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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5/02/09
    바닥을 향한 경주...
    산적-1
  2. 2005/02/08
    앵똘레랑...
    산적-1
  3. 2005/02/07
    쏠리다리떼...
    산적-1
  4. 2005/02/06
    똘레랑스란...(1)
    산적-1
  5. 2005/02/05
    체 게바라의 ‘포코(foco)’ 이론
    산적-1
  6. 2005/02/03
    똘레랑스란...
    산적-1
  7. 2005/02/03
    담배를 사랑한 젊은 혁명가...체!
    산적-1

바닥을 향한 경주...

 

경제적 실적의 부진과 사민주의적 신념에 대한 회의, 그리고 세계화로 인해 더욱 치열해져 가는 국제경쟁 등이 유럽 나라들로 하여금 신자유주의로 눈길을 돌리게 함……그리하여 신자유주의적 구조개편은 노동자들이 자본에 대한 고난에 찬 투쟁을 통해 역사적으로 쟁취해 온 것들을 자본이 회수해가는 과정이라고 일컬어지게 됨. 이름하여 ‘자본의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임. 여기에서 생산입지를 옮기겠다고 하는 자본의 위협은 민족국가와 노조에 대한 초국적자본측의 효과적인 무기가 되어 ‘바닥을 향한 경주’를 낳음. 거기에는 복지와 환경에 대한 자본측의 고려가 약화되는 것도 포함됨. ‘오늘날 세계의 여러 가지 노조운동론 : 사회운동적 노조주의를 중심으로’, 사회진보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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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똘레랑...

 

“의약분업 과정에서 불거진 의사 폐업 사태와 롯데호텔과 사회보험 노동자들의 파업에 대한 공권력의 대응을 보면서 나는 카뮈와 엠마누엘 토드의 말을 돌이키지 않을 수 없었다. 프랑스에서라면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사회적 불의1)였고 차별이었다. 생존권이 아닌 기득권을 지키려는 의사들의 폐업에는 전전긍긍했던 공권력이, 생존권을 요구하는 사회적 약자들에 대해서는 강경 진압을 통하여 ‘질서’를 강제했다.”

“‘받기 위해 주는 것은 모든 교환의 원칙인가?’라는 물음은 ‘남북한 사이의 상호주의’와 구체적으로 관련시킬 수 있겠으며, ‘모든 권력은 폭력을 동반하는가?’라는 질문은 ‘국가폭력’에 관한 질문과 함께 ‘한국에서 파업을 거의 모두 불법으로 규정하고 탄압하는 국가폭력’의 문제로 발전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자유는 거부하는 권리로 정의되는가?’라는 물음에는 ‘자유와 파업권’을 연관시킬 수 있다. 파업권을 노동자들의 ‘거부하는 권리’로 정의할 수 있을테니까.”

“나는 ‘불법파업’이라는 프랑스 말을 들어본 적도, 읽어본 적도 없다. 파업은 사회적 약자인 노동자들의 최후 선택이고 ―그 어떤 노동자가 무조건 파업을 좋아하나?― 노동3권의 하나인 단체행동권의 핵심으로서 당연히 보장되어 마땅한 것이다. 오히려 파업 사업장에 대해 인력을 투입하는 게 불법이다. 그만큼 노동자의 파업권은 보장되어야 한다는 의지가 관철되고 있다. 지하철이나 기차 등 공공부문에서 최소한의 서비스를 확보하기 위해 파업권을 제한해야 한다는 일부의 목소리조차 메아리 없는 외침으로 끝난다.

한국의 상황은 잘 알다시피 이와 정반대의 모습을 보인다. 거의 모든 파업이 ‘불법’이고, 대체인력 투입이 불법이기는커녕 ‘구사대’까지 활개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상황임에도 이른바 국민의 정부는 역대 정권의 똑같이 관계부처 대책회의라는 것을 거쳐 ‘불법파업 단호대처’를 운운하고 있고, ‘조중동’ 등 수구 신문들은 누가 대화에 나서지 않는지 묻지도 않은 채 ‘노동자들은 대화에 나서라’면서 국가경쟁력과 국가 신인도를 앵무새처럼 떠들고 있다.”


