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1.
최근 대만과 중국 대륙 사이의 양안경제협력기본협정(ECFA, economic cooperation framework agreement)의 후속 협의라 할 수 있는 서비스무역협정 반대와 관련해서 난리도 아니다.
http://www.yonhapnews.co.kr/international/2014/03/19/0601300100AKR20140319186000103.HTML
흥미로운 것은 대만에서는 이를 자유무역협정FTA의 일종으로 파악하여 찬성하거나 반대하는 언론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찬성하는 측은 한중 FTA에 앞서 대만이 중국 시장을 선점해야 한다는 논리를 내세우고, 반대하는 측은 한미 FTA를 비판적으로 검토하면서 그 교훈 속에서 중국과의 서비스무역협정을 전면재협상하라고 주장한다. 물론 전자가 현실적 담론으로 우위에 있고, 후자는 포퓰리즘적 담론의 일부로 기능하고 있다. 사실상 양자는 공모관계인데, 대만의 양당 구조가 유지되는 핵심적 기제라 할 수 있다.
물론 중국 측은 경제적 측면 보다 정치적 고려가 앞설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정확한 분석은 안 해봤지만, 기존의 경험으로 볼 때, 중국은 기본적으로 경제적 이익의 측면에서 대만에게 양보하게 되어 있다고 본다. 중국은 이를 역사적 관점에서 기본적으로 '국내 정치'의 일부로 본다. 그 정도의 여유는 중국경제의 규모에서 볼 때 충분히 있다. 그리고 대만은 이를 이용할 수 있는 여지가 상당히 많은 편이다. 나는 이 여지를 잘 살리면 현재와 같은 대외의존적인 측면을 보완할 수 있는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고 보는데, 이를 고민하는 사람들은 극소수인듯 하다. 자유무역협정도 될 수 있지만 자립경제협정도 될 수 있는 것이 양자의 특수관계가 갖는 가능성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미FTA와 비교하는 관점에서 보이듯이, 독립분리주의 '좌파'들에게 중국과 미국은 똑같은 '제국'이고, '자유무역협정'은 반대해야 한다. 그러나 과거부터 이어지는 미국에의 종속에 대해서는 어떤 대안도 내놓지 못한다. 그래서 '좌익담론'이 제시하는 '자유무역협정' 반대는 사실상 뒤로 숨게 되고, 결국 반중국적 독립분리주의 담론에 종속된다. 보편주의 담론이 어떻게 포퓰리즘 담론과 결합되는지를 잘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겠다.
물론 중국은 대만 자본의 요구를 무시할 수 없는데, 대만 자본은 미국에게서 얻던 것을 중국에게서 똑같이 얻으려고 할 뿐, 대만 경제구조 자체의 질적 변화를 꾀하지는 않는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대만의 진봐좌파의 무능이 여실히 드러난다. 꼭 독립지향은 아니지만 궁극적으로 보편주의적 프레임에서 보면 같은 결론을 얻게 되기 때문이다.
미국의 대만 유학생들이 백악관 청원을 시도하고 있다는 소식도 들린다. 미국이 대만을 포기하고 중국과 수교한 30년이 훌쩍 지났음에도 미국이 보호자가 되어줄 것이라고 착각한다. 아마 미국으로부터 매해 사들이는 천문학적인 무기구입과 관련해서도 무기를 공급해주는 미국에게 감사한 마음일지 모르겠다.
2.
대북台北시의 왕씨가족王家의 집이 재개발로 철거되면서 시작된 반철거투쟁이 2년만에 끝났다. 왕씨가 소송에서 연달아 십여 차례 패소하고 공사지연으로 인한 피소 및 가족 내부의 갈등, 운동단체와의 갈등 등으로 지난 주에 가족 중 일부가 직접 가건물을 철거했다.
왕씨 가족은 재개발 지역의 토지와 건물의 소유주로 한화로 30억이상에 달하는 재산을 가진 상류층이었고, 재개발로 제시된 보상 금액도 상당액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그러나 이 가족은 보상을 얼마를 해주든지필요없고, 살던 곳에 계속 살 권리를 보장해달라고 주장했다. 본인의 건물을 포함해 지역 일대의 건물이 모두 철거된 뒤에도 가건물을 짓고 재개발 지역에서 제외하여 건물을 복원해줄 것을 요구했다. 이러한 특이한 지향은 대만의 '도시개발피해자연맹'이라는 학생중심의 단체와 결합되어 2년간 여론의 주목을 받으며 투쟁을 계속하는 주된 동력이 되었다. 투쟁이 길어지고 사회적으로 일정한 동정여론(거품이 많지만)이 조성되면서, 개발자본은 공사지연으로 일정한 손실을 입었을 뿐만 아니라, 이미 철거된 다른 소유주들에게 주거 비용 들을 추가로 지불하게 되어, 이와 관련한 소송을 왕씨 집안에 제기하게 되었다.
