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baltern은 하위주체로 옮기다가 요즘은 그냥 서발턴으로 번역하는 경우가 많더군요. '서민'도 좋아 보이는데, 그냥 '민중'의 의미를 확장해서 사용하는 것도 나쁘지 않아 보이는데, '피플'아니 '파퓰러'가 있으니...좀 애매하긴 하네요. 어쨌든, 전체적으로 매우 공감하는 내용입니다. 평소에 제 생각과 유사해서 놀랐습니다. ㅋㅋ.
"최근 서발턴 연구와 서발턴 개념을 소개하고 있는 국내 문헌이나 번역서에서 서발턴은 '하층민', '하위 주체', '하위 집단' 등으로 번역되어 있다. 그러나 그저 사전적인 뜻대로 '하층민'이나 '하위 집단'으로 번역하는 것은 서발턴 연구의 이론적 문제의식을 어느 정도라도 담아 내지 못한다.
'하위 주체'라는 번역어도 서발턴 연구가 서발턴의 '주체성' 자체를 문제화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 문제의식의 연장선상에서 서발턴의 속성인 '서발터니티(subalternity)'를 번역하기가 더욱 곤란하다는 점에서 난점이 있다.
물론 서발턴의 번역어를 놓고 벌어진 논의를 저도 모르진 않습니다. 서발턴 논자들의 취지에도 어느 정도 공감합니다. 그런데, 그네들의 주장을 그대로 따를 필요도 없겠고, 또한 저는 뭔가 적확한 한국어를 찾아내고 만들어 내는 것 자체가 그네들의 취지에 더 부합한다고 봅니다. 그렇다면, 굳이 개념어가 아니라도 '번역 자체'가 필요 없는 것이니까요
그리고, 번역은 단순히 외국어 간에 일어나는 것은 아니잖아요? 번역은 문화와 문화 간, 지식인(?)과 대표되지 않는 자들(비주체) 간 등등 사이에서 끊임없이 이루어는 것인데, 개념 자체가 그 과정에서 마구 꼬이고 그 의미나 용법이 변화하기도 하잖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이해하는 서벌턴 집단의 논의는 번역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서발턴'이란 역어 자체가 어찌되었던 현재 한국사회에서는 매우 '엘리트'적 용법이라고 봅니다. '서발턴'은 그냥 매우 추상적인 용어일 뿐이지 않나요? 마치, 이데올로기처럼...그나마 이데올로기는 통상적인 관념이라도 있지만, 서발턴은 공중에 떠 있습니다. 이걸 한국사회에 재맥락화 해야 하지 않을까요?
'번역불가능' 요소가 있고, 특히 '서발턴' 집단은 자신들의 논의를 다른 주장들과 세밀히 구분짓고 있지만, 굳이 이들의 주장에만 따라서 '서발턴'을 '서발턴'이라고 옮겨야 하는 건 아니겠지요. 예를 들어, 주디스 버틀러가 즐겨 사용하는 '퍼포머티'를 국내에서는 '수행성'이라고 옮기는데, '수행성'만 듣고 원래 버틀러의 원래 용법이 뭔지 딱 머리에 떠오르나요? 영어 단어 자체는 '수행평가'할 때와 같은 건데요...말씀하신대로, 반대의 경우도 많죠. 프로이트의 '에로스'를 뭘로 옮겨야 할까요? 아무튼, 번역이란 번역할 수 있을 만큼 최대한 해내려고 하는거죠.
게다가...제가 불편한 것은 '서발턴'이란 '번역불가능한' 용어로 그냥 옮기는 요즘 추세는, 왜 그렇게 하는지 이해는 되지만, 오히려 한국사회에서 지식을 일부 유식자 집단이 독점하려는 경향을 반영하지 않나...혹은 정말 '서발턴'과 '지식인'들(그런 게 있다면) 사이에 상호작용이 점점 더 사라지는 상황을 반영하지 않나...그런 생각입니다. 말하자면, '이런 논의는 우리끼리만 알면 되지 않나?' 이런 식이라는 거죠. 제가 좀 낡은 관념을 지녔는지 몰라도, 이런 상황을 극복하는 게 요즘 우리에게 던져진 과제가 아닐까합니다.
