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정은임 아나운서 영전에 부치는 글

[매일노동뉴스펌]

故정은임 아나운서 영전에 부치는 글
“당신이 들려주던 말과 노래가 있었기에 우리들의 지친 가슴이 위로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오성 기자


011-9199-****

‘바보처럼’ 그의 번호를 누르다, 이내 수화기를 내려놓는다.
그는 이제 없다···.

결국 그가 갔다.

지난달 22일 불의의 교통사고로 입원한 지 13일만인 8월 4일 오후 6시 반, MBC 아나운서 정은임씨는 끝내 유명을 달리 했다. 사인은 중증뇌부종연수마비. 서른일곱 해도 다 채우지 못한 삶이었다.

그는 일개 방송인에 불과했으나 그의 삶은 ‘방송국’의 스튜디오 안에만 갇혀 있지 않았다. 노동조합의 여성부장으로서, 그리고 그와 함께 ‘진보적 영화읽기’의 대열에 동참했던 애청자들의 누이로서 그는 하나의 상징이었다.

민주노동당 홈페이지에 올라온 한 당원의 글처럼 때로 볼셰비키의 ‘인터내셔널가’와 ‘임을 위한 행진곡’이 심야의 전파를 타고 울려퍼지기도 하고, ‘철의 노동자’가 ‘영화음악’이라는 사실을 청취자들에게 일깨우기도 했다. ‘좌절의 90년대’에 그의 방송은 몇 안되는 안식처였다.

지난해 한진중공업 노동자 김주익씨의 죽음을 오프닝 멘트로 전하며 ‘이것이 대한민국 노동귀족의 모습’이라며 애도하던 ‘유일무이한’ 방송이었다. 신입사원 시절엔 사측의 노조탈퇴서를 거부하고, 방송파업의 대열에 동참하기도 했던 강성노조원이기도 했다. 뭇남성들을 설레게 한 나지막한 목소리는 그의 표피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런 그의 죽음에 ‘정은임의 영화음악 애청자 모임’ 카페는 물론, 민주노동당 홈페이지 등에도 추모의 글이 이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환한세상’이라는 아이디의 민주노동당원은 “파병소식이 전해지던 순간, 문득 2주 동안 사경을 헤매고 있던 정은임 아나운서가 생각났다”며 “온세상이 외면하던 김주익 열사를 나지막히 찾아주던 정은임 아나운서가 (지금도) 먹먹한 새벽을 여전히 채우고 있었다면 오늘은 과연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었을까 생각했다”며 추모의 글을 올렸다. 애청자들 사이에선 그의 방송을 영구보존하자는 이야기도 나오고 있다.

지난해 8년만에 다시 영화음악으로 돌아왔던 정은임씨의 프로그램이 불과 6개월만에 사라졌을 때 많은 청취자들이 분노하며 MBC측에 항의의 뜻을 전달했던 것은 그런 까닭이었다.

그의 프로그램이 ‘알량한 청취율’ 따위로는 가늠조차 할 수 없는 깊이와 애정을 지니고 있음을 거대 방송사는 몰랐다. 그는 아무렇지 않은 듯 “언젠가 다시 만날 것”이라고 청취자들을 위로했지만, 마지막 방송을 하며 그는 소리없이 울었다. 결국 그 방송의 끝부분에선 코까지 훌쩍이며 우는 바람에 들키고 말았지만.

그날 정은임은 나희덕 시인의 시를 인용하며 이렇게 말했다.

“단 한 사람의 가슴도 따뜻하게 지펴주고 못하고, 그저 연기만 피운 것 아닌가···.”

그것이 그의 진심이라면 이제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당신이 들려주던 말과 노래가 있었기에 우리들의 지친 가슴이 위로받을 수 있었노라고.

그리하여 척박했던 우리들의 지난 시간이 영화로웠노라고. 당신은 연기가 아니라 뜨거운 불길이었노라고.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08/08/16 01:03 2008/08/16 01:03
Trackback Address :: http://blog.jinbo.net/xfiles/trackback/7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