나는 이 사건 발생한 시점에서 바로 이 운동의 문제점들을 조심스럽게 제시한 적이 있는데, 일종의 '문명/문화적 주거권'과 추상적인 반자본/반국가 담론이 결합되어 구체적인 모순을 왜곡하는 효과를 갖게 된다는 점이 핵심적 내용이었다. 재개발은 모두 토목건설 회사의 이윤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무조건 반대해야 한다는 허황된 전제가 있었고, 그것은 왕씨 가족과 같은 문명/문화적 주거권과 결합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를 지지하거나 동정했던 '다음 번엔 내 차례'라고 생각했던 이들은 아마도 왕씨와 유사한 계급적 기반을 가진 토지/주택 소유주들이었을 것이고, 그들은 겉으로는 '대의'에 동의하는 것 같지만 사실 소유권의 보존을 더욱 확실히 보장받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그들의 걱정이 기우였음이 판명나자 별 관심이 없어졌던 것이다.
아마 가장 큰 문제는 이 운동에 '철없이' 결합한 수많은 대학생들과 운동단체들에게 있을 것이다. 물론 이에 대해 어떤 '지도력'도 발휘하지 못했던 사회운동 전반의 무능도 지적될 수 밖에 없다.
3.
두 가지 사건에서 보면 대만이 처한 곤경이 상당히 심각함이 감지된다. 특히 젊은이들의 사상적 공백은 상당히 심각한 상황에 처해 있다. 자신과 사회의 역사성을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있고, 그로 인해 현실의 모순에 대해서도 피상적인 접근 방식을 보이고, 엘리트주의-포퓰리즘의 핵심적 동원대상이 되고 있다. 이러한 난맥상은 어떤 측면에서 역설적으로 지적 사유의 심화를 추동하는 것 같기도 하다. 대만의 '주변성'이 갖는 패러독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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關於兩種「不敢」關於「王家」事件,對兩種「不敢」的批判似乎同時存在。第一是針對不敢參與現實運動的怯弱的知識分子的比較攻擊性的批判。另一個批判是在那種批判在批判知識分子圈成為主流的狀況下,針對不敢提出此批判本身的局限之狀況的。我的好朋友在臉書上把前者的知識分子形容為「明哲保身」的知識分子。不過我不認為問題那麼簡單。雖然如此,我覺得,前者的「不敢」之原因相對來說比較明確,後者的問題比想像還非常複雜。所以,我試圖透過思考後者的問題,重新考察前者問題而提出不同解釋。換句話說,我一方面考慮在台灣知識分子批判上的歷史的制約,另一方面表達這個事件有關的本質性差異不在於道德上,而在於認識上。這篇文章有可能是對「保留」立場的辯護。
首先表示一下我個人的尷尬。作為局外者,我參與這個討論有點困難。我希望這個小意見被看作為台灣社會運動發展的我個人的建議。而且,我個人過去五年不少時間思考了台灣社會運動的歷史性制約因素。不過這個問題還是很不明確。我認為從中有一個關係到「知識分子文化」或「知識位階」問題的層次。面對這次王家事件,我的討論也自然從這個脈絡出發。
我認為前者的「明確」是因為它是來自「認識論的確信」的道德批判。雖然我無法批評有「確信」參與運動,但至少在「對話」或「說服」的過程中,如此的道德批判無助於討論的發展。我個人懷疑王家事件是很清楚,以致可以批評不參與這個運動的知識分子。如果真的只是「保身」問題,問題是很簡單的。批判那些沒有實踐意識和能力的知識分子就夠了。不過,真的只是「保身」的問題嗎?
