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설적으로 말해서, 일본은 서구와 아시아의 사이에서 식민화의 과정을 겪지 않았고, 따라서 민족적 인식의 계기도 주어지지 않았으며, 민족적 인식이 바탕이자 전제가 되는 민중적 민주주의 역시 전개되지 않았다. 생산양식의 국민경제적 자본주의화와 대조적으로 민중적 주체성은 형성되지 못했다. 그러나 패전은 추상적 일본을 극복하고 민족적 인식을 획득하는 하나의 계기였다. 올초 발생한 일본의 지진 참사 역시 일정한 민족적 인식의 계기를 제공해 주는 것 같다. 그렇다면 이는 내재적/민중적 주체성의 형성과 전개를 가능하게 해 줄 것이다. 민족적 인식은 개별적 특수성을 밝혀주는 것인데, 이는 어떤 내부의 본질적 요소를 발견하고 발굴하는 것이 아니라, 내부와 외부의 특수한 관련을 밝힘으로써 내재적 정치성의 전개를 근거짓는 것이다.
근대로의 전환과정 속에서 민족적 인식을 통해 전근대성을 근대적 형식 안에 일정하게 주체적으로 보존하였지만, 근대적 평등/자유를 내부화하는데 실패하면서, 민족적 인식은 국가주의로 외부화되고 정치성 자체의 전개에 실패하는 중국.
근대로의 전환과정 속에서 민족적 인식을 통해 평등/자유라는 주어진 수동적 민주 체제와 이념을 일정하게 내부화하였지만, 주체적 근대로의 전환 없이 전근대성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면서 민족적 인식이 정치성의 전개에 내부화되지 못하는 조선/한국. 분단이라는 복잡성.
근대로의 전환과정 속에서 민족적 인식의 계기가 지연되고, 평등/자유라는 주어진 수동적 민주 체제와 이념 역시 내부화가 지연되다가, 패전이 일정하게 민족적 인식의 계기를 제공하였지만, 체제의 근대로의 전환은 거의 완성된 상태에서 전환과정 속에서 분출될 정치성의 전개를 기대할 수 없게 됨. 패전 이전의 일본 좌익의 민족 없는 계급성의 한계. 전후 계급 없는 민족성의 한계. 물론 세계 자본주의의 위기의 일부로서의 일본의 위기는 계급성과 민족성의 변증법적 결합의 계기가 될 수 있음.
일정정도 상대적이지만 민중 없는 민족(보편성의 부재)은 모순을 외부적 관련으로 환원하는 ‘외적 민족’일 뿐이며, 민족 없는 민중(특수성의 부재)은 역사적 운동의 집단적 주체가 위치하는 구체성을 갖는 장소적 기초와 정치체 변혁의 구체적 전략을 갖지 못하는 ‘추상적 민중’일 뿐이다.
중국, 한국, 일본을 중심으로 하는 동아시아에 대한 담론의 의미를 전통/구제국 중국과 현대/신제국 일본의 대비 속에서 긴장과 모순으로서의 한반도를 의미화하는데서 찾는다면 이 역시 무리한 것일까. 현대성의 문제와 국민국가의 문제를 극복하는데 있어서 동아시아 3국을 다루는 것은 보편적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것 같다. 한편, 홍콩은 전통/구제국과 현대/구제국 사이에 놓여진 특수성이 있다고 할 수 있다. 한반도와 다르지만 또한 나름의 복잡성을 갖는 지역으로서 일정한 비교가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