“일찍이 볼테르는 ‘앵똘레랑(불관용하는 자)’2)을 「우리와 똑같이 생각하지 않는 자를 선험적으로 유죄라고 평가하도록 유도하는 자」라고 말했다. 또 루소는 앵똘레랑을 가리켜 「자기가 믿는 것을 믿지 않으면 선의의 인간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자기와 똑같이 생각하지 않는 자들 모두에게 냉혹하게 저주를 내리는 자」라고 말했다. 21세기초 한국 사회는 17세기에 바나주 드 보발이 말한 「견해의 대립을 통해 이성을 눈뜨게 하지 않으면 인간을 무지와 오류로 몰아가」는, 그런 사회와 멀지 않다. 이를테면 물질은 21세기를 살고 있지만 이성과 정신은 17세기에 미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악역을 맡은 자의 슬픔’, 홍세화.

 

 

1) “사회정의는 질서에 우선한다” 볼테르.

 

 

2) 억압적 관용(repressive tolerance) : ‘억압적 관용’은 마르쿠제가 1965년에 쓴 논문 제목이기도 한데, 간단히 말해 “합법적 권위에 의해 결정된 틀 안에서만 반대파를 용납”하는 지배 계급의 태도를 지칭하는 개념이다. 가령, 지배 계급이 사상․결사․언론의 자유를 보장한다고 해도, 실제에 있어서 이는 기존의 행정 체계의 틀 내에서만 인정받기 때문에 피지배자들의 저항을 흡수하기 위한 수단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마르쿠제는 외견상 순수해 보이는 기존의 관용을 ‘추상적 관용’이라고 비판하면서, 역설적이게도 자유의 범위와 내용을 확장시킬 뿐만 아니라 편파적으로 피지배자의 입장을 옹호하는 ‘차별적’ 관용의 필요성을 주장한다. 차별적 관용을 실천할 때에만, “파괴와 억압을 관용하는 행위 규범을 관용하지 않는, 아니 절대로 관용하지 않으며 이에 복종하지 않는 소수”와 더불어 현존 체제를 분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신좌파의 상상력(세계적 차원에서 본 1968)’, 조지 카치아피카스 지음, 이재원․이종태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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쏠리다리떼...

 

“프랑스에서 종이1) 없는 이주노동자들이 종이를 얻기 위해 단식 투쟁을 할 때 그들과 항상 함께 하는 인류학자 에마뉘엘 테레는 인류에겐 흑인종, 황인종, 백인종의 인‘종’이 없고 다만 인‘류’뿐이라고 외친다. 지금까지 인류는 뒤섞이면서 문화적 다양성을 획득해 왔다” ‘악역을 맡은 자의 슬픔’, 홍세화.

 

 

1) “‘노동허가증’이라는 이름의 종이” ‘악역을 맡은 자의 슬픔’, 홍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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똘레랑스란...(1)

 

“‘서로 다른 체제와 이념을 인정한다는 것.’ 이것이 똘레랑스 정신이다. 나와 다른 남을 다른 그대로 인정한다는 것, 즉 나와 다른 남에게 나와 똑같이 될 것을 강요하지 않는다는 것, 그리하여 서로 다르다는 것을 인정한 바탕 위에서 대화와 토론을 통해 최선의 길을 모색해 나간다는 것, 이것이 바로 똘레랑스의 정신이다.”

“다시금 강조하거니와 똘레랑스의 부드러움은 앵똘레랑스1)에 대한 단호한 앵똘레랑스를 조건으로 하는 것이다.” ‘악역을 맡은 자의 슬픔’, 홍세화.

