마 전연예기획사 대표가 중학생을 강간한 혐의로 기소되었지만 무죄 판결을 받아 이슈였었죠또 많은 성폭력 사건들이 범인이 판사들이 보기에 명시적인 '폭행' '협박'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무죄 판결이 나고 있지요저도 어이가 없어요굳이 말로 협박을 하지 않아도 제 꿈이나 밥줄을 쥐고 있는 사람이 제가 원치 않는 성관계를 요구하면 충분히 협박적인 것을!! 판사님들이 이것도 이해 못할 정도로 멍청한 이상 저는 강간을 당해도 보호받지 못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는 했습니다그래서 처음 의제강간 연령 상향법안을 들었을 때는 음 그래도 이거라도 있으면 나아지려나 싶기도 했구요하지만 생각하면 할수록 이상한 걸 느꼈어요이 법안이 생겨도 만 16세 이상인 사람은 보호받을 수 없다는 부분이죠.

 

 

그래서 저는 의제강간 연령 상향보다 나은 걸 제안하려고 합니다이성애를 금지하자고 말이에요여자랑 성관계한 남자는 모두 처벌하자구요!

 

 

2014년 경찰범죄통계에 따르면 강간 가해자 중 98.7%, 유사상간 가해자 중 98.2%, 강제추행 가해자 중 98.2%, 기타 성폭력 가해자 중 98.2%가 남성입니다반면 강간 피해자 중98.9%, 유사강간 피해자 중 84.5%, 강제추행 피해자 중 93.2%, 기타 성폭력 피해자 중 97%는 여성이죠또 한국가정법률상담소의 통계에 따르면 가정폭력 상담사례 중 남편이 아내한테 폭력을 행사한 경우가 69.9%로 가장 높은 비율을 보였습니다이게 다가 아니에요. 3일에 1명의 여성이 남편애인 등 친한 남성에 의해 살해당합니다성폭력가정폭력데이트 폭력 모두 이성애와 깊은 연관이 있고주로 남성에 의해 여성에게 행해진다는 공통점을 지닙니다.

 

 

남성과 여성의 성관계 자체를 강간으로 간주해버리면 비록 여성의 성적자기결정권을 무시하게 되긴 하지만어차피 여자들 대부분이 자신의 성적자기결정권을 무시당하면서 사는데요내가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상대방을 위해서관계 유지를 위해서사랑을 증명하기 위해서생존하기 위해서 성관계를 하고 사는 여자들이 너무나 많습니다이들을 보호하려면 남성이 여성에게 성관계를 요구하는 것 자체를 막아버리는 게 낫죠여성이 먼저 요구했다고 남성이 거짓말을 할지도 모르니까 아예 이성간의 성관계를 금지하면 됩니다.

 

 

혹시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세요멍청한 판사들이 성폭력이 뭔지도 몰라서 생기는 문제를, 여자들을 섹스 하고 싶은지 아닌지도 모르는 멍청이라고 설정해서 해결하겠단 거라구요?이 문제는 의제강간으로 처리할 게 아니라 판사와 그 판결에 동의하는 이들한테 성폭력이 뭔지 똑똑히 가르쳐줘서 해결할 문제라고 생각하시죠근데 왜 청소년에 대해서는 그렇게 생각을 못하셨을까!

 

 

저는 답을 압니다지난 12월 초 의제강간 기준 연령 상향을 논의한 국회 토론회에 청소년의 자리가 없었기 때문이죠청소년을 어떻게 보호할 지를 결정하는데 보호 받을 당사자의 목소리를 듣지 않는 말도 안 되는 상황에서 결정하고 발의한 법안이 말이 될 리가 없죠.

 

 

나이권력과 지위를 이용한 비청소년의 청소년에 대한 성폭력은 나이라는 일괄적 기준으로 의제강간을 적용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닙니다이 문제는 청소년 인권 신장과 나이권력 철폐를 통해 해결해야 해요그래서 저는 의제강간 연령 상향을 반대합니다.

 

 

ps. 청소년을 폭력으로부터 보호하고 싶다면우리가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폭력인 체벌이나 좀 어떻게 해보세요아직도 많은 학교와 가정에서는 일상적으로 체벌이 일어납니다우리도 폭력 당하기 싫어요!

 

 

본 글은 여성 청소년이 보내는 편지로 구성한 논평입니다.

 

 

십대섹슈얼리티인권모임

2016. 02. 15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16/03/02 16:44 2016/03/02 16:44
태그 :
트랙백 주소 : http://blog.jinbo.net/walls/trackback/22

댓글을 달아 주세요

보 도 자 료

학교에서 체벌 경험 43.8%,

교사로부터 폭언을 들은 경험 46.4%...

서울 관악 중고등학교 학생인권 실태조사 결과 발표

 

수신

각 언론사 사회부 및 교육부

발신

관악 청소년연대 여유

일자

2016.02.18

매수

2

담당자

쥬리(관악 청소년연대 여유)

문의

010-9945-9517

 

1. 귀 언론사의 정론직필에 감사드립니다.

