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낙양 - 중국역사의 축소판

 

1.

낙양을 도읍으로 삼은 북위는 선비족의 탁발부족이 세운 왕조로 그들이 한족의 고향과 같은 중원으로 몰려들었으니 어떻게 해서든지 민족간의 융화를 이루어야만 했다. 성도 한인식으로 바꾸고, 한족과 결혼하는 것을 장려했으며, 호인의 옷차림과 말을 금지하는 과감한 정책을 취했다. 민족간의 융화를 꾀하기 위해서는 그 정신적인 지도원리로 불교에 의지하는 것이 가장 효과가 컸다. 북위가 낙양에 불교사원을 1367개나 지었다는 건 그만큼 불교장려에 힘써 노력했다는 증거다. 북위가 용문에 국가적인 사업으로 석굴사원을 지으려고 했던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2.

소림사가 불교사원이라는 점은 새삼 설명할 필요 없는 사실이다. 인도에서 온 달마대사가 이곳에서 9년동안이나 면벽수행했다는 이야기는 너무나도 유명하다. 소림사라는 절 이름은 소실산의 기슭인 소림에 세워졌기 때문에 붙어졌다. 말하자면 이곳은 선종의 발상지인 셈이다. 소림사는 495년에 효문제가 인도의 승려 발타를 위해 세운 절이다. 그곳으로 남조의 양에게 실망한 인도의 승려 달마가 찾아온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소림사의 가람은 1928년 군벌항쟁기에 석우삼이라는 군벌에게 파괴되어 불타버리고 옛 모습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 서안 - 2천년 황릉의 비밀을 간직한 곳

 

3.

봄추위를 녹이기 위한 화청지

온천수로 매끈매끈하게 지방 덩어리를 씻는다

 

백거이의 이 시로 온천이 더욱 유명해져 여산 기슭의 온천을 화청지라 부르게 되었다. 양귀비를 총애했던 현종은 여산에 모란을 심고, 마음에 드는 가신들에게 별장을 만들어주는 등 사치스러운 궁전이나 누각을 여기저기에 지었다. 어느새 여산은 육문, 십전, 사루, 삼각, 오탕이 있는 규모가 큰 별궁지대가 되었다. 현종은 화청지에서 정무를 보는 일이 잦아졌다. 호화로운 생활을 좋아했던 현종다운 행동이었다. 이윽고 정치는 부패하고 재능도 없는 양귀비 일가가 관직에 올라 정치싸움도 많이 일어났다. 결국 안녹산의 난이 일어나고 현종은 서안에서 탈출해야 했다.

 

4.

만주사변 뒤 전중국에서 일본의 침략에 항의하는 운동이 일어났다. 그런데 장제스는 항일운동을 탄압하고 공산당과 대결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삼았다. 중국 공산당 쪽에서는 말할 필요도 없이 그와는 반대로 항일민족통일전선 정책을 햇다. 장세스는 장쉐량을 서북사령관으로 임명해 계속 공산당과 싸우도록 했다. 장쉐량의 군대는 동북군으로 지난날 일본군과 싸웠던, 항일의식이 굉장히 높은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연안의 공산군과 대치해 있는 동안 그 영향을 받게 되었다. 장쉐량은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에 의문을 품고 자신들이 싸워야 할 대상은 같은 동포가 아닌 일본군이라는 사실을 깨닫고는 공산당의 항일민족통일전선에 공감하게 되었다. 장쉐량은 장제스에게 내전을 중지하고 항일구국을 위해 활동하라고 충고했다. 장제스는 물론 귀를 기울이지 않았으며, 대 공산군 작전이 진행되지 않은 것에 화가 나 스스로 서안에 들어와버렸다.

 

5.

서안에 도착한 장제스는 1936년 12월 12일 화청지의 숙소에서 머물렀다. 장쉐량 일행은 장제스를 감금하고 내전 중지와 항일구국을 요구했다. 장제스도 드디어 장쉐량의 요구를 받아들여 12월 25일에 풀려났다. 이 일을 계기로 이른바 제2차 국공합작이 맺어졌다. 다음해인 1937년 항일통일전선에 의해 중국공산군은 국민혁명국 제팔로군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국공합작으로 당시 국민당이 지배하던 서안 시에도 중국공산당이 사무실을 차리게 되엇다. 그곳에는 국민혁명군 제18집단군 주섬서병사처라는 간판이 내걸렸다. 합작이라지만 국민당은 엄중하게 공산당을 감시했으며, 사무소 가까이에 있는 인력거군들도 사실은 국민당에서 임무를 맡은 사람들이었다고 한다.