덧붙이면, '하위주체'의 '주체'라는 용어(즉, subject)도, 아시겠지만, 오늘날에 와서야 독립된 자유로운 개인이란 '긍정적' 뜻이 있지만, 원래 '종놈', '노예', '신민' 등등의 뜻도 있습니다. 그냥 '아랫 것들'인 겁니다. 우리로 치면 '백성'이겠지요. '주체'라는 용어에서 '종놈'이라는 의미가 사라져서 그렇긴하지만, '하위주체'가 최악의 선택은 아니라는 거죠.
저는 'the subaltern'이란 표현 자체를 비판하고 싶네요. 이런 ‘학문적인 표현’의 ‘정치경제학’이 필요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고요.
유럽의 주류언어들은 관사를 사용해서 형용사를 쉽게 명사화하는데, 여기에 이미 문제가 있지 않나 합니다. 특히, [고대]희랍어와 유사한 독어에서 이런 경향이 심합니다. 심지어는 전치사까지 명사화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를 읽을 때 사람 환장하게 하죠.
최근 재밌는 현상을 발견했는데, 독어를 비교적 못하는/배울 필요가 없는 한국음대생들이 지네들끼리 이야기하면서 “네가 ‘gegen’하니까”라고 말하는 것이었어요. 이 표현은 그저 ‘네가 반대하니까’보다 의미의 폭이 좀 넓은데, 재밌는 건 제가 보기에 독어를 몰라도 한참 모르는 사람들인데, 그네들 의사소통에 독어의 ‘정신’이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있었다는 점입니다. ‘gegen하니까’는 전치사를 명사해서 사용한 거죠.
“the subaltern”이란 표현이 영어의 ‘정신’이 스며있는 표현일까? 영어 잘 못하지만 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영어의 정신은 동사화/분석화에 있지 독어처럼 명사화/합성화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유럽 리스본 조약의 영문과 독문을 비교하고 읽어 내려가면서 얻은 느낌입니다.
그리고 “those who are subaltern”의 명사화는, 이 말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스스로 해서는 안 될 일 또는 할 수 없는 일(‘those ... subaltern’의 기체화에 따르는 주체화)을 주저하지 않고 하는 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일정의 수행모순입니다.
동네형님이 공감해주시니 반갑네요. 저도 동네형님의 글에서 공감하는 부분이 적지 않습니다. 전부터 그랬습니다. 정확한 기억인지 모르지만, 얼핏 "수유너머..."가 기억나네요.
ㅇ님의 댓글은 기본적으로 제가 비판하고자 하는 대상을 반복하고 있는 것으로 읽힙니다. 이런 경우 제가 좀 더 친절해져야 하는데, 제 블로그는 그런 용도는 아닌지라... 그래도 제 글은 몇 가지 주제를 둘러싸고 반복되니 언젠가 접점이 있겠지요.
ou topia님의 독일어와 영어의 대별은 매우 흥미롭네요. 제가 거의 모르는 분야라 잘 이해는 되지 않습니다만... 저는 독일어와 영어가 같은 계통으로 알고 있는데, 그 분화의 과정이 '현대성'과 어떤 관계인지도 궁금해지구요. 독일어의 '명사화/합성화'와 지적 위계와의 관련성은 그것이 희랍어까지 소급된다면, 그건 또 어떤 함의일까 궁금하구요.
현대화와 관련이 있을 것 같습니다. 독일 현대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건 1648년에 종결된 30년 전쟁인데, 사실 '외세'가 독일에서 지랄했던 전쟁이죠. (독일이 주권을 완전히 회복한 건 어쩜 근 500년이 지난 1990년 이 아닐까 하고요.) 암튼, 30년 전쟁은 독일로 하여금 '말'을 상실하게 했구요 (독일 영문학자 Dietrich Schwanitz의 견해, 그래서 '말' 대신에 음악이 발달). 독일이 '말'을 다시 찿게 되는 과정을 Peter Szondi가 재구성했다고 생각하는데, 그는 그리스를 '찾아간' Johann Joachim Winkelmann(1717-1768)을 시조로 해서 그 과정을 설명하죠. 독일 특유의 '현대화 아닌 현대화'(당시의 선진국을 참조하지 않은 현대화)라 할까. 더 공부해야 할 부분이고요.
“alter”하면 둘 중에 한 사람이란 뜻이고 “alternus”하면 ‘번갈아서’에서 ‘갈아치우다’란 의미까지 있는 것 같은데, 'subaltern'하면 ‘아랫것’보다 ‘[누가 들어와도 아무런 변화가 없는] 아래[자리에] 번갈아 가면서 들어오는 것’이란 의미가 아닌가 합니다. 함수의 변수와 같은 것. 독자/독립성이 전혀 없는 것. 명사화가 불가능한 것.