 

2. 서울 관악지역의 청소년단체인 관악 청소년연대 여유에서는 작년 하반기에 중고등학생들을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조사 및 면접조사를 바탕으로 <2015 관악 중고등학교 학생인권 실태조사 보고서>를 발간했습니다.

 

3. 본 설문조사에는 관악 소재 중고등학교 재학생 1499명이 참여했습니다. 본 조사에 따르면관악지역 중고등학교를 다니는 학생 중 43.8%는 직접체벌을 경험했으며, 43.5%는 간접체벌을 경험했고교사로부터 폭언 혹은 수치심을 주는 말을 들은 경우도 46.4%에 달했습니다. 또한 77%는 여전히 학교에서 두발규제를 경험하고 있었고방한 목적의 외투를 규제당한 경우도 44.2%로 나타났습니다. 23%의 응답자는 학교에서 야간자율학습방과후 수업 등 정규교과 외의 학습을 강요당하고 있었습니다뿐만 아니라, 27.4%는 학생의 동의 없는 소지품 검사를 당한 경험이 있었으며소지품을 압수당한 경우도 50.4%에 달했습니다. 22.1%의 응답자는 학교에서 성적에 따른 차별을 경험했다고 밝혔습니다.

 

4. 면접조사에서는 구체적인 체벌과 폭언의 경험들이 드러났는데관악의 한 고등학교에서는 남교사가 여학생의 엉덩이를 치고 지나가는 체벌이 있었고다른 고등학교에서는 남학생의 고환을 꼬집는성적 수치심을 주는 체벌이 일상적으로 일어났습니다. 폭언의 경우 관악의 한 고등학교에서 교사가 성적 수치심을 주는 말을 여학생에게 하여 당사자가 다른 남학생들로부터 2차 피해를 입는 경우가 발생하였고교사가 학생에게 너 자살 안 했냐?’라는 강도 높은 폭언을 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다른 고등학교에서는 교사가 학생들에게 성적인 농담을 일상적으로 한다는 응답도 있었습니다.

 

5. 법적으로 체벌이 금지되고서울 학생인권조례가 제정되었지만 여전히 관악지역의 학생들은 학교에서 인권침해를 유의미한 빈도로 경험하고 있었습니다아직 나아갈 길이 먼 학생인권의 현 실태에 대해 많은 취재와 보도를 요청합니다.

 

6. 아래 링크에서 <2015 관악 중고등학교 학생인권 실태조사 보고서파일을 다운로드 받으실 수 있습니다. 더 많은 정보가 필요하신 경우 담당자에게 문의해주시기 바랍니다. 

http://cafe.naver.com/gwanakafford/324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16/03/02 16:42 2016/03/02 16:42
태그 :
트랙백 주소 : http://blog.jinbo.net/walls/trackback/21

댓글을 달아 주세요

[성명] 청소년 대상 성폭력의 해결책은 의제강간 연령 기준 상향이 아니다 

 

 

 지난 12월 남인순 의원 등이 ‘의제강간 연령 기준’을 현 만 13세에서 16세로 상향하는 법안을 발의했다. 12월 초, 한국여성변호사회가 주최하고 여성 의원들의 축사로 진행된 의제강간 연령 기준 상향을 논의한 국회토론회가 열렸었는데, 그로부터 얼마 되지 않아 해당 내용의 법안이 발의된 것이다.

 

 의제강간 연령 기준이란, 그 기준이 되는 연령 미만의 사람과 성관계를 한 사람을 처벌하기 위한 기준으로 몇 살 미만의 사람은 성적 행동 및 성관계에 동의할 ‘능력’이 없다고 보고 그와의 성관계는 강간으로 간주할 때 적용되는 기준이다. 현 발의안에서는 만 16세 미만인 사람과 만 19세 이상인 사람이 성관계를 하는 경우를 기준으로 잡고 있다.

 

의제강간 연령 상향 논의에 청소년은 없었다

 

 얼마 전, 연예기획사 대표가 여자 중학생을 강간한 혐의로 기소되었지만 무죄 판결을 받아 사회적 논란이 되었다. 무죄 판결이 내려진 데에는 아동·청소년을 상대로 한 성폭력의 특성에 대한 법원의 무지가 원인으로 지목되었다. 이 일을 계기로 여러 단체들은 의제강간 연령 기준 상향을 더욱 강력히 주장했고, 그러한 주장들은 특히 ‘여성’의 요구와 목소리로 조명되었다. 실제로 의제강간 연령 기준 상향을 논의한 국회토론회는 여성단체가 주도하였고, 여성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정치를 수행한다고 평가받는 남인순 의원이 해당 법안을 발의하였다. 