 

 

* 감숙 - 실크로드의 시발점

 

6.

실크로드라는 말은 독일의 지리학자 리히트호펜이 19세기 말에 만들어 처음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 말이 널리 보급되어 중국에서도 그대로 번역해 사주지로라고 부르기도 했다. 고대에 동쪽에는 중국이, 서쪽에는 로마 문명권이 있었다. 동서 대문명국의 수도를 이어주는 교역로, 장안에서 로마에 이르는 길을 넓은 의미에서 실크로드라 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실크로드라 하면 동서 두 문명권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지역의 교역로를 가리킨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지금의 신강 위구르 자치구에서 내륙 아시아 지방을 통해서 유럽으로 돌어가기까지의 사이다. 그러면 황하의 서쪽, 즉 하서 지방이 중국쪽에서 보면 실크로드의 입구에 해당된다.

 

7.

옛날부터 백년 하청을 기다린다는 말이 있었다. 이 말은 황하는 탁하기 때문에 백년을 기다려도 맑은 물이 될 리 없다는 뜻으로 가능성이 없는 일을 기다릴 때 하는 말이다. 황하가 탁한것은 토사가 흘러들기 때문인데 그 흐름을 막으면 황하도 맑아질 것이다. 유가협댐은 황하를 막기위해 만든 것이다. 댐 높이가 147미터, 제방의 길이가 840미터로 지하발전소에는 발전기가 여러 대 설치되어 있다. 댐으로 인해 생긴 인공호수 비파호는 장소에 따라서 폭이 다르지만, 길이가 65키로나 되기 때문에 거의 바다와 같다고 할 수 있다. 수심도 계절에 따라 다르지만 평균 100미터에 이른다고 한다. 돈황 막고굴은 오랜 역사와 미술의 보물창고와 같은 곳이지만 유가협댐은 새로운 중국의 상징이라 할 수 있다.

 

 

* 신강 - 동서양을 연결하는 통로

 

8.

신강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은 우루무치다. 당대는 정주의 관할 아래 윤태현에 속해 있었지만 아직까지 서역의 중심이 될 정도는 아니었다. 그보다 오래전 한대에는 차사국에 속했지만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우루무치를 홍묘자라고 부른 적이 있었는데, 홍산이라는 언덕에 붉은 울타리를 친 묘가 있었던 데서 유래한다. 전설에 따르면 아주 오랜 옛날에 서왕모가 이 지방의 물을 천지로 끌어올렸는데도 머리가 셋인 용이 다시 바다로 갔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용을 잠재우기 위해 탑을 세웠다고 한다. 이 전설은 우루무치 강이 옛날부터 자주 범람해 주민들이 끊임없이 재해와 싸웠던 사실을 반영한다. 당대에 세워진 탑은 지금까지도 남아있다.

 

9.

서유기에는 화염산이라는 가공의 산이 등장하는데, 손오공이 파초선으로 이 산의 불을 끄는 장면이 나온다. 투루판분지에는 실제로 화염산이 있는데 산의 표면이 붉고 침식의 흔적이 세로로 나란히 나 있어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면 불이 나는 것처럼 보인다. 그 화염산 안을 헤치고 들어가면 유명한 베제크리크의 천불동이 나온다. 베제크리크라는 말은 그림으로 장식된 장소를 뜻한다. 그곳에는 석굴이 모두 57개 있으며 그 중에서 석굴 20개에 벽화가 그려져 있다.

 

10.

서역은 무엇보다도 실크로드라는 이름으로 익숙하다. 그러나 허텐 지방 사람들은 실크로드보다 실크타운이라 부르기를 좋아했다. 그곳은 단지 비단이 지나갔던 길만은 아니었다. 이 지방에서는 옛날부터 비단을 생산해왔다. 지금 허텐에는 굉장히 커다란 견직물 공장이 있다. 이곳은 자치구에 유일한 비단 생산지이기도 하다. 옛날 한나라 땅에서 이곳으로 시집왔던 여와잉 모자 안에 누에를 숨겨서 비단 생산 기술을 전해주었다는 전설도 있다. 이 주변에 있는 유적지에 그러한 사실을 이야기 해 주는 유명한 벽화가 남아 있었는데 지금은 영국 대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 사천 - 제갈공명을 말한다

 

11.