그리고 독일의 경우 ‘the subaltern’ 이론이 거의 수용되지 않는 것 같은데, 독어에서 ‘subaltern’이 갖는 이미지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예컨대 이런 것이죠. 나치체제에서 작동했던 [바꿔치기] 기능인들이 ‘subaltern'했다는 완전 부정적인 이미지.
“Subaltern”은 아도르노의 “das Nicht-Identische”와 비교해서 접근할 수 있는 ‘개념 아닌 개념’일 수 있지 않을까합니다. 이런 개념의 서술과 관련해서 ‘대상’을 명사화하여 찍어 올리거나 또는 역으로 ‘그’의 구심력에 의해서 ‘대상’에 빠져 들어가지도 않고 ‘그’를 돌고 또 도는 그런 서술을 아도르노는 이야기했는데 철학/과학보다는 예술/문학에 더 가까운 일이 아닌가 합니다.
앞에서 이야기한 자가당착적인 수행모순을 보지 못하는 게 어떻게 보면 다 헤겔을 뛰어넘으려고 하는 시도들이 헤겔 밑으로 떨어지게 하는 이유인 것 같고요. 감각적 확신의 변증법에 걸려요. 지식이 자기모순을 인식하고 자기투명성을 확보해야 비로소 완성되고 비판이 스스로 움직이는 능력이 된다는 게 정신현상학의 요점 하난데, 모순이 은폐되면 비판이 그저 잠재력으로 배어있는 것밖에 되지 않는 것 같고요.
한글의 정신은 아도르노가 요구한 걸 잘 하는데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외래어(한문?, 영어 등등)를 쓰지 않으면 명사화가 정말 어려워요. 이걸 전 꼭 단점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태를 돌고 돌게 만드는 말이라고 생각하고 그런 결과의 표현들이 풍부한 말이고요.
다른 건 그렇다치고, 영어(독일어)가 명사를 중심으로 하는 건 일정부문 맞는 것 같습니다. 전치사와 관계사를 엄청 즐겨쓰는 이유겠지요. 사실 이것도 현대 영어에서 더 강화되었다고 하더군요. 대신에 한국어는 확실히 동사 중심성이 강하고요. 제가 번역을 많이 하는 건 아니지만, 경험상 명사를 동사로 풀면 확실히 자연스럽더군요. 혹자는 '구술' 문화가 강해서 그렇다고 그러더군요. 갑자기 잡생각이 나서 한자 더 보태어 둡니다.
저는 우선 한자는 '외래어'라 할 수 없는 내재화된 언어자원이라고 보구요. 그런 의미에서 우리말의 개념어가 한자의 사용 없이는 조어가 거의 불가능하다는 문제상황은 '한글'이 갖는 근원적인 한계를 반영한다고 봅니다. 한글은 그 태생부터 보조적인 수단이었다는 게 제 생각인데요. 그래서 백기완 선생 등이 하는 작업이 참 부질없는 그런 상황으로 가는 것이구요.
한자가 그렇고, 그 측면은 중국어에서 여전히 남아 있는데, '명사'와 '동사'의 구별 자체가 본래 우리의 언어 안에서는 맥락적이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이런 구별 자체가 일정하게 '영어 중심적 사고'의 영향인 것 같기도 하구요.
제가 궁금한 것은, 현재로서는 매우 미미하게 남아 있지만, 역사적으로 한자와 한글의 결합이 사실은 이중적 차원에서 일상적 번역실천이 아니었나 하는 점인데요. 그것은 민족간의 번역 실천의 측면(주로 '중국'과 '조선' 사이)이 있고, 민족 내부(조선 지식인과 민중 사이)에서 민중적 번역 실천의 측면이 결합되어 있지 않은가 하는 점입니다.
이것이 어쩌면 번역, 지식, 윤리와 관련한 우리 나름의 역사적 개별성의 한 측면을 구성하지 않나 싶기도 하고, 그런 측면에서 '현대성'과 '현대화'의 문제를 제기하고, 대안적 언어/지식/문화의 모델을 만들어가야 하지 않나 하는 가설적 문제제기를 하고 싶습니다. 저는 이게 궁극적으로 변혁적 운동과 주체의 문제와 밀접하다고 보고 있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