 

 그런데 과연 그것은 ‘여성’의 요구이자 목소리였을까, 우리는 의문을 품는다. 혹시 ‘비청소년 여성’의 목소리는 아니었을까? 국회토론회가 열렸지만 청소년의 인권과 입장을 대변해온 청소년운동에는 발제자로도 토론자로도 섭외 요청이 오지 않았다. 단지 그 자리에는 의제강간 연령 기준 상향은 ‘청소년을 보호하기’ 위해 필요하다고 말하는 비청소년들이 있었을 뿐이다. 그들은 ‘청소년의 미성숙함’을 청소년의 성적자기결정권을 다소 침해하는 한이 있더라도 의제강간 연령 상향이 정당화할 근거로 들었다. 의제강간 연령 상향은 비록 그 처벌 대상이 비청소년이라 하더라도 청소년의 ‘성관계 동의능력’, ‘판단 능력’, ‘성적자기결정권’을 부정하는 전제 하에서 논의되었다. 여성운동과 페미니즘의 역사는 다양한 여성 주체가 주체화되면서 성장해왔다. 하지만 그들은 다양한 여성 주체를 말하면서도 청소년 여성은 주체가 되지 못할, ‘미성숙한’, 비청소년 여성이 보호해주어야 할 존재로 격하시키고 있다.

 

배경에 있는 것은 청소년의 성에 대한 편견

 

 "13∼18세에게 성인영화는 불허하면서 성행위는 허용하는 셈이다. 우리나라는 외국에 비해 청소년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너무 많이 허용하고 있다" 2010년, 이은재 한나라당 의원이 국정감사 때 의제강간 연령 기준 상향을 주장하며 한 말이다. “‘법을 지켜가며’ 성적 자유를 누리겠다는 청소년을 방치하지 않으려면 허용 기준연령을 높여야 한다." 서울신문에 났던 사설의 내용이다. 현재 의제강간 연령 기준을 상향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중 상당수는 ‘청소년을 비청소년이 나이권력을 이용해 자행할 수 있는 폭력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청소년들이 성적 자유를 누리는 것이 꼴 보기 싫어서’ 그를 옹호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대중적으로 청소년의 성행동이나 성적인 표현을 하는 청소년을 혐오하는 정서와 이데올로기들이 있다. 이런 혐오감은 ‘청소년을 성으로부터 보호해야지’라는 보호주의적 감성과 크게 구분되지 않고 뒤섞여서 흘러 다닌다. 

 

 어떤 집단이 ‘성적 자기결정권’을 가질 만한지 아닌지를 국가가 판단하여 일률적 규제를 가하는 것은 많은 문제점과 쟁점을 낳을 법한 이슈다. 그러나 청소년에 관해서 의제강간 연령을 확대하려는 법안에 대해서는 별다른 사회적 반대나 제대로 된 논쟁도 벌어지지 않고 있다. 청소년의 성에 대한 혐오감과 편견, 청소년을 미성숙한 존재로 격하시키는 사회적 낙인이 우리 사회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덕분이다. 의제강간 연령 기준 상향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청소년이 성적 실천을 했을 때 겪게 되는 낙인의 문제에 대해 얼마나 생각해 보았을까? 우리 청소년들은 학교에서 연애 때문에 징계당하지 않을 권리를 말하고, 우리의 성 자체를 금기시하는 사회적 억압에 문제제기하고 있지만 우리의 목소리는 여전히 가닿지 않고 있다. 하지만 ‘청소년을 보호하겠다’며 나서는 어른들의 주장은 이렇게 잘 먹히고 빠르게 법안 발의도 된다. 물론 청소년의 이야기를 들으려는 시늉도 않은 채로 법안을 내놓아도 되고 말이다.

 

 청소년과 청소년의 성에 대한 편견은, 청소년들을 당연히 무성(無性)적 존재일 것이라고 생각하게 만든다. 그 결과 청소년들이 성적 상황에 놓인다면 무조건 피해자일 것이라고 전제하게 된다. 물론 나이와 성별에 따른 권력관계 등, 청소년, 특히 여성 청소년이 더 쉽게 성폭력 피해를 겪게 만드는 사회적 구조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곧 청소년들의 성적 주체성과 수행성을 일반적으로 부정해도 된다는 말은 아니다. 의제강간 제도를 강화하려는 것은 청소년이 비청소년과의 관계에서 일방적으로 피해자일 것이며, 주체성을 가질 수 없다고 규정하려는 것이다. 또한 앞서 보았듯이 청소년의 성적 자유를 법적으로 압살하려는 의도와도 결코 완전히 떨어질 수 없다. 여성의 성욕이나 성적 주체성을 없는 듯 취급하는 사회에 대해 여성운동은 어떤 목소리를 내왔는가? 여성의 성과 성적자기결정권을 말해왔지 않았는가? 사회에서 어떤 집단의 성욕이 금기시되거나 없는 듯 취급된다는 것은 그 사회가 그 집단을 동등한 인간으로 대접하고 있지 않다는 증거이다. 청소년도 마찬가지 처지에 있다.