 

 

1) “저항을 포기한 주체는 이제 자기 정당화의 근거를 찾아야 한다. 이때 주체는 이문열이 <선택>에서 권장한 그 독특한 인생철학, 즉 ‘어차피 그러안아야 할 강제라면 긍지와 자부심을 갖고 주체적으로 그러안자’는 해괴한 논리를 내면화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조선일보 내에서 권력이 작동하는 독특한 방식이다. 가령 동아일보의 경우에는 사내에서 편집방향에 대한 불만의 소리가 터져 나오고 다만 이 ‘말’이 ‘행동’으로 옮겨지지 못하고 “온건론”으로 귀결되는 데에 반해, 조선일보의 경우에는 아예 비판은 나올 수가 없고 평기자들마저도 사측을 옹호하는 논리를 개발하기에 바쁘다. “디제이 신문은 어쩔 수 없다.” “보도 내용이 다소 의심스럽다.” “디제이의 언론개혁은 계급투쟁적 성격이 있다.” “또 마이너 신문들의 메이저 신문들을 위한 공세의 측면도 있다.” 이들의 태도는 이렇게 자발적, 주체적, 공격적인 구사대 룸펜 프롤레타리아의 그것이다.” ‘아웃사이더’, 「존재미학, 비루한 자들의 미적 에토스」, 진중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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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 게바라의 ‘포코(foco)’ 이론

 

대중운동을 움직이게 하는 한 방식으로서 요청된, 소수의 헌신적인 게릴라 집단인 ‘포코’1)가 시골 지역에서 수행하는 무장 투쟁은, 도시에 기반을 둔 노동자 계급의 전위 세력들을 구축한다는 공산당의 전략에 대해 일련의 대안적인 전략을 구성해줬다. 공산주의자들이 가장 발전된 생산 부문의 사람들 내에서 자신들의 기반을 구축하고자 했다면, 게릴라들은 군사적․정치적․경제적으로 집중되어 있는 기성의 권력 조직과 가능한 한 멀리 떨어져 있는 농민들에게 들어가려고 했다. 또한, 공산당이 가능한 한 현존의 정치 일정 내에서 움직이려 했고, 평화적인 변화의 가능성을 믿었다면, 게릴라들은 현존 국가를 분쇄하기만을 원했다. 넒은 의미에서 보아, 공산당은 혁명에 유리한 조건들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꾸준히 강조하면서 사회주의로의 점진적 이행을 주장했던 반면, 게릴라들은 “포코라는 작은 원동력을 통해 대중운동이라는 큰 원동력을” 움직이게 함으로써, 이런 조건들을 창출하려고 했던 것이다.

비록 볼리비아, 콜롬비아, 베네수엘라에서 체의 포코 이론이 현실화되지 못했지만,2) 포코 이론은 니카라과 혁명에서 그 가치를 인정받았다. 이 전략을 채택함으로써 쿠바 혁명의 성공을 따르려고 했던 시도들은, 라틴 아메리카 혹은 제3세계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미국에 있었던 <웨더 언더그라운드 Weather Underground>와 <흑인 해방군 Black Liberation Army>, <아일랜드 공화군 Irish Republican Army>, 서독의 <적군파 Rote Armee Fraktion>, 이탈리아의 <붉은 여단 Red Brigades>, 캐나다의 <퀘백 해방전선 Front de Liberatíon Quebequois>(FLQ), 스페인의 <바스크 토지와 해방 Basque Land and Liberty>(혹은 Euzkadi Ta Askatasuna, ETA), 또한 프랑스의 <프롤레타리아 좌파 Gauche Proletarian> 등은 모두, (마리겔라,3) 마오,4) 지압5) 등은 물론) 체와 드브레6)를 신중하게 연구했으며, 쿠바의 전략을―성공했든지 못했든지 간에― 자신들의 나라에서 실행에 옮겼다.

