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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형 공화국, 전쟁터가 된 몸들

<문화/과학  69호>  2012.3

 

 

전쟁터가 되어버린 몸

 

“크기에 따른 여성의 성만족”, “팔자주름 한번 치료 90살까지”, “혹시 나도 탈모?”, “쌍커풀+코성형+지방이식 290만원”, “방송3사가 극찬한 -25kg감량비법”, “눈밑지방 없애고 10년 젊어지자!”, “수술없이 하루5분으로 명기되기”….

인터넷신문의 온라인 사이트에는 기사를 읽는 것인지 광고를 보는 것인지 모를 정도로 각종 성형수술 광고들이 화면을 가득 메우고 있다. 진보건 보수건 매체의 성향은 문제되지 않는다. 오히려 영세한 진보성향 매체일수록 성형광고의 비중이 더 높기도 하다. 230여 개의 성형외과가 밀집되어 있어 뷰티벨트라 불리는 압구정과 신사역에는 단 두 개의 역사에만 153개의 성형광고가 있다고 한다.2000년대 이후 전 세계적인 경제침체에도 불구하고 나날이 성장세를 기록했다는 미용 산업의 활력과 위세를 여실히 보여준다.

취업이나 일상사에서 외모에 따른 불공평한 처우가 암암리에 자행되고, 갈수록 많은 사람들이 섹시함을 강조하는 문화에 매료되고 있는 외모중시사회에서 각종 미용 산업이 번창하는 것은 필연적인 일이다. 나아가 한국사회에서는 1990년대 이후 소비문화가 성숙하고, 연예엔터테인먼트 산업이 급성장하고, 미디어 환경이 글로벌화 하면서 영상/시각문화가 대중문화 전반을 지배하게 되었다. 몸에 대한 시각도 점차 바뀌어, 몸을 남들 앞에 전시하고 매력적으로 보이게 가꾸는 것은 재미있고, 바람직하고, 손쉬운 일로 여겨지게 되었다. 그 결과 한때 부정적인 눈초리를 받던 성형수술은 아름다운 몸이라는 가치와 몸의 완성이라는 목표를 가장 손쉽게 해결해주는 해법으로 간주되기에 이르렀다. 이제 누구도 촌스럽게 성형수술의 유무를 놓고 도덕적 판단을 내리지 않는다. 오직 수술이 ‘잘’ 되었는 지가 관건일 뿐이다.

지난 10년간 웰빙, 다이어트, 화장술 등 다양한 외모관리 담론과 기법이 만개한 이후, 이제 여성들에겐 미용 성형이야말로 일상적으로 평생에 걸쳐 행해지는 하나의 지배적인 라이프스타일이 된 듯하다. 2009년 <아시아성형수술가이드AsianPlasticSurgeryGuide>의 조사에 따르면 한국은 인구 1만 명당 74명꼴로 인구대비 성형수술 비율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나라이다.성형에 대한 욕구도 강해 지난해 서강대 재학생 5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98%가 성형을 “진지하게 고려해 본 적이 있다”고 답변했으며, 전북의 한 대학교 총학생회장 선거에서는 성형수술비지원을 공약으로 내건 후보가 나타나기도 했다. 비록 실소어린 반응을 받았지만, 그 후보는 “요즘처럼 취업난이 심각할 때 외모는 빠질 수 없는 스펙”이라며 솔직하게 현실을 환기시켰다.2008년 촛불시위에 모습을 드러낸 이후 ‘개념 여성들의 모임’으로 눈길을 끈 국내 최대의 여성 인터넷 커뮤니티 ‘삼국카페’(‘소울드레서’, ‘화장발’, ‘쌍코’)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 각각 패션, 화장기술, 쌍커풀과 코 성형에 대한 정보를 나누는 곳이다. 미용과 성형이 오늘날 젊은 여성들의 가장 큰 관심사라는 점을 여실히 보여준다.

성형을 통해 외모로 인한 차별과 열등감을 극복하고, 사람들의 불편한 시선을 받지 않으면서 이 세상에 온전하게 소속될 수 있다는 믿음은 성형수술이 여성들 내의 민주화를 가져왔다는 긍정적 인식으로 이어진다(물론 남성이나 자본과의 관계에서는 사태가 정반대일 수 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성형수술을 통해 여성들은 타고난 신체적 결함이나 경제적 여건과 무관하게 누구나 아름다운 몸이라는 목표를 달성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당혹스러운 것은, 누구에게나 민주적으로 아름다움을 요구하는 이 경향이 점점 더 단일한 형태로 사람들을 획일화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남성에게는 가슴근육과 ‘식스팩’을, 여성에게는 V라인의 턱 선과 풍만한 유방과 날씬한 각선미를 요구하는 현재의 편협한 미의식은 그 기준에 합치하지 않는 많은 이들을 고민에 빠뜨린다. 팔자주름, 눈 밑 지방, 탈모 등 한때 자연스러운 신체적 변화로 여겨지던 것들도 이제 치료해야 할 질병처럼 간주되고 있다.

몸이 관리를 통해 증강되고 완성될 수 있는 대상이 되면서, 사람들은 아침에 눈뜰 때부터 잠자리에 들 때까지 내내 몸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못한다. 있는 그대로의 몸은 더 이상 안전하거나 정상적인 것으로 간주되지 않으며, 몸에 대해 걱정하는 것이 당연한 규범처럼 되어버렸다. 매일같이 체중의 미세한 변화에 신경 쓰고, 끼니마다 칼로리를 계산하며, 계획에 맞춰 근력운동과 유산소운동을 병행하면서 끊임없이 ‘옳은 몸’을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우리는 몸에 관해 언제나 신경을 곤두세우고 결단을 내려야 한다. 예전에는 패션이나 건강에 별 신경을 쓰지 않던 사람들도 요즘은 발을 뺄 수 없다. 누구나 멋지게 보이려고 노력해야 하고, 자신의 건강과 안녕을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몸은 자연스럽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각종 시선과 평가가 들러붙고 그에 따라 수선하고 가공해야 하는 치열한 전쟁터가 되었다.

 

미용 산업의 성장과 자기배려 담론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괴로워하는 것을 보면 몸에 대해 집착하는 현상이야말로 질병으로 간주되어야 할지도 모른다. 사실 불과 몇 년 전만 하더라도 그랬다. 성형 수술이라는 신체 변형 행위를 혐오스럽게 보는 시선이 강했고, 성형 수술은 외모주의에 굴복한 나약한 자아의식과 허영심의 산물로 간주되었다. 2006년 개봉해 큰 인기를 얻은 영화 <미녀는 괴로워>는 노래는 잘 하지만 뚱뚱하고 못생긴 외모를 가진 주인공 이 전신성형을 통해 ‘미운 오리 새끼’에서 ‘백조’로 거듭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영화에서 주인공의 친구는 세상에는 예쁜 여자(‘명품’), 평범한 여자(‘진품’), 뚱뚱하고 못 생긴 여자(‘반품’) 세 종류의 여자만 있으며 성형을 한 여자는 인간이 아니라 ‘괴물’이라면서, 성형사실을 공개하려는 주인공을 극구 만류한다. 우리 사회에서 성형수술에 대한 사회적 시선이 긍정적으로 변화하는 단절적 시기를 표지하는 영화지만, 당시 여전히 팽배해 있던 성형수술에 대한 일반적인 거부감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연예인들은 당당히 자신의 성형사실을 밝히고 있고, 나아가 성형을 자신의 고유한 캐릭터로 설정하기까지 한다. 일반 여성들에게도 성형은 숨겨야 할 사실이 아니라 자기관리 노력의 일환이자 경제적 여유로움을 보여주는 지표로 여겨지고 있다. 젊은 여성들은 성형정보 카페에서 성형수술에 대한 전문적 지식과 견적 등 관련 정보를 활발히 교류하며, 마치 전자제품에 관한 사용기를 올리듯 본인의 성형수술 전후 사진을 꼼꼼히 기록한 ‘리뷰’를 올리고 있다. 사실상 이제 한국 여성들에게 성형은 미용실에 가서 파마를 하거나, 백화점에서 핸드백을 사는 것만큼 일상적이고 친숙한 일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남자들의 인식도 많이 바뀌어, 최근 센스 있는 남자친구의 전형은 여자 친구에게 성형수술 시켜주는 남자라고 한다.