 

의제강간 제도로는 해결될 수 없다

 

 청소년들이 비청소년들에 의해 나이권력과 지위를 이용한 성폭력 피해를 경험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교사에 의해, 부모에 의해, 고용주에 의해 권력을 이용한 성폭력을 겪거나 목격하는 것은 청소년의 일상에서 드물지 않은 일이고, 청소년에 비해 사회경제적 자원이 많은 비청소년이 청소년을 성적으로 착취하는 것 또한 구조적으로 일어난다.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것은 이 사회에서 청소년의 인권 현실이 열악하기 때문이고, 청소년에게 비청소년과 동등할 수 있는 사회경제적 자원이 보장되지 않기 때문이며, 청소년을 성적으로 이용당하기 쉬운 위치에 머물게 하는 부실한-섹스하지 말라고나 하는-성교육 때문이다. 청소년이 비청소년에 의해 이러한 폭력을 겪지 않으려면 우리가 비청소년과 동등해져야 한다. 나이권력과 지위를 이용한 성폭력의 문제는 나이권력 자체를 없애고 교사-학생, 부모-자식, 고용주-노동자 관계 등 청소년이 약자의 위치에 놓이게 되는 관계를 평등하게 만들어 해결해야 한다.

 

 청소년들이 성폭력 피해를 겪고도 신고하길 망설이는 것은 부모에게 알려질까봐 우려하기 때문이고, 성폭력을 경험한 당시 정황이 술을 마시고 있었다거나 기타 어른들의 눈에 ‘청소년답지’않은 행동을 했던 정황이라서 비난받을까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청소년의 신체와 행동에 덧씌워지는 낙인을 제거해야 청소년이 주체적으로 자신의 피해를 호소할 수 있다. 

 

 청소년이 겪는 성폭력의 해결책으로 의제강간 연령 상향을 내놓는 것은, 청소년의 주체성과 성적자기결정권을 위해 필요한 자원을 마련하는 대신 청소년의 성적자기결정 능력 자체를 부정해버리는 처사이다. 게다가 청소년이 타인과 맺는 관계에 대해 공권력이 개입해야 하는 문제로 전환하여 사회적 낙인을 강화하고 가정이나 학교에의 종속을 강화하는 결과를 불러오게 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지금도 가정이나 학교에서 청소년의 (특히 비청소년과의)연애를 탄압하거나 그에 징계를 내리는 일이 흔한데, 청소년이 그에 불복종하면 그 대가가 부모와 교사에 의한 신고로 시작해 상대방에 대한 공권력의 처벌로 돌아올 수 있는 상황이 되는 것이다.

 

 나이권력과 지위를 이용한 비청소년의 청소년에 대한 성폭력은 나이라는 일괄적 기준으로 의제강간을 적용하여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이 문제는 청소년 인권의 신장과 나이권력 철폐를 통해 해결해야 하는 문제이며, 성폭력 사안에 대한 사법체계의 나이와 성에 따른 권력에 대한 민감도를 높여서 해결해야 하는 문제이다. 때문에 우리는 의제강간 연령을 상향하려는 법안 발의나 그를 위한 논의에 강한 우려를 표하는 바이다.

 

2016. 02. 19

십대섹슈얼리티인권모임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16/03/02 16:37 2016/03/02 16:37
태그 :
트랙백 주소 : http://blog.jinbo.net/walls/trackback/19

댓글을 달아 주세요

[청소년의 눈으로 본 학교 성교육] 학교 성교육에 대한 성소수자의 고함

 
쥬리

 
 

[편집인 주]

올해 4월, 교육부가 내놓은 ‘학교 성교육 표준안’이 성소수자에 대한 내용을 배제한 것이나 보수적인 성별 관념을 담고 있는 것이 지적되며 논란이 불거졌다. 그러나 교육부가 올해 내놓은 성교육 표준안이 ‘특별히’ 후퇴한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그동안 학교에서 이루어져 온 성교육은 애초부터 수많은 문제점들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연재를 통해 당사자인 청소년들이 자신이 경험한 학교 성교육의 문제점에 대해 이야기하고, 청소년의 성적 자기결정권과 청소년들의 삶의 현실을 바탕으로, 현재 학교 성교육이 무엇이 문제이고 어떻게 변화해야 하는지를 제안한다.

나는 2008년 중학교에 입학했다. 초등학교 때 첫사랑을 경험했기 때문에, 중학교에 입학할 즈음에는 내가 남들과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나는 청소년들이 ‘이성’에게 갖는다는 성적 호기심, 사람들이 ‘이성’과 경험한다는 성적 긴장을 여자친구들에게 느끼고 있었다. 

제도교육에서 내가 ‘성애’나 ‘사랑’에 대해 공식적으로 배운 것은 모두 이성애에 대한 것이었다. 딱 한 번 동성애에 관한 언급이 교과서에 등장했었다. HIV에이즈에 대한 설명으로 ‘동성애자에게서 처음 발견되었다’는 언급이었다. 그 외에는 없었다. 성교육 시간에도, 가정 교과서에서도, 사람이 동성에게 성애적 감정을 느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이 이야기된 적은 없었다. 나와 같은 사람의 존재나 감정은 어쨌든 제도교육이라는 공적 공간에서는 삭제되는 무엇이었다. (내가 제도교육에서 경험하지는 않았지만, 최근 고등학교 ‘생활과 윤리’ 교과서에는 성소수자의 인권에 대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일부 학교, 일부 학생만이 선택하는 과목이기에 한계가 있지만, 긍정적인 변화이다.)