雖然我認為不少台灣批判知識分子針對這個議題目前還沒有「明確的分析和對策」,但我不認為它是因為「保身」。我也認為,知識分子應該扮演知識分子該擔任的實踐的角色,不過知識分子的良心根據於他們的知識上的確信。這也是在知識份子參與現實運動中,確保最大責任的前提。例如台灣都市更新或再開發的歷史特殊性有多麼充分被分析,而且它到底怎麼反映在現在的都市更新?教科書上的都更和台灣狀況有什麼樣的不同,其背景和原因是如何?怎麼反映在這次王家事件上?等等。因此我認為,如此的「道德批判」是,像把這個運動批判為「改良主義」的規範性批判一樣,不利於透過說服和同意擴張台灣進步社會運動。
我認為關於王家事件需要重新確認的一點是,在於這是否無產者和有產者的階級對立問題,還是現代化和反現代化的文明對立問題。我認為,前者可以成為反思後者問題的契機,但不認為從後者出發形成出克服前者的動力。因為我認為,歷史進步的動力只能透過社會底層的結構矛盾的深化,由群眾運動形成起來,而我認為在資本主義社會,結構矛盾終究是階級矛盾。假如運動透過文明對立形成起來,我認為那個運動很可能是以脫離階級政治的知識分子為中心的運動,因而很難走向真正的群眾運動(包含社區運動)。在此存在著民粹主義和包辦代理主義的危險。自認為「人民」的代表之知識分子為主的運動不可能改變階級結構,反而服務於它的再生產。魯迅曾經批判過這些知識分子是大眾的「幫忙」或「幫閒」
我認為從這次事件來看,「王家」在台灣社會成為了雙重象徵。也就是擁有不少資產的「有產者/資產階級」和「國家暴力」的受害者。雖然在具體的現實裡,有產/無產的區分是不簡單的,但如果不否認在台灣社會政策上施行著「親有產者」的不動產政策,而這個政策服務於階級結構的再生產,以致在現實生活中不難發現一定的不動產所有與,否決定階級/階層屬性,那麼把王家分類為「有產者」是能夠批判性地顯示這次事件的重要一個面向,就是階級現實。一般來講,後者(國家暴力的受害者)是人權議題,而容易得到社會運動的廣泛連帶和支持。不過從社會運動的歷史來看,人權不具有那麼自律的性質。人權常常是維持資產階級社會的去階級的政治之手段,也成為帝國主義侵略的藉口。換句話說,人權議題只能透過對它所在的脈絡的分析才能夠清楚的被分析好。
因此從王家事件看到的,對「國家暴力」有關的普遍人權的維護和連帶,這個批判性的見解也需要重新被分析。其出發點應該是對其對立的基本架構之分析。「居住權」議題在王家事件初期(衝突前後)比較突出。不過王家的居住權不像一般的居住權,而偏向於對文明/文化性個人資產的所有權。在這個意義上,對立的基本內容是反現代文明/文化所有權和現代資本主義再開發邏輯之衝突。而在過程中出現了國家的「暴力」。這到底是什麼樣的暴力?這的確是由國家來行使的暴力。不過這個暴力反映的脈絡是什麼?從這個暴力出發,大眾的某些人認同「王家就是我家」的口號。他們的認同來自對任意侵犯個人私有財產的國家之恐懼。不過我認為,這只不過是「杞憂」。即便都更在程序上有些問題,但他們還是支撐資本主義社會的基本階級,同時也是支持自由主義議會權力的主要選民。而且假設相對接近社會主義的制度被引進來,帶者恐懼而抗拒這個制度轉型的主要力量也是他們,雖然他們當中不少人是擁有沒有很多私有財產的,自認為「中產」的人。
運動或抗爭的效果雖然不能事前判斷,但如此考察其出發點有助於展望未來。我認為在此需要指出階級對立被文明對立所置換 (displacement)或不足決定(under-determination)的局面。理所當然的,這樣被置換的局面服務於階級對立結構的再生產。因此我不認為從「國家暴力」或「人權」直接得到無條件的維護和連帶。那個「暴力」只不過是「例外」或「失誤」。也就是說,國家行使「階級性暴力」的過程中發生的對自己人的「失誤」。雖然把這個失誤牽引到階級政治的空間不是不可能的,但我認為在台灣首先需要搭好階級政治的起碼的基礎。否則,那些努力無法突破自由主義的政治框架。
馬克思所說的「批判的武器不能替代武器的批判」也是強調知識分子的批判無法取代群眾的主體實踐。知識分子的批判只能透過群眾的實踐能夠得到物質性力量。這次王家事件上的反「暴力」或維護「人權」論述還偏向於「批判的武器」,雖然它模糊地包含著對「親資本」的國家之批判。這可能有理由。因為知識分子的脫離階級政治的現代性批判很容易以自由主義的方式規定「暴力」的性質。但,問題不只是知識分子內部的問題,因為這種置換可能產生扭曲群眾運動的條件之效果。2012년 4월 16일 월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