이러한 인식의 변화가 문화적 성숙의 결과로 자연스럽게 진행된 것이라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육체에 집착하는 문화와 밀접한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는 미용 산업과 성형 산업은 2000년대 들어 급성장했으며, 몸에 대한 각종 담론을 생산하고 유포하는 데 앞장섰다. 재건성형 위주의 의료서비스 차원에 머물러 있던 미용성형은 2000년대 초반 수천억 원대 시장 규모로 급팽창하면서 ‘산업화’되었다. 2000년도의 성형외과 매출액은 1999년보다 17%가량 늘어난 1700억 원에 달했으며, 비전문의와 피부관리실 등에서 행해지는 음성적인 매출을 감안할 때 실제 시장 규모는 1조원 대에 달할 것으로 추정되었다.성형수술이 고수익을 보장함에 따라성형외과 전문의의 수도 크게 늘어 2000년 926명에서 2005년 1344명으로 45.3%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이 기간 동안 전체 전문의 수가 4만5870명에서 5만8807명으로 28.2% 늘어났다는 것을 감안하면 1.5배 이상 신장한 것이다.그 외에 헤어, 피부미용, 메이크업, 네일아트를 포함하는 뷰티산업의 규모도 크게 늘어 뷰티산업 업체 수는 1995년 65,470개에서 2005년 83,632개로 27.74% 증가했고, 종사자수도 99,342명에서 132,852명으로 33.73% 증가했다.

미용 산업과 성형 산업은 ‘내 몸을 관리하고 사랑하자’는 슬로건이 상업적으로 매우 유용하다는 점을 이내 깨달았다. 전문가들은 자기 자신을 관리하는 방법을 조언하는 담론들을 끝도 없이 쏟아냈다. 특히 성형외과는 심리학으로부터 자신의 환자와 진료에 대해 새롭게 생각하고 의미부여할 수 있는 방법을 터득했다. 이 새로운 수단은 바로 ‘열등 콤플렉스’라는 개념이었다. 신체적 결함 때문에 열등 콤플렉스에 사로잡힌 환자는 그로 인해 자기 확신을 가지지 못하고, 경제적・사회적으로 부정적인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다. 성형외과 의사들은 미용 수술을 통해 ‘마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나섰고, 자기 전문과목이 매우 진지하고 의학적으로 필요한 수술이라 주장할 수 있게 되었다.

텔레비전 프로그램들은 개인이 건강과 아름다움에 신경을 쓰면 왜 좋은지, 왜 그래야 하는지를 끊임없이 설파했다. 다이어트 경쟁으로 우승자를 가리는 서바이벌 프로그램, 메이크업 기술을 알려주고 시연해주는 프로그램, 심지어 최근에는 지원자를 선발해 성형수술을 무료로 시켜주는 프로그램까지 등장했다. 영리하게도 성형 산업은 자유주의 페미니즘과 급진주의 페미니즘에서 주장한 몸의 자기결정권 개념을 신자유주의적인 자기계발 및 자기배려 담론과 교묘하게 버무림으로써 페미니스트들의 공격마저 극복했다. “몸이 정체성의 중요한 표식이 되는 시대에, ‘내 몸을 사랑하는 방법’, 즉 자기를 배려하는 방법은 몸을 가만히 놔두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보수와 개선을 통해 몸, 그리고 자아를 계발해내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성형하는 여성들은 가부장주의적인 외모주의에 굴복한 수동적 주체가 아니라 “‘주체적이고 적극적이며 자신을 사랑하는’ ‘페미니스트적인’ 여성으로 재현”되기에 이르렀다.오늘날 성형 수술은 더 이상 자아에 대한 억압이 아니라, 자아를 증진시킴으로써 삶의 질을 개선해주는 ‘자기 배려의 테크놀로지’가 된 것이다.

 

일상의 연예화와 이미지 과잉의 문화

 

몸의 관리와 변형을 지배적인 문화적 실천으로 만든 데에는 셀레브리티 문화도 큰 몫을 했다. 연예엔터테인먼트 산업이 급성장하면서 사실상 지난 10년간 ‘스타시스템’이 대중문화 전반을 주도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몸을 둘러싼 문화적 인식과 실천의 변화에 있어서도 스타들의 행보가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가수 옥주현은 2004년 성형과 다이어트를 통해 대변신을 감행하면서 대대적인 화제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 해에는 ‘몸짱 아줌마’가 미디어의 주목을 받으면서 전국적으로 몸매 관리 열풍이 일었다. 옥주현의 대중적인 성공은 ‘성공적인 성형’에 대한 예찬론을 이끌어냈고, 이후 연예인들이 당당하게 성형수술 사실을 공개하는 기폭제가 되었다.

아름다움이 민주화되었다고 하지만 일반인들이 성형수술을 통해 얻고자 하는 외모는 결국 연예인들의 그것이다. 예컨대 모두가 김태희의 눈, 한가인의 코, 송혜교의 입술, 김희선의 얼굴형을 꿈꾸는 것이다. 사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연예인들에게 마음이 가 있다. 비단 10대들만 연예인과 스타에 열광하는 것이 아니다. 요즘엔 부모들이 자식들과 함께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출연한 아이돌 그룹에 관해 얘기를 나누며, 30-40대 남성들이 걸 그룹의 삼촌팬을 자처한다. 전 국민이 연예인이 되기 위한 오디션 프로그램에 직접 출연하거나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며, 그런 오디션 프로그램만도 방송사별로 수편이 편성되어 있다. 그런 오디션 프로그램에 출연한 초등학생 또는 중학생 소녀들이 성인 여성의 섹시한 표정을 따라하며 섹시댄스를 추고, 마치 여배우처럼 눈물을 달래면서 눈꼬리를 손끝으로 찍어 훔친다. 어린 소녀들이 연예인의 외모는 물론 사소한 몸짓과 표정까지 놓치지 않고 모방하면서 일찌감치 자신의 신체를 길들이고 있는 것이다.

새로운 디지털 환경과 이미지 문화의 영향력도 빼놓을 수 없다. 영상미디어 산업의 세계화로 인해 오늘날 그 어느 때보다 전 세계에 공통의 이미지가 확산되어 있으며, 거리는 물론 대중교통과 인터넷 사이트 어디에나 엄청난 양의 이미지들이 우리의 시각을 잠식하고 있다. 이미지들의 엄청난 양 때문에라도 우리는 그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이런 이미지들이 끼치는 영향은 과소평가할 수 없다. 이러한 이미지들이 우리의 시각적 문법을 구성하면서 몸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구성하고, 나아가 우리와 몸의 관계를 바꿔나가기 때문이다. “존 버거는 (부르주아) 여성들이 남들에게 관찰되는 자기 자신을 관찰한다는 선견지명 있는 발언을 했는데, 요즘의 여성들은 거기에서 더 나아간다. 여성들은 관찰자의 응시를 받아들이고, 스스로를 외부에서 관찰하여, 온 사회에 만연한 시각문화의 요구에 자기가 늘 뒤처진다는 것을 발견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러한 뒤처지는 느낌을 자신의 탓으로 쉽게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지만, 실상은 그 반대이다. 우리가 일주일에 족히 수천 번은 보고 있는 신체이미지들은 대개 디지털 기술로 조작된 것들이기 때문이다. 우리 몸이 아니라 그 이미지들이 ‘비정상’인 것이다. 모델사진을 찍을 때는 요즘 각광받는 신체적 특징들이 과장되어 보이도록 세심하게 조명과 카메라 앵글을 설정하며, 그렇게 찍은 사진도 포토샵과 같은 이미지조작 프로그램을 통해 더 완벽하게 다듬는다. 피부의 잡티는 없애고, 허리는 더욱 잘록하게 지우고, 다리는 더욱 길고 날씬하게 늘린다. 이러한 기술적 조작은 블로그나 미니홈피에 사진을 올리는 일반인들에게도 이미 익숙한 것들이다. 그런데 현실과 이미지의 이러한 괴리는 더 이상 문제되지 않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성형수술의 아이러니는 본인은 정작 변한 자신의 모습을 남들처럼 3차원의 공간 속에서 볼 수 없다는 점이다. 거울에 비친 모습이나 사진을 통해 기껏해야 2차원의 이미지를 볼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부유하는 이미지들, 원본과의 연관을 잃은 시뮬라크르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그들에겐 2차원의 이미지만으로도 충분한 것이리라.