그때로부터 7년이 지난 올해, 교육부는 ‘학교 성교육 표준안’을 내며 성교육의 질 향상을 목표한다고 발화했다. 하지만 표준안의 내용은 7년 전 성교육의 수준과 비슷하거나 더 보수적이고 더 구렸다. 대표적으로 이성애가 아닌 성적 지향, 시스젠더가 아닌 성별정체성에 대한 내용이 초․중․고 과정 전체를 통틀어서 거의 부재하다는 문제가 있었다. 3월에 발표한 성교육 표준안의 연수 자료에는 성소수자나 다양한 성적 지향에 대한 지도는 ‘허용되지 않는다’는 내용마저 있었다. 이 내용은 교육부가 최종적으로 발표한 표준안에서는 삭제되었다.
 
위 사진:성교육 표준안에 따른 고등학교 성교육 자료 일부

기존의 성교육도 그랬지만, 표준안에 따른 성교육 프로그램도 모든 학생이 이성애자 시스젠더라는 확신을 전제로 만들어진 듯하다. 이성 커플의 데이트 그림, 결혼 그림, 아기 그림을 제시하면서 ‘사랑하는 이성이 생긴다면 함께 하고 싶은 것을 세 가지씩 적어보라’는 요구에 동성애자인 학생들은 어떻게 응수해야 할까? 차별하는 사회 때문에 삶에서 그러해왔듯 성교육 시간에도 이성애자인 척을 해야 할 것인데,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교육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위 사진:성교육 표준안에 따른 고등학교 성교육 자료의 차시별 제목들

각 차시의 제목들에서도 알 수 있듯 표준안에 따른 성교육이 알려주는 것은 ‘이성’과의 관계에 대한 것뿐이다. 동성 연인과 교제를 하고 있거나, 동성과 연애하기를 희망하는 학생은 연애에 대해 어디서 배워야 할까? 표준안에 따른 성교육 자료들을 보면 ‘이성 교제’에서 중요한 것은 남녀가 다르며 이 차이를 이해하고 배려해야 한다는 것이다(물론 성교육 표준안은 성별에 대한 고정관념을 답습하면서 남녀의 차이를 말한다). 연애란 곧 이성 교제며, 이성 교제의 갈등은 연애에 참여하는 구성원이 다른 성별이라는 데서 기인한다고 말하는 성교육에서, 동성 간 연애에서 부딪히는 어려움에 대처하는 방안은 응용을 해도 알 수가 없다. 성소수자인 학생들이 살면서 경험하는 차별 문제나 그 차별에 대처하는 방법에 대해서도 언급이 없다. 이런 성교육은 이성애자가 아닌 학생들에게는 쓸모가 없다(사실 성교육 표준안은 성별 고정관념을 답습하는 데다 청소년의 성 자체를 부정적인 것으로 보고 있어 이성애자인 학생에게도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성교육을 초래할 것으로 예상한다).
 
위 사진:성교육 표준안에 따른 중학교 성교육 교사용 지도서 자료 일부

단순히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을 넘어, 성교육 표준안은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을 강화하고 성소수자인 학생들이 스스로를 비정상이라고 인식하게 만들 위험이 있다. 중학교 과정으로 제시된 ‘청소년기의 성 정체성’ 자료를 보면, 성정체성에 대한 고민(성전환 수술에 대한 생각 등)과 동성 친구에게 감정을 느끼는(설레는 감정, 스킨십 욕구) 비율이 중학생보다 고등학생에게 적게 나타났다며 ‘연령이 높아짐에 따라 자신의 성 정체성을 확립해가는 비율이 높아지고 있다’고 결론짓는다. 또한 성정체성 확립을 자신의 출생 시 부여된 성별을 수용하는 것으로 서술하면서 건강한 가정에서는 자녀들이 안정적으로 정체감을 발달시킨다며 성정체성에 대한 고민이나 시스젠더가 아닌 성정체성을 ‘건강하지 못한 것’으로 낙인찍는다. 성소수자를 낙인찍는 성교육을 받으며 성소수자인 학생들은 무척이나 괴로울 것이지만, 교사-학생 간의 위계관계, 이성애 중심적인 학교 분위기 때문에 문제제기를 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당사자인 사람 앞에서 그 사람의 정체성을 부정하고 비난하는 교육을 강제적으로 진행하는 것이 폭력이 아니면 무엇일까.