쿠바 게릴라들의 성공으로 인해, 핵심부와 주변부의 급진적 운동들 내에서 게바라주의자들Gevarist Wing이 등장하게 되었는데, 이로 인해 급진 좌파와 소련 공산당은 심각하게 갈라서게 됐다. 1961년 경에는 브라질 공산당이 무장 투쟁 찬성파와 소련파로 분할됐으며, 이와 유사한 시기에 볼리비아, 베네수엘라, 페루, 칠레, 그리고 콜롬비아의 운동들 내에서 이런 분할이 발생했다. 몇 년이 지난 이후, 이와 똑같은 일이 미국의 <블랙 펜더 당>, 독일의 <독일 사회주의 학생연맹 Sozialistischer Deutscher Studentenbund>(SDS)에서 발생했다. 비록 이 당시 공산주의자들의 입장은 소련이 아니라 마오주의였으며, 무장 투쟁 찬성파 내에도 맑스주의자들이 있었지만 말이다.

전략과 전술상의 차이 외에도, 소련 공산주의와 새로운 급진주의 간의 간극에는 새로운 차원도 있었다. 이는 ‘새로운 사회주의적 인간의 창출’을 위해 인간을 변혁시키라는 체의 요청으로 정리됐다. 오랫동안 소비에트 맑스주의는 사회의 기본 구조를 변혁시키면 필연적이고 자동적으로 문화적․사회적 변혁이 찾아온다고 생각해 왔다. [하지만] 새로운 급진주의는 정치, 경제, 문화를 변혁시킴과 동시에, 사회 구조 및 개인 주체를 변혁시킬 것을 요구했다. 추상적으로 볼 때, 비혁명적인 객관적 조건들은 변화될 수 없는 것이라는 주장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기 거부했다는 점은, 새로운 급진주의가 일상 생활의 변혁은 ‘혁명 이후’에까지 미뤄져야만 한다는 주장을 받아들이기 거부했다는 점과 유사하다. 제3세계의 게릴라들과 핵심부의 급진적 운동들은, 직접 행동과 문화적―정치적 혁명(여성해방을 포함하여)을 요구했다는 점에서 이론적으로 긴밀히 묶여 있었다. 또한 실천적으로는, 공동의 적(미 ‘제국주의’)과 공동의 경쟁자(소련식 ‘급진주의’)에 대항해 단결을 이뤄냈다. 쿠바가 꾸준히 소련과 유대 관계를 맺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혁명적 운동들은 미국의 침공과 경제 봉쇄 이후에까지, 공산주의자들의 지도도 받지 않았고 소련과 유대 관계를 맺지도 않았다. 또한, 쿠바는 신좌파에게 강력한 자극을 주기도 했다. 가령 피델 카스트로7)의 연설문이 미국에서 출간됐을 때, 북아메리카의 한 편집자는 다음과 같이 썼다.


쿠바의 사례는 신좌파에게 영감을 주었다. 단호한 민중들과 강력한 지도력이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군사력을 패배시킬 수 있었던 것이 그 살아 있는 증거이다. 투쟁을 강조하고, 새로운 사회와 ‘새로운 인간’이라는 전망을 던져주는 피델의 연설은, 쿠바인들뿐만 아니라 오늘날 미국의 젊은이들에게 전달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이 책의 헌사는, 그 역사적 가능성을 이해하는 데에 있어서 당당하리마치 낙관적이었다. “북아메리카인들에게 혁명의 완수 가능성을 전해준 쿠바인들과 베트남인들에게, 그리고 이 가능성을 이용하고 있는 북아메리카의 젊은이들에게 이 책을 바친다.” ‘신좌파의 상상력(세계적 차원에서 본 1968)’, 조지 카치아피카스 지음, 이재원․이종태 옮김.

 

 

1) ‘포코(foco)’는 스페인어로, ‘중심’ 혹은 ‘중핵’을 의미한다. 게바라는 특정한(즉, ‘소수의 헌신적인,’ 혹은 ‘전문적이며 혁명적인’) 게릴라 세포들을 이렇게 불렀다. 이들의 전략은 시골과 산간 지역에 해방구를 형성한 후, 이를 도시에까지 확장시키는 것이었다. 다음을 참조하라. 체 게바라, 편집부 옮김, 「게릴라 전쟁」, 『체 게바라』, 오월, 1988, 103~162쪽.