 

몸의 안식을 위하여

 

점차 많은 사람들이 기본적인 섭식의 쾌락마저 포기하며 다이어트를 하고, 고통스러운 과정을 거쳐 성형수술을 하고 있다. 이를 두고 본인이 만족스러워 하면 문제될 것 없지 않느냐는 반응이 주를 이루는 것 같다. 그러나 우리는 진정 만족스러워 하고 있는가? 우리는 여전히 몸을 위협적인 존재로, 가만히 놔두면 비정상의 편으로 나아가는 취약한 대상처럼 취급하고 있진 않은가? 이런 관점에서는 늘 실패할 수밖에 없다. 몸은 반드시 잘못되기 마련이니까. 게다가 미용/성형 산업과 셀레브리티 문화는 몸에 대한 불안을 자양분 삼아 성장한다. 이상적인 아름다움, 완벽한 육체에 대한 각종 담론과 디지털 기술로 보정된 신체이미지들은 우리를 끊임없이 비참하게 만든다. 자기계발과 자기배려 담론은 몸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와 사회적 조건이 아니라 우리의 개인적 노력이 부족한 게 문제라는 입장을 암암리에 설파한다. 이 회로에 편입되는 순간 우리는 몸을 둘러싼 끊임없는 전투와 경쟁에 내몰리는 것 외에 탈출구가 없다. 우리는 마땅히 달성해야 할 ‘옳은 몸’을 창조하는 데 항상 실패할 테니 말이다. 우리에게는 일시적인 평화만이 주어질 뿐이다. 정녕,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 충분한 몸이란 이제 없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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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학생운동, 정치의 복원을 위해

2011.12 <청년운동 별자리잇기> 집담회  발제문

 

 

 

1. 드디어 자본주의의 위기가?

 

2008년 서브프라임모기지 사태로 촉발된 미국의 경제위기 이후 공적자금의 대대적인 투입과 은행의 국유화 정책 등으로 한시름 놓는가 싶던 글로벌 자본주의가 채 3년도 지나지 않아 다시 수렁에 빠졌다. 이번 위기의 진원지는 스페인, 그리스, 이탈리아, 영국 등 유럽이었다. 지난 2008년 위기 때 민간부채를 진화하기 위해 투입했던 공적자금이 최근 각국의 긴축정책과 맞물려 이번엔 공공부채의 위기로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 것이다. 바야흐로 조지 소로스와 워렌 버핏 등 20세기 후반 자본의 화신들이 금융자본주의와 부자들의 탐욕을 개탄하고, 자본의 나팔수가 ‘자본주의 4.0’ 운운하는 새로운 자본주의 모델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며 자본주의의 복구를 꿈꾸는 상황이다.

지난 40여 년간 극단적인 불평등과 삶의 질 저하를 가져 온 신자유주의 체제에 대한 민중들의 저항도 가히 정점에 달했다. 아랍의 봄을 시작으로 유럽 각국에서의 노동자 파업과 학생들의 투쟁, 교육 공공성 확보를 위한 칠레와 콜롬비아 등 남미의 학생시위, 제국의 심장 뉴욕 월가에서의 점거 투쟁까지. 한국도 2008년 촛불시위 이후 사그러들었던 대중투쟁이 희망버스로 재점화 되었고, 두리반과 마리, 홍익대 비정규직 청소노동자와 서울대 본관점거 등 투쟁현장에 대한 청년학생들의 연대가 활발히 진행되었다. 좌파들은 자본의 위기와 그에 대한 지배계급의 무능한 대응이 자본주의에 대한 신앙심을 무너뜨리면서 대중의 집단적 권력의식을 새롭게 각성시키고 있다고 내심 이번 위기를 기회로 여기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대중이 삶의 조건이 열악해져 생존을 위협당한다고 해서 당장 바리케이드를 치고 거리로 뛰쳐나가는 것도 아니다. 현 정세가 보여주듯 정권에 대한 일시적이고 감정적인 분노의 표출로 해소되거나, 중산층 부르주아의 이데올로기에 포섭되어 정권교체와 합리적 개혁이라는 거짓 해법으로 이끌리거나, 외국인 노동자와 일탈적인 범죄자 등 내부의 이방인에 대한 책임전가와 증오로 발현되기 일쑤다. 나아가 자본의 위기는 자본의 기회이기도 하다. 자본은 이참에 낡은 자본주의 질서와 과잉 축적된 잉여자본들을 일거에 청산하고 새로운 자본축적의 길을 모색할 수도 있다. 그 중 하나가 이미 착실히 진행되고 있는 ‘녹색경제’로, 자본은 생태적 위기를 신흥 축적 엔진으로 삼아 미개척된 생태계에 대한 파괴와 상품화로 나아갈 태세를 단단히 갖추고 있다.

냉정히 말해 좌파는 자본주의의 역사적 격변으로 기록될 현 위기 정세에 능동적으로 개입하지 못하고 있으며, 자생적으로 터져 나오는 대중투쟁의 흐름을 간신히 따라잡고 있는 형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현실 사회주의의 몰락과 전지구적인 신자유주의적 재편이라는 수세적 정세 속에서 좌파는 진보적 사회변혁의 가능성을 체념하는 시대분위기에 이내 압도당했고, 위기 이후의 미래를 대비하는 조직화는 꿈도 못 꾸고 있는 실정이다. 그리고 좌파 정치세력의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대응과 전망의 부재 속에 (최소한 국내에서의) 대중투쟁은 일시적이고 막연한 분노의 표출로 끓어오르다, 임계점에 이르지 못하고 다시 식어버리는 비등혁명의 악순환을 반복하고 있다.

대중으로부터의 괴리라는 (상상적) 트라우마로 인해 좌파가 정세에 대한 능동적 개입을 주저하고 고민하는 사이, 진보적 자유주의자들이 위기에 대한 해법과 대안을 내놓으며 정치지형의 프레임을 우견인하고 있다. 일부 좌파들마저 동참하고 있는 케인즈주의적 복지국가로의 회귀와 절차적 민주주의의 회복. 케인즈주의는 현 위기를 실물자본과 유리된 금융자본의 횡포와 타락으로 규정하고, 글로벌 금융자본에 대한 통제와 규제를 통해 실물경제의 건강성을 되살리려 한다. 그러나 1970년대 이루어진 금융규제 완화는 단지 금융자본가 계급의 로비나 정치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글로벌 생산 시스템의 출현에 대응하는 글로벌 금융 시스템의 탄생과 그로 인한 금융 산업의 발전에 뒤이어 꾸준히 진행된 것이다. 따라서 글로벌 수준의 금융자본 이동을 통제한다는 것은 다국적 생산 체제 자체를 거부하고 일국적 자본주의 경제 질서로 돌아간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자본주의의 구조적 변화에 대한 안이한 이해에 근거한다.한편, 절차적 민주주의의 회복과 정권교체를 희망하는 진보적 자유주의 세력은 현 경제위기의 본질을 파악하지 못한 채 기껏 노무현 시대로의 회귀를 꿈꾸는 듯하다. 이들은 사실상 자신들이 처한 계급적 이해관계(중산층 부르주아)에 부합하는 “착한 신자유주의 체제”를 구상하면서 사회의 급진적 변화를 꿈꾸는 좌파의 이상을 끊임없이 조롱하고 억압한다는 점에서 좌파의 가장 큰 적이 아닐 수 없다.

지금의 경제위기가 자본주의의 종말까지는 아니더라도 지난 40여 년간 군림했던 신자유주의 체제의 종언을 예고하고 있다는 점만은 분명하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지난 역사가 알려주듯 자본주의는 과잉생산과 이윤율 저하에 기인하는 축적의 위기를 언제나 새로운 시장의 개척과 민중과 노동자의 부에 대한 착취로 극복해왔다. 1970년대 이윤율 저하의 위기를 공적 서비스의 민영화와 상품화, 가사와 돌봄 노동 등 새로운 서비스 시장의 개척, 제 3세계의 자원과 생태계에 대한 수탈 등 상품화의 확대 및 사회적 부에 대한 전유와 탈취로 회복했던 것처럼 말이다. 그 가장 그로테스크한 사례 중 하나가 교토의정서를 계기로 오염물질 배출권의 명목으로 부정적 가치마저 화폐경제에 포섭했던 것이 아닐까.

여기서 자본주의적 ‘상품화’의 동학에 대해 다시 한 번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마르크스의 분석대로 전면적인 상품(화폐)관계의 확산과 노동력의 상품화 과정은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종차를 구성한다. 오늘날 이러한 상품화의 동학은 신자유주의적 금융화의 메커니즘 속에서 새로운 차원을 획득한다. 금융화는 단지 거시경제의 한 흐름을 일컫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적 실천과 경제에 대한 지배적 표상을 재설정하는 기제로 작동하고 있다. 지난 30년에 걸쳐 금융부문이 엄청나게 성장한 결과, 노동자계급도 연금, 주택담보대출, 신용카드 부채 등을 통해 금융의 순환과정에 편입되었다.

