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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11/20
    술 취한 투정의 위로
    땡땡이

술 취한 투정의 위로

전화가 울린다.

20분 동안 기다리고 있던 전화는 아니지만 오랜만에 보는 친구의 이름.

하지만 나는 지금 전화를 받을 상태가 아니다.

 

잠시의 시간이 흐르고 다시 전화가 울린다.

크게 심호흡을 하고 방금 전의 전화벨은 듣지 못했다는 목소리로 전화를 받는다.

 

역시나 술 취한 목소리.

이 녀석은 술에 취하면 전화를 하는 버릇이 있다. 누구의 술주정이 다 그렇듯 녀석은 평소 꺼내지 못했던 속내와 지난 이야기들을 두서없이 늘어놓는다. 예전에는 녀석이 술만 마시면 취해버려서 '너 저번처럼 술먹고 취하면 다신 너랑 술 안먹는다'는 협박을 하기에 이르렀지만, 취직을 한 후로는 회사 사람들과는 편하지 않아서 취하지 않고 친구들과는 자주 만나지 못해 이렇게 이따금씩 술에 취한 목소리로 전화를 건다.

 

나 힘들다.
회사에서 사람들을 자꾸 잘라.
그래서 술 좀 마셨다.
오랜만에 징징대는 네 목소리 들으려고.
너희들 다 보고싶다. 다른 애들 만나면 내가 진짜 보고싶어한다고 꼭 전해줘.
너 좋은 사람 만나니까 보기 좋다.
나는 안짤릴 거야. 너도 알잖아. 난 절대 안짤려.
근데 내 옆에 앉는 사람도 짤릴 것 같다.
같이 일하던 사람들이 자꾸 짤리니까 너무 힘들다.
근데 너 토요일에는 왜 이상한 옷 입고 왔냐.
너는 아무거나 막 입어도 이쁘니까 앞으로 아무거나 막 입고 다녀.
그래도 내 여자친구가 젤 이쁘다.
내가 돈 벌어서 살만하게 되면 결혼할거야.
아- 힘들어.
회사에서 자꾸 사람들을 자른다.

 

전화를 받는 동안 억지로 참고 있던 눈물이 전화를 끊고 나자 저절로 쏙 들어가버렸다.
나는 술취한 녀석의 투정을 위로하고 내 마음은 녀석의 투정에 위로받았다.
아. 방 한가득 늘어놓은 일만 아니면 동생방에 숨겨놓은 보드카에 오렌지 쥬스를 섞어서 한 잔 마시고 아침이 올 때까지 세상을 잊은 잠을 잘텐데.
하지만 저절로 쏙 들어간 눈물에 기운을 내고 나는 다시 일더미 속으로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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