내 삶에 도움이 되었던 연애, 성, 섹스에 대한 지식이나 태도 중 제도교육에서 배웠던 것은 하나도 없다. 특히 성교육에서 배웠던 것은 더더욱 없다. 제도교육 바깥의, 넘쳐나는 연애 기술서적이나 실용 지식들도 이성애 중심적이고 성차별적이어서 도움이 되었던 것이 없었다. 내게 도움이 됐던 자료는 이성애 각본의 허구를 무너뜨리고 여성의 성에 대해 긍정적으로 발화하는 페미니즘 서적과 글들이었다. 그 외에는 포괄적인 의미에서 사랑에 대해 다룬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만이 도움이 되었다(그러나 그 책에도 성소수자 차별적인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좋은 교육을 받을 권리는 모든 학생에게 보장되어야 한다. 좋은 교육은 일차적으로 당사자 학생의 삶에 도움이 되는 교육이어야 하고, 또 좋은 사회를 만드는데 일조할 수 있는 교육이어야 한다. 여기서 좋은 사회란 ‘어른들 보시기에’, 권력을 가진 세력의 관점에서 좋은 사회가 아니라 교육의 당사자인 학생들과 모든 사회 구성원들에게 좋은 사회를 의미한다. 성소수자인 학생이 여느 학교, 학급에나 일정 비율 존재함에도 성소수자를 위한, 성소수자에 대한 교육이 실시되지 않는 것은 명백히 부조리한 상황이다. 

교육학자 아이스너는 특정 이념이나 문화 세력에 의해 제도교육에서 의도적으로 특정 지식, 가치, 행동양식을 배제하여 지워 버린, 그래서 학생들이 배우지 못하고 놓치게 되는 부분을 ‘영(0) 교육과정’이라고 개념화했다. 성소수자의 존재와 다양한 성적지향, 성별정체성은 이렇게 의도적으로 배제된, 그러나 평등과 인권의 관점에서 꼭 시행되어야 할 교육과정이다.
덧붙이는 글
쥬리 님은 십대섹슈얼리티인권모임 활동가입니다.
 
인권오름 제 464 호 [기사입력] 2015년 11월 26일 15:13:48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16/03/02 16:35 2016/03/02 16:35
태그 :
트랙백 주소 : http://blog.jinbo.net/walls/trackback/18

댓글을 달아 주세요

 [성명]

새누리당과 더불어민주당은 조건 없는 선거권 제한 연령 하향 등 

청소년 참정권 보장을 추진하라!

 

 

 

 여야의 20대 총선 선거구 획정과 쟁점법안 협상 과정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선거권 제한 연령 하향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다. 청소년의 참정권 보장을 요구하는 우리는 선거권 제한 연령 하향 논의가 진지하게 논의되고 있다는 점에서는 환영하는 바이나 그 내용과 논의 방식에 대해서 비판을 제기한다.

 

 

고등학생·연 나이 19세 제외한 18세 선거권?

지금의 논의는 청소년 참정권에 대한 양당의 무관심만 보여줄 뿐이다

 

협상 과정에서 더불어민주당은 만 18세로 선거권 제한 연령을 하향하되 '고등학생인 사람은 제외하자'는 제안을 내기도 했었다. 이 제안의 의미는 선거가 있는 해에 만 19세가 되는 사람, 즉 연 나이 20세부터만 선거권을 보장하자는 주장으로 보인다. 새누리당에서도 역시 청소년들이 선거권을 가지면 ‘교실의 정치화’가 일어난다거나, 전교조 교사들에게 영향을 받아 투표를 할 것이라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이대로 고등학생을 제외하는 안이나, 혹은 연 나이 20세부터 선거권을 보장하는 법안이 통과된다면 청소년에게 참정권이 없는 현실은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10년 넘게 선거권 제한 연령을 하향하라는 요구가 계속되고 있는 이유, 선거권 제한 연령 만 18세의 의의는, 만 18세부터 비로소 현재 한국에서 시민권을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있는 한국 나이 20세 미만의 청소년들 중 극히 일부라도 선거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고등학생·연 나이 19세를 제외한 18세 선거권이라는 발상이 나왔다는 것 자체가 그동안 선거권 제한 연령을 18세로 하향하라고 시민사회와 청소년운동 단체들이 요구해온 맥락조차 알지 못하는 양당의 무관심을 보여줄 뿐이다.

 

 

노동개악과 맞바꾸는 18세 선거권?

청소년 참정권에 대한 고찰은 없고 협상의 카드만 계산하는 상황

 

 이처럼 현재 논의가 고등학생을 제외하자든가 연 나이 20세부터만 보장하자든가 하는 해괴한 방향으로 진행되는 이유는 청소년 참정권 보장에 대한 본질적인 고찰 없이 협상의 카드로써만 선거권 연령 제한 조정을 활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새누리당 김무성 당대표는 더민주당 측에서 ‘쟁점법안’을 수용하고 선거권 제한 연령 하향은 다음 대선부터 적용한다면 받아들일 수도 있다고 밝혔다(1월 5일). ‘쟁점법안’으로는 비정규직 확대, 노동시간 연장을 불러일으킬 것으로 예상되어 ‘노동개악법’으로 불리는 노동개혁법안 등이 있다. 한편 더민주당은 '선거권 제한 연령 18세'에 대한 어떠한 철학이나 원칙도 없이, 이를 자신들에게 유리한 유권자 수를 늘리고 새누리당의 기선을 제압하는 방안으로만 여기고 있다는 의구심이 든다. 청소년 참정권에 대한 제대로 된 이해와 논의 없이 ‘쟁점법안’을 통과시키거나 막는 카드로써 만 18세 선거권이 사용되는 상황에 대한 경계가 필요하다. 