한국 사회에서도 IMF 금융위기 이후 노동자계급은 구조조정과 정리해고로 인한 실질소득의 감소를 주택담보대출과 신용대출에 의존하는 방식으로 연명했고, 이러한 부채는 노동계급으로 하여금 집단적 변혁을 꿈꾸기보다 자본가계급 못지않게 자본주의의 존속에 목매다는 신세로 전락시켰다. 특히 이 기간 대학이 신자유주의적으로 재편되는 과정에서 등록금 자율화 조치로 인해 등록금이 수직상승했고, 이는 마찬가지로 진보운동에 헌신적이던 대학생층을 옭아매는 기제로 작동했다. 가정 경제가 어려워진 상황에서 대학생들 다수는 등록금과 생활비를 대기 위해 장학금과 아르바이트에 의존할 수밖에 없게 되었고, 졸업 후에도 학자금 대출을 갚기 위해 가급적 고임금의 일자리를 얻으려고 하게 되었다.

미래의 소득을 담보로 한 신용의 제공은 달리 말해 노동자계급과 청년층의 미래의 삶을 현재 시점에 착취한다는 것을 뜻한다. 당장의 경기 유지를 위해 전 국토를 유린하고 있는 각종 토건 사업도 돌이킬 수 없는 생태적 파괴를 자본축적의 동력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미래의 삶에 대한 수탈이다. 위기에 내몰린 자본은 지속가능한 생태적 환경과 미래 세대의 삶의 질을 착취하는 방식으로 끈질긴 삶을 연명해가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케인즈주의 복지국가로의 회귀와 같은 기만적인 봉합책 대신 자연과 인간의 관계, 인간과 사회의 관계를 전면적으로 재구성하는 글로벌 자본-생태 시스템의 총체적 변혁을 고민해야만 한다.

 

2. 청년세대의 사회경제적 조건

 

과거 사회적 문제해결의 주체였던 청년세대와 달리 오늘날의 청년세대는 그들이 처한 사회경제적 조건으로 인해 그 자체 우리 사회가 해결해야 할 난제가 되어버렸다.

한국전쟁 이후 냉전체제로 인한 시민사회의 부재 속에서 소수의 사회적 엘리트라는 안정적인 신분을 바탕으로 학생운동은 기본적으로 청년학생계층의 계급적 이해관계나 권리보다 전체 민중과 노동자 계급의 정치적・경제적 이해를 대변하고 투쟁의 선봉에 서는 ‘전위’ 내지 ‘동맹자’의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고 규정되어 왔다. 나아가 이들은 자연스레 스스로를 엘리트 지식인으로 규정했다. 그러나 소수의 엘리트 사회지도층이었던 학생의 지위는 고등교육의 보편화와 더불어 노동시장에 진입하기 전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과도기적 지위의 예비-노동자로 전환하게 된다. 한국 사회에서는 1981년 대학 졸업정원제의 실시와 1995년 대학정원 자율화 정책으로 대략 1990년대 중반을 계기로 대학생 수가 급격히 증가하면서 대학생의 사회경제적 지위도 일정한 조정을 겪게 되었다. 그러다가 1997년 IMF 외환위기를 계기로 노동시장이 개편되면서 청년학생층은 급기야 상대적 과잉인구로 등장하기에 이른다.

현재의 20대부터 30대 중반까지를 아우르는 현 청년세대는 IMF위기 이후 20대에 진입한 이들로, 고용 없는 성장과 불안정노동의 전면화를 핵심기조로 삼는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의 세례를 정면으로 맞아 과거의 청년세대와 달리 노동체제로부터 철저히 배제되고 있다는 특징을 지닌다. 우선 2000년 이후 전체 실업률은 3~4%대 수준을 보이고 있지만, 20대 실업률은 7~10%대 수준을 오르내리면서 전체 실업률의 2배 수준에 이르고 있다. 그러나 이는 정부의 공식적인 통계수치일 뿐 청년층이 느끼는 체감실업률은 그보다 몇 배 더 높다. 2010년 1/4분기 기준 청년층의 실업률은 9.1%로 37만여 명으로 집계되고 있다. 그러나 비경제활동인구 230만여 명중 재학생을 제외한 취업준비생과 ‘그냥 쉼’으로 응답한 ‘백수’ 계층을 포함하면 광의의 취업애로계층은 100만 명을 넘어 청년실업률은 20%에 육박하게 된다. 청년층 5명 중 1명은 취업이 되지 않아 직간접적인 고충을 겪고 있는 셈이다. 게다가 전체 임금노동자의 20%를 차지하는 20대 임금노동자 340만여 명중 50%에 해당하는 170만 여명이 비정규직인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IMF 외환위기 이후 신규졸업자의 절반 이상이 임시직이나 일용직으로 고용되면서 나타난 결과이다. 특히 신규고졸자의 경우 임시직과 일용직으로 고용되는 비율이 80%를 넘어서는 등 학력에 따른 불평등도 극심해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최근의 각종 고시열풍이 보여주듯 아직 완전히 닫히지 않은 취업시장에 진입하기 위해 살인적인 경쟁을 치르고 있지만, 기계화∙자동화에 따른 산노동의 배제를 특징으로 하는 자본주의 발전경향을 고려할 때 바늘구멍은 더욱더 비좁아질 것이다. 이들은 현재와 같은 고용시장 환경에서 안정적인 일자리와 소득을 얻기 힘들며, 그렇기에 부모의 경제적 도움 없이는 변변한 방 한 칸을 마련하기 힘든 세대이고, 자연히 결혼과 출산에 대한 전망도 불투명한 세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단적인 정치적 투쟁의 경험이나 연대성의 체험이 전무해 해방의 전망과 비전에 대해 가장 회의적인 것이 바로 이들이기도 하다. 이들이 겪는 전망 없는 절망의 체험은 급기야 자살이라는 극단적 선택으로 표출되고 있다. 즉 이들 세대는 단순히 노동시장에서뿐만이 아니라 (미래의 삶을 포함해) 삶 전체를 착취/배제당하고 있으며, 한국사회 특유의 제반 사회경제적 모순을 한데 응축하고 있는 세대인 것이다.

따라서 부모의 경제력에 힘입어 노동시장에서 한 자리를 꿰찬 소수를 제외한 나머지 주변부 노동인구의 계급적 이해를 실현하는 운동이 구성될 필요가 있다고 할 때, 그것은 불안정노동의 폐해를 한 몸에 떠안고 있는 청년세대가 중심이 되는 새로운 형태의 ‘노동자 운동’이 될 것이다. 현재 정규직 대기업 중심의 기존 노동운동은 점차 고령화 되고 정규직의 신입채용 비중이 낮아지면서 청년층을 흡수하지 못하고 있고, 청년세대와의 정서적・문화적 괴리감으로 인해 청년들의 노동조합 참여유인을 끌어내지 못하고 있다. 문화적 괴리감은 때로 경제적 이해관계를 뛰어넘을 만큼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데, 한국사회의 경우 압축적 근대화로 인해 불과 10년 터울의 세대 사이에서도 단절적인 감정구조가 형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정치운동에 학생대중을 동원하려 하거나 조합주의적 실천에 매진해 온 기존의 학생운동 또한 ‘노동자운동/사회운동으로서의 청년학생운동’이라는 문제의식을 전혀 담보하지 못하고 있다. 오늘날 대학생은 사회적 특권층이라기보다 ‘지식 노동자’로서 ‘잠재적 산업예비군’이라는 열악한 경제적 지위에 놓여 있는 계층이다.따라서 청년세대의 사회경제적 이해를 대변하면서도 이를 변혁적인 사회운동에 접목시키는 ‘노동운동/사회운동으로서의 청년학생운동’을 통해 청년층에 부과되고 있는 계급적 착취와 적대의 선을 명확히 설정하고, 새로운 감수성과 욕망의 배치로 특징지어지는 전복적인 운동 형태를 구성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다급한 필요에도 불구하고 1990년대 중반 이후 학생운동의 몰락과 신자유주의적 대학개조로 인한 물적, 이데올로기적 조건의 악화 속에서 청년세대의 운동역량은 심각하게 저하되었다. 무엇보다 여전히 자치기구로서 학생회의 구조와 형식은 남아 있되 운동인자들의 재생산에 실패하면서 활동의 동력을 상실해버렸다. 그리고 그 틈을 신자유주의적 경쟁 논리와 탈정치 이데올로기가 장악하게 되었다.