 

 

2) 이런 운동들이 겪었던 유혈 진압을 ‘현실화되지는 못한’이라는 단어로 표현하는 건, 너무 너그러운 일이다. 하바나에서 열린 <3대륙 회의 Tri―Continental Conference>에서 반복적으로 대두된 무장 봉기 요구(1996년 1월)와 1967년의 OLAS 회의에 대해, 라틴 아메리카 정부와 미국은 신속한 대응을 취했다. 1967년, <미주 기구 Organization of American States>는 쿠바를 비난했으며, 쿠바에 대한 경제 제재를 주창했다. 유일한 조정자이자 군사 원조의 출처(그 당시에)였던 미국은, 파나마에 남부 사령부를 건설했다. 1968년경에는, 파나마에서 반게릴라 훈련을 받은 특수 군대가 52차례나 작전을 수행했는데, 1966~1967년에 이 군대는 과테말라, 베네수엘라, 니카라과는 물론, 볼리비아에도 개입했다. Houtart․Rousseau, op. cit., pp.206~207.

 

 

3) Carlos Marighella(1911~1969). 브라질의 도시 게릴라. 마리겔라는 1965년 2월 <10월 8일의 혁명 운동 Revolutionary Movement of October 8>(MR―8)을 결성, 그 다음 해에 결성된 <인민의 혁명적 전위 People’s Revolutionary Vanguard>, <민족 해방을 위한 행동 Action for National Liberation>과 함께 도시 게릴라전을 감행했다. 1969년 12월 30일, 경찰의 매복에 걸려 사살당했다. <붉은 여단>과 <적군파> 등이 그의 저서인 『도시 게릴라 소책자 The Minimanual of the Urban Guerrilla』(1969)를 공식 훈련 입문서로 사용했다.

 

 

4) 毛擇東(모택동; Mao Zedong, 1893~1976). 중국의 혁명가. 이른바 ‘대장정 Long March’(1934~1935)을 통해서 일본군을 패퇴시켰으며, 결국 1949년에 중국인민공화국을 세웠다. 마오는 자신의 게릴라 이론과 문화 대혁명(1966~1969)을 통해, 제3세계는 물론이고 유럽에도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5) Vo Nguyen Giap(1912~ ). 베트남의 군사 전략가이자 정치가. 1939년 9월, 중국에서 호치민을 만나, 그와 함께 ‘베트민’을 결성했다. 그 유명한 ‘디엔비엔푸’ 전투나, ‘구정 공세’가 모두 그의 주도 아래 이뤄진 것이었다. 그는 『큰 승리, 큰 임무 Big Victory, Big Task』(1967) 등과 같은 저서를 통해 군사 전략과 게릴라 전술을 체계화했다.

 

 

6) Régis Debray(1940~ ). 프랑스의 철학자. 1967년 3월, 체 게바라와 게릴라 활동을 하기 위해 볼리비아로 갔다. 이때에 드브레는 라틴 아메리카에서의 무장 투쟁과 정치적 투쟁을 기록한 『혁명 속의 혁명? Révolution dans la révolution?』(1967)을 발간했다. 이 책은 게바라의 ‘포코 이론’을 체계적으로 분석한 내용을 담고 있다. 그의 저서 중, 『이미지의 삶과 죽음 Vie et mort de l’image』(1994)이 국역되어 있다.

 

 

7) Fidel Castro(1926~ ). 쿠바의 대통령. 1956년 12월 2일, 약관 32세의 나이로 체 게바라와 같은 동지들과 쿠바 해안에 상륙, 12명의 게릴라들을 이끌고 시에라 마에스트라 산에서 게릴라 투쟁을 전개했다. 1959년 쿠바 혁명을 완수, 그 해 2월에 수상 자리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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똘레랑스란...

 

“당신의 견해에는 동의하지 않으나, 당신이 그 견해를 발표할 자유만은 옹호한다” 볼테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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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배를 사랑한 젊은 혁명가...체!

우리 모두 리얼리스트가 되자,

 

그러나...

 

가슴 속에 불가능한 꿈을 가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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