 

 

참정권의 평등을

청소년에게 참정권을

 

모든 사람은 공동체의 의사결정에 함께할 권리를 가져야 한다. 청소년에게도 본인에게 영향을 미치는 모든 문제에 대해 의견을 표현하고, 그 의견이 반영되도록 할 권리가 당연히 필요하다. 그런데 청소년의 참정권은 법적으로 거의 보장되지 않고 있다. 선거권이나 피선거권은 물론이요 이를 기준으로 정당 가입이나 여타 정치활동 전반을 사회적 제도적으로 제약당하고 있는 형편이다.

 

 

이와 같이 청소년을 정치에서 배제하는 근거라고는 고작 애매모호한 '성숙', '미성숙'  구별밖에 없다. 단지 선거권 연령을 제한하는 나이를 몇 살로 하느냐 식의 접근이 아니라, 청소년의 참정권을 제한하는 사회적 편견과 제약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이 필요하다. 새누리당 등이 '고등학생들이 정치화되어서 안 된다'라고 하는 억지스런 소리를 더 이상 못하게 해야 한다. 고등학생도, 청소년도, 이 사회에 사는 시민으로서 당연히 정치적 주체인데 어째서 '정치화'되면 안 된다는 말인가? 만 18세 이상이 선거권을 보장받는 것에서 나아가, 모두에게 평등한 참정권 보장이 실현되어야 한다.

 

 

 이 사회를 살아가는 동등한 시민으로서 청소년에게도 참정권 보장을 요구한다. 그리고 만 18세로 선거권 제한 연령 하향을 논하면서 고등학생 · 연 나이 19세이하 제외 등의 청소년 배제 조건이 붙는 것이나, 노동개악 대신 선거권 제한 연령 조정이라는 식으로 논의되는 것에 반대한다. 새누리당과 더민주당은 조건 없는 청소년 참정권 보장을 추진하라!

 

 

 

2016년 1월 6일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진보결집+ 청소년위원회

십대섹슈얼리티인권모임

한국 YMCA 전국연맹 

청소년 녹색당(준)

시민모임 즐거운교육상상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16/01/07 00:07 2016/01/07 00:07
태그 :
트랙백 주소 : http://blog.jinbo.net/walls/trackback/17

댓글을 달아 주세요

청소년의 참정권이 보장되어야 한다

 

-쥬리

 

최근 국회 정치개혁특별위원회에서는 현재 만 19세 이상에게만 보장되고 있는 선거권을 만 18세부터 보장하는 방향으로 선거연령 하향을 논의 중이다. 이번 뿐 아니라 작년에도, 그리고 그 전에도 선거연령을 하향을 담은 공직선거법 개정안이 발의되어 왔었다. 새누리당과 우파 소수정당들을 제외한 정당들은 만 18세, 혹은 그보다 낮은 연령대의 선거권 보장에 우호적인 입장을 취해 왔다(민주당·새정치민주연합도 만 18세 선거권 보장의 입장을 취하지만 당 차원의 노력은 별로 없는 편이다). 선거연령 하향을 주장하는 논의들은 제도권 안팎에서 이루어져 온 셈이다.

 

만 18세로 선거연령을 하향해야 한다는 주장에는 (진보적인)대중의 감성도 어느 정도는 호의적이다. 만 18세, 그러니까 연나이로 치면 19세나 20세 정도면 ‘합리적’인 판단이 가능할 것이라고 여겨지는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적은 나이의 사람들에게도 선거권이 보장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어떨까? 사람마다 선거권이 보장되어도 좋을 만큼 ‘성숙한’ 연령의 시작이 언제부터인지 생각이 다를 테지만, 대개는 청소년의 보다 전면적인 참정권 보장에 반대 의견을 갖거나 의문을 품을 것이다. 청소년의 참정권에 대해 논할 때 사람(어른)들은, 과연 청소년이 자율적이고 이성적인 판단에 의거하여 투표할 수 있을까, 주변 여론에 휩쓸리거나 포퓰리즘에 놀아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을 한다. 어떤 사람들은 청소년은 세금도 안 내고 일도 하지 않으므로 선거권을 가져서는 안 된다고 믿기도 한다.

 

정치참여는 이 사회 구성원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사회적 결정 과정에 개입하고 목소리를 내는 것이다. 참정권이 보장된다는 것은 자신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공동체의 결정에 함께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1인 1표를 동등하게 행사하는 보통선거의 근거는 사회 구성원이라면 누구나 자신이 속한 사회의 결정에 함께할 수 있어야 한다는 원칙이다. 정치참여의 권리를 보장받기 위해서는 어떤 신분이어야 한다거나, 얼마만큼의 지식을 갖고 있어야 한다거나, 어느 정도로 ‘성숙’해야 한다는 조건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참정권의 역사를 돌아보면, 재산 가진 남성에게만 참정권이 보장되던 시절에는 가난하고 못 배운 인간은 정치참여를 할 만큼 성숙하지 못하며 재산권을 행사할 재산이 없으므로 정치참여를 해야 할 이유도 없다고 여겨졌다. 그 시절에는 세금을 납부하는 중산층 이상의 남성만이 정치참여를 할 만한 ‘시민적 성숙’을 갖췄다고 전제되었다. 여성에게 참정권이 보장되지 않았던 시절의 상식은 여성은 판단력이 부족하고 미성숙하므로 정치참여의 자질이 없다는 것이었다(‘여자들은 남편 따라 투표할 것이다!’).