 

3. 청년세대의 이데올로기적 조건과 주체성

 

IMF 외환위기를 계기로 신자유주의적 삶이 전면화 되면서 우리는 자신의 ‘생존’을 가장 소중한 가치로 설정하라는 권력의 명령을 체화해야만 했다. 살아남아야 한다는 압박감은 이 시기 모든 사회구성원에게 공통된 것이었지만, 청년세대에겐 학력자본의 가치하락과 더불어 취업문이 좁아지면서 더욱 절박한 요구가 되었다. 이 과정에서 이들 세대가 처한 사회경제적 모순은 “세대내 경쟁”으로 치환되어 당사자들 사이의 무한 군비경쟁을 초래하게 되었다. 한때 타파해야 할 구습이었던 학벌주의가 대학사회에서 지배적 이데올로기의 왕좌를 꿰차기 시작한 것이 대략 이때부터다. ‘서연고/서성한/중경외시/동건홍/국숭세단/광명상가/한서삼…’으로 이어지는 대학서열과 스펙 쌓기는 비판의 대상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현실이 되었고, 이를 비판하는 이들은 ‘학교발전을 저해하는 공동체의 적’으로 낙인찍히게 되었다.

대학서열화는 일차적으로 보수언론이 주관하는 대학평가와 글로벌한 대학경쟁 구도의 보급을 통해 유포되지만, 그것을 적극 지지하는 학생들의 ‘자발적 협력’에 의해 뒷받침 되고 있다. 이것은 일종의 ‘군비경쟁’으로 대학간 상호 경쟁적인 등록금 인상을 통해 투입해야 할 비용은 꾸준히 증가한다. 그리고 그렇게 인상된 등록금은 교육의 질을 개선하는 데 투자되기보다, 상품으로서 대학의 가치를 높여주는 건물증축에 우선적으로 투입되고 있다. 스펙경쟁은 개개인의 수준에서 벌어지는 군비경쟁이라 할 수 있다. 스펙 요구사항이 높아질수록 개인들이 투여해야 하는 에너지와 비용은 증대하지만, 취업 자격요건에 대한 결정권을 쥐고 있는 기업 입장에서는 아무 것도 손해될 것이 없다.

이러한 ‘죄수의 딜레마’ 상황에서 벗어날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일단 모두가 동시에 군비경쟁에 투입하는 비용을 줄이기로 합의하면, 모두 이전에 비해 줄어든 비용으로 경쟁에 참여하게 된다. 게임에 참여하는 비용은 줄었지만, 게임의 룰은 그대로이므로 모든 참여자가 동등하게 혜택을 입는다. 따라서 군비경쟁을 규제하여 사회적 비용을 줄이려면 제 3자가 개입하거나, 당사자들의 집단적 연대를 통해 게임의 룰을 변형시키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오늘날 대학생들은 학생운동의 몰락으로 대학 내에서 집단행동을 조직하기 어려워졌고, 과거 대학공동체를 바탕으로 형성되었던 공동체성이나 연대성의 경험이 없으며, 학점관리와 취업준비에 전념하느라 절대적인 여유시간이 부족하다. 더욱이 대다수의 대학생들은 이 악무한의 생존경쟁을 전복하려는 의지도 별반 보이지 않고 있다. 사실 대학가에선 후안무치한 경쟁의 투사들이 ‘우세종’의 지위를 차지한 지 오래다. 최근 들어 학벌주의와 대학서열화에 대한 대학생들의 자성이 ‘규범적’ 수준에서조차 제기되지 않는다는 점을 떠올려 보라.

올 한해 한대련의 헌신적 활동으로 ‘반값등록금’이 의제화 되긴 했지만 등록금인하에 대한 목소리가 높지 않은 것도 대학서열의 논리가 저변에 깔려있기 때문이다. 소위 서울 소재 명문대 학생들에게 고액 등록금은 ‘대학의 격’을 나타내며, 학교발전에 대한 전망을 보여주는 지표이다. 대학평준화나 서울대 해체처럼 대학개혁의 일환으로 제시되는 각종 정책들에 관심이 적은 것도 비슷한 이유에서다. 서울대가 해체되면 연고대가 그 역할을 대신할 테고, 전국의 대학을 평준화 하면 해외유학을 다녀온 부잣집 자식들이 특권층을 형성하게 될 것이다. 각 개인에겐 능력의 차이가 존재하고, 대학서열은 개인의 능력을 투명하게 반영하는 지표이다. 우월한 계급지위를 차지하려는 공통의 열망과 인정투쟁이 존재하는 한 무엇을 지표로 삼건 서열화와 위계구조는 존재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 ‘서성한’에 속해 있건 ‘지잡대’에 속해 있건 일단 공정한 게임의 룰에 따라 획득한 지위를 받아들이고, 열정과 조건이 허락한다면 사닥다리의 윗자리를 향해 분투하면 된다…. 그리하여 지방대에서 ‘In 서울’로, ‘중경외시’에서 ‘서연고’로, ‘문사철’에서 ‘로스쿨’로 향하는 끝없는 이동이 시작되고, 독학사부터 편입학까지 이를 돕는 방대한 시장이 형성된다.

대입을 향한 20년의 ‘한 줄’ 경쟁, 그리고 그 이후 곧바로 이어지는 스펙경쟁에 삶의 모든 열정과 에너지를 쏟고 있는 청년세대에게 이러한 현실인식은 자명한 것이다.

 

경쟁의 외부에 단 한 번도 서본 적이 없는 20대에게 경쟁은 인위적인 게임이 아니라 자연발생적인 사회의 작동원리인 양 여겨진다. 그래서 게임 자체를 거부하거나 게임의 룰을 전복하려 하는 대신, 더욱 엄격한 룰의 적용을 요구한다. 더욱 엄정한 학사관리와 상대평가 실시, 룰의 위반자들에 대한 철저한 불이익, 무임승차하는 자들에 대한 극단적인 증오…. 〔…〕 그들에게 게임은 모든 것이며, 외부는 없다. 즉, 세상은 언제나-이미 닫힌 공간이며, 따라서 현실은 절대적으로 긍정된다. 20대의 현실 인식은 “어쩔 수 없다”와 “안 될 거야 아마” 사이에서 진자운동을 한다.

 

의미 없는 군비경쟁으로 삶이 피폐해지지만, 개인의 선택과 책임을 강조하는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에 전면적으로 노출된 이 세대는 자신이 처한 억압적이고 모순적인 상황에 대해 사회적 책임을 묻는 대신 개인의 실패로 받아들이는 데 익숙하며, 개인 단위의 경쟁과 고립되고 파편화 된 삶을 당연한 것으로 간주한다. 그리하여 ‘성공 신화’에 빠져 부단히 자기-계발을 하거나, 경쟁을 포기하고 스스로 ‘루저/잉여’가 되는 극단적인 개인주의적 주체성의 모델만을 가지고 있다.

‘벌거벗은 삶’의 고단함과 피폐함, 그리고 출구에 대한 전망 없이 목을 죄여오는 권력의 거대한 힘은 주체들을 존재론적 유아들, 자신을 어린아이나 애완동물처럼 귀여운 존재로 변모시키는 칭얼대는 주체들로 구성한다. 약한 자는 귀여움을 통해 강자로부터 일정한 안전을 제공받을 수 있다. 나아가 귀여움의 태도는 현실적으로 전제되어 있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상태에서 사전에 극단적인 충돌을 방지하는 약자간의 협약과도 같다. 그리하여 오늘날 우리 모두는 서로에게 귀여운 존재들이다.

 

… 무치(無恥)의 裸身, 그것이 저 천진난만하고 해맑고 온순하고 무해하고 앙증맞고 사랑스럽고 귀여운 동물+속물들인 것이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지식인’도 ‘노인’들도 ‘대학생’도 ‘군인’도 ‘조폭’도 이종격투기의 ‘챔피언’도 ‘성직자’도 심지어는 ‘귀신’도 이제는 모두 귀여울 뿐이다. 모두가 적당히 모범적이며, 적당한 두려움을 갖고 있으며, 적당한 선에서 타협할 줄 안다. 모두가 알고 있는 것이다. 괴롭게 살지 말자. 쉬운 길이 있다. 그것은 나쁜 것이 아니다. 잘 먹고 잘 산 수 있으면 속물이고 어떻고 동물이면 어떤가? 부끄러울 것 없다. 인생 뭐 있는가?

 

한편 우리 시대를 지배하는 ‘자기-계발’하는 주체의 등장은 새로운 정치적 합리성으로서 국가의 과잉-통치를 비판하고 ‘사회적 문제에 대한 개인적 해결’을 강조하는 신자유주의의 기획과 밀접한 연관을 갖는다. 자기-계발의 이상을 압축하고 있는 것이 근래 회자되는 ‘기업가 정신’이다. 자기-계발의 주체는 조직논리나 계층구조에 순종하는 유순한 주체가 아니라, 새로운 가치를 적극적으로 창조하고 예측 불가능한 환경 변화에 민첩하게 적응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춘 주체이다. 구조조정에 직면한 노동자에게 퇴직은 부당한 현실이 아니라 새로운 기회일 뿐이다. 자기-계발하는 주체는 타자의 의사에 따르거나 명령에 복종하는 대신 자신의 행위에 대한 평가를 자각하면서 자기가 설정한 척도에 비추어 자신을 평가하고 사정하는 자기-평가/자기-감사의 주체이다. 따라서 모든 행위의 책임은 전적으로 개인에게 귀속된다. 자기-계발의 주체는 자기 의사에 따라 선택하고 자발적으로 행동하므로, 자신의 ‘운명’에 대해 그 책임을 타자나 조직에 돌릴 수 없다.