전란으로 인해 중원이 살기 힘들어지자 사람들은 풍요로운 땅 사천으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삼국시대에 이르자 이 지방은 북방의 위나라, 남방의 오나라와 더불어 천하를 다스린 3대 세력의 한 거점이 되었다. 천하가 중국의 솥처럼 세 발로 서 있게 되자, 그 가운데 한쪽 다리 구실을 하던 사천은 당연히 중요해 질 수 밖에 없었다. 천하를 세 부분으로 나눌 계획을 세웠던 것은 제갈공명이었다고 한다. 유비는 그 계획에 따라 211년에 촉으로 들어갔다. 제갈공명은 유비가 촉으로 들어간뒤에도 얼마 동안은 형주에 있다가, 214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성도에 들어갔다. 그리고 나서 20년동안 제갈공명은 촉한의 황제가 된 유비와 그의 아들 유선곁에서 사천 경영에 노력을 다했다.

 

12.

삼국이 서로 대립한 시기라고 하지만, 위나 오에 비하면 촉한은 작은 나라였다. 두 나리에 대항하기 위해 영내를 정비하고, 부국강병을 꾀해야 했다. 영내에 살던 서남이란 소수민족은 자주 반란을 일으켰다. 그들의 수장은 맹획이라는 인물로 제갈공명은 그를 포로로 잡았는데, 일곱 번 잡았다가 일곱 번 풀어주었다고 전한다. 이것은 제갈공명이 강경책을 취하지 않고, 소수민족을 감동시켜 그들의 협력을 얻으려고 했음을 말해준다.

 

13.

그때까지 두보는 애수의 시인이었지만, 사천에 와서부터 너그러움이 생기게 되었다. 사천의 풍토를 닮아 여유가 생겼을 지도 모른다. 두부초당에서 그는 문학 활동의 절정에 이르렀다. 다음시는 한가로운 강촌의 풍경을 그린 강촌이다.

 

긴 여름의 대낮

강물에 안기어 마을을 조는 듯 한가롭다

제비는 멋대로 처마를 나들고

갈매기는 가까이 가도 날아갈 줄 모른다

할멈은 종이에 바둑판을 그리고

애놈은 바늘을 두들겨서 낚시를 만들고 있다

나는 우두커니 앉아 아무 바라는 바 없다

그저 약이나 좀 먹었으면 할 뿐

 

14.

사천분지의 또 다른 중심지인 중경은 근대적인 공업도시다. 똑같은 역사라고 해도 고대보다는 근대의 것들이 풍부한 곳이다. 중경은 성도에서 690키로, 장강과 가릉강이 한데 만나는 곳에 있다. 하천만 합류하는 것이 아니라 성투철도도 이곳에서 만난다. 중국은 1876년에 맺어진 지부조약에 따라 개항이 되었다. 강강과 기릉강이 합류하는 지점에 튀어나온 반도처럼 바위산을 깎아 세운 도시다. 중경이 깎아지른 벼랑위에 있는 도시라 자주 산성이라 불리기도 했다.

 

15.

중경 근교에 있는 화룡교의 홍암촌에는 항일전쟁 중에 중국공산당 중앙의 남방국과 팔로군 주재 사무소가 있었다. 현재는 혁명유적으로 거의 원상태로 보존되어 일반인이 참관하고 있다. 아무리 중국공산당과 국민당이 합작했던 시대였다고는 해도, 이 홍암촌을 휘감은 산 곳곳에는 국민당의 특수요원이 숨어 있던 집이 있어 끊임없이 중국공산당을 감시했다고 한다. 시가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중미 합작소라는 기괸이 있었다. 이름처럼 중국과 미국이 협력하기 위한 기관이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실제로는 국민당정부가 반정부적인 지식인을 체포하고 감금하던 장소였다. 전쟁이 끝난 뒤에 마오쩌둥이 연안에서 중경으로 와서 장제스와 이른바 쌍십협정을 맺었다. 장소는 중경 시의 규원이라는 곳이었다. 이곳도 지금은 근대사의 유적으로 보존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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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1/22 19:39 2005/01/22 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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