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휘 선생의 코멘트]
대만에서 주류적인 아시아 담론에 대한 불만을 솔직히 이야기하였고, 그 가운데 가장 주요원 원인은 아시아 문제를 외부관계로 연결짓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민족주의에 대한 비판이라고 하더라도, 실제로 부득이 하게 민족주의를 방법으로 할 수 밖에 없었다. 일종의 민중의 시각이 없이, 일종의 진정한 국제주의는 전개될 수 없으며, 각 국가 내부의 사회투쟁은 연결점을 찾을 수 없다. 20세기 민족해방운동은 민족해방의 깃발 아래 전개되었는데, 그러나 민중투쟁과 계급투쟁의 각도에서 전개되어, 서로 다른 국가의 사회운동이 오히려 더욱 깊은 연대감을 가질 수 있었다. 이는 정치적인 것의 전개이다. 나는 우리가 이러한 투쟁 모델을 반복하자는 것이 아니고, 이 운동이 포함하는 기타 가치검토의 문제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이 운동의 개방정 잠재성을 발굴하고자 하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이는 자본주의의 필연적 초국적화와 관련된다. 단지 초국적인 의미에서 토론하고, 투쟁 공간으로서의 민족국가와 기타 투쟁 공간 사이의 관련을 토론하지 않으면, 공동투쟁의 맥락 속에서 전개되는 역사적 연대를 만들어낼 수 없다. 서방에의 호소, 또는 공통의 전통의 호소 등등이 비판적인 태도이든 보수적인 태도이든 간에, 최종적으로 연대가 구성되기 어렵다. 이러한 내용은 내부적임 잠재력을 발굴한 후에 비로소 실질적 의의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은 일정한 구도와 절차를 갖는 개인적 연구 작업의 출발점의 의미를 갖는다. 나는 국제주의적이며 반국가주의적인 대안적 정치성의 구성이라는 전망을 위해 세계주의적 보편성에 환원되지 않으며, 일국적/특수주의적 틀에 갇히지 않는 지역적 또는 인터아시아적 방법을 통한 사상적 자원의 발굴과 교류 및 공유의 작업이 필요함을 긍정하면서, 한국적 시좌의 재구축을 위해 박현채 선생의 사상에 주목하게 되었고, 이는 다시 나의 중국 당대 사상 및 문화의 연구에 있어서 참조점이 되어, 중국 내부의 시좌에 갇히지 않으면서, 동시에 보편주의적 타자의 시좌에도 갇히지 않는 중국 당대 사상에 대한 구역적이고 인터아시아적 독해를 시도하고자 한다. 이러한 작업은 일정하게 ‘역사적인 것’으로의 우회가 불가피하지만, 궁극적으로 ‘정치적인 것’에 그 성과가 누적된다.
복기를 해보면, 최근 정치와 역사라는 두 범주를 중심으로 사상형성을 사고한 것은 왕휘 선생과의 대화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는 언젠가 '역사가 멈추는 곳에서 정치가 시작된다'고 했던 것 같다. 나는 이 범주를 형식적으로 분리하면서도 일종의 '부재하는 원인'으로서의 상호 타자성을 전제하면서, 상호 관련성과 결정성을 고민해보았다. 물론 최종적으로 정치성의 우위라는 테제를 제기하기도 했다. 이는 일종의 존재론적 사유에 의한 뒷받침을 요하는 것 같다. '정치적 인간'이라 할 수도 있고, 또는 '사회적 인간' 속의 정치의 본질적 의미 같은 것 말이다. 다른 한편 정치와 역사라는 두 범주를 포괄하면서 그 긴장과 상호결정성을 작동시키는 행위, 일종의 지적 실천의 행위는 무엇인가? 기존의 언어로는 '학제간 연구'라는 말이 있지만, 이는 내용이 없는 구호에 불과하다. '문화연구'는 어떤가? '문화'라는 개념은 일정하게 이러한 지적실천을 담아낼 수 있는 것 같다. '문화연구'를 새롭게 규정할 필요가 있을 듯 하다.
전리군 선생의 '57년체제'를 음미하면서, 이른바 '87년체제'와 '97년체제' 등 근래 한국에서 논쟁의 중심이 되었던 역사적 개념들이 공통적으로 갖는 한계가 있지 않은가, 또는 역사적으로 87년에 대한 '과도한' 강조가 우리의 역사적 시좌를 제한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본다. 87년 체제와 97년 체제는 공히 '민중'을 중심으로 한 '정치성'의 담론에 갇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서는 '좌'와 '우'의 정치적 경향의 대립이 중심이 된다. '좌'와 '우'를 결정짓는 역사적 조건과 그 외연의 구체적 역사적 형성의 문제가 사라진다. 그래서 박현채 선생의 논의를 복원할 필요가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비록 장기적 작업이지만, 여기에 왜 이러한 우회를 통해 전리군 선생의 작업을 조명하면서 동시에 다시 한국사회를 비추는 참조점으로 전리군 선생의 작업을 가져오려는지의 이유가 있다. 97년체제나 87년체제도 중요하지만, 어쩌면 48년체제 및 해방공간을 역사적으로 재해석하고 이 역사성을 재전유하는 작업이 결여되어서는 87년체제와 97년체제 등의 정치성의 논의는 궁극적으로 일정하게 한계적 또는 과소결정될 것 같다.