이것이 바로 신자유주의적 ‘자유의 규율’이 추구하는 주체상이다. 이처럼 자기-계발(자기 통치)의 주체가 향유하고 있다고 간주되는 자유에는 어떤 문제가 있을까? 첫째, 자기 통치의 주체는 자신의 삶에 대해 항상 불안과 불만을 갖고 있다. 그들은 자신의 자유로운 선택이 어떠한 결과를 가져올지에 대한 불안을 떨칠 수 없으며, 어떤 지표와 수치에 비추어 자신을 평가하고 자신의 심신을 관리해야 하는지 알 수 없다. 그리하여 각종 평가 기관이나 카운슬러, 테라피스트 등과 같은 전문가들에게 의존해야 한다. 둘째, 자기 책임이 당연한 것으로 수용되는 환경에서 사회적 문제가 능력의 결여나 자기 관리의 실패와 같은 개인적 문제로 환원된다. 다양한 선택지 중에서 자발적으로 선택해야 하는 주체에게 내가 지금 왜 선택해야 하는가, 다른 선택지는 없는가와 같은 일련의 가능한 반문은 애초에 봉쇄되어 있다. 결정의 지연은 자기 통치 능력의 결함을 드러낼 뿐이다. 셋째, 각 개인은 자신의 선택에 대해 타자의 책임을 물을 수 없기 때문에 타자의 좌절이나 실패는 조금 안타깝기는 해도 나와 ‘관계없는’ 일이 된다. 내가 나 자신의 삶에 대해 개인적 책임을 지고 있는 이상, 타자도 그의 삶에 대해 개인적 책임을 져야 한다. 따라서 그/녀의 삶의 파탄은 그/녀의 문제이지 내 문제는 아닌 것이다. 마지막으로 자기 통치하는 주체의 이러한 상호 배타성은 특히 ‘자유의 규율’에 복종하지 않는다고 간주된 타자에 대해 징벌적인 태도를 갖는 특징이 있다. 이러한 타자는 자기 통치의 굴레 속에서 해방된 개인이지만, 나에게 있어선 필요 이상의 부담을 주는 불편하고 귀찮은 존재일 뿐이다.

이로부터 “나는 나”라는 이 시대의 지배적인 정신이 출현한다. 생활과 노동, 불행의 모든 조건들이 개인화되고 개별화되면서 접촉에 대한 히스테리적 욕구가 늘어가고, 내가 ‘나’이고 싶을수록 공허함만 더해간다. 물론 접촉에 대한 욕구와 무관하게 우리는 끊임없이 나를 부담스럽게 하는 타자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다. 90년대 후반 이후 대학가의 주된 화두가 ‘소통’이었다는 것은 접촉과 소통 상실의 시대현실을 역설적으로 반증하지 않는가.

 

나, 너, 우리는, 마치 매표소 창구를 따분하게 지키고 앉아 있듯, 우리의 자아에 매달려 있다. 〔…〕 항구적인 반半파탄 상태, 만성적 괴멸 상태에 처한 자아를 지탱하는 것이야말로 작금의 세상을 돌아가게 하는 비장의 요령이다. 〔…〕 더없이 탐욕스런 소비자이면서 동시에 역설적이게도 가장 생산적인 자아이며, 지극히 사소한 계획에 자신을 열정적으로 쏟아 부었다가 조금 지나면 원초적 유충 상태로 얼마든지 되돌아갈 위인인 것이다.

 

이러한 ‘자아의 요새화’와 개인화 경향은 공적인 영역으로부터의 후퇴와 조응한다. 자유가 공공적 영역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거기에서 이탈하는 움직임을 의미하게 되면서, 공적인 것 일반에 대한 인식의 부재와 멸시가 뒤따르게 된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집단적 연대의식과 공공성의 복원을 위해 무엇보다 타자와의 관계성을 회복해야만 한다. 자기 책임과 개인화의 논리에 따라 타자와의 ‘공간’을 상실하고 스스로를 격리시킨 개인들은 타자의 삶에 생긴 불행한 사태에 대해 도외시하게 된다. 역사를 돌이켜보건대 타자의 자유 상실은 비단 타자만의 자유의 상실로 끝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타자에게 관심을 갖고 타자의 자유를 옹호하는 일은 자기의 당면 이익과 전혀 상관없다 하더라도 ‘세계의 자유’를 옹호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하다.

 

4. 정치의 복원을 위하여

 

학생사회에 만연한 탈정치 이데올로기의 본체는 현실주의와 실용주의라 할 수 있다. 현실을 닫힌 게임의 장으로 규정하고, 보편적 가치의 추구와 공공성의 회복을 꾀하는 정치적 실천 자체를 거부하는 탈정치 이데올로기는 오늘날 대학을 정치의 장소로 복원하려는 모든 시도에 배타적이다.

이는 학생회의 정치적 활동에 대한 끊이지 않는 논란 속에서 쉽게 발견된다. ‘반운동권’을 주창하는 ‘일반 학우’들은 학생회가 공적 대의기구이기에 특정한 정치적 입장을 표방해서는 안 되며, 학생들의 사적 이해관계를 충족시켜주는 복지사업에 국한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들에게 정치는 가치의 추구와 관련되며, 복지는 욕망의 충족과 관련된다. 가치는 다원적이기에 대의될 수 없으며, 욕망을 추구하는 성향은 현실적인 것이기에 보편적이다. 정치적 헤게모니를 상실한 학생운동 진영은 이에 따라 학내정치를 포기하고 복지사업에 전념하는 제스처를 취하곤 했고, 그에 따라 정치는 대학 외부에서 행해지는 것이라는 인식이 강화되는 악순환의 고리가 형성되었다. 그리고 이렇게 공적 영역을 내어준 결과 학내 담론정치의 가능성이 와해되고, 대학은 정치가 사라진 신자유주의적 소비 공간으로 변모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우리는 운동의 물적 조건으로서가 아니라 그것이 가진 형식적 위상으로서 그 자체 ‘정치의 가능성’을 담지하고 있는 학생회라는 대의기구를 다시 사고할 필요가 있다. 아직도 학생회의 정치적 성향이 논란이 된다는 것은 역으로 학생회 기구에 형식적으로나마 남아있는 ‘정치적 보편성의 흔적’이 탈정치적 현실주의 이데올로기에 끊임없는 위협이 되고 있다는 것을 반증한다. 따라서 우리는 단지 운동의 물적 조건을 확보하기 위한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정치적 가능성의 공간을 확보하기 위한 이데올로기적 수단으로서 학생회를 여전히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목적을 위해서라면 한해 학생회를 누가 잡는지는 오히려 부차적인 문제가 될 것이며, 학생회의 위상에 대한 끊임없는 문제제기와 담론투쟁을 통해 나름의 정치적 효과를 얻어낼 수도 있을 것이다.

어떤 정치적 실천이 ‘정치적 가능성의 공간을 여는 것이냐 닫는 것이냐’는 우리가 투쟁의 방향을 결정하는 데 있어 느슨하나마 유용한 지침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예컨대 ‘반값등록금’ 투쟁의 경우 무기력한 대학사회에 정치적 행위의 장을 일정 부분 열었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할 만하나, 그것이 교육공공성에 대한 전면적 요구가 아니라 이명박 정권에 대한 심판의 의미와 더불어 경제적 곤궁에 대한 구호의 요청으로 제시되었다는 점에서 태생적인 한계를 갖는 것이었다. 경제적 어려움에 기초한 심정적 호소는 국가장학금의 제공이나 학자금 대출 확대 같은 선심성 정책으로 언제든 봉합될 위험을 갖는 것이었다. 나아가 이러한 정책들은 결국 개인에 의한 해결을 도모한다는 점에서 신자유주의의 기조에 충실한 것이며, 등록금 투쟁이 교육의 공공성과 대학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정치적 문제제기로 나아가는 것을 제한하는 효과를 낳았다.

