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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똘레랑...

 

“의약분업 과정에서 불거진 의사 폐업 사태와 롯데호텔과 사회보험 노동자들의 파업에 대한 공권력의 대응을 보면서 나는 카뮈와 엠마누엘 토드의 말을 돌이키지 않을 수 없었다. 프랑스에서라면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사회적 불의1)였고 차별이었다. 생존권이 아닌 기득권을 지키려는 의사들의 폐업에는 전전긍긍했던 공권력이, 생존권을 요구하는 사회적 약자들에 대해서는 강경 진압을 통하여 ‘질서’를 강제했다.”

“‘받기 위해 주는 것은 모든 교환의 원칙인가?’라는 물음은 ‘남북한 사이의 상호주의’와 구체적으로 관련시킬 수 있겠으며, ‘모든 권력은 폭력을 동반하는가?’라는 질문은 ‘국가폭력’에 관한 질문과 함께 ‘한국에서 파업을 거의 모두 불법으로 규정하고 탄압하는 국가폭력’의 문제로 발전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자유는 거부하는 권리로 정의되는가?’라는 물음에는 ‘자유와 파업권’을 연관시킬 수 있다. 파업권을 노동자들의 ‘거부하는 권리’로 정의할 수 있을테니까.”

“나는 ‘불법파업’이라는 프랑스 말을 들어본 적도, 읽어본 적도 없다. 파업은 사회적 약자인 노동자들의 최후 선택이고 ―그 어떤 노동자가 무조건 파업을 좋아하나?― 노동3권의 하나인 단체행동권의 핵심으로서 당연히 보장되어 마땅한 것이다. 오히려 파업 사업장에 대해 인력을 투입하는 게 불법이다. 그만큼 노동자의 파업권은 보장되어야 한다는 의지가 관철되고 있다. 지하철이나 기차 등 공공부문에서 최소한의 서비스를 확보하기 위해 파업권을 제한해야 한다는 일부의 목소리조차 메아리 없는 외침으로 끝난다.

한국의 상황은 잘 알다시피 이와 정반대의 모습을 보인다. 거의 모든 파업이 ‘불법’이고, 대체인력 투입이 불법이기는커녕 ‘구사대’까지 활개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상황임에도 이른바 국민의 정부는 역대 정권의 똑같이 관계부처 대책회의라는 것을 거쳐 ‘불법파업 단호대처’를 운운하고 있고, ‘조중동’ 등 수구 신문들은 누가 대화에 나서지 않는지 묻지도 않은 채 ‘노동자들은 대화에 나서라’면서 국가경쟁력과 국가 신인도를 앵무새처럼 떠들고 있다.”


“일찍이 볼테르는 ‘앵똘레랑(불관용하는 자)’2)을 「우리와 똑같이 생각하지 않는 자를 선험적으로 유죄라고 평가하도록 유도하는 자」라고 말했다. 또 루소는 앵똘레랑을 가리켜 「자기가 믿는 것을 믿지 않으면 선의의 인간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자기와 똑같이 생각하지 않는 자들 모두에게 냉혹하게 저주를 내리는 자」라고 말했다. 21세기초 한국 사회는 17세기에 바나주 드 보발이 말한 「견해의 대립을 통해 이성을 눈뜨게 하지 않으면 인간을 무지와 오류로 몰아가」는, 그런 사회와 멀지 않다. 이를테면 물질은 21세기를 살고 있지만 이성과 정신은 17세기에 미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악역을 맡은 자의 슬픔’, 홍세화.

 

 

1) “사회정의는 질서에 우선한다” 볼테르.

 

 

2) 억압적 관용(repressive tolerance) : ‘억압적 관용’은 마르쿠제가 1965년에 쓴 논문 제목이기도 한데, 간단히 말해 “합법적 권위에 의해 결정된 틀 안에서만 반대파를 용납”하는 지배 계급의 태도를 지칭하는 개념이다. 가령, 지배 계급이 사상․결사․언론의 자유를 보장한다고 해도, 실제에 있어서 이는 기존의 행정 체계의 틀 내에서만 인정받기 때문에 피지배자들의 저항을 흡수하기 위한 수단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마르쿠제는 외견상 순수해 보이는 기존의 관용을 ‘추상적 관용’이라고 비판하면서, 역설적이게도 자유의 범위와 내용을 확장시킬 뿐만 아니라 편파적으로 피지배자의 입장을 옹호하는 ‘차별적’ 관용의 필요성을 주장한다. 차별적 관용을 실천할 때에만, “파괴와 억압을 관용하는 행위 규범을 관용하지 않는, 아니 절대로 관용하지 않으며 이에 복종하지 않는 소수”와 더불어 현존 체제를 분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신좌파의 상상력(세계적 차원에서 본 1968)’, 조지 카치아피카스 지음, 이재원․이종태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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