 

청소년 참정권 보장을 반대하는 쪽에서는 청소년이 정치에 대해서 무얼 알겠느냐, 관심이나 있겠느냐 하는 이야기를 한다. 실제로 대다수의 청소년들이 정치를 자기 삶과 동떨어져 있는 것으로 인식하는 경향도 있다. 대중의 정치참여가 쉽지 않고 억압적인 사회에서는 정치에 무관심한 대중적 경향이 있다. 정치에 영향을 미칠 수 없으니 무관심/무력해지고, 정치적 힘이 서민에게 없으니 삶은 더 힘들어져서 정치에 개입할 여지가 더 적어지는 악순환이 반복되는 것이다. 청소년들의 현실도 마찬가지이다. 청소년의 삶의 조건 중에 정치의 결과물이 아닌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입시경쟁과 열악한 학생인권, 가정 내 학대, 부모에의 경제적 종속, 청소년을 하대하는 사회 분위기는 모두 정치의 결과이고 정치적인 문제이다. 청소년의 삶에서 강제야자의 문제는 노동착취나 장시간 노동의 문제만큼 중요하고, 입시경쟁의 문제는 비정규직, 고용불안 문제만큼 중요하며, 가정 내 학대 문제는 강력범죄의 문제만큼 중요하다(그리고 청소년 중에는 임금노동을 하고 있거나 할 예정인 사람이 다수이므로 여타 문제에서도 당사자이다, 강력범죄도 마찬가지). 청소년의 참정권 보장의 의미는 이러한 청소년 삶의 문제들이 정치적인 문제로 공론화되고 정치적인 중요성을 가진 의제로 부상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청소년 집단의 정치적 세력화가 이루어진 후에 이러한 문제들이 정치적으로 다루어지는 방식은 지금까지 다루어졌던 방식과는 매우 다를 것이다. 예를 들어 지금까지 입시경쟁 문제는 청소년 당사자보다는 학부모의 입장에서 공론화되어 온 경향이 있었다. 학부모의 입장에서 사교육비 지출은 심각한 문제였지만 학교에서 실시하는 강제야자는 오히려 학부모에게 좋은 것이었다.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에서의 영유아 학대나 학교의 ‘심한’ 체벌은 학부모의 공분을 사지만 ‘가벼운’ 체벌은 자기 자녀를 말 잘듣는 아이로 만드는 데 도움이 된다면 기꺼이 용납될 수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혹자는 청소년 삶의 문제들은 이미 비청소년들이 대리하여 정치의 장에서 해결하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는데, 약자의 이익을 강자 집단이 대신 챙겨주는 일은 역사적으로 전무하다. 청소년의 입장으로 문제를 대신 말해줄 수 있는 비청소년 집단은 어디에도 없다. 특히 청소년의 이해와 비청소년의 이해가 달라지는 문제들에 대해서 청소년의 목소리는 결코 비청소년에 의해 대변될 수 없다.

 

OECD국가 중 한국과 일본만이 만 18세 선거권을 보장하지 않아왔는데, 일본도 최근 18세부터 선거권을 보장하도록 법이 바뀌었으니 이제 한국만 남은 셈이다. 만 18세 선거권은 한국에서도 그리 먼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로써 청소년의 정치참여가 보장되기엔 청소년 중 만 18세 이상이 차지하는 비율은 너무나 낮다. 나는 몇 살이던 간에 나이를 이유로 참정권을 부정하지는 않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나이 제한이 완전히 없어지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면 기권표가 너무 많아지지 않겠는가, 투표율과 유효표를 지금처럼 계산하기 어려워지게 될 것이다 하는 우려들이 생길 수 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은 충분히 대책을 마련할 수 있는 일이고, 모든 구성원에게 참정권이 있어야 한다는 원칙을 포기해야할 당위가 될 만큼 새로운 선거 방식을 도입하는 것이 어려운 일도 아닐 것이라 본다. 하지만 청소년 참정권 운동은 여타 운동과 마찬가지로 사회의 현실과 협상하며 벌여나가는 운동이기 때문에, 운동의 전략으로 특정 나이에게 선거권을 보장하라는 슬로건을 내걸 수 있다고 생각한다.

 

청소년 참정권을 요구하는 시위들이 있어왔는데, 어느 시위에서 들었던 피켓 중 하나는 ‘흑인 참정권 1870년, 여성 참정권 1928년, 청소년 참정권 몇 년?’이라는 문구를 담고 있었다. 청소년의 참정권은 과연 몇 년에 보장될까? 청소년 참정권을 위한 여정에 당신이 함께하길 바란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16/01/06 00:06 2016/01/06 00:06
태그 :
트랙백 주소 : http://blog.jinbo.net/walls/trackback/16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