한때 자본과 국가권력의 직접적 손길로부터 다소 떨어져있던 대학은 신자유주의 체제 하에서 국가-자본 권력의 주요한 작용 지점이 되었다. 대학정원 자율화와 등록금 자율화, 기업의 법인 소유 허용 등의 정책으로 대학은 자본의 주요한 순환 고리에 편입되었다. 나아가 대학은 그 자체 상품이 되어 캠퍼스를 화려하고 고급스런 소비 공간으로 리모델링하면서 원서대 장사와 등록금 장사를 하고 있다. 또한 산학협력 연구소와 프랜차이즈 업체들을 캠퍼스에 입점시키고 민영기숙사를 들이면서 임대료 장사를 해먹고 있다. 한국연구재단의 독점적인 연구지원과 평가체계로 인해 지식생산 체제는 국가에 전면 포섭되었고, 교수들의 연구활동과 교육활동도 취업률과 외부 프로젝트 수주비 따위의 시장의 평가지표에 종속되었다. 상대평가와 각종 졸업요구사항들의 부가와 같은 학사시스템의 강화는 정치 행위를 위한 최소한의 시간적 여유마저 허용하지 않고 있다.

따라서 대학 자체가 신자유주의 체제의 주요한 고리이자 종속적 주체를 재생산하는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의 일환이라는 점을 새삼 재강조하고 싶다. 학생운동이 몰락하고 학회와 소모임 활동이 쇠락하면서 대학 내 비판적인 연구자, 활동가들이 어느 때부턴가 대학 밖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국가에 의한 제도화와 자본에 의한 상업화에 대항한 ‘탈주’를 감행한 것이다. 대학 바깥에 대안적인 공동체들이 꾸려졌고, 학습과 세미나는 네트워크를 타고 그 곳에 모인 동인들끼리 이루어졌다. 그 결과 대학은 공동화되었고, 무방비상태로 신자유주의에 포섭되어갔다. 제도를 피해 호기롭게 탈주를 감행했던 공동체와 각종 네트워크들도 시장이라는 더 큰 적을 만나 이내 기세가 꺾였다.

2010년 중앙대에서 시작한 자유인문캠프는 기본적으로 대학에 대한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했다. 2008년 두산이 재단으로 들어온 이후 2010년을 기점으로 중앙대는 기업식 구조조정의 최전선이 되었다. 총장직선제가 폐지되고 교수연봉제와 평가제가 도입되었으며, 인문학과 통폐합을 목적으로 하는 학문단위 재조정이 시작되었으며, 교지 <중앙문화> 등 학내 비판적인 언론과 자치기구에 대한 탄압이 자행되었다. 일방적인 의사결정 구조와 탑다운식 구조조정에 대해 교수협의회, 총학생회, 교직원노조 등이 반발하고 나섰으나, 학교 측은 기업식 구조조정에 우호적인 학내 여론을 기반으로 공세를 멈추지 않았다. 저항 진영을 무엇보다 힘들게 한 것은 학교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형성된 학생들의 친-재단적 여론과 암묵적인 동조였다. 학생들은 비판적인 교수들에게 철밥통을 지키려는 이기주의라며 비난했고, 총학생회에 대해선 운동권의 정치공작이라며 비판했다. 급기야 크레인과 한강철교에 올라가 학내 구조조정 반대의사를 표명했던 학생들에 대한 징계로 이어졌고, 학교본부의 강경한 태도 앞에 저항진영은 깊은 좌절과 패배감에 빠져들었다.

기나긴 투쟁 과정에서 뼈저리게 느낀 것은 학생들의 학교발전 이데올로기와 친기업 성향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비판의 실패, 그리고 비슷한 얘기겠지만 저항진영의 담론형성 능력 부족과 투쟁방향 설정에 있어서의 전략부재였다. 학내 어떤 단위도 대학의 기업식 구조조정에 대한 효과적인 저항논리를 설파하지 못했고, 당장의 현안에 대응하고 투쟁을 조직하기에 급급했다. 오랜 기간에 걸친 제반 학생회 조직과 학회, 소모임 등의 몰락이 투쟁의 기초가 되는 광범위한 담론적 헤게모니의 상실, 활동 주체의 역량 약화로 나타났던 것이다. 비판적 인문사회과학에 대한 일상적인 교육과 토론의 장을 건설하는 것이 시급했고, 무엇보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저항의 기초를 닦을 진지와 네트워크의 구축이 절실했다. 이에 인문학 대중강좌라는 틀을 통해 교육문화운동을 개진하고, 학내 흩어져있는 비판적인 주체들을 서로 엮을 수 있는 대안적인 장을 마련하고자 했다.

여기서 네트워크라는 표현은 좀더 세심하게 강조될 필요가 있다. 우리는 경험을 통해 네트워크가 통상 담지하고 있는 자생적이고 수평적인 메커니즘들에 대한 신념이 다분히 공허한 환상이며, 네트워크는 주의 깊은 방식으로 끊임없이 조직될 필요가 있다는 점을 깨달았다. 그리고 네트워크 안에서 우리 스스로 교육하고 조직될 필요가 있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자유인문캠프는 중앙대라는 고유한 장소성을 기반으로 공개강연, 인문학강좌, 영화상영회, 독립저널 발간 등 다양한 방식의 활동을 통해 학내 학생정치조직, 세미나 조직, 정당 학생위원회, 비판적 교수들의 모임, 학교 바깥의 다양한 정치적 모임, 학내외의 비판적 연구자, 지역의 당원협의회 등을 넘나드는 네트워크를 구축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결국 신자유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공통된 과제는 쉽게 달아올랐다 쉽게 사그라지는 일시적인 분노를 담아내어 지속적인 분노와 저항으로 승화시킬 조직을 만들어내는 것일 게다. 그리고 그러한 조직은 민주적인 의사결정과 상호협력적인 시스템의 구축을 통해 개인의 희생과 영웅주의적 결단에 의존하지 않는, 유연하면서도 견고한 형태로 부단히 전화하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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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디 파시즘'이 몰려온다

<잠망경 1호> 2011.12

 

 

 

지난 10월 17일, ‘일방적 구조조정에 맞선 200인 중앙인 원탁회의’가 열렸다. ‘원탁회의’는 구조조정에 대한 문제제기라는 점과 더불어 ‘정문 앞 잔디밭’에서 진행된다는 점 때문에 홍보 단계부터 뜨거운 논란이 되었다. 올해 초 R&D센터의 건립과 더불어 정문 일대를 개비하면서 새롭게 조성된 잔디밭. 거기가 어디 예사 잔디밭인가. 비록 소박한 규모지만 사진의 배경으로 삼을만한 몇 안 되는 포인트이고, 나아가 ‘국내 5위 대학(서연고중성!)’을 향해 나아가는 글로벌 중앙대의 새로운 상징과도 같은 곳이다. 그리하여 행여 잔디 다칠세라 누구 하나 즈려밟지 않고 직각보행을 감수해 오지 않았던가. 학교 측은 애초에 불허 방침을 내렸으나 주최 측은 예정대로 행사를 강행했고, 학교 측은 결국 행사가 끝난 후 3명의 학생에게 징계절차를 위한 ‘학생상벌위원회’ 출석을 요구했다. 그 중 한 명은 지난해 구조조정 반대활동으로 이미 두 차례 징계를 받았던 철학과 김창인 씨다. 그는 구조조정에 반대하는 활동을 벌였단 이유로 이제 세 번째 징계를 받을 처지에 놓였다.

 

정치의 소멸을 꿈꾸는 파시스트 대학

 

중대신문 보도에 따르면 학교 측은 “미허가 집회 개최, 미허가 광고물 부착, 수업 및 연구 활동 방해, 외부인사의 학내초청, 시설물 손괴” 등 다수의 학칙위반을 근거로 상벌위원회를 소집했다. 미허가 포스터는 하루에도 수백 장씩 붙고 있고, 외부인사도 하루에 수백 명씩 중앙대를 드나든다. 애초 기획과 달리 행사 당일엔 30명 남짓의 학생들이 모여앉아 조용히 토론을 진행했으니 수업과 연구에 방해가 되지도 않았고, 잔디밭(시설물?)도 조금 밟혔을지는 모르나 큰 문제는 없었다. 대단한 근거라도 있는 양 늘어놓았지만 결국 요점은 하나다. 애초에 “사전 경고와 집회 불허를 통보”했으며, 주최한 학생들도 이미 징계를 감안하고 행사를 강행했다는 것. 그러니 이제 순리에 따라 징계를 내리겠다는 것.

