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중간물을 대상과 주체로 구분하여 왕휘와 전리군의 차이를 설명하는 방식은 류준필 선생과 고점복 선생이 공유하는 지점으로 보인다. 인식론과 존재론을 분리시키는 방식 보다는 그것이 어떻게 다른 방식으로 결합되어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왕휘 선생과 전리군 선생을 온전하게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전리군 선생의 작업을 비판적 지식인에 대한 옹호, 나아가 지식인 중심주의로 보는 비판적 견해가 중국 내부에도 있고(예를 들어 姚丹, 程凱 등), 성근제 선생이나 이현정 선생의 논의에도 보이는데, 대중의 목소리는 늘 지식의 매개를 통해 담론으로 조직되어 현실적인 정치적 힘을 가질 수 밖에 없다는 점에서 볼 때, 중요한 것은 비판적 지식인에 대한 논의가 아니라 그 내용이다. 지식인중심주의로 몰아가는 논의에 유독 '우파'의 복잡성을 단순화하는 시도들이 보이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나는 전리군 선생의 '정치경제학 비판'을 매우 강조하고 싶은데, 이른바 '신좌파'가 '인민'을 대변하는 '당'의 정당성 확보를 위한 이론적 노력에 치중하는데 비해, 전리군 선생은 노동자와 농민의 조건과 상황에 대한 사회적 분석을 비판의 바탕으로 깔고 있다. 상층과 하층 사이의 중간층으로서의 '지식(인)'은 주체적 공간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상층과 하층 사이의 모순을 담론적으로 표현해주는 비판적이고 지식적인 공간이다. 지식인은 그 담지자일 뿐이지, 그 자체로서 어떤 주체는 아니다. 따라서 비판적 지식인에 대한 옹호는 사실 그들이 대변하고자 했던 하층의 노동자 및 농민, 즉 직접생산자에 대한 옹호이다. 여기에서 바로 지식을 둘러싼 '자유'의 문제와 사회적 모순을 둘러싼 '평등'의 문제가 결합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반면, 전리군 선생은 '인민'이 갖는 추상성을 여러번 비판하면서, 그 추상성이 '대리주의', '포퓰리즘', '엘리트주의', '관료주의' 등을 배태하고 있음을 지적한 바 있다."
사회관계를 봐야합니다. 과거 농촌공동체에서는 생산자들이 부양하는 계층이 있었습니다. 이를테면 의사나 서당선생같은. 생산자들이 이들을 부양하는 이유는 이들이 자신들에게 봉사하기 때문이었습니다. 부양자와 피부양자 사이의 위계는 어떠했는지 모르겠습니다. 다만 이들은 국가에서 보낸 관리들과는 다른 존재들이었고 중국의 경우 관리들도 공동체의 자율성을 일정하게 인정해주었다고 합니다. 자신들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고 관공서에 가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고 합니다. 지금은 공동체가 해체되었기 때문에 개인은 자본, 혹은 국가와 직접적으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주제넘지만 제가 좀더 부언을 하자면 인민이 갖는 추상성은 분업의 발전의 결과이고 (따라서 추상적 인간으로 나타납니다) 당, 노조, 지식인 등에서 보이는 대리주의, 포퓰리즘, 엘리트주의는 그 부산물입니다. 지식인은 생산자를 대변하는 자가 아니라 봉사하는 자입니다. 지식인에 대한 옹호는 피부양자에 대한 옹호입니다. 이러한 분업, 위계가 해체될 때까지.
그런데 님은 대체 헤겔은 읽은겁니까. 전리군 선생이 아무리 대단해도 우리 H선생보다 더 대단할 수는 없습니다. <정신현상학>의 정신 장을 보면 이른바 이론과 실천의 관계가 잘 정리되어 있습니다.
"결국 판단하는 의식이 순수한 선을 유지할 수 있다면 이는 오직 행동을 하지 않기 때문인데.."
지식인의 위선을 폭로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악의 의식이 "나는 악하다"고 토로하더라도 이에 대한 응답으로 동일한 고백이 되돌아오지는 않는다. 판단하는 의식에게는 그럴 용의가 전혀 없다. 그의 본심은 오히려 상대방과 함께 어울리기를 거부하고 그와의 연결고리를 끊어버림으로써 자기만의 독자성을 지켜나가려는데 있다."
지식인의 오만과 구체적 현실에 대한 무관심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행동하는 의식 역시 위선적이긴 매한가지인데 판단하는 의식은 외화된 자기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상황이 바뀌면 자신도 똑같이 그렇게 된다는거죠.
"하지만 이러한 자기의 외화를 통하여 두 개의 존재로 분열된 지는 마침내 자아`자기로서의 통일성을 되찾아온다."
"두 개의 자아가 대립적인 상태를 벗어나 화해하는 태도를 말로 나타날 때 둘로 나뉘었던 자아의 모습은 서로가 그 속에서 자기동일성을 보존하고 또는 완전한 자기외화의 대립 속에서 자기확신을 누리게 된다. 두 개의 자아가 이러한 순수지의 경지에 이르게 될 때, 그 한가운데에 신이 나타난다."
여기서 신이란 인간들 사이의 적나라한 동일성을 체험하게 되는 진리의 시간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