그러나 학교 측이 내세우는 ‘미허가 집회’라는 규정은 헛소리에 불과하다. 학칙 제65조는 학생의 집회 절차와 관련해 “사전 신고”를 하라고 규정되어 있지, ‘사전 허가’를 받아야 한다는 규정은 없다. 학칙에 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우리 헌법은 원칙적으로 집회에 대한 허가 자체를 인정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헌법21조2항언론, 출판에 대한 허가나 검열과 집회, 결사에 대한 허가는 인정되지 아니한다.”) 표현의 자유와 더불어 집회와 시위의 자유는 개인의 자기결정과 권리의 발현은 물론 여론 형성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민주주의 사회의 ‘불가결의 근본요소’로 인정된다. 즉, 원칙적으로 ‘미신고 집회’는 있을 수 있어도, ‘미허가 집회’나 ‘불법 집회’는 개념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 오직 집회를 하는 과정에서 불법적인 행위가 발생할 수 있을 뿐이다. 따라서 ‘미허가 집회’ 운운하며 징계에 회부하는 것은 학칙에 대한 오독에 근거하며, 만약 고의적으로 왜곡한 것이라면 ‘공갈협박’에 해당한다. 나아가 헌법에 보장된 집회의 자유를 제한한다는 점에서 심각한 위헌 행위가 아닐 수 없다.

한국사회에서 정상적인 중등교육 과정만 이수해도 알 수 있는 ‘신고제’와 ‘허가제’의 법리적 차이를 학교 측이 몰랐을 리 만무하고, 또한 잔디밭에 모여 앉아 몇 시간 토론을 했다고 시설물 손괴 운운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니 결국 이번 사태는 ‘구조조정 반대 집회’라는 정치적 행위에 대한 제재조치라고 할 수 있다. 두산이 법인으로 들어와 기업식 구조조정을 강행하면서 매일 같이 벌어졌던 일들이다. 상명하달과 일사불란한 처리를 강조하는 기업식 운영은 민주적인 토론과 의견수렴을 거추장스런 절차로 여기며, 비판적 여론은 균형 있는 공론 형성을 위해 필요한 목소리가 아니라 근절시켜야 할 적으로 간주한다. 이때 손쉬운 방편으로 징계 등의 행정처리가 동원된다. 억압적인 독재정권도 선거와 법집행 따위를 완전히 무시하지는 않는다. 결국 규칙을 해석하고 적용하는 과정에서 얼마든지 자의적 권력을 행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학교 측이 번번이 내세우는 ‘면학분위기 저해’, ‘학교 명예 실추’ 따위의 규정들은 어떤 행위든 처벌할 수 있는 포괄적인 근거로 활용된다. 이때 행정절차는 결국 자의적 권력행사에 외관상의 객관성과 중립성을 부여하는 알리바이로 동원된다.

 

청년 파시스트들 모습을 드러내다

 

이처럼 정당성 없는 폭압적 조처를 가능케 하는 것이 대다수 학내구성원의 무관심과 ‘카우인’을 중심으로 형성되는 일부 극성인자들의 동조 여론이다. 학교발전에 목매달면서 재단과 학교의 구조조정에 전폭적인 지지를 보내고, 그에 저항하는 구성원들을 학내에서 박멸해야 할 존재로 여기는 이들. 이들 훌리건들에겐 구조조정에 반대하는 모든 움직임이 ‘운동권의 음모’로 간주되며, ‘운동권’이라는 낙인은 마치 수구세력들이 사용하는 ‘빨갱이’처럼 그 자체 ‘악’으로 표상된다. ‘운동권’은 나치 치하 독일의 유태인처럼 시민권을 갖지 못한 내부의 이방인이기에, 어떠한 절대적 증오와 분노의 표출도 정당화된다(‘카우인’에서 운동권 학생들을 대상으로 행해지는 노골적인 언어폭력과 ‘신상 털기’ 행태를 보라.) 그리하여 반대여론을 가진 이들은 애초에 그 공론장을 떠나 버리고, 한 줌의 훌리건들의 의견이 ‘과잉재현’되기에 이른다. 학교발전 이데올로기로 똘똘 뭉친 ‘카우인’에서 나름 균형 잡힌 반대의견도 제시하면서, 그 공간에서 배제당하지 않는 길이 있긴 하다. “저는 운동권이나 좌파는 아니지만…”으로 시작해 “그래도 자랑스런 중앙인 여러분 사랑합니다.”로 끝마치는 것. 이곳에서 공적 발언권을 얻으려면 사상검증과 충성서약이 전제조건인 셈이다.

이번 원탁회의는 온라인에서 익명으로 활동하던 이들 청년 파시스트들이 오프라인에 모습을 드러내는 계기가 되었다. 원탁회의가 진행되는 동안 네 명의 학생들이 근처에서 “왜 잔디밭인가, 왜 시험기간인가, 우리는 당신들의 정치적 놀음의 배경화면이 아닙니다!!”라는 피케팅 시위를 벌인 것. 이들은 구조조정에 저항하는 학생들을 마치 ‘깨어있는 지성인’인 양 영웅시하는 분위기에 불만을 느껴 “직접행동”에 나섰다고 주장했다. 심지어 그 중 한 명은 실제로 ‘직접행동’에 나서 원탁회의 홍보 현수막을 손수 찢어버렸다. 학교 측이 불허방침만 내리고 실제적인 제재조치에 어려움을 느끼는 것을 보고, 불의를 견디다 못해 직접 ‘불법 행위에 대한 처단’에 나섰다는 것. 이는 타인의 사유물에 대한 침해이자 자의적인 폭력행위(‘테러’)에 불과한데, 더욱 심각한 것은 이를 자랑스레 여겨 스스로 카우인에 전말을 알리고 많은 동조자들이 “행동하는 양심”이라며 칭송했다는 점이다. 여기서 우리는 파시즘의 역사를 떠올리며 아찔한 현기증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학교발전에 대한 집단적인 강박이 최소한의 이성적 판단마저 침식하고, 심지어 테러행위에 대한 숭배로 나아가는 결정적 순간이기 때문이다.

 

숨 막히는 ‘무균질의 공간’

 

 

“왜 잔디밭인가”라는 문제제기는 많은 의미를 함축한다. 공원에 산책이라도 나갈라치면 늘 밟게 되는 것이 잔디밭인데 무어 그리 안달일까? 물론 이러한 강박적 집착엔 나름의 이유가 있다. 길게 뻗은 대로와 그 소실점의 끝에 우뚝 솟은 유럽풍의 석조건물은 ‘일류대학’의 상징과도 같으며, 이번에 새로이 조성한 잔디밭은 오랜 콤플렉스의 소박한 해소인 것이다. 이러한 눈물겨운 심리적 동기 너머에 또 다른 차원의 정치적 동기도 놓여 있다. 깨끗한 장방형의 잔디밭이 구현하는 공간적 합리성은 ‘질서’에 대한 은유로 작동하면서 그 공간 내에서 살아가는 주체들의 행위를 규율한다. 잔디밭에 들어가는 행위, 신고하지 않은 대자보를 붙이는 행위, 아무 데서나 흡연하는 행위, 공연을 하면서 소음을 일으키는 행위 등 공간의 합리성을 헤친다고 여겨지는 사소한 일탈행위들은 생활공간의 복잡성과 다양성을 보여주는 지표가 아니라, 제재하고 억압해야 할 ‘불법행위’로 규정된다. 물론 이러한 원칙은 대개 학교 측에 반대하는 정치적 표현행위에 대해 적용된다.

‘클린 캠퍼스’ 캠페인은 단지 캠퍼스 환경을 미화하자는 차원을 넘어 사소한 일탈행위들, 정치적 표현행위들이 제거된 ‘무균질의 공간’을 꿈꾼다. 그 곳은 학교본부의 위엄이 우선하는 지배질서의 공간이자, 모든 정치색이 탈각된 ‘소비 공간’이기도 하다. 누구도 백화점에 들어가 시위를 벌이진 않듯이, 이러한 탈정치적 공간에서 정치적 의사표현 행위는 그저 엉뚱한 일이 되어버리고 만다. 잔디밭을 집회의 장소로 활용하는 것은 이러한 암묵적인 상징적 코드를 깨뜨린다는 점에서 그 자체 매우 유의미한 정치행위다. 이러한 전유행위를 통해 잔디밭은 단순한 관상의 대상에서 구성원들의 정치적 요구와 주장이 오가는 ‘광장’으로 거듭난다. 정치는 근본적으로 ‘권리를 위한 투쟁’이다. 나아가 보장받아야 할 권리가 무엇인지에 대한 물음마저도 포함한다는 점에서 ‘권리들에 대한 권리’의 요구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공간에 대한 권리는 출발점일 뿐이다. 이미 주어진 것의 보장을 넘어, 새로운 권리들을 발명하고 요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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